최연준이 그를 힐끗 보았다. 사실 그도 그 의문이 든 지 오래였다.하지만 더욱 이상한 건 남자 중에서도 체력이 좋은 편인 두 사람이 두 여인을 따라가지 못하고 거의 녹초가 되었다는 것이다.오늘 밤 아무래도 제대로 ‘벌’을 줘야겠다고 생각했다...“저기요, 뭘 그렇게 웃어요?”육경섭이 그의 눈앞에서 손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제야 생각에서 빠져나온 최연준은 미소를 거두어들이고 다시 차가운 모습으로 돌아왔다.“경섭 씨.”그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다시 바른길로 돌아갈 생각은 안 해봤어요?”육경섭이 멈칫하는가 싶더니 이내 표정이 복잡해졌다.“비록 우정 씨랑 다시 잘됐고 우정 씨도 경섭 씨를 받아들였지만 지금 삶이 살얼음판인 건 사실이잖아요. 어느 정도 권력을 얻긴 했지만 그만큼 원수도 많아졌죠. 지난번에는 제가 마침 그 호텔에 있었기에 망정이지...”최연준이 의미심장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만약 그런 일이 또 일어난다면 지난번 같은 우연이 다시 있을까요? 혹시라도 당신한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우정 씨의 행복은 어떡해요?”육경섭이 어두워진 얼굴로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사실 그도 진작 생각은 했었다. 그때 최지한이 그에게 일을 시킬 때도 신분 세탁을 해주겠다고 했었다. 하지만 최지한은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서 함부로 믿어선 안 되었다.육경섭은 최연준을 빤히 쳐다보며 뭔가 얘기하려다가 결국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제가 도와줄게요.”최연준이 나지막이 말했다.“하지만 그 과정이 쉽진 않을 거고 생각했던 것보다 시간이 훨씬 더 오래 걸릴 수도 있어요. 그리고 포기해야 하는 것도 있어요.”“괜찮아요.”육경섭은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즉각 답했다.“우정이랑 함께할 수만 있다면 모든 걸 다 포기해도 좋아요.”최연준은 그를 한참 동안 빤히 쳐다보다가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웃었다.그때 강서연과 임우정이 마침 그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이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는 알 수 없으나 꽤 잘 지내는 것 같았다.임우정이 손을 흔들
“그렇게 얘기하면 어떡해.”육경섭이 맞장구를 쳤다.“겨우 장가갔는데 와이프를 잘 지켜야지...”“긁혀서 상처가 나도 괜찮아요.”그때 옆에서 갑자기 장사꾼의 소리가 들려왔다.“저한테 특효약이 있는데 절대 흉터 안 져요!”장사꾼의 말에 육경섭과 임우정이 배꼽 빠져라 웃어댔다.강서연은 정교한 약병에 끌렸는지 약병을 들고 살폈다. 옛날 느낌이 물씬 나는 포장에 가볍고 작아서 한 손에 잡기에도 딱이었다. 약을 공예품처럼 만드는 건 또 처음 봤다.장사꾼이 그녀에게 활짝 웃으며 말했다.“아가씨, 한 병 살래요? 이건 재희 제약에서 만든 건데 제가 십 년 넘게 팔았어요. 상도의를 지키면서 장사하는 사람입니다, 저!”“재희 제약?”“네! 윤제 그룹의 제약 공장 말이에요.”최연준이 살짝 멈칫하더니 눈살을 찌푸렸다.‘성남과 남양이 가깝긴 하다만... 설마 저 사람이 말한 윤제 그룹이 바로 남양의 윤씨 가문인가?’그들은 한참 동안 걷다가 사람이 비교적 드문 곳에 왔다. 임우정은 강서연과 함께 길거리 음식을 먹으러 갔고 두 남자는 여전히 그녀들 뒤를 따랐다.최연준의 안색이 이상함을 눈치챈 육경섭이 물었다.“무슨 일 있어요?”“아니에요.”덤덤하게 대답하던 최연준이 잠깐 생각하다가 물었다.“아까 약 장사꾼이 윤제 그룹이고 뭐고 하던데, 들어본 적이 있어요?”“당연하죠. 남양에서 아주 유명해요.”육경섭이 조직 보스와 여러 지역을 돌아다녀 이런 일에 대해 들은 바가 많았다.“윤제 그룹은 남양 일대에서 그래도 꽤 세력이 있어요. 예전에 의사 집안이어서 지금까지 제약 공장을 남겨두고 있대요.”“그런데 그 약들이 왜 야시장에서 팔리고 있죠?”“재희 제약의 약값이 저렴한 데다가 약효까지 좋아서 인기가 아주 좋아요. 그리고 다른 큰 제약 공장처럼 거드름 부리지 않아서 곳곳에서 재희 제약의 약을 볼 수 있거든요. 게다가 가격이 너무 저렴해서 일반인들도 다 구매할 수 있으니까 모조품을 만드는 사람도 없어요.”최연준이 실눈을 떴다.“그럼 아주 양심적인 기업이
두 남자가 이구동성으로 소리를 질렀다.“안 돼!”“안 돼요!”물론 그들의 반대는 당연히 무효였다. 어쨌거나 남자와 함께 자는 것보다 와이프를 화나게 하는 결과가 더 심각하니 말이다.늦은 시각, 육경섭은 쇼핑백을 바리바리 들고 풀이 죽은 얼굴로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 방 문을 열고 푹신푹신한 큰 침대를 본 순간 그는 울분이 터질 것만 같았다.그에 비해 최연준은 덤덤하기만 했다. 묵묵히 겉옷을 벗고 술 진열장에서 와인 한 병을 꺼내 얼음을 넣고 천천히 흔들어 마셨다.“연준 씨, 당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반드시 한배를 타야 해요!”육경섭이 이를 꽉 깨물었다.“내일부터 자기 여자는 자기가 알아서 책임져요. 절대 저 둘이 붙어있게 해서는 안 돼요. 들었어요?”육경섭이 씩씩거리며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최연준은 그를 보며 덤덤하게 웃어 보이고는 창밖의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잠시 후, 그의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남양, 윤제 그룹, 윤정재, 제약 공장...이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최진혁이 그를 해하려는 원인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윤정재는 왜 그를 도우려 했을까? 그깟 1억 불이 넘는 보험금에 흔들렸단 말인가?윤씨 가문의 세력이 최씨 가문보다는 못해도, 돈을 가장 많이 버는 의약과 정보 과학기술 영역의 사업을 하고 있어 절대 돈이 부족할 리가 없었다. 하여 윤정재가 이렇게까지 하는 건 분명 다른 목적이 있을 것이다!...성남에서 돌아간 후, 강서연은 전보다 눈에 띄게 웃음이 많아졌다. 최연준이 조금 시름을 놓던 그때 유찬혁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연준 형, 형이 나한테 쓰라고 했던 성명서 있잖아요. 영감님께서 막으셨어요. 형 아무래도 오성에 한 번 다녀가야겠어요.”“응, 알았어.”최연준은 진작 예상하였다. 유찬혁에게 성명서를 쓰라고 할 때부터 그는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있었다.전화를 끊은 최연준은 고개를 들어 아직 집 청소를 하는 강서연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강서연은 한시도 가만히 있질 못했다
“서연아.”그가 잠깐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나 내일부터... 합숙 훈련에 들어가.”강서연이 화들짝 놀랐다.“또 경기가 있어요?”“응.”그가 대충 얼버무렸다.“이번에는 합숙 훈련이 꽤 길 것 같아.”강서연의 표정이 우울해졌다. 하지만 최연준이 좋아하는 일이라 그녀는 무조건 응원했다.최연준은 그녀에게 다가가 허리를 감싸 안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향긋한 냄새가 그의 코끝을 스쳤다.“여보, 내가 예전에 가르쳤던 동작 기억나?”강서연이 두 눈을 깜빡이더니 별다른 생각 없이 그의 질문에 답했다.“기억나요.”그러자 최연준이 음흉하게 웃었다.“어느 정도 기억해?”순진한 강서연이 동작을 보여줬다.“만약 누군가 앞에서 날 공격하면 이렇게... 뒤에서 공격하면 이렇게...”그런데 그녀가 그의 손목을 잡았을 때 최연준은 그녀를 더욱더 세게 끌어안았다. 최연준의 힘이 더 세다 보니 그녀가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여보... 으악!”최연준은 그녀를 번쩍 들어 곧장 안방의 큰 침대로 향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강서연은 작은 주먹으로 그의 가슴팍을 두드리며 두 눈을 부릅떴다.“아까 한 동작들은 다 괜찮았어.”최연준이 목소리를 내리깔고 가볍게 웃었다.“그럼 지금...”그는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점점 가까이 다가갔다....“도련님, 도착했어요.”방한서가 차를 최상 빌라 밖에 세웠다.최연준이 유리창 밖을 힐끗 보더니 조금 전 정신을 딴 데 팔아 민망한지 마른기침을 두어 번 했다.방한서는 시선을 내리깔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도련님. 강서연 씨 쪽에 사람을 많이 보냈으니까 절대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그래.”최연준이 덤덤하게 대답했다.비행기에 몸을 실은 내내 그녀의 부드럽고 간질간질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고 보호 본능을 자극하듯 그의 가슴팍에 살포시 기대던 모습이 그리웠다...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강서연밖에 없었다.오성에 도
최연준의 눈빛이 어두워졌고 널찍한 등도 굳어버린 것 같았다. 최재원의 질문에도 그는 입을 꾹 다물었다.분위기가 어찌나 싸늘한지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최재원이 그를 빤히 쳐다보다가 더욱 무거운 말투로 다시 한번 물었다.“강서연이 누구냐고!”“저의 와이프 입니다.”최재원이 손을 들어 상을 탁 내려치자 순식간에 깨져 산산이 조각났다.최연준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손등의 핏줄이 다 터질 것만 같았다. 최재원이 성난 목소리로 물었다.“언제 결혼했어? 이 여자는 또 언제 만났고?”“만약 내가 이 발표를 막지 않았더라면 정말 최씨 가문의 절반을 남한테 줄 생각이었어?”집사와 도우미들이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서재 안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감히 숨소리도 내질 못했고 방한서마저도 여간 놀란 게 아니었다.최재원은 일을 처리하면서 늘 침착함을 유지하던 사람이라 오늘같이 성을 내는 일은 그야말로 드물었다.오늘 할아버지와 손자는 마치 끝장을 볼 기세로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가까이 다가가기는커녕 소리만 들어도 저도 모르게 오금이 저렸다.“네 명의로 된 재산, 주식, 펀드, 그리고 해외 부동산과 현금까지 전부 그 여자한테 절반 나눠주려고?”최재원이 싸늘하게 말을 이었다.“연준아, 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니!”최연준이 입술을 적시고는 단호하게 말했다.“절반이 아니라... 전부 다 줄 거예요.”“뭐라고?”“성명서에 절반이라고 쓴 건 아직 완전히 제 와이프가 아니기 때문이에요. 나중에 완전히 제 여자가 된다면 그땐 다 그 사람 것이에요.”최재원이 냉기가 감도는 눈빛으로 그를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결혼하지 않았단 말이야?”최연준이 이를 꽉 깨물었다. 그가 아무 말이 없자 최재원은 그제야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는 최연준이 비행기 사고를 당한 후로 줄곧 강주에서 요양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여 강서연과는 그 시기에 만났을 거라고 짐작했다.사람이 몸을 다치게 되면 의지력도 약해지고 그 틈을
“오성이 이렇게나 큰데 걔 하나 발붙일 자리가 없겠어?”최재원이 드래곤 지팡이를 잡았다.“걔가 지낼 집 하나 마련해서 나중에 네가 결혼하면 한 달에 몇 번 정도 보러 가. 걔가 사고를 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네 곁에 둬도 좋다!”최연준이 멈칫하더니 한참 후에 차갑게 웃었다.“서연이더러 제 내연녀를 하란 말씀이셨군요.”“그런 여자는 내연녀 자리도 아까워!”최연준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그건 말도 안 돼요!”그가 목청을 높였다.“절대 서연이가 그런 일을 당하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예요!”“그럼 어떡할 건데? 결혼이라도 하려고?”최재원이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너 그 여자한테 아주 홀딱 빠졌구나!”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창문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가슴을 움켜쥐었다.“당장 그 애랑 헤어져! 나연이와 결혼하고 싶지 않다면 다른 3대 가문에서 골라도 되잖아!”“제 평생에 서연이 말고 다른 여자는 없어요!”“다른 여자는 없다고?”최재원이 목청을 높이며 그를 무섭게 째려보았다.“만약 걔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면?”최연준은 순간 머리가 윙 했고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최재원이 계속하여 그를 몰아붙였다.“연준아, 넌 내가 직접 키운 우리 가문의 후계자야. 뭘 하든 넌 항상 최상 그룹부터 생각해야 해. 그리고 할아버지의 책임은 너의 앞길을 막는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는 거야... 여자도 포함해서 말이지.”최연준의 눈빛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가 다시 풀었다. 분위기가 다시 살얼음판이 되었고 그가 아무 말이 없자 최재원의 얼굴에 점점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그런데 그가 손을 내밀어 최연준의 어깨를 다독이려던 순간, 최연준이 갑자기 휙 피했다.최연준은 고개를 들고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매섭고 싸늘한 눈빛은 마치 야밤에 산속을 거니는 한 마리 맹수 같았다.“할아버지.”그가 또박또박 말했다.“만약 서연이 털끝 하나라도 건드렸다간 할아버지도 직접 키운 후계자를 잃으실 겁니다!”“너..
최연준이 발걸음을 멈췄다. 그의 우람한 뒷모습이 오늘따라 더욱 차가워 보였다. 그는 갑자기 고개를 돌려 임나연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입꼬리를 씩 올렸다. 차가운 눈빛 속에 비웃음이 담겨있었다.“결혼? 나연 씨, 우리가 언제 혼약을 맺은 적이 있던가요?”최연준이 갑자기 그녀를 멀리하며 존댓말을 쓰기 시작했다.임나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내가 알고 있는 혼약은 두 사람이 서로 원해야만 맺는 거라고 들었어요. 하지만 아쉽게도 우린 그 조건에 부합되지 않아요!”“최연준 너...”“앞으로는 연준 씨라고 불러요. 그리고 존댓말도 하고요.”최연준이 싸늘하게 말했다.“나연 씨, 우리가 아직 친구처럼 이름을 막 부를 정도로 친하진 않은 것 같은데!”최연준은 자기 할 말만 하고 홱 돌아섰다. 홀로 남겨진 임나연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의 뒷모습이 그녀의 시야에서 점점 사라졌다.임나연이 이를 깨물면서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마음속에 마치 돌덩이가 앉은 듯 답답하기만 했다. 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쉬면서 마음을 가라앉힌 후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최재원의 표정도 말이 아니게 어두웠다.서재로 들어간 임나연은 깨져 난장판이 된 찻그릇과 바닥에 놓인 드래곤 지팡이를 본 순간 방금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임나연도 이런 상황에 끼어들 수 없어 인사치레로 몇 마디 위로를 건넨 뒤 떠나려는데 티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휴대 전화가 갑자기 진동했다.“할아버지, 이건...”최재원이 그녀를 힐끗 보며 말했다.“연준이가 까먹고 놓고 갔나 봐. 나연아, 네가 가져다줘.”생각지도 못한 기회에 임나연은 바로 웃으며 알겠다고 했다.“연준이 만나면 설득 좀 해줘.”최재원이 덤덤하게 말했다.“나연아, 난 네가 마음이 넓은 애라는 거 알아. 이 일 때문에 연준이를 탓하진 않을 거지?”임나연이 화들짝 놀랐다. 아까 문 앞에서 내연녀고 어쩌고 어렴풋이 듣긴 들었다.‘나중에 내가 연준이랑 결혼하게 되면 연준이가 밖
휴대 전화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강서연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나도 사랑해요.”강서연은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렸고 두 볼도 빨갛게 달아올랐다. 사랑한다고 말하고 바로 전화를 끊어버린 그녀는 휴대 전화를 한참 동안 멍하니 들여다보다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결혼한 지 이렇게나 오래되었는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진지하게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강서연은 여유롭게 기지개를 켰다. 기분이 날아갈 듯이 기뻤고 오늘 밤에 또 최연준의 꿈을 꿀 것만 같았다.전화를 끊은 최연준이 방한서에게 차를 가져오라고 전화하려던 그때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강서연 씨야?”그는 움찔한 마음을 뒤로한 채 돌아서서 그녀를 싸늘하게 쳐다보았다.“아직도 여기 있었어요?”“연준아...”임나연이 멈칫하다가 말을 바꾸었다.“도련님, 강서연 씨랑 계속 이렇게 지내는 것도 말이 안 되지 않나요?”최연준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우리 두 사람 일은 당신이랑 상관없어요!”“하지만 최씨 가문 전체와 연관되잖아요.”“당신은 최씨 가문 사람도 아닌데 그걸 신경 써서 뭐 해요?”임나연은 화가 나서 몸이 다 부들부들 떨릴 지경이었다.질투의 불꽃이 마음속에서 활활 타오르면서 그녀의 이성을 점점 삼켜버렸다.조금 전 최연준과 최재원이 서재에서 싸울 때 그녀도 대충 들었다. 하지만 처음 보는 최연준의 다정함에 늘 차갑기만 하던 최씨 가문 셋째 도련님이 맞나 의심이 들 정도였다.최씨 가문과 임씨 가문의 혼약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거의 기정사실이 되었었다. 하여 그녀도 자신이 장차 최씨 가문의 손주며느리가 될 거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왜... 왜 갑자기 강서연이라는 여자가 나타난 걸까!임나연이 숨을 깊게 들이쉬며 주먹을 불끈 쥐더니 최대한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으려고 애를 썼다.“도련님, 난 최씨 가문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당신을 위해서 이러는 거예요. 강서연 씨가 아직 도련님의 정체를 모른다면서요? 하지만 나중에 언젠가는 밝혀질 텐데 강서연 씨가
“앞으로 고모와 고모부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할지도 모르겠어.”배윤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우리 엄마는 원래 몸이 좋지 않은 데다가 아빠까지 화가 나서 쓰러질 지경이셔. 두 분의 건강 상태가 안 좋아질까 봐... 정말 걱정이야.”최군성은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 최군성은 배윤아를 부드럽게 안아주며 등을 다독였다.“그나저나.”최군성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배현진이 이번에 귀국한 이유가 송윤지와의 결혼을 준비하기 위해서였잖아. 그런데 소피아가 갑자기 끼어들다니, 도대체 또 무슨 상황이야?”“오빠는 애초에 송윤지와 결혼할 생각이 없었어.”배윤아가 최군성을 바라보며 말했다.“게다가 이번에 돌아온 이유도 결혼 때문이 아니야. 해외 회사의 경영 상황이 좋지 않아서 돌아온 거야.”“그래?”“해외 시장은 원래부터 우리 가족의 주력 분야가 아니었어. 아빠는 그동안 해외 사업을 오빠에게 맡겼는데, 오빠가 어릴 때부터 해외에서 교육을 받았으니 익숙하게 운영할 거라고 생각했고 오빠가 성과를 내서 친척들 입을 막아주길 바랐던 거야. 하지만 오빠도 해외에서 고생 많이 했어. 이미 시장은 포화 상태였고 각종 장벽도 많았거든. 백인 중심 사회에서 성공적으로 이름을 알리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야.”최군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했다.“그럼, 오빠가 이번에 돌아온 건 본사 지원을 요청하려고 한 거구나?”배윤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었다.“만약 오빠가 송윤지와 결혼을 잘 성사했다면, 아빠와 엄마가 기뻐서 본사 지원을 해줬을지도 몰라. 하지만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거야. 소피아를 데리고 들어올 줄은.”“걱정하지 마.”최군성은 배윤아를 위로하며 말했다.“우리 두 집안의 관계를 생각하면 배씨 가문에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 최씨 가문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야. 지금 가장 중요한 건 경원 아저씨를 안심시키고 병이 악화되지 않도록 하는 거야.”배윤아는 최군성의 품에 기댔다. 이 따뜻한 품만이 배윤아를 안정시켜주는 유일한 위로가 되었다.그러나 그 시
임지강은 자신이 한 말을 되짚어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혹시 자신이 돌려서 모욕한 걸로 들린 건 아닐까?그는 황급히 해명하려 했지만, 말문이 막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얼굴만 붉혔다.그런데 송윤지는 갑자기 입을 가리고 웃음을 터뜨렸다.“송윤지 씨, 저는 그저...”“말 안 해도 돼요.”송윤지는 맑고 부드러운 눈빛으로 말했다.“알아요. 나쁜 뜻은 없었다는 걸.”임지강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송윤지를 바라보았다.“그런데요, 앞으로는 그런 썰렁한 농담은 하지 마세요. 농담은 별로 안 웃기는데, 임 대표님 반응이 참 웃겨요!”송윤지의 말에 임지강도 따라 웃었고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창문 틈으로 들어온 햇살이 두 사람의 얼굴을 따뜻하게 비췄다.송윤지는 눈치가 빠른 편은 아니지만 임지강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제는 알 것 같았다.그리고 송윤지도 임지강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그것은 단순한 호감 이상이었다. 그에게서는 이상하게도 익숙함이 느껴졌다. 마치 전생에 알고 있었던 것처럼.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이란 참으로 신비로운 것이었다....배윤아는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작품은 아직 절반만 완성된 상태였지만, 마감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남은 시간은 많지 않았다.그때 최군성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화실로 들어섰다. 최군성은 배윤아의 그림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윤아야, 이 부분의 구도가 맞지 않잖아... 그리고 여기, 앞부분에서 주인공은 이렇게 묘사되지 않았다고.”“영상 제작사에서 이미 전화가 왔어. 그쪽은 홍보까지 마쳤고 이제 우리 둘의 완성본만 기다리고 있대. 그런데 이 속도로는 안 될 것 같아.”“차라리 내가 우리 엄마한테 물어볼까? 어진 엔터테인먼트가 그래도 영상 업계에서 어느 정도 위치가 있잖아. 우리 엄마 인맥도 넓으니까, 제작사에 부탁해서 마감일을 조금 미뤄보라고 할게.”“그만둬.”배윤아는 한참을 침묵하다 무기력한 목소리로 말했다.“1년을 더 준대도 똑같아.”최군성은 걱정스러운
이틀이 지나고 나서야 송윤지의 고열이 서서히 내려갔다.송윤지는 마치 아주 긴 꿈을 꾼 것 같았다. 꿈속에서 다시 임지강의 얼굴이 나타났지만, 지난번처럼 기묘한 꿈은 아니었다.이번에는 임지강이 송윤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따뜻하고 다정했다. 마치 자신의 모든 애정과 온기를 송윤지에게 전하고 싶어 하는 듯했다.꿈속에서 송윤지는 호접란이 만개한 작은 정원에 있었다. 꽃들은 활짝 피어 있었고 따스한 봄 햇살이 내리쬐며 푸른 하늘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오성에 온 이후로 본 적 없었던 평화로운 하늘이었다.정원의 한쪽에는 작은 남자아이가 송윤지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 아이는 포동포동하고 귀여운 모습이었다. 아이는 해맑게 웃으며 큰 소리로 엄마라고 외쳤다.송윤지는 아이를 향해 달려가려 했지만, 그 순간 꿈에서 깨어났다.송윤지는 천천히 눈을 떴다. 온몸이 깊은 피로감에 휩싸였고 마치 물속에서 건져낸 듯 축 처져 있었다.그러나 고열로 인한 불편함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송윤지는 옆자리를 바라보았다. 움푹 들어간 침대 자리에 익숙한 기운이 남아 있었다. 송윤지는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 부엌에서는 임지강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임지강은 송윤지를 위해 뭔가를 요리하려는 듯했다.그러나 부엌일은 그의 전문 분야가 아닌 것이 분명했다. 단순히 국을 끓이는 일이었는데도 그는 냄비를 태워버렸고 부엌은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임지강은 짜증 난 듯 국자를 내던지며 휴대전화를 꺼내 전화를 걸었다. 목소리는 화가 가득 차 있었다.“네가 말한 대로 했는데 제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거야?”그는 잠시 말을 듣더니 다시 소리쳤다.“이러고도 호텔 총주방장이야? 당장 그만둬!”“내가 주소를 보낼 테니까 음식이랑 국 좀 가져와. 1분이라도 늦으면 내일부턴 짐 싸서 나가야 할 줄 알아!”송윤지는 이 모습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임지강은 송윤지의 웃음소리를 듣고 갑자기 뒤돌
임지강은 막 공항으로 향하려던 참이었다.중림 그룹에서 처리할 일이 있어 오전에 운산시로 갔다가 저녁에 돌아올 예정이었다. 그런데 선배로부터 송윤지와 관련된 전화가 걸려 왔다.송윤지는 임지강이 필요해 보였다.임지강은 주저 없이 짐을 내려놓고 부하에게 운산시로 혼자 가라고 지시했다.“대표님, 이건...”부하는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쪽 사람들한테 이미 지시해 두었어.”임지강은 급히 설명을 이어갔다.“운산시에 도착하면 내가 지시해 둔 대로 그 사람들과 협력해 일을 처리하면 돼. 내가 없어도 문제없을 거야.”부하가 멍하니 있는 사이, 임지강은 이미 차의 가속 페달을 밟아버렸다. 차는 화살처럼 도로 위를 질주했다.중림 그룹의 일 따위는 사소한 문제였다. 그는 송윤지와 함께 시간을 보낼 모든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임지강은 금세 송윤지를 데리러 갔다.송윤지는 두통과 인후통에 시달리며 피곤한 상태였고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어 했다. 집에 도착하자, 송윤지는 문 앞에서 누군가가 이삿짐을 나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송윤지는 문간에 서서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그때, 소피아가 문밖으로 나왔다. 소피아는 송윤지를 보자 얄미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돌아왔네요? 송 선생님, 그동안 우리 제임스를 잘 돌봐주셔서 감사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 없을 거예요!”소피아는 비웃는 듯한 말투로 이어갔다.“현진 씨가 제임스에게 개인 교사를 붙여줬거든요. 앞으로는 집에서 수업할 예정이에요. 현진 씨는 제임스를 정말 친아들처럼 아껴서요. 제임스에게 돈 쓰는 걸 보면, 진짜 친아들보다 더 신경 쓰는 것 같아요!”송윤지는 아무런 표정도 없이 문틀에 기대 있었다.“아, 맞다.”소피아는 비웃으며 덧붙였다.“현진 씨가 이 집을 팔았어요. 오늘은 짐을 좀 챙겨가려고 왔어요. 이제 우리 만날 일은 없을 거예요.”“그래요?”송윤지는 조용히 말했다.“정말 다행이네요...”“현진 씨가 저를 위해 새집을 사줬어요!”소피아는 일부러
“미안해, 송윤지. 나... 너한테 상처 주고 싶지 않았어.”“넌 나한테 상처를 줄 수 없어.”송윤지는 배현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오늘에서야 깨달았어. 내가 널 그렇게 깊이 사랑했던 것도 아니란 걸.”배현진은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번쩍 들었다.“다만, 한 가지는 이해가 되지 않아.”송윤지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이미 마음속에 다른 사람이 있었으면서 왜 나를 만났어?”배현진은 목이 메는 듯 입술을 한 번 적시고 나서, 쉰 목소리로 답했다.“너는 유정 이모가 소개해 준 사람이었어. 우리 부모님도 너를 무척 마음에 들어 했고... 그리고 넌 예쁘지만, 배경이 없어서 다루기 쉬웠으니까. 결혼 후에 내가 밖에서 다른 여자를 만나도 너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네 친정도 나를 어쩌지 못할 테고.”송윤지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믿기 힘든 말이 송윤지의 마음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송윤지를 선택한 이유가 다루기 쉬워서, 그리고 배경이 없어서였단 말인가?생각해 보면, 강소아나 배윤아 같은 집안의 딸이었다면 이런 취급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 같은 사람들은 이런 일을 겪으면 결코 가만히 있지 않는다. 설령 본인이 참더라도 강력한 친정이 먼저 나서서 사위를 응징했을 테니까.송윤지는 놀라움이 가라앉자 갑자기 쓴웃음이 터져 나왔다.배현진은 송윤지의 반응에 표정이 굳었다. 배현진은 송윤지가 감정적으로 무너져 울거나, 자신을 때릴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송윤지는 울지도 소란을 피우지도 않았다. 송윤지의 태도는 지나치게 평온했다. 오히려 그 점이 배현진을 불안하게 했다.“송윤지, 정말 화가 났다면 나를 때려도 돼. 여기, 나를 때려! 내가 잘못했어. 내가 나쁜 놈이야. 어서 때려!”배현진은 송윤지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송윤지는 배현진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송윤지는 잠시 배현진을 응시하다가 아무 말 없이 그 자리를 떠났다.그 순간, 송윤지는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마치 오랫동안
“소유야, 난...”배현진은 난처한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됐어!”최군형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억눌린 분노를 터뜨렸다.“배현진, 우린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어. 비록 형제처럼 친하진 않았지만, 난 너를 친구로 여겼어. 그런데 네가 이런 사람이었다니 정말 실망이야.”“맞아!”강소아도 매서운 눈빛으로 배현진을 노려보며 말했다.“이미 마음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애초에 왜 송윤지를 건드린 거야? 송윤지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그만들 해!”배현진이 낮고 거친 목소리로 소리쳤다.“오늘 여기 온 건 아이들 문제를 해결하려고 온 거지 내 사생활을 따지러 온 게 아니야.”“너...”최군형이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배현진은 원장과 학부모들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원장님, 그리고 학부모님들.”배현진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서서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제 아들이 잘못한 부분에 대해, 아버지로서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법적으로나 도의적으로 마땅히 해야 할 보상은 변호사를 통해 진행할 겁니다. 하지만 제 아들이 맞은 일에 대해서도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뭐라고?”늘 침착하던 최군형도 이 말을 듣고 분노를 참지 못했다.“배현진, 너 제정신이야?”“최군형!”배현진은 강한 어조로 말을 끊으며 최군형을 똑바로 바라봤다.“내 아들이 유치원에서 장난치고 말썽을 피운 건 사실이야. 하지만 네 딸이 내 아들을 때려서 얼굴에 멍이 들고 코피까지 흘리게 한 것도 사실이잖아. 아이끼리 싸우는 건 내가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어른들까지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면 문제가 더 커질 거야. 내 책임은 내가 지겠지만, 너희 쪽 책임도 똑같이 져야 한다고 생각해.”“너...”최군형의 가슴속은 커다란 바위가 내려앉은 듯 답답했다.이게 정말 배현진이란 말인가? 배씨 가문의 아들이자 배윤아의 오빠라는 사람이 맞나?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임지강이 갑자기 책상을 세게 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몇 걸음 만에 배현진 앞까지 다
“삼촌.”최군형이 강소아의 허리를 감싸안으며 가볍게 웃었다.“우린 딸 문제를 해결하려 온 것도 맞지만 또 한편으론... 저랑 소유 둘 다 궁금했거든요. 이 제임스라는 아이의 아버지가 대체 어떤 사람인지.”“흥! 뭐 좋은 사람이겠어요?”이때 누군가 끼어들었다. 최군형의 사업 파트너 부인이자 평소 최군형 집안과 친하게 지내던 여성이었다.“보세요, 그 애 엄마를 보면 알아요. 부부 둘 다 똑같은 부류라서 그런 문제아를 키운 거예요!”강소아는 부인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미소 지었다.“최 사모님, 사모님은 늘 온화하고 대범한 분이시지만 오늘만큼은 저를 말리지 마세요!”여자는 불만스러운 듯 말했다.“그 문제아가 우리 아들을 괴롭혔어요. 오늘 이 자리에서 제 체면 다 내려놓더라도 우리 아들을 위해 한마디 해야겠어요!”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회의실 문이 열렸다. 하이힐 소리를 내며 당당하게 소피아가 걸어들어왔다. 뒤에는 제임스가 따라왔는데 찌푸린 표정으로 모든 사람을 원망스럽게 쳐다보고 있었다.소피아는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제임스를 안심시켰다.“원장님, 그리고 여러분.”소피아는 선글라스를 벗으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 미소에는 조소가 서려 있었다.“제 아들이 유치원에서 폭행당했어요. 이 문제는 반드시 끝까지 따질 겁니다! 송 선생님은 어디 계시죠?”소피아는 주위를 둘러보며 오늘의 ‘주인공’을 찾다가 보이지 않자, 눈살을 찌푸렸다.“담임이라면, 이런 문제에 나서야 하지 않나요?”소피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낮고 깊은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송 선생님이 없으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나요?”소피아는 깜짝 놀라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거기에는 라이터를 돌리며 앉아 있던 임지강이 있었다. 임지강의 여유로운 태도에는 냉혹한 기운이 묻어 있었다. 눈을 번쩍 들어 올리자, 임지강의 차가운 시선은 마치 두 개의 날카로운 검처럼 느껴져 모두를 긴장하게 했다.임지강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송 선생님이 없더라도 원장님이 계시잖아요.
“하지만...”송윤지가 머뭇거리며 말했다.“임 대표님, 이건 제 문제예요. 그 반 아이들은 제가 책임지고 있습니다. 학부모님들이 불만이 있거나 문제가 생기면 제가 나서서 해결해야 맞는 거잖아요...”“가지 말라고 했잖아요.”임지강의 목소리는 단호해졌다. 임지강의 눈빛은 깊은 연못처럼 어둡고 알 수 없는 강렬한 힘이 담겨 있었다.송윤지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이상하게도 임지강의 엄격한 표정과 냉혹함에도 송윤지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임지강의 어떤 모습이어도 두려운 사람이 아니었다.“임 대표님...”“윤지 씨.”임지강은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송윤지의 어깨를 단단히 잡으며 말했다.“모든 걸 저에게 맡겨요.”그 순간, 송윤지는 혹시 임지강이 뭔가 알고 있는 게 아닐지 생각했다.송윤지의 가슴이 마구 뛰었고 눈은 임지강을 곧게 응시하고 있었다.“임 대표님, 혹시 저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세요?”임지강은 잠시 입술을 깨물며 침묵하더니 천천히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더 이상 숨기지 않을게요. 사실, 윤지 씨 약혼자를 조사했어요.”“뭐라고요?”임지강이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송윤지의 머릿속이 순간 새하얗게 변했다.“그 제임스의 어머니, 소피아라는 여자는 배현진의 연인이에요.”임지강은 담담하게 말했다.“처음엔 배현진이 단순히 이 여자와 재미로 만나는 줄 알았어요. 솔직히 말해서, 그 여자는 조건이 뛰어난 편도 아니니까... 하지만 조사를 더 해보니, 배현진은 이 여자와 진지했어요. 배현진이 소유했던 몇 채의 부동산이 이미 그 여자 명의로 넘어간 걸 확인했거든요.”송윤지는 한참 동안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눈앞이 흐려지며 무릎에 힘이 풀렸다. 송윤지는 따뜻하고 단단한 품속으로 쓰러졌다.임지강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송윤지를 바라보며 넓은 손으로 송윤지의 등을 조심스럽게 토닥였다.“오늘 소피아가 유치원에 찾아와 소란을 피운 건 윤지 씨를 일부러 곤란하게 하려는 의도였던 것 같아요.”송윤지의 눈가가 붉어졌다. 울고 싶은데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 무
배현진은 고개를 살짝 돌리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너 요즘 너무 피곤한 거 아니야? 오늘은 늦었으니, 일단 푹 쉬고 다른 날 얘기하자.”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배현진은 등을 돌려 떠나버렸다.송윤지는 그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응시했다. 그의 모호한 말과 행동을 떠올리며 벽에 머리를 기대고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송윤지는 알 수 있었다. 이 관계는 이제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그날 밤, 송윤지는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 못 들었다. 머릿속은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처럼 어지러웠다. 그러다 우연히 머리맡에 놓인 딸기 곰 인형을 발견했다. 송윤지는 그 인형을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송윤지는 잠이 들었다.눈 부신 빛이 그녀를 감싸며 시야를 덮었다. 빛이 사라지고 송윤지는 어딘가 낯선 작은 별장 앞에 서 있었다.마당은 화려한 팔레놉시스로 가득했다. 그 눈부신 자태에 이끌려 송윤지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집 안은 고풍스러운 유럽풍 가구로 꾸며져 있었다. 소박하면서도 우아함이 물씬 풍겼다. 그녀는 숨을 고르며 멈춰 섰다. 낯선 공간의 기운에 몸이 얼어붙은 순간, 소파에 앉아 있던 누군가가 천천히 일어섰다.그는 몸을 돌렸다.임지강이었다.송윤지는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임지강이 손을 뻗어 그녀의 팔을 잡았다.“윤지야, 돌아왔구나.”임지강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온화하고 어딘가 몽환적이었다.송윤지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갑자기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임지강은 위층을 쳐다보며 웃었다.“아기가 울고 있네. 엄마를 찾는 모양이야.”“뭐라고요?”송윤지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송윤지는 황급히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울음소리는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방 안에는 작은 요람이 있었지만, 그 안엔 아이가 아닌 베개만 놓여 있었다.그녀는 작게 비명을 내질렀다. 뒤돌아보니 임지강이 문가에 서 있었다.이번엔 그의 미소가 차갑게 변해 있었다. 눈빛은 공허했고 섬뜩한 기운마저 감돌았다.“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