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할 필요도 없다. 분명 강소영의 친구였을 테니까. 전화를 끄려고 했으나 뭔가 퍼뜩 떠올랐다.그녀는 잠시 고민하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화를 건 쪽도 마침 침묵을 유지했다.그렇게 시간이 조금 흐르자, 강소영의 목소리가 들려온다.“윤아 씨, 나 소영인데...”친구가 안 먹히니까 본인이 나서겠다는 건가?윤아는 입꼬리를 애써 올리며 대답했다.“네.”“저기, 우리 한번 만날래요?”이 말을 끝내고 소영은 그녀가 거절이라도 할까 봐 금방 말을 이었다.“주소 보내 줘요. 내가 찾아갈게요.”윤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지금 집에 있는데요.”저쪽에서는 한참 동안의 침묵이 맴돌다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그, 그게 무슨 뜻이에요?”“집에서 만나죠.”“...”또 침묵이 흐른다.“오늘 제가 좀 힘들어서요. 나가기 싫네요.”이 말을 듣자, 소영은 그제야 답했다.“알겠어요. 내가 윤아 씨 집까지 찾아갈게요.”전화를 끊은 뒤, 윤아는 갑자기 결심이 섰다. 이 아이를 낳겠다고.강소영이 왜 하필 이때 그녀를 찾아오겠는가. 진씨 집안 본가에 있다고 말했는데, 그런데도 오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이유는 아마 그 하나뿐이겠지.-강소영은 생각보다 제법 일찍 도착했다. 십오 분도 되지 않아서 도우미가 그녀에게 도착 소식을 알렸다.“알겠어요.”윤아는 카디건을 걸치고는 아래층으로 내려왔다.“아가씨, 차 드세요.”도우미가 차를 강소영 앞에 놓자, 그녀는 도우미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면서 머리를 들었는데 마침 윤아가 아래층에 내려오는 모습을 보았다.요 며칠간, 윤아는 제법 마른 것 같았다. 연하늘색 원피스에 새하얀 카디건까지 걸치니 평소보다 더 청순해 보였다.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은 투명하리만치 하얗고 언뜻 보기엔 창백한 입술에는 연한 분홍빛이 돌았는데, 아파 보이면서도 또 예뻤다.그저 한눈 쳐다봤을 뿐인데, 소영은 손가락을 몇 번이나 꼼지락거렸다.이런 여자가 매일 수현 씨 곁에 붙어있다니...생각에 잠겨있을 무렵, 도우
또 이런 말.윤아는 예전에 소영이 아주 다정하고 부드러운 사람이라 여겼다. 타인을 대할 때에도 시원시원했고 격을 갖추었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녀가 귀국한 요 며칠 동안, 소영은 이런 말을 두 번이나 했다.저번엔 수현 씨에 대해 말했고, 이번엔 집안 도우미였다.겉면으로 보기엔 그녀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것 같지만 실은 내 것이라 정정하고 있었다. 이럴 자격이 없음에도 말이다.전에 수현 씨와 사귀는 사이였으면 그나마 합당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아니었잖아? 그래서 소영이 어떤 자격으로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강소영은 전에 그녀를 도와준 적이 있었다. 그래서 윤아는 입술을 앙다문채 가슴에 얹혀있는 불편함을 가리앉히고 옅게 웃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불쾌한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는 윤아를 보니 소영은 솜뭉치에 주먹질한 듯 시원하지 않았고, 오히려 좌절감마저 들었다. 더 이상 시간을 끌어서는 안 된다고 여긴 소영은 윤아에게 웃으며 물었다.“우리 정원에 가서 얘기 좀 할까요?”이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전에 윤아가 자기 친구들을 무시하던 태도가 머릿속에 떠오르면서 살짝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얼른 목소리를 낮게 깐 채 입을 열었다.“여긴 보는 눈이 너무 많아요. 대화할 수 있는 좋은 곳이 아니에요.”윤아는 머리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말하고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만약 가능하다면 윤아는 정말 소영과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갚기 어려운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신세가 아닐지 싶다.정원,윤아는 소영을 데리고 한적하고 고요한 곳으로 갔다.소영은 주위를 둘러보며 드디어 시름을 놓았다. 여기에서 말하면 문제없을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여긴 엿듣는 사람 없겠죠?”이 말을 듣자, 윤아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머리를 흔들었다.“이곳엔 도우미들이 잘 안 와요. 정원사들은 보통 오전에 와서 물을 주거나 다듬고요.”지금은 벌써 점심시간에 가까웠다.“다행이군요.
이러면 안 되는데...윤아를 찾아오기 전, 소영은 그녀가 만만해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만약 진짜 만만했으면 임신까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소영은 앞으로 다가가 윤아 대신 봉투를 열었다.10억 원짜리 수표였다.소영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이 년간 수고했어요. 회사에서 수현 씨 많이 도왔잖아요. 그 사람도 나에게 윤아 씨 칭찬 많이 했어요. 능력도 좋고 착실히 일한다고 말이에요. ““내가 보기엔, 윤아 씨 심 씨 집안 장녀로부터 오늘처럼 되기까지 되게 힘들게 살아온 것 같아요. 이 액수는 너무 많지 않지만 내 성의니까 받아줬으면 해요. 좋아하는 것도 사고 맛있는 것도 사 먹고 그러면서 몸보신 잘 해요.”몸보신이라는 말을 입에 담을 때 소영은 윤아의 손목을 꼭 붙잡고, 손 끝으로 그녀의 손바닥을 가볍게 눌렀다.윤아는 시선을 바로잡으며 소영과 눈을 마주쳤다. 자신을 향해 머리를 끄덕이다가 안 됐다는 듯 머리를 흔들면서 한숨을 내쉬며 더는 말할 수 없다는 뜻으로 자신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는 소영을 보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어제 사무실에서 수현 씨가 그녀에게 휴가를 내어주며 소영과 같은 말을 했었다. 몸보신을 잘 해라는 뜻이었다.얼핏 보기엔 자기 자존심을 지켜주느라 이런 암시하는 방식으로 말한 듯싶었다.윤아의 분홍 빛 입술이 열렸다 닫혔다.“내가 뭐라고 말해야 하나요?”그들의 배려에 고맙다고?몸 걱정 해줘서 고맙다고? 휴가도 내주고 돈도 주면서 건강 챙기라고 암시해 줘서 고맙다고?이걸 받지 않는다면 그들의 지극한 성의를 짓밟는 격이 되겠지.순간 헛웃음이 나왔다. 혼자 고민하고 고통스러워했던 자신이 너무 바보 같아 보였다. 다른 사람들이 이미 자신이 앞으로 걸어야 할 길마저 다 정해놓은 것도 모르고......소영이 윤아의 눈에 비치는 분노를 보고 마침 입을 열려고 했을 때, 윤아가 수표를 밀어내는 것을 보았다. “윤아 씨...”돈을 안 가진다고? 왜? 소영은 잠시 당황했다.“혹시 액수가
소영은 윤아가 돈을 받지 않겠다는 말을 한 후, 눈에 띄게 당황했다.귀국한 뒤, 그녀는 수현이 윤아를 대하는 태도가 미묘해졌다는 것을 발견했다.수현은 아직 윤아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모른다. 만약 그가 알게 된다면...소영도 수현이 어떤 선택을 할지 몰랐다.하지만, 그녀의 촉이 알려주기를, 수현이 이 사실을 안다면 절대 그리 쉽게 윤아를 놓지 않을 것이다.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소영은 억지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윤아 씨, 혹시 다른 사람들이 뭐라 할까 봐 두려워서 그래요?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이 돈은 내 사비라 다른 이들이 아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리고 나도 윤아 씨 걱정돼서 그래요. 어쨌든 윤아 씨 형편...”“강소영 씨.”윤아는 한숨을 쉬고는 말을 이어갔다.“우선, 걱정해 준 거 고마워요. 우리 집 망한 건 맞지만 이 몇 년간 계속 노력하고 있다 보니 예전 같진 않아도 나와...”잠시 멈칫한 윤아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을 이어갔다.“날 먹여 살리는 건 문제 없어요. 그리고 소영 씨 예전에 나 많이 도와줬잖아요. 그러니 어떻게 이 돈을 더 받겠어요.”“괜찮아요. 이건 내가 윤아 씨 주고 싶어서 그러는 거니까.”“아뇨. 정말 못 받아요.”윤아는 봉투를 다시 소영의 손에 쥐여주고는 뒤로 물러서서 그녀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이 모습을 본 소영은 순간 뭔가를 알아챘다.윤아가 그녀의 돈을 거절한 것과 아까 말하다 멈칫한 것, 명확하게 말하지는 않았으나 소영은 그 뜻을 제대로 알아들었다.‘자신과 아이를 먹여 살릴 수 있다 했어... 설마 아이를 낳겠다고?’이렇게 생각하자, 소영의 얼굴엔 핏기가 가시면서 창백하게 변했다.선한 이미지를 깨기 싫었지만 더는 입가의 웃음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소영은 서늘하게 물었다.“진심이에요?”윤아는 큰 반응을 보이는 소영을 바라보며 머리를 끄덕였다. 소영은 그녀의 결정을 바꿀 수 없었으니까.“네. 미안하게 됐어요. 소영 씨가 오기 전에 이미 마음 먹은 일이었거든요.”이
이런 마음가짐은 그녀가 아이를 낳겠다고 결심한 순간부터 시작되었다.윤아는 손을 들어 조심스레 아랫배를 만졌다. 그녀의 입가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이젠 그녀의 세상엔 또 한 명의 가족이 생기는 거였다.‘아가, 아빠 몫까지 엄마가 다 해줄게.’-어느덧 밖이 어둑어둑해졌다.물건을 정리하면서 오늘 밤 수현이 돌아올지를 고민하고 있을 때, 별장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그녀는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았다.차의 전조등이 대문을 비추는 것을 보자, 윤아는 난간에 걸친 손을 움츠렸다.진수현의 차였다.마침 잘 됐다. 윤아는 오늘 저녁에 그와 모든 얘기를 끝낼 예정이었다.결정을 내리고 그녀는 다시 방으로 돌아가 짐 정리를 했다.평소에 쇼핑을 즐기지 않아서인지 물건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정리가 빠르게 진행되리라 여겼지만 정작 정리하다 보니 참 힘들었다.여기에서 보낸 이년이란 시간 동안, 그녀의 생활과 습관은 이미 이 방 곳곳에 스며들었다. 옷장, 침대, 화장대, 세면대, 소파 심지어 티 테이블에 놓인 여러 가지 물건 그리고 선반 위의 장식품들... 이 모든 것들에 그녀의 자취가 남겨졌다.결국 윤아는 옷 몇 벌과 일용품만 간단히 챙겼다.찰칵-밖에서 문고리를 비틀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윤아는 멈칫 동작을 멈추었다. 곧이어 차분하고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윤아는 끝까지 머리를 돌리지 않았다.수현은 그녀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아마 그녀가 평생을 다 해도 갚지 못할 정도였을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수현에게 불쾌한 기색을 나타낼 수 없었다. 하지만 수현과 소영의 여러 번의 암시는 그녀를 난감하게 했다.발걸음 소리가 점점 더 다가오고 있다가 갑자기 우뚝 멈췄다.윤아는 길게 숨을 들이쉬며 감정을 억눌렀다.세상엔 반드시 직면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도망가서는 안 될 그런 것들.수현은 미간을 좁힌 채 눈앞의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는 잘못 들어온 줄 알았다. 두 개 옅은 색의 캐리어가 가지런히 침대 옆에 놓여 있었는데
수현은 그녀의 말에 머리를 맞은 듯 어안이 벙벙해졌다.정신을 차리고 윤아를 바라보니 그녀의 눈동자엔 자조와 고통이 일렁이고 있었다.너는 왜 그런 눈빛을 하고 있는 거야...그가 자세히 보기도 전에 윤아는 머리를 숙이고 계속 짐 정리를 했다. 하지만 속도는 아까보다 훨씬 빨랐고 옷도 대수 겹쳐 캐리어에 몰아넣었다.윤아가 몸을 돌리려던 순간, 수현은 윤아의 가녀린 손목을 붙잡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왜 하필 오늘에 옮기는 건데? 그렇게 급해?”그는 비아냥 섞인 어투로 말을 이어갔다.“왜? 오늘 강찬영과 함께 한 그 점심 때문에 그러나?”이 말을 듣자, 윤아는 고개를 번쩍 들고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비꼬지 마! 나랑 찬영 오빠가 어떤 사이인지 수현 씨가 제일 잘 알잖아!”윤아는 수현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 하지만 그는 더욱 세게 부여잡으면서 그녀가 조금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했다.수현의 미간이 일그러지면서 눈썹 주변으로 사나운 기운이 일었다.“내가 틀린 말 했나? 강찬영 때문이 아니라면 왜 이러는 건데?” 자기 손을 뿌리치지 못해 안달인 저 여자를 보니 알 수 없는 불쾌함이 일었다. 그의 얼굴엔 싸늘한 냉소가 퍼져나갔다.“역시, 이 년간 답답했나 봐?”윤아는 몸부림치는 것을 잠시 멈추면서 어이가 없다는 듯 수현을 바라보았다.“수현 씨, 말할 거면 제대로 해야지. 수현 씨가 이혼하자고 했잖아.”“그래.” 무표정하게 대답하는 수현.“너도 원하지 않았어? 내가 이혼 얘기 꺼내기 바쁘게 다른 남자와 점심을 함께 하지 않겠는가, 짐 정리를 하지 않겠는가. 심윤아 마음에 쏙 드는 제안 했네, 내가.”“...”진수현이 소영에 대한 감정을 알고 있지만 않았어도 수현이 질투한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 이상, 어떻게 밥 한 끼 먹은 걸 가지고 저렇게 상상한단 말인가.수현이 이렇게 화내는 이유는 아마 남자 특유의 자존심이 도발되었다고 생각해서일 것이다. 어쨌든 두 사람은 정식으로 이혼하지 않았고, 그의 아내란 여자
그녀는 조금의 미련도 없어 보였다. 지금 방을 따로 쓰겠다고 할 때처럼, 담담했다.윤아의 손목을 잡고 있던 손힘이 점점 풀리고 있다. 손이 자유를 회복하자, 윤아는 곧 몸을 돌려 물건을 마저 정리했다.그런 윤아를 보는 수현은 가슴이 답답해 났고 화가 치밀었다. 그는 손을 뻗어 넥타이를 잡아당기며 성가시다는 듯 입을 열었다.“지금 각방 쓰면 도우미들이 금방 눈치챌 거야.”이 점에 대해, 윤아도 고려해 보았다.“상관없어. 어차피 우리 곧 이혼할 거잖아.”“그러면 할머니는?”“할머님께서는 눈치채지 못할 거야.”“그걸 어떻게 장담하는데. 집안의 도우미 중 할머니 사람이 없을 것 같아?”이 말을 듣자, 윤아는 동작을 멈추었다.이건 전혀 생각해 보지 못했던 일이었다.한참이 지나서야 윤아는 입을 열었다.“그렇다면 할머님께서 수술 마치신 다음에 다시 얘기해.”너무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어땠든 할머님 건강이 우선이었으니까.이 말을 들은 수현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너 되게 억울해 보이네.”“괜찮아. 이렇게 사는 거 벌써 이년이나 됐잖아.”“그래? 이 년 동안 억울했다는 소린가?”“......”처음이었다. 수현이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온 것은.윤아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수현과 더는 말 섞기 싫다는 태도를 보였다.아마 이성적인 대화는 불가능했을 거다.두 사람 다 그런 대화를 유지할 수 없었으니까. 어차피 아무 것도 바꿀 수 없을 텐데 더 말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수현은 잠시 윤아를 조용히 바라보다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조롱하듯 말했다.“왜 그런 표정 짓고 있는 건데. 네가 날 만나고 싶지 않다면 앞으론 돌아오지 않을 게.”이 말을 마치고 수현은 성큼성큼 밖을 향해 걸어 나갔다.윤아는 한참 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수현이 떠나자마자 온몸의 힘을 뺏긴 듯, 침대에 기대 스르륵 앉았다.아래층 대문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그녀의 얼굴은 사색으로 뒤덮였다.이분이 지나서 집사가 헐레벌떡 윤아를 찾아왔다.“사모님, 도련님께서 왜 금방
수현은 집에서 나온 뒤, 친구 두 명을 불러 술집에 갔다.그는 한잔 또 한잔 빠르게 마셨다. 술이 아니라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마신다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그런 수현을 옆에서 지켜보는 김양훈과 고석훈도 무척 놀랐다.“말려봐.”양훈은 석훈에게 눈치 주며 말했다.그러자 석훈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내가 말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양훈은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이미 너무 마셨어. 이러다간 몸에 안 좋을 수도 있어.”이 말을 듣자, 석훈도 고개를 끄덕였다.“그러게.”서로 눈을 마주치자마자, 두 사람은 동시에 일어나 수현을 말리기 시작했다.“현아, 됐어. 그만 마셔.”“취하겠다 작정하고 마시는 건 알겠는데 이 정도까지만 해. 너 그러다가 뻗어.”그들은 말리고 있긴 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말뿐이었고, 감히 수현의 몸에 손대진 못했다.이런 말을 듣자, 수현은 피식 웃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셨는지라 그의 눈가는 붉어졌고 얼굴엔 불쾌하다는 기색으로 가득했다.“얘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석훈이 눈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강소영도 돌아왔잖아. 빨리 가서 오붓한 시간을 보내지는 못할망정, 왜 술이나 퍼마시고 있는 건데.”양훈은 오히려 알 것 같다는 어투로 말했다.“내가 보기엔, 소영이 돌아온 게 문제야. 그래서 이렇게 된 것 같아.”석훈은 처음엔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고 나니 금방 양훈의 뜻을 알아챘다. 그는 놀라서 눈을 커다랗게 뜨고는 물었다.“설마...”양훈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런 양훈을 보며 석훈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그러겠네. 소영이가 돌아왔으니, 수현이 저 자식 심윤아와 이혼하겠지? 꽤 오랫동안 함께 살았을 텐데 이렇게 이혼하자니 조금 아쉬웠을 거야.”두 사람이 이렇게 한마디씩 주고받고 있을 때, 수현이 갑자기 머리를 홱 돌리더니 석훈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석훈은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는 말을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