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연아. 이건...”“식기 전에 빨리 먹어요.”강서연은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라면을 너무 많이 먹으면 몸에 좋지 않다고 전에 몇 번 말해줬는데.”임우정은 코끝이 찡했고 눈시울이 붉어졌다.강서연은 그녀를 쭉 지켜보다가 더 참지 못하고 히죽히죽 웃어버렸다.“내가 처음으로 도시락을 해준 것도 아닌데, 이게 눈물이 나올 상황이에요?”임우정은 입안의 밥을 꿀꺽 넘기고 붉어진 눈으로 강서연을 바라보며 말을 할 듯 말 듯 하다가 끝내는 세 글자를 뱉었다.“미안해.”강서연은 마음이 찌릿했다.임우정이 자존심이 얼마나 센 사람인지, 누구랑 싸워도 지지 않을 뿐더러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그녀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임우정이 그녀를 위해 얼마나 애쓰는지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사실 그날은 그냥 친구 사이에 흔한 말다툼이었을 뿐, 이렇게 심각할 필요까지 없었다.강서연은 웃으며 임우정의 손을 잡고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며 말했다.“형제끼리도 싸우고 그러는데 우리가 길게 싸울 필요가 있겠어요?”“그래!”임우정도 시름을 놓고 웃었다.“서연아, 그래도 네가 만든 돈가스가 제일 맛있어!”“그러니까 라면은 적게 먹고 내가 도시락 쌀 때 언니 것도 같이 싸 올게요.”“헤헤...”임우정은 고운 치아를 다 내보이며 웃었다. 그녀는 몇 숟가락 더 들고 나서 손을 들어 맹세하였다. 얻어먹는 자는 감사할 줄 알았다.“서연아, 내가 다시는 현수 씨 나쁜 말을 하지 않을게. 맹세할게! 이제부터 현수 씨는 나의 제부로 모실게. 모든 일에서 두 사람의 편을 들게!”강서연은 그녀의 모습이 기가 차고 웃겼다. 그녀를 한참 지켜보다가 박장대소를 하였다.“그런데 말이 나와서 말인데. 왜 내 남편이 그렇게 눈에 거슬렸어요?”“그런 게 아니라...”임우정은 머쓱해서 웃었다.“그냥 난 네가 아까워서, 너의 짝에 대한 기대가 너무 높았나 봐. 너는 더 좋은 남자를 만날 거라 믿었어!”“현수 씨, 좋아요.”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래그래, 너만 좋으면
구현수는 자상한 미소를 띠고 품 안에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현수 씨.”강서연은 귀엽게 그의 품 안에서 얼굴을 묻으며 말했다.“아니면 우리가 좀 도와줄까요?”“도와준다고?”구현수은 이런 일은 경험이 없어서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 몰라 되물었고 그녀는 진지하게 답했다.“신 의사님이 아니었다면 우리도 함께 하지 못했을 거잖아요. 우리도 그분께 감사해야 해요! 이번에 우리가 도와 우정 언니와 잘 되게 하면 너무 완벽할 것 같아요.”구현수는 아무런 대꾸가 없었고 눈빛은 어둡고 깊었다.그는 그녀보다 더 많은 생각에 잠겼다. 그는 자신이 이런 일에 아무 생각 없이 휘말려 들어가는 것을 꺼렸다. 게다가 임우정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고 또 신석훈은 그에게 있어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기에 더욱 신중하게 되었다.하지만 강서연은 이미 신나서 오작교를 하고 싶어 했고 구현수는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강서연은 고양이처럼 귀엽게 머리를 그의 어깨에 기댔다.“현수 씨. 나 좋은 수가 떠올랐어요. 우리 넷이 같이 여행가요. 저랑 우정 언니도 마침 휴가가 있고, 놀러 가고 싶었던 곳도 있어요.”그녀는 신나서 핸드폰을 꺼내 보여주었다.아주 아름다운 온천 민박이었다. 오성의 외각에 위치한 명황산의 최상 빌라와 마주하고 있는 곳이었다. 강서연이 진작부터 가보고 싶어서 소장했던 곳이라 아름다운 풍경 사진을 보니 두 눈에서 빛이 어렸다.“왜 여기야?”구현수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이곳을 좋아해?”“여기 엄청나게 이름 있어요!”강서연은 흥분해서 설명했다.“검색해 보면 온천 민박 중에 여기가 평점이 제일 높아요. 주말은 육 개월 전부터 예약해야 한대요. 평일에 휴가 내서 가면 사람들로 붐비지는 않을 거예요. 조용하고 놀기도 좋고.”“당신은 계획이 다 있었구나.”구현수는 가볍게 웃었다. 보아하니 그녀가 여기를 매우 좋아하는 것 같았다. 만에 하나 그녀가 이 민박의 진짜 주인이 최연준인 걸 알게 되면 그래도 좋아할까?강서연은 그의 얼굴색이 이상한 걸 보았
“같이 여행하는 거 현수 씨 아이디어 아니죠?”신석훈은 그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맞아요. 강서연 아이디어예요.”구현수는 낮게 말했다.“서연이가 석훈 씨와 우정 씨가 잘되기를 바라요. 그래서 같이 여행 가자고 제안했죠. 둘이 얘기를 많이 나눴으면 해서.”“서연 씨가 애썼네요.”신석훈은 웃으며 주위를 살폈다.“이곳 정말 좋네요. 그런데 좀 이상해요.”“왜요?”“내가 찾아봤는데 민박집이 엄청 유명하던데. 오기 전에 사람들로 붐빌 거로 생각했는데 우리밖에 없네요? 주말 아니라도 너무 조용하지 않아요?”구현수는 가볍게 기침을 두 번 했다. 오기 전에 그는 이곳을 비워두게 했고 당연히 사람이 보일 리가 없었다.“하하, 보아하니 여기 경영 제대로 못 해서 망하는 거 아닐까 싶네요.”말문이 막힌 구현수는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뒤집었다.“사람이 많은 게 좋아요?”신석훈는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사람은 그래도 떠들썩한 데가 좋은가 봐요. 하하. 밥 먹으러 가도 가게가 사람이 적으면 나는 절대로 안 들어가요, 핫한 데 가서 줄을 설지라도.”구현수는 어이없어하며 대답했다.“칠성급 호텔도 사람이 적은데, 아무나 먹을 수가 없잖아요?”“허허, 이 사람이 ...”신석훈은 말문이 막혀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앞전에 밤낮없이 보살펴 목숨을 구해줬었건만 사람 민망하게 말이다.“둘이 뒤에서 뭐 하기에 그렇게 천천히 와요?”앞에서 강서연의 달달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구현수가 바라보니 강서연이 그를 향해 힘차게 손 흔들고 있었다. 강서연과 임우정이 서 있는데 뭔가 다른 사람이 더 있는 것 같았다.구현수는 눈빛이 바로 변하더니 경각을 높였다.‘이미 이곳을 통으로 빌려서 사람이 들어왔을 리가 없는데 이게 웬일이지?’“현수 씨, 빨리 와요!”강서연은 그의 팔을 붙잡았다.“여기 할머니가 손금을 봐준대요!”구현수는 흠칫했다.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절이 있기는 했다. 일부 스님이나 도사들이 여기를 지나다니는 것은 정상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그 말에 강서연의 머리가 하얘졌다.당혹스러워하던 그녀가 할머니한테 물으려다 곁의 구현수를 보고 깜짝 놀랐다.얼굴에는 그늘이 드리워 있고 눈빛은 더없이 매서워서 금방이라도 폭풍우가 몰아칠 것만 같았다.강서연은 그와 깍지 끼면서 낮은 목소리로 얘기했다.“할머니도 무슨 얘기를 하시는지 인지 못 하시는 나이라...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예상 밖으로 할머니의 귀가 밝아 듣고는 헤벌쭉 웃었다.“아가씨가 마음씨가 참 좋아, 좋은 사람은 좋은 일이 따를 거야.”“할머니 고마워요.”강서연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저희 남편이 좀 과묵한 데다 부리부리한 외모 때문에 오해를 자주 받지만 그래도 더없이 자상해요.”“허, 아가씨 궁합을 보고 싶은 게지?”강서연은 연신 머리를 끄덕였다.할머니는 손금을 힐끗 보고는 천천히 주머니에서 빨간 끈 두 줄을 꺼냈다.능수능란한 손재간으로 벼 이삭 같은 매듭에 빚는 동심결마다 정갈한 방울까지 더해 맑고 쟁쟁한 소리가 났다.“이 팔찌를 손목에 착용하거라.”할머니는 한자 한자 타이르듯 말했다.“방울이 울리면 아무리 먼 곳에 떨어져 있어도 서로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을 거야.”“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미간을 찌푸린 신석훈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이런 용한 물건이면 휴대 전화도 필요 없겠네요!”어리둥절해 있던 강서연은 돌아서 환한 얼굴로 할머니를 향했다.“할머니, 남편이랑 저는 오래오래 같이 있을 거라 떨어지지 않을 거예요.”“너희 언젠가는 떨어질 거야.”순간 하얗게 질려버린 강서연은 구현수의 손을 꼭 잡았다.“하지만...”할머니는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언젠가는 둘이 꼭 행복한 날이 올 거야.”강서연은 그제야 미간이 풀렸고 작은 보조개가 얼굴에 달려있었다.구현수는 심각한 표정으로 실눈을 떠서 쳐다보고는 그녀를 끌어당겨 자리를 떴다.“허! 이 할머니가 정말!”신석훈이 끼어들어 말했다.“나이 들어서 어떻게 되신 거 아니야? 그래도 마지막 말은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그녀가 팔지를 치우려고 하자 구현수가 뺏어서 주머니에 넣었다.“당신...”“너랑 나 하나씩 갖고 있어야지. 그 할머니가 그러셨잖아. 혹시라도 서로 헤어지면 안 되니까...”“퉤퉤퉤. 헤어지는 일은 없어요!”강서연은 두려웠다. 할머니가 얘기하실 때 신경도 안 썼는데 구현수의 입에서 ‘헤어진다’ 라는 말을 들으니 특별히 예민해진 그녀였다.“바보.”낮고 허스키한 구현수의 목소리 속에는 다정함이 있었다.“헤어진다고 한들 내가 놔주지 않을 거야!”“그럼요!”강서연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서로 눈빛을 주고받은 신석훈과 임우정은 동시에 웃음이 났다.그렇게 돌아다니던 네 사람은 민박집을 찾았고 가게 점장이 직접 마중 나와 민박의 가장 고급스러운 식당으로 안내했다.식당에 발을 들이자 신석훈과 임우정은 입이 떡 벌어졌다. 여기가 정녕 말로만 듣던 반년 월급을 팔아서야 겨우 한 끼 먹을 수 있다는 의화루인가? 강서연이 여기를 어떻게 예약한 거지!“점장님. 잘못 찾아온 거 아니죠?”강서연도 의아해하며 물었다.“인터넷으로 예약할 때는 기본 세트라고...”“맞아요. 여깁니다.”점장이 공손하게 손뼉을 치자 훈련받은 웨이터들이 저마다 산해진미를 그들 앞에 대령했다.눈이 휘둥그레진 강서연은 숨죽이고 있었다.사진으로만 봐왔던 의화루의 메인 요리들이 한 상을 가득 채웠다. 이 한상차림만 해도 그녀가 충분히 빈털터리가 되고도 남을만한 가격이었다!“점장님!”그녀는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고는 말했다.“강서연 씨. 예약하신 게 기본 세트가 맞습니다. 하지만 요 며칠 저희 가게에서 민박에 주숙하신 손님 중 행운고객을 선정하여 초호화 세트로 업그레이드하는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당첨된 번호가 바로 강서연 씨의 예약 번호입니다!”“정말요?”실제로 하늘에서 떡이 떨어지는 일이 있단 말인가!신석훈과 임우정은 그 자리에서 넋이 나갔다. 두 사람은 꿈을 꾸는 것 같아 마주 보았다.“진짜로? 운이 너무 따라주잖아요!”임우정은 흥분된 목소리로 주위를 뱅
둥근 식탁에 모두가 모여앉았다.차려진 음식들은 맛과 향 그리고 색감까지 완벽하게 어우러져 정교한 사기그릇에 담겨있어 저마다 최상의 화려함을 자랑했다.풍성함에 눈이 휘둥그레진 신석훈은 약을 탔는지 의심도 없이 다급하게 먹으려고 들었다.임우정은 웃으며 말했다.“이러다 은행카드 비밀번호도 순순히 불러드리겠어요?”“마음대로 하라고 그래요! 어차피 은행카드에 얼마 없기도 하고 이 한상차림 살 돈도 없어 다 먹으면 그만이니까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에요!”신석훈은 중얼거렸다.“역시 신 의사님이 계산이 빨라요.”“저 못지 않으면서요!”신석훈은 웃는 얼굴로 말했다.“나보다 많이 먹잖아요!”말하면서 젓가락으로 신석훈의 머리를 때리는 시늉을 했다.강서연과 구현수는 그들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에 서로를 바라보았고 눈에는 사랑스러움이 묻어있었다.“여러분. 모든 요리가 다 나왔습니다.”점장은 직원들을 불러 생선탕을 대령했다.“이건 쏘가리탕입니다. 명황산 아래 시냇물에서만 자라는 물고기는 신선하고 육질이 부드러우며 느끼하지도 않아 탕으로 드시기 제일 적합합니다.”그들은 앞에 있는 수프 그릇을 쳐다봤다.역시나 싱그럽고 향긋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쏘가리는 진하게 고아져 간이 잘되었고 복숭아 꽃잎으로 장식을 해서 로맨틱함을 한층 더했다.강서연은 습관적으로 물고기 눈알을 구현수에게 집어줬다.어릴 적 어머니가 건강하셨을 때 늘 그녀와 윤찬에게 생선요리를 해줬는데 요리가 다 되면 어머니는 항상 생선 눈알을 하나씩 나눠주곤 했다.생선 눈알은 눈을 맑게 해줘서 생선 중 가장 귀한 부위라고 어머니가 말씀해주셨다.강서연은 웃으며 구현수를 바라보았다.한쪽에서 지켜보던 임우정은 질투가 났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휴. 다른 집 남편은 사모님이 생선 눈알도 집어주면서 끔찍이 여긴다는데. 정말 선남선녀가 따로 없네. 부럽다 부러워!”“질투하세요?”신석훈이 놀려댔다.“여기 생선 많잖아요! 드시고 싶으면 집어 드시면 되죠!”볼 빨개진 강서연은 천천히 머리를 숙였다.구
“괜찮아.”훌쩍이던 그녀는 억지로 웃으며 어깨의 손을 토닥거렸다.“우정 언니.”강서연은 무언가를 말하려 머뭇거리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은 얼른 쉬어요. 무슨 일 있으면 혼자 담아두지 말고 내가 다 들어줄 테니까 나한테 얘기하고요. 얘기하고 나면 훨씬 나아져요. 딱히 얘기하고 싶지 않다면 나도 더 안 물을게요.”“서연아. 나...”임우정은 말하려다 다시 삼켰다.한참 후에야 다시 천천히 말을 꺼냈다.“나 석훈 씨한테 비하면 많이 부족한 거 같아.”“네?”“내가 부족한 것 같다고.”임우정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나... 전에 그 사람이랑...”더는 얘기하지 않았지만 강서연은 무슨 일인지 눈치로 알 수가 있었다.임우정은 늘 활발하고 털털한 성격이지만 남녀 사이 문제에서는 진지한 모습에 강서연도 조금 놀랐다.하지만 얼마나 사랑했기에 여자가 자신을 허락할 수 있단 말인가?강서연은 흠칫 놀라 그녀의 손을 잡아 꾹꾹 눌렀다.“우정 언니는 생각이 너무 많아요.”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동안의 일들이 잘못한 것도 아니고 숨겨야 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 사람과 정말로 사랑해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때 그 일만 없었더라면 아직까지도 같이 있었을 거잖아요. 맞죠?”임우정은 조용히 입을 꾹 다물고 한마디도 없었다.“우정 언니. 왜서 신 의사님을 안 받아줬는지 이해가 돼요. 어울리지 않는 게 아니고 언니 마음속에 그 사람 말고 다른 사람이 들어올 자리가 없는 거죠.”“서연아...”임우정은 울먹이며 말했다.강서연은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아기 안아주듯 흐느끼고 있는 그녀를 뒤에서 꼭 안아주었다.“솔직히 난 그렇게 큰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지금 때가 언제인데 이 정도 과거야 누구나 있는 거고 이젠 이런 건 일도 아니라고요. 신석훈 씨는 신경도 안쓸걸요?”“정말?”임우정은 웃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강서연이 이런 얘기를 할 줄은 몰랐다.“물론이죠.”강서연은 이어 말했다.“현수 씨가 그러는데 여자가 순결을 지켜
그녀는 문뜩 모래밭을 걸어보고 싶었다.강서연은 머리카락을 넘기며 슬리퍼를 신고 바닷가를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환한 미소가 가시질 않았다....구현수는 온밤 잠을 설쳤다.이제는 강서연이 곁에 없으면 잠에 들기 어려웠다. 하지만 강서연과 임우정이 절친 사이라 두 사람의 수다에 끼어들어 방해하면 속 좁은 사람으로 몰릴까 봐 말도 못 꺼냈었다.그래서 어젯밤에는 침대서 여기저기 뒹굴며 화풀이를 했었다. 눈은 방울보다 더 커져서는 속으로 수백 번이고 신석훈을 욕했었다.이번 여행은 누구를 위한 여행이란 말인가?!하지만 신석훈은 임우정과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를 이토록 손쉽게 저버렸으니 말이다. 신석훈의 코를 고는 소리가 어찌나 쩌렁쩌렁한지 옆방에서도 또렷하게 들렸다!구현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날이 슬슬 밝아지자 잠깐 눈붙여 안정을 취하려 했다.그 순간 방의 전화가 울렸다.“셋째 도련님. 서연 씨가 혼자 밖으로 나갔습니다.”“뭐?”그는 깜짝 놀랐다.“어디로 갔는데?”“아침 일찍 바닷가로 향해 저희 쪽에서 따라붙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가 저희 개인 바닷가가 아닌 공공구역이라 아직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습니다만 발견될까 봐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있습니다.”구현수는 실눈을 떴다.‘바닷가?’거기 경치가 좋지만 최씨 가문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었다. 현재 그곳은 여행객들도 거의 없는 데다 만에 하나 사고라도 난다면...구현수는 경계태세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바짝 따라붙어. 혹시라도 문제 생기면 책임을 단단히 묻겠어!”전화기 너머로 전전긍긍하다 다급하게 수긍했다.바닷가에 온 강서연은 슬리퍼를 한 쪽에 벗어두고 맨발로 부드러운 모래밭을 걷고 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바닷냄새를 몰고 머리카락을 스쳤다. 멀리에서는 바닷새가 날아다녔고 수평선에서 해가 서서히 떠올라 수면을 벌겋게 물들였다.강서연이 도시에서는 감상하기 어려운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다 갑자기 휴대 전화를 잊고 못 챙겨온 걸 한없이 후회했다. 이
“그... 괜찮아!”정승우는 억지로 미소 지으며 권온유에게 말했다. 정승우는 이곳에서 권온유를 반드시 데리고 나가겠다고 결심했다.그런데 이때, 공장 문이 “쾅” 하고 열리더니 곧바로 하이힐 소리가 들려왔다.정승우는 재빨리 권온유에게 눈짓했고 권온유도 알아채고는 즉시 땅바닥에 쓰러져 의식이 없는 척했다.정승우는 벽에 기대어 눈을 반쯤 감았다.“이 아이인가요?”영미의 목소리에는 차가운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맞아.”정대명은 영미를 흘깃 노려보며 묵묵히 대답했다.영미는 두 걸음 앞으로 다가서서 희미한 빛 속에 있는 아이를 살펴보더니, 곧 얼굴빛이 확 변했다.“이 아이... 혹시 권씨 집안의 막내딸 아니에요?”정대명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애초에 아이를 훔쳐 올 때 이 아이가 누구의 자식인지 알 리가 없었다.“정대명 씨.”영미가 차갑게 웃으며 돌아보았다.“제가 최씨 가문 집안 아이를 훔쳐 오라고 했지, 권씨 집안 아이를 훔치라고 했나요? 이러고도 저를 속이지 않았다고요?”“그게...”정대명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영미 아가씨, 어차피 목적은 백인서를 곤경에 빠뜨리는 거잖아? 그러니 누구를 훔쳐 오든 상관없지 않아? 아이를 훔치기만 하면 유괴범이 되는 거니까.”이 말은 영미에게만 충격을 준 게 아니었다. 정승우의 귀에도 또렷이 들어왔다.“좋아요.”영미는 깊은숨을 들이마신 뒤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이 아이는 잘 지키고 있어요, 제가 다시 연락할 테니까.”...한편, 권씨 집안은 완전히 뒤집혀 있었다.권욱은 조순영을 탓하며 아이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고 했고, 조순영은 오열하며 남편을 원망했다. 조순영은 권욱이 바깥에서 여자와 부적절하게 얽히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거라고 했다.“헛소리하지 마! 사람들이 나한테 어떤 소문을 퍼뜨렸는지 잘 알잖아. 결혼 생활 내내 너한테 부끄러운 일 한 적 없어.”“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정말 떳떳하게 행동했다면 왜 사람들이 당신만 가만두지 않는 건데?”며칠 전까지만
권온유의 질문에 정승우는 당황했다.권온유는 커다란 눈망울로 정승우를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했던 슈퍼맨 같은 오빠가, 이제는 먹을 것 하나 구하지 못하는 모습이 되어버린 것이다.정승우는 어색하게 입가를 씰룩이며 권온유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이야기를 이어갔다.“너, 정말 배고파?”“네!”권온유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듯 작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원래는 엄마랑 식당에서 밥을 먹으려 했어요. 엄마가 특별히 고등어조림을 준비해달라고 부탁하셨거든요... 엉엉... 엉엉...”“울지 마, 울지 마! 그냥 생선 하나 가지고...”“나 배고파!”정승우는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아이와 대화하는 건 그에게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겨우 권온유를 달래고 나서 정승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팔을 걷어붙이며 권온유에게 내밀었다.“너 정말 참을 수 없을 만큼 배고프면, 여기 한번 물어볼래?”권온유는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정승우를 바라보았다.“우리 집은 가난해서 늘 먹을 게 부족했거든. 그래서 어릴 때 너무 배가 고프면 이렇게 배고픔을 달랠 만한 걸 물곤 했어.”권온유는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특히 ‘배고픔을 달랠 만한 것'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정승우는 웃으며 계속 설명했다.“예를 들어 쌀통 같은 거야. 한때 쌀이 들어 있던 쌀통은 비어 있어도 쌀 냄새가 남아 있거든. 그래서 쌀통 가장자리를 살짝 물면서 하얀 쌀밥을 먹는 상상하는 거야. 그러면 배가 덜 고파져.”“그리고 이웃집에서 밥하는 냄새를 맡으며 그 밥을 먹는 상상을 하는 거야. 그러면 그렇게 배고프지 않더라고.”권온유는 정승우의 이야기에 넋을 잃고 입을 벌린 채 있었다. 정승우는 웃음을 터뜨렸다.지금은 웃으며 말할 수 있지만, 한때 정대명이 도박과 술에 빠져 정승우를 굶겼던 시절은 그야말로 비참한 순간들이었다.잠시 후, 권온유의 눈에 다시 눈물이 맺히는 것을 보고 정승우는 속으로 ‘큰일이다'라고 생
영미는 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최지용을 지켜보았다.최지용은 다소 초조한 기색으로 구석에 앉아 휴대전화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가끔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가 전화를 걸기도 했다.영미는 바로 뒤를 따라갔고 최지용의 낮고 다급한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찾았습니까?”“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세요... 만약 납치범의 목적이 돈이었다면 분명 전화를 걸어올 겁니다!”영미의 가슴이 철렁하며 내려앉았다.납치범이라니? 대체 뭘 찾는다는 거지?백인서와 통화한 걸까?그때, 최군성이 큰 소리로 외쳤다.“지용이 형, 여기서 뭐 해요?”영미는 얼른 몸을 숨겼고 최군성은 최지용에게 다가가 최지용을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우리 형이 찾고 있었는데 여기서 뭐 하고 있었던 거예요? 어서 와서 먹고 즐기자고요!”최지용은 최군성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며 영미와 눈이 마주쳤다. 둘은 동시에 잠시 멈칫했다.영미는 급히 시선을 피하며 억지 미소로 인사했다.“지용 오빠...”“어, 영미?”최군성도 배윤아처럼 물었다.“여기 웬일이야? 형님이 널 초대한 것 같지 않은데?”“그게...”영미는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최군성은 영미의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최지용을 끌고 가 먹고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최지용은 점점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영미가 도대체 여기 왜 있는 거지? 평소에는 볼 수 없던 사람이, 왜 하필 오늘 온유가 사라진 날에 나타난 걸까?그때, 최군형과 강소아가 가원이를 품에 안고 나타났다.강소아는 아이를 보행기에 앉혔고 아이는 보행기 가장자리를 잡고 작은 발을 내디뎠다. 이 모습에 방 안의 모든 사람이 환호성을 질렀다.영미는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황급히 자리를 떠 교외의 버려진 공장으로 향했다.그 시각, 정대명은 영미의 지시에 따라 승합차를 몰고 공장에 도착해 있었고 영미가 도착했을 때 그는 공장 문 앞에서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영미는 핸드백을 휘둘러 정대명에게 던졌다.“정대명 씨, 감히 날 속여
“너 따위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정대명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하지만 결국엔 자기 아들이었기에 정승우에게 감출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때리고 꾸짖어도 떠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정대명은 서랍에서 가위를 꺼내 들고는 권온유의 양 갈래머리를 단칼에 잘라냈다. 머리카락이 천천히 바닥에 떨어졌다.정승우는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있다가 막아서려는 순간, 자신과 정대명 사이에 힘의 격차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무작정 나섰다가는 역부족일 터였다.정승우는 이를 악물고 정대명에게 다가가 물었다.“아빠, 정말 이 아이를 팔 생각이에요?”“내가 원하는 게 아니야, 영미라는 그 여자가 원하는 거야!”정대명은 불만스레 대꾸하며 정승우에게 옷장에 있는 헌 옷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정승우가 옷을 가져오자, 정대명은 손을 뻗어 권온유의 예쁜 드레스를 찢으려 했다. 정승우는 급히 소리쳤다.“뭐 하는 거예요!”“이 자식이!”정대명은 정승우를 노려보며 소리쳤다.“조용히 해! 죽고 싶어?”“아빠, 이건...”“이 애한테 옷을 갈아입히려는 거야! 이렇게 좋은 옷을 입고 있으면 바로 눈에 띄잖아.”정승우는 다가가 정대명을 옆으로 밀치며 말했다.“제가 갈아입힐게요!”“이놈이...”정대명은 하려던 말을 멈추고 피식 웃었다. 그는 정승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아하, 아빠를 도와주고 싶구나? 역시 아들은 아들밖에 없지! 그래, 네가 손이 빠르니까 빨리 옷을 갈아입혀. 둘이 함께 가자고!”정승우는 속으로 혐오감이 치밀었지만, 지금은 그저 상황을 지켜보며 대응하는 수밖에 없었다.정승우는 권온유의 드레스를 벗기지 않고, 정대명의 헌 옷을 위에 입혀 단단히 감쌌다. 그런 다음 모자를 씌워 얼핏 보면 남자아이처럼 보이게 했다.“좋아, 이 정도면 되겠어!”정대명은 정승우에게 눈짓을 보내며 말했다.“뒷문에 승합차가 준비돼 있대. 어서 출발하자!”“아빠, 이 소녀는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예요?”“교외지!”정대명은 귀찮다는 듯 말했다.“빨리 움직
권온유는 깜짝 놀라며 정대명을 멍하니 쳐다보았다.“아저씨가 맛있는 걸 가지고 왔단다. 배고프지 않니?”권온유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달아나려 했다. 정대명은 급히 권온유 앞을 가로막았다.“아니, 가지 마!”정대명은 두 손으로 권온유를 꼭 붙들며 말했다.“그게... 네 엄마가 나한테 너를 데려오라고 부탁했어!”엄마라는 말을 듣고 권온유는 잠시 멈칫했다.“정말이야, 네 엄마가 부탁한 거라니까!”정대명은 거짓말을 이어갔다.“방금 네 엄마가 갑자기 어디론가 가버렸지? 너 보고 기다리라고 했잖아?”“네... 맞아요.”“그래!”정대명은 웃으며 말했다.“그런데 네가 여기저기 막 돌아다녀서 엄마가 널 못 찾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엄마는 내가 여기 있는 걸 알 거예요. 저는 여기서 조금 놀다가 다시 휴게실로 돌아갈 거예요!”“오... 그렇구나.”정대명은 잠시 생각을 굴렸다.“아저씨가 휴게실이 어딘지 아니까, 내가 데려다줄게!”권온유는 경계하며 정대명에게서 몸을 빼내고 두 걸음 물러났다.“얘가! 난 정말로 네 엄마 친구라니까. 네가 여기저기 돌아다녀서 엄마가 널 못 찾게 되면 걱정하지 않겠어? 맞지?”“자, 자! 아저씨가 데려다줄게. 착하지!”정대명은 권온유를 갑자기 붙들어 어깨에 둘러맸다. 권온유는 본능적으로 소리치려 했지만, 정대명의 손이 입을 단단히 막고 있어 소리를 낼 수 없었다.어린 소녀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어른 남자를 이길 수는 없었다. 정대명은 권온유의 머리 뒤쪽을 세게 내리쳐 기절시켰고, 온유가 들고 있던 인형은 땅에 떨어졌다....정승우는 익숙하게 호텔로 와서 지난번 일을 핑계로 다시 정대명에게 돈을 뜯어낼 생각이었는데, 방 안에 기절한 어린 소녀가 누워 있는 걸 발견했다.“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어른 일에 참견하지 말고 신경 꺼!”정대명은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방금 정대명은 온유를 데려오며 보안과 호텔 직원의 눈을 피하고자 아이를 어깨에 메고 가지 않고, 자신의 아이인 것처럼 속여서 안
“엄마, 우리 오늘도 여기서 밥 먹어요?”“그래. 네가 제일 좋아하는 게 고등어조림 요리잖아.”“그런데...”권온유는 입을 꾹 다물고 말을 삼켰다. 사실 권온유는 집에서 밥을 먹고 싶었다.어린 권온유도 느낄 만큼 엄마는 요즘 기분이 좋지 않았다.방금 대답조차 어딘가 건성으로 들렸다.권온유는 어른들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는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았다가 나빴다가 하는 걸까? 누군가 아빠와 다른 여자가 함께 찍힌 사진을 보내기만 하면, 엄마는 이렇게 변해버렸다.“엄마...”권온유는 엄마의 손을 조심스레 잡아당겼다. 그러나 조순영은 갑자기 권온유의 손을 놓고는 시선이 어느 한 곳에 고정되더니 초조한 표정으로 그곳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권온유는 깜짝 놀라 인형을 떨어뜨렸다.“엄마!”“온유야, 여기서 움직이지 말고 있어!”조순영은 급히 돌아보며 외쳤다.“엄마 금방 올게!”권온유는 엄마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홀로 서 있었다. 시야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엄마의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엄마는 아빠가 다른 여자가 친밀하게 지내는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엄마는 통제력을 잃고 온유를 혼자 내버려두곤 했다. 그러고 한참 후에야 멍한 표정으로 다시 돌아오곤 했다.어두운 구석에 숨어 있던 정대명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요 며칠 동안 몇 번이나 이 모녀를 본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이 여자는 자주 아이와 함께 식사하러 왔는데 가끔 혼자 올 때도 있었다...남편의 외도를 잡으려는 걸까?맞아, 틀림없이 그런 거다!정대명은 매일 호텔에 살면서 듣는 소문도 적지 않았다. 한 회장이라는 사람은 아내와 자식이 있음에도 바람이 잦았다고 하는데 그 회장은 차기 시장의 사위가 될 인물이라는 말도 있었다.정대명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이런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차피 남자가 바깥에서 다른 여자를 만나는 건 흔한 일이니까.정대명은 다시 어린 소녀를 주시했다. 소녀
정대명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얼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며칠을 기다린 결과가 고작 최가원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었다.그럼에도 영미는 끊임없이 전화를 걸어왔다.“정대명 씨, 대체 뭐 하고 있는 겁니까? 대단한 것도 아니고 아이 하나 훔쳐 오는 게 그렇게 어렵나요?”젠장! 정대명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차라리 보석을 훔치는 게 더 쉬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하하... 영미 아가씨.”마음속으로는 욕하고 있었지만, 얼굴엔 여전히 웃음이 서려 있었다.“이게, 그렇게 쉽지 않네요! 제가 며칠 동안 지켜본 결과, 그 경호원들이 전부 총을 들고 있더라고요. 제가 무턱대고 나서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정말 쓸모없네요.”영미의 목소리는 차가웠다.“내가 사람들까지 매수해 놨는데, 일을 이따위로 하다니!”정대명은 억눌린 분노를 꾹 참고 입을 다물었다.“말해 두겠는데요!”영미는 한발 더 나아가 말했다.“이 일 못 해내면, 화려한 호텔 스위트룸도 더 이상 못 쓰게 될 테고 돈 한 푼도 못 받는 줄 아세요! 다시 그 작은 산골 마을로 돌아가서 평생 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으면 똑바로 하세요!”정대명은 이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했다.호사에 길든 사람이 다시 가난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려운 법이다. 최근 정대명은 오성에서 살아가며 화려한 삶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영미는 정대명이 잘 먹고 살게 도와줬고 돈까지도 넉넉히 주니 점점 체면이 생기기 시작했다.호텔에서 정대명이 매일 스위트룸에서 지내는 것을 본 사람들은 그를 대단한 부자로 착각했고 그에게 예의를 갖추며 인사했다.이런 삶은 초라했던 지난날에선 꿈도 꾸지 못한 것이었다.고작 아이 하나 때문에 이 모든 걸 잃기엔 너무 아까웠다.정대명은 급히 전화기를 붙잡고 외쳤다.“영미 아가씨, 너무 흥분하지 마!”영미는 냉소적인 웃음을 흘렸다.“내가... 내가 방법을 찾아볼게.”정대명은 어영부영 답했다.“겨우 아이 하나 가지고, 뭐 대단한 일도 아니지! 내가
백인서는 웃으며 정승우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었다.정승우는 전혀 망설임 없이 백인서의 그릇에 고기가 많은 걸 보자마자 젓가락을 뻗었다.“너 지금 내 소고기를 뺏어 먹는 거야?”“사장님이 누나만 편애하는 거 아니에요? 고기를 이렇게나 많이 주다니!”“안 돼, 내 거야. 뺏어 먹지 마.”백인서는 웃으며 말했다.“이건 사장님이 특별히 주신 사랑의 소고기야!”“저는 성장기 남자애라 많이 먹어야 해요!”두 사람은 웃고 떠들며 면을 거의 다 비워가고 있었다. 백인서가 정승우에게 국수를 한 그릇 더 가져다주려고 일어서려는 순간, 달콤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고모!”백인서는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예쁘고 앙증맞은 작은 공주가 백인서에게 달려왔다.“온유야?”권온유는 백인서에게 달라붙어 작은 머리로 백인서의 품에 얼굴을 비볐다.정승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정승우는 이렇게 예쁜 여자아이를 본 적이 없었다. 두 갈래로 묶은 머리에 공주 같은 퍼프 드레스를 입고, 마치 아까 놀이공원에서 본 백설 공주처럼 보였다.이 아이는 정말 동화 속에서 나온 공주일까?작은 소녀는 고개를 기울여 정승우를 한 번 바라보더니 달콤하게 미소를 지으며 다시 백인서를 보며 물었다.“고모, 이 사람은 누구예요?”“이 사람은...”백인서가 대답하려던 찰나, 문밖에서 권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 오빠는 학교에서 우등생이야. 공부도 엄청 열심히 하거든. 온유도 나중에 커서 이 오빠처럼 열심히 공부해야 해.”백인서는 권욱을 올려다보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여긴 어떻게 오셨어요?”“왜? 딸과 단둘이 외식하러 나오는 게 이상해?”“아니요.”백인서는 고개를 저었다.“그냥 권욱 씨가 이런 작은 가게에서 식사하실 줄은 몰랐어요...”“여기도 꽤 유명한 맛집이야!”권욱은 의자에 앉으며 사장에게 소고기 국수 두 그릇을 주문했다.“오늘 주말이라 온유를 데리고 나왔는데, 이 녀석이 배고프다고 해서 핸드폰으로 근처 맛집을 검색해 보니 이곳 평이 좋더라고.
정승우의 머릿속엔 여전히 어린 시절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그 시절, 백인서는 낮에는 그를 등에 업고 다녔고 밤에는 재워주며 보살폈다. 따뜻함이라고는 거의 없었던 그의 삶에서 백인서는 유일하게 빛을 밝혀 준 존재였다.누가 세 살, 네 살 아이에게 기억이 없다고 했던가? 그 기억은 정승우의 성장 내내 곁을 지켜 주었고 다시 누나를 찾을 수 있도록 지탱해 주었다.“누나, 제발... 울지 마세요. 백 선생님!”백인서는 깜짝 놀라 정승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백인서는 정승우의 미소에 눈물을 멈췄다.두 사람은 작은 음식점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우연히도, 이곳은 예전에 최지용이 백인서를 데리고 와 소고기 국수를 먹던 곳이었다.이번에도 그 가게 주인이 반갑게 맞이하며 다가왔다.“오, 이게 누구야! 귀한 손님이 오셨네!”그의 시선이 정승우에게로 멈췄다.“이 아이는?”“동생이에요!”정승우가 먼저 씩씩하게 대답했다.백인서는 미소를 지으며 주인에게 소고기 국수 두 그릇을 주문했다.주인은 의아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한번 보고는 주방으로 돌아가 푸짐하게 고기가 올라간 소고기 국수를 내왔다.“얼른 먹어!”백인서는 젓가락을 건네며 말했다.“여긴 정직하게 장사하는 곳이라 양도 푸짐하고 맛도 아주 좋아. 지용 씨가 나를 데리고 왔던 곳인데...”최지용을 언급하자 백인서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정승우는 장난기 어린 미소로 백인서를 바라보며 물었다.“그 남자, 누나한테 잘해 줘요?”백인서는 모르는 척하며 대답했다.“무슨 남자?”“그러니까, 방금 말한 그 지용이란 사람 말이에요!”정승우는 더욱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숨기지 않아도 돼요. 산에 있을 때, 두 사람이 포옹하는 것도 봤고 그 사람이 누나한테 키스하는 것도 다 봤어요!”“정승우!”백인서는 정승우를 노려보았고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씩 쏠렸다.“그만해!”백인서는 테이블 아래로 정승우의 다리를 가볍게 툭 차며 말했다.“애가 무슨 이상한 소릴 하고 있어!”“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