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큰아가씨는 완전히 세력을 잃은 건가요?”“그건 아직 몰라요... 아무튼 지난번에 큰아가씨가 수십억 사기를 당한 일로 회장님이 화가 많이 나셨어요. 하긴, 그런 머리로 이 큰 그룹을 어떻게 관리하겠어요.”뭇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강서연의 귓가에 전해졌다. 그녀는 그 소리를 애써 무시했다.구현수가 그녀에게 얘기하지 않았던가? 무슨 일이 있어도 덤덤하게 대해야 한다고. 침착할수록 더 좋은 대책이 떠오른다고 했다. 사람은 당황할 때 이성을 가장 쉽게 잃는 법이니까.남편 생각에 강서연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올라갔고 안색도 아주 편해졌다.이사회가 제시간에 맞춰 시작됐다.강명원은 이사회에서 강서연을 간단하게 소개한 후 맡을 업무를 안배했다. 주주들은 전부 시선을 아래로 내리뜨리고 강명원의 결정에 토도 달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여러 의혹이 있었지만 그래도 겉으로는 강서연을 환영했다.어쨌거나 아직 후계자가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니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건 없었다.이사회가 끝난 후 사람들이 회의실을 나섰고 강서연은 회사 사무 환경을 둘러볼 생각이었다.그런데 그녀가 1층 로비에 도착했을 때 뒤에서 누군가 갑자기 그녀를 불렀다.“강서연!”그녀가 고개를 돌리자마자 다짜고짜 따귀 한대가 날아왔다. 순간 머리가 멍했고 따끔거리는 볼을 움켜쥐었다. 이 세상이 마치 진공 속에 빠진 듯 수많은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그녀가 고개를 들어보니 강유빈이 노기등등하여 그녀를 잡아먹을 기세로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천한 것 같으니라고!”강유빈이 목청을 높이며 욕설을 퍼부었다.“평소에는 강씨 가문 재산에 아무런 관심도 없는 척하더니 인제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정말 네 그 뻔뻔한 엄마랑 똑같이 쌍스러워!”“강유빈!”강서연의 몸이 살짝 떨렸다.“함부로 말하지 마! 난 강씨 가문의 재산에 아예 관심 없어. 오늘은 회장님께서 오라고 해서 온 거고 주식도 회장님이 주신 거야! 재간 있으면 이사회에 가서 따져. 여기서 거들
아니나 다를까 잔뜩 굳은 얼굴로 계단 위에 서 있던 강명원이 발걸음을 멈춰 섰다.두 딸의 말다툼을 비서나 나서서 말리려 했지만, 강명원은 그럴 필요 없다는듯 손짓했다. 그는 둘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들어보고 싶었다.강서연이 느긋하게 말했다.“언니, 그때 내가 왜 그 사람이랑 결혼했는지 몰라서 이래? 아빠가 언니를 더 편애하고 아끼니까 언니 대신 내가 시집간 거잖아. 회사에서 집안일을 얘기하는 건 적절치 않아. 그러니까 여기까지만 해.”강서연이 그녀를 피해 엘리베이터에 타려는데 강유빈이 달려가 앞을 막아섰다.“왜? 더는 아무 말 못 하겠어?”강유빈이 막무가내식으로 말했다.“너 말 아주 잘하잖아? 왜 말 못 해? 천한 년, 지금 내 앞에서 연약한 척을 해?”강서연이 기다린 게 바로 이거였다. 그녀가 마구 생트집을 잡는 것!강서연이 강유빈을 흘겨보고는 싸늘하게 웃었다.“언니, 아빠는 언니를 더 아끼셔. 앞으로 이 회사도 언니한테 물려줄 거고. 난 여기서 그저 언니를 도와 뒤치다꺼리나 하고 길을 마련해주는 것뿐이야.”“말이 그렇지, 네가 무슨 꿍꿍이인지 누가 알아?”“난 정말 언니를 도우려고 온 거야.”강유빈이 한 번씩 몰아붙일수록 강서연은 한발 물러서며 피해갔다.“강씨 집안에서 난 아무것도 아니야. 언니야말로 이 집안의 유일한 후계자잖아. 그런 언니랑 내가 어찌 감히 경쟁하겠어!”“쟤가 유일한 후계자라고 누가 그래?”날카로운 목소리가 로비 전체가 울려 퍼졌다. 로비가 갑자기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고 사람들은 놀란 얼굴로 소리가 나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강명원의 표정이 말이 아니게 어두웠다. 마지막 한 계단까지 내려온 그는 분노에 찬 얼굴로 강유빈을 노려보고는 강서연 옆에 섰다.그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서연아, 너도 강씨 집안 사람이고 나, 강명원의 딸이라는 걸 잊지 마.”강서연은 입을 꾹 다물었고 강유빈의 눈에 분노가 가득했다.“아빠!”강서연이 덤덤하게 말했다.“아빠, 전 경쟁 같은 거 단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
“너...”강서연이 한걸음 나서며 말했다.“언니, 우린 다 성이 강 씨고 한 가족이야. 명예와 치욕을 함께하는 가족이라고. 언니가 망신당하면 아빠가 망신당하는 거랑 똑같아. 다음에 나한테 화를 내고 싶으면 아무도 없는 곳에서 때리든 욕하든 마음대로 해. 제발 아빠 체면 깎이게 사람 많은 곳에서 이러지 마!”강유빈이 창백한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았다.강서연의 한마디 한마디가 강유빈의 정곡을 쿡쿡 찔렀다. 아무리 눈치 없는 강유빈이라고 해도 이 상황에서는 더는 화를 내지 못했다.“하, 평소에는 경쟁에 아무 관심이 없는 것처럼 하던 네가 이토록 매정할 줄은 정말 몰랐어.”강서연이 차가운 얼굴로 또박또박 말했다.“난 그저 언니랑 같이 일 잘해보고 싶었을 뿐이야.”강유빈은 코웃음을 치고는 그대로 홱 돌아섰다.강서연은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다가 무심결에 의기양양 해하는 강명원의 모습을 보고 말았다. 그 순간 왠지 모르게 서글퍼졌다. 사실 그녀와 강유빈은 강명원의 손아귀에 잡힌 바둑알일 뿐인데 이기고 지고 무슨 의미가 있을까?그녀가 나지막이 말했다.“아빠, 저 먼저 사무실로 올라갈게요.”강명원이 환하게 웃었다.“그래. 서연아, 아빠가 역시 널 제대로 봤어! 한번 잘해봐, 잘하면 강진 그룹에서 너도 한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거야.”강서연은 대충 웃어 보였고 그의 말을 별로 마음에 새겨듣지 않았다. 반대로 강명원을 쳐다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원망이 더 짙어졌다.저녁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기분이 울적했다.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청소하고 있던 최연준은 그녀가 돌아오자 활짝 웃으며 맞이했다.“여보, 나 청소한 것 좀 봐. 어때?”그는 그녀에게 온 오후 열심히 쓸고 닦은 노동의 성과를 자랑했다. 집안을 쭉 둘러보던 강서연은 오히려 더 골치가 아팠다.최연준은 아무리 봐도 참 집안일을 할 줄 모른다. 바닥을 분명 닦았다고 했는데 물기가 여기저기 얼룩져 차라리 닦기 전보다도 못했다.베란다에 널었던 빨래도 전부 걷었다. 하지만 옷을 잘 개었다기보다 그냥
“왜 그래?”“아... 아니에요.”강서연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는 국수를 먹으며 몰래 그의 눈치를 살피더니 낮게 중얼거렸다.“무슨 날짜 계산이 이렇게 정확해... ”‘머릿속에 대체 뭐가 든 거야? 오늘 마침 생리가 끝난 건 어떻게 알았지?’강서연의 두 볼이 더 빨개졌고 쑥스러움에 그를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다.어리둥절한 최연준은 한참을 생각해도 그녀가 왜 이러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국수를 먹다가 왜 갑자기 얼굴이 빨개졌지?’최연준이 마른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강서연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요 며칠 강진 그룹에서 잘 적응했나 봐? 무슨 좋은 일이 있었어?”그의 말에 강서연의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이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요 며칠 있었던 일을 최연준에게 전부 얘기했다. 회사 로비에서 강유빈이 그녀를 곤란하게 했던 일도 포함해서 말이다.최연준은 그녀의 얘기에 조용히 귀 기울였다. 그녀가 강진 그룹에서 홀로 얼마나 힘겹게 버티고 있을지 상상이 갔다. 비록 자기 집안의 기업이긴 해도 그녀가 처한 상황이 다른 이들보다 힘겨운 건 사실이었다.하지만 이건 그녀가 언젠가는 반드시 헤쳐 나가야 하는 길이다. 절대 두려워해서도 안 되고 무너져서도 안 된다. 그리고 그 길에 최연준이 늘 함께할 것이다.강서연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여보, 오늘 아빠가 나더러... 인사팀 맡으라고 했어요.”최연준의 두 눈이 반짝였다.인사팀은 회사의 주요한 기능 부서라 대부분 강씨 가문의 최측근들이 인사팀에 많았다.그러니 강명원의 이번 의도가 참으로 의심스러웠다.최연준이 피식 웃더니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그래서 하겠다고 했어?”“당연히 거절했죠.”강서연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는 자기 아내가 그리 어리석진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왜?”강서연이 그를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회사에서 인사팀과 재무팀이 가장 중요한 부서예요. 우리 아빠 성격이라면 인사권과 자금 모두 직접 컨트롤하려고 할 거예요. 아빠랑 결혼한 지 오
남자는 탄탄한 팔뚝으로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그의 그윽한 두 눈과 마주친 순간 다 먹고 해야 할 일을 하자던 그의 얘기가 문득 떠올랐다.강서연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그의 가슴팍에 고개를 푹 파묻혔다.“여보.”그녀가 우물쭈물 말했다.“우리... 우리 이따가 해요.”최연준은 어리둥절했다.“뭘 이따가 해?”“아까 해야 할 일... 그냥 이따가 해요. 지금은 너무 배불러요!”최연준은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의 뜻을 알아듣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그녀에게 말했다.“나랑 어디 다녀오자.”강서연이 커다란 두 눈을 깜빡이며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여보!”최연준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평소 그가 이상야릇한 뉘앙스를 어찌나 많이 풍겼으면, 그녀가 조건 반사적으로 해야 할 일이라는 얘기에 바로 야한 생각부터 들었을까?‘이게 다 나의 언행과 노력에 세뇌된 것 아니겠어!'최연준의 입가에 의기양양한 미소가 지어졌다. 강서연은 주먹을 꽉 쥐고 그의 가슴팍을 냅다 두드렸다.“구현수!”“됐어, 그만해.”최연준은 그녀의 작은 손을 움켜쥐었다.“내가 말한 그 할 일은 너랑 같이 어디 가자는 거였어.”“어디 가는데요?”그가 가볍게 웃었다.“배부르게 먹었다며? 소화하러 가야지!”...강서연은 옷을 갈아입고 그와 함께 집을 나섰다. 두 사람은 버스를 타고 지하철로 갈아탔다가 또 한참 걸어서 남쪽 구역 바닷가 옆의 상가 거리에 도착했다.시 중심보다 화려하진 않았지만 나름 이곳만의 분위기가 넘쳤고 옆에 이국적인 상가 거리가 더해져 더욱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은 수많은 젊은이가 모임을 즐기는 곳으로 자리 잡았다.강서연은 현지인이었지만 이런 곳에 별로 다니지 않았다.그녀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최연준은 그녀의 손을 잡고 오동나무로 그늘진 자갈길을 걷다가 한 가게 앞에 멈춰 섰다.강서연은 뭔가가 가슴에 쿵 하고 부딪친 것처럼 울컥하여 저도 모르게 두 눈을 크게 떴다.“여보, 여긴...”이
최연준은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기만 했다.강서연은 그런 그의 그윽한 눈빛에서 복잡한 감정을 캐치했다. 그녀는 가슴이 쿵쾅거리다 못해 손바닥에도 식은땀으로 흥건했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한참이 지나서야 최연준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진지하게 말했다.“나 이 가게 엄청나게 오래 찾았어. 집주인하고도 여러 번 얘기한 끝에 겨우 세를 맡고 인테리어 한 거야.”강서연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당신이 커피숍 차리고 싶다고 했었잖아.”그는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두 볼을 살며시 어루만졌다.“그 말 계속 기억하고 있었거든. 그래서 시간이 날 때마다 여러 가게를 찾아서 비교해 보다가 결국 이 가게로 정한 거야. 이곳이 그래도 당신 요구랑 가장 가까운 것 같더라고.”그는 그녀를 사랑스럽게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여보, 남편이 다른 재간은 없어도 갖고 싶다는 건 무슨 대가를 치르든 최선을 다해서 갖게 해줄 거야.”가슴이 울컥한 강서연은 그의 손을 힘껏 잡았다.“여기 엄청 비싸죠?”“응, 조금 나가.”싸다고 해 봤자 믿지 않을 게 뻔하기에 차라리 진지하게 얘기하는 게 나았다.“저번 두 경기에서 받은 상금이랑 한동안 일한 월급, 그리고 보너스까지 합하니까 딱 되더라고.”강서연은 마음 한구석으로는 살짝 아깝기도 했다.경기 한번 하면 꽤 많은 돈을 받는 건 알지만 그건 몸으로 직접 싸우면서 힘들게 번 돈이다. 그가 피와 땀으로 번 돈을 마구 써버릴 수 없어 지금까지 그의 월급을 달라고 하지 않은 것이었다.그녀는 그가 자신에게 쓰는 돈은 아끼지 않길 바랐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마음껏 먹고 사고 싶은 게 있으면 고민 없이 사길 바랐지, 아껴 쓰는 걸 원하지 않았다.그런데 그가 돈을 쓴 건 맞지만 결국에는 자신이 아니라 그녀에게 쓴 것이었다.“당신 돈은 당신한테 쓰라고 했잖아요.”강서연이 그를 꾸짖었다.“너한테 쓰려고 내가 돈을 버는 거지.”그가 피식 웃었다.“네 소원을 이룰 수 있어서 하나도 아깝지 않아.”“나 소원이 엄청 많아요.”그녀가 입을
“현수 씨, 여기는 저번에 저를 구해줬던 최연희 양.”“연희 양, 이분은...”“저 알아요!”한 손으로 강서연의 목을 감싸 안은 채 최연희는 최연준을 보며 웃었다.“남편분이시죠? 구현수 씨!”“형부, 안녕하세요!”최연준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현수 씨?”강서연은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연희 양이 인사하잖아요!”“음.”최연준은 최연희를 힐끗 쳐다보고는 시큰둥하게 한마디를 한 후 뒤돌아 주방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본 강서연은 혹여 최연희가 난처해할까 걱정되었다.“연희 양, 죄송해요.”그녀는 웃으며 말했다.“저의 남편이 평소에는 무뚝뚝하고 살갑지 않지만... 같이 지내다 보면 정말 좋은 사람인 걸 알 수 있어요.” 최진혁은 최연준을 어릴 적부터 ‘얌생이’ 라고 불렀고 최상 가에서는 ‘냉혈한’, ‘고집불통’ 이라고 했다.그런 사람이 어쩌다 강서연한테는 이토록 다정할 수 있는가?아무래도 오빠가 여심을 잡는 기술이 남다른 게 분명했다!강서연은 최연희에게 버블티 한잔을 내려주었고, 남편에게 오븐 시간 체크를 부탁한 뒤 마당을 청소하러 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주방에서는 버터 향이 풍겼다. 최연희는 살금살금 주방으로 가서 그를 깜짝 놀래켜 주려 했다. 그러나 최연준이 먼저 인기척을 느끼고 뒤돌아 팔짱을 낀 채 미간을 찌푸렸다.깜짝 놀란 최연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하... 오빠.”최연준은 눈썹을 치켜세우고는 말했다.“오빠라니, 형부라고 불러야지.”최연희는 혀를 내두르며 헛웃음을 지었고 그는 정색해 물었다.“여긴 무슨 일로 왔어?”“그게...”최연희는 당황스러웠다.“난 단지 진심으로 축하해주러 왔을 뿐이야! 더욱이 서연 언니의 초대로 온 거고!”“얌전히 밥만 먹고 가!”최연준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강서연 앞에서는 말조심하고! 알겠지?”“당연하지!”최연희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내가 오빠 동생인데 설마 일을 그르치겠어? 오빠는 구현수고 우리는 오늘 처음 만난 거야! 맞지? 그보다... 베리 쿠키는 다 됐어
최연준도 입 모양으로 대꾸했다.“너 혼날래?”최연희는 웃느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서 먹고 있던 베리 쿠키 부스러기가 사방에 떨어졌다.강서연은 꽃에 물을 주러 마당으로 나갔고 최연준은 정색한 채 동생 옆으로 와서 말했다.“다 먹고 청소하도록!”최연희는 갑작스런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그녀는 허겁지겁 입안의 과자를 삼키고는 달갑지 않았지만 결국엔 그의 기에 눌려 순순히 빗자루를 들었다.“오빠, 참 대단한 거 같아.”그녀는 청소하면서도 잊지 않고 놀려댔다.“이러다 국민남편 타이틀까지 다 차지하겠어?”최연준은 힐끗 째려보았다.최연희는 히죽 웃었고 청소를 마치고 나서는 나머지 쿠키를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최연준은 무심하게 물었다.“누구 주려고?”그녀는 마음속으로 움찔한 나머지 쿠키봉지를 더 세게 움켜쥐었다.어찌나 눈치가 빠른지 오빠의 눈은 속일 수가 없었다. 숨기려 해도 끝내 들켜버렸다.“그게...”최연희는 머리를 쥐어 짜내어 변명을 만들어 보려 했지만 다시 한 번 최연준에게 덜미를 잡혔다.“혼자 먹을 건 아닐 테고!”한참이나 그 자리에 얼어 붙어있던 그녀는 더는 숨길 수 없을 것 같아 이실직고하였다.“인지석한테 맛 좀 보게 가져다주려고.”‘인지석? 또 그 자인가?’최연준의 눈은 한껏 매서워졌고 의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얼마 전 동생이 병원에 찾아왔을 때도 그녀는 인지석과 함께 강주로 왔다고 했다.그때는 인지석이 누구인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시간 지나 보니 인지석의 할아버지 때부터 최씨 가문의 집사였다. 그들은 주로 청소 같은 잡일을 도맡아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다.그런데 이런 사람이 어찌 동생의 마음에 들었을까?최연준은 담담하게 물었다.“그 사람 아직도 안 갔어?”“당연하지! 나 혼자 강주에 있는데 걱정돼서 어떻게 가!”“그 사람이, 걱정한다고?”“음... 그래!”최연희는 당황한 기색이 묻어났다.“원래 나 지키려고 온 거야.”“먼 길 떠나는데 많은 경호원들을 놔두고 하필이면 잔디 깎는 사람을 데려와?”
“저는 이 아이의 둘째 삼촌입니다!”체육 선생님은 잠시 생각하더니 무릎을 굽혀 부드럽게 최가원에게 물었다.“가원아, 이 사람 알아?”최군성은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불만스럽게 말했다.“아니, 선생님! 저를 못 믿으시겠단 건가요?”“정말 죄송합니다.”체육 선생님은 예의 바르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건 유치원 규정이라 어쩔 수 없습니다. 저희는 모든 아이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하거든요. 평소에 가원이는 보모나 경호원, 때론 부모님이나 할머니, 할아버지,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데리러 오셨죠. 가끔은 지용 삼촌이나 인서 이모도 오셨는데, 둘째 삼촌이라는 분은 없었던 것 같아서요... 그래서 다시 확인한 겁니다. 아이를 모르는 분께 맡길 순 없잖아요.”최군성은 말문이 막혔다.사실 최군성이 유치원을 방문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만약 ‘경쟁자’를 확인할 일이 아니었다면 이곳에 올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가원아, 이 사람 알아?”체육 선생님은 다시 물었다.최군성은 조카에게 눈짓을 보내며 도움을 요청했다.하지만 최가원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최군성은 조카를 놀리듯 평소처럼 귀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입을 벌리고 혀를 내밀면서 목을 조르는 시늉을 했다.평소에도 삼촌과 조카는 이런 유치한 장난으로 서로를 놀리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서로 장난감을 뺏거나 간식을 두고 자주 다퉜다. 심지어 그림 도구를 놓고 실랑이를 벌이다 서로 몸싸움까지 하는 모습은 어린아이와 다를 바 없었다.최가원은 늘 삼촌에게 밀려 속상해하며 발을 동동 굴렀었다.오늘, 드디어 복수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최가원은 커다란 눈을 반짝이며 장난스럽게 미소 짓더니 천천히 말했다.“모르는 사람이에요!”“뭐?”최군성은 당황한 나머지 거의 뛰어오를 뻔했다.“이 꼬맹아!”최군성은 조카의 머리끈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체육 선생님은 아이를 납치하려는 줄로 오해해 재빨리 최군성의 손목을 붙잡아 힘껏 비틀었다.“아!”최군성은 고통을 느끼며 몇
하지만 배윤아와 최군성은 지금의 관계에 매우 만족스러워 보였다.지난 2년 동안, 두 사람은 함께 그림을 그리고 저작권을 판매하며 작품을 각색했다. 나아가 함께 애니메이션 감독으로도 활동했다. 두 사람은 함께 바쁘게 뛰어다니며 서로를 의지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일상의 소소한 기쁨을 함께 나누며 예술적 영감도 서로 나눴다.두 예술인이 함께 지내는 만큼, 각자의 예술적 견해를 두고 종종 불꽃 튀는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최군형과 강소아는 몇 번이나 두 사람의 관계가 정말 끝나버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그러나 방금까지 싸움닭처럼 티격태격하던 두 사람은 언제 그랬냐는 듯 웃으며 화해했고 화실 안은 금세 따스한 온기로 가득 찼다.강소아가 딸에게 물었다.“엄마가 알려준 말, 다 전했어?”최가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대답했다.“삼촌 반응은 어땠어?”“음...”최가원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삼촌한테는 별로 효과가 없는 것 같아요!”“뭐라고?”강소아는 놀란 얼굴로 물었다.옆에서 듣고 있던 최군형은 강소아를 끌어안으며 웃었다.“찮아, 천천히 풀어가자. 군성이는 생각보다 고집이 센 편은 아니니까.”“그래도 이렇게 질질 끌고 있으니까...”강소아는 여전히 답답한 표정이었다.“걱정하지 마.”최군형은 딸을 바라보며 물었다.“가원아, 내일 유치원 끝나면 누구 손잡고 나올 거야?”최가원은 크림 케이크를 한입 먹던 중 아빠의 말에 신이 나서 고양이 같은 얼굴로 대답했다.“체육 선생님!”“정답이야!”부녀는 힘차게 손뼉을 마주쳤다.다음 날, 최군성은 유치원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유치원 정문에 나타났다.최군성은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늘 폴로셔츠와 청바지 같은 편한 옷만 입던 그가 오늘은 세련된 정장을 입고 머리까지 깔끔하게 손질했다.평소 화실에서의 부스스한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최군성의 외모와 체격은 최씨 가문의 젊은 세대 중에서도 눈에 띄는 인물이었다. 외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남양 제일 미남’의
최군형은 방금 다 먹은 닭 날개 꼬치를 들고 최군성을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꼬치를 던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엄마가 항상 옳다니까. 넌 정말...”최군성은 당황스러워하며 물었다.“뭐가?”최군형은 이를 악물며 한 마디로 대답했다.“유난이야!”그 말을 내뱉고는 최지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최군성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어리둥절했다. 멀찍이서 바라보니 저쪽은 꽤 북적거리고 있었다. 최군성의 내면 깊은 곳에서 ‘흥겨운 분위기를 즐기는 본능’이 슬며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최군성은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스케치북을 펴고 빠르게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다른 사람들은 대충 윤곽만 그린 반면, 특정 인물을 그릴 때만큼은 세심하게 한 획 한 획 공들여 그려내어 풍경 속에서도 돋보이게 했다....모든 일이 마무리되었고 이제 남은 건 최지용과 백인서의 결혼식이었다.최군형도 두 사람의 결혼을 돕고 싶어 최근 며칠 동안 집에 머물며 부모님과 함께 세심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지용이와 인서는 둘 다 조용한 걸 좋아하니, 웅장한 것보다는 소박하고 아기자기한 결혼식이 더 잘 어울릴 것 같구나.”최연준은 상자에서 온갖 보물들을 꺼내며 결혼 선물로 줄 것을 고르고 있었다. 그중 강서연은 분홍빛 진주 세트를 한눈에 알아보고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이게 딱이겠네! 인서에게 정말 잘 어울릴 거야.”“엄마.”최군형은 살짝 놀라며 말했다.“그건 외할아버지께서 엄마에게 주신 거잖아요. 남양 주변 해역에서만 나는 진주라면서요.”“맞아, 그런데...”강서연은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말했다.“분홍색은 젊고 사랑스러운 느낌이잖아. 이제는 엄마한테 조금 안 어울릴지도 모르겠어.”“누가 그래!”최연준은 즉각 반박하며 손을 뻗어 진주 세트를 집어 들려 했다. 그러자 강서연은 그의 손등을 톡 치며 진주를 되찾아왔다.“인서에게 줄 거니까 당신은 끼어들지 말아요!”“우리 다른 선물을 하자고! 이건 당신이 간직해야 할 물건이야!”두 사람은 한동안 실랑이를 벌였
강소아가 손짓하자 최지용은 더는 망설이지 않고 백인서에게로 달려갔다.“이제 딸을 보러 가야겠네요!”강소아가 웃으며 말했다.“저 대신... 인서 좀 돌봐줄 수 있을까요?”최지용은 그 말에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아까는 주저하며 다가가지 못했던 이유가 있었다. 바로 주변에 권욱과 강소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사람은 백인서의 오빠였고 다른 한 사람은 그녀의 절친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섣불리 다가가면 괜히 이상하게 보일까 봐 망설였다.최지용이 어깨를 펴고 당당히 백인서의 어깨에 손을 얹으려는 순간, 누군가 그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뭐 해요?”최지용은 깜짝 놀랐다.“너야 말고 뭐해?”권욱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감히 내 눈앞에서 내 동생한테 손대는데 어떻게 보고만 있어?”“...”최지용은 당황해서 말을 잃었다.생각해 보면 두 사람은 처음 만난 순간부터 뭔가 삐걱거렸던 것 같았다. 서로 영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그땐 권욱이 백인서의 오빠라는 사실을 몰랐기에 오히려 잠재적 경쟁 상대로 여기기도 했었다.그리고 지금... 더욱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이 되어버렸다.“쓸데없이 귀찮게 하지 말고 물러나!”권욱은 두 사람 사이에 서서 최지용을 흘겨보며 말했다.“동생과 나에겐 나눌 얘기가 산더미처럼 쌓였으니 방해하지 마!”“할 얘기가 뭐가 그렇게 많은데요?”“예를 들면... 인서가 권씨 가문에서 맡게 될 직책 같은 거?”“그나저나!”최지용은 그제야 떠오른 듯 고개를 치며 말했다.“아까 권욱 씨 입으로 직접 말했어요. 최상 그룹과 권오 그룹이 협력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권씨 가문이 진정성을 보여주기 위해 동생을 우리 최씨 집안에 시집보내겠다고요!”“내가 그런 말을 했었나?”권욱은 태연하게 모른 척하며 말을 돌렸다.“내가 무슨 말을 했었는지 기억이 안 나네.”“저기요, 권욱 씨!”두 남자가 티격태격하는 사이, 백인서는 살짝 뒤로 물러나 두 사람의 시야에서 벗어났다.백인서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잔잔히 미소 지었다. 과거에는
손님들이 웅성거리며 비명이 들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백인서?”배윤아가 일부러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큰 소리를 질러?”“아니야... 난 백인서가 아니야!”백시연은 목이 쉬도록 외치며 갑자기 강소아를 돌아보았다.“말해봐! 아까 다 알고 있었던 거잖아? 내가 백인서가 아니라는 걸! 모두가 알 수 있게 똑똑히 말하라고!”“인서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강소아는 담담하면서도 비웃는 표정을 지으며 차분히 백시연의 손을 밀어냈다.“혹시 술이라도 마신 거야? 취한 것 같아.”“강소아 씨!”백시연은 분노에 치를 떨며 외쳤다.강소아는 백시연의 손을 잡고 안쓰럽다는 듯이 바라보며 말했다.“인서야, 우린 자매잖아. 여기서 소란스러운 모습 보이지 말자. 오늘은 어쨌든 육씨 가문의 중요한 날이기도 하고 내 딸도 여기 있어... 그러니까, 제발 진정해 줘.”“아니야...”“인서야!”“아니라고! 아니라고!”백시연은 두 손으로 귀를 막고 한 발짝씩 뒤로 물러섰다.“난 백인서가 아니야! 몇 번을 말해야 믿을 거야?”배윤아는 피식 웃으며 백시연의 팔짱을 끼고 태연히 말했다.“어머, 백인서. 왜 그래? 백인서가 아니면, 왜 백인서 얼굴을 하고 있는 건데? 그런데... 굳이 너와 백인서의 다른 점을 꼽으라면... 손목에 그림이 있다는 거?”“비켜!”백시연은 배윤아를 거칠게 밀어내고 다급히 무대를 향해 뛰어갔다.백인서는 고요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마침내 기다리던 이 순간이 왔다.백인서는 천천히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눈앞의 백시연을 바라보았지만,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눈앞의 이 사람은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지옥에서 온 악마처럼 보였다.백인서는 문득 생각했다. 어쩌면 백시연은 진짜 악마일지도 모른다고. 사람은 누구나 두 가지 얼굴을 지니고 있다. 한쪽은 천사, 다른 한쪽은 악마. 그리고 자신과 백시연 같은 쌍둥이의 운명은 그런 인간의 본성을 극대화해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가면은 순금으로 빚어졌고 가장자리에는 보석이 촘촘히 박혀 조명이 닿을 때마다 눈 부신 빛을 흩뿌렸다.백시연은 그 자리에 선 채 몸이 굳어버렸다.“이... 이럴 수가!”그 사이, 백인서는 이미 무대 위로 올라가 권욱 옆에 서 있었다.권욱은 이어서 말했다.“이분이 바로 제 이복동생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늘 제 동생을 걱정하며 꼭 찾아달라고 당부하셨죠. 이제야 동생을 찾게 되었습니다!”권욱은 백인서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의 눈빛 속에는 진심 어린 애정과 따스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솔직히 말씀드리면, 처음엔 동생의 출생에 대해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죠. 우리는 결국 한 가족입니다. 동생을 찾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동생이 그동안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요... 우리 권씨 가문이 제 동생에게 너무 많은 빚을 졌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하늘의 뜻일지도 모릅니다. 동생의 존재는 제 딸의 목숨을 구하기도 했으니까요. 그래서 이분은 제 동생일 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의 은인이기도 합니다!”객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오고 몇몇은 감동에 겨워 눈가를 붉혔다.하지만 백시연의 머릿속은 텅 비어 있었다.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동생이란 말인가? 그리고 왜 저 여자도 가면을 쓰고 있는 걸까?분명 백인서는 종수가 지하실에 가둬뒀고 곧 처리될 운명이 아니었던가.“그리고 이어서 발표하겠습니다!”권욱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권씨 가문의 재산 중 절반을, 이 세상 유일한 동생에게 넘기겠습니다!”“뭐... 뭐라고?”백시연의 온몸은 떨림으로 굳어졌고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갔다.“아니야... 이건 아니야!”“뭐가 아니야?”강소아가 일부러 물었다.“인서야, 어디 아파?”“그게....”“권 대표는 네 직장 상사잖아? 상사가 가족을 찾은 거니 축하해줘야지!”백시연은 차가운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강소아는 낮게 웃음을 흘리며 다른 이들에게 들리지 않게 백시연의 귀에 속삭였다.“그렇게 백인서의 자리가
“그게... 무슨 뜻이에요?”백시연은 침착함을 가장하며 입을 열었지만, 권욱의 눈빛을 똑바로 마주치지 못했다.“이 카드가 제 거 아니면 누구 건데요?”“난 그런 말 한 적은 없는데?”권욱의 입가에는 여유로운 미소가 번졌다.“그냥 문득 우리 아내도 이런 비슷한 카드를 몇 장 가지고 있던 게 떠올랐을 뿐이야. 카드 색깔도 이런 파란색이었고 뒷면에는 대나무 무늬의 홀로그램이 새겨져 있었어. 조씨 가문은 학문을 중시하는 전통을 지닌 집안이라 대나무처럼 강인하고 꿋꿋한 식물을 특별히 아낀다고 하더군. 한번 뒤집어 확인해 볼래?”백시연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가 이내 창백해졌고 손은 카드 위에서 더욱 굳어졌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백시연은 강소아를 찾아갔다.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약속했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면서 묘안석이 그렇게 비싼 줄 몰라서 서둘러 나오느라 준비가 부족해 지금은 이 카드밖에 없다고 둘러댔다.그러고는 억지로 친근한 미소를 띠며 애써 밝은 표정을 지었다.“소아 언니, 우리 자매처럼 친한 사이잖아요. 언니 딸은 곧 제 딸이나 다름없죠! 가원이에게 쓰는 돈이라면 하나도 아깝지 않아요!”강소아는 미소를 머금고 백시연의 손에서 카드를 슬쩍 가져가며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정말? 고마워! 나중에 가원이가 크면 널 두 번째 어머니로 생각할 거야.”백시연의 얼굴 근육이 떨렸지만 억지로 미소를 유지하며 애써 태연한 척했다.“인서야.”강소아는 다정한 눈빛으로 백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요즘 권욱의 공익 프로젝트를 도맡아 관리하고 있다면서? 잘한다는 칭찬이 자자하더라. 몇 번이나 넌 정말 유능한 관리형 인재라고 말했어.”“아... 그래요?”백시연은 속으로 긴장하며 애써 태연한 척했다.“그럼!”강소아가 웃으며 말했다.“그래서 앞으로도 너한테 정말 잘해줄 생각이야.”그 말을 듣자 백시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10억 원을 써서 강소아의 호의를 얻은 거라면 나쁘지 않은 거래라는 생각이 들었다.“소아 아가씨
연회장 한편에서 백시연은 마침내 잠시 자리를 빠져나갈 기회를 잡았다. 화장실에 간다고 둘러대고는 한적한 구석에 숨어 종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무언가 해답을 찾고 싶었다.긴 신호음 끝에야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백시연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왜 이렇게 늦게 받아요?”백시연은 알지 못했다. 종수가 이미 경찰차에 타고 있었고 간신히 경찰의 허락을 받아 전화를 받은 것이라는 사실을.“아저씨! 정말 급해서 전화했어요. 지금 뭐 하고 계셨어요?”종수는 억지로 미소를 짓고 나지막이 속삭였다.“시연아...”뭔가 말을 더하려던 종수는 경찰이 허리춤에 총구를 겨누는 바람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됐어요, 됐다고요!”백시연은 짜증을 내며 말을 끊었다.“딱 한 가지만 물을게요... 아까 소아 아가씨가 저한테 10억 원짜리 선물을 요구했는데, 그거 줘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10억?”“네!”상황을 모르는 백시연은 초조한 듯 말을 더 이어갔다.“그 재수 없는 여자가 과거에 강소아와 무슨 약속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오늘 강소아가 저를 보자마자 자기 딸이 말하기 시작했다면서 선물을 요구하더라고요. 뭐였더라... 묘안석이라고 했던가? 어쨌든 그게 10억 원짜리래요!”종수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상황을 단번에 파악했다. 그건 강소아가 원하는 게 아니라 조순영을 대신해 요구한 것이라는 사실을.세상은 언제나 공평했다. 무엇을 얻었다면 그 대가는 반드시 같은 무게로 돌아오게 마련이었다.종수는 지친 듯 눈을 감고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아저씨? 종수 아저씨!”백시연은 초조한 목소리로 외쳤다.“뭐라도 말 좀 해주세요! 줘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시연아, 이제 너도 어른이야. 이런 일은 네가 직접 판단해야 해.”“제가 알아서 할 수 있었으면, 아저씨께 묻겠어요?”백시연은 이마를 찡그리며 투덜거렸다. 오늘의 종수는 어딘가 낯설고 이상했다.“솔직히... 전 주고 싶지 않아요. 그런 비싼 걸 고작 어린애한테 준다
“뭐라고요? 10억 원이요?”백시연은 깜짝 놀라서 외쳤다.강소아는 슬쩍 백시연을 바라보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왜 그래? 고작 10억 가지고. 게다가 가원이에게 큰 선물을 주겠다고 네가 먼저 약속한 거잖아. 혹시 후회라도 하는 거야?”“그럴 리가!”배윤아가 옆으로 걸어오며 백시연의 어깨를 힘차게 두드렸다.“우리 인서는 분명히 선물을 줄 거야, 그렇지? 너희 둘 사이에 보석 하나쯤은 아무것도 아니잖아.”백시연의 얼굴이 단단히 굳어졌고 입술이 굳게 닫혔다.10억? 조순영에게서 받은 카드에는 고작 10억 원뿐이었다.백인서가 이때까지 이렇게 호화로운 생활을 하면서 이 정도 돈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 걸까?그래서 강소아가 그렇게 말한 것일까?“어머, 저 사람은 육 아가씨와 친하다던 백인서 아니야?”그때, 근처에 있던 여배우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방금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었어?”“예전에... 둘이 약속했나 봐, 백인서가 육 아가씨의 딸에게 선물을 주기로. 그런데 지금은 마음이 바뀐 것 같아!”“정말? 풉! 상류층 자매라는 것도 결국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건가 봐! 백인서는 육 아가씨와 둘도 없는 사이처럼 보였는데. 육 아가씨가 어디를 가든 따라다녔잖아... 이제는 최씨 가문의 아들과 친해지니까, 가식적인 행동도 하기 싫어졌나 봐.”“그 선물이 10억 원짜리라고 하던데... 역시 두 사람 우정은 10억 원도 안 되는 거였어!”백시연의 얼굴은 점점 더 붉게 물들어갔다. 뒤돌아 그들에게 따지려던 찰나, 강소아가 재빠르게 백시연의 손목을 붙잡았다.“됐어, 인서야.”강소아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저 사람들은 평소에도 입만 살았어. 나중에 제대로 혼내 줄 거야.”“그래야죠, 저 사람들은 정섭 엔터테인먼트 소속 연예인이잖아요. 제대로 가르쳐야 해요!”백시연은 화를 내며 말했다.“소아 언니, 저 사람들이 이런 자리에 나온 건 정섭 엔터테인먼트를 대표해서이기도 하지만 결국 언니를 대표하는 것이기도 하잖아요. 저렇게 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