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대박이에요, 대박!”신석훈이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여느 관중들 못지않게 경기를 관람하는 내내 기뻐 어쩔 줄을 모르는 건 물론이고 목청 높이 응원하기도 했다.“그렇지! 훅을 날리란 말이야... 그래!”현장의 환호성이 귀청이 떨어질 만큼 쩌렁쩌렁했다. 또다시 구현수의 제자가 경기 승리를 거두었다.“서연 씨, 오늘 경기 모두 현수 씨의 제자들이 이긴다면 상금도 엄청 많이 받겠네요?”그의 질문에 강서연은 웃음을 터뜨렸다.“왜 그래요.”임우정은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그럼 석훈 씨도 업종 바꿀래요? 의사 말고 복싱 코치할래요?”“그것도 나름 괜찮은 생각이에요!”신석훈이 주변을 쭉 둘러보았다.“관중들 좀 봐봐요. 다들 티켓을 구매하고 온 사람들이잖아요. 복싱 선수는 지든 이기든 출전 수당이 있으니까, 코치는 당연히 더 많이 받겠죠.”“석훈 씨, 요즘 돈독이 올랐어요?”임우정이 휘둥그레진 두 눈으로 물으니, 신석훈이 일부러 한숨을 내쉬었다.“어휴, 돈독이 안 오르면 어떻게 장가가요.”“뭐라고요?”신석훈은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세게 저었다. 임우정도 웃으며 그를 때리려다가 갑자기 동작을 멈추었다.강서연은 그녀의 안색이 확 굳은 걸 바로 알아챘다.“언니, 왜 그래요?”임우정은 아무 말 없이 그저 한곳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녀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지면서 몸도 부들부들 떨었다.강서연은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링과 멀지 않은 곳에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는데 인파 속을 뚫고 비상구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우람한 체구에 뒷모습만 봐도 엄청 살벌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가슴이 움찔한 그녀는 임우정의 표정을 보자마자 뭔가 깨달은 듯했다...그때 임우정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어디 가요?”강서연도 따라나섰다. 임우정은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황급히 그 사람을 뒤쫓아갔다. 두 사람은 불빛이 어두컴컴한 복도를 지나 경기장의 백스테이지로 왔다.강서연이 숨을 헐떡이며 무슨 일이냐고 물으
“저기요, 지금 뭐 하는 거예요!”강서연이 소리를 지르며 남편 앞을 막아섰다.“난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남자의 두 눈에 경멸이 가득했다.“당신 남편한테 물어봐. 예전에 어떻게 날 깍듯하게 모셨는지... 하하, 내가 재떨이가 필요할 때면 두 손으로 받쳐 들곤 했어. 쟤 손바닥이 내 재떨이였거든.”“당신...”“이봐, 당신이 좋은 남자한테 시집간 줄 알았어?”남자가 아래위로 훑어보는 시선에 강서연은 기분이 매우 불쾌했다.“하하, 쟤는 맨 밑바닥에 있는 양아치야. 감방에서도 맨날 무시나 당하던 사람을 뭐가 좋다고 그리 감싸는 건데?”남자가 코웃음을 쳤다.“구현수, 너 아주 여자 복이 많다?”“그만하지 못해요?”강서연도 소리를 질렀고 전혀 밀리지 않았다.“당신이 누구든 여기는 공공장소예요. 계속 내 남편한테 무리하게 굴었다간 경비원 부를 거예요!”남자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구현수, 넌 여전히 못났구나? 아직도 여자 뒤에 숨을 줄밖에 몰라?”“이게... 다 무슨 일이에요?”바로 헐레벌떡 뒤따라온 신석훈은 땀을 뻘뻘 흘리며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들을 쳐다보았다.임우정 걱정에 그녀 옆에 다가갔다. 그런데 채 다가가기도 전에 임우정이 옆으로 슬쩍 피하더니 일부러 그와 거리를 유지했다.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신석훈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그때 그 남자가 코웃음을 치더니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강서연은 너무도 화가 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구현수의 몸에, 담뱃재에 덴 자국은 없는지 자세히 살펴보니 다행히 다친 데는 없었다.임우정은 넋이라도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남자가 나가자, 그녀의 시선도 따라 움직였다. 잠시 후,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남자가 나간 방향으로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우정 씨...”신석훈은 그런 그녀를 말리지 못했다. 마음이 뭔가에 세게 부딪힌 것처럼 찢어질 듯이 아파 말을 잇지 못했다....임우정은 체육장 문 앞까지 쫓아갔다.멀리서부터 고급 자동차 십여 대가 천천히 달려오고 있는 걸 보았다. 수십 명
조금 전에 만난 구현수는 예전과 사뭇 달랐다. 전에 감방에 있을 땐 맨날 얻어맞기만 하던 구현수였는데 아까는 어찌나 날카롭고 싸늘한지 그 역시도 움찔했다.‘게다가 결혼까지 해서 와이프도 있어? 하하, 멀쩡한 여자라면 피해도 모자랄 판에, 누가 걔한테 시집가겠어!’“조사할 때 조심해. 새어나가지 않게.”육경섭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 모금 깊게 빨아들였다.“형, 구현수 와이프랑 임우정 씨가 가까운 사이인 것 같던데...”“걔 와이프까지 조사해!”육경섭의 눈빛이 흉악스럽기 그지없었다.“대체 어떤 여장부인지, 두 부부가 무슨 꿍꿍이인 건지 잘 알아봐야겠어!”...저녁에 집으로 돌아온 후 강서연은 구현수가 씻을 목욕물을 받아서 따끈따끈한 물에 몸을 담그라고 했다. 그리고 그녀는 욕조 옆에 웅크리고 앉아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었다.구현수가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힘들게 안 주물러도 돼. 가서 일찍 쉬어. 씻고 금방 들어갈게.”“하나도 안 힘들어요.”강서연은 그를 보며 계속 고집스럽게 마사지해 주었다.그런데 구현수의 낯빛이 살짝 변했다. 마사지하지 말라고 한 건 꾹꾹 누르는 힘이 마사지가 아니라 유혹이었기 때문이다. 섬섬옥수로 마치 마법이라도 부리는 듯 그의 몸을 터치할 때마다 저도 모르게 흥분되었다...구현수는 숨을 깊게 들이쉰 후 고개를 옆으로 돌려 그녀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녀의 작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코끝에 땀방울이 맺혔다. 잔머리가 자연스럽게 내려와 귀밑에 붙은 모습이 너무도 귀여워 당장이라도 욕조 안으로 끌어들이고 싶었다.구현수가 씩 웃으며 그녀의 손목을 잡으려던 그때 강서연의 한마디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다른 생각 하지 말아요. 나 오늘은 안 돼요.”강서연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계속 팔 마사지를 해주었다. 순간 김이 샌 구현수는 욕조 안에서 잔뜩 풀이 죽은 모습으로 마사지를 받았다.“남자들 머릿속에는 그 생각밖에 없어요?”구현수가 생각에 잠겼다.‘난 다른 남자랑 달라. 네 앞에서만 이런다고.’그녀의 말이
그는 아무 말 없이 그저 거친 숨만 몰아쉬었다. 진동음과 함께 메일이 도착하자 그는 바로 자료를 확인했다.역시 최연준의 예상대로 육경섭과 진짜 구현수 사이, 과거에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게 맞았다.“연준 도련님.”방한서가 계속 말을 이었다.“육경섭은 18살에 특수 상해죄로 감옥에 들어가 10년 형을 선고받았는데 모범수가 되어서 2년 적게 살고 가석방되었어요. 요 2년 동안 강주 일대에서 조폭 패거리를 관리하면서 돈도 많이 벌었더라고요. 그런데 소문에는 육경섭이 지금 이 자리에 앉을 수 있었던 건 몇몇 두목 사이를 이간질하고 몰래 뒤에서 처리해서 조폭 두목이 됐대요. 지금 육경섭 밑에 적지 않은 술집이 있다고 하는데 그건 다 간판일 뿐이고 사실은 불법 밀거래를 하고 있답니다.”구현수가 어두운 목소리로 물었다.“예전에, 감방에 있을 때는 어땠는데?”방한서가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말을 이었다.“감방에 있을 땐 그래도 나름 두목이었어요. 죄수들도 여러 등급으로 나뉘는데 육경섭처럼 사람을 죽이고 다치게 해서 들어온 죄수는 1등급이라 다른 죄수들이 함부로 대하지 못했대요. 그리고 구현수 같은 강간범은 가장 무시당하는 죄수래요.”“뭐?”최연준은 그가 빌려 쓴 신분의 구현수 인생이 이럴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그냥 패싸움이나 하고 다니는 건달이었다며?”방한서가 씁쓸하게 웃었다.“도련님, 일반 건달이었다면 감방을 그렇게 여러 번이나 갔다 왔겠어요?”최연준은 머리가 지끈거려 미간을 문질렀다.“구현수는 상습범이에요. 강간당한 여자 중에 가장 어린 나이가 16살 밖에 안 된대요...”최연준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가 다시 내뱉었다.‘더러운 인간!’이런 인간은 육경섭뿐만 아니라 최연준도 혐오하긴 마찬가지였다.구현수가 이미 죽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도련님, 육경섭이라는 사람 최대한 멀리하세요. 그 사람 지금 세력이 최상과는 비할 바가 안 되지만 그래도 조폭 쪽이라 우리랑은 아예 달라요. 혹시라도...”“응. 나도 알아.”그는 방한서
“이 늦은 밤에... 볼 뉴스가 있어요?”“다 지나간 뉴스야. 심심할 땐 가끔 들어가서 보거든.”강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잠이 덜 깨 그의 어깨에 살포시 기댔다.최연준은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향긋한 샴푸 냄새가 그의 코끝을 스쳤다. 만약 강서연이 한 달에 한 번 걸리는 마법에 걸리지 않았더라면...최연준은 심호흡하며 그 생각을 떨쳐내려 애를 썼다. 요즘 야한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아서 정말 큰 일이다.“여보.”강서연이 나지막이 말했다.“나 할 얘기 있어요.”“뭔데?”“아빠가 나한테 강진 그룹으로 들어오는 게 어떻겠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월급도 이쪽보다 3배는 많아서 엄마 병원비 걱정 안 해도 된다면서요.”최연준의 두 눈에 어둠이 스쳐 지나갔다. 늙은 여우 같은 강명원의 말이라면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절대 그리 단순하진 않을 것이다.“당신 생각은 어때?”“나요?”모든 걸 꿰뚫어 본 강서연이 피식 웃었다.“아빠가 좋은 뜻으로 나더러 돌아오라고 한 것 같지는 않아요. 어릴 적부터 아빠의 책임을 져 본 적 없는 사람인지라, 갑자기 강진에 와서 일하라는 건 너무 이상해요.”최연준의 찌푸렸던 미간도 그제야 느슨해지면서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누구보다 똑똑한 와이프가 단지 가족이라는 이유로 쉽게 그들의 꿍꿍이에 놀아나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그깟 권력에 눈멀어서 아빠는 절대 놓지 않으려 해요.”강서연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얼마 전에 아빠가 거슬려 하는 짓을 유빈 언니가 했거든요. 이번에 나한테 돌아오라고 한 건 그 집에 강유빈 말고 나라는 딸이 하나 더 있다고 언니한테 경고하기 위해서예요. 그리고 이건 좀 더 나쁜 생각이지만...”강서연이 몸을 웅크리고 앉아 턱을 무릎 위에 받친 채 커다란 두 눈을 깜빡였다.“나랑 유빈 언니가 서로 물고 뜯고 싸우는 걸 옆에서 보면서 어부지리로 이득을 보려는 생각일 수도 있어요. 흥, 아빠는 그저 날 이용해서 강유빈을 견제하고 싶을 뿐이에요.”최연준이 놀라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돌리고 그를 쳐다보는 강서연의 표정이 덤덤하기만 했다.“내 결정은 거절이에요.”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최연준의 예상을 조금 넘어선 대답이었지만 그녀의 생각을 더 들어보고 싶었다.“난 어릴 적부터 남들과 조금 다른 가정에서 자랐어요.”강서연은 그에게 기댄 채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 갔다.“아빠는 없기만 못했고 정신이 오락가락한 엄마에 남동생까지 챙겨야 했어요. 게다가 이쪽에서는 양연 아줌마와 강유빈의 갖은 괴롭힘과 치욕을 견뎌야 했고요. 강씨 가문이 나한테 준 게 뭐가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나한테 그 어떤 따스함도 준 적이 없는 집인데 인제 와서 강진 그룹에 힘을 보태고 싶진 않아요.”그녀가 고개를 들고 그를 올려다보았다.“난 이젠 현수 씨 아내예요. 더는 강씨 가문과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 그리고 아빠가 날 불러들인 목적이 불순하잖아요. 아빠한테 이용당하고 싶지 않아요.”강서연이 그의 허리춤을 꼭 껴안았다.“여보... 난 그냥 다른 생각 하지 않고 우리 둘이서만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최연준이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그녀의 마음을 완전히 헤아릴 수는 없어도 이런 집안에서 자란 아이가 나중에 얼마나 큰 트라우마를 겪을지는 알고 있었다.최씨 가문도 겉으로는 화려하고 남 부러울 것 없어 보이지만 사실 그들보다 더 콩가루 집안은 없을 것이다.그녀가 속상해하는 게 마음 아팠지만 반드시 그들과 함께 공존해야 하는 법을 깨우쳐야 한다. 왜냐하면 이게 바로 생존 법칙이니까.그가 목소리를 내리깔고 말했다.“서연아, 난 그렇게 생각 안 해.”“네?”“네가 강씨 가문과 관계를 끊고 싶어 하는 마음은 이해해. 하지만 혈연관계라는 건 평생 바꿀 수도 없고 네가 관계를 끊고 싶다고 해서 사라지는 게 아니야.”반짝거리는 그녀의 두 눈이 어두워졌다.“우리 엄마 생각해 본 적 있어요?”그녀가 어두운 얼굴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최연준은 그녀의 볼을 어루만지며 그윽하게 내려다보았다.“네 아빠가 장모님한테 몹쓸 짓을 한 바람에 네
검은 캡 모자 밑으로 험상궂은 얼굴이 드러났고 사악한 눈빛에 오만함과 경멸이 섞여 있었다.최연준은 잠깐 멈칫하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자연스럽게 인사했다.“경섭 씨.”“뭐?”그의 태도에 육경섭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방금 경섭 씨라고 불렀어?”최연준이 덤덤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눈빛은 한없이 차가웠다.타고난 차가운 분위기에 그와 가까이하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위압감을 느꼈고 육경섭도 예외는 아니었다. 불안감이 밀려왔고 예전과 다른 모습에 자꾸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예전에 맨날 내 심부름만 할 때 어떤 꼴이었는지 다 잊었지?”그가 최연준의 어깨를 툭툭 쳤다.“흥, 그때는 형님 형님 하면서 굽신거리더니 이젠 교양이 있는 척하네?”하지만 육경섭의 손이 최연준의 어깨에 닿은 순간 최연준이 그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갑작스러운 상황에 육경섭은 깜짝 놀랐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애를 썼지만 하도 꽉 잡힌 바람에 꿈쩍할 수도 없었다.육경섭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구현수! 뭐 하는 짓이야!”최연준이 싸늘하게 웃더니 그의 손목을 확 비틀었다.순간 밀려온 엄청난 고통에 육경섭은 얼굴까지 시뻘게졌다. 그는 사나운 눈빛으로 최연준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경섭 씨, 말을 가려서 하시죠.”최연준이 또박또박 말했다.“과거에 내가 아무리 못나도 그건 다 지나간 일입니다. 선비는 헤어졌다 사흘이 지나면 다시 눈을 비비고 보아야 한다는 말, 못 들어봤어요?”“구현수...”“설령 예전에 당신의 하찮은 심부름을 했다고 해도 앞으로는 절대 그럴 일이 없어요. 그러니까 다시는 날 찾아와서 귀찮게 하지 말아요. 안 그러면 나도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귀에 때려 박혔다. 육경섭의 표정이 저도 모르게 굳어졌다.최연준이 꽉 잡고 있던 손목을 풀며 날카롭게 노려보자 육경섭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그는 멀어져가는 최연준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정
“그럼 큰아가씨는 완전히 세력을 잃은 건가요?”“그건 아직 몰라요... 아무튼 지난번에 큰아가씨가 수십억 사기를 당한 일로 회장님이 화가 많이 나셨어요. 하긴, 그런 머리로 이 큰 그룹을 어떻게 관리하겠어요.”뭇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강서연의 귓가에 전해졌다. 그녀는 그 소리를 애써 무시했다.구현수가 그녀에게 얘기하지 않았던가? 무슨 일이 있어도 덤덤하게 대해야 한다고. 침착할수록 더 좋은 대책이 떠오른다고 했다. 사람은 당황할 때 이성을 가장 쉽게 잃는 법이니까.남편 생각에 강서연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올라갔고 안색도 아주 편해졌다.이사회가 제시간에 맞춰 시작됐다.강명원은 이사회에서 강서연을 간단하게 소개한 후 맡을 업무를 안배했다. 주주들은 전부 시선을 아래로 내리뜨리고 강명원의 결정에 토도 달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여러 의혹이 있었지만 그래도 겉으로는 강서연을 환영했다.어쨌거나 아직 후계자가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니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건 없었다.이사회가 끝난 후 사람들이 회의실을 나섰고 강서연은 회사 사무 환경을 둘러볼 생각이었다.그런데 그녀가 1층 로비에 도착했을 때 뒤에서 누군가 갑자기 그녀를 불렀다.“강서연!”그녀가 고개를 돌리자마자 다짜고짜 따귀 한대가 날아왔다. 순간 머리가 멍했고 따끔거리는 볼을 움켜쥐었다. 이 세상이 마치 진공 속에 빠진 듯 수많은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그녀가 고개를 들어보니 강유빈이 노기등등하여 그녀를 잡아먹을 기세로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천한 것 같으니라고!”강유빈이 목청을 높이며 욕설을 퍼부었다.“평소에는 강씨 가문 재산에 아무런 관심도 없는 척하더니 인제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정말 네 그 뻔뻔한 엄마랑 똑같이 쌍스러워!”“강유빈!”강서연의 몸이 살짝 떨렸다.“함부로 말하지 마! 난 강씨 가문의 재산에 아예 관심 없어. 오늘은 회장님께서 오라고 해서 온 거고 주식도 회장님이 주신 거야! 재간 있으면 이사회에 가서 따져. 여기서 거들
“그... 괜찮아!”정승우는 억지로 미소 지으며 권온유에게 말했다. 정승우는 이곳에서 권온유를 반드시 데리고 나가겠다고 결심했다.그런데 이때, 공장 문이 “쾅” 하고 열리더니 곧바로 하이힐 소리가 들려왔다.정승우는 재빨리 권온유에게 눈짓했고 권온유도 알아채고는 즉시 땅바닥에 쓰러져 의식이 없는 척했다.정승우는 벽에 기대어 눈을 반쯤 감았다.“이 아이인가요?”영미의 목소리에는 차가운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맞아.”정대명은 영미를 흘깃 노려보며 묵묵히 대답했다.영미는 두 걸음 앞으로 다가서서 희미한 빛 속에 있는 아이를 살펴보더니, 곧 얼굴빛이 확 변했다.“이 아이... 혹시 권씨 집안의 막내딸 아니에요?”정대명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애초에 아이를 훔쳐 올 때 이 아이가 누구의 자식인지 알 리가 없었다.“정대명 씨.”영미가 차갑게 웃으며 돌아보았다.“제가 최씨 가문 집안 아이를 훔쳐 오라고 했지, 권씨 집안 아이를 훔치라고 했나요? 이러고도 저를 속이지 않았다고요?”“그게...”정대명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영미 아가씨, 어차피 목적은 백인서를 곤경에 빠뜨리는 거잖아? 그러니 누구를 훔쳐 오든 상관없지 않아? 아이를 훔치기만 하면 유괴범이 되는 거니까.”이 말은 영미에게만 충격을 준 게 아니었다. 정승우의 귀에도 또렷이 들어왔다.“좋아요.”영미는 깊은숨을 들이마신 뒤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이 아이는 잘 지키고 있어요, 제가 다시 연락할 테니까.”...한편, 권씨 집안은 완전히 뒤집혀 있었다.권욱은 조순영을 탓하며 아이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고 했고, 조순영은 오열하며 남편을 원망했다. 조순영은 권욱이 바깥에서 여자와 부적절하게 얽히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거라고 했다.“헛소리하지 마! 사람들이 나한테 어떤 소문을 퍼뜨렸는지 잘 알잖아. 결혼 생활 내내 너한테 부끄러운 일 한 적 없어.”“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정말 떳떳하게 행동했다면 왜 사람들이 당신만 가만두지 않는 건데?”며칠 전까지만
권온유의 질문에 정승우는 당황했다.권온유는 커다란 눈망울로 정승우를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했던 슈퍼맨 같은 오빠가, 이제는 먹을 것 하나 구하지 못하는 모습이 되어버린 것이다.정승우는 어색하게 입가를 씰룩이며 권온유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이야기를 이어갔다.“너, 정말 배고파?”“네!”권온유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듯 작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원래는 엄마랑 식당에서 밥을 먹으려 했어요. 엄마가 특별히 고등어조림을 준비해달라고 부탁하셨거든요... 엉엉... 엉엉...”“울지 마, 울지 마! 그냥 생선 하나 가지고...”“나 배고파!”정승우는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아이와 대화하는 건 그에게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겨우 권온유를 달래고 나서 정승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팔을 걷어붙이며 권온유에게 내밀었다.“너 정말 참을 수 없을 만큼 배고프면, 여기 한번 물어볼래?”권온유는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정승우를 바라보았다.“우리 집은 가난해서 늘 먹을 게 부족했거든. 그래서 어릴 때 너무 배가 고프면 이렇게 배고픔을 달랠 만한 걸 물곤 했어.”권온유는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특히 ‘배고픔을 달랠 만한 것'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정승우는 웃으며 계속 설명했다.“예를 들어 쌀통 같은 거야. 한때 쌀이 들어 있던 쌀통은 비어 있어도 쌀 냄새가 남아 있거든. 그래서 쌀통 가장자리를 살짝 물면서 하얀 쌀밥을 먹는 상상하는 거야. 그러면 배가 덜 고파져.”“그리고 이웃집에서 밥하는 냄새를 맡으며 그 밥을 먹는 상상을 하는 거야. 그러면 그렇게 배고프지 않더라고.”권온유는 정승우의 이야기에 넋을 잃고 입을 벌린 채 있었다. 정승우는 웃음을 터뜨렸다.지금은 웃으며 말할 수 있지만, 한때 정대명이 도박과 술에 빠져 정승우를 굶겼던 시절은 그야말로 비참한 순간들이었다.잠시 후, 권온유의 눈에 다시 눈물이 맺히는 것을 보고 정승우는 속으로 ‘큰일이다'라고 생
영미는 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최지용을 지켜보았다.최지용은 다소 초조한 기색으로 구석에 앉아 휴대전화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가끔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가 전화를 걸기도 했다.영미는 바로 뒤를 따라갔고 최지용의 낮고 다급한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찾았습니까?”“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세요... 만약 납치범의 목적이 돈이었다면 분명 전화를 걸어올 겁니다!”영미의 가슴이 철렁하며 내려앉았다.납치범이라니? 대체 뭘 찾는다는 거지?백인서와 통화한 걸까?그때, 최군성이 큰 소리로 외쳤다.“지용이 형, 여기서 뭐 해요?”영미는 얼른 몸을 숨겼고 최군성은 최지용에게 다가가 최지용을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우리 형이 찾고 있었는데 여기서 뭐 하고 있었던 거예요? 어서 와서 먹고 즐기자고요!”최지용은 최군성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며 영미와 눈이 마주쳤다. 둘은 동시에 잠시 멈칫했다.영미는 급히 시선을 피하며 억지 미소로 인사했다.“지용 오빠...”“어, 영미?”최군성도 배윤아처럼 물었다.“여기 웬일이야? 형님이 널 초대한 것 같지 않은데?”“그게...”영미는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최군성은 영미의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최지용을 끌고 가 먹고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최지용은 점점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영미가 도대체 여기 왜 있는 거지? 평소에는 볼 수 없던 사람이, 왜 하필 오늘 온유가 사라진 날에 나타난 걸까?그때, 최군형과 강소아가 가원이를 품에 안고 나타났다.강소아는 아이를 보행기에 앉혔고 아이는 보행기 가장자리를 잡고 작은 발을 내디뎠다. 이 모습에 방 안의 모든 사람이 환호성을 질렀다.영미는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황급히 자리를 떠 교외의 버려진 공장으로 향했다.그 시각, 정대명은 영미의 지시에 따라 승합차를 몰고 공장에 도착해 있었고 영미가 도착했을 때 그는 공장 문 앞에서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영미는 핸드백을 휘둘러 정대명에게 던졌다.“정대명 씨, 감히 날 속여
“너 따위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정대명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하지만 결국엔 자기 아들이었기에 정승우에게 감출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때리고 꾸짖어도 떠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정대명은 서랍에서 가위를 꺼내 들고는 권온유의 양 갈래머리를 단칼에 잘라냈다. 머리카락이 천천히 바닥에 떨어졌다.정승우는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있다가 막아서려는 순간, 자신과 정대명 사이에 힘의 격차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무작정 나섰다가는 역부족일 터였다.정승우는 이를 악물고 정대명에게 다가가 물었다.“아빠, 정말 이 아이를 팔 생각이에요?”“내가 원하는 게 아니야, 영미라는 그 여자가 원하는 거야!”정대명은 불만스레 대꾸하며 정승우에게 옷장에 있는 헌 옷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정승우가 옷을 가져오자, 정대명은 손을 뻗어 권온유의 예쁜 드레스를 찢으려 했다. 정승우는 급히 소리쳤다.“뭐 하는 거예요!”“이 자식이!”정대명은 정승우를 노려보며 소리쳤다.“조용히 해! 죽고 싶어?”“아빠, 이건...”“이 애한테 옷을 갈아입히려는 거야! 이렇게 좋은 옷을 입고 있으면 바로 눈에 띄잖아.”정승우는 다가가 정대명을 옆으로 밀치며 말했다.“제가 갈아입힐게요!”“이놈이...”정대명은 하려던 말을 멈추고 피식 웃었다. 그는 정승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아하, 아빠를 도와주고 싶구나? 역시 아들은 아들밖에 없지! 그래, 네가 손이 빠르니까 빨리 옷을 갈아입혀. 둘이 함께 가자고!”정승우는 속으로 혐오감이 치밀었지만, 지금은 그저 상황을 지켜보며 대응하는 수밖에 없었다.정승우는 권온유의 드레스를 벗기지 않고, 정대명의 헌 옷을 위에 입혀 단단히 감쌌다. 그런 다음 모자를 씌워 얼핏 보면 남자아이처럼 보이게 했다.“좋아, 이 정도면 되겠어!”정대명은 정승우에게 눈짓을 보내며 말했다.“뒷문에 승합차가 준비돼 있대. 어서 출발하자!”“아빠, 이 소녀는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예요?”“교외지!”정대명은 귀찮다는 듯 말했다.“빨리 움직
권온유는 깜짝 놀라며 정대명을 멍하니 쳐다보았다.“아저씨가 맛있는 걸 가지고 왔단다. 배고프지 않니?”권온유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달아나려 했다. 정대명은 급히 권온유 앞을 가로막았다.“아니, 가지 마!”정대명은 두 손으로 권온유를 꼭 붙들며 말했다.“그게... 네 엄마가 나한테 너를 데려오라고 부탁했어!”엄마라는 말을 듣고 권온유는 잠시 멈칫했다.“정말이야, 네 엄마가 부탁한 거라니까!”정대명은 거짓말을 이어갔다.“방금 네 엄마가 갑자기 어디론가 가버렸지? 너 보고 기다리라고 했잖아?”“네... 맞아요.”“그래!”정대명은 웃으며 말했다.“그런데 네가 여기저기 막 돌아다녀서 엄마가 널 못 찾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엄마는 내가 여기 있는 걸 알 거예요. 저는 여기서 조금 놀다가 다시 휴게실로 돌아갈 거예요!”“오... 그렇구나.”정대명은 잠시 생각을 굴렸다.“아저씨가 휴게실이 어딘지 아니까, 내가 데려다줄게!”권온유는 경계하며 정대명에게서 몸을 빼내고 두 걸음 물러났다.“얘가! 난 정말로 네 엄마 친구라니까. 네가 여기저기 돌아다녀서 엄마가 널 못 찾게 되면 걱정하지 않겠어? 맞지?”“자, 자! 아저씨가 데려다줄게. 착하지!”정대명은 권온유를 갑자기 붙들어 어깨에 둘러맸다. 권온유는 본능적으로 소리치려 했지만, 정대명의 손이 입을 단단히 막고 있어 소리를 낼 수 없었다.어린 소녀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어른 남자를 이길 수는 없었다. 정대명은 권온유의 머리 뒤쪽을 세게 내리쳐 기절시켰고, 온유가 들고 있던 인형은 땅에 떨어졌다....정승우는 익숙하게 호텔로 와서 지난번 일을 핑계로 다시 정대명에게 돈을 뜯어낼 생각이었는데, 방 안에 기절한 어린 소녀가 누워 있는 걸 발견했다.“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어른 일에 참견하지 말고 신경 꺼!”정대명은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방금 정대명은 온유를 데려오며 보안과 호텔 직원의 눈을 피하고자 아이를 어깨에 메고 가지 않고, 자신의 아이인 것처럼 속여서 안
“엄마, 우리 오늘도 여기서 밥 먹어요?”“그래. 네가 제일 좋아하는 게 고등어조림 요리잖아.”“그런데...”권온유는 입을 꾹 다물고 말을 삼켰다. 사실 권온유는 집에서 밥을 먹고 싶었다.어린 권온유도 느낄 만큼 엄마는 요즘 기분이 좋지 않았다.방금 대답조차 어딘가 건성으로 들렸다.권온유는 어른들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는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았다가 나빴다가 하는 걸까? 누군가 아빠와 다른 여자가 함께 찍힌 사진을 보내기만 하면, 엄마는 이렇게 변해버렸다.“엄마...”권온유는 엄마의 손을 조심스레 잡아당겼다. 그러나 조순영은 갑자기 권온유의 손을 놓고는 시선이 어느 한 곳에 고정되더니 초조한 표정으로 그곳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권온유는 깜짝 놀라 인형을 떨어뜨렸다.“엄마!”“온유야, 여기서 움직이지 말고 있어!”조순영은 급히 돌아보며 외쳤다.“엄마 금방 올게!”권온유는 엄마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홀로 서 있었다. 시야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엄마의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엄마는 아빠가 다른 여자가 친밀하게 지내는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엄마는 통제력을 잃고 온유를 혼자 내버려두곤 했다. 그러고 한참 후에야 멍한 표정으로 다시 돌아오곤 했다.어두운 구석에 숨어 있던 정대명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요 며칠 동안 몇 번이나 이 모녀를 본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이 여자는 자주 아이와 함께 식사하러 왔는데 가끔 혼자 올 때도 있었다...남편의 외도를 잡으려는 걸까?맞아, 틀림없이 그런 거다!정대명은 매일 호텔에 살면서 듣는 소문도 적지 않았다. 한 회장이라는 사람은 아내와 자식이 있음에도 바람이 잦았다고 하는데 그 회장은 차기 시장의 사위가 될 인물이라는 말도 있었다.정대명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이런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차피 남자가 바깥에서 다른 여자를 만나는 건 흔한 일이니까.정대명은 다시 어린 소녀를 주시했다. 소녀
정대명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얼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며칠을 기다린 결과가 고작 최가원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었다.그럼에도 영미는 끊임없이 전화를 걸어왔다.“정대명 씨, 대체 뭐 하고 있는 겁니까? 대단한 것도 아니고 아이 하나 훔쳐 오는 게 그렇게 어렵나요?”젠장! 정대명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차라리 보석을 훔치는 게 더 쉬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하하... 영미 아가씨.”마음속으로는 욕하고 있었지만, 얼굴엔 여전히 웃음이 서려 있었다.“이게, 그렇게 쉽지 않네요! 제가 며칠 동안 지켜본 결과, 그 경호원들이 전부 총을 들고 있더라고요. 제가 무턱대고 나서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정말 쓸모없네요.”영미의 목소리는 차가웠다.“내가 사람들까지 매수해 놨는데, 일을 이따위로 하다니!”정대명은 억눌린 분노를 꾹 참고 입을 다물었다.“말해 두겠는데요!”영미는 한발 더 나아가 말했다.“이 일 못 해내면, 화려한 호텔 스위트룸도 더 이상 못 쓰게 될 테고 돈 한 푼도 못 받는 줄 아세요! 다시 그 작은 산골 마을로 돌아가서 평생 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으면 똑바로 하세요!”정대명은 이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했다.호사에 길든 사람이 다시 가난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려운 법이다. 최근 정대명은 오성에서 살아가며 화려한 삶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영미는 정대명이 잘 먹고 살게 도와줬고 돈까지도 넉넉히 주니 점점 체면이 생기기 시작했다.호텔에서 정대명이 매일 스위트룸에서 지내는 것을 본 사람들은 그를 대단한 부자로 착각했고 그에게 예의를 갖추며 인사했다.이런 삶은 초라했던 지난날에선 꿈도 꾸지 못한 것이었다.고작 아이 하나 때문에 이 모든 걸 잃기엔 너무 아까웠다.정대명은 급히 전화기를 붙잡고 외쳤다.“영미 아가씨, 너무 흥분하지 마!”영미는 냉소적인 웃음을 흘렸다.“내가... 내가 방법을 찾아볼게.”정대명은 어영부영 답했다.“겨우 아이 하나 가지고, 뭐 대단한 일도 아니지! 내가
백인서는 웃으며 정승우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었다.정승우는 전혀 망설임 없이 백인서의 그릇에 고기가 많은 걸 보자마자 젓가락을 뻗었다.“너 지금 내 소고기를 뺏어 먹는 거야?”“사장님이 누나만 편애하는 거 아니에요? 고기를 이렇게나 많이 주다니!”“안 돼, 내 거야. 뺏어 먹지 마.”백인서는 웃으며 말했다.“이건 사장님이 특별히 주신 사랑의 소고기야!”“저는 성장기 남자애라 많이 먹어야 해요!”두 사람은 웃고 떠들며 면을 거의 다 비워가고 있었다. 백인서가 정승우에게 국수를 한 그릇 더 가져다주려고 일어서려는 순간, 달콤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고모!”백인서는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예쁘고 앙증맞은 작은 공주가 백인서에게 달려왔다.“온유야?”권온유는 백인서에게 달라붙어 작은 머리로 백인서의 품에 얼굴을 비볐다.정승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정승우는 이렇게 예쁜 여자아이를 본 적이 없었다. 두 갈래로 묶은 머리에 공주 같은 퍼프 드레스를 입고, 마치 아까 놀이공원에서 본 백설 공주처럼 보였다.이 아이는 정말 동화 속에서 나온 공주일까?작은 소녀는 고개를 기울여 정승우를 한 번 바라보더니 달콤하게 미소를 지으며 다시 백인서를 보며 물었다.“고모, 이 사람은 누구예요?”“이 사람은...”백인서가 대답하려던 찰나, 문밖에서 권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 오빠는 학교에서 우등생이야. 공부도 엄청 열심히 하거든. 온유도 나중에 커서 이 오빠처럼 열심히 공부해야 해.”백인서는 권욱을 올려다보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여긴 어떻게 오셨어요?”“왜? 딸과 단둘이 외식하러 나오는 게 이상해?”“아니요.”백인서는 고개를 저었다.“그냥 권욱 씨가 이런 작은 가게에서 식사하실 줄은 몰랐어요...”“여기도 꽤 유명한 맛집이야!”권욱은 의자에 앉으며 사장에게 소고기 국수 두 그릇을 주문했다.“오늘 주말이라 온유를 데리고 나왔는데, 이 녀석이 배고프다고 해서 핸드폰으로 근처 맛집을 검색해 보니 이곳 평이 좋더라고.
정승우의 머릿속엔 여전히 어린 시절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그 시절, 백인서는 낮에는 그를 등에 업고 다녔고 밤에는 재워주며 보살폈다. 따뜻함이라고는 거의 없었던 그의 삶에서 백인서는 유일하게 빛을 밝혀 준 존재였다.누가 세 살, 네 살 아이에게 기억이 없다고 했던가? 그 기억은 정승우의 성장 내내 곁을 지켜 주었고 다시 누나를 찾을 수 있도록 지탱해 주었다.“누나, 제발... 울지 마세요. 백 선생님!”백인서는 깜짝 놀라 정승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백인서는 정승우의 미소에 눈물을 멈췄다.두 사람은 작은 음식점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우연히도, 이곳은 예전에 최지용이 백인서를 데리고 와 소고기 국수를 먹던 곳이었다.이번에도 그 가게 주인이 반갑게 맞이하며 다가왔다.“오, 이게 누구야! 귀한 손님이 오셨네!”그의 시선이 정승우에게로 멈췄다.“이 아이는?”“동생이에요!”정승우가 먼저 씩씩하게 대답했다.백인서는 미소를 지으며 주인에게 소고기 국수 두 그릇을 주문했다.주인은 의아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한번 보고는 주방으로 돌아가 푸짐하게 고기가 올라간 소고기 국수를 내왔다.“얼른 먹어!”백인서는 젓가락을 건네며 말했다.“여긴 정직하게 장사하는 곳이라 양도 푸짐하고 맛도 아주 좋아. 지용 씨가 나를 데리고 왔던 곳인데...”최지용을 언급하자 백인서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정승우는 장난기 어린 미소로 백인서를 바라보며 물었다.“그 남자, 누나한테 잘해 줘요?”백인서는 모르는 척하며 대답했다.“무슨 남자?”“그러니까, 방금 말한 그 지용이란 사람 말이에요!”정승우는 더욱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숨기지 않아도 돼요. 산에 있을 때, 두 사람이 포옹하는 것도 봤고 그 사람이 누나한테 키스하는 것도 다 봤어요!”“정승우!”백인서는 정승우를 노려보았고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씩 쏠렸다.“그만해!”백인서는 테이블 아래로 정승우의 다리를 가볍게 툭 차며 말했다.“애가 무슨 이상한 소릴 하고 있어!”“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