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인서는 미소를 머금고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가 이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최지용은 그 의미를 곰곰이 헤아려 보았으나 알 길이 없었다.배인서는 설명하지 않고 그저 거리를 따라 걸어가기 시작했다. 최지용은 묵묵히 배인서의 뒤를 따랐고 저녁의 선선한 바람이 두 사람을 감싸며 스쳐 지나갔다. 달빛은 은쟁반처럼 밤하늘에 걸려 있었고 달빛이 두 사람 위로 부드럽게 내리쬐었다. 이 도시는 모든 것이 고요하고 아름다웠다.오랜만에 누군가와 함께 걷는 기분이 마냥 좋았다. 하지만 배인서에게 이런 감각은 너무나도 오랫동안 잊힌 것이었다.“배인서 씨, 설마 집까지 계속 걸어가려는 건 아니겠죠?”배인서는 조용히 발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뒤돌아 최지용을 응시했다.특전 부대 소년의 얼굴에는 다급함이 묻어 있었고 눈은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그럼...” 배인서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저를 집에 데려다주시겠어요?”“데려다주지 않을 건데요?” 최지용은 웃으며 말했다. “저랑 같이 야식 먹을래요?”“네?”최지용은 느닷없이 배인서의 손을 잡고 배인서를 이끌며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배인서의 가슴은 요동쳤다. 이성은 손을 놓으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손끝은 오히려 그를 더욱 단단히 붙잡았다.두 사람 모두 달리는 속도가 빨랐다. 찬 바람이 배인서의 입가를 스치며 어딘가 달콤한 향이 은은하게 퍼졌다.배인서는 웃음이 터져 나왔고 더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최지용은 배인서를 작은 국수집 앞으로 이끌었다.간판은 크지 않았고 가게는 깔끔했다. 주인은 푸근한 인상의 아저씨였다.“어서 오세요.”주인아저씨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활기차게 맞아주었다.이미 깊은 밤이라 가게 안에는 다른 손님이 없었고 최지용은 배인서를 창가 쪽 자리로 안내했다.최지용은 별다른 고민 없이 소고기 국수 두 그릇을 주문했다. 뜨거운 국수가 나오고 나서도 두 사람은 모두 아무 말 없이 국수만 바라봤다.“왜 그래요?” 최지용은 눈가에 미소를 띠며 배인서를 바라보았다.배인
배인서는 무심코 최지용을 바라보았고 최지용의 따스한 시선과 마주쳤다. 배인서는 말없이 젓가락 끝으로 국수를 휘저었지만, 마음은 그 국수처럼 엉켜만 갔다.최지용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지만 배인서는 가볍게 피하며 거리를 두었다. 멍하니 있던 최지용의 앞에 배인서는 조용히 소고기를 올려주고 자신은 하트 모양 계란 프라이를 한입 가볍게 베어 물었다.“배... 배인서 씨, 이거...”“맛있네요.” 배인서가 부드럽게 말했다.최지용은 초조하게 말했다. “계란이 아니에요, 내가 말하고 싶은 건!”“국수 얘기인가요?”“배인서 씨, 당신...”최지용은 지금껏 어떤 여자 앞에서도 얼굴이 빨개진 적이 없었다.최지용은 깊은 한숨을 쉬었지만 배인서는 여전히 차분하게 앉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국수를 먹고 있었다.이때, 어색한 침묵 속에 가게주인이 활짝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두 분, 맛있게 드셨나요? 소고기 더 드릴까요?”최지용은 가게주인을 바라보며 팔꿈치를 탁자에 대고 얼굴을 가린 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아니, 오늘은 최지용답지 않게 적게 먹네!” 가게주인은 웃으며 최지용의 어깨를 툭툭 쳤다. “평소에는 고기 세 접시, 국수 한 그릇을 더 먹었잖아. 오늘은 미녀 앞이라 그런가 적게 먹는 척하는 건가?”최지용은 눈짓으로 서둘러 그만하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가게주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가게주인은 오히려 더욱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젊은 사람이 잘 먹는 게 복이지! 아가씨, 이렇게 잘 먹는 사람 만나면 앞으로 큰 복이 따를 거예요!”“콜록콜록...”최지용은 국수를 먹다가 거의 뿜을 뻔했다.“아, 아저씨.” 최지용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저한테 무슨 복이 있겠어요? 오늘은 소고기 국수가 아니라 마음 아픈 국수를 먹고 있는데...”“마음 아픈 국수?” 가게주인은 잠시 멍하더니 옆에서 조용히 국수를 먹고 있는 배인서를 보고는 상황을 눈치챘다.“하하, 괜찮아, 젊은이!” 가게주인은 푸근하게 웃으며 말했다. “옛말
배인서의 마음이 순간 철렁 내려앉았다. 배인서는 조용히 말했다.“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어요.”“흥, 모른다고?”“육연우 씨.” 배인서는 차분하게 예의를 잃지 않고 말했다. “지금은 이미 늦은 시간이니 일찍 쉬는 게 좋을 것 같아요.”“거기 서!” 육연우는 배인서의 앞을 막아서며 눈빛으로 매섭게 쏘아보았다.“아직 내 질문에 답하지 않았잖아! 왜... 왜 네가 나타나자마자 모든 게 변해버린 거지?”“육연우 씨...”“왜 우리 엄마를 가만두지 않는 거야!” 육연우의 몸은 떨리고 있었고 눈물이 흘러내렸다.“엄마가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부터 서재 근처에서 어슬렁거린다고 말하면서 뭔가 의심스럽다고 했잖아...”“전 틀린 말은 하지 않았어요.” 배인서는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결국 소아 언니의 설계도를 훔친 것도 사실이잖아요.”“그건 우리 엄마가 아니야! 그 사람은... 그 사람은...”“육연우 씨.” 배인서는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그저 육씨 집안 모두를 지키려 할 뿐이에요. 당신을 포함해서요. 누군가가 육씨 집안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려 한다면 그가 누구든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그만해!” 육연우는 귀를 막으며 눈이 충혈된 채 거의 이성을 잃은 듯 소리쳤다.“네가 무슨 자격으로? 여기가 네 집이라도 되는 거야?”“여기는...” 배인서는 입술을 깨물며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여기가 자신의 집이 아니라는 것을 배인서는 알고 있었다.하지만 배인서는 여기를 집처럼 소중히 지키고 싶었다. 이미 엄마를 잃었고 이제 아빠와 언니마저 잃고 싶지 않았다.육연우는 배인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더욱 확신하며 비난의 눈빛을 보냈다.“배인서, 너 대체 누구야?” 육연우는 한 발짝 더 다가가며 물었다. “대체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 거야?”배인서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속 감정을 억눌렀다.배인서는 평소 물러서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이번만큼은 육연우와 싸우고 싶지 않았다.“육연우 씨.” 배인서는 조용
강소아는 마지막 서류를 넘기고 가볍게 기지개를 켜며 책상 위의 달력에 시선을 돌렸다.달력에는 온통 동그라미가 가득했는데 모두 최군형이 그려둔 것이었다.최군형은 이 날 동안 용돈을 더 받아낼 거라고 하더니 그 이상으로 놀라운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강소아는 미소를 지으며 컴퓨터를 끄고 점심쯤에 일찍 퇴근해 집으로 향할 준비를 했다. 그때 비서가 문을 두드리며 들어왔다.“작은 육 대표님, 누가 오셨는지 보세요!”고개를 든 강소아는 뜻밖에 임우정과 소정애가 함께 온 모습을 보고 놀라 기뻤다. 최군형의 용돈 이야기는 순식간에 잊혔다.강소아는 달려가 두 사람을 한 손씩 꼭 끌어안았다.세 사람은 회사 근처의 호텔에서 자리를 잡았다.강소아는 두 사람이 좋아하는 요리만 골라 주문했고 두 엄마가 오래된 친구처럼 어울리는 모습을 보며 행복하게 웃었다.이제 두 사람은 진정한 오랜 친구가 되어 있었다. 소정애는 임우정과 함께 책을 읽고 차를 마시며 꽃을 가꿨고 임우정은 소정애에게서 마작과 고스톱을 배웠다.두 집은 자주 왕래했고 임우정은 자신을 용서한 동시에 딸을 사랑해 주는 또 다른 부모에게도 마음을 열었다.강소아는 두 사람에게 음식을 덜어주며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오늘 두 분이 어떻게 같이 오셨어요? 저한테 무슨 일 있으신 거예요?”소정애와 임우정은 서로 눈을 맞추며 웃었다.“그냥 나가서 좀 걷고 싶었는데 네 엄마가 너 보러 가자고 해서 점심도 같이 먹으려고 왔지.”“맞아, 이번엔 네 엄마가 밥을 살 거야.” 임우정도 웃으며 말했다. “소아야, 이번엔 네가 내려고 하지 마.”“그럴 순 없죠!” 강소아는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제가 두 분을 공경해야 하는 거 아니겠어요?”“꼭 내가 사야 해.” 소정애는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네 동생 소준이가 이번 학기에 장학금을 받았어, 그것도 최고 장학금. 수백만 원이 넘는 장학금이야! 이렇게 좋은 소식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내가 당연히 점심을 사야지, 안 그래?”강소아는 동생 강소준의
육연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혜림에게 인사를 건넸다.동혜림은 눈치가 매우 빠른 사람이었다. 한눈에 육연우에게 뭔가 고민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육연우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그 시선 끝엔 주우남과 배인서가 있었다. 육연우가 주우남과는 별다른 관련이 없었으니 그 시선이 향한 것은 분명 검은 옷을 입은 배인서일 것이다.동혜림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육 아가씨, 오랜만에 회사에 오셨네요! 오늘 와 보니 변화가 많으시죠?”육연우는 잠시 멈칫하며 못 들은 척했다.동혜림은 포기하지 않고 고개를 살짝 들며 말했다. “육 아가씨, 배인서 씨를 보고 계신 건가요?”육연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나 동혜림은 육연우의 주먹이 점점 더 단단히 쥐어지는 것을 눈치챘다.“아이고, 육 아가씨, 저 배 할머니 볼 필요 없어요! 차라리 제가 커피 한잔 사드릴게요. 요즘 새로 나온 메뉴들도 있어요. 함께 가요.”“방금 뭐라고 했어요?” 육연우의 눈에 의아한 표정이 떠올랐다. “배인서를 뭐라고 불렀죠?”“아, 배 할머니요? 하하, 다들 그렇게 불러요. 검은 옷만 입고 다니니까 구닥다리 같지 않나요? 보기도 답답해요!”이 말을 듣고 육연우의 긴장된 표정이 한결 풀렸다. 동혜림은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단 몇 마디로 작은 주주의 마음을 살짝 흔든 것처럼 보였다.하지만 육연우와 배인서 사이에는 대체 어떤 인연이 있는 걸까?동혜림이 궁금해하던 찰나 배인서가 조용히 말했다.“그런 말은 좋지 않아요. 사람을 외모로 평가할 수는 없잖아요. 그 사람에게도 배울 점이 있을지 모르잖아요.”“아, 그런가요?” 동혜림은 어색하게 웃으며 눈을 굴리고는 다시 예의를 갖췄다. 동혜림은 육연우의 팔짱을 끼고 아까보다 더 친근하게 말했다.“육 아가씨, 이 커피는 꼭 제가 사드릴게요. 배울 게 정말 많네요. 남의 장점을 보는 안목이 저보다 훨씬 뛰어나세요!”육연우는 동혜림에게 가볍게 미소 지었다.영업부 사람들은 모두 말솜씨가 뛰어나고 상황 파악에 능숙하다. 그들의 생존
육연우는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상대방은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혹시 육연우 씨 맞으신가요? 여기는 오성 교외 구치소입니다.”육연우의 심장은 요동치기 시작했고 다리는 순식간에 힘을 잃었다.“확인 먼저 하겠습니다.” 상대방은 말을 이었다. “아버지의 성함이 육명진 씨 맞으시죠?”“맞아요...”“육명진의 사형 집행일은 이번 달 14일입니다.”연우는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며 비틀거리다 가까운 나무에 몸을 기대었다.“육연우 씨, 듣고 계신가요?”육연우는 크게 숨을 내쉬며 겨우 차분함을 유지하려 애썼다.“네, 듣고 있어요...”“관례에 따라 사형수는 형이 집행되기 전에 가족과 면회할 수 있습니다. 육명진 씨가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 면회 시간은...”육연우의 귀에는 마치 수천 마리의 벌레가 울부짖는 소리가 가득 찼다. 육연우는 전화를 끊자마자 길을 따라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육연우는 이렇게 달리면 운명이 자신을 비웃는 듯한 이 상황을 피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하지만...육연우는 바다까지 달려가서 멈췄다. 육명진이 엄마를 이용해 자신을 협박하고 육소유로 가장시켜 육씨 집안의 재산을 빼앗으려 했던 장면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육연우가 그런 악한 일을 거부하자 육명진은 육연우를 때리고 욕하고 모욕하고 위협했다.그는 더 이상 아버지가 아니었다. 그저 악마일 뿐이었다.육연우는 두 귀를 감싸고 절규했지만, 그 비명은 파도 소리에 묻혀 하늘로 흩어진 구름처럼 사라져갔다.*약속된 시간은 금세 찾아왔다.여러차례 망설이던 육연우는 마침내 교외의 구치소로 향했다. 육연우는 하얀 옷을 입고 얼굴에는 옅은 화장을 하고 있었다. 마치 창백하고 연약한 아름다움을 지닌 듯 보였다. 하지만 육연우의 눈빛에 담긴 결심은 마치 칼처럼 날카로웠다. 그 눈빛은 육명진을 보자마자 그의 심장을 찌르고 싶어 할 정도로 가득 차 있었다.“오, 내 딸, 왔구나.”육명진은 부어오른 눈을 힘겹게 뜨고 썩어가는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육명진의 입에는 이
“싫어요! 싫어요!”육연우는 끝없는 악몽 속에서 헤매는 듯 두 귀를 막고 비명을 질렀다.육연우는 도망치고 싶었지만 보이지 않는 손이 그녀를 더러운 진창 속으로 던져 벗어날 수 없게 꽉 붙잡고 있었다.“이 천한 년! 너도 네 엄마와 똑같아. 머리도 없는 쓸모없는 폐물! 온갖 부귀영화를 누릴 기회가 있었는데도 그걸 다 남에게 내주다니! 쓸모없는 폐물이야!”“그만하세요!” 육연우는 유리 벽을 미친 듯이 두드리며 절규했다. “당신은 짐승이에요! 이 모든 게 다 당신 때문이에요! 엄마가 그렇게 된 것도 당신 때문이에요! 엄마를 농락하고 괴롭히지 않았다면, 엄마는 절대 다중인격 장애에 걸리지 않았을 거예요... 결국 엄마는 죽었어요. 이제야 만족하신가요?”“뭐라고?” 육명진은 잠시 멍하더니 곧이어 더욱 크게 웃어댔다.교도관들이 몇 차례 경고했지만, 육명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결국 교도관들은 육명진을 강제로 끌어넣기 시작했다. 밖에 있던 여자 교도관은 육연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자리에 앉게 했다.육명진이 철문 안으로 끌려가던 순간, 갑자기 고개를 돌리며 눈빛을 번뜩였다. 마치 지옥의 깊은 구렁에서 나온 눈빛 같았다.“흥, 연우야, 넌 내 딸이잖아!”“육경섭 부부가 정말 너를 진심으로 아껴줄 것 같아? 언젠가 너도 그 사람들에게 버림받게 될 거야!”“차라리 우리 셋이 지옥에서 다시 만나자! 하하하하하...”“꺼져버려요!” 육연우는 다시 감정이 폭발해 통제 불능이 되었고 두 명의 교도관이 육연우를 억누르며 간신히 진정시켰다.차가운 방은 고요해졌지만, 육연우의 절망 어린 울음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 채 육연우는 구치소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바깥 하늘은 맑고 푸르렀으며 햇살이 밝게 내리쬐었지만, 육연우는 여전히 추웠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몸과 마음이 얼어붙은 듯한 차가움이 육연우를 감쌌다. 그때, 최군성이 전화를 걸어왔다. 아직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그쪽에서는 밝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연우야, 내
최군성은 이제 더 이상 목발에 의존하지 않아도 됐다. 의사는 최군성이 타고난 체력과 함께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마음가짐 덕분에 빠르게 회복했다고 말했다. 최군성은 드디어 자랑할 것이 생겼다며 부모님과 형, 형수 앞에서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예전에 나보고 맨날 웃기만 한다고 뭐라 하셨잖아요! 그런데 보세요, 웃으면 젊어진다니까요! 좋은 기분이야말로 모든 병을 고치는 만병통치약이에요!!”하지만 성소월이 죽고 난 후, 육연우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고 최군성의 웃음도 함께 줄어들었다.육연우가 최씨 집안 별장에 도착했다. 최군성에게는 따로 집이 있었지만, 부상 이후 강서연은 그가 혼자 지내지 못하도록 이곳에서 돌보겠다고 고집했다.최군성은 소파 옆에 앉아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은빛 작은 아기 고양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고양이들은 약한 울음소리를 내며 사람의 마음을 녹일 듯했다.최군성은 고양이들이 아직 어리다 보니 젖을 잘 먹지 못할까 봐 걱정하며 몇 개의 젖병을 준비했다. 젖병에 우유를 채워 조심스럽게 고양이들에게 먹이던 최군성은, 세심한 이 일을 오래 견디지 못하고 금세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최군성이 고개를 들어 보니 육연우가 서 있었다. 최군성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연우야, 빨리 와봐!”“이것 봐, 얼마나 귀여워!” 최군성은 웃으며 부드러운 면 천으로 고양이 입가의 우유를 닦아냈다.육연우는 그 모습을 보며 참지 못하고 칭찬했다.“말 세심하게 돌봐주고 있네요.”“별거 아닌걸.” 최군성은 웃으며 말했다. “아직 애들이 너무 작잖아, 당연히 부드럽게 돌봐야지! 그런데 너는 어떤 애가 제일 마음에 들어? 다 마음에 들면 우리 다 데리고 있자. 내 친구는 아주 후한 사람이야.”“어떤 친구요?”“너도 한 번 본 적 있을걸. 백 아저씨네 막내딸이야!”육연우는 잠시 생각해 보더니 한 번 연회에서 본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배경원은 최연준과 육경섭과도 깊은 친분이 있는 사람이다.소문에 따르면 배경원의 부인은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백
손님들이 웅성거리며 비명이 들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백인서?”배윤아가 일부러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큰 소리를 질러?”“아니야... 난 백인서가 아니야!”백시연은 목이 쉬도록 외치며 갑자기 강소아를 돌아보았다.“말해봐! 아까 다 알고 있었던 거잖아? 내가 백인서가 아니라는 걸! 모두가 알 수 있게 똑똑히 말하라고!”“인서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강소아는 담담하면서도 비웃는 표정을 지으며 차분히 백시연의 손을 밀어냈다.“혹시 술이라도 마신 거야? 취한 것 같아.”“강소아 씨!”백시연은 분노에 치를 떨며 외쳤다.강소아는 백시연의 손을 잡고 안쓰럽다는 듯이 바라보며 말했다.“인서야, 우린 자매잖아. 여기서 소란스러운 모습 보이지 말자. 오늘은 어쨌든 육씨 가문의 중요한 날이기도 하고 내 딸도 여기 있어... 그러니까, 제발 진정해 줘.”“아니야...”“인서야!”“아니라고! 아니라고!”백시연은 두 손으로 귀를 막고 한 발짝씩 뒤로 물러섰다.“난 백인서가 아니야! 몇 번을 말해야 믿을 거야?”배윤아는 피식 웃으며 백시연의 팔짱을 끼고 태연히 말했다.“어머, 백인서. 왜 그래? 백인서가 아니면, 왜 백인서 얼굴을 하고 있는 건데? 그런데... 굳이 너와 백인서의 다른 점을 꼽으라면... 손목에 그림이 있다는 거?”“비켜!”백시연은 배윤아를 거칠게 밀어내고 다급히 무대를 향해 뛰어갔다.백인서는 고요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마침내 기다리던 이 순간이 왔다.백인서는 천천히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눈앞의 백시연을 바라보았지만,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눈앞의 이 사람은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지옥에서 온 악마처럼 보였다.백인서는 문득 생각했다. 어쩌면 백시연은 진짜 악마일지도 모른다고. 사람은 누구나 두 가지 얼굴을 지니고 있다. 한쪽은 천사, 다른 한쪽은 악마. 그리고 자신과 백시연 같은 쌍둥이의 운명은 그런 인간의 본성을 극대화해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가면은 순금으로 빚어졌고 가장자리에는 보석이 촘촘히 박혀 조명이 닿을 때마다 눈 부신 빛을 흩뿌렸다.백시연은 그 자리에 선 채 몸이 굳어버렸다.“이... 이럴 수가!”그 사이, 백인서는 이미 무대 위로 올라가 권욱 옆에 서 있었다.권욱은 이어서 말했다.“이분이 바로 제 이복동생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늘 제 동생을 걱정하며 꼭 찾아달라고 당부하셨죠. 이제야 동생을 찾게 되었습니다!”권욱은 백인서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의 눈빛 속에는 진심 어린 애정과 따스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솔직히 말씀드리면, 처음엔 동생의 출생에 대해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죠. 우리는 결국 한 가족입니다. 동생을 찾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동생이 그동안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요... 우리 권씨 가문이 제 동생에게 너무 많은 빚을 졌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하늘의 뜻일지도 모릅니다. 동생의 존재는 제 딸의 목숨을 구하기도 했으니까요. 그래서 이분은 제 동생일 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의 은인이기도 합니다!”객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오고 몇몇은 감동에 겨워 눈가를 붉혔다.하지만 백시연의 머릿속은 텅 비어 있었다.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동생이란 말인가? 그리고 왜 저 여자도 가면을 쓰고 있는 걸까?분명 백인서는 종수가 지하실에 가둬뒀고 곧 처리될 운명이 아니었던가.“그리고 이어서 발표하겠습니다!”권욱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권씨 가문의 재산 중 절반을, 이 세상 유일한 동생에게 넘기겠습니다!”“뭐... 뭐라고?”백시연의 온몸은 떨림으로 굳어졌고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갔다.“아니야... 이건 아니야!”“뭐가 아니야?”강소아가 일부러 물었다.“인서야, 어디 아파?”“그게....”“권 대표는 네 직장 상사잖아? 상사가 가족을 찾은 거니 축하해줘야지!”백시연은 차가운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강소아는 낮게 웃음을 흘리며 다른 이들에게 들리지 않게 백시연의 귀에 속삭였다.“그렇게 백인서의 자리가
“그게... 무슨 뜻이에요?”백시연은 침착함을 가장하며 입을 열었지만, 권욱의 눈빛을 똑바로 마주치지 못했다.“이 카드가 제 거 아니면 누구 건데요?”“난 그런 말 한 적은 없는데?”권욱의 입가에는 여유로운 미소가 번졌다.“그냥 문득 우리 아내도 이런 비슷한 카드를 몇 장 가지고 있던 게 떠올랐을 뿐이야. 카드 색깔도 이런 파란색이었고 뒷면에는 대나무 무늬의 홀로그램이 새겨져 있었어. 조씨 가문은 학문을 중시하는 전통을 지닌 집안이라 대나무처럼 강인하고 꿋꿋한 식물을 특별히 아낀다고 하더군. 한번 뒤집어 확인해 볼래?”백시연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가 이내 창백해졌고 손은 카드 위에서 더욱 굳어졌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백시연은 강소아를 찾아갔다.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약속했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면서 묘안석이 그렇게 비싼 줄 몰라서 서둘러 나오느라 준비가 부족해 지금은 이 카드밖에 없다고 둘러댔다.그러고는 억지로 친근한 미소를 띠며 애써 밝은 표정을 지었다.“소아 언니, 우리 자매처럼 친한 사이잖아요. 언니 딸은 곧 제 딸이나 다름없죠! 가원이에게 쓰는 돈이라면 하나도 아깝지 않아요!”강소아는 미소를 머금고 백시연의 손에서 카드를 슬쩍 가져가며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정말? 고마워! 나중에 가원이가 크면 널 두 번째 어머니로 생각할 거야.”백시연의 얼굴 근육이 떨렸지만 억지로 미소를 유지하며 애써 태연한 척했다.“인서야.”강소아는 다정한 눈빛으로 백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요즘 권욱의 공익 프로젝트를 도맡아 관리하고 있다면서? 잘한다는 칭찬이 자자하더라. 몇 번이나 넌 정말 유능한 관리형 인재라고 말했어.”“아... 그래요?”백시연은 속으로 긴장하며 애써 태연한 척했다.“그럼!”강소아가 웃으며 말했다.“그래서 앞으로도 너한테 정말 잘해줄 생각이야.”그 말을 듣자 백시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10억 원을 써서 강소아의 호의를 얻은 거라면 나쁘지 않은 거래라는 생각이 들었다.“소아 아가씨
연회장 한편에서 백시연은 마침내 잠시 자리를 빠져나갈 기회를 잡았다. 화장실에 간다고 둘러대고는 한적한 구석에 숨어 종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무언가 해답을 찾고 싶었다.긴 신호음 끝에야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백시연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왜 이렇게 늦게 받아요?”백시연은 알지 못했다. 종수가 이미 경찰차에 타고 있었고 간신히 경찰의 허락을 받아 전화를 받은 것이라는 사실을.“아저씨! 정말 급해서 전화했어요. 지금 뭐 하고 계셨어요?”종수는 억지로 미소를 짓고 나지막이 속삭였다.“시연아...”뭔가 말을 더하려던 종수는 경찰이 허리춤에 총구를 겨누는 바람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됐어요, 됐다고요!”백시연은 짜증을 내며 말을 끊었다.“딱 한 가지만 물을게요... 아까 소아 아가씨가 저한테 10억 원짜리 선물을 요구했는데, 그거 줘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10억?”“네!”상황을 모르는 백시연은 초조한 듯 말을 더 이어갔다.“그 재수 없는 여자가 과거에 강소아와 무슨 약속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오늘 강소아가 저를 보자마자 자기 딸이 말하기 시작했다면서 선물을 요구하더라고요. 뭐였더라... 묘안석이라고 했던가? 어쨌든 그게 10억 원짜리래요!”종수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상황을 단번에 파악했다. 그건 강소아가 원하는 게 아니라 조순영을 대신해 요구한 것이라는 사실을.세상은 언제나 공평했다. 무엇을 얻었다면 그 대가는 반드시 같은 무게로 돌아오게 마련이었다.종수는 지친 듯 눈을 감고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아저씨? 종수 아저씨!”백시연은 초조한 목소리로 외쳤다.“뭐라도 말 좀 해주세요! 줘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시연아, 이제 너도 어른이야. 이런 일은 네가 직접 판단해야 해.”“제가 알아서 할 수 있었으면, 아저씨께 묻겠어요?”백시연은 이마를 찡그리며 투덜거렸다. 오늘의 종수는 어딘가 낯설고 이상했다.“솔직히... 전 주고 싶지 않아요. 그런 비싼 걸 고작 어린애한테 준다
“뭐라고요? 10억 원이요?”백시연은 깜짝 놀라서 외쳤다.강소아는 슬쩍 백시연을 바라보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왜 그래? 고작 10억 가지고. 게다가 가원이에게 큰 선물을 주겠다고 네가 먼저 약속한 거잖아. 혹시 후회라도 하는 거야?”“그럴 리가!”배윤아가 옆으로 걸어오며 백시연의 어깨를 힘차게 두드렸다.“우리 인서는 분명히 선물을 줄 거야, 그렇지? 너희 둘 사이에 보석 하나쯤은 아무것도 아니잖아.”백시연의 얼굴이 단단히 굳어졌고 입술이 굳게 닫혔다.10억? 조순영에게서 받은 카드에는 고작 10억 원뿐이었다.백인서가 이때까지 이렇게 호화로운 생활을 하면서 이 정도 돈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 걸까?그래서 강소아가 그렇게 말한 것일까?“어머, 저 사람은 육 아가씨와 친하다던 백인서 아니야?”그때, 근처에 있던 여배우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방금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었어?”“예전에... 둘이 약속했나 봐, 백인서가 육 아가씨의 딸에게 선물을 주기로. 그런데 지금은 마음이 바뀐 것 같아!”“정말? 풉! 상류층 자매라는 것도 결국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건가 봐! 백인서는 육 아가씨와 둘도 없는 사이처럼 보였는데. 육 아가씨가 어디를 가든 따라다녔잖아... 이제는 최씨 가문의 아들과 친해지니까, 가식적인 행동도 하기 싫어졌나 봐.”“그 선물이 10억 원짜리라고 하던데... 역시 두 사람 우정은 10억 원도 안 되는 거였어!”백시연의 얼굴은 점점 더 붉게 물들어갔다. 뒤돌아 그들에게 따지려던 찰나, 강소아가 재빠르게 백시연의 손목을 붙잡았다.“됐어, 인서야.”강소아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저 사람들은 평소에도 입만 살았어. 나중에 제대로 혼내 줄 거야.”“그래야죠, 저 사람들은 정섭 엔터테인먼트 소속 연예인이잖아요. 제대로 가르쳐야 해요!”백시연은 화를 내며 말했다.“소아 언니, 저 사람들이 이런 자리에 나온 건 정섭 엔터테인먼트를 대표해서이기도 하지만 결국 언니를 대표하는 것이기도 하잖아요. 저렇게 뒤에서
권욱과 조순영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벅찬 기쁨에 눈물이 터져 나왔고 이내 서로를 끌어안은 채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권 대표님, 사모님, 정말 큰 경사입니다!”의사는 골수 검사 결과를 들고 환히 웃으며 말했다.“드디어 아가씨를 살릴 수 있게 됐습니다!”“맞아요, 정말 기쁜 일이네요.”최지용이 권욱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한심하긴, 그만 울어요!”권욱은 흐느끼면서도 반박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네 딸이 아픈 게 아니니, 넌 당연히... 당연히 이 고통을 알 리가 없지!”최지용은 기가 차 웃으며 권욱의 등을 두 번 세게 두드렸다.백인서는 마음 한편의 큰 짐을 덜어낸 듯 병실 안에 있는 권온유를 바라보며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그나저나.”조순영이 문득 입을 열었다.“백시연의 골수 결과는 어떻게 됐나요?”“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나왔습니다.”의사가 고개를 저었다.“대부분의 지표는 일치했지만 몇 가지 중요한 항목이 맞지 않아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정말 신기한 인연이네요.”최지용이 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쌍둥이라고 해도 신체의 세포가 다를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하네요.”한 명은 강인하고 선량했고 다른 한 명은 어리석고 악랄했다.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자매라도 서로 다른 개성과 운명을 가질 수밖에 없다. 누구도 타인의 성격과 운명을 그대로 복제할 수는 없는 법이다.“그러게 말이야.”권욱은 생각에 잠기며 말했다.“다른 쌍둥이였다는 걸 알게 됐으니 이제 모든 진실을 밝힐 때가 된 것 같네.”...축하 연회 날, 손님들로 붐비는 연회장은 떠들썩하고 활기가 넘쳤다. 오성에서 유명한 대가문은 물론, 연예계의 반 이상이 모인 듯했다.정섭 엔터테인먼트는 업계에서 명성이 자자했기에 대상 수상 경력이 있는 배우들조차 강소아의 초대를 거절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연회장에 들어선 백시연은 평소 TV에서만 보던 유명 여배우들이 서로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광경에 기가 죽고 말았다.백시연은
차 안에서 백인서는 멍하니 창밖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함께 앉아 있던 두 남자는 서로를 힐끔거리기만 할 뿐,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조금 전 나눈 대화로 머릿속이 복잡해진 백인서는 갑작스레 쏟아진 진실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이 권씨 가문의 사생아라니.“네 어머니와 우리 아버지가 꽤 가까운 사이였던 모양이야.”“두 사람 사이에 주고받은 물건이 있었어. 바로 회중시계인데, 그걸 백시연이 가지고 온 거지.”“인서야, 너와 백시연이 쌍둥이 자매란 거 알고 있었어?”백인서는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머리가 깨질 듯 욱신거렸다.어머니가 이렇게 많은 진실을 감추고 있었을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인서야?”최지용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백인서의 손을 잡았다.그러자 앞좌석에 있던 권욱이 뒤를 돌아보며 싸늘한 눈빛으로 최지용을 쏘아보았다.“놔라!”“뭐요?”권욱은 입을 삐죽이며 최지용이 꼭 잡은 백인서의 손을 가리켰다.참 이상했다. 평소에는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매형이 된 순간부터 그가 갑자기 거슬리기 시작했다.“인서는 좀 쉬어야 해!”권욱은 찡그리며 말했다.“손은 왜 자꾸 붙잡고 있는 거야?”최지용은 순간 멍해서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권욱을 쳐다보았다.“무슨 상관이에요?”“난 인서 오빠야! 당연히 내가 상관해야 할 일이지.”“웃기지 좀 마세요!”“너...”“그만 좀 싸울래요?”백인서가 뒤돌아 두 사람을 힐끔 쳐다봤다.머릿속이 이미 복잡할 대로 복잡한데 이 두 사람은 백인서를 편히 둘 생각이 없는 듯했다.최지용과 권욱은 서로를 노려보며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눈싸움을 벌였다.“온유는 아직 병원에 있어요?”백인서가 갑자기 물었다.“응...”“지금 당장 병원으로 가요!”“뭐라고?”권욱은 순간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백인서는 다소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진짜 동생이라면 온유 고모가 되는 거잖아요. 아직 적합한 골수를 찾지 못했다면서요? 제가 한번 해볼게요!”권욱은 잠시
종수는 잠시 망설이더니 천천히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백인서에게 내밀었다.“통화해.”종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최 도련님의 번호는 분명 잘 기억하고 있겠지만, 굳이 조언을 하나 하자면... 먼저 육씨 가문의 아가씨에게 연락하는 게 좋을 거야.”백인서는 종수를 노려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왜냐하면 백인서도 강소아에게 먼저 연락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강소아는 위치 추적 장비를 가지고 있었기에 전화를 걸면 곧바로 이곳이 추적될 터였다.그렇게 되면 종수와 백시연은 피해 갈 수 없을 터였다.“내가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지 않아?”종수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어젯밤, 소아 아가씨가 시연이와 통화했는데 평소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던 아가씨가 시연이와 한참 동안 통화를 하더군. 내가 생각하기론 위치를 추적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가장 컸어.”백인서의 표정이 점점 풀렸다.백인서는 천천히 손을 옮기고 종수가 움직이기 전에 재빨리 몸을 돌려 문 쪽으로 달려갔다. 종수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듯했다.종수는 그저 가만히 백인서를 바라볼 뿐, 뒤쫓으려는 기색은 없었다. 그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들이 스쳐 지나갔다.“백시연을 용서할 거란 기대는 하지 마세요.”백인서는 차갑게 말했다.“아저씨를 용서할 생각도 없어요! 저는 누구를 먼저 해치지 않아요. 그런데 당신들이 먼저 나타나 저를 해치려 들고선 이제 와서 자매애를 말하다니, 우습지도 않나요?”백인서는 말을 마치고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종수는 백인서의 뒷모습을 보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종수의 마음은 더욱 복잡했다.백인서는 저택을 벗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좁은 길을 따라 걸었다. 한참을 걸은 끝에 조용한 길 한가운데에 다다랐다. 지친 몸을 이끌며 주위를 둘러봤지만, 화려한 시내는 여전히 멀어 보였다.오성은 너무 넓었고 모든 곳을 다 가본 게 아니었기에 대략적인 방향만 추정할 수 있을 뿐, 휴대전화도 없어서 난감하기만 했다.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을 닦아내던 순간, 고요한 길
종수는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의 눈빛에는 깊은 씁쓸함이 서려 있었다.종수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백인서는 문밖 풍경을 바라보았다.때마침 오전의 화창한 햇살이 세상을 밝히고 있었다. 나뭇가지가 바람에 살랑거리고 작은 새들이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지저귀는 모습은 한없이 평화로워 보였다.백인서는 무의식적으로 깊은숨을 들이쉬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종수를 바라보았다.“어서 가.”종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인서야, 내가 한 가지 부탁해도 될까?”“뭔데요?”“네 남자 친구에게 시연에 대한 얘기는 하지 말아줬으면 하는데, 그렇게 해줄 수 있을까?”백인서는 미간을 찌푸렸다.종수는 한 걸음 다가서며 간절한 눈빛으로 백인서를 바라보았다.“시연이는 내가 키운 아이야. 내겐 딸이나 다름없는 존재다... 약속할게, 시연이를 데리고 이곳 오성을 떠나 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고.”“결국, 저보고 용서하라는 말이군요?”“인서야, 그 아이는 네 쌍둥이 동생이야. 네가...”종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백인서는 빠르게 식탁 위의 포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날카로운 부분을 종수의 목에 단숨에 들이댔다.종수는 깜짝 놀라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고, 급히 손을 뻗어 백인서의 손목을 잡으려 했지만 이미 목 깊숙이 차가운 위협이 스며든 후였다.백인서가 누르고 있는 곳은 동맥이 위치한 곳이었다.“백인서, 너...”“아저씨.”백인서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제가 조금만 힘을 주면, 아저씨는 여기서 생을 마감할 수도 있어요. 방금 확인했는데, 이 저택은 넓지만, 따로 감시카메라는 없더군요. 제가 아저씨를 죽이고 떠나도 아무도 알지 못할 거란 얘기예요.”종수의 얼굴은 더욱 굳어졌다.“경찰이 너를 추적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흥!”백인서는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전 역추적 능력에는 꽤 자신 있거든요.”“백인서!”“아저씨, 전 사람을 해치고 싶진 않았어. 그런데 당신들은 왜 저를 놓아주지 않는 걸까요?”“전부 시연이 잘못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