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에 앉아 있던 최군형이 고개를 돌려 배인서와 강소아를 쳐다봤다.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배인서는 강소아의 일에 특히 마음을 썼다. 사람을 시켜 조사를 해봤지만 배인서가 현지 사람이 아니고, 부모님이 모두 돌아갔다는 정보 외에는 특별한 게 없었다.최군형이 인상을 찌푸렸다. 배인서가 강소아를 향한 마음이 조금 불투명한 것 같았다.“왜 멍하니 있어요?”강소아가 최군형의 손을 잡았다.최군형은 강소아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아니에요. 그다음으로 뭘 하면 좋을지 생각해 봤어요.”“뭘 해야 하는데요?”최군형이 비서를 향해 손짓했다.그러자 멀쩡하게 틀어지던 홍보영상에 조금 변화가 생겼다.아이들이 호세연을 향해 더러운 물을 뿌리고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혼란스러워졌다. 화면을 돌리자, 보육원 시설이 낡고 해진 게 보였으며, 방안의 노인들은 휠체어에 앉아 절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돌봐주는 사람이 없어 방안은 축축하고 어두웠으며 복도의 구석에는 곰팡이가 가득했고 뒤뜰에는 잡초가 무성했다.보육원이라기보다는 공포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무대 아래 사람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고 그 장면에 경악했다.호정길의 안색도 순식간에 어두워졌는데 두 눈이 휘둥그레지고 입술을 덜덜 떨었다.“대표님, 지금...”그리고 화면은 회색 하늘로 고정되었다.“이게 대체 무슨 일이래?”김자옥이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아, 세연이 말을 전하지 않았나 보구나. 그날 보육원에서 아이들에게 괴롭힘당하는 걸 보고 우리 군형이가 신고했단다. 그런데 그런 일을 숨겼다니, 정말 큰일을 해낼 아이로구나.”호정길은 입술을 벙긋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정길아.”김자옥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세연이 참는다고 해도 난 참을 수가 없었단다. 어떻게 이렇게 사람을 괴롭힐 수가 있는 거지? 아비가 되어 넌 참을 수 있겠느냐?”“지금...”“그래서 신고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쪽으로 조사도 해보았단다.”호정길은 식은땀을 흘렸고, 손에 쥔 와인잔은 부서질 것처럼 부들거렸다.역시 한치의
김자옥은 지팡이로 바닥을 쿵쿵 때리더니, 다시 번쩍 들어 스크린을 가리켰다.“두 눈 똑바로 뜨고 보거라. 이런 천리에 어긋나는 일에 감히 우리 김씨 가문을 끌어들이다니. 정말 몇 대가 친분을 쌓아온 게 부질없다는 생각이 드는구나!”데이터 보고서에 따르면 어떤 자금은 김씨 가문에 유통되도록 계획되었다. 하지만 김자옥은 출처가 불분명한 돈은 어떤 형태로든 유통될 수 없게 미리 막아두었고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그러니 호정길이 세운 대책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사실 호정길은 이 일로 김씨 가문을 함께 끌어내리려 했다...최군형이 주변을 둘러보자 변장한 경찰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호정길은 여전히 김자옥 앞에서 연기를 이어갔다.“대... 대표님! 저도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호씨 가문이 투자했던 여러 프로젝트가 망하고 액수가 너무 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자선 성금에 손을 댄 거예요.”그리고 김자옥의 팔을 잡고 그녀의 앞으로 무릎을 꿇었다.김자옥은 경멸스러운 눈길로 호정길을 바라봤다.“그런 말은 이제 경찰서에 가서 하거라!”“대표님!”“네가 사실대로 말하지 않을까 미리 영국 쪽에도 증거를 제출했어! 너희 호씨 가문이 벌인 일은 이 한두 가지가 아니더라고!”김자옥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자선이라는 허울로 사채업을 해서 얼마나 많은 가정을 파탄으로 만들었는지 알기나 알아? 그 돈을 흥청망청 쓰면서 밤에 잠은 잘 오던가?”호세연도 김자옥의 손을 잡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애원했다.호정길은 겉으로 보기에는 많이 당황한 것처럼 보여도 사실 속으로는 아주 이성적이었다. 호세연이 김자옥의 손을 잡았고, 김자옥은 두 사람의 손을 뿌리치려고 하고 있었다...호정길은 이를 악물고 와인잔을 순식간에 깨부수더니 조각을 주워 김자옥의 목에 가져다 댔다!“꺄!”주변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김자옥과 가장 가까운 사람은 오직 호정길과 호세연 둘뿐이었다!김자옥도 많이 당황한 눈치였으며 온몸이 굳어져 미처 다른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 호정길은 그녀의
김자옥의 목이 칼에 베여 피부가 살짝 찢어지며 피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어서 호정길은 호세연의 손에서 총을 받아 들고 김자옥의 관자놀이에 겨누었다.이것이 호정길이 미리 계획한 작전이었다.만약 호정길의 추악한 비밀이 드러나면, 어떻게든 김자옥이나 최씨 집안의 누군가를 인질로 삼아 자신이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도록 준비해 두었다.“최연준!” 호정길이 턱을 치켜들며 소리쳤다. “당신 사람들 모두 물러나게 해!”최연준은 이를 꽉 물었다. 그의 주먹이 약간 떨리고 있었다. 비록 사전에 준비했지만, 호정길이 총을 가지고 행사장에 들어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그 총이 어떻게 보안 검색대를 통과했는지도 생각지 못한 일이다.강서연은 최연준의 손을 살짝 잡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 순간 강서연은 깨달았다. 최씨 집안에 내통자가 있었고 호정길과 공모해 그가 총을 쉽게 가지고 들어오게 했다는 것을.그러나 지금은 그 내통자가 누구인지 따질 시간이 없다.최연준은 차가운 숨을 들이마시고 어렵게 손을 들어 모두에게 후퇴하라는 신호를 보냈다.“그래, 잘하고 있어!” 호정길이 냉소를 지으며, 김자옥을 끌고 한 걸음 한 걸음 문 쪽으로 물러났다.“호 선생님.” 강서연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차분하게 말했다. “일이 너무 커져서 끝낼 수 없게 되면 양쪽 모두에게 손해가 될 것입니다. 원하시는 조건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저희가 꼭 들어드리겠습니다.”“잊지 마십시오, 선생님께는 딸이 있습니다.” 강서연은 호세연을 한 번 쳐다보며 말했다. “우리 모두 부모입니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아이에게는 길을 열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강서연의 눈은 예리했다. 강서연은 호세연의 두려움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호세연은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아가씨로 이런 상황을 전혀 경험해 보지 못했다. 이 순간, 아버지 곁에 있지 않으면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보였다. “세연아.” 강서연은 부드럽게 말했다. “기억나니? 어릴 때 우리 집에 왔을 때 내가 구워준 작
“돈과 사람을 교환하더라도, 준비할 시간을 조금은 주셔야 합니다.”강서연은 위급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침착함을 유지했다. “호 선생님, 저희 어머니께서는 연세가 많으셔서 이런 일로 더 이상 괴로움을 겪으실 수 없어요. 만약 어머니께 무슨 일이 생기면, 선생님께서는 감옥에 가실 뿐만 아니라 아무런 이익도 얻지 못하실 겁니다.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 잘 생각해 보세요.”호정길은 눈을 굴리며 김자옥의 목을 조르던 손을 잠시 느슨하게 했다가 다시 강하게 움켜쥐었다.“나를 속이려는 거야? 흥! 최 여사, 아직 한참 멀었어.”“허 아저씨!”이때, 강소아가 앞으로 나섰다. 강소아는 강서연의 팔을 붙잡아 뒤로 물러나게 했다.강서연의 마음은 조마조마해졌고 강소아의 부드러운 목소리만이 들렸다.“호 아저씨, 최 여사의 말을 믿지 않으신다면, 우리 거래를 하나 하죠. 어떠세요?”“어차피 인질이라면 누구를 데리고 있어도 같은 거잖아요. 그러니 저로 바꿔주세요... 저를 할머니와 바꿔주세요!”“유자야!”강서연은 놀라며 강소아를 힘껏 끌어당겼고 다시 최군형이 와서 강소아를 데려가게 했다.그러나 강소아는 강서연의 손을 놓고 최군형을 한 번 쳐다보며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최군형은 입술을 꽉 다물었지만, 그의 깊고 인내심 있는 눈빛에는 걱정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다 최군형은 멀리서 한 소녀가 언뜻 보였다. 그 소녀는 야구 모자를 쓴 채 사람들 사이를 조용히 움직였고 손에는 배홍이 강소아에게 준 권총이 쥐어져 있었다.“호 아저씨.” 강소아는 호정길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당신 딸이 군형 씨를 좋아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어요. 제가 호연 씨의 연을 망친 사람입니다... 그리고 복지원 사건의 시작도 저였어요. 그 아이들에게 오물을 던지게 하고 경찰을 불러 자선기금 조사를 하게 한 사람도 바로 저였어요.”강소아는 한 마디씩 말하며 천천히 발을 움직여 호정길의 주의를 끌었고, 배인서가 각도를 잡고 시간을 벌 수 있도록 했다.호정길은 강소아의 발걸음에 맞춰 몸을 돌렸다
시간이 천천히 흘러갔다. 호정길이 김자옥을 끌고 방으로 들어간 지 고작 5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최연준과 강서연에게는 다섯 세기가 지난 것처럼 느껴졌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이 상황을 보고하러 달려왔다.“범인이 인질을 창문 근처에 묶어놓았습니다. 그의 손에는 총과 칼이 있어 강제로 진입하기 어렵습니다.”“방의 시야가 좋지 않나요?”강서연은 초조한 마음에 물었다.“시야는 좋습니다만...” 경찰이 잠시 머뭇거렸다. “범인이 교묘하게도 김 회장을 창문 앞에 두었기 때문에 우리 저격수가 맞은편 건물에서 총을 쏘면 인질이 쉽게 다칠 수 있습니다.”“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강서연은 참아왔던 눈물을 결국 흘리고 말았다.최연준은 정신을 강하게 붙들어 보려 했지만, 지금 자신의 친어머니가 인질로 잡혀 있는 상황에서 아무리 자제하려 해도 완전히 침착해질 수는 없었다.최연준은 갑자기 손을 들어 경호원에게서 총을 빼앗아 들었다. 그의 이마에는 분노로 인한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다.“연준 씨!”강서연은 그의 손을 꽉 잡고 놓지 않으려 애썼다. 최연준은 아내의 간절한 눈빛과 마주치며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침착하세요...”강서연은 최연준을 껴안으며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기회를 기다려야 해요. 무리하게 밀어붙였다가는 어머니가 다칠 거예요.”“그래요, 아버지.”최군형은 최연준의 어깨를 붙잡고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와 엄마는 뒤로 물러나세요. 여기는 저에게 맡기세요.”강소아는 사람들에게 호텔의 전체 설계도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곧 두꺼운 설계도가 눈앞에 쌓였다. 강소아는 건물 구조를 연구하며 눈썹을 잔뜩 찌푸렸고 콧잔등에는 가느다란 땀방울이 맺혔다. 심장은 쿵쿵 뛰고 있었지만, 복잡한 데이터와 선들 속에서 돌파구를 찾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최군형도 함께 도면을 살펴보며, 두 사람은 연필로 도면에 표시하기 시작했다.“이 위치... 그리고 저기...”“군형 씨, 맞은편 건물의 이 방향, 여기가 좋은 지점인 것 같아요.”“하
최지용은 밤의 어둠을 이용해 몰래 맞은편 건물로 이동했다. 저격용 총을 설치하고 이어폰을 통해 맞은편과 연락을 주고받았다.경찰도 다른 두 명의 저격수를 보내 여러 각도에서 함께 호흡을 맞추고 있었다.“군형, 내 위치에서 보면 할머니는 일단 위험해 보이지 않아. 머리 상처는 이미 붕대로 감싸져 있고 호정길은 김 할머니 옆에 앉아서 권총과 단검을 할머니에게 겨누고 있어. 그 옆에 있는 호세연도 계속 김 할머니 옆에 서 있어.”“지금 총을 쏠 수 있나요?”“아직은 안 돼.” 최지용은 침착하게 속삭였다. “호정길이 사람들을 철저히 감시하고 있어. 주의를 흐트러뜨려야 해. 할머니와의 거리가 세 걸음 정도만 벌어지면 명중시킬 수 있어.”강소아는 천천히 깊이 숨을 들이마시면서 시간을 확인했다. 이미 한 시간이 넘게 흘러 있었다.강소아가 이 방의 카드 키를 만들 때 이미 방 안에 있는 모든 음식과 음료를 치워달라고 지시했었다.방 안의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극도로 긴장한 상태에서 한 시간 넘게 아무것도 먹지 않고 버티는 건 꽤 힘든 일이었다.이 방법이 김자옥에게 좋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강소아는 심호흡을 한 후, 문을 조심스레 두드렸다.“누구야?!”“아저씨, 저희 할머니가... 약을 드셔야 해요.”“약을 먹어야 한다고?” 방 안에서 호정길의 비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할망구는 정신이 멀쩡해. 지금 나를 노려보고 있잖아! 무슨 약을 먹어야 한다는 거야?”“아저씨, 아마 모르실 텐데 저희 할머니께서는 노인성 질환이 있어요.” 강소아는 차분하게 말했다. “약을 제때 드시지 않으면 발작이 올 수도 있어요. 그때가 되면 누구도 책임질 수 없을 겁니다.”“아저씨, 저희 아버지가 지금 돈을 모으고 있어요... 육씨 집안의 자금 유동성이 많아 단시간 내에 1조 원을 모으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아요.”방 안은 조용해졌다. 그때 최군형의 이어폰을 통해 최지용의 목소리가 들렸다. “호정길이 약간 동요하는 것 같아.”최군형은
최씨 집안의 사람들이 곧바로 유로화를 가득 채운 상자를 가져왔다. 강소아는 직접 종업원으로 변장해 위험을 무릅쓰고 물건을 전달하며 호정길과 대면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이 계획은 곧바로 최군형에게 거절당했다.그 순간, 강소아의 귀에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네가 갈 필요 없어, 내가 갈게.”“인서야, 너...”“아까 연회장에서 김 할머니를 구하지 못한 건 내가 너무 늦었기 때문이야.” 배인서는 강소아를 잠깐 바라보다가 야구 모자의 챙을 더 깊숙이 눌러쓰며 말했다. “이번에는 안심해, 내가 알아서 상황을 살필게.”“안 돼!” 강소아는 배인서를 붙들고 애원하듯 말했다. “어떻게 너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겠어? 너를 연회장에 데려온 건 나야, 난 너를 여기서 무사히 나가게 해야 해.”그러나 배인서는 강소아를 최군형의 품으로 힘차게 밀어 넣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소아를 잘 지켜줘요.”“배인서!”배인서는 뒤돌아보지 않은 채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강소아는 불안에 휩싸였다. 하지만 최군형은 강소아의 어깨를 살짝 눌렀다.“어쩌면... 배인서만의 계획이 있을지도 몰라.”“그래도 안 돼요!”“소아야, 배인서는 실력이 있는 사람이야. 분명 잘 해낼 거야. 게다가, 호정길은 배인서를 본 적이 없으니 배인서가 종업원으로 변장하는 게 가장 적합해.”“하지만...”“안심해, 배인서는 똑똑한 사람이니까 무엇을 해야 할지 잘 알 거야. 만약 무리라고 판단했다면 절대 무리하지 않을 거야.”얼마 지나지 않아 배인서가 돌아왔고 이미 종업원의 옷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배인서는 소매 속에 권총을 은밀히 숨겼다. 배인서는 최군형에게서 이어폰을 받아 최지용에게 연락했다. 최지용은 상대가 낯선 여성의 목소리로 바뀌자 살짝 당황하며 물었다. “실례지만, 당신은 누구시죠...”“내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지금은 사람을 구하는 게 급선무예요.” 배인서는 냉철한 목소리로 답했다. “지금부터 내가 문을 두드려 물건을 전달할 겁니다. 이때 호정길
곧 방 안에서 호정길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이 멍청한 계집애, 그것 하나도 제대로 못 나르냐? 빨리 들어와!”“아빠, 이 상자가 정말 무거워요!”호세연은 온 힘을 다해 상자를 끌어당겼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상자가 계속해서 팔을 짓눌렀다.상자의 반대편에서 배인서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배인서는 원래 작은 체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상자 뒤에 숨어 있으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배인서는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쓰고 얼굴의 대부분을 가린 채 호텔 종업원의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당황한 호세연은 배인서를 알아볼 수 없었다.배인서는 아예 상자 위에 몸을 기대어 버렸다.호세연은 상자뿐만 아니라 배인서의 무게까지 견뎌야 했기에 당연히 버티기 힘들었다.“아빠, 제발 와서 도와줘요! 나...”호세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배인서는 호정길이 서둘러 이쪽으로 오는 발소리를 들었다.배인서는 즉시 기회가 왔음을 깨달았다.배인서는 힘껏 상자를 밀어버렸다. 비록 몸집은 작지만 힘은 매우 강력했다. 호세연은 갑자기 밀려나 뒤에서 다가오던 호정길과 부딪혔다.“아아...”호세연이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호정길은 바로 뛰어올랐다. 배인서는 상자를 밟고 뛰어오르더니 몇 걸음 만에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호정길은 바로 뒤쫓아갔고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총을 뽑아 서로를 겨누었다.하지만 호정길은 조금 늦었고 배인서는 김자옥의 앞을 단단히 막으며 서 있었다. 배인서의 어린 얼굴에는 두려움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호정길은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그 순간 배인서의 입가에 비웃는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너...”“호 선생님.” 배인서는 총구를 높여 그의 이마를 겨누며 말했다. “저와 내기하시겠습니까?”“흥, 어린 계집애가, 네가 여기서 살아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배인서는 그를 무시하고 조용히 말했다. “당신의 목숨을 걸고 내기하자는 겁니다.”호정길은 이 작은 소녀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배인서의 말투가 호정길을 분노하게 했다. 호정
배현진은 마치 자신의 영혼이 몸을 떠나 허공을 떠도는 듯한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그는 허공에 떠 있는 듯 응급실의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사들이 급히 자신을 응급처치하는 모습과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로 누워 있는 자기 육체를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에서 해방된 듯한 감각이 그를 감쌌다.의식은 또렷했지만, 살아남겠다는 의지는 조금도 없었다.그날, 배현진은 오강호와 싸웠다.송윤희와 이혼 후 더 나락으로 떨어진 오강호는 그날 술집에서 술에 취해 있던 배현진과 우연히 마주쳤다.말다툼은 곧 몸싸움으로 번졌고 오강호는 배현진이 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자, 송윤지를 언급하며 조롱을 쏟아냈다.배현진은 격분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먼저 손을 댄 쪽이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오강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배현진은 오강호에게 몇 대 얻어맞고는 응급실로 실려 가고 말았다.지금도 배현진의 귀에는 오강호의 말이 메아리처럼 맴돌고 있었다.“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더니 별수 없군. 여자를 제대로 붙잡지도 못하고 결국 임지강에게 뺏겼다지? 하하하...”“배 도련님, 혹시 속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임지강이 송윤지에게 접근한 건 처음부터 다 계획된 거였을 거야!”“너 같은 쓰레기가 무슨 남자야. 약혼녀도 남에게 빼앗기고 말이야.”배현진의 가슴 한구석이 세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강한 힘이 그의 영혼을 다시 육체로 끌어당겼다.옆에서 심전도가 삐 울리더니 직선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의사들은 제세동기를 정리하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환자가 심장박동을 회복했습니다. 약물을 투여하세요.”배현진의 꼭 감겼던 두 눈이 살짝 떨렸다.그를 때린 사람이 임지강과 송윤지의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걸까?혹시, 그 둘 사이에 정말로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그는 알아내야 했다.죽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자신이 겪은 모든 수모를 반드시 임지강에게 똑같이 되돌려주겠다고 다짐했다....
임지강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제가 누나랑 형부께 누를 끼쳤네요.”“그렇게 생각하지 마.”임우정은 부드럽게 말했다.“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은 결국 운명 같은 거야. 따지고 보면 이 일의 원인은 나야. 내가 처음에 송윤지를 현진이에게 소개하지 말아야 했어.”“저 때문에 누나가 곤란해진 거예요.”임지강은 진지하게 말했다.“솔직히 말하면, 이번에 제가 조금 비겁한 방법을 썼어요. 누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배씨 가문을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배현진이 은행에 진 빚은...”임지강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임우정이 임지강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경원이와 수정이는 모두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야.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빚진 돈은 은행에 분할해서 납부할 거야.”“그럼 이자는 받지 않을게요.”임우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안도와 약간의 무력감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배현진에 대해서는.”임지강은 계속해서 말했다.“저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윤지를 괴롭힐 때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예상했어야죠. 지금 정신 상태가 좋지 않다거나, 심지어 정말로 정신이 나갔다 해도 그건 자업자득이에요.”“됐어, 봐줄 줄도 알아야지. 너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잖아...”임지강은 고개를 들어 임우정을 바라봤고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친 뒤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무슨 냄새예요?”갑자기 집 안에서 송윤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지강은 놀라며 황급히 돌아섰다.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송윤지가 급히 주방으로 달려 들어왔다.임지강도 곧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아이고, 이거 다 태웠네요!”송윤지는 놀라 외치며 불을 껐다. 그런 다음 행주로 냄비 뚜껑을 열었다.“이건 뭐예요?”“제가 만든 당근 소고기 스튜예요...”임지강은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송윤지에서 한번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는데 결과는 역시나 이 모양이었다.“물 안 넣었어요?”송윤지는 코를 찡그리며 물었다.“당근
임지강은 송윤지의 세계에 다시 한번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다.임지강은 이제 송윤지의 아파트에서 종종 머물렀다. 겉으로는 송윤지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라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은 간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송윤지는 몇 번 거절하려 했지만, 임지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국 그냥 놔두기로 했다.임지강은 비록 소파에서 자야 했지만, 그것조차도 행복했다.임지강은 언젠가는 송윤지의 곁에서 함께 아침을 맞이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임지강은 대부분의 시간을 송윤지와 함께 보내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그는 세 끼를 직접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송윤지가 과거에 자신을 위해 했던 일들이 얼마나 힘들고 정성이 담긴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고 과거 송윤지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다.가끔 송윤지는 집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임지강의 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꿈이 자꾸 송윤지를 괴롭혔지만, 송윤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임조강이 곁에 있으면 훨씬 마음이 놓인다는 것을.임지강은 배현진과는 완전히 달랐다.배현진은 늘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앞으로’ 같은 말로 막연한 미래를 약속하곤 했다.반면, 임지강은 ‘내가 있잖아’, ‘나한테 맡겨’, ‘두려워하지 마’ 같은 말로 송윤지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임지강의 말 속에는 사랑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었지만, 행동 하나하나에서 송윤지를 얼마나 아끼는지 충분히 느껴졌다.그날은 송윤지가 쉬는 날이었다. 임지강은 주방에서 당근과 소고기를 넣은 스튜를 끓이고 있었다.이 요리는 임지강이 새로 배운 것이었다. 임지강은 요리의 모든 과정을 조심스럽게 진행했고 조미료를 넣는 것도 마치 화학 실험을 하듯 정밀하게 측정했다.잠시 후, 요리의 향기가 퍼져 나갔고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냄비 뚜껑을 덮고 불을 약하게 조절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그가 문을 열자, 임우정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임우정은 복잡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누나?”
배현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임지강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소중히 여겨야 할 때 외면했으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임지강은 손가락으로 배현진의 코앞을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다시 내 여자를 건드리면, 소피아와 함께 감옥에서 만나게 될 거야.”임지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갔다.방 안에는 이제 배현진과 배윤아 두 남매만 남아 있었다.배현진은 멍하니 바닥에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후회와 절망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배현진의 모습을 보며 배윤아는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오빠...”배윤아는 조심스럽게 배현진을 부축하며 말했다.“사실, 오빠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진작에 알아봐야 했어. 소피아가 없었다면, 우리 집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배현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는 벽에 기대어 머리를 부딪치며 자신을책망했다.“오빠.”배윤아는 애써 배현진의 마음을 다독이며 말했다.“내 생각엔 임지강 씨는 오빠에게 교훈을 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진심으로 오빠를 망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닐 거야. 이미 송윤지의 복수를 한 거나 다름없으니, 더는 오빠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게다가 다행히도 오빠가 진 빚은 임지강 씨의 은행에서 대출받은 거니까, 그에게 시간을 좀 더 달라고 부탁하면 좀 봐주지 않을까?”“봐준다고?”백약곡의 쓴웃음은 공허하고 힘이 없었다.“지금 나는 아무것도 없어. 완전히 끝났어...”“오빠에겐 아직 나랑 부모님이 있잖아!”배윤아는 울먹이며 말했다.“우리는 여전히 가족이야! 오빠,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잘못했다고 해. 오빠가 진 빚은 부모님이 분명 해결하려고 하실 거야.”“내가 은행에 진 빚은 수천억이라고.”배현진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게다가 이 모든 걸 뒤에서 조종한 사람은 임지강이야. 그 사람은 절대 날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오빠...”배윤아가 더 말을 이어가려 했
“현진 씨, 제발 내 말 좀 들어봐!”소피아는 두려움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이렇게 한 건... 다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은 모든 걸 여동생에게 넘겼잖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랑 제임스는? 당신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여기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다면, 제임스를 어떻게 키우겠어?”“그만해!”배현진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소리쳤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소피아는 오직 자신과 제임스의 미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소피아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배현진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대하려 했던 건 소피아를 사랑해서지, 빚진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현진 씨...”소피아는 눈물을 흘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내가 잘못한 거 알아. 하지만 정말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이 나를 인정해 주길 바랐고 우리가 순조롭게 결혼하길 원했을 뿐이야. 그래서 내가...”“네가 원하는 건, 배씨 가문을 차지하는 거잖아?”“당신...”“윤아는 내 친동생이야!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내 등 뒤에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어?”배현진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소피아는 배현진의 외침에 놀라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소리쳤다.“배현진! 앞으로 네 여동생이랑 살 거야? 아니면 나랑 살 거야?”그 말에 배현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소피아의 뺨을 세게 때리며 속에 쌓여 있던 모든 후회와 분노를 폭발시켰다.소피아는 비명을 지르며 배현진의 얼굴을 긁으려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몸싸움을 벌이며 뒤엉켰고 배현진의 얼굴에는 소피아에게 긁힌 상처가 선명하게 남았다.그때, 경찰이 방으로 들이닥쳐 두 사람을 강제로 떼어놓았다. 차가운 수갑이 소피아의 손목에 채워졌다.배현진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소피아가 경찰에게 끌려 나가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도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 그의 존재는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온몸이 퍼즐 조각처럼 부서져 다시는 하나로
임지강은 대출 증명서를 꺼내 들었다. 서류에 선명한 배현진의 서명과 붉게 찍힌 도장은 마치 피로 얼룩진 조롱처럼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했다.“제 생각엔,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조 회장이 말했다.“지강아, 빨리 돈을 배 도련님 계좌로 송금하고 그 두 광산을 사들여라. 그리고 배 도련님,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임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너그럽게 대해주고 있는데, 도련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말도 안 되죠. 흥! 약속을 어기는 일은 배씨 가문의 품격에도 맞지 않잖아요, 안 그래요?”배현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후회와 절망이 그의 마음을 홍수처럼 휩쓸고 있었다.“배씨 가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오늘 제가 데려온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배 도련님도 보고 싶었을 겁니다.”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룸의 문이 열리며 배윤아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배현진은 배윤아를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놀라움은 곧 걱정과 초조함으로 변했다. 배현진은 재빨리 배윤아에게 다가가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윤아야, 괜찮아?”“나 괜찮아.”배윤아는 눈가가 붉어졌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 고작 사흘뿐이었지만, 그 시간은 마치 몇 세기가 흐른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그러나 배윤아의 시선이 소피아를 향하는 순간, 증오가 담긴 눈빛이 소피아를 사로잡았다. 배윤아는 이를 악물며 소피아를 가리켰다.“오빠, 바로 저 여자가 사람을 시켜 날 해친 거야!”“뭐라고?”배현진은 몸을 떨며 경악했다.소피아는 그제야 충격에서 벗어나 발악하듯 배현진 곁으로 뛰어들며 변명했다.“아니야! 내가 아니야! 윤아야, 너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네가 사라진 동안, 난 네 소식을 찾으려고 정말 애를 썼어. 난 정말로...”“거짓말하지 마세요!”배윤아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소피아 씨가 사람을 시켜 날 폭행하고 내 물건을 훔쳐 간 건 분명해요! 그리고 소피아 씨가 가장 원했던 게 배씨
“조 회장님, 이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요!”소피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항의했다.“우리가 그 광산을 사느라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지 아시잖아요. 대박을 기대했는데, 지금 헐값에 팔면 원금도 못 건질 뿐만 아니라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고요. 게다가 그 돈은 전부 은행 대출입니다.”“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나요?”조 회장은 다 피운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이건 아가씨가 주도한 일 아닌가요? 제 기억으로는 배 도련님이 처음엔 그 두 광산에 별 관심이 없으셨던 걸로 압니다만.”“조 회장님...”“배 도련님.”조 회장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말했다.“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오히려 추악한 수단으로 올라선 여자의 말을 믿었으니, 그 손해는 당연히 본인이 책임져야죠.”“지금 말 다했어요?”소피아는 벌떡 일어나며 격분해 외쳤다.조 회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짓누르듯 바라보았다. 그때 주변에 있던 부하들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섰고 소피아의 기세는 단숨에 꺾였다.“배 도련님, 매입자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배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 회장은 부하에게 매입자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뒤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본 배현진은 그만 충격에 말을 잃고 말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임지강과 송윤지였다.배현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다 테이블을 건드렸고 접시와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임지강은 송윤지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를 위해 의자를 빼주고 임지강도 옆에 나란히 앉았다.“배 도련님, 아는 분이시죠?”조 회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제가 따로 소개해 드려야 할까요?”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배 도련님.”임지강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제가 듣기론 도련님이 투자하신 두 광산이 이제 3200억밖에 안 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3400억에 사들이겠습니다. 도련님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도
화면에 띄워진 데이터는 충격 그 자체였다.두 사람은 멍하니 눈을 크게 뜬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친 듯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배현진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소피아 역시 어찌 된 일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소피아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우리가 1조를 들여 산 두 광산이라고! 무려 1조라고!”배현진이 소리쳤다.“가격이 분명 오를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지금 3200억으로 폭락한 거냐고!”“나도... 나도 모르겠어...”소피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 광산의 시장 가격을 철저히 조사했었단 말이야. 그 두 광산은 운산시에 있는데, 지금 운산시 광산 가격이 상승세잖아. 분명 손해 볼 투자가 아니었어.”“하지만 지금 상황 좀 봐.”배현진은 입술을 떨며 소리쳤다. 그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소피아, 그 1조는 전부 은행 대출금이야. 지금 난 은행에 수천억 빚을 졌고 이자도 엄청나다고.”“현진 씨, 진정해.”소피아는 급히 배현진을 달래며 말했다.“이 일은 조 회장이 중간에서 소개한 거래잖아. 조 회장에게 물어보면 모든 게 밝혀질 거야. 내가 직접 물어볼게.”...배현진과 소피아는 약속된 시간보다 훨씬 일찍 호텔 룸에서 조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배현진은 오늘의 만남을 위해 호텔 매니저에게 최고의 음식을 준비하도록 특별히 부탁했다. 테이블 위에는 호텔의 대표 메뉴들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다.조 회장이 방에 들어서자, 배현진은 그가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조 회장의 눈빛은 마치 코너에 몰린 쥐를 노리는 고양이 같았고 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쥐가 된 듯한 압박감에 사로잡혔다.“두 분이 너무 과하게 준비하셨네요.”조 회장은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위의 술잔을 힐끗 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이렇게까지 준비하실 필요는 없었어요. 나이
이른 아침, 소피아는 천천히 눈을 뜨며 옆에 누운 남자의 맨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배현진의 입술에 살며시 입맞춤했다.배현진은 그녀의 키스에 미소로 답하며 부드럽게 눈을 떴다.하룻밤의 열정에 지친 두 사람의 얼굴에는 희미한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제임스는 아직 안 깨어났어?”“이 시간엔 절대 안 일어나요.”소피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 위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그럼... 우리 한 번 더?”“아니.”배현진은 소피아의 손을 잡아 입술에 가져다 댄 뒤 가볍게 입맞춤하며 말했다.그는 정말로 피곤했다. 소피아는 도대체 어떻게 매일 밤 이렇게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는 걸까?소피아는 송윤지와 완전히 달랐다. 송윤지는 늘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그가 바라볼 때만 순수한 미소를 띠곤 했다.배현진은 문득 송윤지를 떠올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그는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했다.“자기야, 무슨 일이야?”“아, 별거 아니야.”배현진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맞다, 나 현진 씨랑 상의할 게 있어.”소피아는 배현진의 얼굴을 자신을 향해 돌리며 말했다.“제임스도 점점 크고 있어. 가정교사를 불러서 집에서만 공부시키는 건 이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또래 아이들과 학교에서 어울리는 게 필요하지 않겠어? 어쨌든 앞으로는 제임스가 배씨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을 사람이 될 테니까, 그렇지?”“음...”배현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소피아를 바라보았다.“그런데 장래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부모님이 이미 가업을 전부 윤아에게 넘겼잖아.”소피아는 미소를 띠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흡족해했다.배윤아 같은 풋내기는 소피아와 겨룰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배윤아를 기절시켜 조 회장의 카지노 앞에 던져 놓았기 때문이다.조 회장이 배윤아를 데려갔으니, 모두가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범인이 조 회장과 임지강이라고 믿을 것이다.혹시 조 회장이 색욕에 휘둘리는 사람이라면 더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