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당신.”한순간 한 줄기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하얘졌다!무언가를 눈치챈 듯한 부랑자는 그녀를 힐긋 쳐다보고는 머리를 흔들며 입으로 중얼대더니 쓰레기 꾸러미를 들고 냅다 도망갔다.강서연은 뒤따라 쫓아갔지만 몇 걸음 못 가 얼굴이 하얗게 질려 거친 숨을 내쉬었다.그 얼굴...너무나도 구현수와 닮아 있었다.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린 강서연은 피가 거꾸로 솟구치고 손발이 차갑게 저렸다. 어떻게 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은 채로 그녀는 이미 민박집 앞에 와 있었다. 앞에는 구현수가 나와 있었고 어깨에 손을 얹자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치며 멍하니 바라보았다.“무슨 일이야?”구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상냥하게 물었다.그제야 정신이 든 강서연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그녀의 눈앞에 또렷한 턱선과 깔끔한 이목구비가 나타났고, 농염한 남성미가 내뿜어져 왔다. 이런 현수 씨를 어찌 부랑자와 비교하겠는가!방금은 실성을 했는지 헛것을 본 게 분명했다. 강서연은 자책하면서 저절로 머리를 세게 내리쳤다.“도대체 왜 그래?”구현수는 방금보다 더 상냥하게 물었다.강서연은 그와 깍지를 낀 채로 입술을 삐죽거리고 있었다.그녀의 손은 놀랍도록 차가워 구현수는 되레 걱정되었다.“아침부터 어디로 간 거야? 사면이 바다인 데다 바람도 세고 오성은 점심에는 덥지만. 아침저녁에는 기온이 떨어져. 이렇게 얇게 입고 나가더니 감기 걸린 거 아니야?”커다란 손이 그녀의 이마에 닿자 강서연은 애교 섞인 말투로 잡아 내렸다.“나 괜찮아요. 걱정 말아요!”구현수는 생각에 잠긴 눈빛으로 유심히 그녀를 바라보았다.강서연은 갑자기 방금의 웃음거리가 생각나 입꼬리가 올라가다가 피식 웃었다.이 웃음이 구현수의 눈에는 온 세상을 환하게 만들어주는 것만 같았다.“여보.”그녀의 어깨를 끌어안고는 매력적인 저음으로 말했다.“명색이 신혼여행인데 어제는 왜 날 독수공방하게 만들었을까.”“그래서. 기분 나빴어요?”그녀는 작은 여우처럼 올려다보았다.“그럴 리가.”그는 실눈을 뜨며
“정말이에요?”강서연이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이벤트를 한 건 그 사람들인데 우리만 운이 좋았네요!”“그러니까 말이야.”구현수가 덤덤하게 웃었다. 그녀가 즐거워하는 모습만 봐도 마음이 흐뭇했다.“현수 씨랑 결혼한 후로 내 운이 수직 상승한 것 같아요. 모든 일이 다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순조롭게 잘 풀린다니까요.”그녀는 발뒤꿈치를 들고 그의 볼을 두 손으로 잡더니 쪽하고 입맞춤했다.“현수 씨는 정말 복덩어리예요!”구현수는 잠깐 멈칫하다가 그녀의 코끝을 톡 치며 가볍게 웃었다.“먼저 가서 먹어.”그가 나지막이 속삭였다.“화장실 갔다가 바로 갈게.”“알았어요.”강서연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그럼 나 먼저 우정 언니랑 심 의사님 찾으러 갈게요. 얼른 와야 해요.”“알았어.”강서연이 폴짝폴짝 뛰며 방을 나간 순간 구현수의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는 테이블 위의 전화기로 번호를 꾹꾹 눌러 부하에게 전화를 걸었다.“오늘 아침 서연이한테 무슨 일 있었어?”“서연 씨는 계속 바닷가에서 놀았고 저희는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거든요. 그런데 돌아가는 길에 길거리 쓰레기통 그쪽에서...”부하가 말을 얼버무렸고 구현수가 버럭 화를 냈다.“말해!”“거기서 노숙자랑 부딪혔어요.”‘노숙자? 무슨 일은 없었겠지?’구현수는 마음이 움찔했다.“다행히 노숙자는 서연 씨한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노숙자가 떠난 후에 서연 씨가 계속 노숙자가 간 방향을 쳐다보는 거예요. 아마 십여 분 정도 움직이지도 않고 지켜봤을 거예요.”‘놀라서 그랬나?’구현수의 뇌리를 가장 먼저 스친 생각이었다. 하지만 강서연과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몇몇 건달들이 문 앞에서 그녀를 희롱했을 땐 나무 막대기를 들고 달려들기도 했었다.그리고 지난번 식사 자리가 끝난 후 배경원이 그녀에게 딴마음을 품고 있다고 오해했을 때도 운전기사의 목을 조르고 차에서 뛰어내린 바람에 하마터면 목숨까지 잃을 뻔했다.이토록 용감하고 강한 여자가 고작 노숙자 때문
사진들 전부 윤문희의 사진이었다.정신 요양 병원은 다른 병원보다 조금 특별했다. 환자 대부분이 면역력이 낮아 환자 가족들이 외부 세균이나 독감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걸 막기 위해 요즘 규정을 새로 수정했다.환자 가족은 한 달에 한 번 면회가 가능했고 나머지 시간에는 요양원에서 전문가가 직접 보살핀다고 한다.강서연은 더는 전처럼 언제든지 어머니를 볼 수 없게 되었다. 하여 신석훈은 시간이 여유로울 때마다 그녀 어머니의 사진을 종종 찍어 요양원에서 잘 지낸다고 알려주곤 했다.“아주머니 잘 지내고 계세요.”신석훈이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아주머니를 돌보는 간호사가 그러는데 요즘 대화할 때나 야외 활동을 할 때나 보통 사람과 다를 바가 없대요. 저도 아주머니 차트도 보고 담당 의사한테 물어봤는데 요즘 복용하는 약도 절반 줄었대요.”“정말이에요?”강서연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소식이 없었다.신석훈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하지만 전 그냥 이쪽에 잠깐 배우러 온 의사라 직권이 별로 없어서 아주머니를 자주 보러 가진 못해요. 안 그러면 서연 씨도 아주머니 상황을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텐데 말이죠.”“그런 말씀 말아요.”강서연이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저는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심 의사님, 정말 너무 고마워요.”“별말씀을요.”신석훈이 입술을 적셨다.“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전데요.”“저한테 고맙다고요?”신석훈이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더니 웃으며 말했다.“저 요즘 우정 씨랑 자주 데이트도 하고 그랬어요... 하하, 서연 씨가 저에 대한 좋은 얘기 많이 해준 거 맞죠? 고마워요, 서연 씨!”강서연은 진심으로 기뻤고 또 임우정이 행복하길 바랐다. 하지만 임우정이 왜 그녀에게 솔직하게 얘기하지 않은 건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그녀는 잠깐 침묵하다가 이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건 다 신 의사님의 정성이죠. 우정 언니가 신 의사님의 진심에 감동한 거예요.”“만약 서연 씨가 지난번 여행을 계획하지 않았더라면 저랑 우정 씨도 이렇
“와, 대박이에요, 대박!”신석훈이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여느 관중들 못지않게 경기를 관람하는 내내 기뻐 어쩔 줄을 모르는 건 물론이고 목청 높이 응원하기도 했다.“그렇지! 훅을 날리란 말이야... 그래!”현장의 환호성이 귀청이 떨어질 만큼 쩌렁쩌렁했다. 또다시 구현수의 제자가 경기 승리를 거두었다.“서연 씨, 오늘 경기 모두 현수 씨의 제자들이 이긴다면 상금도 엄청 많이 받겠네요?”그의 질문에 강서연은 웃음을 터뜨렸다.“왜 그래요.”임우정은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그럼 석훈 씨도 업종 바꿀래요? 의사 말고 복싱 코치할래요?”“그것도 나름 괜찮은 생각이에요!”신석훈이 주변을 쭉 둘러보았다.“관중들 좀 봐봐요. 다들 티켓을 구매하고 온 사람들이잖아요. 복싱 선수는 지든 이기든 출전 수당이 있으니까, 코치는 당연히 더 많이 받겠죠.”“석훈 씨, 요즘 돈독이 올랐어요?”임우정이 휘둥그레진 두 눈으로 물으니, 신석훈이 일부러 한숨을 내쉬었다.“어휴, 돈독이 안 오르면 어떻게 장가가요.”“뭐라고요?”신석훈은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세게 저었다. 임우정도 웃으며 그를 때리려다가 갑자기 동작을 멈추었다.강서연은 그녀의 안색이 확 굳은 걸 바로 알아챘다.“언니, 왜 그래요?”임우정은 아무 말 없이 그저 한곳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녀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지면서 몸도 부들부들 떨었다.강서연은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링과 멀지 않은 곳에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는데 인파 속을 뚫고 비상구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우람한 체구에 뒷모습만 봐도 엄청 살벌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가슴이 움찔한 그녀는 임우정의 표정을 보자마자 뭔가 깨달은 듯했다...그때 임우정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어디 가요?”강서연도 따라나섰다. 임우정은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황급히 그 사람을 뒤쫓아갔다. 두 사람은 불빛이 어두컴컴한 복도를 지나 경기장의 백스테이지로 왔다.강서연이 숨을 헐떡이며 무슨 일이냐고 물으
“저기요, 지금 뭐 하는 거예요!”강서연이 소리를 지르며 남편 앞을 막아섰다.“난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남자의 두 눈에 경멸이 가득했다.“당신 남편한테 물어봐. 예전에 어떻게 날 깍듯하게 모셨는지... 하하, 내가 재떨이가 필요할 때면 두 손으로 받쳐 들곤 했어. 쟤 손바닥이 내 재떨이였거든.”“당신...”“이봐, 당신이 좋은 남자한테 시집간 줄 알았어?”남자가 아래위로 훑어보는 시선에 강서연은 기분이 매우 불쾌했다.“하하, 쟤는 맨 밑바닥에 있는 양아치야. 감방에서도 맨날 무시나 당하던 사람을 뭐가 좋다고 그리 감싸는 건데?”남자가 코웃음을 쳤다.“구현수, 너 아주 여자 복이 많다?”“그만하지 못해요?”강서연도 소리를 질렀고 전혀 밀리지 않았다.“당신이 누구든 여기는 공공장소예요. 계속 내 남편한테 무리하게 굴었다간 경비원 부를 거예요!”남자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구현수, 넌 여전히 못났구나? 아직도 여자 뒤에 숨을 줄밖에 몰라?”“이게... 다 무슨 일이에요?”바로 헐레벌떡 뒤따라온 신석훈은 땀을 뻘뻘 흘리며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들을 쳐다보았다.임우정 걱정에 그녀 옆에 다가갔다. 그런데 채 다가가기도 전에 임우정이 옆으로 슬쩍 피하더니 일부러 그와 거리를 유지했다.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신석훈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그때 그 남자가 코웃음을 치더니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강서연은 너무도 화가 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구현수의 몸에, 담뱃재에 덴 자국은 없는지 자세히 살펴보니 다행히 다친 데는 없었다.임우정은 넋이라도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남자가 나가자, 그녀의 시선도 따라 움직였다. 잠시 후,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남자가 나간 방향으로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우정 씨...”신석훈은 그런 그녀를 말리지 못했다. 마음이 뭔가에 세게 부딪힌 것처럼 찢어질 듯이 아파 말을 잇지 못했다....임우정은 체육장 문 앞까지 쫓아갔다.멀리서부터 고급 자동차 십여 대가 천천히 달려오고 있는 걸 보았다. 수십 명
조금 전에 만난 구현수는 예전과 사뭇 달랐다. 전에 감방에 있을 땐 맨날 얻어맞기만 하던 구현수였는데 아까는 어찌나 날카롭고 싸늘한지 그 역시도 움찔했다.‘게다가 결혼까지 해서 와이프도 있어? 하하, 멀쩡한 여자라면 피해도 모자랄 판에, 누가 걔한테 시집가겠어!’“조사할 때 조심해. 새어나가지 않게.”육경섭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 모금 깊게 빨아들였다.“형, 구현수 와이프랑 임우정 씨가 가까운 사이인 것 같던데...”“걔 와이프까지 조사해!”육경섭의 눈빛이 흉악스럽기 그지없었다.“대체 어떤 여장부인지, 두 부부가 무슨 꿍꿍이인 건지 잘 알아봐야겠어!”...저녁에 집으로 돌아온 후 강서연은 구현수가 씻을 목욕물을 받아서 따끈따끈한 물에 몸을 담그라고 했다. 그리고 그녀는 욕조 옆에 웅크리고 앉아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었다.구현수가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힘들게 안 주물러도 돼. 가서 일찍 쉬어. 씻고 금방 들어갈게.”“하나도 안 힘들어요.”강서연은 그를 보며 계속 고집스럽게 마사지해 주었다.그런데 구현수의 낯빛이 살짝 변했다. 마사지하지 말라고 한 건 꾹꾹 누르는 힘이 마사지가 아니라 유혹이었기 때문이다. 섬섬옥수로 마치 마법이라도 부리는 듯 그의 몸을 터치할 때마다 저도 모르게 흥분되었다...구현수는 숨을 깊게 들이쉰 후 고개를 옆으로 돌려 그녀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녀의 작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코끝에 땀방울이 맺혔다. 잔머리가 자연스럽게 내려와 귀밑에 붙은 모습이 너무도 귀여워 당장이라도 욕조 안으로 끌어들이고 싶었다.구현수가 씩 웃으며 그녀의 손목을 잡으려던 그때 강서연의 한마디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다른 생각 하지 말아요. 나 오늘은 안 돼요.”강서연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계속 팔 마사지를 해주었다. 순간 김이 샌 구현수는 욕조 안에서 잔뜩 풀이 죽은 모습으로 마사지를 받았다.“남자들 머릿속에는 그 생각밖에 없어요?”구현수가 생각에 잠겼다.‘난 다른 남자랑 달라. 네 앞에서만 이런다고.’그녀의 말이
그는 아무 말 없이 그저 거친 숨만 몰아쉬었다. 진동음과 함께 메일이 도착하자 그는 바로 자료를 확인했다.역시 최연준의 예상대로 육경섭과 진짜 구현수 사이, 과거에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게 맞았다.“연준 도련님.”방한서가 계속 말을 이었다.“육경섭은 18살에 특수 상해죄로 감옥에 들어가 10년 형을 선고받았는데 모범수가 되어서 2년 적게 살고 가석방되었어요. 요 2년 동안 강주 일대에서 조폭 패거리를 관리하면서 돈도 많이 벌었더라고요. 그런데 소문에는 육경섭이 지금 이 자리에 앉을 수 있었던 건 몇몇 두목 사이를 이간질하고 몰래 뒤에서 처리해서 조폭 두목이 됐대요. 지금 육경섭 밑에 적지 않은 술집이 있다고 하는데 그건 다 간판일 뿐이고 사실은 불법 밀거래를 하고 있답니다.”구현수가 어두운 목소리로 물었다.“예전에, 감방에 있을 때는 어땠는데?”방한서가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말을 이었다.“감방에 있을 땐 그래도 나름 두목이었어요. 죄수들도 여러 등급으로 나뉘는데 육경섭처럼 사람을 죽이고 다치게 해서 들어온 죄수는 1등급이라 다른 죄수들이 함부로 대하지 못했대요. 그리고 구현수 같은 강간범은 가장 무시당하는 죄수래요.”“뭐?”최연준은 그가 빌려 쓴 신분의 구현수 인생이 이럴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그냥 패싸움이나 하고 다니는 건달이었다며?”방한서가 씁쓸하게 웃었다.“도련님, 일반 건달이었다면 감방을 그렇게 여러 번이나 갔다 왔겠어요?”최연준은 머리가 지끈거려 미간을 문질렀다.“구현수는 상습범이에요. 강간당한 여자 중에 가장 어린 나이가 16살 밖에 안 된대요...”최연준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가 다시 내뱉었다.‘더러운 인간!’이런 인간은 육경섭뿐만 아니라 최연준도 혐오하긴 마찬가지였다.구현수가 이미 죽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도련님, 육경섭이라는 사람 최대한 멀리하세요. 그 사람 지금 세력이 최상과는 비할 바가 안 되지만 그래도 조폭 쪽이라 우리랑은 아예 달라요. 혹시라도...”“응. 나도 알아.”그는 방한서
“이 늦은 밤에... 볼 뉴스가 있어요?”“다 지나간 뉴스야. 심심할 땐 가끔 들어가서 보거든.”강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잠이 덜 깨 그의 어깨에 살포시 기댔다.최연준은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향긋한 샴푸 냄새가 그의 코끝을 스쳤다. 만약 강서연이 한 달에 한 번 걸리는 마법에 걸리지 않았더라면...최연준은 심호흡하며 그 생각을 떨쳐내려 애를 썼다. 요즘 야한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아서 정말 큰 일이다.“여보.”강서연이 나지막이 말했다.“나 할 얘기 있어요.”“뭔데?”“아빠가 나한테 강진 그룹으로 들어오는 게 어떻겠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월급도 이쪽보다 3배는 많아서 엄마 병원비 걱정 안 해도 된다면서요.”최연준의 두 눈에 어둠이 스쳐 지나갔다. 늙은 여우 같은 강명원의 말이라면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절대 그리 단순하진 않을 것이다.“당신 생각은 어때?”“나요?”모든 걸 꿰뚫어 본 강서연이 피식 웃었다.“아빠가 좋은 뜻으로 나더러 돌아오라고 한 것 같지는 않아요. 어릴 적부터 아빠의 책임을 져 본 적 없는 사람인지라, 갑자기 강진에 와서 일하라는 건 너무 이상해요.”최연준의 찌푸렸던 미간도 그제야 느슨해지면서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누구보다 똑똑한 와이프가 단지 가족이라는 이유로 쉽게 그들의 꿍꿍이에 놀아나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그깟 권력에 눈멀어서 아빠는 절대 놓지 않으려 해요.”강서연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얼마 전에 아빠가 거슬려 하는 짓을 유빈 언니가 했거든요. 이번에 나한테 돌아오라고 한 건 그 집에 강유빈 말고 나라는 딸이 하나 더 있다고 언니한테 경고하기 위해서예요. 그리고 이건 좀 더 나쁜 생각이지만...”강서연이 몸을 웅크리고 앉아 턱을 무릎 위에 받친 채 커다란 두 눈을 깜빡였다.“나랑 유빈 언니가 서로 물고 뜯고 싸우는 걸 옆에서 보면서 어부지리로 이득을 보려는 생각일 수도 있어요. 흥, 아빠는 그저 날 이용해서 강유빈을 견제하고 싶을 뿐이에요.”최연준이 놀라는가 싶더니 이내
배현진은 마치 자신의 영혼이 몸을 떠나 허공을 떠도는 듯한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그는 허공에 떠 있는 듯 응급실의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사들이 급히 자신을 응급처치하는 모습과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로 누워 있는 자기 육체를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에서 해방된 듯한 감각이 그를 감쌌다.의식은 또렷했지만, 살아남겠다는 의지는 조금도 없었다.그날, 배현진은 오강호와 싸웠다.송윤희와 이혼 후 더 나락으로 떨어진 오강호는 그날 술집에서 술에 취해 있던 배현진과 우연히 마주쳤다.말다툼은 곧 몸싸움으로 번졌고 오강호는 배현진이 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자, 송윤지를 언급하며 조롱을 쏟아냈다.배현진은 격분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먼저 손을 댄 쪽이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오강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배현진은 오강호에게 몇 대 얻어맞고는 응급실로 실려 가고 말았다.지금도 배현진의 귀에는 오강호의 말이 메아리처럼 맴돌고 있었다.“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더니 별수 없군. 여자를 제대로 붙잡지도 못하고 결국 임지강에게 뺏겼다지? 하하하...”“배 도련님, 혹시 속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임지강이 송윤지에게 접근한 건 처음부터 다 계획된 거였을 거야!”“너 같은 쓰레기가 무슨 남자야. 약혼녀도 남에게 빼앗기고 말이야.”배현진의 가슴 한구석이 세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강한 힘이 그의 영혼을 다시 육체로 끌어당겼다.옆에서 심전도가 삐 울리더니 직선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의사들은 제세동기를 정리하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환자가 심장박동을 회복했습니다. 약물을 투여하세요.”배현진의 꼭 감겼던 두 눈이 살짝 떨렸다.그를 때린 사람이 임지강과 송윤지의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걸까?혹시, 그 둘 사이에 정말로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그는 알아내야 했다.죽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자신이 겪은 모든 수모를 반드시 임지강에게 똑같이 되돌려주겠다고 다짐했다....
임지강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제가 누나랑 형부께 누를 끼쳤네요.”“그렇게 생각하지 마.”임우정은 부드럽게 말했다.“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은 결국 운명 같은 거야. 따지고 보면 이 일의 원인은 나야. 내가 처음에 송윤지를 현진이에게 소개하지 말아야 했어.”“저 때문에 누나가 곤란해진 거예요.”임지강은 진지하게 말했다.“솔직히 말하면, 이번에 제가 조금 비겁한 방법을 썼어요. 누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배씨 가문을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배현진이 은행에 진 빚은...”임지강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임우정이 임지강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경원이와 수정이는 모두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야.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빚진 돈은 은행에 분할해서 납부할 거야.”“그럼 이자는 받지 않을게요.”임우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안도와 약간의 무력감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배현진에 대해서는.”임지강은 계속해서 말했다.“저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윤지를 괴롭힐 때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예상했어야죠. 지금 정신 상태가 좋지 않다거나, 심지어 정말로 정신이 나갔다 해도 그건 자업자득이에요.”“됐어, 봐줄 줄도 알아야지. 너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잖아...”임지강은 고개를 들어 임우정을 바라봤고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친 뒤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무슨 냄새예요?”갑자기 집 안에서 송윤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지강은 놀라며 황급히 돌아섰다.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송윤지가 급히 주방으로 달려 들어왔다.임지강도 곧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아이고, 이거 다 태웠네요!”송윤지는 놀라 외치며 불을 껐다. 그런 다음 행주로 냄비 뚜껑을 열었다.“이건 뭐예요?”“제가 만든 당근 소고기 스튜예요...”임지강은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송윤지에서 한번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는데 결과는 역시나 이 모양이었다.“물 안 넣었어요?”송윤지는 코를 찡그리며 물었다.“당근
임지강은 송윤지의 세계에 다시 한번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다.임지강은 이제 송윤지의 아파트에서 종종 머물렀다. 겉으로는 송윤지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라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은 간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송윤지는 몇 번 거절하려 했지만, 임지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국 그냥 놔두기로 했다.임지강은 비록 소파에서 자야 했지만, 그것조차도 행복했다.임지강은 언젠가는 송윤지의 곁에서 함께 아침을 맞이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임지강은 대부분의 시간을 송윤지와 함께 보내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그는 세 끼를 직접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송윤지가 과거에 자신을 위해 했던 일들이 얼마나 힘들고 정성이 담긴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고 과거 송윤지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다.가끔 송윤지는 집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임지강의 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꿈이 자꾸 송윤지를 괴롭혔지만, 송윤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임조강이 곁에 있으면 훨씬 마음이 놓인다는 것을.임지강은 배현진과는 완전히 달랐다.배현진은 늘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앞으로’ 같은 말로 막연한 미래를 약속하곤 했다.반면, 임지강은 ‘내가 있잖아’, ‘나한테 맡겨’, ‘두려워하지 마’ 같은 말로 송윤지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임지강의 말 속에는 사랑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었지만, 행동 하나하나에서 송윤지를 얼마나 아끼는지 충분히 느껴졌다.그날은 송윤지가 쉬는 날이었다. 임지강은 주방에서 당근과 소고기를 넣은 스튜를 끓이고 있었다.이 요리는 임지강이 새로 배운 것이었다. 임지강은 요리의 모든 과정을 조심스럽게 진행했고 조미료를 넣는 것도 마치 화학 실험을 하듯 정밀하게 측정했다.잠시 후, 요리의 향기가 퍼져 나갔고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냄비 뚜껑을 덮고 불을 약하게 조절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그가 문을 열자, 임우정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임우정은 복잡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누나?”
배현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임지강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소중히 여겨야 할 때 외면했으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임지강은 손가락으로 배현진의 코앞을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다시 내 여자를 건드리면, 소피아와 함께 감옥에서 만나게 될 거야.”임지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갔다.방 안에는 이제 배현진과 배윤아 두 남매만 남아 있었다.배현진은 멍하니 바닥에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후회와 절망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배현진의 모습을 보며 배윤아는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오빠...”배윤아는 조심스럽게 배현진을 부축하며 말했다.“사실, 오빠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진작에 알아봐야 했어. 소피아가 없었다면, 우리 집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배현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는 벽에 기대어 머리를 부딪치며 자신을책망했다.“오빠.”배윤아는 애써 배현진의 마음을 다독이며 말했다.“내 생각엔 임지강 씨는 오빠에게 교훈을 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진심으로 오빠를 망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닐 거야. 이미 송윤지의 복수를 한 거나 다름없으니, 더는 오빠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게다가 다행히도 오빠가 진 빚은 임지강 씨의 은행에서 대출받은 거니까, 그에게 시간을 좀 더 달라고 부탁하면 좀 봐주지 않을까?”“봐준다고?”백약곡의 쓴웃음은 공허하고 힘이 없었다.“지금 나는 아무것도 없어. 완전히 끝났어...”“오빠에겐 아직 나랑 부모님이 있잖아!”배윤아는 울먹이며 말했다.“우리는 여전히 가족이야! 오빠,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잘못했다고 해. 오빠가 진 빚은 부모님이 분명 해결하려고 하실 거야.”“내가 은행에 진 빚은 수천억이라고.”배현진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게다가 이 모든 걸 뒤에서 조종한 사람은 임지강이야. 그 사람은 절대 날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오빠...”배윤아가 더 말을 이어가려 했
“현진 씨, 제발 내 말 좀 들어봐!”소피아는 두려움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이렇게 한 건... 다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은 모든 걸 여동생에게 넘겼잖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랑 제임스는? 당신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여기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다면, 제임스를 어떻게 키우겠어?”“그만해!”배현진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소리쳤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소피아는 오직 자신과 제임스의 미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소피아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배현진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대하려 했던 건 소피아를 사랑해서지, 빚진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현진 씨...”소피아는 눈물을 흘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내가 잘못한 거 알아. 하지만 정말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이 나를 인정해 주길 바랐고 우리가 순조롭게 결혼하길 원했을 뿐이야. 그래서 내가...”“네가 원하는 건, 배씨 가문을 차지하는 거잖아?”“당신...”“윤아는 내 친동생이야!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내 등 뒤에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어?”배현진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소피아는 배현진의 외침에 놀라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소리쳤다.“배현진! 앞으로 네 여동생이랑 살 거야? 아니면 나랑 살 거야?”그 말에 배현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소피아의 뺨을 세게 때리며 속에 쌓여 있던 모든 후회와 분노를 폭발시켰다.소피아는 비명을 지르며 배현진의 얼굴을 긁으려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몸싸움을 벌이며 뒤엉켰고 배현진의 얼굴에는 소피아에게 긁힌 상처가 선명하게 남았다.그때, 경찰이 방으로 들이닥쳐 두 사람을 강제로 떼어놓았다. 차가운 수갑이 소피아의 손목에 채워졌다.배현진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소피아가 경찰에게 끌려 나가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도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 그의 존재는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온몸이 퍼즐 조각처럼 부서져 다시는 하나로
임지강은 대출 증명서를 꺼내 들었다. 서류에 선명한 배현진의 서명과 붉게 찍힌 도장은 마치 피로 얼룩진 조롱처럼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했다.“제 생각엔,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조 회장이 말했다.“지강아, 빨리 돈을 배 도련님 계좌로 송금하고 그 두 광산을 사들여라. 그리고 배 도련님,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임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너그럽게 대해주고 있는데, 도련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말도 안 되죠. 흥! 약속을 어기는 일은 배씨 가문의 품격에도 맞지 않잖아요, 안 그래요?”배현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후회와 절망이 그의 마음을 홍수처럼 휩쓸고 있었다.“배씨 가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오늘 제가 데려온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배 도련님도 보고 싶었을 겁니다.”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룸의 문이 열리며 배윤아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배현진은 배윤아를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놀라움은 곧 걱정과 초조함으로 변했다. 배현진은 재빨리 배윤아에게 다가가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윤아야, 괜찮아?”“나 괜찮아.”배윤아는 눈가가 붉어졌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 고작 사흘뿐이었지만, 그 시간은 마치 몇 세기가 흐른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그러나 배윤아의 시선이 소피아를 향하는 순간, 증오가 담긴 눈빛이 소피아를 사로잡았다. 배윤아는 이를 악물며 소피아를 가리켰다.“오빠, 바로 저 여자가 사람을 시켜 날 해친 거야!”“뭐라고?”배현진은 몸을 떨며 경악했다.소피아는 그제야 충격에서 벗어나 발악하듯 배현진 곁으로 뛰어들며 변명했다.“아니야! 내가 아니야! 윤아야, 너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네가 사라진 동안, 난 네 소식을 찾으려고 정말 애를 썼어. 난 정말로...”“거짓말하지 마세요!”배윤아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소피아 씨가 사람을 시켜 날 폭행하고 내 물건을 훔쳐 간 건 분명해요! 그리고 소피아 씨가 가장 원했던 게 배씨
“조 회장님, 이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요!”소피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항의했다.“우리가 그 광산을 사느라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지 아시잖아요. 대박을 기대했는데, 지금 헐값에 팔면 원금도 못 건질 뿐만 아니라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고요. 게다가 그 돈은 전부 은행 대출입니다.”“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나요?”조 회장은 다 피운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이건 아가씨가 주도한 일 아닌가요? 제 기억으로는 배 도련님이 처음엔 그 두 광산에 별 관심이 없으셨던 걸로 압니다만.”“조 회장님...”“배 도련님.”조 회장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말했다.“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오히려 추악한 수단으로 올라선 여자의 말을 믿었으니, 그 손해는 당연히 본인이 책임져야죠.”“지금 말 다했어요?”소피아는 벌떡 일어나며 격분해 외쳤다.조 회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짓누르듯 바라보았다. 그때 주변에 있던 부하들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섰고 소피아의 기세는 단숨에 꺾였다.“배 도련님, 매입자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배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 회장은 부하에게 매입자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뒤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본 배현진은 그만 충격에 말을 잃고 말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임지강과 송윤지였다.배현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다 테이블을 건드렸고 접시와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임지강은 송윤지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를 위해 의자를 빼주고 임지강도 옆에 나란히 앉았다.“배 도련님, 아는 분이시죠?”조 회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제가 따로 소개해 드려야 할까요?”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배 도련님.”임지강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제가 듣기론 도련님이 투자하신 두 광산이 이제 3200억밖에 안 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3400억에 사들이겠습니다. 도련님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도
화면에 띄워진 데이터는 충격 그 자체였다.두 사람은 멍하니 눈을 크게 뜬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친 듯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배현진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소피아 역시 어찌 된 일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소피아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우리가 1조를 들여 산 두 광산이라고! 무려 1조라고!”배현진이 소리쳤다.“가격이 분명 오를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지금 3200억으로 폭락한 거냐고!”“나도... 나도 모르겠어...”소피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 광산의 시장 가격을 철저히 조사했었단 말이야. 그 두 광산은 운산시에 있는데, 지금 운산시 광산 가격이 상승세잖아. 분명 손해 볼 투자가 아니었어.”“하지만 지금 상황 좀 봐.”배현진은 입술을 떨며 소리쳤다. 그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소피아, 그 1조는 전부 은행 대출금이야. 지금 난 은행에 수천억 빚을 졌고 이자도 엄청나다고.”“현진 씨, 진정해.”소피아는 급히 배현진을 달래며 말했다.“이 일은 조 회장이 중간에서 소개한 거래잖아. 조 회장에게 물어보면 모든 게 밝혀질 거야. 내가 직접 물어볼게.”...배현진과 소피아는 약속된 시간보다 훨씬 일찍 호텔 룸에서 조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배현진은 오늘의 만남을 위해 호텔 매니저에게 최고의 음식을 준비하도록 특별히 부탁했다. 테이블 위에는 호텔의 대표 메뉴들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다.조 회장이 방에 들어서자, 배현진은 그가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조 회장의 눈빛은 마치 코너에 몰린 쥐를 노리는 고양이 같았고 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쥐가 된 듯한 압박감에 사로잡혔다.“두 분이 너무 과하게 준비하셨네요.”조 회장은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위의 술잔을 힐끗 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이렇게까지 준비하실 필요는 없었어요. 나이
이른 아침, 소피아는 천천히 눈을 뜨며 옆에 누운 남자의 맨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배현진의 입술에 살며시 입맞춤했다.배현진은 그녀의 키스에 미소로 답하며 부드럽게 눈을 떴다.하룻밤의 열정에 지친 두 사람의 얼굴에는 희미한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제임스는 아직 안 깨어났어?”“이 시간엔 절대 안 일어나요.”소피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 위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그럼... 우리 한 번 더?”“아니.”배현진은 소피아의 손을 잡아 입술에 가져다 댄 뒤 가볍게 입맞춤하며 말했다.그는 정말로 피곤했다. 소피아는 도대체 어떻게 매일 밤 이렇게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는 걸까?소피아는 송윤지와 완전히 달랐다. 송윤지는 늘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그가 바라볼 때만 순수한 미소를 띠곤 했다.배현진은 문득 송윤지를 떠올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그는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했다.“자기야, 무슨 일이야?”“아, 별거 아니야.”배현진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맞다, 나 현진 씨랑 상의할 게 있어.”소피아는 배현진의 얼굴을 자신을 향해 돌리며 말했다.“제임스도 점점 크고 있어. 가정교사를 불러서 집에서만 공부시키는 건 이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또래 아이들과 학교에서 어울리는 게 필요하지 않겠어? 어쨌든 앞으로는 제임스가 배씨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을 사람이 될 테니까, 그렇지?”“음...”배현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소피아를 바라보았다.“그런데 장래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부모님이 이미 가업을 전부 윤아에게 넘겼잖아.”소피아는 미소를 띠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흡족해했다.배윤아 같은 풋내기는 소피아와 겨룰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배윤아를 기절시켜 조 회장의 카지노 앞에 던져 놓았기 때문이다.조 회장이 배윤아를 데려갔으니, 모두가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범인이 조 회장과 임지강이라고 믿을 것이다.혹시 조 회장이 색욕에 휘둘리는 사람이라면 더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