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여행하는 거 현수 씨 아이디어 아니죠?”신석훈은 그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맞아요. 강서연 아이디어예요.”구현수는 낮게 말했다.“서연이가 석훈 씨와 우정 씨가 잘되기를 바라요. 그래서 같이 여행 가자고 제안했죠. 둘이 얘기를 많이 나눴으면 해서.”“서연 씨가 애썼네요.”신석훈은 웃으며 주위를 살폈다.“이곳 정말 좋네요. 그런데 좀 이상해요.”“왜요?”“내가 찾아봤는데 민박집이 엄청 유명하던데. 오기 전에 사람들로 붐빌 거로 생각했는데 우리밖에 없네요? 주말 아니라도 너무 조용하지 않아요?”구현수는 가볍게 기침을 두 번 했다. 오기 전에 그는 이곳을 비워두게 했고 당연히 사람이 보일 리가 없었다.“하하, 보아하니 여기 경영 제대로 못 해서 망하는 거 아닐까 싶네요.”말문이 막힌 구현수는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뒤집었다.“사람이 많은 게 좋아요?”신석훈는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사람은 그래도 떠들썩한 데가 좋은가 봐요. 하하. 밥 먹으러 가도 가게가 사람이 적으면 나는 절대로 안 들어가요, 핫한 데 가서 줄을 설지라도.”구현수는 어이없어하며 대답했다.“칠성급 호텔도 사람이 적은데, 아무나 먹을 수가 없잖아요?”“허허, 이 사람이 ...”신석훈은 말문이 막혀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앞전에 밤낮없이 보살펴 목숨을 구해줬었건만 사람 민망하게 말이다.“둘이 뒤에서 뭐 하기에 그렇게 천천히 와요?”앞에서 강서연의 달달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구현수가 바라보니 강서연이 그를 향해 힘차게 손 흔들고 있었다. 강서연과 임우정이 서 있는데 뭔가 다른 사람이 더 있는 것 같았다.구현수는 눈빛이 바로 변하더니 경각을 높였다.‘이미 이곳을 통으로 빌려서 사람이 들어왔을 리가 없는데 이게 웬일이지?’“현수 씨, 빨리 와요!”강서연은 그의 팔을 붙잡았다.“여기 할머니가 손금을 봐준대요!”구현수는 흠칫했다.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절이 있기는 했다. 일부 스님이나 도사들이 여기를 지나다니는 것은 정상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그 말에 강서연의 머리가 하얘졌다.당혹스러워하던 그녀가 할머니한테 물으려다 곁의 구현수를 보고 깜짝 놀랐다.얼굴에는 그늘이 드리워 있고 눈빛은 더없이 매서워서 금방이라도 폭풍우가 몰아칠 것만 같았다.강서연은 그와 깍지 끼면서 낮은 목소리로 얘기했다.“할머니도 무슨 얘기를 하시는지 인지 못 하시는 나이라...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예상 밖으로 할머니의 귀가 밝아 듣고는 헤벌쭉 웃었다.“아가씨가 마음씨가 참 좋아, 좋은 사람은 좋은 일이 따를 거야.”“할머니 고마워요.”강서연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저희 남편이 좀 과묵한 데다 부리부리한 외모 때문에 오해를 자주 받지만 그래도 더없이 자상해요.”“허, 아가씨 궁합을 보고 싶은 게지?”강서연은 연신 머리를 끄덕였다.할머니는 손금을 힐끗 보고는 천천히 주머니에서 빨간 끈 두 줄을 꺼냈다.능수능란한 손재간으로 벼 이삭 같은 매듭에 빚는 동심결마다 정갈한 방울까지 더해 맑고 쟁쟁한 소리가 났다.“이 팔찌를 손목에 착용하거라.”할머니는 한자 한자 타이르듯 말했다.“방울이 울리면 아무리 먼 곳에 떨어져 있어도 서로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을 거야.”“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미간을 찌푸린 신석훈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이런 용한 물건이면 휴대 전화도 필요 없겠네요!”어리둥절해 있던 강서연은 돌아서 환한 얼굴로 할머니를 향했다.“할머니, 남편이랑 저는 오래오래 같이 있을 거라 떨어지지 않을 거예요.”“너희 언젠가는 떨어질 거야.”순간 하얗게 질려버린 강서연은 구현수의 손을 꼭 잡았다.“하지만...”할머니는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언젠가는 둘이 꼭 행복한 날이 올 거야.”강서연은 그제야 미간이 풀렸고 작은 보조개가 얼굴에 달려있었다.구현수는 심각한 표정으로 실눈을 떠서 쳐다보고는 그녀를 끌어당겨 자리를 떴다.“허! 이 할머니가 정말!”신석훈이 끼어들어 말했다.“나이 들어서 어떻게 되신 거 아니야? 그래도 마지막 말은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그녀가 팔지를 치우려고 하자 구현수가 뺏어서 주머니에 넣었다.“당신...”“너랑 나 하나씩 갖고 있어야지. 그 할머니가 그러셨잖아. 혹시라도 서로 헤어지면 안 되니까...”“퉤퉤퉤. 헤어지는 일은 없어요!”강서연은 두려웠다. 할머니가 얘기하실 때 신경도 안 썼는데 구현수의 입에서 ‘헤어진다’ 라는 말을 들으니 특별히 예민해진 그녀였다.“바보.”낮고 허스키한 구현수의 목소리 속에는 다정함이 있었다.“헤어진다고 한들 내가 놔주지 않을 거야!”“그럼요!”강서연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서로 눈빛을 주고받은 신석훈과 임우정은 동시에 웃음이 났다.그렇게 돌아다니던 네 사람은 민박집을 찾았고 가게 점장이 직접 마중 나와 민박의 가장 고급스러운 식당으로 안내했다.식당에 발을 들이자 신석훈과 임우정은 입이 떡 벌어졌다. 여기가 정녕 말로만 듣던 반년 월급을 팔아서야 겨우 한 끼 먹을 수 있다는 의화루인가? 강서연이 여기를 어떻게 예약한 거지!“점장님. 잘못 찾아온 거 아니죠?”강서연도 의아해하며 물었다.“인터넷으로 예약할 때는 기본 세트라고...”“맞아요. 여깁니다.”점장이 공손하게 손뼉을 치자 훈련받은 웨이터들이 저마다 산해진미를 그들 앞에 대령했다.눈이 휘둥그레진 강서연은 숨죽이고 있었다.사진으로만 봐왔던 의화루의 메인 요리들이 한 상을 가득 채웠다. 이 한상차림만 해도 그녀가 충분히 빈털터리가 되고도 남을만한 가격이었다!“점장님!”그녀는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고는 말했다.“강서연 씨. 예약하신 게 기본 세트가 맞습니다. 하지만 요 며칠 저희 가게에서 민박에 주숙하신 손님 중 행운고객을 선정하여 초호화 세트로 업그레이드하는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당첨된 번호가 바로 강서연 씨의 예약 번호입니다!”“정말요?”실제로 하늘에서 떡이 떨어지는 일이 있단 말인가!신석훈과 임우정은 그 자리에서 넋이 나갔다. 두 사람은 꿈을 꾸는 것 같아 마주 보았다.“진짜로? 운이 너무 따라주잖아요!”임우정은 흥분된 목소리로 주위를 뱅
둥근 식탁에 모두가 모여앉았다.차려진 음식들은 맛과 향 그리고 색감까지 완벽하게 어우러져 정교한 사기그릇에 담겨있어 저마다 최상의 화려함을 자랑했다.풍성함에 눈이 휘둥그레진 신석훈은 약을 탔는지 의심도 없이 다급하게 먹으려고 들었다.임우정은 웃으며 말했다.“이러다 은행카드 비밀번호도 순순히 불러드리겠어요?”“마음대로 하라고 그래요! 어차피 은행카드에 얼마 없기도 하고 이 한상차림 살 돈도 없어 다 먹으면 그만이니까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에요!”신석훈은 중얼거렸다.“역시 신 의사님이 계산이 빨라요.”“저 못지 않으면서요!”신석훈은 웃는 얼굴로 말했다.“나보다 많이 먹잖아요!”말하면서 젓가락으로 신석훈의 머리를 때리는 시늉을 했다.강서연과 구현수는 그들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에 서로를 바라보았고 눈에는 사랑스러움이 묻어있었다.“여러분. 모든 요리가 다 나왔습니다.”점장은 직원들을 불러 생선탕을 대령했다.“이건 쏘가리탕입니다. 명황산 아래 시냇물에서만 자라는 물고기는 신선하고 육질이 부드러우며 느끼하지도 않아 탕으로 드시기 제일 적합합니다.”그들은 앞에 있는 수프 그릇을 쳐다봤다.역시나 싱그럽고 향긋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쏘가리는 진하게 고아져 간이 잘되었고 복숭아 꽃잎으로 장식을 해서 로맨틱함을 한층 더했다.강서연은 습관적으로 물고기 눈알을 구현수에게 집어줬다.어릴 적 어머니가 건강하셨을 때 늘 그녀와 윤찬에게 생선요리를 해줬는데 요리가 다 되면 어머니는 항상 생선 눈알을 하나씩 나눠주곤 했다.생선 눈알은 눈을 맑게 해줘서 생선 중 가장 귀한 부위라고 어머니가 말씀해주셨다.강서연은 웃으며 구현수를 바라보았다.한쪽에서 지켜보던 임우정은 질투가 났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휴. 다른 집 남편은 사모님이 생선 눈알도 집어주면서 끔찍이 여긴다는데. 정말 선남선녀가 따로 없네. 부럽다 부러워!”“질투하세요?”신석훈이 놀려댔다.“여기 생선 많잖아요! 드시고 싶으면 집어 드시면 되죠!”볼 빨개진 강서연은 천천히 머리를 숙였다.구
“괜찮아.”훌쩍이던 그녀는 억지로 웃으며 어깨의 손을 토닥거렸다.“우정 언니.”강서연은 무언가를 말하려 머뭇거리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은 얼른 쉬어요. 무슨 일 있으면 혼자 담아두지 말고 내가 다 들어줄 테니까 나한테 얘기하고요. 얘기하고 나면 훨씬 나아져요. 딱히 얘기하고 싶지 않다면 나도 더 안 물을게요.”“서연아. 나...”임우정은 말하려다 다시 삼켰다.한참 후에야 다시 천천히 말을 꺼냈다.“나 석훈 씨한테 비하면 많이 부족한 거 같아.”“네?”“내가 부족한 것 같다고.”임우정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나... 전에 그 사람이랑...”더는 얘기하지 않았지만 강서연은 무슨 일인지 눈치로 알 수가 있었다.임우정은 늘 활발하고 털털한 성격이지만 남녀 사이 문제에서는 진지한 모습에 강서연도 조금 놀랐다.하지만 얼마나 사랑했기에 여자가 자신을 허락할 수 있단 말인가?강서연은 흠칫 놀라 그녀의 손을 잡아 꾹꾹 눌렀다.“우정 언니는 생각이 너무 많아요.”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동안의 일들이 잘못한 것도 아니고 숨겨야 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 사람과 정말로 사랑해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때 그 일만 없었더라면 아직까지도 같이 있었을 거잖아요. 맞죠?”임우정은 조용히 입을 꾹 다물고 한마디도 없었다.“우정 언니. 왜서 신 의사님을 안 받아줬는지 이해가 돼요. 어울리지 않는 게 아니고 언니 마음속에 그 사람 말고 다른 사람이 들어올 자리가 없는 거죠.”“서연아...”임우정은 울먹이며 말했다.강서연은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아기 안아주듯 흐느끼고 있는 그녀를 뒤에서 꼭 안아주었다.“솔직히 난 그렇게 큰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지금 때가 언제인데 이 정도 과거야 누구나 있는 거고 이젠 이런 건 일도 아니라고요. 신석훈 씨는 신경도 안쓸걸요?”“정말?”임우정은 웃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강서연이 이런 얘기를 할 줄은 몰랐다.“물론이죠.”강서연은 이어 말했다.“현수 씨가 그러는데 여자가 순결을 지켜
그녀는 문뜩 모래밭을 걸어보고 싶었다.강서연은 머리카락을 넘기며 슬리퍼를 신고 바닷가를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환한 미소가 가시질 않았다....구현수는 온밤 잠을 설쳤다.이제는 강서연이 곁에 없으면 잠에 들기 어려웠다. 하지만 강서연과 임우정이 절친 사이라 두 사람의 수다에 끼어들어 방해하면 속 좁은 사람으로 몰릴까 봐 말도 못 꺼냈었다.그래서 어젯밤에는 침대서 여기저기 뒹굴며 화풀이를 했었다. 눈은 방울보다 더 커져서는 속으로 수백 번이고 신석훈을 욕했었다.이번 여행은 누구를 위한 여행이란 말인가?!하지만 신석훈은 임우정과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를 이토록 손쉽게 저버렸으니 말이다. 신석훈의 코를 고는 소리가 어찌나 쩌렁쩌렁한지 옆방에서도 또렷하게 들렸다!구현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날이 슬슬 밝아지자 잠깐 눈붙여 안정을 취하려 했다.그 순간 방의 전화가 울렸다.“셋째 도련님. 서연 씨가 혼자 밖으로 나갔습니다.”“뭐?”그는 깜짝 놀랐다.“어디로 갔는데?”“아침 일찍 바닷가로 향해 저희 쪽에서 따라붙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가 저희 개인 바닷가가 아닌 공공구역이라 아직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습니다만 발견될까 봐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있습니다.”구현수는 실눈을 떴다.‘바닷가?’거기 경치가 좋지만 최씨 가문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었다. 현재 그곳은 여행객들도 거의 없는 데다 만에 하나 사고라도 난다면...구현수는 경계태세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바짝 따라붙어. 혹시라도 문제 생기면 책임을 단단히 묻겠어!”전화기 너머로 전전긍긍하다 다급하게 수긍했다.바닷가에 온 강서연은 슬리퍼를 한 쪽에 벗어두고 맨발로 부드러운 모래밭을 걷고 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바닷냄새를 몰고 머리카락을 스쳤다. 멀리에서는 바닷새가 날아다녔고 수평선에서 해가 서서히 떠올라 수면을 벌겋게 물들였다.강서연이 도시에서는 감상하기 어려운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다 갑자기 휴대 전화를 잊고 못 챙겨온 걸 한없이 후회했다. 이
“당... 당신.”한순간 한 줄기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하얘졌다!무언가를 눈치챈 듯한 부랑자는 그녀를 힐긋 쳐다보고는 머리를 흔들며 입으로 중얼대더니 쓰레기 꾸러미를 들고 냅다 도망갔다.강서연은 뒤따라 쫓아갔지만 몇 걸음 못 가 얼굴이 하얗게 질려 거친 숨을 내쉬었다.그 얼굴...너무나도 구현수와 닮아 있었다.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린 강서연은 피가 거꾸로 솟구치고 손발이 차갑게 저렸다. 어떻게 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은 채로 그녀는 이미 민박집 앞에 와 있었다. 앞에는 구현수가 나와 있었고 어깨에 손을 얹자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치며 멍하니 바라보았다.“무슨 일이야?”구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상냥하게 물었다.그제야 정신이 든 강서연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그녀의 눈앞에 또렷한 턱선과 깔끔한 이목구비가 나타났고, 농염한 남성미가 내뿜어져 왔다. 이런 현수 씨를 어찌 부랑자와 비교하겠는가!방금은 실성을 했는지 헛것을 본 게 분명했다. 강서연은 자책하면서 저절로 머리를 세게 내리쳤다.“도대체 왜 그래?”구현수는 방금보다 더 상냥하게 물었다.강서연은 그와 깍지를 낀 채로 입술을 삐죽거리고 있었다.그녀의 손은 놀랍도록 차가워 구현수는 되레 걱정되었다.“아침부터 어디로 간 거야? 사면이 바다인 데다 바람도 세고 오성은 점심에는 덥지만. 아침저녁에는 기온이 떨어져. 이렇게 얇게 입고 나가더니 감기 걸린 거 아니야?”커다란 손이 그녀의 이마에 닿자 강서연은 애교 섞인 말투로 잡아 내렸다.“나 괜찮아요. 걱정 말아요!”구현수는 생각에 잠긴 눈빛으로 유심히 그녀를 바라보았다.강서연은 갑자기 방금의 웃음거리가 생각나 입꼬리가 올라가다가 피식 웃었다.이 웃음이 구현수의 눈에는 온 세상을 환하게 만들어주는 것만 같았다.“여보.”그녀의 어깨를 끌어안고는 매력적인 저음으로 말했다.“명색이 신혼여행인데 어제는 왜 날 독수공방하게 만들었을까.”“그래서. 기분 나빴어요?”그녀는 작은 여우처럼 올려다보았다.“그럴 리가.”그는 실눈을 뜨며
“정말이에요?”강서연이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이벤트를 한 건 그 사람들인데 우리만 운이 좋았네요!”“그러니까 말이야.”구현수가 덤덤하게 웃었다. 그녀가 즐거워하는 모습만 봐도 마음이 흐뭇했다.“현수 씨랑 결혼한 후로 내 운이 수직 상승한 것 같아요. 모든 일이 다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순조롭게 잘 풀린다니까요.”그녀는 발뒤꿈치를 들고 그의 볼을 두 손으로 잡더니 쪽하고 입맞춤했다.“현수 씨는 정말 복덩어리예요!”구현수는 잠깐 멈칫하다가 그녀의 코끝을 톡 치며 가볍게 웃었다.“먼저 가서 먹어.”그가 나지막이 속삭였다.“화장실 갔다가 바로 갈게.”“알았어요.”강서연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그럼 나 먼저 우정 언니랑 심 의사님 찾으러 갈게요. 얼른 와야 해요.”“알았어.”강서연이 폴짝폴짝 뛰며 방을 나간 순간 구현수의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는 테이블 위의 전화기로 번호를 꾹꾹 눌러 부하에게 전화를 걸었다.“오늘 아침 서연이한테 무슨 일 있었어?”“서연 씨는 계속 바닷가에서 놀았고 저희는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거든요. 그런데 돌아가는 길에 길거리 쓰레기통 그쪽에서...”부하가 말을 얼버무렸고 구현수가 버럭 화를 냈다.“말해!”“거기서 노숙자랑 부딪혔어요.”‘노숙자? 무슨 일은 없었겠지?’구현수는 마음이 움찔했다.“다행히 노숙자는 서연 씨한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노숙자가 떠난 후에 서연 씨가 계속 노숙자가 간 방향을 쳐다보는 거예요. 아마 십여 분 정도 움직이지도 않고 지켜봤을 거예요.”‘놀라서 그랬나?’구현수의 뇌리를 가장 먼저 스친 생각이었다. 하지만 강서연과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몇몇 건달들이 문 앞에서 그녀를 희롱했을 땐 나무 막대기를 들고 달려들기도 했었다.그리고 지난번 식사 자리가 끝난 후 배경원이 그녀에게 딴마음을 품고 있다고 오해했을 때도 운전기사의 목을 조르고 차에서 뛰어내린 바람에 하마터면 목숨까지 잃을 뻔했다.이토록 용감하고 강한 여자가 고작 노숙자 때문
최군형은 방금 다 먹은 닭 날개 꼬치를 들고 최군성을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꼬치를 던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엄마가 항상 옳다니까. 넌 정말...”최군성은 당황스러워하며 물었다.“뭐가?”최군형은 이를 악물며 한 마디로 대답했다.“유난이야!”그 말을 내뱉고는 최지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최군성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어리둥절했다. 멀찍이서 바라보니 저쪽은 꽤 북적거리고 있었다. 최군성의 내면 깊은 곳에서 ‘흥겨운 분위기를 즐기는 본능’이 슬며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최군성은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스케치북을 펴고 빠르게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다른 사람들은 대충 윤곽만 그린 반면, 특정 인물을 그릴 때만큼은 세심하게 한 획 한 획 공들여 그려내어 풍경 속에서도 돋보이게 했다....모든 일이 마무리되었고 이제 남은 건 최지용과 백인서의 결혼식이었다.최군형도 두 사람의 결혼을 돕고 싶어 최근 며칠 동안 집에 머물며 부모님과 함께 세심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지용이와 인서는 둘 다 조용한 걸 좋아하니, 웅장한 것보다는 소박하고 아기자기한 결혼식이 더 잘 어울릴 것 같구나.”최연준은 상자에서 온갖 보물들을 꺼내며 결혼 선물로 줄 것을 고르고 있었다. 그중 강서연은 분홍빛 진주 세트를 한눈에 알아보고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이게 딱이겠네! 인서에게 정말 잘 어울릴 거야.”“엄마.”최군형은 살짝 놀라며 말했다.“그건 외할아버지께서 엄마에게 주신 거잖아요. 남양 주변 해역에서만 나는 진주라면서요.”“맞아, 그런데...”강서연은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말했다.“분홍색은 젊고 사랑스러운 느낌이잖아. 이제는 엄마한테 조금 안 어울릴지도 모르겠어.”“누가 그래!”최연준은 즉각 반박하며 손을 뻗어 진주 세트를 집어 들려 했다. 그러자 강서연은 그의 손등을 톡 치며 진주를 되찾아왔다.“인서에게 줄 거니까 당신은 끼어들지 말아요!”“우리 다른 선물을 하자고! 이건 당신이 간직해야 할 물건이야!”두 사람은 한동안 실랑이를 벌였
강소아가 손짓하자 최지용은 더는 망설이지 않고 백인서에게로 달려갔다.“이제 딸을 보러 가야겠네요!”강소아가 웃으며 말했다.“저 대신... 인서 좀 돌봐줄 수 있을까요?”최지용은 그 말에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아까는 주저하며 다가가지 못했던 이유가 있었다. 바로 주변에 권욱과 강소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사람은 백인서의 오빠였고 다른 한 사람은 그녀의 절친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섣불리 다가가면 괜히 이상하게 보일까 봐 망설였다.최지용이 어깨를 펴고 당당히 백인서의 어깨에 손을 얹으려는 순간, 누군가 그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뭐 해요?”최지용은 깜짝 놀랐다.“너야 말고 뭐해?”권욱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감히 내 눈앞에서 내 동생한테 손대는데 어떻게 보고만 있어?”“...”최지용은 당황해서 말을 잃었다.생각해 보면 두 사람은 처음 만난 순간부터 뭔가 삐걱거렸던 것 같았다. 서로 영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그땐 권욱이 백인서의 오빠라는 사실을 몰랐기에 오히려 잠재적 경쟁 상대로 여기기도 했었다.그리고 지금... 더욱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이 되어버렸다.“쓸데없이 귀찮게 하지 말고 물러나!”권욱은 두 사람 사이에 서서 최지용을 흘겨보며 말했다.“동생과 나에겐 나눌 얘기가 산더미처럼 쌓였으니 방해하지 마!”“할 얘기가 뭐가 그렇게 많은데요?”“예를 들면... 인서가 권씨 가문에서 맡게 될 직책 같은 거?”“그나저나!”최지용은 그제야 떠오른 듯 고개를 치며 말했다.“아까 권욱 씨 입으로 직접 말했어요. 최상 그룹과 권오 그룹이 협력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권씨 가문이 진정성을 보여주기 위해 동생을 우리 최씨 집안에 시집보내겠다고요!”“내가 그런 말을 했었나?”권욱은 태연하게 모른 척하며 말을 돌렸다.“내가 무슨 말을 했었는지 기억이 안 나네.”“저기요, 권욱 씨!”두 남자가 티격태격하는 사이, 백인서는 살짝 뒤로 물러나 두 사람의 시야에서 벗어났다.백인서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잔잔히 미소 지었다. 과거에는
손님들이 웅성거리며 비명이 들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백인서?”배윤아가 일부러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큰 소리를 질러?”“아니야... 난 백인서가 아니야!”백시연은 목이 쉬도록 외치며 갑자기 강소아를 돌아보았다.“말해봐! 아까 다 알고 있었던 거잖아? 내가 백인서가 아니라는 걸! 모두가 알 수 있게 똑똑히 말하라고!”“인서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강소아는 담담하면서도 비웃는 표정을 지으며 차분히 백시연의 손을 밀어냈다.“혹시 술이라도 마신 거야? 취한 것 같아.”“강소아 씨!”백시연은 분노에 치를 떨며 외쳤다.강소아는 백시연의 손을 잡고 안쓰럽다는 듯이 바라보며 말했다.“인서야, 우린 자매잖아. 여기서 소란스러운 모습 보이지 말자. 오늘은 어쨌든 육씨 가문의 중요한 날이기도 하고 내 딸도 여기 있어... 그러니까, 제발 진정해 줘.”“아니야...”“인서야!”“아니라고! 아니라고!”백시연은 두 손으로 귀를 막고 한 발짝씩 뒤로 물러섰다.“난 백인서가 아니야! 몇 번을 말해야 믿을 거야?”배윤아는 피식 웃으며 백시연의 팔짱을 끼고 태연히 말했다.“어머, 백인서. 왜 그래? 백인서가 아니면, 왜 백인서 얼굴을 하고 있는 건데? 그런데... 굳이 너와 백인서의 다른 점을 꼽으라면... 손목에 그림이 있다는 거?”“비켜!”백시연은 배윤아를 거칠게 밀어내고 다급히 무대를 향해 뛰어갔다.백인서는 고요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마침내 기다리던 이 순간이 왔다.백인서는 천천히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눈앞의 백시연을 바라보았지만,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눈앞의 이 사람은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지옥에서 온 악마처럼 보였다.백인서는 문득 생각했다. 어쩌면 백시연은 진짜 악마일지도 모른다고. 사람은 누구나 두 가지 얼굴을 지니고 있다. 한쪽은 천사, 다른 한쪽은 악마. 그리고 자신과 백시연 같은 쌍둥이의 운명은 그런 인간의 본성을 극대화해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가면은 순금으로 빚어졌고 가장자리에는 보석이 촘촘히 박혀 조명이 닿을 때마다 눈 부신 빛을 흩뿌렸다.백시연은 그 자리에 선 채 몸이 굳어버렸다.“이... 이럴 수가!”그 사이, 백인서는 이미 무대 위로 올라가 권욱 옆에 서 있었다.권욱은 이어서 말했다.“이분이 바로 제 이복동생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늘 제 동생을 걱정하며 꼭 찾아달라고 당부하셨죠. 이제야 동생을 찾게 되었습니다!”권욱은 백인서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의 눈빛 속에는 진심 어린 애정과 따스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솔직히 말씀드리면, 처음엔 동생의 출생에 대해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죠. 우리는 결국 한 가족입니다. 동생을 찾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동생이 그동안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요... 우리 권씨 가문이 제 동생에게 너무 많은 빚을 졌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하늘의 뜻일지도 모릅니다. 동생의 존재는 제 딸의 목숨을 구하기도 했으니까요. 그래서 이분은 제 동생일 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의 은인이기도 합니다!”객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오고 몇몇은 감동에 겨워 눈가를 붉혔다.하지만 백시연의 머릿속은 텅 비어 있었다.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동생이란 말인가? 그리고 왜 저 여자도 가면을 쓰고 있는 걸까?분명 백인서는 종수가 지하실에 가둬뒀고 곧 처리될 운명이 아니었던가.“그리고 이어서 발표하겠습니다!”권욱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권씨 가문의 재산 중 절반을, 이 세상 유일한 동생에게 넘기겠습니다!”“뭐... 뭐라고?”백시연의 온몸은 떨림으로 굳어졌고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갔다.“아니야... 이건 아니야!”“뭐가 아니야?”강소아가 일부러 물었다.“인서야, 어디 아파?”“그게....”“권 대표는 네 직장 상사잖아? 상사가 가족을 찾은 거니 축하해줘야지!”백시연은 차가운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강소아는 낮게 웃음을 흘리며 다른 이들에게 들리지 않게 백시연의 귀에 속삭였다.“그렇게 백인서의 자리가
“그게... 무슨 뜻이에요?”백시연은 침착함을 가장하며 입을 열었지만, 권욱의 눈빛을 똑바로 마주치지 못했다.“이 카드가 제 거 아니면 누구 건데요?”“난 그런 말 한 적은 없는데?”권욱의 입가에는 여유로운 미소가 번졌다.“그냥 문득 우리 아내도 이런 비슷한 카드를 몇 장 가지고 있던 게 떠올랐을 뿐이야. 카드 색깔도 이런 파란색이었고 뒷면에는 대나무 무늬의 홀로그램이 새겨져 있었어. 조씨 가문은 학문을 중시하는 전통을 지닌 집안이라 대나무처럼 강인하고 꿋꿋한 식물을 특별히 아낀다고 하더군. 한번 뒤집어 확인해 볼래?”백시연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가 이내 창백해졌고 손은 카드 위에서 더욱 굳어졌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백시연은 강소아를 찾아갔다.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약속했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면서 묘안석이 그렇게 비싼 줄 몰라서 서둘러 나오느라 준비가 부족해 지금은 이 카드밖에 없다고 둘러댔다.그러고는 억지로 친근한 미소를 띠며 애써 밝은 표정을 지었다.“소아 언니, 우리 자매처럼 친한 사이잖아요. 언니 딸은 곧 제 딸이나 다름없죠! 가원이에게 쓰는 돈이라면 하나도 아깝지 않아요!”강소아는 미소를 머금고 백시연의 손에서 카드를 슬쩍 가져가며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정말? 고마워! 나중에 가원이가 크면 널 두 번째 어머니로 생각할 거야.”백시연의 얼굴 근육이 떨렸지만 억지로 미소를 유지하며 애써 태연한 척했다.“인서야.”강소아는 다정한 눈빛으로 백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요즘 권욱의 공익 프로젝트를 도맡아 관리하고 있다면서? 잘한다는 칭찬이 자자하더라. 몇 번이나 넌 정말 유능한 관리형 인재라고 말했어.”“아... 그래요?”백시연은 속으로 긴장하며 애써 태연한 척했다.“그럼!”강소아가 웃으며 말했다.“그래서 앞으로도 너한테 정말 잘해줄 생각이야.”그 말을 듣자 백시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10억 원을 써서 강소아의 호의를 얻은 거라면 나쁘지 않은 거래라는 생각이 들었다.“소아 아가씨
연회장 한편에서 백시연은 마침내 잠시 자리를 빠져나갈 기회를 잡았다. 화장실에 간다고 둘러대고는 한적한 구석에 숨어 종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무언가 해답을 찾고 싶었다.긴 신호음 끝에야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백시연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왜 이렇게 늦게 받아요?”백시연은 알지 못했다. 종수가 이미 경찰차에 타고 있었고 간신히 경찰의 허락을 받아 전화를 받은 것이라는 사실을.“아저씨! 정말 급해서 전화했어요. 지금 뭐 하고 계셨어요?”종수는 억지로 미소를 짓고 나지막이 속삭였다.“시연아...”뭔가 말을 더하려던 종수는 경찰이 허리춤에 총구를 겨누는 바람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됐어요, 됐다고요!”백시연은 짜증을 내며 말을 끊었다.“딱 한 가지만 물을게요... 아까 소아 아가씨가 저한테 10억 원짜리 선물을 요구했는데, 그거 줘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10억?”“네!”상황을 모르는 백시연은 초조한 듯 말을 더 이어갔다.“그 재수 없는 여자가 과거에 강소아와 무슨 약속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오늘 강소아가 저를 보자마자 자기 딸이 말하기 시작했다면서 선물을 요구하더라고요. 뭐였더라... 묘안석이라고 했던가? 어쨌든 그게 10억 원짜리래요!”종수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상황을 단번에 파악했다. 그건 강소아가 원하는 게 아니라 조순영을 대신해 요구한 것이라는 사실을.세상은 언제나 공평했다. 무엇을 얻었다면 그 대가는 반드시 같은 무게로 돌아오게 마련이었다.종수는 지친 듯 눈을 감고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아저씨? 종수 아저씨!”백시연은 초조한 목소리로 외쳤다.“뭐라도 말 좀 해주세요! 줘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시연아, 이제 너도 어른이야. 이런 일은 네가 직접 판단해야 해.”“제가 알아서 할 수 있었으면, 아저씨께 묻겠어요?”백시연은 이마를 찡그리며 투덜거렸다. 오늘의 종수는 어딘가 낯설고 이상했다.“솔직히... 전 주고 싶지 않아요. 그런 비싼 걸 고작 어린애한테 준다
“뭐라고요? 10억 원이요?”백시연은 깜짝 놀라서 외쳤다.강소아는 슬쩍 백시연을 바라보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왜 그래? 고작 10억 가지고. 게다가 가원이에게 큰 선물을 주겠다고 네가 먼저 약속한 거잖아. 혹시 후회라도 하는 거야?”“그럴 리가!”배윤아가 옆으로 걸어오며 백시연의 어깨를 힘차게 두드렸다.“우리 인서는 분명히 선물을 줄 거야, 그렇지? 너희 둘 사이에 보석 하나쯤은 아무것도 아니잖아.”백시연의 얼굴이 단단히 굳어졌고 입술이 굳게 닫혔다.10억? 조순영에게서 받은 카드에는 고작 10억 원뿐이었다.백인서가 이때까지 이렇게 호화로운 생활을 하면서 이 정도 돈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 걸까?그래서 강소아가 그렇게 말한 것일까?“어머, 저 사람은 육 아가씨와 친하다던 백인서 아니야?”그때, 근처에 있던 여배우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방금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었어?”“예전에... 둘이 약속했나 봐, 백인서가 육 아가씨의 딸에게 선물을 주기로. 그런데 지금은 마음이 바뀐 것 같아!”“정말? 풉! 상류층 자매라는 것도 결국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건가 봐! 백인서는 육 아가씨와 둘도 없는 사이처럼 보였는데. 육 아가씨가 어디를 가든 따라다녔잖아... 이제는 최씨 가문의 아들과 친해지니까, 가식적인 행동도 하기 싫어졌나 봐.”“그 선물이 10억 원짜리라고 하던데... 역시 두 사람 우정은 10억 원도 안 되는 거였어!”백시연의 얼굴은 점점 더 붉게 물들어갔다. 뒤돌아 그들에게 따지려던 찰나, 강소아가 재빠르게 백시연의 손목을 붙잡았다.“됐어, 인서야.”강소아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저 사람들은 평소에도 입만 살았어. 나중에 제대로 혼내 줄 거야.”“그래야죠, 저 사람들은 정섭 엔터테인먼트 소속 연예인이잖아요. 제대로 가르쳐야 해요!”백시연은 화를 내며 말했다.“소아 언니, 저 사람들이 이런 자리에 나온 건 정섭 엔터테인먼트를 대표해서이기도 하지만 결국 언니를 대표하는 것이기도 하잖아요. 저렇게 뒤에서
권욱과 조순영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벅찬 기쁨에 눈물이 터져 나왔고 이내 서로를 끌어안은 채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권 대표님, 사모님, 정말 큰 경사입니다!”의사는 골수 검사 결과를 들고 환히 웃으며 말했다.“드디어 아가씨를 살릴 수 있게 됐습니다!”“맞아요, 정말 기쁜 일이네요.”최지용이 권욱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한심하긴, 그만 울어요!”권욱은 흐느끼면서도 반박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네 딸이 아픈 게 아니니, 넌 당연히... 당연히 이 고통을 알 리가 없지!”최지용은 기가 차 웃으며 권욱의 등을 두 번 세게 두드렸다.백인서는 마음 한편의 큰 짐을 덜어낸 듯 병실 안에 있는 권온유를 바라보며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그나저나.”조순영이 문득 입을 열었다.“백시연의 골수 결과는 어떻게 됐나요?”“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나왔습니다.”의사가 고개를 저었다.“대부분의 지표는 일치했지만 몇 가지 중요한 항목이 맞지 않아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정말 신기한 인연이네요.”최지용이 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쌍둥이라고 해도 신체의 세포가 다를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하네요.”한 명은 강인하고 선량했고 다른 한 명은 어리석고 악랄했다.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자매라도 서로 다른 개성과 운명을 가질 수밖에 없다. 누구도 타인의 성격과 운명을 그대로 복제할 수는 없는 법이다.“그러게 말이야.”권욱은 생각에 잠기며 말했다.“다른 쌍둥이였다는 걸 알게 됐으니 이제 모든 진실을 밝힐 때가 된 것 같네.”...축하 연회 날, 손님들로 붐비는 연회장은 떠들썩하고 활기가 넘쳤다. 오성에서 유명한 대가문은 물론, 연예계의 반 이상이 모인 듯했다.정섭 엔터테인먼트는 업계에서 명성이 자자했기에 대상 수상 경력이 있는 배우들조차 강소아의 초대를 거절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연회장에 들어선 백시연은 평소 TV에서만 보던 유명 여배우들이 서로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광경에 기가 죽고 말았다.백시연은
차 안에서 백인서는 멍하니 창밖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함께 앉아 있던 두 남자는 서로를 힐끔거리기만 할 뿐,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조금 전 나눈 대화로 머릿속이 복잡해진 백인서는 갑작스레 쏟아진 진실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이 권씨 가문의 사생아라니.“네 어머니와 우리 아버지가 꽤 가까운 사이였던 모양이야.”“두 사람 사이에 주고받은 물건이 있었어. 바로 회중시계인데, 그걸 백시연이 가지고 온 거지.”“인서야, 너와 백시연이 쌍둥이 자매란 거 알고 있었어?”백인서는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머리가 깨질 듯 욱신거렸다.어머니가 이렇게 많은 진실을 감추고 있었을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인서야?”최지용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백인서의 손을 잡았다.그러자 앞좌석에 있던 권욱이 뒤를 돌아보며 싸늘한 눈빛으로 최지용을 쏘아보았다.“놔라!”“뭐요?”권욱은 입을 삐죽이며 최지용이 꼭 잡은 백인서의 손을 가리켰다.참 이상했다. 평소에는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매형이 된 순간부터 그가 갑자기 거슬리기 시작했다.“인서는 좀 쉬어야 해!”권욱은 찡그리며 말했다.“손은 왜 자꾸 붙잡고 있는 거야?”최지용은 순간 멍해서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권욱을 쳐다보았다.“무슨 상관이에요?”“난 인서 오빠야! 당연히 내가 상관해야 할 일이지.”“웃기지 좀 마세요!”“너...”“그만 좀 싸울래요?”백인서가 뒤돌아 두 사람을 힐끔 쳐다봤다.머릿속이 이미 복잡할 대로 복잡한데 이 두 사람은 백인서를 편히 둘 생각이 없는 듯했다.최지용과 권욱은 서로를 노려보며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눈싸움을 벌였다.“온유는 아직 병원에 있어요?”백인서가 갑자기 물었다.“응...”“지금 당장 병원으로 가요!”“뭐라고?”권욱은 순간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백인서는 다소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진짜 동생이라면 온유 고모가 되는 거잖아요. 아직 적합한 골수를 찾지 못했다면서요? 제가 한번 해볼게요!”권욱은 잠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