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천천히 흘러갔다. 호정길이 김자옥을 끌고 방으로 들어간 지 고작 5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최연준과 강서연에게는 다섯 세기가 지난 것처럼 느껴졌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이 상황을 보고하러 달려왔다.“범인이 인질을 창문 근처에 묶어놓았습니다. 그의 손에는 총과 칼이 있어 강제로 진입하기 어렵습니다.”“방의 시야가 좋지 않나요?”강서연은 초조한 마음에 물었다.“시야는 좋습니다만...” 경찰이 잠시 머뭇거렸다. “범인이 교묘하게도 김 회장을 창문 앞에 두었기 때문에 우리 저격수가 맞은편 건물에서 총을 쏘면 인질이 쉽게 다칠 수 있습니다.”“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강서연은 참아왔던 눈물을 결국 흘리고 말았다.최연준은 정신을 강하게 붙들어 보려 했지만, 지금 자신의 친어머니가 인질로 잡혀 있는 상황에서 아무리 자제하려 해도 완전히 침착해질 수는 없었다.최연준은 갑자기 손을 들어 경호원에게서 총을 빼앗아 들었다. 그의 이마에는 분노로 인한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다.“연준 씨!”강서연은 그의 손을 꽉 잡고 놓지 않으려 애썼다. 최연준은 아내의 간절한 눈빛과 마주치며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침착하세요...”강서연은 최연준을 껴안으며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기회를 기다려야 해요. 무리하게 밀어붙였다가는 어머니가 다칠 거예요.”“그래요, 아버지.”최군형은 최연준의 어깨를 붙잡고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와 엄마는 뒤로 물러나세요. 여기는 저에게 맡기세요.”강소아는 사람들에게 호텔의 전체 설계도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곧 두꺼운 설계도가 눈앞에 쌓였다. 강소아는 건물 구조를 연구하며 눈썹을 잔뜩 찌푸렸고 콧잔등에는 가느다란 땀방울이 맺혔다. 심장은 쿵쿵 뛰고 있었지만, 복잡한 데이터와 선들 속에서 돌파구를 찾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최군형도 함께 도면을 살펴보며, 두 사람은 연필로 도면에 표시하기 시작했다.“이 위치... 그리고 저기...”“군형 씨, 맞은편 건물의 이 방향, 여기가 좋은 지점인 것 같아요.”“하
최지용은 밤의 어둠을 이용해 몰래 맞은편 건물로 이동했다. 저격용 총을 설치하고 이어폰을 통해 맞은편과 연락을 주고받았다.경찰도 다른 두 명의 저격수를 보내 여러 각도에서 함께 호흡을 맞추고 있었다.“군형, 내 위치에서 보면 할머니는 일단 위험해 보이지 않아. 머리 상처는 이미 붕대로 감싸져 있고 호정길은 김 할머니 옆에 앉아서 권총과 단검을 할머니에게 겨누고 있어. 그 옆에 있는 호세연도 계속 김 할머니 옆에 서 있어.”“지금 총을 쏠 수 있나요?”“아직은 안 돼.” 최지용은 침착하게 속삭였다. “호정길이 사람들을 철저히 감시하고 있어. 주의를 흐트러뜨려야 해. 할머니와의 거리가 세 걸음 정도만 벌어지면 명중시킬 수 있어.”강소아는 천천히 깊이 숨을 들이마시면서 시간을 확인했다. 이미 한 시간이 넘게 흘러 있었다.강소아가 이 방의 카드 키를 만들 때 이미 방 안에 있는 모든 음식과 음료를 치워달라고 지시했었다.방 안의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극도로 긴장한 상태에서 한 시간 넘게 아무것도 먹지 않고 버티는 건 꽤 힘든 일이었다.이 방법이 김자옥에게 좋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강소아는 심호흡을 한 후, 문을 조심스레 두드렸다.“누구야?!”“아저씨, 저희 할머니가... 약을 드셔야 해요.”“약을 먹어야 한다고?” 방 안에서 호정길의 비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할망구는 정신이 멀쩡해. 지금 나를 노려보고 있잖아! 무슨 약을 먹어야 한다는 거야?”“아저씨, 아마 모르실 텐데 저희 할머니께서는 노인성 질환이 있어요.” 강소아는 차분하게 말했다. “약을 제때 드시지 않으면 발작이 올 수도 있어요. 그때가 되면 누구도 책임질 수 없을 겁니다.”“아저씨, 저희 아버지가 지금 돈을 모으고 있어요... 육씨 집안의 자금 유동성이 많아 단시간 내에 1조 원을 모으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아요.”방 안은 조용해졌다. 그때 최군형의 이어폰을 통해 최지용의 목소리가 들렸다. “호정길이 약간 동요하는 것 같아.”최군형은
최씨 집안의 사람들이 곧바로 유로화를 가득 채운 상자를 가져왔다. 강소아는 직접 종업원으로 변장해 위험을 무릅쓰고 물건을 전달하며 호정길과 대면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이 계획은 곧바로 최군형에게 거절당했다.그 순간, 강소아의 귀에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네가 갈 필요 없어, 내가 갈게.”“인서야, 너...”“아까 연회장에서 김 할머니를 구하지 못한 건 내가 너무 늦었기 때문이야.” 배인서는 강소아를 잠깐 바라보다가 야구 모자의 챙을 더 깊숙이 눌러쓰며 말했다. “이번에는 안심해, 내가 알아서 상황을 살필게.”“안 돼!” 강소아는 배인서를 붙들고 애원하듯 말했다. “어떻게 너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겠어? 너를 연회장에 데려온 건 나야, 난 너를 여기서 무사히 나가게 해야 해.”그러나 배인서는 강소아를 최군형의 품으로 힘차게 밀어 넣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소아를 잘 지켜줘요.”“배인서!”배인서는 뒤돌아보지 않은 채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강소아는 불안에 휩싸였다. 하지만 최군형은 강소아의 어깨를 살짝 눌렀다.“어쩌면... 배인서만의 계획이 있을지도 몰라.”“그래도 안 돼요!”“소아야, 배인서는 실력이 있는 사람이야. 분명 잘 해낼 거야. 게다가, 호정길은 배인서를 본 적이 없으니 배인서가 종업원으로 변장하는 게 가장 적합해.”“하지만...”“안심해, 배인서는 똑똑한 사람이니까 무엇을 해야 할지 잘 알 거야. 만약 무리라고 판단했다면 절대 무리하지 않을 거야.”얼마 지나지 않아 배인서가 돌아왔고 이미 종업원의 옷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배인서는 소매 속에 권총을 은밀히 숨겼다. 배인서는 최군형에게서 이어폰을 받아 최지용에게 연락했다. 최지용은 상대가 낯선 여성의 목소리로 바뀌자 살짝 당황하며 물었다. “실례지만, 당신은 누구시죠...”“내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지금은 사람을 구하는 게 급선무예요.” 배인서는 냉철한 목소리로 답했다. “지금부터 내가 문을 두드려 물건을 전달할 겁니다. 이때 호정길
곧 방 안에서 호정길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이 멍청한 계집애, 그것 하나도 제대로 못 나르냐? 빨리 들어와!”“아빠, 이 상자가 정말 무거워요!”호세연은 온 힘을 다해 상자를 끌어당겼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상자가 계속해서 팔을 짓눌렀다.상자의 반대편에서 배인서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배인서는 원래 작은 체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상자 뒤에 숨어 있으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배인서는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쓰고 얼굴의 대부분을 가린 채 호텔 종업원의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당황한 호세연은 배인서를 알아볼 수 없었다.배인서는 아예 상자 위에 몸을 기대어 버렸다.호세연은 상자뿐만 아니라 배인서의 무게까지 견뎌야 했기에 당연히 버티기 힘들었다.“아빠, 제발 와서 도와줘요! 나...”호세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배인서는 호정길이 서둘러 이쪽으로 오는 발소리를 들었다.배인서는 즉시 기회가 왔음을 깨달았다.배인서는 힘껏 상자를 밀어버렸다. 비록 몸집은 작지만 힘은 매우 강력했다. 호세연은 갑자기 밀려나 뒤에서 다가오던 호정길과 부딪혔다.“아아...”호세연이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호정길은 바로 뛰어올랐다. 배인서는 상자를 밟고 뛰어오르더니 몇 걸음 만에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호정길은 바로 뒤쫓아갔고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총을 뽑아 서로를 겨누었다.하지만 호정길은 조금 늦었고 배인서는 김자옥의 앞을 단단히 막으며 서 있었다. 배인서의 어린 얼굴에는 두려움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호정길은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그 순간 배인서의 입가에 비웃는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너...”“호 선생님.” 배인서는 총구를 높여 그의 이마를 겨누며 말했다. “저와 내기하시겠습니까?”“흥, 어린 계집애가, 네가 여기서 살아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배인서는 그를 무시하고 조용히 말했다. “당신의 목숨을 걸고 내기하자는 겁니다.”호정길은 이 작은 소녀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배인서의 말투가 호정길을 분노하게 했다. 호정
강소아는 말을 마치고 최군성을 향해 엄지를 들러 보였다. 최군형은 강소아를 보며 웃으며 말했다. “도련님이 어제 하루 종일 주방에서 준비했어. 이 재료를 양념하는 데만 서너 시간이나 걸려서 우리 집 요리사들이 깜짝 놀랐다니까.”“왜요?”“요리사들이 자신들이 필요 없어질 줄 알고, 해고될까 봐 걱정했다더군. “강소아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육연우는 종업원처럼 모두에게 음료를 따라주고 양념을 나눠주었다. 바쁠수록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언니, 이 양념은 군성 오빠의 독자적인 레시피에요! 꼭 찍어 먹어봐야 해요.”“맞아, 꼭 한 번 맛봐!” 최군형도 웃으며 말했다. “이 녀석 어제 주방에서 문을 닫고 뭘 하고 있는지 나한테 보여주지도 않더군.”“형이 이걸 배워 가면 어떡해? 이건 내가 힘들게 개발한 비밀 레시피야. 배우려면 수업료를 내야지.”최군형은 눈썹을 살짝 올리며 물었다. “얼마나 줄까?”최군성은 다섯 손가락을 펴 보이며 말했다. “친형제니까, 딱 10만 원.”“그거 아버지가 받는 용돈이잖아?”“하하하...”“너 이 녀석, 다행히 아버지가 여기에 안 계셔서 다행이야. 아니면 틀림없이 그 60만 원짜리 골동품 벨트를 풀어서 널 혼내셨을 거야.”최군성은 웃느라 거의 서 있지 못했다. 문성원은 최군성을 부축하며 손에서 꼬치를 받아 구이를 계속했다.“됐어, 됐어, 좀 쉬어. 내가 할게!”햇빛 아래에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새들조차 부러워하며 나뭇가지에 앉아 그들을 지켜보았다.문성원은 갑자기 가장 중요한 두 사람을 잊고 있는 것 같다고 눈치챘다. 그 두 사람은 한쪽에서 너무나 조용히 앉아 있었다. 둘 다 검은 옷에 검은색 야구 모자를 쓰고 있었다. 심지어 담담한 표정까지 똑같았다.두 사람의 눈빛은 평온했고 마치 이 세상을 초월한 듯한 느낌이었다.문성원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가볍게 두 번 기침했다.“저기... 여러분, 중요한 일을 잊고 있는 것 같지 않나요?”최군성은 먼저 웃음을 멈췄다.모두 문성원의 시선을 따라가며 오
“이건 제가 꼭 설명해 드려야겠네요.” 최지용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제 본명은 최군서였어요. 그런데 부대에 들어가고 나니 이름이 너무 여성스럽게 느껴져서 지용으로 바꿨어요.”“맞아, 우리 집안에서 이름을 바꿀 용기를 낸 건 이 사람이 유일해.” 최군형도 웃으며 말했다. “우리 집안 이름은 다 증조부님이 지어주셨는데, 이 사람은 이름은 바꿔버렸죠!”최지용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이름이란 건 단지 하나의 상징일 뿐이니까요, 기억하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요?”“그렇죠, 배 씨 아가씨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최지용은 줄곧 말이 없던 배인서를 바라보았다.하지만 배인서는 생각에 잠겨 있다가 한참 후에야 최지용을 멍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저를 부르신 건가요?”최지용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요... 여기 배 씨 성을 가진 사람이 또 있나요?”“아, 그렇군요.” 배인서는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저는 사람들이 저를 ‘배 씨 아가씨’라고 부르는 게 익숙하지 않아요.”“그러면...”“아까 이름이 그냥 상징이라고 하셨잖아요?” 배인서는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제 상징은 ‘배인서’예요.”배인서는 고개를 들어 최지용을 바라보았다. 야구 모자 아래로 청순하면서도 아름다운 얼굴이 드러났다.이목구비는 정교하고 피부는 하얗고 고요한 분위기가 배인서를 감쌌다.하지만 그날 호정길을 제압할 때, 배인서의 눈매에서는 남다른 기개가 엿보였다.최지용은 가슴 속 어딘가가 살짝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건 그가 태어나서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배인서?” 그는 낮게 물었다. “인은 어떤 글자죠?”“너그러움의 ‘인’이에요.”“인서야.”“무슨 말씀하셨죠?” 배인서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경계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아, 미안해요.” 최지용은 진심으로 사과하며 말했다. “그냥 그렇게 부르는 게 참 예쁘다고 생각해서요... 그러면 앞으로 제가...”“안 돼요.” 배인서는 차갑게 거절하며 최지용을 한 번도 쳐다보
최지용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서 있었다.최지용의 앞에는 바비큐 그릴이 있었고 두 개의 닭 날개 꼬치가 그릴 위에 올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배인서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최지용은 어릴 때부터 호화로운 가문의 자제로 모두의 주목을 받으며 자랐다. 나중에 군대에 들어가서는 뛰어난 체력과 빠른 두뇌로 여러 차례 군공을 세우며 특수부대 내에서도 주목받는 인물이 되었다.하지만 지금은 한 어린 소녀에게 반박조차 못 하고 말문이 막혀버렸다.최지용은 마음이 조금 답답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답답함 속에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섞여 있었다... 솔직히 말해, 배인서가 한 번 더 자신을 몰아붙여 주길 바라는 마음마저 들었다.최지용은 갑자기 자신을 깨우며 생각했다. 이런 생각이 혹시 조금 이상한가...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최군성이 등을 힘껏 두드리며 소리쳤다. “지용이 형! 불이야! 불이야!”최지용은 거의 깜짝 놀라 뛰어오를 뻔했다.최지용이 올려놓은 두 개의 닭 날개는 이미 까맣게 타버려 불꽃을 내며 타들어 가고 있었다.“맙소사, 지용이 형!” 최군성은 불을 끄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특수부대에서 혹독한 야외 훈련을 받으셨죠? 그래서 이런 시커먼 걸 더 친근하게 느끼시나요?”“너...” 최지용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최지용은 고개를 들어 무표정한 배인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배인서는 차갑게 돌아서며 점점 그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있었다.최지용은 눈살을 찌푸리며 조용히 최군성에게 물었다. “저 여자... 도대체 어떤 사람이야?”“나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예전에 배인서 씨가 소유를 보호한 적이 있어요.”“늘 저렇게 냉정해?”“그렇죠.” 최군성은 입안 가득 꼬치를 물고 말했다. “자기가 그랬거든요. 원래 타고난 얼굴이래요, 웃음도 별로 없다고.”최지용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미소를 살짝 지었다.배인서가 웃으면 강가의 합환나무 꽃보다 더 아름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최군형과 강소아의 결혼식 날짜가 확정되었다. 동시
최연준은 놀라서 순간 멍해지고 말았다.그 서예 작품의 필체는 강력하면서도 우아했고 독특한 글씨체는 보는 이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림은 세밀한 공필화로, 색채의 조화가 우아해 보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또 몇 개의 도자기 병이 있었는데 모두 최문혁이 직접 디자인하고 구워낸 것이었다. 전각 작품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최연준은 문득 깨달았다. “이제 보니 군성이는 할아버지를 닮았던 거였구나!”권모술수 빼고는 다 잘하네.강서연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연회에서 최문혁이 두 아내 사이에 끼어 아무 말도 못 하던 장면이 떠올랐다.“음... 그래도 할아버지보다는 낫네요.” 강서연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적어도 군성이는 두 명의 강한 아내를 맞이하지는 않을 거예요.”“하하하!”“정말 세월이 야속하네요.” 강서연이 조용히 말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아이들이 다 자랐고, 우리도 늙었네.”최연준의 큰 손이 강서연의 어깨에 살짝 얹혔고, 강서연은 그 익숙하고 따뜻한 품에 기대어 이 모든 것이 마치 오래전 일처럼 느껴졌다.“여보, 기억나? 우리가 예전에 했던 약속.”“네?” 너무 많은 말을 주고받았기에 다 기억나지는 않았다.최연준은 고개를 숙여 강서연을 바라보았다. 눈에는 가득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최연준은 손가락으로 강서연의 머리카락을 살짝 밀어내며 부드럽게 말했다. “우리가 말했었잖아. 다음 생, 그다음 생까지도 언제나 함께 하자고.”“그래서 이번 생이 끝나도 우리는 사실 늙은 게 아니야. 영원과 비교하면 우리는 아직 어린 시절에 머물러 있는 셈이지.”강서연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최연준의 품에 조금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그리고” 강서연이 덧붙였다. “다음 생에 당신이 고기 완자라면, 나는 채소 완자가 될 거예요. 우리가 다 익어도, 우리는 한 접시에서 함께할 수 있겠죠.”최연준은 가볍게 웃으며 강서연의 이마에 깊은 애정을 담아 입맞춤을 남겼다.세상에서 이 긴 사랑의 시간을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서로뿐이다.
“저는 이 아이의 둘째 삼촌입니다!”체육 선생님은 잠시 생각하더니 무릎을 굽혀 부드럽게 최가원에게 물었다.“가원아, 이 사람 알아?”최군성은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불만스럽게 말했다.“아니, 선생님! 저를 못 믿으시겠단 건가요?”“정말 죄송합니다.”체육 선생님은 예의 바르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건 유치원 규정이라 어쩔 수 없습니다. 저희는 모든 아이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하거든요. 평소에 가원이는 보모나 경호원, 때론 부모님이나 할머니, 할아버지,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데리러 오셨죠. 가끔은 지용 삼촌이나 인서 이모도 오셨는데, 둘째 삼촌이라는 분은 없었던 것 같아서요... 그래서 다시 확인한 겁니다. 아이를 모르는 분께 맡길 순 없잖아요.”최군성은 말문이 막혔다.사실 최군성이 유치원을 방문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만약 ‘경쟁자’를 확인할 일이 아니었다면 이곳에 올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가원아, 이 사람 알아?”체육 선생님은 다시 물었다.최군성은 조카에게 눈짓을 보내며 도움을 요청했다.하지만 최가원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최군성은 조카를 놀리듯 평소처럼 귀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입을 벌리고 혀를 내밀면서 목을 조르는 시늉을 했다.평소에도 삼촌과 조카는 이런 유치한 장난으로 서로를 놀리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서로 장난감을 뺏거나 간식을 두고 자주 다퉜다. 심지어 그림 도구를 놓고 실랑이를 벌이다 서로 몸싸움까지 하는 모습은 어린아이와 다를 바 없었다.최가원은 늘 삼촌에게 밀려 속상해하며 발을 동동 굴렀었다.오늘, 드디어 복수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최가원은 커다란 눈을 반짝이며 장난스럽게 미소 짓더니 천천히 말했다.“모르는 사람이에요!”“뭐?”최군성은 당황한 나머지 거의 뛰어오를 뻔했다.“이 꼬맹아!”최군성은 조카의 머리끈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체육 선생님은 아이를 납치하려는 줄로 오해해 재빨리 최군성의 손목을 붙잡아 힘껏 비틀었다.“아!”최군성은 고통을 느끼며 몇
하지만 배윤아와 최군성은 지금의 관계에 매우 만족스러워 보였다.지난 2년 동안, 두 사람은 함께 그림을 그리고 저작권을 판매하며 작품을 각색했다. 나아가 함께 애니메이션 감독으로도 활동했다. 두 사람은 함께 바쁘게 뛰어다니며 서로를 의지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일상의 소소한 기쁨을 함께 나누며 예술적 영감도 서로 나눴다.두 예술인이 함께 지내는 만큼, 각자의 예술적 견해를 두고 종종 불꽃 튀는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최군형과 강소아는 몇 번이나 두 사람의 관계가 정말 끝나버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그러나 방금까지 싸움닭처럼 티격태격하던 두 사람은 언제 그랬냐는 듯 웃으며 화해했고 화실 안은 금세 따스한 온기로 가득 찼다.강소아가 딸에게 물었다.“엄마가 알려준 말, 다 전했어?”최가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대답했다.“삼촌 반응은 어땠어?”“음...”최가원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삼촌한테는 별로 효과가 없는 것 같아요!”“뭐라고?”강소아는 놀란 얼굴로 물었다.옆에서 듣고 있던 최군형은 강소아를 끌어안으며 웃었다.“찮아, 천천히 풀어가자. 군성이는 생각보다 고집이 센 편은 아니니까.”“그래도 이렇게 질질 끌고 있으니까...”강소아는 여전히 답답한 표정이었다.“걱정하지 마.”최군형은 딸을 바라보며 물었다.“가원아, 내일 유치원 끝나면 누구 손잡고 나올 거야?”최가원은 크림 케이크를 한입 먹던 중 아빠의 말에 신이 나서 고양이 같은 얼굴로 대답했다.“체육 선생님!”“정답이야!”부녀는 힘차게 손뼉을 마주쳤다.다음 날, 최군성은 유치원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유치원 정문에 나타났다.최군성은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늘 폴로셔츠와 청바지 같은 편한 옷만 입던 그가 오늘은 세련된 정장을 입고 머리까지 깔끔하게 손질했다.평소 화실에서의 부스스한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최군성의 외모와 체격은 최씨 가문의 젊은 세대 중에서도 눈에 띄는 인물이었다. 외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남양 제일 미남’의
최군형은 방금 다 먹은 닭 날개 꼬치를 들고 최군성을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꼬치를 던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엄마가 항상 옳다니까. 넌 정말...”최군성은 당황스러워하며 물었다.“뭐가?”최군형은 이를 악물며 한 마디로 대답했다.“유난이야!”그 말을 내뱉고는 최지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최군성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어리둥절했다. 멀찍이서 바라보니 저쪽은 꽤 북적거리고 있었다. 최군성의 내면 깊은 곳에서 ‘흥겨운 분위기를 즐기는 본능’이 슬며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최군성은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스케치북을 펴고 빠르게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다른 사람들은 대충 윤곽만 그린 반면, 특정 인물을 그릴 때만큼은 세심하게 한 획 한 획 공들여 그려내어 풍경 속에서도 돋보이게 했다....모든 일이 마무리되었고 이제 남은 건 최지용과 백인서의 결혼식이었다.최군형도 두 사람의 결혼을 돕고 싶어 최근 며칠 동안 집에 머물며 부모님과 함께 세심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지용이와 인서는 둘 다 조용한 걸 좋아하니, 웅장한 것보다는 소박하고 아기자기한 결혼식이 더 잘 어울릴 것 같구나.”최연준은 상자에서 온갖 보물들을 꺼내며 결혼 선물로 줄 것을 고르고 있었다. 그중 강서연은 분홍빛 진주 세트를 한눈에 알아보고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이게 딱이겠네! 인서에게 정말 잘 어울릴 거야.”“엄마.”최군형은 살짝 놀라며 말했다.“그건 외할아버지께서 엄마에게 주신 거잖아요. 남양 주변 해역에서만 나는 진주라면서요.”“맞아, 그런데...”강서연은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말했다.“분홍색은 젊고 사랑스러운 느낌이잖아. 이제는 엄마한테 조금 안 어울릴지도 모르겠어.”“누가 그래!”최연준은 즉각 반박하며 손을 뻗어 진주 세트를 집어 들려 했다. 그러자 강서연은 그의 손등을 톡 치며 진주를 되찾아왔다.“인서에게 줄 거니까 당신은 끼어들지 말아요!”“우리 다른 선물을 하자고! 이건 당신이 간직해야 할 물건이야!”두 사람은 한동안 실랑이를 벌였
강소아가 손짓하자 최지용은 더는 망설이지 않고 백인서에게로 달려갔다.“이제 딸을 보러 가야겠네요!”강소아가 웃으며 말했다.“저 대신... 인서 좀 돌봐줄 수 있을까요?”최지용은 그 말에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아까는 주저하며 다가가지 못했던 이유가 있었다. 바로 주변에 권욱과 강소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사람은 백인서의 오빠였고 다른 한 사람은 그녀의 절친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섣불리 다가가면 괜히 이상하게 보일까 봐 망설였다.최지용이 어깨를 펴고 당당히 백인서의 어깨에 손을 얹으려는 순간, 누군가 그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뭐 해요?”최지용은 깜짝 놀랐다.“너야 말고 뭐해?”권욱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감히 내 눈앞에서 내 동생한테 손대는데 어떻게 보고만 있어?”“...”최지용은 당황해서 말을 잃었다.생각해 보면 두 사람은 처음 만난 순간부터 뭔가 삐걱거렸던 것 같았다. 서로 영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그땐 권욱이 백인서의 오빠라는 사실을 몰랐기에 오히려 잠재적 경쟁 상대로 여기기도 했었다.그리고 지금... 더욱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이 되어버렸다.“쓸데없이 귀찮게 하지 말고 물러나!”권욱은 두 사람 사이에 서서 최지용을 흘겨보며 말했다.“동생과 나에겐 나눌 얘기가 산더미처럼 쌓였으니 방해하지 마!”“할 얘기가 뭐가 그렇게 많은데요?”“예를 들면... 인서가 권씨 가문에서 맡게 될 직책 같은 거?”“그나저나!”최지용은 그제야 떠오른 듯 고개를 치며 말했다.“아까 권욱 씨 입으로 직접 말했어요. 최상 그룹과 권오 그룹이 협력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권씨 가문이 진정성을 보여주기 위해 동생을 우리 최씨 집안에 시집보내겠다고요!”“내가 그런 말을 했었나?”권욱은 태연하게 모른 척하며 말을 돌렸다.“내가 무슨 말을 했었는지 기억이 안 나네.”“저기요, 권욱 씨!”두 남자가 티격태격하는 사이, 백인서는 살짝 뒤로 물러나 두 사람의 시야에서 벗어났다.백인서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잔잔히 미소 지었다. 과거에는
손님들이 웅성거리며 비명이 들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백인서?”배윤아가 일부러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큰 소리를 질러?”“아니야... 난 백인서가 아니야!”백시연은 목이 쉬도록 외치며 갑자기 강소아를 돌아보았다.“말해봐! 아까 다 알고 있었던 거잖아? 내가 백인서가 아니라는 걸! 모두가 알 수 있게 똑똑히 말하라고!”“인서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강소아는 담담하면서도 비웃는 표정을 지으며 차분히 백시연의 손을 밀어냈다.“혹시 술이라도 마신 거야? 취한 것 같아.”“강소아 씨!”백시연은 분노에 치를 떨며 외쳤다.강소아는 백시연의 손을 잡고 안쓰럽다는 듯이 바라보며 말했다.“인서야, 우린 자매잖아. 여기서 소란스러운 모습 보이지 말자. 오늘은 어쨌든 육씨 가문의 중요한 날이기도 하고 내 딸도 여기 있어... 그러니까, 제발 진정해 줘.”“아니야...”“인서야!”“아니라고! 아니라고!”백시연은 두 손으로 귀를 막고 한 발짝씩 뒤로 물러섰다.“난 백인서가 아니야! 몇 번을 말해야 믿을 거야?”배윤아는 피식 웃으며 백시연의 팔짱을 끼고 태연히 말했다.“어머, 백인서. 왜 그래? 백인서가 아니면, 왜 백인서 얼굴을 하고 있는 건데? 그런데... 굳이 너와 백인서의 다른 점을 꼽으라면... 손목에 그림이 있다는 거?”“비켜!”백시연은 배윤아를 거칠게 밀어내고 다급히 무대를 향해 뛰어갔다.백인서는 고요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마침내 기다리던 이 순간이 왔다.백인서는 천천히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눈앞의 백시연을 바라보았지만,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눈앞의 이 사람은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지옥에서 온 악마처럼 보였다.백인서는 문득 생각했다. 어쩌면 백시연은 진짜 악마일지도 모른다고. 사람은 누구나 두 가지 얼굴을 지니고 있다. 한쪽은 천사, 다른 한쪽은 악마. 그리고 자신과 백시연 같은 쌍둥이의 운명은 그런 인간의 본성을 극대화해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가면은 순금으로 빚어졌고 가장자리에는 보석이 촘촘히 박혀 조명이 닿을 때마다 눈 부신 빛을 흩뿌렸다.백시연은 그 자리에 선 채 몸이 굳어버렸다.“이... 이럴 수가!”그 사이, 백인서는 이미 무대 위로 올라가 권욱 옆에 서 있었다.권욱은 이어서 말했다.“이분이 바로 제 이복동생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늘 제 동생을 걱정하며 꼭 찾아달라고 당부하셨죠. 이제야 동생을 찾게 되었습니다!”권욱은 백인서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의 눈빛 속에는 진심 어린 애정과 따스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솔직히 말씀드리면, 처음엔 동생의 출생에 대해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죠. 우리는 결국 한 가족입니다. 동생을 찾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동생이 그동안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요... 우리 권씨 가문이 제 동생에게 너무 많은 빚을 졌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하늘의 뜻일지도 모릅니다. 동생의 존재는 제 딸의 목숨을 구하기도 했으니까요. 그래서 이분은 제 동생일 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의 은인이기도 합니다!”객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오고 몇몇은 감동에 겨워 눈가를 붉혔다.하지만 백시연의 머릿속은 텅 비어 있었다.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동생이란 말인가? 그리고 왜 저 여자도 가면을 쓰고 있는 걸까?분명 백인서는 종수가 지하실에 가둬뒀고 곧 처리될 운명이 아니었던가.“그리고 이어서 발표하겠습니다!”권욱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권씨 가문의 재산 중 절반을, 이 세상 유일한 동생에게 넘기겠습니다!”“뭐... 뭐라고?”백시연의 온몸은 떨림으로 굳어졌고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갔다.“아니야... 이건 아니야!”“뭐가 아니야?”강소아가 일부러 물었다.“인서야, 어디 아파?”“그게....”“권 대표는 네 직장 상사잖아? 상사가 가족을 찾은 거니 축하해줘야지!”백시연은 차가운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강소아는 낮게 웃음을 흘리며 다른 이들에게 들리지 않게 백시연의 귀에 속삭였다.“그렇게 백인서의 자리가
“그게... 무슨 뜻이에요?”백시연은 침착함을 가장하며 입을 열었지만, 권욱의 눈빛을 똑바로 마주치지 못했다.“이 카드가 제 거 아니면 누구 건데요?”“난 그런 말 한 적은 없는데?”권욱의 입가에는 여유로운 미소가 번졌다.“그냥 문득 우리 아내도 이런 비슷한 카드를 몇 장 가지고 있던 게 떠올랐을 뿐이야. 카드 색깔도 이런 파란색이었고 뒷면에는 대나무 무늬의 홀로그램이 새겨져 있었어. 조씨 가문은 학문을 중시하는 전통을 지닌 집안이라 대나무처럼 강인하고 꿋꿋한 식물을 특별히 아낀다고 하더군. 한번 뒤집어 확인해 볼래?”백시연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가 이내 창백해졌고 손은 카드 위에서 더욱 굳어졌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백시연은 강소아를 찾아갔다.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약속했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면서 묘안석이 그렇게 비싼 줄 몰라서 서둘러 나오느라 준비가 부족해 지금은 이 카드밖에 없다고 둘러댔다.그러고는 억지로 친근한 미소를 띠며 애써 밝은 표정을 지었다.“소아 언니, 우리 자매처럼 친한 사이잖아요. 언니 딸은 곧 제 딸이나 다름없죠! 가원이에게 쓰는 돈이라면 하나도 아깝지 않아요!”강소아는 미소를 머금고 백시연의 손에서 카드를 슬쩍 가져가며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정말? 고마워! 나중에 가원이가 크면 널 두 번째 어머니로 생각할 거야.”백시연의 얼굴 근육이 떨렸지만 억지로 미소를 유지하며 애써 태연한 척했다.“인서야.”강소아는 다정한 눈빛으로 백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요즘 권욱의 공익 프로젝트를 도맡아 관리하고 있다면서? 잘한다는 칭찬이 자자하더라. 몇 번이나 넌 정말 유능한 관리형 인재라고 말했어.”“아... 그래요?”백시연은 속으로 긴장하며 애써 태연한 척했다.“그럼!”강소아가 웃으며 말했다.“그래서 앞으로도 너한테 정말 잘해줄 생각이야.”그 말을 듣자 백시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10억 원을 써서 강소아의 호의를 얻은 거라면 나쁘지 않은 거래라는 생각이 들었다.“소아 아가씨
연회장 한편에서 백시연은 마침내 잠시 자리를 빠져나갈 기회를 잡았다. 화장실에 간다고 둘러대고는 한적한 구석에 숨어 종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무언가 해답을 찾고 싶었다.긴 신호음 끝에야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백시연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왜 이렇게 늦게 받아요?”백시연은 알지 못했다. 종수가 이미 경찰차에 타고 있었고 간신히 경찰의 허락을 받아 전화를 받은 것이라는 사실을.“아저씨! 정말 급해서 전화했어요. 지금 뭐 하고 계셨어요?”종수는 억지로 미소를 짓고 나지막이 속삭였다.“시연아...”뭔가 말을 더하려던 종수는 경찰이 허리춤에 총구를 겨누는 바람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됐어요, 됐다고요!”백시연은 짜증을 내며 말을 끊었다.“딱 한 가지만 물을게요... 아까 소아 아가씨가 저한테 10억 원짜리 선물을 요구했는데, 그거 줘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10억?”“네!”상황을 모르는 백시연은 초조한 듯 말을 더 이어갔다.“그 재수 없는 여자가 과거에 강소아와 무슨 약속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오늘 강소아가 저를 보자마자 자기 딸이 말하기 시작했다면서 선물을 요구하더라고요. 뭐였더라... 묘안석이라고 했던가? 어쨌든 그게 10억 원짜리래요!”종수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상황을 단번에 파악했다. 그건 강소아가 원하는 게 아니라 조순영을 대신해 요구한 것이라는 사실을.세상은 언제나 공평했다. 무엇을 얻었다면 그 대가는 반드시 같은 무게로 돌아오게 마련이었다.종수는 지친 듯 눈을 감고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아저씨? 종수 아저씨!”백시연은 초조한 목소리로 외쳤다.“뭐라도 말 좀 해주세요! 줘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시연아, 이제 너도 어른이야. 이런 일은 네가 직접 판단해야 해.”“제가 알아서 할 수 있었으면, 아저씨께 묻겠어요?”백시연은 이마를 찡그리며 투덜거렸다. 오늘의 종수는 어딘가 낯설고 이상했다.“솔직히... 전 주고 싶지 않아요. 그런 비싼 걸 고작 어린애한테 준다
“뭐라고요? 10억 원이요?”백시연은 깜짝 놀라서 외쳤다.강소아는 슬쩍 백시연을 바라보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왜 그래? 고작 10억 가지고. 게다가 가원이에게 큰 선물을 주겠다고 네가 먼저 약속한 거잖아. 혹시 후회라도 하는 거야?”“그럴 리가!”배윤아가 옆으로 걸어오며 백시연의 어깨를 힘차게 두드렸다.“우리 인서는 분명히 선물을 줄 거야, 그렇지? 너희 둘 사이에 보석 하나쯤은 아무것도 아니잖아.”백시연의 얼굴이 단단히 굳어졌고 입술이 굳게 닫혔다.10억? 조순영에게서 받은 카드에는 고작 10억 원뿐이었다.백인서가 이때까지 이렇게 호화로운 생활을 하면서 이 정도 돈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 걸까?그래서 강소아가 그렇게 말한 것일까?“어머, 저 사람은 육 아가씨와 친하다던 백인서 아니야?”그때, 근처에 있던 여배우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방금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었어?”“예전에... 둘이 약속했나 봐, 백인서가 육 아가씨의 딸에게 선물을 주기로. 그런데 지금은 마음이 바뀐 것 같아!”“정말? 풉! 상류층 자매라는 것도 결국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건가 봐! 백인서는 육 아가씨와 둘도 없는 사이처럼 보였는데. 육 아가씨가 어디를 가든 따라다녔잖아... 이제는 최씨 가문의 아들과 친해지니까, 가식적인 행동도 하기 싫어졌나 봐.”“그 선물이 10억 원짜리라고 하던데... 역시 두 사람 우정은 10억 원도 안 되는 거였어!”백시연의 얼굴은 점점 더 붉게 물들어갔다. 뒤돌아 그들에게 따지려던 찰나, 강소아가 재빠르게 백시연의 손목을 붙잡았다.“됐어, 인서야.”강소아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저 사람들은 평소에도 입만 살았어. 나중에 제대로 혼내 줄 거야.”“그래야죠, 저 사람들은 정섭 엔터테인먼트 소속 연예인이잖아요. 제대로 가르쳐야 해요!”백시연은 화를 내며 말했다.“소아 언니, 저 사람들이 이런 자리에 나온 건 정섭 엔터테인먼트를 대표해서이기도 하지만 결국 언니를 대표하는 것이기도 하잖아요. 저렇게 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