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연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강소아를 노려보았다.“소아 언니, 저는 정말 괜찮다니까요.”호세연은 그제야 어떻게 된 일인지 눈치챘다. 구정물을 뿌린 아이들은 겉보기에는 배인서의 지시에 따라 움직인 것 같았지만 배후는 강소아였다. 강소아가 이런 일 꾸민 건 경찰을 개입시키기 위해서이고 호일 그룹 자선기금회의 흑막을 까발리기 위해서였다. 호세연은 강소아를 죽이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에 핑계를 대고 이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군형 오빠, 소아 언니. 아이들이 철없어서 그런 거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아이들은 이러면서 크는 거잖아요? 저는 정말 괜찮아요.”“하지만 세연 씨...”호세연은 벌떡 일어나더니 걸어 나가며 말했다.“저는 아이들의 잘못을 따질 생각 없어요. 오늘 김씨 가문 할머니랑 약속이 있어서 저는 이만 가볼게요.”형사와 순경은 어안이 벙벙했다.“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죠? 신고한 사람이 도망가다니, 허위 신고를 한 건가요?”차군형이 재빨리 형사 옆으로 다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형사님, 3일 뒤에 일 년에 한 번 있는 최상 그룹 자선 파티가 열리는데, 형사님의 자리는 따로 마련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최상 그룹의 자선 파티는 규모가 어마어마했고 최상 그룹 산하의 어진 엔터테인먼트 영향으로 연예계에서 내로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참석했다.톱스타 유환이 모습을 드러내자 기자들은 셔터를 미친 듯이 눌렀고 유환의 아름다움을 담기 위해 애썼다. 유환은 어진 엔터테인먼트 소속임에도 불구하고 육자 영화 도시의 홍보대사를 맡았으며 육씨 가문 아가씨와 친한 사이였다.유환을 탐탁지 않아 하는 기자가 혀를 끌끌 찼다.“모든 걸 다 가지고 태어나서 좋겠네요.”“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는걸요.”옆에 있던 기자가 코웃음을 쳤다.“트집잡히는 순간 무너질 게 뻔하거든요.”“그게 무슨 말이에요?”“조금만 기다려봐요.”유환은 레드카펫을 밟고 우아하게 걸어오더니 사인 판에 사인하고는 뒤돌아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셔터를 누르는 소리 사
게다가 유환을 망가뜨리려고 작정한 네티즌은 허위 사실을 각종 커뮤니티에 퍼뜨렸다. 바쁜 스케줄 때문에 신경 쓰지 않는 척했었지만 혼자 남겨질 때면 떠도는 소문은 비수가 되어 유환의 마음을 찔러댔다.유환은 데뷔할 때부터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했었기에 작은 실수 하나가 치명적으로 작용하며 유환을 괴롭혔다. 유환은 아직도 뭘 잘못했는지도 모른 채 고통스러워했다.“유환 씨, 육자 영화 도시 홍보대사로서 동료 배우들과 시청자들한테 해명해야 하지 않나요?”유환은 마이크를 꽉 잡은 채 미소를 지었지만 작은 어깨가 덜덜 떨렸다. 기자들은 쉴 틈 없이 쏘아붙였다.“유환 씨, 해명해 주세요!”“해명하지 않는 이유가 있으신가요?”이때 한 기자가 예리한 질문을 던졌다.“어진 엔터테인먼트 소속 연예인이 육자 영화 도시 홍보대사를 맡은 것도 이상한데, 개막식 날 유환 씨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중독되었어요. 이 사건에 두 가문이 개입했다고 봐도 될까요?”“유환 씨, 사실대로 얘기해주세요!”“저는...”유환은 식은땀을 흘리더니 호흡이 가빠졌다. 카메라가 없는 자리였다면 진작에 기자의 뺨을 후려갈겼을 것이다. 유환은 호흡을 가다듬고는 침착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이 중요한 시점에 매니저 재크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유환은 심호흡하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곧 공식 입장을 발표할 것이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유환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레드카펫 입장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분들도 계시니 이만 들어가 볼게요. 불미스러운 일로 심려를 끼쳐서 죄송해요.”“유환 씨, 이렇게 얼버무릴 생각인가요?”“누가 얼버무린다고 그래요?”힘 있고 카리스마 넘치는 목소리에 유환은 고개를 돌렸다. 인파 속을 헤집고 나온 문성원은 공주를 구하러 온 용사처럼 든든하고 멋있었다.“얼버무린다고 한 기자님이 어느 분이시죠?”질문 공세를 이어가던 기자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육감적으로 화젯거리를 보도할 수 있다고 생각한 다른 기자들이 문성원을 찍기 시작했다.“누구신지...”
유환은 몰래 자신을 꼬집으며 지금 꿈을 꾸는 게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다.문성원은 손에 디저트 두 접시를 들고,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그녀의 앞으로 접시를 건넸다.“뭘 좋아할지 몰라 이것저것 다 챙겨 왔어요.”문성원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이건... 아까 물어보니까 슈가 프리라고 살이 안 찐대요. 그러니까 조금만 먹으면 괜찮을 거예요.”유환은 기쁜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문성원이 건넨 접시를 받아쥔 순간, 두 사람의 손이 겹쳤다.유환은 심장 박동이 멈춰선듯한 기분을 느꼈으며 머릿속이 새하얘졌다.문성원도 유환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아까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유환을 보며 참을 수가 없어 기자들에게 한소리를 했는데, 행여나 유환의 작품에 영향이 가지 않을까 걱정되었다.‘만약 아까 기자들이 함부로 기사를 쓴다면 앞으로 유환 씨가 더 많은 고생을 하지 않을까?’그래서 사과의 의미로 작은 케이크를 가져온 것이었다. 접시를 건네는데 두 손이 맞닿았다.문성원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심장이 이렇게 빨리 뛰었다.두 사람은 바로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쑥스러운 마음에 감히 서로의 눈을 바라보지 못했다.“아까, 아까는 고마웠어요.”유환의 목소리는 아주 작았다.“아니에요, 어렵지도 않은 일이었는데요. 제가 혹시 유환 씨를 곤란하게 만든 게 아니었으면 좋겠네요.”“아!”누군가 큰 소리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유환과 문성원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고 재크가 어느새 두 사람의 뒤에 서 있는 게 보였다. 재크는 가슴 앞으로 팔짱을 척 끼더니 한 손으로 안경을 쓱 밀었다. 그리고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두 사람을 가리켰다.“곤란하게 만들긴 뭐가요! 두 사람이야말로 골칫덩어리가 따로 없어요!”“문성원 씨, 아니 문성원 변호사님! 제가 얼마나 많은 기회를 만들어줬나요? 두 사람을 이어주겠다고 카니발 배터리까지 뜯어냈다고요! 제가 왜 그랬겠어요? 카니발을 더 오래 수리 맡기기 위해 그런 거잖아요!”“그리고 오늘 우리 유환이 그렇게 손가락질당하고 있는데
“오늘 이 자선 연회는 성금이 목적이란다.”김자옥이 옅은 미소를 지은 채로 말했다.“정길아, 자선에 호씨 가문이 둘째라면 섭섭하지 않겠느냐?”호정길이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고 예의 바른 인사말로 대답했다.최군성이 입을 삐죽이고 제 형을 향해 구시렁거렸다.“어릴 때부터 저 삼촌은 정말 가식적이라는 생각을 했었어. 시간이 이렇게 오래 지났는데도 여전히 저렇게 웃는 걸 봐... 형, 무슨 입꼬리 시술이라고 있던데 저 사람도 그 주사를 맞은 게 아닐까?”“쉿!”최군형이 고개를 돌려 최군성을 바라보는데 마침 호정길이 걸어왔다.“최씨 가문 두 도련님이 벌써 이렇게 컸구먼!”최군성은 방금까지 호정길을 뭐라고 하더니만 자신도 가식적인 미소를 장착했다.“헤헤. 안녕하세요, 삼촌.”최군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호정길은 눈을 가늘게 뜨고 두 사람을 겨누어보다가 최군형에게 시선을 잠시 고정했다.“우리 군형이는 이미 약혼을 한 건가? 도련님을 구워삶은 여자라면 보통 여자가 아닌가 보지?”최군영은 무덤덤한 얼굴로 이어질 호정길의 말을 기다렸다.“그 아가씨는 깡패 배경도 있다던데?”“삼촌.”최군형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무 증거도 없는 뜬소문을 믿으시는 거예요?”“허, 세연의 말을 들어보면 총을 아주 잘 다룬다고 하더구나!”“그래요?”최군형은 하나도 조급해하지 않았다.“마침 저도 최근에 들은 소문이 하나 있어요. 호씨 가문이 자선이라는 허울로 대량의 자금을 사적으로 사용했다던데 삼촌 이런 소문을 과연 믿어도 될까요?”호정길은 말문이 막혀버렸다.이때 김자옥이 나타나 얼어붙은 분위기를 깨뜨렸다.“호씨 가문의 자선 가업은 몇 대가 물려받으며 하는 사업이란다. 이제 그 큰 사업이 세연의 어깨 위로 오게 되었지만, 세연은 어릴 때부터 똑똑하고 야무지니 자금을 잘 관리할 게 분명해!”“네네, 대표님 말이 맞아요!”호정길이 웃으며 말했다.“그런 소문은 말할 가치가 없지요.”“군형아.”김자옥이 가만히 눈짓했다.“연예인들도 대부분
옆에 앉아 있던 최군형이 고개를 돌려 배인서와 강소아를 쳐다봤다.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배인서는 강소아의 일에 특히 마음을 썼다. 사람을 시켜 조사를 해봤지만 배인서가 현지 사람이 아니고, 부모님이 모두 돌아갔다는 정보 외에는 특별한 게 없었다.최군형이 인상을 찌푸렸다. 배인서가 강소아를 향한 마음이 조금 불투명한 것 같았다.“왜 멍하니 있어요?”강소아가 최군형의 손을 잡았다.최군형은 강소아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아니에요. 그다음으로 뭘 하면 좋을지 생각해 봤어요.”“뭘 해야 하는데요?”최군형이 비서를 향해 손짓했다.그러자 멀쩡하게 틀어지던 홍보영상에 조금 변화가 생겼다.아이들이 호세연을 향해 더러운 물을 뿌리고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혼란스러워졌다. 화면을 돌리자, 보육원 시설이 낡고 해진 게 보였으며, 방안의 노인들은 휠체어에 앉아 절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돌봐주는 사람이 없어 방안은 축축하고 어두웠으며 복도의 구석에는 곰팡이가 가득했고 뒤뜰에는 잡초가 무성했다.보육원이라기보다는 공포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무대 아래 사람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고 그 장면에 경악했다.호정길의 안색도 순식간에 어두워졌는데 두 눈이 휘둥그레지고 입술을 덜덜 떨었다.“대표님, 지금...”그리고 화면은 회색 하늘로 고정되었다.“이게 대체 무슨 일이래?”김자옥이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아, 세연이 말을 전하지 않았나 보구나. 그날 보육원에서 아이들에게 괴롭힘당하는 걸 보고 우리 군형이가 신고했단다. 그런데 그런 일을 숨겼다니, 정말 큰일을 해낼 아이로구나.”호정길은 입술을 벙긋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정길아.”김자옥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세연이 참는다고 해도 난 참을 수가 없었단다. 어떻게 이렇게 사람을 괴롭힐 수가 있는 거지? 아비가 되어 넌 참을 수 있겠느냐?”“지금...”“그래서 신고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쪽으로 조사도 해보았단다.”호정길은 식은땀을 흘렸고, 손에 쥔 와인잔은 부서질 것처럼 부들거렸다.역시 한치의
김자옥은 지팡이로 바닥을 쿵쿵 때리더니, 다시 번쩍 들어 스크린을 가리켰다.“두 눈 똑바로 뜨고 보거라. 이런 천리에 어긋나는 일에 감히 우리 김씨 가문을 끌어들이다니. 정말 몇 대가 친분을 쌓아온 게 부질없다는 생각이 드는구나!”데이터 보고서에 따르면 어떤 자금은 김씨 가문에 유통되도록 계획되었다. 하지만 김자옥은 출처가 불분명한 돈은 어떤 형태로든 유통될 수 없게 미리 막아두었고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그러니 호정길이 세운 대책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사실 호정길은 이 일로 김씨 가문을 함께 끌어내리려 했다...최군형이 주변을 둘러보자 변장한 경찰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호정길은 여전히 김자옥 앞에서 연기를 이어갔다.“대... 대표님! 저도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호씨 가문이 투자했던 여러 프로젝트가 망하고 액수가 너무 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자선 성금에 손을 댄 거예요.”그리고 김자옥의 팔을 잡고 그녀의 앞으로 무릎을 꿇었다.김자옥은 경멸스러운 눈길로 호정길을 바라봤다.“그런 말은 이제 경찰서에 가서 하거라!”“대표님!”“네가 사실대로 말하지 않을까 미리 영국 쪽에도 증거를 제출했어! 너희 호씨 가문이 벌인 일은 이 한두 가지가 아니더라고!”김자옥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자선이라는 허울로 사채업을 해서 얼마나 많은 가정을 파탄으로 만들었는지 알기나 알아? 그 돈을 흥청망청 쓰면서 밤에 잠은 잘 오던가?”호세연도 김자옥의 손을 잡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애원했다.호정길은 겉으로 보기에는 많이 당황한 것처럼 보여도 사실 속으로는 아주 이성적이었다. 호세연이 김자옥의 손을 잡았고, 김자옥은 두 사람의 손을 뿌리치려고 하고 있었다...호정길은 이를 악물고 와인잔을 순식간에 깨부수더니 조각을 주워 김자옥의 목에 가져다 댔다!“꺄!”주변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김자옥과 가장 가까운 사람은 오직 호정길과 호세연 둘뿐이었다!김자옥도 많이 당황한 눈치였으며 온몸이 굳어져 미처 다른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 호정길은 그녀의
김자옥의 목이 칼에 베여 피부가 살짝 찢어지며 피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어서 호정길은 호세연의 손에서 총을 받아 들고 김자옥의 관자놀이에 겨누었다.이것이 호정길이 미리 계획한 작전이었다.만약 호정길의 추악한 비밀이 드러나면, 어떻게든 김자옥이나 최씨 집안의 누군가를 인질로 삼아 자신이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도록 준비해 두었다.“최연준!” 호정길이 턱을 치켜들며 소리쳤다. “당신 사람들 모두 물러나게 해!”최연준은 이를 꽉 물었다. 그의 주먹이 약간 떨리고 있었다. 비록 사전에 준비했지만, 호정길이 총을 가지고 행사장에 들어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그 총이 어떻게 보안 검색대를 통과했는지도 생각지 못한 일이다.강서연은 최연준의 손을 살짝 잡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 순간 강서연은 깨달았다. 최씨 집안에 내통자가 있었고 호정길과 공모해 그가 총을 쉽게 가지고 들어오게 했다는 것을.그러나 지금은 그 내통자가 누구인지 따질 시간이 없다.최연준은 차가운 숨을 들이마시고 어렵게 손을 들어 모두에게 후퇴하라는 신호를 보냈다.“그래, 잘하고 있어!” 호정길이 냉소를 지으며, 김자옥을 끌고 한 걸음 한 걸음 문 쪽으로 물러났다.“호 선생님.” 강서연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차분하게 말했다. “일이 너무 커져서 끝낼 수 없게 되면 양쪽 모두에게 손해가 될 것입니다. 원하시는 조건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저희가 꼭 들어드리겠습니다.”“잊지 마십시오, 선생님께는 딸이 있습니다.” 강서연은 호세연을 한 번 쳐다보며 말했다. “우리 모두 부모입니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아이에게는 길을 열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강서연의 눈은 예리했다. 강서연은 호세연의 두려움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호세연은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아가씨로 이런 상황을 전혀 경험해 보지 못했다. 이 순간, 아버지 곁에 있지 않으면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보였다. “세연아.” 강서연은 부드럽게 말했다. “기억나니? 어릴 때 우리 집에 왔을 때 내가 구워준 작
“돈과 사람을 교환하더라도, 준비할 시간을 조금은 주셔야 합니다.”강서연은 위급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침착함을 유지했다. “호 선생님, 저희 어머니께서는 연세가 많으셔서 이런 일로 더 이상 괴로움을 겪으실 수 없어요. 만약 어머니께 무슨 일이 생기면, 선생님께서는 감옥에 가실 뿐만 아니라 아무런 이익도 얻지 못하실 겁니다.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 잘 생각해 보세요.”호정길은 눈을 굴리며 김자옥의 목을 조르던 손을 잠시 느슨하게 했다가 다시 강하게 움켜쥐었다.“나를 속이려는 거야? 흥! 최 여사, 아직 한참 멀었어.”“허 아저씨!”이때, 강소아가 앞으로 나섰다. 강소아는 강서연의 팔을 붙잡아 뒤로 물러나게 했다.강서연의 마음은 조마조마해졌고 강소아의 부드러운 목소리만이 들렸다.“호 아저씨, 최 여사의 말을 믿지 않으신다면, 우리 거래를 하나 하죠. 어떠세요?”“어차피 인질이라면 누구를 데리고 있어도 같은 거잖아요. 그러니 저로 바꿔주세요... 저를 할머니와 바꿔주세요!”“유자야!”강서연은 놀라며 강소아를 힘껏 끌어당겼고 다시 최군형이 와서 강소아를 데려가게 했다.그러나 강소아는 강서연의 손을 놓고 최군형을 한 번 쳐다보며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최군형은 입술을 꽉 다물었지만, 그의 깊고 인내심 있는 눈빛에는 걱정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다 최군형은 멀리서 한 소녀가 언뜻 보였다. 그 소녀는 야구 모자를 쓴 채 사람들 사이를 조용히 움직였고 손에는 배홍이 강소아에게 준 권총이 쥐어져 있었다.“호 아저씨.” 강소아는 호정길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당신 딸이 군형 씨를 좋아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어요. 제가 호연 씨의 연을 망친 사람입니다... 그리고 복지원 사건의 시작도 저였어요. 그 아이들에게 오물을 던지게 하고 경찰을 불러 자선기금 조사를 하게 한 사람도 바로 저였어요.”강소아는 한 마디씩 말하며 천천히 발을 움직여 호정길의 주의를 끌었고, 배인서가 각도를 잡고 시간을 벌 수 있도록 했다.호정길은 강소아의 발걸음에 맞춰 몸을 돌렸다
결정적인 순간에 배윤아가 나서서 둘 사이를 중재했다.“뭐 어때? 가원이가 그렇게 타고 싶다잖아. 그냥 타게 하자!”배윤아는 웃으며 가방에서 미리 준비해 온 작은 바지를 꺼냈다.“이것 봐, 역시 소아는 다 알고 있었어. 자기 딸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나한테 바지를 챙겨가라고 한 거였어!”최가원은 기뻐하며 환하게 웃었다. 최가원은 배윤아와 함께 여자 화장실로 향했고 잠시 후 당당하고 씩씩한 모습으로 뛰어나왔다. 즐겁게 말을 타며 음악에 맞춰 손을 흔들고 흥겨운 몸짓으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삼촌! 나중에는 진짜 말을 타보고 싶어요!”“그래, 그래!”최군성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다른 집 공주님들은 다 얌전하고 우아하던데, 넌 정말...”“저 공주라고 부르는 거 싫어요! 앞으로는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그럼, 뭐라고 불러줄까?”“음... 여자 전사로 불러주세요!”최군성과 배윤아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한참을 웃었다.이 성격으로 보아 정말 친할머니를 쏙 빼닮았다.보아하니 가원이는 앞으로도 여리고 약한 소녀보다는 할머니처럼 강렬한 존재감을 가진 멋진 여성이 될 것 같았다.회전목마를 다 타고 난 뒤, 최가원은 큰 아이스크림콘을 사서 맛있게 먹고 있었다.최군성과 배윤아는 최가원 뒤를 따라 걷고 있었다. 세 사람은 놀이공원 속 조용한 숲길을 따라 산책하며 햇볕을 만끽하고 있었다.“여기 정말 예쁘다!”배윤아는 주위를 둘러보며 감탄했다. 작은 자갈이 깔린 길은 운치가 있었고 작은 숲에는 오동나무와 은행나무가 가득했다. 가을이 되면 황금빛으로 물드는 곳이었다.“그러게. 좋은 곳이긴 한데 운영이 예전 같지는 않네.”최군성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시설이 낡고 첨단 기술도 없는 걸 보면 오래 유지되긴 힘들겠네.”“그건 몰라!”배윤아가 최군성을 쳐다보며 말했다.“보기엔 이 놀이공원, 만화적인 매력이 있어. 그렇지 않아?”“음, 확실히 그렇네.”최군성은 고개를 끄덕였다.“만약 만화 영화의 촬영지로 쓰인다면 정말 괜
그때, 배윤아가 멀리서 허둥지둥 달려왔다.“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배윤아는 화장기 없는 얼굴에 검은 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가원아, 정말 미안해! 정신없이 그림을 그리다가 시간을 놓쳐버렸어... 그래서 이제야 오게 됐어. 나 용서해줄 수 있을까?”배윤아는 숨을 헐떡이며 허겁지겁 사과했다. 손끝에 묻은 물감 자국도 미처 닦아내지 못한 모습이었다.하지만 최가원은 환하게 웃으며 작은 새처럼 배윤아의 품에 뛰어들었다.최군성도 배윤아 옆으로 다가가며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가원아.”체육 선생님이 배윤아를 가리키며 물었다.“이분도 네 가족이니?”“네!”최가원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배윤아는 얼굴이 살짝 붉어졌고 무심결에 최군성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이내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그 순간, 최가원은 갑자기 중요한 사실을 떠올렸다. 윤아 이모를 오게 한 이유가 선생님에게 소개해 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최가원은 둘째 삼촌이 더 좋았다.평소 삼촌이 자신을 자주 놀리곤 했지만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언제나 든든히 곁을 지켜주는 사람이었다.최가원은 작은 이마를 찌푸리며 잠시 고민하다 부모님의 말씀을 어기고 체육 선생님에게 이모를 소개하지 않기로 결심했다.체육 선생님은 언제든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 수 있지만 세상에 단 하나뿐인 둘째 삼촌만큼은 절대 바꿀 수 없었기 때문이다.최가원은 한 손으로 최군성의 손을, 다른 손으로 배윤아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러고는 뽐내듯 고개를 들고 귀여운 목소리로 외쳤다.“선생님, 잘 보세요! 이쪽은 우리 둘째 삼촌이고요, 이쪽은... 우리 둘째 이모예요! 앞으로 둘이 저를 자주 데리러 올 거예요!”체육 선생님은 가볍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하지만 최군성과 배윤아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고 얼굴은 동시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애가,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네?”최가원은 어리둥절했다.두 사람은 말투부터 표정까지 완벽히 똑같았다.“그만하고 빨리 집에 가자!”최군성은
“저는 이 아이의 둘째 삼촌입니다!”체육 선생님은 잠시 생각하더니 무릎을 굽혀 부드럽게 최가원에게 물었다.“가원아, 이 사람 알아?”최군성은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불만스럽게 말했다.“아니, 선생님! 저를 못 믿으시겠단 건가요?”“정말 죄송합니다.”체육 선생님은 예의 바르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건 유치원 규정이라 어쩔 수 없습니다. 저희는 모든 아이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하거든요. 평소에 가원이는 보모나 경호원, 때론 부모님이나 할머니, 할아버지,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데리러 오셨죠. 가끔은 지용 삼촌이나 인서 이모도 오셨는데, 둘째 삼촌이라는 분은 없었던 것 같아서요... 그래서 다시 확인한 겁니다. 아이를 모르는 분께 맡길 순 없잖아요.”최군성은 말문이 막혔다.사실 최군성이 유치원을 방문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만약 ‘경쟁자’를 확인할 일이 아니었다면 이곳에 올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가원아, 이 사람 알아?”체육 선생님은 다시 물었다.최군성은 조카에게 눈짓을 보내며 도움을 요청했다.하지만 최가원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최군성은 조카를 놀리듯 평소처럼 귀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입을 벌리고 혀를 내밀면서 목을 조르는 시늉을 했다.평소에도 삼촌과 조카는 이런 유치한 장난으로 서로를 놀리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서로 장난감을 뺏거나 간식을 두고 자주 다퉜다. 심지어 그림 도구를 놓고 실랑이를 벌이다 서로 몸싸움까지 하는 모습은 어린아이와 다를 바 없었다.최가원은 늘 삼촌에게 밀려 속상해하며 발을 동동 굴렀었다.오늘, 드디어 복수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최가원은 커다란 눈을 반짝이며 장난스럽게 미소 짓더니 천천히 말했다.“모르는 사람이에요!”“뭐?”최군성은 당황한 나머지 거의 뛰어오를 뻔했다.“이 꼬맹아!”최군성은 조카의 머리끈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체육 선생님은 아이를 납치하려는 줄로 오해해 재빨리 최군성의 손목을 붙잡아 힘껏 비틀었다.“아!”최군성은 고통을 느끼며 몇
하지만 배윤아와 최군성은 지금의 관계에 매우 만족스러워 보였다.지난 2년 동안, 두 사람은 함께 그림을 그리고 저작권을 판매하며 작품을 각색했다. 나아가 함께 애니메이션 감독으로도 활동했다. 두 사람은 함께 바쁘게 뛰어다니며 서로를 의지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일상의 소소한 기쁨을 함께 나누며 예술적 영감도 서로 나눴다.두 예술인이 함께 지내는 만큼, 각자의 예술적 견해를 두고 종종 불꽃 튀는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최군형과 강소아는 몇 번이나 두 사람의 관계가 정말 끝나버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그러나 방금까지 싸움닭처럼 티격태격하던 두 사람은 언제 그랬냐는 듯 웃으며 화해했고 화실 안은 금세 따스한 온기로 가득 찼다.강소아가 딸에게 물었다.“엄마가 알려준 말, 다 전했어?”최가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대답했다.“삼촌 반응은 어땠어?”“음...”최가원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삼촌한테는 별로 효과가 없는 것 같아요!”“뭐라고?”강소아는 놀란 얼굴로 물었다.옆에서 듣고 있던 최군형은 강소아를 끌어안으며 웃었다.“찮아, 천천히 풀어가자. 군성이는 생각보다 고집이 센 편은 아니니까.”“그래도 이렇게 질질 끌고 있으니까...”강소아는 여전히 답답한 표정이었다.“걱정하지 마.”최군형은 딸을 바라보며 물었다.“가원아, 내일 유치원 끝나면 누구 손잡고 나올 거야?”최가원은 크림 케이크를 한입 먹던 중 아빠의 말에 신이 나서 고양이 같은 얼굴로 대답했다.“체육 선생님!”“정답이야!”부녀는 힘차게 손뼉을 마주쳤다.다음 날, 최군성은 유치원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유치원 정문에 나타났다.최군성은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늘 폴로셔츠와 청바지 같은 편한 옷만 입던 그가 오늘은 세련된 정장을 입고 머리까지 깔끔하게 손질했다.평소 화실에서의 부스스한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최군성의 외모와 체격은 최씨 가문의 젊은 세대 중에서도 눈에 띄는 인물이었다. 외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남양 제일 미남’의
최군형은 방금 다 먹은 닭 날개 꼬치를 들고 최군성을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꼬치를 던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엄마가 항상 옳다니까. 넌 정말...”최군성은 당황스러워하며 물었다.“뭐가?”최군형은 이를 악물며 한 마디로 대답했다.“유난이야!”그 말을 내뱉고는 최지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최군성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어리둥절했다. 멀찍이서 바라보니 저쪽은 꽤 북적거리고 있었다. 최군성의 내면 깊은 곳에서 ‘흥겨운 분위기를 즐기는 본능’이 슬며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최군성은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스케치북을 펴고 빠르게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다른 사람들은 대충 윤곽만 그린 반면, 특정 인물을 그릴 때만큼은 세심하게 한 획 한 획 공들여 그려내어 풍경 속에서도 돋보이게 했다....모든 일이 마무리되었고 이제 남은 건 최지용과 백인서의 결혼식이었다.최군형도 두 사람의 결혼을 돕고 싶어 최근 며칠 동안 집에 머물며 부모님과 함께 세심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지용이와 인서는 둘 다 조용한 걸 좋아하니, 웅장한 것보다는 소박하고 아기자기한 결혼식이 더 잘 어울릴 것 같구나.”최연준은 상자에서 온갖 보물들을 꺼내며 결혼 선물로 줄 것을 고르고 있었다. 그중 강서연은 분홍빛 진주 세트를 한눈에 알아보고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이게 딱이겠네! 인서에게 정말 잘 어울릴 거야.”“엄마.”최군형은 살짝 놀라며 말했다.“그건 외할아버지께서 엄마에게 주신 거잖아요. 남양 주변 해역에서만 나는 진주라면서요.”“맞아, 그런데...”강서연은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말했다.“분홍색은 젊고 사랑스러운 느낌이잖아. 이제는 엄마한테 조금 안 어울릴지도 모르겠어.”“누가 그래!”최연준은 즉각 반박하며 손을 뻗어 진주 세트를 집어 들려 했다. 그러자 강서연은 그의 손등을 톡 치며 진주를 되찾아왔다.“인서에게 줄 거니까 당신은 끼어들지 말아요!”“우리 다른 선물을 하자고! 이건 당신이 간직해야 할 물건이야!”두 사람은 한동안 실랑이를 벌였
강소아가 손짓하자 최지용은 더는 망설이지 않고 백인서에게로 달려갔다.“이제 딸을 보러 가야겠네요!”강소아가 웃으며 말했다.“저 대신... 인서 좀 돌봐줄 수 있을까요?”최지용은 그 말에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아까는 주저하며 다가가지 못했던 이유가 있었다. 바로 주변에 권욱과 강소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사람은 백인서의 오빠였고 다른 한 사람은 그녀의 절친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섣불리 다가가면 괜히 이상하게 보일까 봐 망설였다.최지용이 어깨를 펴고 당당히 백인서의 어깨에 손을 얹으려는 순간, 누군가 그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뭐 해요?”최지용은 깜짝 놀랐다.“너야 말고 뭐해?”권욱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감히 내 눈앞에서 내 동생한테 손대는데 어떻게 보고만 있어?”“...”최지용은 당황해서 말을 잃었다.생각해 보면 두 사람은 처음 만난 순간부터 뭔가 삐걱거렸던 것 같았다. 서로 영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그땐 권욱이 백인서의 오빠라는 사실을 몰랐기에 오히려 잠재적 경쟁 상대로 여기기도 했었다.그리고 지금... 더욱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이 되어버렸다.“쓸데없이 귀찮게 하지 말고 물러나!”권욱은 두 사람 사이에 서서 최지용을 흘겨보며 말했다.“동생과 나에겐 나눌 얘기가 산더미처럼 쌓였으니 방해하지 마!”“할 얘기가 뭐가 그렇게 많은데요?”“예를 들면... 인서가 권씨 가문에서 맡게 될 직책 같은 거?”“그나저나!”최지용은 그제야 떠오른 듯 고개를 치며 말했다.“아까 권욱 씨 입으로 직접 말했어요. 최상 그룹과 권오 그룹이 협력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권씨 가문이 진정성을 보여주기 위해 동생을 우리 최씨 집안에 시집보내겠다고요!”“내가 그런 말을 했었나?”권욱은 태연하게 모른 척하며 말을 돌렸다.“내가 무슨 말을 했었는지 기억이 안 나네.”“저기요, 권욱 씨!”두 남자가 티격태격하는 사이, 백인서는 살짝 뒤로 물러나 두 사람의 시야에서 벗어났다.백인서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잔잔히 미소 지었다. 과거에는
손님들이 웅성거리며 비명이 들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백인서?”배윤아가 일부러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큰 소리를 질러?”“아니야... 난 백인서가 아니야!”백시연은 목이 쉬도록 외치며 갑자기 강소아를 돌아보았다.“말해봐! 아까 다 알고 있었던 거잖아? 내가 백인서가 아니라는 걸! 모두가 알 수 있게 똑똑히 말하라고!”“인서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강소아는 담담하면서도 비웃는 표정을 지으며 차분히 백시연의 손을 밀어냈다.“혹시 술이라도 마신 거야? 취한 것 같아.”“강소아 씨!”백시연은 분노에 치를 떨며 외쳤다.강소아는 백시연의 손을 잡고 안쓰럽다는 듯이 바라보며 말했다.“인서야, 우린 자매잖아. 여기서 소란스러운 모습 보이지 말자. 오늘은 어쨌든 육씨 가문의 중요한 날이기도 하고 내 딸도 여기 있어... 그러니까, 제발 진정해 줘.”“아니야...”“인서야!”“아니라고! 아니라고!”백시연은 두 손으로 귀를 막고 한 발짝씩 뒤로 물러섰다.“난 백인서가 아니야! 몇 번을 말해야 믿을 거야?”배윤아는 피식 웃으며 백시연의 팔짱을 끼고 태연히 말했다.“어머, 백인서. 왜 그래? 백인서가 아니면, 왜 백인서 얼굴을 하고 있는 건데? 그런데... 굳이 너와 백인서의 다른 점을 꼽으라면... 손목에 그림이 있다는 거?”“비켜!”백시연은 배윤아를 거칠게 밀어내고 다급히 무대를 향해 뛰어갔다.백인서는 고요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마침내 기다리던 이 순간이 왔다.백인서는 천천히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눈앞의 백시연을 바라보았지만,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눈앞의 이 사람은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지옥에서 온 악마처럼 보였다.백인서는 문득 생각했다. 어쩌면 백시연은 진짜 악마일지도 모른다고. 사람은 누구나 두 가지 얼굴을 지니고 있다. 한쪽은 천사, 다른 한쪽은 악마. 그리고 자신과 백시연 같은 쌍둥이의 운명은 그런 인간의 본성을 극대화해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가면은 순금으로 빚어졌고 가장자리에는 보석이 촘촘히 박혀 조명이 닿을 때마다 눈 부신 빛을 흩뿌렸다.백시연은 그 자리에 선 채 몸이 굳어버렸다.“이... 이럴 수가!”그 사이, 백인서는 이미 무대 위로 올라가 권욱 옆에 서 있었다.권욱은 이어서 말했다.“이분이 바로 제 이복동생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늘 제 동생을 걱정하며 꼭 찾아달라고 당부하셨죠. 이제야 동생을 찾게 되었습니다!”권욱은 백인서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의 눈빛 속에는 진심 어린 애정과 따스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솔직히 말씀드리면, 처음엔 동생의 출생에 대해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죠. 우리는 결국 한 가족입니다. 동생을 찾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동생이 그동안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요... 우리 권씨 가문이 제 동생에게 너무 많은 빚을 졌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하늘의 뜻일지도 모릅니다. 동생의 존재는 제 딸의 목숨을 구하기도 했으니까요. 그래서 이분은 제 동생일 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의 은인이기도 합니다!”객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오고 몇몇은 감동에 겨워 눈가를 붉혔다.하지만 백시연의 머릿속은 텅 비어 있었다.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동생이란 말인가? 그리고 왜 저 여자도 가면을 쓰고 있는 걸까?분명 백인서는 종수가 지하실에 가둬뒀고 곧 처리될 운명이 아니었던가.“그리고 이어서 발표하겠습니다!”권욱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권씨 가문의 재산 중 절반을, 이 세상 유일한 동생에게 넘기겠습니다!”“뭐... 뭐라고?”백시연의 온몸은 떨림으로 굳어졌고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갔다.“아니야... 이건 아니야!”“뭐가 아니야?”강소아가 일부러 물었다.“인서야, 어디 아파?”“그게....”“권 대표는 네 직장 상사잖아? 상사가 가족을 찾은 거니 축하해줘야지!”백시연은 차가운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강소아는 낮게 웃음을 흘리며 다른 이들에게 들리지 않게 백시연의 귀에 속삭였다.“그렇게 백인서의 자리가
“그게... 무슨 뜻이에요?”백시연은 침착함을 가장하며 입을 열었지만, 권욱의 눈빛을 똑바로 마주치지 못했다.“이 카드가 제 거 아니면 누구 건데요?”“난 그런 말 한 적은 없는데?”권욱의 입가에는 여유로운 미소가 번졌다.“그냥 문득 우리 아내도 이런 비슷한 카드를 몇 장 가지고 있던 게 떠올랐을 뿐이야. 카드 색깔도 이런 파란색이었고 뒷면에는 대나무 무늬의 홀로그램이 새겨져 있었어. 조씨 가문은 학문을 중시하는 전통을 지닌 집안이라 대나무처럼 강인하고 꿋꿋한 식물을 특별히 아낀다고 하더군. 한번 뒤집어 확인해 볼래?”백시연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가 이내 창백해졌고 손은 카드 위에서 더욱 굳어졌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백시연은 강소아를 찾아갔다.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약속했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면서 묘안석이 그렇게 비싼 줄 몰라서 서둘러 나오느라 준비가 부족해 지금은 이 카드밖에 없다고 둘러댔다.그러고는 억지로 친근한 미소를 띠며 애써 밝은 표정을 지었다.“소아 언니, 우리 자매처럼 친한 사이잖아요. 언니 딸은 곧 제 딸이나 다름없죠! 가원이에게 쓰는 돈이라면 하나도 아깝지 않아요!”강소아는 미소를 머금고 백시연의 손에서 카드를 슬쩍 가져가며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정말? 고마워! 나중에 가원이가 크면 널 두 번째 어머니로 생각할 거야.”백시연의 얼굴 근육이 떨렸지만 억지로 미소를 유지하며 애써 태연한 척했다.“인서야.”강소아는 다정한 눈빛으로 백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요즘 권욱의 공익 프로젝트를 도맡아 관리하고 있다면서? 잘한다는 칭찬이 자자하더라. 몇 번이나 넌 정말 유능한 관리형 인재라고 말했어.”“아... 그래요?”백시연은 속으로 긴장하며 애써 태연한 척했다.“그럼!”강소아가 웃으며 말했다.“그래서 앞으로도 너한테 정말 잘해줄 생각이야.”그 말을 듣자 백시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10억 원을 써서 강소아의 호의를 얻은 거라면 나쁘지 않은 거래라는 생각이 들었다.“소아 아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