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나 다를까 잔뜩 굳은 얼굴로 계단 위에 서 있던 강명원이 발걸음을 멈춰 섰다.두 딸의 말다툼을 비서나 나서서 말리려 했지만, 강명원은 그럴 필요 없다는듯 손짓했다. 그는 둘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들어보고 싶었다.강서연이 느긋하게 말했다.“언니, 그때 내가 왜 그 사람이랑 결혼했는지 몰라서 이래? 아빠가 언니를 더 편애하고 아끼니까 언니 대신 내가 시집간 거잖아. 회사에서 집안일을 얘기하는 건 적절치 않아. 그러니까 여기까지만 해.”강서연이 그녀를 피해 엘리베이터에 타려는데 강유빈이 달려가 앞을 막아섰다.“왜? 더는 아무 말 못 하겠어?”강유빈이 막무가내식으로 말했다.“너 말 아주 잘하잖아? 왜 말 못 해? 천한 년, 지금 내 앞에서 연약한 척을 해?”강서연이 기다린 게 바로 이거였다. 그녀가 마구 생트집을 잡는 것!강서연이 강유빈을 흘겨보고는 싸늘하게 웃었다.“언니, 아빠는 언니를 더 아끼셔. 앞으로 이 회사도 언니한테 물려줄 거고. 난 여기서 그저 언니를 도와 뒤치다꺼리나 하고 길을 마련해주는 것뿐이야.”“말이 그렇지, 네가 무슨 꿍꿍이인지 누가 알아?”“난 정말 언니를 도우려고 온 거야.”강유빈이 한 번씩 몰아붙일수록 강서연은 한발 물러서며 피해갔다.“강씨 집안에서 난 아무것도 아니야. 언니야말로 이 집안의 유일한 후계자잖아. 그런 언니랑 내가 어찌 감히 경쟁하겠어!”“쟤가 유일한 후계자라고 누가 그래?”날카로운 목소리가 로비 전체가 울려 퍼졌다. 로비가 갑자기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고 사람들은 놀란 얼굴로 소리가 나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강명원의 표정이 말이 아니게 어두웠다. 마지막 한 계단까지 내려온 그는 분노에 찬 얼굴로 강유빈을 노려보고는 강서연 옆에 섰다.그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서연아, 너도 강씨 집안 사람이고 나, 강명원의 딸이라는 걸 잊지 마.”강서연은 입을 꾹 다물었고 강유빈의 눈에 분노가 가득했다.“아빠!”강서연이 덤덤하게 말했다.“아빠, 전 경쟁 같은 거 단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
“너...”강서연이 한걸음 나서며 말했다.“언니, 우린 다 성이 강 씨고 한 가족이야. 명예와 치욕을 함께하는 가족이라고. 언니가 망신당하면 아빠가 망신당하는 거랑 똑같아. 다음에 나한테 화를 내고 싶으면 아무도 없는 곳에서 때리든 욕하든 마음대로 해. 제발 아빠 체면 깎이게 사람 많은 곳에서 이러지 마!”강유빈이 창백한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았다.강서연의 한마디 한마디가 강유빈의 정곡을 쿡쿡 찔렀다. 아무리 눈치 없는 강유빈이라고 해도 이 상황에서는 더는 화를 내지 못했다.“하, 평소에는 경쟁에 아무 관심이 없는 것처럼 하던 네가 이토록 매정할 줄은 정말 몰랐어.”강서연이 차가운 얼굴로 또박또박 말했다.“난 그저 언니랑 같이 일 잘해보고 싶었을 뿐이야.”강유빈은 코웃음을 치고는 그대로 홱 돌아섰다.강서연은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다가 무심결에 의기양양 해하는 강명원의 모습을 보고 말았다. 그 순간 왠지 모르게 서글퍼졌다. 사실 그녀와 강유빈은 강명원의 손아귀에 잡힌 바둑알일 뿐인데 이기고 지고 무슨 의미가 있을까?그녀가 나지막이 말했다.“아빠, 저 먼저 사무실로 올라갈게요.”강명원이 환하게 웃었다.“그래. 서연아, 아빠가 역시 널 제대로 봤어! 한번 잘해봐, 잘하면 강진 그룹에서 너도 한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거야.”강서연은 대충 웃어 보였고 그의 말을 별로 마음에 새겨듣지 않았다. 반대로 강명원을 쳐다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원망이 더 짙어졌다.저녁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기분이 울적했다.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청소하고 있던 최연준은 그녀가 돌아오자 활짝 웃으며 맞이했다.“여보, 나 청소한 것 좀 봐. 어때?”그는 그녀에게 온 오후 열심히 쓸고 닦은 노동의 성과를 자랑했다. 집안을 쭉 둘러보던 강서연은 오히려 더 골치가 아팠다.최연준은 아무리 봐도 참 집안일을 할 줄 모른다. 바닥을 분명 닦았다고 했는데 물기가 여기저기 얼룩져 차라리 닦기 전보다도 못했다.베란다에 널었던 빨래도 전부 걷었다. 하지만 옷을 잘 개었다기보다 그냥
“왜 그래?”“아... 아니에요.”강서연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는 국수를 먹으며 몰래 그의 눈치를 살피더니 낮게 중얼거렸다.“무슨 날짜 계산이 이렇게 정확해... ”‘머릿속에 대체 뭐가 든 거야? 오늘 마침 생리가 끝난 건 어떻게 알았지?’강서연의 두 볼이 더 빨개졌고 쑥스러움에 그를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다.어리둥절한 최연준은 한참을 생각해도 그녀가 왜 이러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국수를 먹다가 왜 갑자기 얼굴이 빨개졌지?’최연준이 마른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강서연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요 며칠 강진 그룹에서 잘 적응했나 봐? 무슨 좋은 일이 있었어?”그의 말에 강서연의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이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요 며칠 있었던 일을 최연준에게 전부 얘기했다. 회사 로비에서 강유빈이 그녀를 곤란하게 했던 일도 포함해서 말이다.최연준은 그녀의 얘기에 조용히 귀 기울였다. 그녀가 강진 그룹에서 홀로 얼마나 힘겹게 버티고 있을지 상상이 갔다. 비록 자기 집안의 기업이긴 해도 그녀가 처한 상황이 다른 이들보다 힘겨운 건 사실이었다.하지만 이건 그녀가 언젠가는 반드시 헤쳐 나가야 하는 길이다. 절대 두려워해서도 안 되고 무너져서도 안 된다. 그리고 그 길에 최연준이 늘 함께할 것이다.강서연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여보, 오늘 아빠가 나더러... 인사팀 맡으라고 했어요.”최연준의 두 눈이 반짝였다.인사팀은 회사의 주요한 기능 부서라 대부분 강씨 가문의 최측근들이 인사팀에 많았다.그러니 강명원의 이번 의도가 참으로 의심스러웠다.최연준이 피식 웃더니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그래서 하겠다고 했어?”“당연히 거절했죠.”강서연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는 자기 아내가 그리 어리석진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왜?”강서연이 그를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회사에서 인사팀과 재무팀이 가장 중요한 부서예요. 우리 아빠 성격이라면 인사권과 자금 모두 직접 컨트롤하려고 할 거예요. 아빠랑 결혼한 지 오
남자는 탄탄한 팔뚝으로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그의 그윽한 두 눈과 마주친 순간 다 먹고 해야 할 일을 하자던 그의 얘기가 문득 떠올랐다.강서연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그의 가슴팍에 고개를 푹 파묻혔다.“여보.”그녀가 우물쭈물 말했다.“우리... 우리 이따가 해요.”최연준은 어리둥절했다.“뭘 이따가 해?”“아까 해야 할 일... 그냥 이따가 해요. 지금은 너무 배불러요!”최연준은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의 뜻을 알아듣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그녀에게 말했다.“나랑 어디 다녀오자.”강서연이 커다란 두 눈을 깜빡이며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여보!”최연준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평소 그가 이상야릇한 뉘앙스를 어찌나 많이 풍겼으면, 그녀가 조건 반사적으로 해야 할 일이라는 얘기에 바로 야한 생각부터 들었을까?‘이게 다 나의 언행과 노력에 세뇌된 것 아니겠어!'최연준의 입가에 의기양양한 미소가 지어졌다. 강서연은 주먹을 꽉 쥐고 그의 가슴팍을 냅다 두드렸다.“구현수!”“됐어, 그만해.”최연준은 그녀의 작은 손을 움켜쥐었다.“내가 말한 그 할 일은 너랑 같이 어디 가자는 거였어.”“어디 가는데요?”그가 가볍게 웃었다.“배부르게 먹었다며? 소화하러 가야지!”...강서연은 옷을 갈아입고 그와 함께 집을 나섰다. 두 사람은 버스를 타고 지하철로 갈아탔다가 또 한참 걸어서 남쪽 구역 바닷가 옆의 상가 거리에 도착했다.시 중심보다 화려하진 않았지만 나름 이곳만의 분위기가 넘쳤고 옆에 이국적인 상가 거리가 더해져 더욱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은 수많은 젊은이가 모임을 즐기는 곳으로 자리 잡았다.강서연은 현지인이었지만 이런 곳에 별로 다니지 않았다.그녀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최연준은 그녀의 손을 잡고 오동나무로 그늘진 자갈길을 걷다가 한 가게 앞에 멈춰 섰다.강서연은 뭔가가 가슴에 쿵 하고 부딪친 것처럼 울컥하여 저도 모르게 두 눈을 크게 떴다.“여보, 여긴...”이
최연준은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기만 했다.강서연은 그런 그의 그윽한 눈빛에서 복잡한 감정을 캐치했다. 그녀는 가슴이 쿵쾅거리다 못해 손바닥에도 식은땀으로 흥건했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한참이 지나서야 최연준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진지하게 말했다.“나 이 가게 엄청나게 오래 찾았어. 집주인하고도 여러 번 얘기한 끝에 겨우 세를 맡고 인테리어 한 거야.”강서연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당신이 커피숍 차리고 싶다고 했었잖아.”그는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두 볼을 살며시 어루만졌다.“그 말 계속 기억하고 있었거든. 그래서 시간이 날 때마다 여러 가게를 찾아서 비교해 보다가 결국 이 가게로 정한 거야. 이곳이 그래도 당신 요구랑 가장 가까운 것 같더라고.”그는 그녀를 사랑스럽게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여보, 남편이 다른 재간은 없어도 갖고 싶다는 건 무슨 대가를 치르든 최선을 다해서 갖게 해줄 거야.”가슴이 울컥한 강서연은 그의 손을 힘껏 잡았다.“여기 엄청 비싸죠?”“응, 조금 나가.”싸다고 해 봤자 믿지 않을 게 뻔하기에 차라리 진지하게 얘기하는 게 나았다.“저번 두 경기에서 받은 상금이랑 한동안 일한 월급, 그리고 보너스까지 합하니까 딱 되더라고.”강서연은 마음 한구석으로는 살짝 아깝기도 했다.경기 한번 하면 꽤 많은 돈을 받는 건 알지만 그건 몸으로 직접 싸우면서 힘들게 번 돈이다. 그가 피와 땀으로 번 돈을 마구 써버릴 수 없어 지금까지 그의 월급을 달라고 하지 않은 것이었다.그녀는 그가 자신에게 쓰는 돈은 아끼지 않길 바랐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마음껏 먹고 사고 싶은 게 있으면 고민 없이 사길 바랐지, 아껴 쓰는 걸 원하지 않았다.그런데 그가 돈을 쓴 건 맞지만 결국에는 자신이 아니라 그녀에게 쓴 것이었다.“당신 돈은 당신한테 쓰라고 했잖아요.”강서연이 그를 꾸짖었다.“너한테 쓰려고 내가 돈을 버는 거지.”그가 피식 웃었다.“네 소원을 이룰 수 있어서 하나도 아깝지 않아.”“나 소원이 엄청 많아요.”그녀가 입을
“현수 씨, 여기는 저번에 저를 구해줬던 최연희 양.”“연희 양, 이분은...”“저 알아요!”한 손으로 강서연의 목을 감싸 안은 채 최연희는 최연준을 보며 웃었다.“남편분이시죠? 구현수 씨!”“형부, 안녕하세요!”최연준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현수 씨?”강서연은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연희 양이 인사하잖아요!”“음.”최연준은 최연희를 힐끗 쳐다보고는 시큰둥하게 한마디를 한 후 뒤돌아 주방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본 강서연은 혹여 최연희가 난처해할까 걱정되었다.“연희 양, 죄송해요.”그녀는 웃으며 말했다.“저의 남편이 평소에는 무뚝뚝하고 살갑지 않지만... 같이 지내다 보면 정말 좋은 사람인 걸 알 수 있어요.” 최진혁은 최연준을 어릴 적부터 ‘얌생이’ 라고 불렀고 최상 가에서는 ‘냉혈한’, ‘고집불통’ 이라고 했다.그런 사람이 어쩌다 강서연한테는 이토록 다정할 수 있는가?아무래도 오빠가 여심을 잡는 기술이 남다른 게 분명했다!강서연은 최연희에게 버블티 한잔을 내려주었고, 남편에게 오븐 시간 체크를 부탁한 뒤 마당을 청소하러 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주방에서는 버터 향이 풍겼다. 최연희는 살금살금 주방으로 가서 그를 깜짝 놀래켜 주려 했다. 그러나 최연준이 먼저 인기척을 느끼고 뒤돌아 팔짱을 낀 채 미간을 찌푸렸다.깜짝 놀란 최연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하... 오빠.”최연준은 눈썹을 치켜세우고는 말했다.“오빠라니, 형부라고 불러야지.”최연희는 혀를 내두르며 헛웃음을 지었고 그는 정색해 물었다.“여긴 무슨 일로 왔어?”“그게...”최연희는 당황스러웠다.“난 단지 진심으로 축하해주러 왔을 뿐이야! 더욱이 서연 언니의 초대로 온 거고!”“얌전히 밥만 먹고 가!”최연준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강서연 앞에서는 말조심하고! 알겠지?”“당연하지!”최연희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내가 오빠 동생인데 설마 일을 그르치겠어? 오빠는 구현수고 우리는 오늘 처음 만난 거야! 맞지? 그보다... 베리 쿠키는 다 됐어
최연준도 입 모양으로 대꾸했다.“너 혼날래?”최연희는 웃느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서 먹고 있던 베리 쿠키 부스러기가 사방에 떨어졌다.강서연은 꽃에 물을 주러 마당으로 나갔고 최연준은 정색한 채 동생 옆으로 와서 말했다.“다 먹고 청소하도록!”최연희는 갑작스런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그녀는 허겁지겁 입안의 과자를 삼키고는 달갑지 않았지만 결국엔 그의 기에 눌려 순순히 빗자루를 들었다.“오빠, 참 대단한 거 같아.”그녀는 청소하면서도 잊지 않고 놀려댔다.“이러다 국민남편 타이틀까지 다 차지하겠어?”최연준은 힐끗 째려보았다.최연희는 히죽 웃었고 청소를 마치고 나서는 나머지 쿠키를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최연준은 무심하게 물었다.“누구 주려고?”그녀는 마음속으로 움찔한 나머지 쿠키봉지를 더 세게 움켜쥐었다.어찌나 눈치가 빠른지 오빠의 눈은 속일 수가 없었다. 숨기려 해도 끝내 들켜버렸다.“그게...”최연희는 머리를 쥐어 짜내어 변명을 만들어 보려 했지만 다시 한 번 최연준에게 덜미를 잡혔다.“혼자 먹을 건 아닐 테고!”한참이나 그 자리에 얼어 붙어있던 그녀는 더는 숨길 수 없을 것 같아 이실직고하였다.“인지석한테 맛 좀 보게 가져다주려고.”‘인지석? 또 그 자인가?’최연준의 눈은 한껏 매서워졌고 의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얼마 전 동생이 병원에 찾아왔을 때도 그녀는 인지석과 함께 강주로 왔다고 했다.그때는 인지석이 누구인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시간 지나 보니 인지석의 할아버지 때부터 최씨 가문의 집사였다. 그들은 주로 청소 같은 잡일을 도맡아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다.그런데 이런 사람이 어찌 동생의 마음에 들었을까?최연준은 담담하게 물었다.“그 사람 아직도 안 갔어?”“당연하지! 나 혼자 강주에 있는데 걱정돼서 어떻게 가!”“그 사람이, 걱정한다고?”“음... 그래!”최연희는 당황한 기색이 묻어났다.“원래 나 지키려고 온 거야.”“먼 길 떠나는데 많은 경호원들을 놔두고 하필이면 잔디 깎는 사람을 데려와?”
최연준은 그녀의 말에 아무 말도 못한 채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노려보았다.그녀는 연신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열여덟 살이 어때서... 열여덟 살에 연애하지 말란 법이 어딨어? 오빠 열여덟 살에는 임나연이 얼마나 따라 다녔는데!”“그 입 다물어!”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최연준의 기세에 실내에는 정적이 흘렀다.주위가 어찌나 조용했던지 최연희의 귀에는 자신의 심장 소리가 크게 들렸다.그녀는 불안함에 머리를 푹 숙이고 입술만 깨물며 한마디도 못 하고 서 있었다.이때 강서연이 임우정과 신석훈을 데리고 왔다. 그 뒤에는 유찬혁도 있었다.그들은 모두 개업식을 축하하러 왔다.최연희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는 최대한 자연스러운 미소로 그들을 반겼다.그는 가게 사장님답게 예의 있는 인사말을 그들과 주고받았다.강서연은 작은 새처럼 최연준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본 임우정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문뜩 정신을 차린 강서연은 삐죽대고는 곧장 카운터로 달려갔다.“매일 보는데도 모자라?”임우정이 따라와 말했다.“현수 씨가 이번 일은 잘한 결정인 것 같아, 다시 보게 됐다니까! 아무튼, 밖에서 여기저기서 사고 치지 않고 너에게만 신경 쓴다면, 난 제부로 인정해!”“됐네요!”강서연은 웃으며 메뉴판을 건넸다.“뭐 마실래요?”“난 괜찮아! 다들 모였어?”“찬이가 오늘 학원에 가는 날이라 끝나고 올 거예요. 다른 분들은... 아마 이미 도착했을 거예요.”그 말을 들은 유찬혁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때마침 울린 핸드폰 벨 소리에 그는 밝게 웃으며 전화를 받으러 밖으로 향했다.상대는 배경원이었다.“찬혁아, 연준이 형 너무한 거 아니야?”전화를 받자마자 억울함을 호소하는 배경원이다.“내가 못 갈 곳도 아니고! 개업식같은 큰 행사에 나더러 오지 말라니...”유찬혁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다독여 주었다.“네가 이해해, 그러게 누가 서연 씨한테 변태 취급 받으래? 교통사고도 그렇고! 서연 씨가 너를 보자마자 놀라 도망가면 어쩌려고!”시무룩한 표정을
배현진은 마치 자신의 영혼이 몸을 떠나 허공을 떠도는 듯한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그는 허공에 떠 있는 듯 응급실의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사들이 급히 자신을 응급처치하는 모습과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로 누워 있는 자기 육체를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에서 해방된 듯한 감각이 그를 감쌌다.의식은 또렷했지만, 살아남겠다는 의지는 조금도 없었다.그날, 배현진은 오강호와 싸웠다.송윤희와 이혼 후 더 나락으로 떨어진 오강호는 그날 술집에서 술에 취해 있던 배현진과 우연히 마주쳤다.말다툼은 곧 몸싸움으로 번졌고 오강호는 배현진이 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자, 송윤지를 언급하며 조롱을 쏟아냈다.배현진은 격분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먼저 손을 댄 쪽이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오강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배현진은 오강호에게 몇 대 얻어맞고는 응급실로 실려 가고 말았다.지금도 배현진의 귀에는 오강호의 말이 메아리처럼 맴돌고 있었다.“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더니 별수 없군. 여자를 제대로 붙잡지도 못하고 결국 임지강에게 뺏겼다지? 하하하...”“배 도련님, 혹시 속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임지강이 송윤지에게 접근한 건 처음부터 다 계획된 거였을 거야!”“너 같은 쓰레기가 무슨 남자야. 약혼녀도 남에게 빼앗기고 말이야.”배현진의 가슴 한구석이 세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강한 힘이 그의 영혼을 다시 육체로 끌어당겼다.옆에서 심전도가 삐 울리더니 직선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의사들은 제세동기를 정리하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환자가 심장박동을 회복했습니다. 약물을 투여하세요.”배현진의 꼭 감겼던 두 눈이 살짝 떨렸다.그를 때린 사람이 임지강과 송윤지의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걸까?혹시, 그 둘 사이에 정말로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그는 알아내야 했다.죽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자신이 겪은 모든 수모를 반드시 임지강에게 똑같이 되돌려주겠다고 다짐했다....
임지강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제가 누나랑 형부께 누를 끼쳤네요.”“그렇게 생각하지 마.”임우정은 부드럽게 말했다.“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은 결국 운명 같은 거야. 따지고 보면 이 일의 원인은 나야. 내가 처음에 송윤지를 현진이에게 소개하지 말아야 했어.”“저 때문에 누나가 곤란해진 거예요.”임지강은 진지하게 말했다.“솔직히 말하면, 이번에 제가 조금 비겁한 방법을 썼어요. 누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배씨 가문을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배현진이 은행에 진 빚은...”임지강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임우정이 임지강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경원이와 수정이는 모두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야.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빚진 돈은 은행에 분할해서 납부할 거야.”“그럼 이자는 받지 않을게요.”임우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안도와 약간의 무력감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배현진에 대해서는.”임지강은 계속해서 말했다.“저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윤지를 괴롭힐 때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예상했어야죠. 지금 정신 상태가 좋지 않다거나, 심지어 정말로 정신이 나갔다 해도 그건 자업자득이에요.”“됐어, 봐줄 줄도 알아야지. 너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잖아...”임지강은 고개를 들어 임우정을 바라봤고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친 뒤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무슨 냄새예요?”갑자기 집 안에서 송윤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지강은 놀라며 황급히 돌아섰다.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송윤지가 급히 주방으로 달려 들어왔다.임지강도 곧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아이고, 이거 다 태웠네요!”송윤지는 놀라 외치며 불을 껐다. 그런 다음 행주로 냄비 뚜껑을 열었다.“이건 뭐예요?”“제가 만든 당근 소고기 스튜예요...”임지강은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송윤지에서 한번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는데 결과는 역시나 이 모양이었다.“물 안 넣었어요?”송윤지는 코를 찡그리며 물었다.“당근
임지강은 송윤지의 세계에 다시 한번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다.임지강은 이제 송윤지의 아파트에서 종종 머물렀다. 겉으로는 송윤지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라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은 간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송윤지는 몇 번 거절하려 했지만, 임지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국 그냥 놔두기로 했다.임지강은 비록 소파에서 자야 했지만, 그것조차도 행복했다.임지강은 언젠가는 송윤지의 곁에서 함께 아침을 맞이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임지강은 대부분의 시간을 송윤지와 함께 보내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그는 세 끼를 직접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송윤지가 과거에 자신을 위해 했던 일들이 얼마나 힘들고 정성이 담긴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고 과거 송윤지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다.가끔 송윤지는 집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임지강의 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꿈이 자꾸 송윤지를 괴롭혔지만, 송윤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임조강이 곁에 있으면 훨씬 마음이 놓인다는 것을.임지강은 배현진과는 완전히 달랐다.배현진은 늘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앞으로’ 같은 말로 막연한 미래를 약속하곤 했다.반면, 임지강은 ‘내가 있잖아’, ‘나한테 맡겨’, ‘두려워하지 마’ 같은 말로 송윤지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임지강의 말 속에는 사랑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었지만, 행동 하나하나에서 송윤지를 얼마나 아끼는지 충분히 느껴졌다.그날은 송윤지가 쉬는 날이었다. 임지강은 주방에서 당근과 소고기를 넣은 스튜를 끓이고 있었다.이 요리는 임지강이 새로 배운 것이었다. 임지강은 요리의 모든 과정을 조심스럽게 진행했고 조미료를 넣는 것도 마치 화학 실험을 하듯 정밀하게 측정했다.잠시 후, 요리의 향기가 퍼져 나갔고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냄비 뚜껑을 덮고 불을 약하게 조절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그가 문을 열자, 임우정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임우정은 복잡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누나?”
배현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임지강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소중히 여겨야 할 때 외면했으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임지강은 손가락으로 배현진의 코앞을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다시 내 여자를 건드리면, 소피아와 함께 감옥에서 만나게 될 거야.”임지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갔다.방 안에는 이제 배현진과 배윤아 두 남매만 남아 있었다.배현진은 멍하니 바닥에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후회와 절망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배현진의 모습을 보며 배윤아는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오빠...”배윤아는 조심스럽게 배현진을 부축하며 말했다.“사실, 오빠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진작에 알아봐야 했어. 소피아가 없었다면, 우리 집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배현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는 벽에 기대어 머리를 부딪치며 자신을책망했다.“오빠.”배윤아는 애써 배현진의 마음을 다독이며 말했다.“내 생각엔 임지강 씨는 오빠에게 교훈을 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진심으로 오빠를 망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닐 거야. 이미 송윤지의 복수를 한 거나 다름없으니, 더는 오빠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게다가 다행히도 오빠가 진 빚은 임지강 씨의 은행에서 대출받은 거니까, 그에게 시간을 좀 더 달라고 부탁하면 좀 봐주지 않을까?”“봐준다고?”백약곡의 쓴웃음은 공허하고 힘이 없었다.“지금 나는 아무것도 없어. 완전히 끝났어...”“오빠에겐 아직 나랑 부모님이 있잖아!”배윤아는 울먹이며 말했다.“우리는 여전히 가족이야! 오빠,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잘못했다고 해. 오빠가 진 빚은 부모님이 분명 해결하려고 하실 거야.”“내가 은행에 진 빚은 수천억이라고.”배현진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게다가 이 모든 걸 뒤에서 조종한 사람은 임지강이야. 그 사람은 절대 날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오빠...”배윤아가 더 말을 이어가려 했
“현진 씨, 제발 내 말 좀 들어봐!”소피아는 두려움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이렇게 한 건... 다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은 모든 걸 여동생에게 넘겼잖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랑 제임스는? 당신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여기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다면, 제임스를 어떻게 키우겠어?”“그만해!”배현진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소리쳤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소피아는 오직 자신과 제임스의 미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소피아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배현진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대하려 했던 건 소피아를 사랑해서지, 빚진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현진 씨...”소피아는 눈물을 흘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내가 잘못한 거 알아. 하지만 정말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이 나를 인정해 주길 바랐고 우리가 순조롭게 결혼하길 원했을 뿐이야. 그래서 내가...”“네가 원하는 건, 배씨 가문을 차지하는 거잖아?”“당신...”“윤아는 내 친동생이야!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내 등 뒤에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어?”배현진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소피아는 배현진의 외침에 놀라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소리쳤다.“배현진! 앞으로 네 여동생이랑 살 거야? 아니면 나랑 살 거야?”그 말에 배현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소피아의 뺨을 세게 때리며 속에 쌓여 있던 모든 후회와 분노를 폭발시켰다.소피아는 비명을 지르며 배현진의 얼굴을 긁으려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몸싸움을 벌이며 뒤엉켰고 배현진의 얼굴에는 소피아에게 긁힌 상처가 선명하게 남았다.그때, 경찰이 방으로 들이닥쳐 두 사람을 강제로 떼어놓았다. 차가운 수갑이 소피아의 손목에 채워졌다.배현진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소피아가 경찰에게 끌려 나가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도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 그의 존재는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온몸이 퍼즐 조각처럼 부서져 다시는 하나로
임지강은 대출 증명서를 꺼내 들었다. 서류에 선명한 배현진의 서명과 붉게 찍힌 도장은 마치 피로 얼룩진 조롱처럼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했다.“제 생각엔,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조 회장이 말했다.“지강아, 빨리 돈을 배 도련님 계좌로 송금하고 그 두 광산을 사들여라. 그리고 배 도련님,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임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너그럽게 대해주고 있는데, 도련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말도 안 되죠. 흥! 약속을 어기는 일은 배씨 가문의 품격에도 맞지 않잖아요, 안 그래요?”배현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후회와 절망이 그의 마음을 홍수처럼 휩쓸고 있었다.“배씨 가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오늘 제가 데려온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배 도련님도 보고 싶었을 겁니다.”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룸의 문이 열리며 배윤아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배현진은 배윤아를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놀라움은 곧 걱정과 초조함으로 변했다. 배현진은 재빨리 배윤아에게 다가가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윤아야, 괜찮아?”“나 괜찮아.”배윤아는 눈가가 붉어졌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 고작 사흘뿐이었지만, 그 시간은 마치 몇 세기가 흐른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그러나 배윤아의 시선이 소피아를 향하는 순간, 증오가 담긴 눈빛이 소피아를 사로잡았다. 배윤아는 이를 악물며 소피아를 가리켰다.“오빠, 바로 저 여자가 사람을 시켜 날 해친 거야!”“뭐라고?”배현진은 몸을 떨며 경악했다.소피아는 그제야 충격에서 벗어나 발악하듯 배현진 곁으로 뛰어들며 변명했다.“아니야! 내가 아니야! 윤아야, 너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네가 사라진 동안, 난 네 소식을 찾으려고 정말 애를 썼어. 난 정말로...”“거짓말하지 마세요!”배윤아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소피아 씨가 사람을 시켜 날 폭행하고 내 물건을 훔쳐 간 건 분명해요! 그리고 소피아 씨가 가장 원했던 게 배씨
“조 회장님, 이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요!”소피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항의했다.“우리가 그 광산을 사느라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지 아시잖아요. 대박을 기대했는데, 지금 헐값에 팔면 원금도 못 건질 뿐만 아니라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고요. 게다가 그 돈은 전부 은행 대출입니다.”“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나요?”조 회장은 다 피운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이건 아가씨가 주도한 일 아닌가요? 제 기억으로는 배 도련님이 처음엔 그 두 광산에 별 관심이 없으셨던 걸로 압니다만.”“조 회장님...”“배 도련님.”조 회장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말했다.“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오히려 추악한 수단으로 올라선 여자의 말을 믿었으니, 그 손해는 당연히 본인이 책임져야죠.”“지금 말 다했어요?”소피아는 벌떡 일어나며 격분해 외쳤다.조 회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짓누르듯 바라보았다. 그때 주변에 있던 부하들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섰고 소피아의 기세는 단숨에 꺾였다.“배 도련님, 매입자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배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 회장은 부하에게 매입자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뒤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본 배현진은 그만 충격에 말을 잃고 말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임지강과 송윤지였다.배현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다 테이블을 건드렸고 접시와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임지강은 송윤지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를 위해 의자를 빼주고 임지강도 옆에 나란히 앉았다.“배 도련님, 아는 분이시죠?”조 회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제가 따로 소개해 드려야 할까요?”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배 도련님.”임지강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제가 듣기론 도련님이 투자하신 두 광산이 이제 3200억밖에 안 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3400억에 사들이겠습니다. 도련님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도
화면에 띄워진 데이터는 충격 그 자체였다.두 사람은 멍하니 눈을 크게 뜬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친 듯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배현진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소피아 역시 어찌 된 일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소피아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우리가 1조를 들여 산 두 광산이라고! 무려 1조라고!”배현진이 소리쳤다.“가격이 분명 오를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지금 3200억으로 폭락한 거냐고!”“나도... 나도 모르겠어...”소피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 광산의 시장 가격을 철저히 조사했었단 말이야. 그 두 광산은 운산시에 있는데, 지금 운산시 광산 가격이 상승세잖아. 분명 손해 볼 투자가 아니었어.”“하지만 지금 상황 좀 봐.”배현진은 입술을 떨며 소리쳤다. 그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소피아, 그 1조는 전부 은행 대출금이야. 지금 난 은행에 수천억 빚을 졌고 이자도 엄청나다고.”“현진 씨, 진정해.”소피아는 급히 배현진을 달래며 말했다.“이 일은 조 회장이 중간에서 소개한 거래잖아. 조 회장에게 물어보면 모든 게 밝혀질 거야. 내가 직접 물어볼게.”...배현진과 소피아는 약속된 시간보다 훨씬 일찍 호텔 룸에서 조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배현진은 오늘의 만남을 위해 호텔 매니저에게 최고의 음식을 준비하도록 특별히 부탁했다. 테이블 위에는 호텔의 대표 메뉴들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다.조 회장이 방에 들어서자, 배현진은 그가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조 회장의 눈빛은 마치 코너에 몰린 쥐를 노리는 고양이 같았고 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쥐가 된 듯한 압박감에 사로잡혔다.“두 분이 너무 과하게 준비하셨네요.”조 회장은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위의 술잔을 힐끗 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이렇게까지 준비하실 필요는 없었어요. 나이
이른 아침, 소피아는 천천히 눈을 뜨며 옆에 누운 남자의 맨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배현진의 입술에 살며시 입맞춤했다.배현진은 그녀의 키스에 미소로 답하며 부드럽게 눈을 떴다.하룻밤의 열정에 지친 두 사람의 얼굴에는 희미한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제임스는 아직 안 깨어났어?”“이 시간엔 절대 안 일어나요.”소피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 위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그럼... 우리 한 번 더?”“아니.”배현진은 소피아의 손을 잡아 입술에 가져다 댄 뒤 가볍게 입맞춤하며 말했다.그는 정말로 피곤했다. 소피아는 도대체 어떻게 매일 밤 이렇게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는 걸까?소피아는 송윤지와 완전히 달랐다. 송윤지는 늘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그가 바라볼 때만 순수한 미소를 띠곤 했다.배현진은 문득 송윤지를 떠올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그는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했다.“자기야, 무슨 일이야?”“아, 별거 아니야.”배현진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맞다, 나 현진 씨랑 상의할 게 있어.”소피아는 배현진의 얼굴을 자신을 향해 돌리며 말했다.“제임스도 점점 크고 있어. 가정교사를 불러서 집에서만 공부시키는 건 이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또래 아이들과 학교에서 어울리는 게 필요하지 않겠어? 어쨌든 앞으로는 제임스가 배씨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을 사람이 될 테니까, 그렇지?”“음...”배현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소피아를 바라보았다.“그런데 장래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부모님이 이미 가업을 전부 윤아에게 넘겼잖아.”소피아는 미소를 띠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흡족해했다.배윤아 같은 풋내기는 소피아와 겨룰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배윤아를 기절시켜 조 회장의 카지노 앞에 던져 놓았기 때문이다.조 회장이 배윤아를 데려갔으니, 모두가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범인이 조 회장과 임지강이라고 믿을 것이다.혹시 조 회장이 색욕에 휘둘리는 사람이라면 더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