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문뜩 모래밭을 걸어보고 싶었다.강서연은 머리카락을 넘기며 슬리퍼를 신고 바닷가를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환한 미소가 가시질 않았다....구현수는 온밤 잠을 설쳤다.이제는 강서연이 곁에 없으면 잠에 들기 어려웠다. 하지만 강서연과 임우정이 절친 사이라 두 사람의 수다에 끼어들어 방해하면 속 좁은 사람으로 몰릴까 봐 말도 못 꺼냈었다.그래서 어젯밤에는 침대서 여기저기 뒹굴며 화풀이를 했었다. 눈은 방울보다 더 커져서는 속으로 수백 번이고 신석훈을 욕했었다.이번 여행은 누구를 위한 여행이란 말인가?!하지만 신석훈은 임우정과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를 이토록 손쉽게 저버렸으니 말이다. 신석훈의 코를 고는 소리가 어찌나 쩌렁쩌렁한지 옆방에서도 또렷하게 들렸다!구현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날이 슬슬 밝아지자 잠깐 눈붙여 안정을 취하려 했다.그 순간 방의 전화가 울렸다.“셋째 도련님. 서연 씨가 혼자 밖으로 나갔습니다.”“뭐?”그는 깜짝 놀랐다.“어디로 갔는데?”“아침 일찍 바닷가로 향해 저희 쪽에서 따라붙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가 저희 개인 바닷가가 아닌 공공구역이라 아직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습니다만 발견될까 봐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있습니다.”구현수는 실눈을 떴다.‘바닷가?’거기 경치가 좋지만 최씨 가문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었다. 현재 그곳은 여행객들도 거의 없는 데다 만에 하나 사고라도 난다면...구현수는 경계태세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바짝 따라붙어. 혹시라도 문제 생기면 책임을 단단히 묻겠어!”전화기 너머로 전전긍긍하다 다급하게 수긍했다.바닷가에 온 강서연은 슬리퍼를 한 쪽에 벗어두고 맨발로 부드러운 모래밭을 걷고 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바닷냄새를 몰고 머리카락을 스쳤다. 멀리에서는 바닷새가 날아다녔고 수평선에서 해가 서서히 떠올라 수면을 벌겋게 물들였다.강서연이 도시에서는 감상하기 어려운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다 갑자기 휴대 전화를 잊고 못 챙겨온 걸 한없이 후회했다. 이
“당... 당신.”한순간 한 줄기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하얘졌다!무언가를 눈치챈 듯한 부랑자는 그녀를 힐긋 쳐다보고는 머리를 흔들며 입으로 중얼대더니 쓰레기 꾸러미를 들고 냅다 도망갔다.강서연은 뒤따라 쫓아갔지만 몇 걸음 못 가 얼굴이 하얗게 질려 거친 숨을 내쉬었다.그 얼굴...너무나도 구현수와 닮아 있었다.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린 강서연은 피가 거꾸로 솟구치고 손발이 차갑게 저렸다. 어떻게 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은 채로 그녀는 이미 민박집 앞에 와 있었다. 앞에는 구현수가 나와 있었고 어깨에 손을 얹자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치며 멍하니 바라보았다.“무슨 일이야?”구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상냥하게 물었다.그제야 정신이 든 강서연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그녀의 눈앞에 또렷한 턱선과 깔끔한 이목구비가 나타났고, 농염한 남성미가 내뿜어져 왔다. 이런 현수 씨를 어찌 부랑자와 비교하겠는가!방금은 실성을 했는지 헛것을 본 게 분명했다. 강서연은 자책하면서 저절로 머리를 세게 내리쳤다.“도대체 왜 그래?”구현수는 방금보다 더 상냥하게 물었다.강서연은 그와 깍지를 낀 채로 입술을 삐죽거리고 있었다.그녀의 손은 놀랍도록 차가워 구현수는 되레 걱정되었다.“아침부터 어디로 간 거야? 사면이 바다인 데다 바람도 세고 오성은 점심에는 덥지만. 아침저녁에는 기온이 떨어져. 이렇게 얇게 입고 나가더니 감기 걸린 거 아니야?”커다란 손이 그녀의 이마에 닿자 강서연은 애교 섞인 말투로 잡아 내렸다.“나 괜찮아요. 걱정 말아요!”구현수는 생각에 잠긴 눈빛으로 유심히 그녀를 바라보았다.강서연은 갑자기 방금의 웃음거리가 생각나 입꼬리가 올라가다가 피식 웃었다.이 웃음이 구현수의 눈에는 온 세상을 환하게 만들어주는 것만 같았다.“여보.”그녀의 어깨를 끌어안고는 매력적인 저음으로 말했다.“명색이 신혼여행인데 어제는 왜 날 독수공방하게 만들었을까.”“그래서. 기분 나빴어요?”그녀는 작은 여우처럼 올려다보았다.“그럴 리가.”그는 실눈을 뜨며
“정말이에요?”강서연이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이벤트를 한 건 그 사람들인데 우리만 운이 좋았네요!”“그러니까 말이야.”구현수가 덤덤하게 웃었다. 그녀가 즐거워하는 모습만 봐도 마음이 흐뭇했다.“현수 씨랑 결혼한 후로 내 운이 수직 상승한 것 같아요. 모든 일이 다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순조롭게 잘 풀린다니까요.”그녀는 발뒤꿈치를 들고 그의 볼을 두 손으로 잡더니 쪽하고 입맞춤했다.“현수 씨는 정말 복덩어리예요!”구현수는 잠깐 멈칫하다가 그녀의 코끝을 톡 치며 가볍게 웃었다.“먼저 가서 먹어.”그가 나지막이 속삭였다.“화장실 갔다가 바로 갈게.”“알았어요.”강서연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그럼 나 먼저 우정 언니랑 심 의사님 찾으러 갈게요. 얼른 와야 해요.”“알았어.”강서연이 폴짝폴짝 뛰며 방을 나간 순간 구현수의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는 테이블 위의 전화기로 번호를 꾹꾹 눌러 부하에게 전화를 걸었다.“오늘 아침 서연이한테 무슨 일 있었어?”“서연 씨는 계속 바닷가에서 놀았고 저희는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거든요. 그런데 돌아가는 길에 길거리 쓰레기통 그쪽에서...”부하가 말을 얼버무렸고 구현수가 버럭 화를 냈다.“말해!”“거기서 노숙자랑 부딪혔어요.”‘노숙자? 무슨 일은 없었겠지?’구현수는 마음이 움찔했다.“다행히 노숙자는 서연 씨한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노숙자가 떠난 후에 서연 씨가 계속 노숙자가 간 방향을 쳐다보는 거예요. 아마 십여 분 정도 움직이지도 않고 지켜봤을 거예요.”‘놀라서 그랬나?’구현수의 뇌리를 가장 먼저 스친 생각이었다. 하지만 강서연과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몇몇 건달들이 문 앞에서 그녀를 희롱했을 땐 나무 막대기를 들고 달려들기도 했었다.그리고 지난번 식사 자리가 끝난 후 배경원이 그녀에게 딴마음을 품고 있다고 오해했을 때도 운전기사의 목을 조르고 차에서 뛰어내린 바람에 하마터면 목숨까지 잃을 뻔했다.이토록 용감하고 강한 여자가 고작 노숙자 때문
사진들 전부 윤문희의 사진이었다.정신 요양 병원은 다른 병원보다 조금 특별했다. 환자 대부분이 면역력이 낮아 환자 가족들이 외부 세균이나 독감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걸 막기 위해 요즘 규정을 새로 수정했다.환자 가족은 한 달에 한 번 면회가 가능했고 나머지 시간에는 요양원에서 전문가가 직접 보살핀다고 한다.강서연은 더는 전처럼 언제든지 어머니를 볼 수 없게 되었다. 하여 신석훈은 시간이 여유로울 때마다 그녀 어머니의 사진을 종종 찍어 요양원에서 잘 지낸다고 알려주곤 했다.“아주머니 잘 지내고 계세요.”신석훈이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아주머니를 돌보는 간호사가 그러는데 요즘 대화할 때나 야외 활동을 할 때나 보통 사람과 다를 바가 없대요. 저도 아주머니 차트도 보고 담당 의사한테 물어봤는데 요즘 복용하는 약도 절반 줄었대요.”“정말이에요?”강서연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소식이 없었다.신석훈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하지만 전 그냥 이쪽에 잠깐 배우러 온 의사라 직권이 별로 없어서 아주머니를 자주 보러 가진 못해요. 안 그러면 서연 씨도 아주머니 상황을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텐데 말이죠.”“그런 말씀 말아요.”강서연이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저는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심 의사님, 정말 너무 고마워요.”“별말씀을요.”신석훈이 입술을 적셨다.“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전데요.”“저한테 고맙다고요?”신석훈이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더니 웃으며 말했다.“저 요즘 우정 씨랑 자주 데이트도 하고 그랬어요... 하하, 서연 씨가 저에 대한 좋은 얘기 많이 해준 거 맞죠? 고마워요, 서연 씨!”강서연은 진심으로 기뻤고 또 임우정이 행복하길 바랐다. 하지만 임우정이 왜 그녀에게 솔직하게 얘기하지 않은 건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그녀는 잠깐 침묵하다가 이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건 다 신 의사님의 정성이죠. 우정 언니가 신 의사님의 진심에 감동한 거예요.”“만약 서연 씨가 지난번 여행을 계획하지 않았더라면 저랑 우정 씨도 이렇
“와, 대박이에요, 대박!”신석훈이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여느 관중들 못지않게 경기를 관람하는 내내 기뻐 어쩔 줄을 모르는 건 물론이고 목청 높이 응원하기도 했다.“그렇지! 훅을 날리란 말이야... 그래!”현장의 환호성이 귀청이 떨어질 만큼 쩌렁쩌렁했다. 또다시 구현수의 제자가 경기 승리를 거두었다.“서연 씨, 오늘 경기 모두 현수 씨의 제자들이 이긴다면 상금도 엄청 많이 받겠네요?”그의 질문에 강서연은 웃음을 터뜨렸다.“왜 그래요.”임우정은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그럼 석훈 씨도 업종 바꿀래요? 의사 말고 복싱 코치할래요?”“그것도 나름 괜찮은 생각이에요!”신석훈이 주변을 쭉 둘러보았다.“관중들 좀 봐봐요. 다들 티켓을 구매하고 온 사람들이잖아요. 복싱 선수는 지든 이기든 출전 수당이 있으니까, 코치는 당연히 더 많이 받겠죠.”“석훈 씨, 요즘 돈독이 올랐어요?”임우정이 휘둥그레진 두 눈으로 물으니, 신석훈이 일부러 한숨을 내쉬었다.“어휴, 돈독이 안 오르면 어떻게 장가가요.”“뭐라고요?”신석훈은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세게 저었다. 임우정도 웃으며 그를 때리려다가 갑자기 동작을 멈추었다.강서연은 그녀의 안색이 확 굳은 걸 바로 알아챘다.“언니, 왜 그래요?”임우정은 아무 말 없이 그저 한곳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녀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지면서 몸도 부들부들 떨었다.강서연은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링과 멀지 않은 곳에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는데 인파 속을 뚫고 비상구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우람한 체구에 뒷모습만 봐도 엄청 살벌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가슴이 움찔한 그녀는 임우정의 표정을 보자마자 뭔가 깨달은 듯했다...그때 임우정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어디 가요?”강서연도 따라나섰다. 임우정은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황급히 그 사람을 뒤쫓아갔다. 두 사람은 불빛이 어두컴컴한 복도를 지나 경기장의 백스테이지로 왔다.강서연이 숨을 헐떡이며 무슨 일이냐고 물으
“저기요, 지금 뭐 하는 거예요!”강서연이 소리를 지르며 남편 앞을 막아섰다.“난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남자의 두 눈에 경멸이 가득했다.“당신 남편한테 물어봐. 예전에 어떻게 날 깍듯하게 모셨는지... 하하, 내가 재떨이가 필요할 때면 두 손으로 받쳐 들곤 했어. 쟤 손바닥이 내 재떨이였거든.”“당신...”“이봐, 당신이 좋은 남자한테 시집간 줄 알았어?”남자가 아래위로 훑어보는 시선에 강서연은 기분이 매우 불쾌했다.“하하, 쟤는 맨 밑바닥에 있는 양아치야. 감방에서도 맨날 무시나 당하던 사람을 뭐가 좋다고 그리 감싸는 건데?”남자가 코웃음을 쳤다.“구현수, 너 아주 여자 복이 많다?”“그만하지 못해요?”강서연도 소리를 질렀고 전혀 밀리지 않았다.“당신이 누구든 여기는 공공장소예요. 계속 내 남편한테 무리하게 굴었다간 경비원 부를 거예요!”남자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구현수, 넌 여전히 못났구나? 아직도 여자 뒤에 숨을 줄밖에 몰라?”“이게... 다 무슨 일이에요?”바로 헐레벌떡 뒤따라온 신석훈은 땀을 뻘뻘 흘리며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들을 쳐다보았다.임우정 걱정에 그녀 옆에 다가갔다. 그런데 채 다가가기도 전에 임우정이 옆으로 슬쩍 피하더니 일부러 그와 거리를 유지했다.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신석훈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그때 그 남자가 코웃음을 치더니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강서연은 너무도 화가 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구현수의 몸에, 담뱃재에 덴 자국은 없는지 자세히 살펴보니 다행히 다친 데는 없었다.임우정은 넋이라도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남자가 나가자, 그녀의 시선도 따라 움직였다. 잠시 후,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남자가 나간 방향으로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우정 씨...”신석훈은 그런 그녀를 말리지 못했다. 마음이 뭔가에 세게 부딪힌 것처럼 찢어질 듯이 아파 말을 잇지 못했다....임우정은 체육장 문 앞까지 쫓아갔다.멀리서부터 고급 자동차 십여 대가 천천히 달려오고 있는 걸 보았다. 수십 명
조금 전에 만난 구현수는 예전과 사뭇 달랐다. 전에 감방에 있을 땐 맨날 얻어맞기만 하던 구현수였는데 아까는 어찌나 날카롭고 싸늘한지 그 역시도 움찔했다.‘게다가 결혼까지 해서 와이프도 있어? 하하, 멀쩡한 여자라면 피해도 모자랄 판에, 누가 걔한테 시집가겠어!’“조사할 때 조심해. 새어나가지 않게.”육경섭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 모금 깊게 빨아들였다.“형, 구현수 와이프랑 임우정 씨가 가까운 사이인 것 같던데...”“걔 와이프까지 조사해!”육경섭의 눈빛이 흉악스럽기 그지없었다.“대체 어떤 여장부인지, 두 부부가 무슨 꿍꿍이인 건지 잘 알아봐야겠어!”...저녁에 집으로 돌아온 후 강서연은 구현수가 씻을 목욕물을 받아서 따끈따끈한 물에 몸을 담그라고 했다. 그리고 그녀는 욕조 옆에 웅크리고 앉아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었다.구현수가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힘들게 안 주물러도 돼. 가서 일찍 쉬어. 씻고 금방 들어갈게.”“하나도 안 힘들어요.”강서연은 그를 보며 계속 고집스럽게 마사지해 주었다.그런데 구현수의 낯빛이 살짝 변했다. 마사지하지 말라고 한 건 꾹꾹 누르는 힘이 마사지가 아니라 유혹이었기 때문이다. 섬섬옥수로 마치 마법이라도 부리는 듯 그의 몸을 터치할 때마다 저도 모르게 흥분되었다...구현수는 숨을 깊게 들이쉰 후 고개를 옆으로 돌려 그녀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녀의 작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코끝에 땀방울이 맺혔다. 잔머리가 자연스럽게 내려와 귀밑에 붙은 모습이 너무도 귀여워 당장이라도 욕조 안으로 끌어들이고 싶었다.구현수가 씩 웃으며 그녀의 손목을 잡으려던 그때 강서연의 한마디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다른 생각 하지 말아요. 나 오늘은 안 돼요.”강서연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계속 팔 마사지를 해주었다. 순간 김이 샌 구현수는 욕조 안에서 잔뜩 풀이 죽은 모습으로 마사지를 받았다.“남자들 머릿속에는 그 생각밖에 없어요?”구현수가 생각에 잠겼다.‘난 다른 남자랑 달라. 네 앞에서만 이런다고.’그녀의 말이
그는 아무 말 없이 그저 거친 숨만 몰아쉬었다. 진동음과 함께 메일이 도착하자 그는 바로 자료를 확인했다.역시 최연준의 예상대로 육경섭과 진짜 구현수 사이, 과거에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게 맞았다.“연준 도련님.”방한서가 계속 말을 이었다.“육경섭은 18살에 특수 상해죄로 감옥에 들어가 10년 형을 선고받았는데 모범수가 되어서 2년 적게 살고 가석방되었어요. 요 2년 동안 강주 일대에서 조폭 패거리를 관리하면서 돈도 많이 벌었더라고요. 그런데 소문에는 육경섭이 지금 이 자리에 앉을 수 있었던 건 몇몇 두목 사이를 이간질하고 몰래 뒤에서 처리해서 조폭 두목이 됐대요. 지금 육경섭 밑에 적지 않은 술집이 있다고 하는데 그건 다 간판일 뿐이고 사실은 불법 밀거래를 하고 있답니다.”구현수가 어두운 목소리로 물었다.“예전에, 감방에 있을 때는 어땠는데?”방한서가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말을 이었다.“감방에 있을 땐 그래도 나름 두목이었어요. 죄수들도 여러 등급으로 나뉘는데 육경섭처럼 사람을 죽이고 다치게 해서 들어온 죄수는 1등급이라 다른 죄수들이 함부로 대하지 못했대요. 그리고 구현수 같은 강간범은 가장 무시당하는 죄수래요.”“뭐?”최연준은 그가 빌려 쓴 신분의 구현수 인생이 이럴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그냥 패싸움이나 하고 다니는 건달이었다며?”방한서가 씁쓸하게 웃었다.“도련님, 일반 건달이었다면 감방을 그렇게 여러 번이나 갔다 왔겠어요?”최연준은 머리가 지끈거려 미간을 문질렀다.“구현수는 상습범이에요. 강간당한 여자 중에 가장 어린 나이가 16살 밖에 안 된대요...”최연준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가 다시 내뱉었다.‘더러운 인간!’이런 인간은 육경섭뿐만 아니라 최연준도 혐오하긴 마찬가지였다.구현수가 이미 죽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도련님, 육경섭이라는 사람 최대한 멀리하세요. 그 사람 지금 세력이 최상과는 비할 바가 안 되지만 그래도 조폭 쪽이라 우리랑은 아예 달라요. 혹시라도...”“응. 나도 알아.”그는 방한서
최군형은 방금 다 먹은 닭 날개 꼬치를 들고 최군성을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꼬치를 던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엄마가 항상 옳다니까. 넌 정말...”최군성은 당황스러워하며 물었다.“뭐가?”최군형은 이를 악물며 한 마디로 대답했다.“유난이야!”그 말을 내뱉고는 최지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최군성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어리둥절했다. 멀찍이서 바라보니 저쪽은 꽤 북적거리고 있었다. 최군성의 내면 깊은 곳에서 ‘흥겨운 분위기를 즐기는 본능’이 슬며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최군성은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스케치북을 펴고 빠르게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다른 사람들은 대충 윤곽만 그린 반면, 특정 인물을 그릴 때만큼은 세심하게 한 획 한 획 공들여 그려내어 풍경 속에서도 돋보이게 했다....모든 일이 마무리되었고 이제 남은 건 최지용과 백인서의 결혼식이었다.최군형도 두 사람의 결혼을 돕고 싶어 최근 며칠 동안 집에 머물며 부모님과 함께 세심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지용이와 인서는 둘 다 조용한 걸 좋아하니, 웅장한 것보다는 소박하고 아기자기한 결혼식이 더 잘 어울릴 것 같구나.”최연준은 상자에서 온갖 보물들을 꺼내며 결혼 선물로 줄 것을 고르고 있었다. 그중 강서연은 분홍빛 진주 세트를 한눈에 알아보고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이게 딱이겠네! 인서에게 정말 잘 어울릴 거야.”“엄마.”최군형은 살짝 놀라며 말했다.“그건 외할아버지께서 엄마에게 주신 거잖아요. 남양 주변 해역에서만 나는 진주라면서요.”“맞아, 그런데...”강서연은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말했다.“분홍색은 젊고 사랑스러운 느낌이잖아. 이제는 엄마한테 조금 안 어울릴지도 모르겠어.”“누가 그래!”최연준은 즉각 반박하며 손을 뻗어 진주 세트를 집어 들려 했다. 그러자 강서연은 그의 손등을 톡 치며 진주를 되찾아왔다.“인서에게 줄 거니까 당신은 끼어들지 말아요!”“우리 다른 선물을 하자고! 이건 당신이 간직해야 할 물건이야!”두 사람은 한동안 실랑이를 벌였
강소아가 손짓하자 최지용은 더는 망설이지 않고 백인서에게로 달려갔다.“이제 딸을 보러 가야겠네요!”강소아가 웃으며 말했다.“저 대신... 인서 좀 돌봐줄 수 있을까요?”최지용은 그 말에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아까는 주저하며 다가가지 못했던 이유가 있었다. 바로 주변에 권욱과 강소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사람은 백인서의 오빠였고 다른 한 사람은 그녀의 절친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섣불리 다가가면 괜히 이상하게 보일까 봐 망설였다.최지용이 어깨를 펴고 당당히 백인서의 어깨에 손을 얹으려는 순간, 누군가 그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뭐 해요?”최지용은 깜짝 놀랐다.“너야 말고 뭐해?”권욱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감히 내 눈앞에서 내 동생한테 손대는데 어떻게 보고만 있어?”“...”최지용은 당황해서 말을 잃었다.생각해 보면 두 사람은 처음 만난 순간부터 뭔가 삐걱거렸던 것 같았다. 서로 영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그땐 권욱이 백인서의 오빠라는 사실을 몰랐기에 오히려 잠재적 경쟁 상대로 여기기도 했었다.그리고 지금... 더욱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이 되어버렸다.“쓸데없이 귀찮게 하지 말고 물러나!”권욱은 두 사람 사이에 서서 최지용을 흘겨보며 말했다.“동생과 나에겐 나눌 얘기가 산더미처럼 쌓였으니 방해하지 마!”“할 얘기가 뭐가 그렇게 많은데요?”“예를 들면... 인서가 권씨 가문에서 맡게 될 직책 같은 거?”“그나저나!”최지용은 그제야 떠오른 듯 고개를 치며 말했다.“아까 권욱 씨 입으로 직접 말했어요. 최상 그룹과 권오 그룹이 협력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권씨 가문이 진정성을 보여주기 위해 동생을 우리 최씨 집안에 시집보내겠다고요!”“내가 그런 말을 했었나?”권욱은 태연하게 모른 척하며 말을 돌렸다.“내가 무슨 말을 했었는지 기억이 안 나네.”“저기요, 권욱 씨!”두 남자가 티격태격하는 사이, 백인서는 살짝 뒤로 물러나 두 사람의 시야에서 벗어났다.백인서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잔잔히 미소 지었다. 과거에는
손님들이 웅성거리며 비명이 들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백인서?”배윤아가 일부러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큰 소리를 질러?”“아니야... 난 백인서가 아니야!”백시연은 목이 쉬도록 외치며 갑자기 강소아를 돌아보았다.“말해봐! 아까 다 알고 있었던 거잖아? 내가 백인서가 아니라는 걸! 모두가 알 수 있게 똑똑히 말하라고!”“인서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강소아는 담담하면서도 비웃는 표정을 지으며 차분히 백시연의 손을 밀어냈다.“혹시 술이라도 마신 거야? 취한 것 같아.”“강소아 씨!”백시연은 분노에 치를 떨며 외쳤다.강소아는 백시연의 손을 잡고 안쓰럽다는 듯이 바라보며 말했다.“인서야, 우린 자매잖아. 여기서 소란스러운 모습 보이지 말자. 오늘은 어쨌든 육씨 가문의 중요한 날이기도 하고 내 딸도 여기 있어... 그러니까, 제발 진정해 줘.”“아니야...”“인서야!”“아니라고! 아니라고!”백시연은 두 손으로 귀를 막고 한 발짝씩 뒤로 물러섰다.“난 백인서가 아니야! 몇 번을 말해야 믿을 거야?”배윤아는 피식 웃으며 백시연의 팔짱을 끼고 태연히 말했다.“어머, 백인서. 왜 그래? 백인서가 아니면, 왜 백인서 얼굴을 하고 있는 건데? 그런데... 굳이 너와 백인서의 다른 점을 꼽으라면... 손목에 그림이 있다는 거?”“비켜!”백시연은 배윤아를 거칠게 밀어내고 다급히 무대를 향해 뛰어갔다.백인서는 고요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마침내 기다리던 이 순간이 왔다.백인서는 천천히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눈앞의 백시연을 바라보았지만,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눈앞의 이 사람은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지옥에서 온 악마처럼 보였다.백인서는 문득 생각했다. 어쩌면 백시연은 진짜 악마일지도 모른다고. 사람은 누구나 두 가지 얼굴을 지니고 있다. 한쪽은 천사, 다른 한쪽은 악마. 그리고 자신과 백시연 같은 쌍둥이의 운명은 그런 인간의 본성을 극대화해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가면은 순금으로 빚어졌고 가장자리에는 보석이 촘촘히 박혀 조명이 닿을 때마다 눈 부신 빛을 흩뿌렸다.백시연은 그 자리에 선 채 몸이 굳어버렸다.“이... 이럴 수가!”그 사이, 백인서는 이미 무대 위로 올라가 권욱 옆에 서 있었다.권욱은 이어서 말했다.“이분이 바로 제 이복동생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늘 제 동생을 걱정하며 꼭 찾아달라고 당부하셨죠. 이제야 동생을 찾게 되었습니다!”권욱은 백인서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의 눈빛 속에는 진심 어린 애정과 따스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솔직히 말씀드리면, 처음엔 동생의 출생에 대해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죠. 우리는 결국 한 가족입니다. 동생을 찾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동생이 그동안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요... 우리 권씨 가문이 제 동생에게 너무 많은 빚을 졌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하늘의 뜻일지도 모릅니다. 동생의 존재는 제 딸의 목숨을 구하기도 했으니까요. 그래서 이분은 제 동생일 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의 은인이기도 합니다!”객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오고 몇몇은 감동에 겨워 눈가를 붉혔다.하지만 백시연의 머릿속은 텅 비어 있었다.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동생이란 말인가? 그리고 왜 저 여자도 가면을 쓰고 있는 걸까?분명 백인서는 종수가 지하실에 가둬뒀고 곧 처리될 운명이 아니었던가.“그리고 이어서 발표하겠습니다!”권욱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권씨 가문의 재산 중 절반을, 이 세상 유일한 동생에게 넘기겠습니다!”“뭐... 뭐라고?”백시연의 온몸은 떨림으로 굳어졌고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갔다.“아니야... 이건 아니야!”“뭐가 아니야?”강소아가 일부러 물었다.“인서야, 어디 아파?”“그게....”“권 대표는 네 직장 상사잖아? 상사가 가족을 찾은 거니 축하해줘야지!”백시연은 차가운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강소아는 낮게 웃음을 흘리며 다른 이들에게 들리지 않게 백시연의 귀에 속삭였다.“그렇게 백인서의 자리가
“그게... 무슨 뜻이에요?”백시연은 침착함을 가장하며 입을 열었지만, 권욱의 눈빛을 똑바로 마주치지 못했다.“이 카드가 제 거 아니면 누구 건데요?”“난 그런 말 한 적은 없는데?”권욱의 입가에는 여유로운 미소가 번졌다.“그냥 문득 우리 아내도 이런 비슷한 카드를 몇 장 가지고 있던 게 떠올랐을 뿐이야. 카드 색깔도 이런 파란색이었고 뒷면에는 대나무 무늬의 홀로그램이 새겨져 있었어. 조씨 가문은 학문을 중시하는 전통을 지닌 집안이라 대나무처럼 강인하고 꿋꿋한 식물을 특별히 아낀다고 하더군. 한번 뒤집어 확인해 볼래?”백시연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가 이내 창백해졌고 손은 카드 위에서 더욱 굳어졌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백시연은 강소아를 찾아갔다.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약속했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면서 묘안석이 그렇게 비싼 줄 몰라서 서둘러 나오느라 준비가 부족해 지금은 이 카드밖에 없다고 둘러댔다.그러고는 억지로 친근한 미소를 띠며 애써 밝은 표정을 지었다.“소아 언니, 우리 자매처럼 친한 사이잖아요. 언니 딸은 곧 제 딸이나 다름없죠! 가원이에게 쓰는 돈이라면 하나도 아깝지 않아요!”강소아는 미소를 머금고 백시연의 손에서 카드를 슬쩍 가져가며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정말? 고마워! 나중에 가원이가 크면 널 두 번째 어머니로 생각할 거야.”백시연의 얼굴 근육이 떨렸지만 억지로 미소를 유지하며 애써 태연한 척했다.“인서야.”강소아는 다정한 눈빛으로 백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요즘 권욱의 공익 프로젝트를 도맡아 관리하고 있다면서? 잘한다는 칭찬이 자자하더라. 몇 번이나 넌 정말 유능한 관리형 인재라고 말했어.”“아... 그래요?”백시연은 속으로 긴장하며 애써 태연한 척했다.“그럼!”강소아가 웃으며 말했다.“그래서 앞으로도 너한테 정말 잘해줄 생각이야.”그 말을 듣자 백시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10억 원을 써서 강소아의 호의를 얻은 거라면 나쁘지 않은 거래라는 생각이 들었다.“소아 아가씨
연회장 한편에서 백시연은 마침내 잠시 자리를 빠져나갈 기회를 잡았다. 화장실에 간다고 둘러대고는 한적한 구석에 숨어 종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무언가 해답을 찾고 싶었다.긴 신호음 끝에야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백시연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왜 이렇게 늦게 받아요?”백시연은 알지 못했다. 종수가 이미 경찰차에 타고 있었고 간신히 경찰의 허락을 받아 전화를 받은 것이라는 사실을.“아저씨! 정말 급해서 전화했어요. 지금 뭐 하고 계셨어요?”종수는 억지로 미소를 짓고 나지막이 속삭였다.“시연아...”뭔가 말을 더하려던 종수는 경찰이 허리춤에 총구를 겨누는 바람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됐어요, 됐다고요!”백시연은 짜증을 내며 말을 끊었다.“딱 한 가지만 물을게요... 아까 소아 아가씨가 저한테 10억 원짜리 선물을 요구했는데, 그거 줘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10억?”“네!”상황을 모르는 백시연은 초조한 듯 말을 더 이어갔다.“그 재수 없는 여자가 과거에 강소아와 무슨 약속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오늘 강소아가 저를 보자마자 자기 딸이 말하기 시작했다면서 선물을 요구하더라고요. 뭐였더라... 묘안석이라고 했던가? 어쨌든 그게 10억 원짜리래요!”종수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상황을 단번에 파악했다. 그건 강소아가 원하는 게 아니라 조순영을 대신해 요구한 것이라는 사실을.세상은 언제나 공평했다. 무엇을 얻었다면 그 대가는 반드시 같은 무게로 돌아오게 마련이었다.종수는 지친 듯 눈을 감고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아저씨? 종수 아저씨!”백시연은 초조한 목소리로 외쳤다.“뭐라도 말 좀 해주세요! 줘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시연아, 이제 너도 어른이야. 이런 일은 네가 직접 판단해야 해.”“제가 알아서 할 수 있었으면, 아저씨께 묻겠어요?”백시연은 이마를 찡그리며 투덜거렸다. 오늘의 종수는 어딘가 낯설고 이상했다.“솔직히... 전 주고 싶지 않아요. 그런 비싼 걸 고작 어린애한테 준다
“뭐라고요? 10억 원이요?”백시연은 깜짝 놀라서 외쳤다.강소아는 슬쩍 백시연을 바라보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왜 그래? 고작 10억 가지고. 게다가 가원이에게 큰 선물을 주겠다고 네가 먼저 약속한 거잖아. 혹시 후회라도 하는 거야?”“그럴 리가!”배윤아가 옆으로 걸어오며 백시연의 어깨를 힘차게 두드렸다.“우리 인서는 분명히 선물을 줄 거야, 그렇지? 너희 둘 사이에 보석 하나쯤은 아무것도 아니잖아.”백시연의 얼굴이 단단히 굳어졌고 입술이 굳게 닫혔다.10억? 조순영에게서 받은 카드에는 고작 10억 원뿐이었다.백인서가 이때까지 이렇게 호화로운 생활을 하면서 이 정도 돈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 걸까?그래서 강소아가 그렇게 말한 것일까?“어머, 저 사람은 육 아가씨와 친하다던 백인서 아니야?”그때, 근처에 있던 여배우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방금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었어?”“예전에... 둘이 약속했나 봐, 백인서가 육 아가씨의 딸에게 선물을 주기로. 그런데 지금은 마음이 바뀐 것 같아!”“정말? 풉! 상류층 자매라는 것도 결국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건가 봐! 백인서는 육 아가씨와 둘도 없는 사이처럼 보였는데. 육 아가씨가 어디를 가든 따라다녔잖아... 이제는 최씨 가문의 아들과 친해지니까, 가식적인 행동도 하기 싫어졌나 봐.”“그 선물이 10억 원짜리라고 하던데... 역시 두 사람 우정은 10억 원도 안 되는 거였어!”백시연의 얼굴은 점점 더 붉게 물들어갔다. 뒤돌아 그들에게 따지려던 찰나, 강소아가 재빠르게 백시연의 손목을 붙잡았다.“됐어, 인서야.”강소아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저 사람들은 평소에도 입만 살았어. 나중에 제대로 혼내 줄 거야.”“그래야죠, 저 사람들은 정섭 엔터테인먼트 소속 연예인이잖아요. 제대로 가르쳐야 해요!”백시연은 화를 내며 말했다.“소아 언니, 저 사람들이 이런 자리에 나온 건 정섭 엔터테인먼트를 대표해서이기도 하지만 결국 언니를 대표하는 것이기도 하잖아요. 저렇게 뒤에서
권욱과 조순영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벅찬 기쁨에 눈물이 터져 나왔고 이내 서로를 끌어안은 채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권 대표님, 사모님, 정말 큰 경사입니다!”의사는 골수 검사 결과를 들고 환히 웃으며 말했다.“드디어 아가씨를 살릴 수 있게 됐습니다!”“맞아요, 정말 기쁜 일이네요.”최지용이 권욱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한심하긴, 그만 울어요!”권욱은 흐느끼면서도 반박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네 딸이 아픈 게 아니니, 넌 당연히... 당연히 이 고통을 알 리가 없지!”최지용은 기가 차 웃으며 권욱의 등을 두 번 세게 두드렸다.백인서는 마음 한편의 큰 짐을 덜어낸 듯 병실 안에 있는 권온유를 바라보며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그나저나.”조순영이 문득 입을 열었다.“백시연의 골수 결과는 어떻게 됐나요?”“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나왔습니다.”의사가 고개를 저었다.“대부분의 지표는 일치했지만 몇 가지 중요한 항목이 맞지 않아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정말 신기한 인연이네요.”최지용이 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쌍둥이라고 해도 신체의 세포가 다를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하네요.”한 명은 강인하고 선량했고 다른 한 명은 어리석고 악랄했다.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자매라도 서로 다른 개성과 운명을 가질 수밖에 없다. 누구도 타인의 성격과 운명을 그대로 복제할 수는 없는 법이다.“그러게 말이야.”권욱은 생각에 잠기며 말했다.“다른 쌍둥이였다는 걸 알게 됐으니 이제 모든 진실을 밝힐 때가 된 것 같네.”...축하 연회 날, 손님들로 붐비는 연회장은 떠들썩하고 활기가 넘쳤다. 오성에서 유명한 대가문은 물론, 연예계의 반 이상이 모인 듯했다.정섭 엔터테인먼트는 업계에서 명성이 자자했기에 대상 수상 경력이 있는 배우들조차 강소아의 초대를 거절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연회장에 들어선 백시연은 평소 TV에서만 보던 유명 여배우들이 서로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광경에 기가 죽고 말았다.백시연은
차 안에서 백인서는 멍하니 창밖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함께 앉아 있던 두 남자는 서로를 힐끔거리기만 할 뿐,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조금 전 나눈 대화로 머릿속이 복잡해진 백인서는 갑작스레 쏟아진 진실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이 권씨 가문의 사생아라니.“네 어머니와 우리 아버지가 꽤 가까운 사이였던 모양이야.”“두 사람 사이에 주고받은 물건이 있었어. 바로 회중시계인데, 그걸 백시연이 가지고 온 거지.”“인서야, 너와 백시연이 쌍둥이 자매란 거 알고 있었어?”백인서는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머리가 깨질 듯 욱신거렸다.어머니가 이렇게 많은 진실을 감추고 있었을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인서야?”최지용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백인서의 손을 잡았다.그러자 앞좌석에 있던 권욱이 뒤를 돌아보며 싸늘한 눈빛으로 최지용을 쏘아보았다.“놔라!”“뭐요?”권욱은 입을 삐죽이며 최지용이 꼭 잡은 백인서의 손을 가리켰다.참 이상했다. 평소에는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매형이 된 순간부터 그가 갑자기 거슬리기 시작했다.“인서는 좀 쉬어야 해!”권욱은 찡그리며 말했다.“손은 왜 자꾸 붙잡고 있는 거야?”최지용은 순간 멍해서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권욱을 쳐다보았다.“무슨 상관이에요?”“난 인서 오빠야! 당연히 내가 상관해야 할 일이지.”“웃기지 좀 마세요!”“너...”“그만 좀 싸울래요?”백인서가 뒤돌아 두 사람을 힐끔 쳐다봤다.머릿속이 이미 복잡할 대로 복잡한데 이 두 사람은 백인서를 편히 둘 생각이 없는 듯했다.최지용과 권욱은 서로를 노려보며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눈싸움을 벌였다.“온유는 아직 병원에 있어요?”백인서가 갑자기 물었다.“응...”“지금 당장 병원으로 가요!”“뭐라고?”권욱은 순간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백인서는 다소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진짜 동생이라면 온유 고모가 되는 거잖아요. 아직 적합한 골수를 찾지 못했다면서요? 제가 한번 해볼게요!”권욱은 잠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