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들 전부 윤문희의 사진이었다.정신 요양 병원은 다른 병원보다 조금 특별했다. 환자 대부분이 면역력이 낮아 환자 가족들이 외부 세균이나 독감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걸 막기 위해 요즘 규정을 새로 수정했다.환자 가족은 한 달에 한 번 면회가 가능했고 나머지 시간에는 요양원에서 전문가가 직접 보살핀다고 한다.강서연은 더는 전처럼 언제든지 어머니를 볼 수 없게 되었다. 하여 신석훈은 시간이 여유로울 때마다 그녀 어머니의 사진을 종종 찍어 요양원에서 잘 지낸다고 알려주곤 했다.“아주머니 잘 지내고 계세요.”신석훈이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아주머니를 돌보는 간호사가 그러는데 요즘 대화할 때나 야외 활동을 할 때나 보통 사람과 다를 바가 없대요. 저도 아주머니 차트도 보고 담당 의사한테 물어봤는데 요즘 복용하는 약도 절반 줄었대요.”“정말이에요?”강서연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소식이 없었다.신석훈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하지만 전 그냥 이쪽에 잠깐 배우러 온 의사라 직권이 별로 없어서 아주머니를 자주 보러 가진 못해요. 안 그러면 서연 씨도 아주머니 상황을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텐데 말이죠.”“그런 말씀 말아요.”강서연이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저는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심 의사님, 정말 너무 고마워요.”“별말씀을요.”신석훈이 입술을 적셨다.“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전데요.”“저한테 고맙다고요?”신석훈이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더니 웃으며 말했다.“저 요즘 우정 씨랑 자주 데이트도 하고 그랬어요... 하하, 서연 씨가 저에 대한 좋은 얘기 많이 해준 거 맞죠? 고마워요, 서연 씨!”강서연은 진심으로 기뻤고 또 임우정이 행복하길 바랐다. 하지만 임우정이 왜 그녀에게 솔직하게 얘기하지 않은 건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그녀는 잠깐 침묵하다가 이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건 다 신 의사님의 정성이죠. 우정 언니가 신 의사님의 진심에 감동한 거예요.”“만약 서연 씨가 지난번 여행을 계획하지 않았더라면 저랑 우정 씨도 이렇
“와, 대박이에요, 대박!”신석훈이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여느 관중들 못지않게 경기를 관람하는 내내 기뻐 어쩔 줄을 모르는 건 물론이고 목청 높이 응원하기도 했다.“그렇지! 훅을 날리란 말이야... 그래!”현장의 환호성이 귀청이 떨어질 만큼 쩌렁쩌렁했다. 또다시 구현수의 제자가 경기 승리를 거두었다.“서연 씨, 오늘 경기 모두 현수 씨의 제자들이 이긴다면 상금도 엄청 많이 받겠네요?”그의 질문에 강서연은 웃음을 터뜨렸다.“왜 그래요.”임우정은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그럼 석훈 씨도 업종 바꿀래요? 의사 말고 복싱 코치할래요?”“그것도 나름 괜찮은 생각이에요!”신석훈이 주변을 쭉 둘러보았다.“관중들 좀 봐봐요. 다들 티켓을 구매하고 온 사람들이잖아요. 복싱 선수는 지든 이기든 출전 수당이 있으니까, 코치는 당연히 더 많이 받겠죠.”“석훈 씨, 요즘 돈독이 올랐어요?”임우정이 휘둥그레진 두 눈으로 물으니, 신석훈이 일부러 한숨을 내쉬었다.“어휴, 돈독이 안 오르면 어떻게 장가가요.”“뭐라고요?”신석훈은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세게 저었다. 임우정도 웃으며 그를 때리려다가 갑자기 동작을 멈추었다.강서연은 그녀의 안색이 확 굳은 걸 바로 알아챘다.“언니, 왜 그래요?”임우정은 아무 말 없이 그저 한곳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녀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지면서 몸도 부들부들 떨었다.강서연은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링과 멀지 않은 곳에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는데 인파 속을 뚫고 비상구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우람한 체구에 뒷모습만 봐도 엄청 살벌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가슴이 움찔한 그녀는 임우정의 표정을 보자마자 뭔가 깨달은 듯했다...그때 임우정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어디 가요?”강서연도 따라나섰다. 임우정은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황급히 그 사람을 뒤쫓아갔다. 두 사람은 불빛이 어두컴컴한 복도를 지나 경기장의 백스테이지로 왔다.강서연이 숨을 헐떡이며 무슨 일이냐고 물으
“저기요, 지금 뭐 하는 거예요!”강서연이 소리를 지르며 남편 앞을 막아섰다.“난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남자의 두 눈에 경멸이 가득했다.“당신 남편한테 물어봐. 예전에 어떻게 날 깍듯하게 모셨는지... 하하, 내가 재떨이가 필요할 때면 두 손으로 받쳐 들곤 했어. 쟤 손바닥이 내 재떨이였거든.”“당신...”“이봐, 당신이 좋은 남자한테 시집간 줄 알았어?”남자가 아래위로 훑어보는 시선에 강서연은 기분이 매우 불쾌했다.“하하, 쟤는 맨 밑바닥에 있는 양아치야. 감방에서도 맨날 무시나 당하던 사람을 뭐가 좋다고 그리 감싸는 건데?”남자가 코웃음을 쳤다.“구현수, 너 아주 여자 복이 많다?”“그만하지 못해요?”강서연도 소리를 질렀고 전혀 밀리지 않았다.“당신이 누구든 여기는 공공장소예요. 계속 내 남편한테 무리하게 굴었다간 경비원 부를 거예요!”남자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구현수, 넌 여전히 못났구나? 아직도 여자 뒤에 숨을 줄밖에 몰라?”“이게... 다 무슨 일이에요?”바로 헐레벌떡 뒤따라온 신석훈은 땀을 뻘뻘 흘리며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들을 쳐다보았다.임우정 걱정에 그녀 옆에 다가갔다. 그런데 채 다가가기도 전에 임우정이 옆으로 슬쩍 피하더니 일부러 그와 거리를 유지했다.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신석훈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그때 그 남자가 코웃음을 치더니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강서연은 너무도 화가 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구현수의 몸에, 담뱃재에 덴 자국은 없는지 자세히 살펴보니 다행히 다친 데는 없었다.임우정은 넋이라도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남자가 나가자, 그녀의 시선도 따라 움직였다. 잠시 후,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남자가 나간 방향으로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우정 씨...”신석훈은 그런 그녀를 말리지 못했다. 마음이 뭔가에 세게 부딪힌 것처럼 찢어질 듯이 아파 말을 잇지 못했다....임우정은 체육장 문 앞까지 쫓아갔다.멀리서부터 고급 자동차 십여 대가 천천히 달려오고 있는 걸 보았다. 수십 명
조금 전에 만난 구현수는 예전과 사뭇 달랐다. 전에 감방에 있을 땐 맨날 얻어맞기만 하던 구현수였는데 아까는 어찌나 날카롭고 싸늘한지 그 역시도 움찔했다.‘게다가 결혼까지 해서 와이프도 있어? 하하, 멀쩡한 여자라면 피해도 모자랄 판에, 누가 걔한테 시집가겠어!’“조사할 때 조심해. 새어나가지 않게.”육경섭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 모금 깊게 빨아들였다.“형, 구현수 와이프랑 임우정 씨가 가까운 사이인 것 같던데...”“걔 와이프까지 조사해!”육경섭의 눈빛이 흉악스럽기 그지없었다.“대체 어떤 여장부인지, 두 부부가 무슨 꿍꿍이인 건지 잘 알아봐야겠어!”...저녁에 집으로 돌아온 후 강서연은 구현수가 씻을 목욕물을 받아서 따끈따끈한 물에 몸을 담그라고 했다. 그리고 그녀는 욕조 옆에 웅크리고 앉아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었다.구현수가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힘들게 안 주물러도 돼. 가서 일찍 쉬어. 씻고 금방 들어갈게.”“하나도 안 힘들어요.”강서연은 그를 보며 계속 고집스럽게 마사지해 주었다.그런데 구현수의 낯빛이 살짝 변했다. 마사지하지 말라고 한 건 꾹꾹 누르는 힘이 마사지가 아니라 유혹이었기 때문이다. 섬섬옥수로 마치 마법이라도 부리는 듯 그의 몸을 터치할 때마다 저도 모르게 흥분되었다...구현수는 숨을 깊게 들이쉰 후 고개를 옆으로 돌려 그녀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녀의 작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코끝에 땀방울이 맺혔다. 잔머리가 자연스럽게 내려와 귀밑에 붙은 모습이 너무도 귀여워 당장이라도 욕조 안으로 끌어들이고 싶었다.구현수가 씩 웃으며 그녀의 손목을 잡으려던 그때 강서연의 한마디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다른 생각 하지 말아요. 나 오늘은 안 돼요.”강서연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계속 팔 마사지를 해주었다. 순간 김이 샌 구현수는 욕조 안에서 잔뜩 풀이 죽은 모습으로 마사지를 받았다.“남자들 머릿속에는 그 생각밖에 없어요?”구현수가 생각에 잠겼다.‘난 다른 남자랑 달라. 네 앞에서만 이런다고.’그녀의 말이
그는 아무 말 없이 그저 거친 숨만 몰아쉬었다. 진동음과 함께 메일이 도착하자 그는 바로 자료를 확인했다.역시 최연준의 예상대로 육경섭과 진짜 구현수 사이, 과거에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게 맞았다.“연준 도련님.”방한서가 계속 말을 이었다.“육경섭은 18살에 특수 상해죄로 감옥에 들어가 10년 형을 선고받았는데 모범수가 되어서 2년 적게 살고 가석방되었어요. 요 2년 동안 강주 일대에서 조폭 패거리를 관리하면서 돈도 많이 벌었더라고요. 그런데 소문에는 육경섭이 지금 이 자리에 앉을 수 있었던 건 몇몇 두목 사이를 이간질하고 몰래 뒤에서 처리해서 조폭 두목이 됐대요. 지금 육경섭 밑에 적지 않은 술집이 있다고 하는데 그건 다 간판일 뿐이고 사실은 불법 밀거래를 하고 있답니다.”구현수가 어두운 목소리로 물었다.“예전에, 감방에 있을 때는 어땠는데?”방한서가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말을 이었다.“감방에 있을 땐 그래도 나름 두목이었어요. 죄수들도 여러 등급으로 나뉘는데 육경섭처럼 사람을 죽이고 다치게 해서 들어온 죄수는 1등급이라 다른 죄수들이 함부로 대하지 못했대요. 그리고 구현수 같은 강간범은 가장 무시당하는 죄수래요.”“뭐?”최연준은 그가 빌려 쓴 신분의 구현수 인생이 이럴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그냥 패싸움이나 하고 다니는 건달이었다며?”방한서가 씁쓸하게 웃었다.“도련님, 일반 건달이었다면 감방을 그렇게 여러 번이나 갔다 왔겠어요?”최연준은 머리가 지끈거려 미간을 문질렀다.“구현수는 상습범이에요. 강간당한 여자 중에 가장 어린 나이가 16살 밖에 안 된대요...”최연준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가 다시 내뱉었다.‘더러운 인간!’이런 인간은 육경섭뿐만 아니라 최연준도 혐오하긴 마찬가지였다.구현수가 이미 죽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도련님, 육경섭이라는 사람 최대한 멀리하세요. 그 사람 지금 세력이 최상과는 비할 바가 안 되지만 그래도 조폭 쪽이라 우리랑은 아예 달라요. 혹시라도...”“응. 나도 알아.”그는 방한서
“이 늦은 밤에... 볼 뉴스가 있어요?”“다 지나간 뉴스야. 심심할 땐 가끔 들어가서 보거든.”강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잠이 덜 깨 그의 어깨에 살포시 기댔다.최연준은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향긋한 샴푸 냄새가 그의 코끝을 스쳤다. 만약 강서연이 한 달에 한 번 걸리는 마법에 걸리지 않았더라면...최연준은 심호흡하며 그 생각을 떨쳐내려 애를 썼다. 요즘 야한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아서 정말 큰 일이다.“여보.”강서연이 나지막이 말했다.“나 할 얘기 있어요.”“뭔데?”“아빠가 나한테 강진 그룹으로 들어오는 게 어떻겠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월급도 이쪽보다 3배는 많아서 엄마 병원비 걱정 안 해도 된다면서요.”최연준의 두 눈에 어둠이 스쳐 지나갔다. 늙은 여우 같은 강명원의 말이라면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절대 그리 단순하진 않을 것이다.“당신 생각은 어때?”“나요?”모든 걸 꿰뚫어 본 강서연이 피식 웃었다.“아빠가 좋은 뜻으로 나더러 돌아오라고 한 것 같지는 않아요. 어릴 적부터 아빠의 책임을 져 본 적 없는 사람인지라, 갑자기 강진에 와서 일하라는 건 너무 이상해요.”최연준의 찌푸렸던 미간도 그제야 느슨해지면서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누구보다 똑똑한 와이프가 단지 가족이라는 이유로 쉽게 그들의 꿍꿍이에 놀아나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그깟 권력에 눈멀어서 아빠는 절대 놓지 않으려 해요.”강서연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얼마 전에 아빠가 거슬려 하는 짓을 유빈 언니가 했거든요. 이번에 나한테 돌아오라고 한 건 그 집에 강유빈 말고 나라는 딸이 하나 더 있다고 언니한테 경고하기 위해서예요. 그리고 이건 좀 더 나쁜 생각이지만...”강서연이 몸을 웅크리고 앉아 턱을 무릎 위에 받친 채 커다란 두 눈을 깜빡였다.“나랑 유빈 언니가 서로 물고 뜯고 싸우는 걸 옆에서 보면서 어부지리로 이득을 보려는 생각일 수도 있어요. 흥, 아빠는 그저 날 이용해서 강유빈을 견제하고 싶을 뿐이에요.”최연준이 놀라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돌리고 그를 쳐다보는 강서연의 표정이 덤덤하기만 했다.“내 결정은 거절이에요.”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최연준의 예상을 조금 넘어선 대답이었지만 그녀의 생각을 더 들어보고 싶었다.“난 어릴 적부터 남들과 조금 다른 가정에서 자랐어요.”강서연은 그에게 기댄 채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 갔다.“아빠는 없기만 못했고 정신이 오락가락한 엄마에 남동생까지 챙겨야 했어요. 게다가 이쪽에서는 양연 아줌마와 강유빈의 갖은 괴롭힘과 치욕을 견뎌야 했고요. 강씨 가문이 나한테 준 게 뭐가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나한테 그 어떤 따스함도 준 적이 없는 집인데 인제 와서 강진 그룹에 힘을 보태고 싶진 않아요.”그녀가 고개를 들고 그를 올려다보았다.“난 이젠 현수 씨 아내예요. 더는 강씨 가문과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 그리고 아빠가 날 불러들인 목적이 불순하잖아요. 아빠한테 이용당하고 싶지 않아요.”강서연이 그의 허리춤을 꼭 껴안았다.“여보... 난 그냥 다른 생각 하지 않고 우리 둘이서만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최연준이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그녀의 마음을 완전히 헤아릴 수는 없어도 이런 집안에서 자란 아이가 나중에 얼마나 큰 트라우마를 겪을지는 알고 있었다.최씨 가문도 겉으로는 화려하고 남 부러울 것 없어 보이지만 사실 그들보다 더 콩가루 집안은 없을 것이다.그녀가 속상해하는 게 마음 아팠지만 반드시 그들과 함께 공존해야 하는 법을 깨우쳐야 한다. 왜냐하면 이게 바로 생존 법칙이니까.그가 목소리를 내리깔고 말했다.“서연아, 난 그렇게 생각 안 해.”“네?”“네가 강씨 가문과 관계를 끊고 싶어 하는 마음은 이해해. 하지만 혈연관계라는 건 평생 바꿀 수도 없고 네가 관계를 끊고 싶다고 해서 사라지는 게 아니야.”반짝거리는 그녀의 두 눈이 어두워졌다.“우리 엄마 생각해 본 적 있어요?”그녀가 어두운 얼굴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최연준은 그녀의 볼을 어루만지며 그윽하게 내려다보았다.“네 아빠가 장모님한테 몹쓸 짓을 한 바람에 네
검은 캡 모자 밑으로 험상궂은 얼굴이 드러났고 사악한 눈빛에 오만함과 경멸이 섞여 있었다.최연준은 잠깐 멈칫하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자연스럽게 인사했다.“경섭 씨.”“뭐?”그의 태도에 육경섭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방금 경섭 씨라고 불렀어?”최연준이 덤덤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눈빛은 한없이 차가웠다.타고난 차가운 분위기에 그와 가까이하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위압감을 느꼈고 육경섭도 예외는 아니었다. 불안감이 밀려왔고 예전과 다른 모습에 자꾸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예전에 맨날 내 심부름만 할 때 어떤 꼴이었는지 다 잊었지?”그가 최연준의 어깨를 툭툭 쳤다.“흥, 그때는 형님 형님 하면서 굽신거리더니 이젠 교양이 있는 척하네?”하지만 육경섭의 손이 최연준의 어깨에 닿은 순간 최연준이 그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갑작스러운 상황에 육경섭은 깜짝 놀랐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애를 썼지만 하도 꽉 잡힌 바람에 꿈쩍할 수도 없었다.육경섭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구현수! 뭐 하는 짓이야!”최연준이 싸늘하게 웃더니 그의 손목을 확 비틀었다.순간 밀려온 엄청난 고통에 육경섭은 얼굴까지 시뻘게졌다. 그는 사나운 눈빛으로 최연준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경섭 씨, 말을 가려서 하시죠.”최연준이 또박또박 말했다.“과거에 내가 아무리 못나도 그건 다 지나간 일입니다. 선비는 헤어졌다 사흘이 지나면 다시 눈을 비비고 보아야 한다는 말, 못 들어봤어요?”“구현수...”“설령 예전에 당신의 하찮은 심부름을 했다고 해도 앞으로는 절대 그럴 일이 없어요. 그러니까 다시는 날 찾아와서 귀찮게 하지 말아요. 안 그러면 나도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귀에 때려 박혔다. 육경섭의 표정이 저도 모르게 굳어졌다.최연준이 꽉 잡고 있던 손목을 풀며 날카롭게 노려보자 육경섭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그는 멀어져가는 최연준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정
최군형은 방금 다 먹은 닭 날개 꼬치를 들고 최군성을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꼬치를 던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엄마가 항상 옳다니까. 넌 정말...”최군성은 당황스러워하며 물었다.“뭐가?”최군형은 이를 악물며 한 마디로 대답했다.“유난이야!”그 말을 내뱉고는 최지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최군성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어리둥절했다. 멀찍이서 바라보니 저쪽은 꽤 북적거리고 있었다. 최군성의 내면 깊은 곳에서 ‘흥겨운 분위기를 즐기는 본능’이 슬며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최군성은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스케치북을 펴고 빠르게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다른 사람들은 대충 윤곽만 그린 반면, 특정 인물을 그릴 때만큼은 세심하게 한 획 한 획 공들여 그려내어 풍경 속에서도 돋보이게 했다....모든 일이 마무리되었고 이제 남은 건 최지용과 백인서의 결혼식이었다.최군형도 두 사람의 결혼을 돕고 싶어 최근 며칠 동안 집에 머물며 부모님과 함께 세심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지용이와 인서는 둘 다 조용한 걸 좋아하니, 웅장한 것보다는 소박하고 아기자기한 결혼식이 더 잘 어울릴 것 같구나.”최연준은 상자에서 온갖 보물들을 꺼내며 결혼 선물로 줄 것을 고르고 있었다. 그중 강서연은 분홍빛 진주 세트를 한눈에 알아보고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이게 딱이겠네! 인서에게 정말 잘 어울릴 거야.”“엄마.”최군형은 살짝 놀라며 말했다.“그건 외할아버지께서 엄마에게 주신 거잖아요. 남양 주변 해역에서만 나는 진주라면서요.”“맞아, 그런데...”강서연은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말했다.“분홍색은 젊고 사랑스러운 느낌이잖아. 이제는 엄마한테 조금 안 어울릴지도 모르겠어.”“누가 그래!”최연준은 즉각 반박하며 손을 뻗어 진주 세트를 집어 들려 했다. 그러자 강서연은 그의 손등을 톡 치며 진주를 되찾아왔다.“인서에게 줄 거니까 당신은 끼어들지 말아요!”“우리 다른 선물을 하자고! 이건 당신이 간직해야 할 물건이야!”두 사람은 한동안 실랑이를 벌였
강소아가 손짓하자 최지용은 더는 망설이지 않고 백인서에게로 달려갔다.“이제 딸을 보러 가야겠네요!”강소아가 웃으며 말했다.“저 대신... 인서 좀 돌봐줄 수 있을까요?”최지용은 그 말에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아까는 주저하며 다가가지 못했던 이유가 있었다. 바로 주변에 권욱과 강소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사람은 백인서의 오빠였고 다른 한 사람은 그녀의 절친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섣불리 다가가면 괜히 이상하게 보일까 봐 망설였다.최지용이 어깨를 펴고 당당히 백인서의 어깨에 손을 얹으려는 순간, 누군가 그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뭐 해요?”최지용은 깜짝 놀랐다.“너야 말고 뭐해?”권욱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감히 내 눈앞에서 내 동생한테 손대는데 어떻게 보고만 있어?”“...”최지용은 당황해서 말을 잃었다.생각해 보면 두 사람은 처음 만난 순간부터 뭔가 삐걱거렸던 것 같았다. 서로 영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그땐 권욱이 백인서의 오빠라는 사실을 몰랐기에 오히려 잠재적 경쟁 상대로 여기기도 했었다.그리고 지금... 더욱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이 되어버렸다.“쓸데없이 귀찮게 하지 말고 물러나!”권욱은 두 사람 사이에 서서 최지용을 흘겨보며 말했다.“동생과 나에겐 나눌 얘기가 산더미처럼 쌓였으니 방해하지 마!”“할 얘기가 뭐가 그렇게 많은데요?”“예를 들면... 인서가 권씨 가문에서 맡게 될 직책 같은 거?”“그나저나!”최지용은 그제야 떠오른 듯 고개를 치며 말했다.“아까 권욱 씨 입으로 직접 말했어요. 최상 그룹과 권오 그룹이 협력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권씨 가문이 진정성을 보여주기 위해 동생을 우리 최씨 집안에 시집보내겠다고요!”“내가 그런 말을 했었나?”권욱은 태연하게 모른 척하며 말을 돌렸다.“내가 무슨 말을 했었는지 기억이 안 나네.”“저기요, 권욱 씨!”두 남자가 티격태격하는 사이, 백인서는 살짝 뒤로 물러나 두 사람의 시야에서 벗어났다.백인서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잔잔히 미소 지었다. 과거에는
손님들이 웅성거리며 비명이 들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백인서?”배윤아가 일부러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큰 소리를 질러?”“아니야... 난 백인서가 아니야!”백시연은 목이 쉬도록 외치며 갑자기 강소아를 돌아보았다.“말해봐! 아까 다 알고 있었던 거잖아? 내가 백인서가 아니라는 걸! 모두가 알 수 있게 똑똑히 말하라고!”“인서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강소아는 담담하면서도 비웃는 표정을 지으며 차분히 백시연의 손을 밀어냈다.“혹시 술이라도 마신 거야? 취한 것 같아.”“강소아 씨!”백시연은 분노에 치를 떨며 외쳤다.강소아는 백시연의 손을 잡고 안쓰럽다는 듯이 바라보며 말했다.“인서야, 우린 자매잖아. 여기서 소란스러운 모습 보이지 말자. 오늘은 어쨌든 육씨 가문의 중요한 날이기도 하고 내 딸도 여기 있어... 그러니까, 제발 진정해 줘.”“아니야...”“인서야!”“아니라고! 아니라고!”백시연은 두 손으로 귀를 막고 한 발짝씩 뒤로 물러섰다.“난 백인서가 아니야! 몇 번을 말해야 믿을 거야?”배윤아는 피식 웃으며 백시연의 팔짱을 끼고 태연히 말했다.“어머, 백인서. 왜 그래? 백인서가 아니면, 왜 백인서 얼굴을 하고 있는 건데? 그런데... 굳이 너와 백인서의 다른 점을 꼽으라면... 손목에 그림이 있다는 거?”“비켜!”백시연은 배윤아를 거칠게 밀어내고 다급히 무대를 향해 뛰어갔다.백인서는 고요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마침내 기다리던 이 순간이 왔다.백인서는 천천히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눈앞의 백시연을 바라보았지만,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눈앞의 이 사람은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지옥에서 온 악마처럼 보였다.백인서는 문득 생각했다. 어쩌면 백시연은 진짜 악마일지도 모른다고. 사람은 누구나 두 가지 얼굴을 지니고 있다. 한쪽은 천사, 다른 한쪽은 악마. 그리고 자신과 백시연 같은 쌍둥이의 운명은 그런 인간의 본성을 극대화해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가면은 순금으로 빚어졌고 가장자리에는 보석이 촘촘히 박혀 조명이 닿을 때마다 눈 부신 빛을 흩뿌렸다.백시연은 그 자리에 선 채 몸이 굳어버렸다.“이... 이럴 수가!”그 사이, 백인서는 이미 무대 위로 올라가 권욱 옆에 서 있었다.권욱은 이어서 말했다.“이분이 바로 제 이복동생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늘 제 동생을 걱정하며 꼭 찾아달라고 당부하셨죠. 이제야 동생을 찾게 되었습니다!”권욱은 백인서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의 눈빛 속에는 진심 어린 애정과 따스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솔직히 말씀드리면, 처음엔 동생의 출생에 대해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죠. 우리는 결국 한 가족입니다. 동생을 찾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동생이 그동안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요... 우리 권씨 가문이 제 동생에게 너무 많은 빚을 졌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하늘의 뜻일지도 모릅니다. 동생의 존재는 제 딸의 목숨을 구하기도 했으니까요. 그래서 이분은 제 동생일 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의 은인이기도 합니다!”객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오고 몇몇은 감동에 겨워 눈가를 붉혔다.하지만 백시연의 머릿속은 텅 비어 있었다.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동생이란 말인가? 그리고 왜 저 여자도 가면을 쓰고 있는 걸까?분명 백인서는 종수가 지하실에 가둬뒀고 곧 처리될 운명이 아니었던가.“그리고 이어서 발표하겠습니다!”권욱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권씨 가문의 재산 중 절반을, 이 세상 유일한 동생에게 넘기겠습니다!”“뭐... 뭐라고?”백시연의 온몸은 떨림으로 굳어졌고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갔다.“아니야... 이건 아니야!”“뭐가 아니야?”강소아가 일부러 물었다.“인서야, 어디 아파?”“그게....”“권 대표는 네 직장 상사잖아? 상사가 가족을 찾은 거니 축하해줘야지!”백시연은 차가운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강소아는 낮게 웃음을 흘리며 다른 이들에게 들리지 않게 백시연의 귀에 속삭였다.“그렇게 백인서의 자리가
“그게... 무슨 뜻이에요?”백시연은 침착함을 가장하며 입을 열었지만, 권욱의 눈빛을 똑바로 마주치지 못했다.“이 카드가 제 거 아니면 누구 건데요?”“난 그런 말 한 적은 없는데?”권욱의 입가에는 여유로운 미소가 번졌다.“그냥 문득 우리 아내도 이런 비슷한 카드를 몇 장 가지고 있던 게 떠올랐을 뿐이야. 카드 색깔도 이런 파란색이었고 뒷면에는 대나무 무늬의 홀로그램이 새겨져 있었어. 조씨 가문은 학문을 중시하는 전통을 지닌 집안이라 대나무처럼 강인하고 꿋꿋한 식물을 특별히 아낀다고 하더군. 한번 뒤집어 확인해 볼래?”백시연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가 이내 창백해졌고 손은 카드 위에서 더욱 굳어졌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백시연은 강소아를 찾아갔다.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약속했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면서 묘안석이 그렇게 비싼 줄 몰라서 서둘러 나오느라 준비가 부족해 지금은 이 카드밖에 없다고 둘러댔다.그러고는 억지로 친근한 미소를 띠며 애써 밝은 표정을 지었다.“소아 언니, 우리 자매처럼 친한 사이잖아요. 언니 딸은 곧 제 딸이나 다름없죠! 가원이에게 쓰는 돈이라면 하나도 아깝지 않아요!”강소아는 미소를 머금고 백시연의 손에서 카드를 슬쩍 가져가며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정말? 고마워! 나중에 가원이가 크면 널 두 번째 어머니로 생각할 거야.”백시연의 얼굴 근육이 떨렸지만 억지로 미소를 유지하며 애써 태연한 척했다.“인서야.”강소아는 다정한 눈빛으로 백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요즘 권욱의 공익 프로젝트를 도맡아 관리하고 있다면서? 잘한다는 칭찬이 자자하더라. 몇 번이나 넌 정말 유능한 관리형 인재라고 말했어.”“아... 그래요?”백시연은 속으로 긴장하며 애써 태연한 척했다.“그럼!”강소아가 웃으며 말했다.“그래서 앞으로도 너한테 정말 잘해줄 생각이야.”그 말을 듣자 백시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10억 원을 써서 강소아의 호의를 얻은 거라면 나쁘지 않은 거래라는 생각이 들었다.“소아 아가씨
연회장 한편에서 백시연은 마침내 잠시 자리를 빠져나갈 기회를 잡았다. 화장실에 간다고 둘러대고는 한적한 구석에 숨어 종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무언가 해답을 찾고 싶었다.긴 신호음 끝에야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백시연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왜 이렇게 늦게 받아요?”백시연은 알지 못했다. 종수가 이미 경찰차에 타고 있었고 간신히 경찰의 허락을 받아 전화를 받은 것이라는 사실을.“아저씨! 정말 급해서 전화했어요. 지금 뭐 하고 계셨어요?”종수는 억지로 미소를 짓고 나지막이 속삭였다.“시연아...”뭔가 말을 더하려던 종수는 경찰이 허리춤에 총구를 겨누는 바람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됐어요, 됐다고요!”백시연은 짜증을 내며 말을 끊었다.“딱 한 가지만 물을게요... 아까 소아 아가씨가 저한테 10억 원짜리 선물을 요구했는데, 그거 줘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10억?”“네!”상황을 모르는 백시연은 초조한 듯 말을 더 이어갔다.“그 재수 없는 여자가 과거에 강소아와 무슨 약속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오늘 강소아가 저를 보자마자 자기 딸이 말하기 시작했다면서 선물을 요구하더라고요. 뭐였더라... 묘안석이라고 했던가? 어쨌든 그게 10억 원짜리래요!”종수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상황을 단번에 파악했다. 그건 강소아가 원하는 게 아니라 조순영을 대신해 요구한 것이라는 사실을.세상은 언제나 공평했다. 무엇을 얻었다면 그 대가는 반드시 같은 무게로 돌아오게 마련이었다.종수는 지친 듯 눈을 감고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아저씨? 종수 아저씨!”백시연은 초조한 목소리로 외쳤다.“뭐라도 말 좀 해주세요! 줘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시연아, 이제 너도 어른이야. 이런 일은 네가 직접 판단해야 해.”“제가 알아서 할 수 있었으면, 아저씨께 묻겠어요?”백시연은 이마를 찡그리며 투덜거렸다. 오늘의 종수는 어딘가 낯설고 이상했다.“솔직히... 전 주고 싶지 않아요. 그런 비싼 걸 고작 어린애한테 준다
“뭐라고요? 10억 원이요?”백시연은 깜짝 놀라서 외쳤다.강소아는 슬쩍 백시연을 바라보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왜 그래? 고작 10억 가지고. 게다가 가원이에게 큰 선물을 주겠다고 네가 먼저 약속한 거잖아. 혹시 후회라도 하는 거야?”“그럴 리가!”배윤아가 옆으로 걸어오며 백시연의 어깨를 힘차게 두드렸다.“우리 인서는 분명히 선물을 줄 거야, 그렇지? 너희 둘 사이에 보석 하나쯤은 아무것도 아니잖아.”백시연의 얼굴이 단단히 굳어졌고 입술이 굳게 닫혔다.10억? 조순영에게서 받은 카드에는 고작 10억 원뿐이었다.백인서가 이때까지 이렇게 호화로운 생활을 하면서 이 정도 돈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 걸까?그래서 강소아가 그렇게 말한 것일까?“어머, 저 사람은 육 아가씨와 친하다던 백인서 아니야?”그때, 근처에 있던 여배우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방금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었어?”“예전에... 둘이 약속했나 봐, 백인서가 육 아가씨의 딸에게 선물을 주기로. 그런데 지금은 마음이 바뀐 것 같아!”“정말? 풉! 상류층 자매라는 것도 결국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건가 봐! 백인서는 육 아가씨와 둘도 없는 사이처럼 보였는데. 육 아가씨가 어디를 가든 따라다녔잖아... 이제는 최씨 가문의 아들과 친해지니까, 가식적인 행동도 하기 싫어졌나 봐.”“그 선물이 10억 원짜리라고 하던데... 역시 두 사람 우정은 10억 원도 안 되는 거였어!”백시연의 얼굴은 점점 더 붉게 물들어갔다. 뒤돌아 그들에게 따지려던 찰나, 강소아가 재빠르게 백시연의 손목을 붙잡았다.“됐어, 인서야.”강소아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저 사람들은 평소에도 입만 살았어. 나중에 제대로 혼내 줄 거야.”“그래야죠, 저 사람들은 정섭 엔터테인먼트 소속 연예인이잖아요. 제대로 가르쳐야 해요!”백시연은 화를 내며 말했다.“소아 언니, 저 사람들이 이런 자리에 나온 건 정섭 엔터테인먼트를 대표해서이기도 하지만 결국 언니를 대표하는 것이기도 하잖아요. 저렇게 뒤에서
권욱과 조순영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벅찬 기쁨에 눈물이 터져 나왔고 이내 서로를 끌어안은 채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권 대표님, 사모님, 정말 큰 경사입니다!”의사는 골수 검사 결과를 들고 환히 웃으며 말했다.“드디어 아가씨를 살릴 수 있게 됐습니다!”“맞아요, 정말 기쁜 일이네요.”최지용이 권욱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한심하긴, 그만 울어요!”권욱은 흐느끼면서도 반박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네 딸이 아픈 게 아니니, 넌 당연히... 당연히 이 고통을 알 리가 없지!”최지용은 기가 차 웃으며 권욱의 등을 두 번 세게 두드렸다.백인서는 마음 한편의 큰 짐을 덜어낸 듯 병실 안에 있는 권온유를 바라보며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그나저나.”조순영이 문득 입을 열었다.“백시연의 골수 결과는 어떻게 됐나요?”“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나왔습니다.”의사가 고개를 저었다.“대부분의 지표는 일치했지만 몇 가지 중요한 항목이 맞지 않아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정말 신기한 인연이네요.”최지용이 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쌍둥이라고 해도 신체의 세포가 다를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하네요.”한 명은 강인하고 선량했고 다른 한 명은 어리석고 악랄했다.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자매라도 서로 다른 개성과 운명을 가질 수밖에 없다. 누구도 타인의 성격과 운명을 그대로 복제할 수는 없는 법이다.“그러게 말이야.”권욱은 생각에 잠기며 말했다.“다른 쌍둥이였다는 걸 알게 됐으니 이제 모든 진실을 밝힐 때가 된 것 같네.”...축하 연회 날, 손님들로 붐비는 연회장은 떠들썩하고 활기가 넘쳤다. 오성에서 유명한 대가문은 물론, 연예계의 반 이상이 모인 듯했다.정섭 엔터테인먼트는 업계에서 명성이 자자했기에 대상 수상 경력이 있는 배우들조차 강소아의 초대를 거절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연회장에 들어선 백시연은 평소 TV에서만 보던 유명 여배우들이 서로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광경에 기가 죽고 말았다.백시연은
차 안에서 백인서는 멍하니 창밖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함께 앉아 있던 두 남자는 서로를 힐끔거리기만 할 뿐,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조금 전 나눈 대화로 머릿속이 복잡해진 백인서는 갑작스레 쏟아진 진실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이 권씨 가문의 사생아라니.“네 어머니와 우리 아버지가 꽤 가까운 사이였던 모양이야.”“두 사람 사이에 주고받은 물건이 있었어. 바로 회중시계인데, 그걸 백시연이 가지고 온 거지.”“인서야, 너와 백시연이 쌍둥이 자매란 거 알고 있었어?”백인서는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머리가 깨질 듯 욱신거렸다.어머니가 이렇게 많은 진실을 감추고 있었을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인서야?”최지용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백인서의 손을 잡았다.그러자 앞좌석에 있던 권욱이 뒤를 돌아보며 싸늘한 눈빛으로 최지용을 쏘아보았다.“놔라!”“뭐요?”권욱은 입을 삐죽이며 최지용이 꼭 잡은 백인서의 손을 가리켰다.참 이상했다. 평소에는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매형이 된 순간부터 그가 갑자기 거슬리기 시작했다.“인서는 좀 쉬어야 해!”권욱은 찡그리며 말했다.“손은 왜 자꾸 붙잡고 있는 거야?”최지용은 순간 멍해서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권욱을 쳐다보았다.“무슨 상관이에요?”“난 인서 오빠야! 당연히 내가 상관해야 할 일이지.”“웃기지 좀 마세요!”“너...”“그만 좀 싸울래요?”백인서가 뒤돌아 두 사람을 힐끔 쳐다봤다.머릿속이 이미 복잡할 대로 복잡한데 이 두 사람은 백인서를 편히 둘 생각이 없는 듯했다.최지용과 권욱은 서로를 노려보며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눈싸움을 벌였다.“온유는 아직 병원에 있어요?”백인서가 갑자기 물었다.“응...”“지금 당장 병원으로 가요!”“뭐라고?”권욱은 순간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백인서는 다소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진짜 동생이라면 온유 고모가 되는 거잖아요. 아직 적합한 골수를 찾지 못했다면서요? 제가 한번 해볼게요!”권욱은 잠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