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군성은 한동안 형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강서연은 사랑스럽게 막내아들의 머리를 쓰다듬고, 이어서 큰아들에게도 칭찬의 눈길을 보냈다.“군형 말이 맞아.”최연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소정애도 소유를 자신보다 더 아꼈었지. 그리고 소정애도 암에 걸렸으니, 생각해보면 소정애와 성소월의 상황이 사실 크게 다르지 않아.”강서연은 이어서 말했다. “하지만 소정애는 소유가 우리 군형이와 결혼할 거라는 걸 알았을 때, 가진 전부를 털어 소유에게 혼수를 마련해줬어요. 가게 하나에 집 한 채, 우리에게는 별것 아닐 수 있어요. 우정 언니도 그리 만족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그게 소정애가 줄 수 있는 전부였죠.”“소정애는 전부를 내어놓고도 우리에게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았어요.”최연준은 복잡한 눈빛으로 둘째 아들을 바라보았다.“그 사람은 네 엄마의 보석함에 뭐가 있는지, 군형이가 얼마나 많은 주식을 가졌는지조차 묻지 않았어.”그 말을 듣고 모두가 잠시 말을 잃었다.최군성은 눈썹을 찌푸리며 무언가 깨달은 듯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군성아.”잠시 후, 강서연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는 네가 연우와의 결혼을 잠시 미루길 권하고 싶구나.”“뭐라고요?”최군성은 벌떡 일어나며 탁자 위의 찻잔을 거의 넘어뜨릴 뻔했다.“왜... 왜요!”최군성은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 “저와 연우는 이미 결혼을 약속했어요. 이 시점에서 결혼을 미루라고 하면, 연우는 어떻게 생각하겠어요.”“진정해라.”최군형이 최군성의 어깨를 누르며 말했다. “결혼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잠시 미루자는 거지.”“나한테 손대지 마!”“최군성!”최군형은 냉정한 표정으로 말했다.“지금 우리는 성 아줌마가 정말 뭘 하려는지 알아내야 해. 그게 분명해지고 나서 결혼해도 늦지 않아.”“알아낼 게 뭐가 있어요?”최군성은 소리쳤다.“그냥 돈을 좀 원할 뿐이잖아요. 우리에게 돈이 없나요? 왜 사람을 보면 재산을 노리고 권력을 탐한다고만 생각하세요? 좋은 쪽으로 생각할 수는 없나
최군형은 급히 휴대전화를 꺼내어 강소아에게 전화를 걸려다 멈췄다. 몇 마디 말로는 상황을 제대로 전달할 수 없을 것 같았고 오히려 강소아를 걱정시킬까 염려되었다.잠시 고민하던 끝에 더 적합한 인물이 떠올랐다.“최지용.” 최군형은 최지용에게 전화를 걸며 말했다. “지금 당장 육씨 집안으로 가봐요. 군성이의 감정이 많이 불안정해요. 형이 배인서를 다른 곳으로 데려가는 게 좋겠어요.”“뭐라고?”전화 너머의 사람은 어리둥절했다.최군형은 더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 해요!”“그...그래!”최지용은 최군형의 부탁을 받아들인 후 서둘러 육씨 집안으로 향했다.하지만 도착했을 때, 그는 자신이 이미 늦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당에서는 말다툼 소리가 들려왔다:“도대체 무슨 말이야?!”“오지랖 좀 그만 부려! 앞으로 나와 연우, 그리고 성 아줌마한테서 떨어져! 우리는 너한테 도둑 취급받을 이유가 없다고!”“배인서, 말 좀 해봐! 도대체 무슨 속셈이야?”최지용은 잠시 멍해졌다. 그건 최군성의 큰 목소리 때문이었다. 최군성은 격분하여 배인서에게 소리치고 있었고, 배인서는 옆에 서서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최지용은 마음이 점점 무거워졌다.가끔 그도 배인서의 이런 성격이 정말 답답하게 느껴졌다. 다른 사람이 아무리 감정이 격앙되거나 화가 나도, 배인서는 항상 아무런 감정 없이 그저 무표정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마치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사람처럼.배인서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나무 인형 같았다. 유일하게 그녀의 감정을 자극할 수 있는 것은 강소아, 육경섭, 그리고 임우정을 만났을 때뿐이었다.그러나...최지용은 최군성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배인서의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파졌다. 최지용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배인서 앞을 가로막았다. 배인서는 최지용이 갑자기 자신을 뒤로 끌어당기는 것에 놀라 멈칫했다.배인서는 키가 작아 최지용의 어깨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또 마르고 약한 체격으로 최지용이 앞
최군성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답답함이 가슴을 옥죄어 숨쉬기조차 어려웠고 가슴속엔 오직 괴로움만이 자리했다. 최지용은 최군성보다 나이가 더 많았고 군대에 있었던 만큼 엄숙한 분위기와 강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어 최군성은 감히 함부로 굴지 못했다.세상은 마치 한순간에 고요해진 것 같았다.시간이 일분일초 흐르고 있었다. 그 매 순간이 침묵 속에서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배인서의 심장은 쿵쾅거렸다. 배인서는 최지용까지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최군성의 말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하고 싶은 말을 충분히 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자신을 놔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최지용이 이 일에 끼어들게 되어 배인서는 매우 곤란하게 되었다. 배인서는 손을 뻗어 최지용의 소매를 잡으려다 갑자기 최군성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 지금 이 여자 편을 드는 거예요?”“군성아...”“형! 이 여자를 대신해 나랑 대적하려는 거예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나는 배인서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야!” 최지용은 거의 소리치듯이 외쳤다.최군성과 배인서는 동시에 얼어붙었다. 최지용 자신의 목소리에 놀랐다. 하지만 이미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었다.최지용은 아예 마음을 굳히고 갑자기 배인서의 손을 잡아채며 최군성을 똑바로 바라보며 분명하게 말했다. “배인서의 성격이 좀 별나기 하지만 네가 말하는 그런 불순한 의도를 가진 사람은 절대 아니야. 많은 일에 대해 일일이 설명하지 않았다고 해서 배인서가 비겁하거나 나약한 게 아니야. 군성아, 네 충동적인 성격 좀 고쳐. 그리고 생각 정리되면 배인서에게 사과해. “배인서는 멍하니 최지용을 바라보며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가는 느낌이었다. 최지용에게 꼭 쥐어진 배인서의 손은 뜨겁게 느껴졌다. 최지용은 배인서의 손을 잡고 다른 곳으로 이끌었고 배인서는 마치 꼭두각시처럼 그의 뒤를 따라갔다. 갑자기 멀리서 누군가의 그림자가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배인서는 순간 소스라치게
육연우는 두 손으로 옷자락을 쥐고 계속 문지르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강소아는 육연우의 표정을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육연우에게 말 못 할 사정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한참 후에야, 육연우는 머리를 들어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우리 엄마를 돌봐줄 사람이 필요해요.”“그게 전부야?”강소아는 한숨을 쉬었다.“연우야, 다시 생각해 봐... 엄마를 돌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너 자신의 커리어를 지키는 것도 중요해.”“언니, 하지만 저희 엄마예요.”육연우는 강소아를 바라보며 큰 눈에 슬픔이 스쳐 지나갔다.“엄마는 수술 후로 계속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제가 곁을 떠날 수가 없어요. 제가 계속 돌봐줘야 해요.”“너희 엄마... 상태가 그렇게 나쁜 거야?”육연우는 고개를 저었다.강소아의 마음에 의혹이 생겼다.강소아는 문득 그날 배인서가 성소월에 관해 이야기하며, ‘건강하게 잘 지내, 전혀 아픈 사람 같지 않아’라고 차갑게 웃으며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그런데 왜 육연우는 성 아줌마에 대해 몸이 아프다고 하는 걸까?강소아는 이마를 찌푸렸다. 아마도 각자 병의 심각성을 다르게 받아들여서 생긴 차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강소아는 마음을 가다듬고 계속 설득했다.“연우야, 집에 간호사도 있고 요양사도 있잖아? 그분들이 성 아줌마를 돌보는 데 문제없을 거야. 만약 지금 돌봐주는 분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몇 명 더 교체해 보는 것도 괜찮아.”“언니, 간호사나 요양사 문제가 아니에요.”육연우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우리 엄마는 지금 저를 한시도 떠나지 않으려고 해요. 그리고 저한테 자꾸 여러 가지 요구를 하는데 제가 해내지 못하면... 엄마는 화를 내세요. ““저도 어쩔 수 없어서, 엄마가 시키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어요.”“언니, 언니를 키워주신 어머니도 암에 걸리셨고 몸이 좋지 않으셨잖아요... 만약 그분이 언니에게 모든 걸 내려놓고 곁에 있으라고 하셨다면, 거절할 수 있었겠어요?”강소아는 순간 멍하니 있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강소
“네.”육연우는 진심 어린 표정으로 강소아의 손을 꼭 잡았다.“언니, 정말 미안해... 나도 같이 이번 새 프로젝트들을 해야 했는데...”“너랑 나 사이에 그런 말 하지 마.”강소아는 미소를 지었다.원래는 공사 도면을 다 그려 놓고 육연우에게 비용 계산을 부탁하려 했었다.그러나 말을 꺼내려다 결국 참아버렸다. 육연우는 이미 사직했기 때문에 더는 육자 그룹의 직원이 아니었다.그리고 육자 그룹의 공사 도면과 비용 계산은 회사 내부 기밀 사항에 속했다.아무리 육연우를 믿는다 하더라도, 이런 일은 경계를 분명히 해야 하는 법이었다.*집에 돌아온 육연우는 소파에 앉아 움직이지 않는 성소월을 발견했다. 육연우는 마음이 아팠다.성소월은 퇴원 후 대부분의 시간을 소파에 앉아 넓은 챙이 달린 모자를 쓰고 지냈다. 모자를 쓰지 않을 땐 후드가 달린 옷을 입고 후드를 뒤집어쓰곤 했다.육연우는 엄마가 왜 이렇게 변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엄마에게 조금이라도 다가가려 하면 오히려 호되게 꾸짖기 일쑤였다.예전엔 늘 안아주던 엄마가 이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뒤로 엄마는 예전의 성소월이 아니었다.“엄마, 저 왔어요.”육연우는 마음을 다잡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엄마, 저 사직했어요.”“그래?”성소월은 눈망울이 약간 움직였다.“역시 내 말대로 사직했구나?”“네.”성소월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사직은 그저 육연우를 길들이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육연우가 자기 말을 따르는지 보기 위한 시험이었는데 이제 보니 단순히 말을 듣는 게 아니라 아주 잘 따르고 있었다.“연우야, 정말 미안해...”성소월은 슬픔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나만 아니었어도 넌 더 높이, 더 멀리 날아갈 수 있었을 텐데.”“엄마,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집에 남아서 엄마를 돌보는 건 제 기쁜 마음에서 한 거예요.”“그래, 그러면 됐다.”성소월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 “오늘 너희 사촌언니가 너한테 뭔가 준 건 없니
“아니야, 그런 적 없어.”성소월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가 다시 눈을 들어 가볍게 미소 지었다.“연우야, 엄마가 수술 후 몸이 좀 불편해져서 다른 사람의 손길이 부담스러워졌어... 이해할 수 있겠니?”“엄마?”육연우는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어디가 불편한 건데요? 제가 언니와 형부에게 도움을 청할게요...”“그럴 필요 없어.”성소월은 육연우의 손을 붙잡았다. 육연우는 잠시 멈칫하며 엄마의 손이 이전처럼 딱딱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전의 성소월은 병을 앓아 뼈만 앙상하게 남아 손도 마치 마른 나뭇가지처럼 거칠었었다.그런데 지금은...“연우야, 엄마가 너에게 할 말이 있어.”육연우는 정신을 차리고 조용히 엄마를 바라보았다.“너희 삼촌 집의 그 배인서라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야?”“엄마, 왜 갑자기 그걸 물으세요?”“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 “잠시 고민하던 육연우는 조용히 대답했다. “아직도 지난번에 엄마가 서재에 들어가는 걸 막고 다투었던 일 때문에 그러세요? 엄마, 아마 오해하신 것 같아요. 그 사람은 성격이 차갑고 낯을 가리긴 하지만 사실 마음씨는 아주 따뜻한 사람이에요.”“그래?”성소월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연우야, 넌 아직 어려서 사람 마음을 꿰뚫어 보지 못하는구나.”“그게...”“이런 사람일수록 더 잘 위장해. '짖지 않는 개가 더 무섭다'는 말, 들어본 적 있지?”육연우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엄마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러니까, 그 배인서와는 너무 가깝게 지내지 마라.”성소월은 육연우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배인서를 반드시 제거해야 너와 군성이가 행복하게 살 수 있어.”“엄마,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육연우는 온몸이 떨리며 물었다.성소월은 그 말을 끝으로 고개를 숙이며 다시 소심한 가정주부의 모습으로 돌아갔다.하지만 방금 그 순간, 성소월이 배인서를 제거하라고 말했을 때 육연우는 엄마의 눈에서 음산한 빛이 번쩍이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육연우의 심
“아... 네.” 육연우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예전에는 우리가 컴퓨터를 살 형편이 안 됐었잖아요. 이건 언니가 선물해 준 거예요.”“왜 예전에는 본 적이 없었지?”“엄마.” 육연우는 엄마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엄마가 예전에 아프셨잖아요. 그래서 이런 건 신경 쓰지 않으셨을 거예요. 게다가 이 컴퓨터는 주로 사무실에서만 썼어요. 집에 거의 가져오지 않았죠. 이제 제가 사직했으니...”“그렇구나.” 성소월은 잠시 침묵하다가 연우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내가 한 번 써봐도 될까?”육연우는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연우야, 사실... 엄마도 새로운 걸 배우고 싶어. 예전에는 계속 아파서 너에게 짐이 되었던 게 늘 마음에 걸렸거든...”“하지만 이제 몸도 점점 나아지고 새로운 걸 배울 힘도 생겼어. 연우야, 엄마가 집에서 심심할 때 인터넷 사용법 좀 가르쳐 줄래?”“물론이죠!”엄마의 이런 부탁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게다가 육연우는 성소월의 어떤 부탁도 거절할 수 없었다.“연우야, 엄마가 이걸 배우면 나중에 인터넷으로 작은 사업이라도 해볼게.”성소월은 육연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러면... 너에게 조금이나마 부담을 덜어줄 수 있을 거야.”육연우의 코끝이 찡해지고 엄마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사실 엄마는 변하지 않았다. 딸을 생각하는 그 마음은 여전히 예전 그대로였다.육연우는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엄마 앞에서 비밀번호를 입력한 뒤 사용 방법을 설명해 주었다.하지만 육연우 뒤에 서 있던 성소월의 눈이 살짝 가늘어지며 그 눈빛 속에 차가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육자 그룹의 프로젝트는 곧 입찰 단계에 접어들게 되었다.그동안 강소아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이번 프로젝트는 강소아가 처음으로 책임을 맡은 일이었기 때문에 기획부터 디자인 개발, 자금 준비, 초기 작업까지...어떤 사소한 부분도 강소아는 직접 챙겼다.어느 한 단계라도 뒤처지면 전체 프로젝트의 진행이 지연될 수 있었기 때
이번 ‘야근'은 깊은 밤까지 이어졌다.강소아는 간신히 소파에서 일어나 바닥에 흩어진 옷을 주워들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아팠다.“내가 도와줄게.”최군형이 뒤에서 강소아를 부드럽게 감싸안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강소아는 최군형의 뜨거운 가슴이 등에 닿는 것을 느꼈다. 그의 심장 박동이 강소아의 마음 깊이 울려 퍼졌다. 하지만 강소아는 더 이상 최군형의 도움을 받지 않기로 하고 서둘러 몸을 빼며 허둥지둥 옷을 입었다. 최군형은 웃으며 옷을 입고 습관적으로 바지 주머니를 뒤졌지만 이미 담배는 다 떨어져 있었다.이제야 아버지가 예전에 '담뱃값'을 벌기 위해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강소아는 마지막 자료를 겨우 확인한 후에야 최군형과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다음 날 두 사람은 거의 여덟 시가 되어 깨어났고 결국 휴대전화 벨 소리에 잠에서 깨게 되었다. “네 전화야?”“아니, 당신 전화 같은데요...”“응?”두 사람은 동시에 일어나 휴대전화가 동시에 진동하는 것을 알아챘다. 강소아의 비서는 말했다. “작은 대표님, 빨리 뉴스 보세요! 큰일 났어요!”최군형의 비서도 말했다. “최 대표님, 그... 그 육자 그룹의 프로젝트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아요. 빨리 뉴스 보세요!”두 사람은 갑자기 잠이 확 깨며 휴대전화를 켰고 수많은 뉴스 헤드라인이 팝업으로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어느 부동산 회사가 갑작스럽게 기자 회견을 열고 최신 아파트 정보를 발표했다.그런데 그 건물의 디자인, 외관과 내부는 물론이고 심지어 사용된 재료와 문구까지 강소아가 맡은 프로젝트와 똑같았다.“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강소아가 회사에 도착했을 때 이사회 멤버들은 이미 모두 모여 있었다.이사회에는 육경섭과 함께 회사를 세운 사람들도 있었고 그와 반대편에 선 사람들도 있었다.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모두 복잡한 눈빛으로 강소아를 바라보며 회의실은 죽은 듯한 정적에 휩싸였다.“작은 대표님” 마침내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당신의 능력과
배현진은 마치 자신의 영혼이 몸을 떠나 허공을 떠도는 듯한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그는 허공에 떠 있는 듯 응급실의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사들이 급히 자신을 응급처치하는 모습과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로 누워 있는 자기 육체를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에서 해방된 듯한 감각이 그를 감쌌다.의식은 또렷했지만, 살아남겠다는 의지는 조금도 없었다.그날, 배현진은 오강호와 싸웠다.송윤희와 이혼 후 더 나락으로 떨어진 오강호는 그날 술집에서 술에 취해 있던 배현진과 우연히 마주쳤다.말다툼은 곧 몸싸움으로 번졌고 오강호는 배현진이 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자, 송윤지를 언급하며 조롱을 쏟아냈다.배현진은 격분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먼저 손을 댄 쪽이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오강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배현진은 오강호에게 몇 대 얻어맞고는 응급실로 실려 가고 말았다.지금도 배현진의 귀에는 오강호의 말이 메아리처럼 맴돌고 있었다.“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더니 별수 없군. 여자를 제대로 붙잡지도 못하고 결국 임지강에게 뺏겼다지? 하하하...”“배 도련님, 혹시 속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임지강이 송윤지에게 접근한 건 처음부터 다 계획된 거였을 거야!”“너 같은 쓰레기가 무슨 남자야. 약혼녀도 남에게 빼앗기고 말이야.”배현진의 가슴 한구석이 세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강한 힘이 그의 영혼을 다시 육체로 끌어당겼다.옆에서 심전도가 삐 울리더니 직선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의사들은 제세동기를 정리하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환자가 심장박동을 회복했습니다. 약물을 투여하세요.”배현진의 꼭 감겼던 두 눈이 살짝 떨렸다.그를 때린 사람이 임지강과 송윤지의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걸까?혹시, 그 둘 사이에 정말로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그는 알아내야 했다.죽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자신이 겪은 모든 수모를 반드시 임지강에게 똑같이 되돌려주겠다고 다짐했다....
임지강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제가 누나랑 형부께 누를 끼쳤네요.”“그렇게 생각하지 마.”임우정은 부드럽게 말했다.“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은 결국 운명 같은 거야. 따지고 보면 이 일의 원인은 나야. 내가 처음에 송윤지를 현진이에게 소개하지 말아야 했어.”“저 때문에 누나가 곤란해진 거예요.”임지강은 진지하게 말했다.“솔직히 말하면, 이번에 제가 조금 비겁한 방법을 썼어요. 누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배씨 가문을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배현진이 은행에 진 빚은...”임지강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임우정이 임지강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경원이와 수정이는 모두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야.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빚진 돈은 은행에 분할해서 납부할 거야.”“그럼 이자는 받지 않을게요.”임우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안도와 약간의 무력감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배현진에 대해서는.”임지강은 계속해서 말했다.“저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윤지를 괴롭힐 때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예상했어야죠. 지금 정신 상태가 좋지 않다거나, 심지어 정말로 정신이 나갔다 해도 그건 자업자득이에요.”“됐어, 봐줄 줄도 알아야지. 너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잖아...”임지강은 고개를 들어 임우정을 바라봤고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친 뒤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무슨 냄새예요?”갑자기 집 안에서 송윤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지강은 놀라며 황급히 돌아섰다.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송윤지가 급히 주방으로 달려 들어왔다.임지강도 곧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아이고, 이거 다 태웠네요!”송윤지는 놀라 외치며 불을 껐다. 그런 다음 행주로 냄비 뚜껑을 열었다.“이건 뭐예요?”“제가 만든 당근 소고기 스튜예요...”임지강은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송윤지에서 한번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는데 결과는 역시나 이 모양이었다.“물 안 넣었어요?”송윤지는 코를 찡그리며 물었다.“당근
임지강은 송윤지의 세계에 다시 한번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다.임지강은 이제 송윤지의 아파트에서 종종 머물렀다. 겉으로는 송윤지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라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은 간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송윤지는 몇 번 거절하려 했지만, 임지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국 그냥 놔두기로 했다.임지강은 비록 소파에서 자야 했지만, 그것조차도 행복했다.임지강은 언젠가는 송윤지의 곁에서 함께 아침을 맞이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임지강은 대부분의 시간을 송윤지와 함께 보내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그는 세 끼를 직접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송윤지가 과거에 자신을 위해 했던 일들이 얼마나 힘들고 정성이 담긴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고 과거 송윤지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다.가끔 송윤지는 집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임지강의 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꿈이 자꾸 송윤지를 괴롭혔지만, 송윤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임조강이 곁에 있으면 훨씬 마음이 놓인다는 것을.임지강은 배현진과는 완전히 달랐다.배현진은 늘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앞으로’ 같은 말로 막연한 미래를 약속하곤 했다.반면, 임지강은 ‘내가 있잖아’, ‘나한테 맡겨’, ‘두려워하지 마’ 같은 말로 송윤지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임지강의 말 속에는 사랑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었지만, 행동 하나하나에서 송윤지를 얼마나 아끼는지 충분히 느껴졌다.그날은 송윤지가 쉬는 날이었다. 임지강은 주방에서 당근과 소고기를 넣은 스튜를 끓이고 있었다.이 요리는 임지강이 새로 배운 것이었다. 임지강은 요리의 모든 과정을 조심스럽게 진행했고 조미료를 넣는 것도 마치 화학 실험을 하듯 정밀하게 측정했다.잠시 후, 요리의 향기가 퍼져 나갔고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냄비 뚜껑을 덮고 불을 약하게 조절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그가 문을 열자, 임우정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임우정은 복잡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누나?”
배현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임지강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소중히 여겨야 할 때 외면했으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임지강은 손가락으로 배현진의 코앞을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다시 내 여자를 건드리면, 소피아와 함께 감옥에서 만나게 될 거야.”임지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갔다.방 안에는 이제 배현진과 배윤아 두 남매만 남아 있었다.배현진은 멍하니 바닥에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후회와 절망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배현진의 모습을 보며 배윤아는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오빠...”배윤아는 조심스럽게 배현진을 부축하며 말했다.“사실, 오빠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진작에 알아봐야 했어. 소피아가 없었다면, 우리 집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배현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는 벽에 기대어 머리를 부딪치며 자신을책망했다.“오빠.”배윤아는 애써 배현진의 마음을 다독이며 말했다.“내 생각엔 임지강 씨는 오빠에게 교훈을 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진심으로 오빠를 망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닐 거야. 이미 송윤지의 복수를 한 거나 다름없으니, 더는 오빠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게다가 다행히도 오빠가 진 빚은 임지강 씨의 은행에서 대출받은 거니까, 그에게 시간을 좀 더 달라고 부탁하면 좀 봐주지 않을까?”“봐준다고?”백약곡의 쓴웃음은 공허하고 힘이 없었다.“지금 나는 아무것도 없어. 완전히 끝났어...”“오빠에겐 아직 나랑 부모님이 있잖아!”배윤아는 울먹이며 말했다.“우리는 여전히 가족이야! 오빠,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잘못했다고 해. 오빠가 진 빚은 부모님이 분명 해결하려고 하실 거야.”“내가 은행에 진 빚은 수천억이라고.”배현진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게다가 이 모든 걸 뒤에서 조종한 사람은 임지강이야. 그 사람은 절대 날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오빠...”배윤아가 더 말을 이어가려 했
“현진 씨, 제발 내 말 좀 들어봐!”소피아는 두려움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이렇게 한 건... 다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은 모든 걸 여동생에게 넘겼잖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랑 제임스는? 당신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여기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다면, 제임스를 어떻게 키우겠어?”“그만해!”배현진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소리쳤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소피아는 오직 자신과 제임스의 미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소피아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배현진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대하려 했던 건 소피아를 사랑해서지, 빚진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현진 씨...”소피아는 눈물을 흘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내가 잘못한 거 알아. 하지만 정말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이 나를 인정해 주길 바랐고 우리가 순조롭게 결혼하길 원했을 뿐이야. 그래서 내가...”“네가 원하는 건, 배씨 가문을 차지하는 거잖아?”“당신...”“윤아는 내 친동생이야!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내 등 뒤에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어?”배현진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소피아는 배현진의 외침에 놀라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소리쳤다.“배현진! 앞으로 네 여동생이랑 살 거야? 아니면 나랑 살 거야?”그 말에 배현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소피아의 뺨을 세게 때리며 속에 쌓여 있던 모든 후회와 분노를 폭발시켰다.소피아는 비명을 지르며 배현진의 얼굴을 긁으려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몸싸움을 벌이며 뒤엉켰고 배현진의 얼굴에는 소피아에게 긁힌 상처가 선명하게 남았다.그때, 경찰이 방으로 들이닥쳐 두 사람을 강제로 떼어놓았다. 차가운 수갑이 소피아의 손목에 채워졌다.배현진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소피아가 경찰에게 끌려 나가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도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 그의 존재는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온몸이 퍼즐 조각처럼 부서져 다시는 하나로
임지강은 대출 증명서를 꺼내 들었다. 서류에 선명한 배현진의 서명과 붉게 찍힌 도장은 마치 피로 얼룩진 조롱처럼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했다.“제 생각엔,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조 회장이 말했다.“지강아, 빨리 돈을 배 도련님 계좌로 송금하고 그 두 광산을 사들여라. 그리고 배 도련님,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임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너그럽게 대해주고 있는데, 도련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말도 안 되죠. 흥! 약속을 어기는 일은 배씨 가문의 품격에도 맞지 않잖아요, 안 그래요?”배현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후회와 절망이 그의 마음을 홍수처럼 휩쓸고 있었다.“배씨 가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오늘 제가 데려온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배 도련님도 보고 싶었을 겁니다.”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룸의 문이 열리며 배윤아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배현진은 배윤아를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놀라움은 곧 걱정과 초조함으로 변했다. 배현진은 재빨리 배윤아에게 다가가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윤아야, 괜찮아?”“나 괜찮아.”배윤아는 눈가가 붉어졌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 고작 사흘뿐이었지만, 그 시간은 마치 몇 세기가 흐른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그러나 배윤아의 시선이 소피아를 향하는 순간, 증오가 담긴 눈빛이 소피아를 사로잡았다. 배윤아는 이를 악물며 소피아를 가리켰다.“오빠, 바로 저 여자가 사람을 시켜 날 해친 거야!”“뭐라고?”배현진은 몸을 떨며 경악했다.소피아는 그제야 충격에서 벗어나 발악하듯 배현진 곁으로 뛰어들며 변명했다.“아니야! 내가 아니야! 윤아야, 너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네가 사라진 동안, 난 네 소식을 찾으려고 정말 애를 썼어. 난 정말로...”“거짓말하지 마세요!”배윤아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소피아 씨가 사람을 시켜 날 폭행하고 내 물건을 훔쳐 간 건 분명해요! 그리고 소피아 씨가 가장 원했던 게 배씨
“조 회장님, 이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요!”소피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항의했다.“우리가 그 광산을 사느라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지 아시잖아요. 대박을 기대했는데, 지금 헐값에 팔면 원금도 못 건질 뿐만 아니라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고요. 게다가 그 돈은 전부 은행 대출입니다.”“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나요?”조 회장은 다 피운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이건 아가씨가 주도한 일 아닌가요? 제 기억으로는 배 도련님이 처음엔 그 두 광산에 별 관심이 없으셨던 걸로 압니다만.”“조 회장님...”“배 도련님.”조 회장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말했다.“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오히려 추악한 수단으로 올라선 여자의 말을 믿었으니, 그 손해는 당연히 본인이 책임져야죠.”“지금 말 다했어요?”소피아는 벌떡 일어나며 격분해 외쳤다.조 회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짓누르듯 바라보았다. 그때 주변에 있던 부하들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섰고 소피아의 기세는 단숨에 꺾였다.“배 도련님, 매입자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배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 회장은 부하에게 매입자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뒤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본 배현진은 그만 충격에 말을 잃고 말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임지강과 송윤지였다.배현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다 테이블을 건드렸고 접시와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임지강은 송윤지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를 위해 의자를 빼주고 임지강도 옆에 나란히 앉았다.“배 도련님, 아는 분이시죠?”조 회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제가 따로 소개해 드려야 할까요?”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배 도련님.”임지강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제가 듣기론 도련님이 투자하신 두 광산이 이제 3200억밖에 안 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3400억에 사들이겠습니다. 도련님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도
화면에 띄워진 데이터는 충격 그 자체였다.두 사람은 멍하니 눈을 크게 뜬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친 듯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배현진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소피아 역시 어찌 된 일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소피아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우리가 1조를 들여 산 두 광산이라고! 무려 1조라고!”배현진이 소리쳤다.“가격이 분명 오를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지금 3200억으로 폭락한 거냐고!”“나도... 나도 모르겠어...”소피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 광산의 시장 가격을 철저히 조사했었단 말이야. 그 두 광산은 운산시에 있는데, 지금 운산시 광산 가격이 상승세잖아. 분명 손해 볼 투자가 아니었어.”“하지만 지금 상황 좀 봐.”배현진은 입술을 떨며 소리쳤다. 그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소피아, 그 1조는 전부 은행 대출금이야. 지금 난 은행에 수천억 빚을 졌고 이자도 엄청나다고.”“현진 씨, 진정해.”소피아는 급히 배현진을 달래며 말했다.“이 일은 조 회장이 중간에서 소개한 거래잖아. 조 회장에게 물어보면 모든 게 밝혀질 거야. 내가 직접 물어볼게.”...배현진과 소피아는 약속된 시간보다 훨씬 일찍 호텔 룸에서 조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배현진은 오늘의 만남을 위해 호텔 매니저에게 최고의 음식을 준비하도록 특별히 부탁했다. 테이블 위에는 호텔의 대표 메뉴들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다.조 회장이 방에 들어서자, 배현진은 그가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조 회장의 눈빛은 마치 코너에 몰린 쥐를 노리는 고양이 같았고 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쥐가 된 듯한 압박감에 사로잡혔다.“두 분이 너무 과하게 준비하셨네요.”조 회장은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위의 술잔을 힐끗 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이렇게까지 준비하실 필요는 없었어요. 나이
이른 아침, 소피아는 천천히 눈을 뜨며 옆에 누운 남자의 맨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배현진의 입술에 살며시 입맞춤했다.배현진은 그녀의 키스에 미소로 답하며 부드럽게 눈을 떴다.하룻밤의 열정에 지친 두 사람의 얼굴에는 희미한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제임스는 아직 안 깨어났어?”“이 시간엔 절대 안 일어나요.”소피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 위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그럼... 우리 한 번 더?”“아니.”배현진은 소피아의 손을 잡아 입술에 가져다 댄 뒤 가볍게 입맞춤하며 말했다.그는 정말로 피곤했다. 소피아는 도대체 어떻게 매일 밤 이렇게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는 걸까?소피아는 송윤지와 완전히 달랐다. 송윤지는 늘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그가 바라볼 때만 순수한 미소를 띠곤 했다.배현진은 문득 송윤지를 떠올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그는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했다.“자기야, 무슨 일이야?”“아, 별거 아니야.”배현진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맞다, 나 현진 씨랑 상의할 게 있어.”소피아는 배현진의 얼굴을 자신을 향해 돌리며 말했다.“제임스도 점점 크고 있어. 가정교사를 불러서 집에서만 공부시키는 건 이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또래 아이들과 학교에서 어울리는 게 필요하지 않겠어? 어쨌든 앞으로는 제임스가 배씨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을 사람이 될 테니까, 그렇지?”“음...”배현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소피아를 바라보았다.“그런데 장래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부모님이 이미 가업을 전부 윤아에게 넘겼잖아.”소피아는 미소를 띠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흡족해했다.배윤아 같은 풋내기는 소피아와 겨룰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배윤아를 기절시켜 조 회장의 카지노 앞에 던져 놓았기 때문이다.조 회장이 배윤아를 데려갔으니, 모두가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범인이 조 회장과 임지강이라고 믿을 것이다.혹시 조 회장이 색욕에 휘둘리는 사람이라면 더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