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임진숙의 말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진료실에서 한 여자아이가 불쑥 나왔다. 아이의 목소리에 의기양양하던 진숙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윤아는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눈에 봐도 그의 딸 조보아임을 알 수 있었다. 보아는 손에 검사표를 들고 있었고 얼굴은 유난히 창백했다. 언뜻 보기에도 건강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방금까지도 콧대를 세우며 윤아를 조롱하던 진숙은 재빨리 몸을 돌려 아이를 데리고 가버렸다. 뭐에 쫓기기라도 하는듯한 그녀의 행동에서 윤아는 뭔갈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러나 남의 사적인 일에 별 관심이 없는 윤아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잠시 후, 딸은 어디에 두고 왔는지 홀로 다시 돌아온 임진숙. 그녀는 윤아의 앞으로 다가와 잔뜩 구겨진 표정으로 말했다.“윤아 아가씨, 넌 똑똑한 사람이니 알겠지. 쓸데없는 말들은 입에 올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윤아는 그가 다시 돌아올걸 예상하고 있었다. 윤아는 입꼬리를 가볍게 올린 채 여유롭게 머리를 쓸어넘기며 말했다.“아줌마, 제가 똑똑한 사람일지 아닐지는 제 기분에 따라 바뀌는 거라서요. 누가 제 심기를 건드린다면 저도 제 정신상태가 어떻게 될지 몰라요. 정신이 홱 돌아버려서 무슨 말을 뱉을지는 저도 모르는 일이죠.”이 병원에 오는 사람들이 대부분 뭘 하려는 건지 둘 다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윤아의 말에 임진숙은 표정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임윤아. 너 감히 날 협박해?”“제가 어떻게 감히 협박하겠어요. 그저 거래를 하는 거죠.”분노로 치를 떠는 임진숙.“네 일이 우리 보아보다 훨씬 커.”“그런가요?”윤아는 코웃음을 쳤다.“확실해요? 제 기억이 맞았다면 당신 딸은 아직 대학교도 가지 않았죠?”윤아의 말 한마디에 임진숙은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윤아의 저 여유만만한 얼굴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 임진숙은 안 그래도 모든 걸 다 가진 이선아가 못마땅하던 차에 큰 건수 하나 잡아 진씨 가문을 풍비박산 낼 생각이었으나 하필이면 그때 딸이 나오는 바람에
그들은 이미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기에 윤아는 더는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간식을 한 아름 사 들고 돌아오는 현아.“윤아야. 샌드위치랑 우유 그리고 사탕들도 샀어. 여기 매점엔 뭐가 많이 없더라고 이거라도 얼른 먹어.”현아는 포장을 일일이 까주며 말했다.“얼른 먹어. 배고프겠다.”윤아는 그런 현아를 보며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을 느꼈다.“고마워.”어찌 보면 현아가 윤아의 친엄마보다 더 마음 써주는 사람이었다.“고맙긴 뭘!”역시나 이번에도 현아가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우리 사이에 고맙다는 말이 필요해? 고마운 거로 따지면 내가 너보다 더하지. 그때 네가 아니었으면 난 대학교도 못 다녔어.”윤아는 말없이 그저 웃었다. 윤아와 현아는 고등학교 때 처음 알게 돼 대학교까지 같은 곳에 붙게 된 끈끈한 인연이었다.그러다 어느 방학 때 현아의 아버지가 도박에 손을 대면서 현아의 집은 순식간에 빚더미에 앉게 되었다. 별수 없이 휴학하고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던 현아를 도와준 사람이 바로 윤아였다. 그는 현아의 사정을 알게 된 후 그녀를 대신해 빚을 갚아주고 직접 현아를 학교까지 데려다줬었다.오랜만에 옛 생각에 잠기기는 현아도 마찬가지였다. 한참을 추억에 잠겨있다고 말을 떼는 현아.“그거 알아? 나 그때 엄청 고마웠어. 네가 없었으면 난 지금쯤 어디에 있을지 몰라. 진작에 빚쟁이들에게 쫓겨 죽어버렸을지도 모르지. 넌 내 절친을 넘어 내 은인이야. 평생 잊지 못할.”현아의 고백에 기쁘기도 잠시, 그의 말을 들은 윤아는 저도 모르게 진수현을 떠올렸다. ‘그도 현아처럼 강소영을 평생 잊지 못할까?’이런 생각이 들자 윤아는 현아에게 생뚱맞은 질문을 했다.“내가 만약 남자라면 너 나한테 시집올 거야?”그 말의 속내를 알 리 없는 현아는 단번에 대답했다.“당연하지 자기야. 네가 남자였다면 난 너한테 흠뻑 빠져있었을걸? 아쉽게 여자라 절친밖에 못 하지만.”윤아는 그 말에 고개를 떨궜다.‘그렇구나. 진수현도 그럼 그렇게 생각
윤아는 입맛이 전혀 없었지만 현아의 닦달에 별수 없이 꾸역꾸역 우유와 샌드위치를 입에 넣었다. 현아는 윤아가 더는 못 먹겠다 하자 더는 강요하지 않고 주섬주섬 물건들을 정리했다.“어때? 좀 나아졌어?”“응.”현아는 목을 가다듬고 슬쩍 물었다.“그럼 오늘은 일단 돌아갈까?”윤아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현아는 그런 윤아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돌아가자.”“그래.”윤아는 지금 안개 속을 거니는 듯 혼란스러웠다. 누군가가 나타나 그녀를 어딘가로 끌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어느 쪽이든 말이다.윤아는 몸을 일으켜 현아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마침 코너를 돌던 그때, 윤아는 주변이 소란스러운 것을 느꼈다.“하지만 엄마, 전 그 사람을 좋아해요.”한 여자아이가 애처로운 목소리로 말했다.”닥쳐!”그녀의 말에 대답하는 건 한 여자의 냉랭한 목소리였다.“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내가 널 그렇게 가르쳤니? 넌 그놈한테 홀딱 넘어간 거야. 아직도 모르겠어?”“엄마...”“이번 일이 지나면 너 다시는 그놈과 만날 생각 하지 말아라. 그딴 놈은 어차피 너와 어울리지 않았어. 누가 알게 되기라도 하면 앞으로 네 혼삿길은 는 거야.”여자의 호통 속에서 아이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저 유리알 같은 눈물이 두 볼을 타고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윤아는 그 모습을 보다 고개를 돌렸다. 현아도 잠시 눈길을 주더니 이내 시선을 돌렸다. 병원을 빠져나와서야 입을 떼는 현아.“아까 그 여자애 말이야. 아직 학생 같던데 참, 아직 어려서 그런가. 참 어리석네.”윤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거리가 멀었지만, 윤아는 그 아이가 조금 전에 봤던 조보아임을 알아봤다.그때, 윤아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 소리에 바짝 다가오는 현아.“너 전화 오는데 혹시 진수현? 벌써 후회하는 거 아냐?”진수현이 아니다. 발신 미상의 번호였다.“누구야?”왜인지 모르게 윤아는 이 낯선 번호를 보며 불쾌한 예감이 들었다. 머뭇거리다 전화를 받은 윤아.“심윤
윤아는 진수현을 욕하는 현아에게 무어라 해명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입을 열어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해명? 일이 이 지경이 됐는데 무슨 해명이 더 필요하겠는가. 윤아는 그저 고개를 떨구고 입을 꾹 다물었다.“됐어 가지 마. 만나고 싶으면 직접 찾아오라 해. 문자로 주소 하나 보내면 네가 갈 줄 알고?”화가 머리끝까지 난 현아를 오히려 윤아가 위로해줬다.“응. 나갈 생각 없어. 화 가라앉혀.”“내가 화내는 거로 보여? 난 네가 안쓰러운 거야.”그러던 중 현아는 불현듯 뭔가 떠오른 듯 가자미눈을 하며 말했다.“강소영이 자기 친구를 시켜서 널 만나게 한 걸 보니 어지간히 급한 게 아닌가 보네. 설마 네가 낙태를 하지 않고 진수현을 빼앗으려 할까 봐 두려운 거 아니야? 쯧, 그쪽도 완전 자신 있는 건 아닌가 봐?”윤이라는 핸드폰을 가방에 넣었다. 현아가 말리지 않아도 윤아는 나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 일은 그녀와 진수현 사이의 일이지 다른 사람과는 관련이 없었다. 강소영의 친구든 강소영 본인이든.윤아는 현아와 헤어진 후 곧장 집으로 향했다. 연차가 꽤 길어 시간이 넉넉한 덕에 윤아는 요 며칠 마음을 다잡고 생각을 정리할 심산이었다. 도대체 자기가 진정 뭘 원하는지를 말이다.한 편, 시내의 한 카페,강소영은 커피를 마시다 말고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안 오는 거 아냐?”강소영의 친구가 웃으며 말했다.“올 거야. 이 일을 해결하고 싶다면 말이지. 분명 지금쯤 엄청 무서워하고 있을걸? 넌 그냥 여기에서 기다리다 거의 다 오는 것 같으면 재빨리 숨어있기만 하면 돼.”모든 건 강소영의 친구가 세운 꾀였다. 소영은 불안한 듯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물었다.“뭘 어떻게 하려고? 아마 윤아 씨도 일부러 그러려던 건 아닐 거야. 이따가 얘기할 때 너무 세게 말하진 말아줘. 보상금이 필요하다면 그것도 내가...”“소영아, 넌 너무 착해서 문제야. 뭘 일부러 그러려던 게 아니야. 임신하고 싶다는 생각을 안 했겠어? 진수현이 자
그날 밤, 진수현에게 온 윤아의 문자를 몰래 지운 후부터 강소영은 내내 불안 속에서 살았다. 문자로 말한 걸 보아 직접 말할 용기는 없었을 거라 예상하긴 했지만, 소영은 내내 마음에 걸렸다. 불안한 마음에 그날 바로 진수현을 불러내려고 했지만, 하필 그날 야근이 있어 나오지 못한다던 수현. 소영은 마음이 놓이지 않아 굳이 수현이 퇴근할 때까지 기다렸다. 친구들 모임에까지 끌고 갔었다. 술을 진탕 먹고 뻗어버린 수현. 소영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윤아와 직접 통화까지 했다. 소영은 어느새 불안함은 잊고 짜릿한 기분이 들었다. 윤아의 반응을 보아 그녀는 이미 수현에게 실망한 듯 보였고 소영은 그저 진수현이 그에게 낙태를 권유했다는 소식만 슬쩍 전하면 되었다. 그리고 적당한 보상으로 입막음을 한다면 더는 망상은 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 모든 걸 직접 할 수는 없었다. 나중에 혹시라도 수현에게 들켰다간 자기가 모든 죄명을 덮어쓸 것이 분명했다. 그리하여 소영은 은근슬쩍 친구들에게 이 소식을 흘려 자신을 대신해 모든 일을 해주길 바랐다. 예상대로 그의 친구들은 움직여줬고 이대로만 진행된다면 모든 것이 완벽했다.하지만 심윤아가 이 자리에 나오지 않을 줄이야. 소영은 생각이 많아졌다.‘대체 뭘 하려는 거지? 설마 정말 그 아이로 수현 씨를 협박하려는 건가?’소영은 비록 그 아이가 진수현의 그 무엇도 바꿀 수 없을 거라 생각하지만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해 하루라도 빨리 아이를 처리하고 싶었다. 그러다 문득 수가 떠오른 소영이 입을 뗐다.“오지 않으려 하면 우리가 찾으러 가면 되잖아?”“찾으러 가자고? 이딴 일을 벌인 여자를 뭣 하러 찾으러 가?”“그래 소영아. 이렇게 뻔뻔한 여자는 자기 발로 찾아오게 만들어야 해.”소영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어쨌거나 일은 해결해야지.”간신히 웃어 보이는 소영을 보며 친구들은 어쩔 수 없이 그의 말에 찬성했다.“그래. 우리가 찾으러 가자.”한 편, 집에 돌아간 윤아는 곧바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진수현
생각할 필요도 없다. 분명 강소영의 친구였을 테니까. 전화를 끄려고 했으나 뭔가 퍼뜩 떠올랐다.그녀는 잠시 고민하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화를 건 쪽도 마침 침묵을 유지했다.그렇게 시간이 조금 흐르자, 강소영의 목소리가 들려온다.“윤아 씨, 나 소영인데...”친구가 안 먹히니까 본인이 나서겠다는 건가?윤아는 입꼬리를 애써 올리며 대답했다.“네.”“저기, 우리 한번 만날래요?”이 말을 끝내고 소영은 그녀가 거절이라도 할까 봐 금방 말을 이었다.“주소 보내 줘요. 내가 찾아갈게요.”윤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지금 집에 있는데요.”저쪽에서는 한참 동안의 침묵이 맴돌다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그, 그게 무슨 뜻이에요?”“집에서 만나죠.”“...”또 침묵이 흐른다.“오늘 제가 좀 힘들어서요. 나가기 싫네요.”이 말을 듣자, 소영은 그제야 답했다.“알겠어요. 내가 윤아 씨 집까지 찾아갈게요.”전화를 끊은 뒤, 윤아는 갑자기 결심이 섰다. 이 아이를 낳겠다고.강소영이 왜 하필 이때 그녀를 찾아오겠는가. 진씨 집안 본가에 있다고 말했는데, 그런데도 오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이유는 아마 그 하나뿐이겠지.-강소영은 생각보다 제법 일찍 도착했다. 십오 분도 되지 않아서 도우미가 그녀에게 도착 소식을 알렸다.“알겠어요.”윤아는 카디건을 걸치고는 아래층으로 내려왔다.“아가씨, 차 드세요.”도우미가 차를 강소영 앞에 놓자, 그녀는 도우미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면서 머리를 들었는데 마침 윤아가 아래층에 내려오는 모습을 보았다.요 며칠간, 윤아는 제법 마른 것 같았다. 연하늘색 원피스에 새하얀 카디건까지 걸치니 평소보다 더 청순해 보였다.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은 투명하리만치 하얗고 언뜻 보기엔 창백한 입술에는 연한 분홍빛이 돌았는데, 아파 보이면서도 또 예뻤다.그저 한눈 쳐다봤을 뿐인데, 소영은 손가락을 몇 번이나 꼼지락거렸다.이런 여자가 매일 수현 씨 곁에 붙어있다니...생각에 잠겨있을 무렵, 도우
또 이런 말.윤아는 예전에 소영이 아주 다정하고 부드러운 사람이라 여겼다. 타인을 대할 때에도 시원시원했고 격을 갖추었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녀가 귀국한 요 며칠 동안, 소영은 이런 말을 두 번이나 했다.저번엔 수현 씨에 대해 말했고, 이번엔 집안 도우미였다.겉면으로 보기엔 그녀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것 같지만 실은 내 것이라 정정하고 있었다. 이럴 자격이 없음에도 말이다.전에 수현 씨와 사귀는 사이였으면 그나마 합당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아니었잖아? 그래서 소영이 어떤 자격으로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강소영은 전에 그녀를 도와준 적이 있었다. 그래서 윤아는 입술을 앙다문채 가슴에 얹혀있는 불편함을 가리앉히고 옅게 웃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불쾌한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는 윤아를 보니 소영은 솜뭉치에 주먹질한 듯 시원하지 않았고, 오히려 좌절감마저 들었다. 더 이상 시간을 끌어서는 안 된다고 여긴 소영은 윤아에게 웃으며 물었다.“우리 정원에 가서 얘기 좀 할까요?”이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전에 윤아가 자기 친구들을 무시하던 태도가 머릿속에 떠오르면서 살짝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얼른 목소리를 낮게 깐 채 입을 열었다.“여긴 보는 눈이 너무 많아요. 대화할 수 있는 좋은 곳이 아니에요.”윤아는 머리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말하고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만약 가능하다면 윤아는 정말 소영과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갚기 어려운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신세가 아닐지 싶다.정원,윤아는 소영을 데리고 한적하고 고요한 곳으로 갔다.소영은 주위를 둘러보며 드디어 시름을 놓았다. 여기에서 말하면 문제없을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여긴 엿듣는 사람 없겠죠?”이 말을 듣자, 윤아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머리를 흔들었다.“이곳엔 도우미들이 잘 안 와요. 정원사들은 보통 오전에 와서 물을 주거나 다듬고요.”지금은 벌써 점심시간에 가까웠다.“다행이군요.
이러면 안 되는데...윤아를 찾아오기 전, 소영은 그녀가 만만해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만약 진짜 만만했으면 임신까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소영은 앞으로 다가가 윤아 대신 봉투를 열었다.10억 원짜리 수표였다.소영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이 년간 수고했어요. 회사에서 수현 씨 많이 도왔잖아요. 그 사람도 나에게 윤아 씨 칭찬 많이 했어요. 능력도 좋고 착실히 일한다고 말이에요. ““내가 보기엔, 윤아 씨 심 씨 집안 장녀로부터 오늘처럼 되기까지 되게 힘들게 살아온 것 같아요. 이 액수는 너무 많지 않지만 내 성의니까 받아줬으면 해요. 좋아하는 것도 사고 맛있는 것도 사 먹고 그러면서 몸보신 잘 해요.”몸보신이라는 말을 입에 담을 때 소영은 윤아의 손목을 꼭 붙잡고, 손 끝으로 그녀의 손바닥을 가볍게 눌렀다.윤아는 시선을 바로잡으며 소영과 눈을 마주쳤다. 자신을 향해 머리를 끄덕이다가 안 됐다는 듯 머리를 흔들면서 한숨을 내쉬며 더는 말할 수 없다는 뜻으로 자신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는 소영을 보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어제 사무실에서 수현 씨가 그녀에게 휴가를 내어주며 소영과 같은 말을 했었다. 몸보신을 잘 해라는 뜻이었다.얼핏 보기엔 자기 자존심을 지켜주느라 이런 암시하는 방식으로 말한 듯싶었다.윤아의 분홍 빛 입술이 열렸다 닫혔다.“내가 뭐라고 말해야 하나요?”그들의 배려에 고맙다고?몸 걱정 해줘서 고맙다고? 휴가도 내주고 돈도 주면서 건강 챙기라고 암시해 줘서 고맙다고?이걸 받지 않는다면 그들의 지극한 성의를 짓밟는 격이 되겠지.순간 헛웃음이 나왔다. 혼자 고민하고 고통스러워했던 자신이 너무 바보 같아 보였다. 다른 사람들이 이미 자신이 앞으로 걸어야 할 길마저 다 정해놓은 것도 모르고......소영이 윤아의 눈에 비치는 분노를 보고 마침 입을 열려고 했을 때, 윤아가 수표를 밀어내는 것을 보았다. “윤아 씨...”돈을 안 가진다고? 왜? 소영은 잠시 당황했다.“혹시 액수가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