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진수현의 차에서 깨어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윤아 님, 제가 진 대표님에게 윤아 님이 쓰러진 것 같다고 말했을 때 진 대표님께서 얼마나 놀라셨는지 모르시죠?”심윤아는 임연수가 무슨 생각으로 자기와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상사에게 잘 보이려고?’그래서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그래요? 얼마나 놀랐는데요?”임연수는 조금 수줍게 웃었다.“아무튼, 제가 진씨 그룹에 입사하고 어제 처음 진 대표님이 그런 표정을 지으시는 걸 봤어요. 당시 진 대표님 옆에 이사님들이 보고를 올리고 있었는데. 윤아 님이 쓰러졌다고 하니 이사님들도 무시하고 직접 달려와 안아서 차에 태우시고 계속 걱정하고 계셨어요.”말이 끝나자, 임연수는 그녀를 향해 눈을 깜박였다.“진 대표님이 윤아 님 엄청 신경 쓰고 계세요.”“그랬어요?”심윤아는 혼이 나간 것 같은 임연수를 바라보며 말했다.“어제 그의 옆에 다른 여자가 있는 걸 본 적 없어요?”이 한마디에 사내 커플을 응원하던 임연수의 생각이 바로 사라졌다.그녀는 당황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진수현의 행동 때문에 임연수는 옆에 다른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말았다. 임연수는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심윤아가 이렇게 말하니 뭔가 정말 잘못된 것 같았다.왜냐하면... 그 여자가 대표님의 사무실에 계속 있었다.그리고 최근에는 그 여자와 이상한 관계라는 소문이 회사에 돌기도 했다.임연수가 멍하니 서 있는 것을 보고 심윤아는 손을 들어 아픈 이마를 짚으며 조용히 말했다.“가서 일 보세요.”“네, 알겠습니다.”임연수가 떠난 후.심윤아는 다시 핸드폰을 꺼내어 화면을 클릭해 예약을 확인했다.아쉬울 것이 전혀 없다고 그녀는 생각했다.점심에 강찬영은 그녀에게 함께 점심을 먹자고 메시지를 보냈다.심윤아는 생각이 복잡해서 거절하고 싶었지만, 그가 어제 그녀를 대신해 업무를 처리해 주었기에 그러자고 했다.점심시간이 되자 심윤아는 강찬영을 기다리기
“어머, 듣고 보니 그렇네요.”“당연한 거 아냐? 어디 부잣집 사모님이 회사에서 비서 일이나 하고 있겠어?”“하지만 전 이해가 안 돼요. 왜 가짜 결혼까지 하는 걸까요.”“아마 이유가 있겠지. 듣기로는 심 비서와 대표님이 어릴 적부터 같이 컸대. 심씨 가문이 망하고 나서는 대표님이 심 비서와 결혼했지. 내가 보기엔 심 비서님 도와주려는 것 같아. 이봐, 지금 아무도 심 비서님 못 괴롭히잖아?”“그런 거라면 저희 대표님 정말 좋으신 분이네요.”“내가 듣기로는 대표님은 출국한 강소영을 기다리고 있었대. 정말 순정파라니까. 역시 우리 대표님이야.”윤아가 그들의 뒤에서 다 듣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신나게 떠들어대는 직원들. 윤아는 생각보다 평온했다. 마치 그들이 말하는 상대가 자신이 아닌 듯 덤덤한 표정이다. 그때, 강찬영의 차가 유유히 다가오더니 그들의 앞에서 멈춰 섰다. 그는 창문을 열더니 그의 훈훈한 얼굴을 드러내며 말했다.“얼른 타.”사람들의 시선이 심윤아에게 집중됐다. 윤아는 그들의 시선 속에서 강찬영의 차에 올라탔다.깜짝 놀라 황당해하고 있던 직원들은 강찬영의 차가 떠나간 뒤에야 정신을 차렸다.“아까... 심 비서님이었죠...?”“응, 아마도.”“저희가 하던 얘기 다 들었으면 어쩌죠?””들어도 뭐 어쩌겠어. 우리가 지어낸 것도 아니고 그냥 들은 얘기인데. 그리고 설령 우리가 한 얘기면 또 뭐 어때? 다 사실인데. 아니면 반박을 했겠지. 분명 찔리는 게 있어서 말 못 하는 거야.”“어떻게 반박할지도 모르는 거 아닐까요? 방금 대표님 차에 그 여자가 타고 있었잖아요.”멀어지는 차를 보며 그들은 쑥덕거리기 바빴다.윤아는 묵묵히 창문을 올리고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다 시들어가는 나뭇잎과 회색빛 건물들을 보며 그의 두 눈도 색이 바래가는 것 같았다. 그의 귓가에는 아직도 직원들이 하던 말들이 맴돌았다. 그리고...방금 전 스쳐 지나갔던 검은 카이엔까지...“왜 그래? 넋 나간 사람처럼.”강찬영이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리고 윤
강찬영은 더 말을 잇지 않았지만 그의 말투는 이미 그의 감정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윤아가 안쓰러웠다.윤아는 강찬영이 임신에 관한 일을 모른다는 것에 안도했다. 알았다면 그의 말투는 지금보다도 더 날카로웠겠지.윤아가 대답하지 않자 강찬영도 더 말하지 않았다. 그는 윤아를 데리고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이윽고 주문을 마치고는 자리를 뜨는 강찬영.“여기서 10분만 기다리고 있어. 잠깐 나갔다 올게.”“네.”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뭘 하러 가는지 궁금하긴 했지만 굳이 알아볼 기운도 없었다.10분 뒤, 정체 모를 봉지를 들고 오는 강찬영.“받아.”“이게 뭐예요?”“약. 너 아프다며? 그 나이 먹고 아직도 비상약들 안 챙겨놓으니 원. 가져갔다 아플 때 먹어.”윤아는 잠시 멍해졌다.“하지만 저 이제 다 나았는데요?”“그래도 챙겨.”“알겠어요.”윤아는 봉지를 받아들었다. 안에는 갖가지 상비약들로 가득했다.“고마워요. 찬영 오빠.”“고맙긴.”찬영이 손을 뻗어 윤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다른 사람들한테는 못해도 나한테는 편하게 굴어. 무슨 일 있으면 말하고.”“알겠어요.”두 사람은 잠시 훈훈한 듯하더니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잠시 후 묵묵히 밥을 먹던 찬영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너 설마 강소영 벌써 만났어?”그의 질문에 멈칫하던 윤아,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네.”“그 여자는 대체 무슨 생각이래? 귀국하고 바로 진수현을 찾으러 간 거야? 인제 와서 뭐 다시 만나기라도 하자는 건가?”윤아는 다시 만난다는 말이 유난히 가슴에 박혔다.“다시 만나는 거 아니에요. 인제 와서 둘 사이에 무슨 옛 인연이 있겠어요.”비록 진수현이 예전에 여러 얘기를 했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 둘은 사귀지 않았다. 사실 윤아도 모르겠는 것투성이다.‘그때 왜 수현 씨는 강소영과 사귀지 않았을까? 자신의 옆자리는 늘 강소영일 거라는 말까지 할 정도면 강소영도 수현 씨를 사랑한다는 걸 텐데. 둘은 원래 사귀는 사이여야 하지 않나?‘하지
강찬영은 잠시 후 정신을 가다듬고 눈앞의 그 여자를 봤다. 간단한 차림에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이 하늘거렸다. 화장기 없는 얼굴은 청초한 분위기를 풍기며 보호 욕구를 자극했다. 강찬영은 현명한 사람이었다. 자신은 진수현과 비교도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심씨 가문이 망했을 때 그도 여기저기 발로 뛰며 방법을 찾아봤지만 그의 미미한 힘으로는 그 어떤 도움도 되지 못했다. 당시 한 기업의 대표가 그에게 한 말이 있었다.“강찬영 씨, 당신은 우수한 사람이죠. 저도 당신 능력은 아주 좋게 보고 있어요. 하지만 심씨 가문은 이제 망했습니다. 당신은 현명한 사람이니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잘 알겠죠. 우리 회사로 와요.”당시 그가 도움을 청한 기업들에서는 손을 뻗어주기보단 그를 스카우트해가려는 곳이 더 많았다.“심씨 가문은 이제 다시 일어설 수 없어요. 설령 누군가 도움을 준다 해도 심씨 가문은 전과 같을 수 없어요.”“충고 하나 하죠. 자신의 미래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당신은 심씨 집안 사람이 아니에요. 그 집의 사위도 아니죠. 그러니 이렇게까지 발 벗고 나설 필요 없지 않나요?”그때 강찬영의 마음은 구멍이 뚫린 듯 공허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는 정말 그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러다 윤아에게 전화를 걸어 그가 있는 곳으로 데리러 간다고 했었다. 그러나 그가 윤아가 있는 곳으로 갔을 땐 진 씨 그룹의 둘째 아들이 그의 친구들과 함께 윤아를 모욕하고 있었다.“심씨 가문의 큰아가씨, 네 집안이 잘 나갈 때나 도도한 아가씨였지. 이젠 다 망했는데 아직도 상황파악이 안 되나? 뭐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안될 것도 없긴 하지. 대가는 하룻밤 정도면 되는데.”그들은 말이 끝나자 낄낄대며 웃어댔다. 강찬영은 그 순간 저놈들을 모조리 패 죽이고 싶었다. 올 때 했던 자신의 미래에 관한 생각들은 모조리 사라지고 그에게는 단 한 가지 생각만이 맴돌았다.‘절대 심씨 가문을 버리고 내 살길을 찾으려 하면 안 되겠구나. ‘그러나 그는 진씨 가문
이어지는 윤아의 답장.“출근하기 전에는 돌아갈게.”이윽고 그는 핸드폰을 끄고 찬영을 향해 말했다.“알았어요. 찬영 오빠.”강찬영의 시선이 그녀의 핸드폰에 머물렀다.“그 사람이야?”윤아는 잠시 멈칫하더니 머리를 끄덕였다. 찬영도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둘은 묵묵히 식사를 마치고 레스토랑을 나왔다.강찬영은 윤아를 바래다주고는 슬며시 엘리베이터까지 따라갔다. 뒤늦게 찬영을 발견하고 묻는 윤아.“어디 가게요?”두 사람의 사무실은 다른 곳에 있었다. 강찬영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덤덤하게 말했다.“대표님 찾으러. 마침 보고할 것도 있고.”엘리베이터에서 나온 강찬영은 손목의 시계를 한 눈 보고는 말했다.“출근 시간까지 10분 남았으니까 지금 대표님을 찾아가는 건 실례겠지?”윤아는 어쩔 수 없이 말했다.“제 사무실에 잠깐 있다 가요.”“응”윤아의 사무실은 진수현의 사무실을 지나칠 필요가 없었다. 두 사람이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강소영이 출근한 뒤였다. 임연수는 바로 몸을 일으켜 두 사람에게 커피를 타줬다.“고마워요.”강찬영은 커피를 받아 들고는 연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대표님은 다녀가셨어요?”연수는 잠시 갸웃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혼자 오셨어요? 아니면...”연수는 말이 없었다. 순간 사무실에는 어색하고 묘한 분위기가 맴돌았다.10분 후, 찬영은 컵을 내려놓고는 일어섰다.“시간이 됐으니 난 대표님을 찾으러 가야겠어.”사무실 문을 열던 그는 고개를 다시 돌리더니 윤아를 보며 말했다.“윤아야, 어제 그 프로젝트 보고서 말이야. 네가 좀 도와줘야겠는데. 같이 가자.”윤아는 잠시 멈칫했다. 미간을 찌푸리고 대답하지 않는 윤아를 보고 찬영이 물었다.“윤아야?”그제야 정신을 차린 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같이 가요.”그녀는 원래 강수현과 강소영을 피해 다닐 생각이었다. 그날 나의 카톡에는 답장도 안 하더니 강소영이 나한테 통화로 그이가 집에 안 올 거라고 말하게 시켰으니 윤아
그의 서늘한 눈빛에 윤아는 몸 둘 바를 몰랐다.‘그나저나 점심에 분명 강소영과 함께 회사에 오지 않았나? 왜 강소영은 안 보이지?’이러한 생각에 잠겨있던 윤아는 강찬영의 질문에 후다닥 정신을 가다듬고 보고를 도왔다. 보고를 끝낸 강찬영이 사무실을 나가려 하자 진서현의 시선은 더욱 노골적으로 그녀를 향했다. 그전에는 강찬영의 뒤에 서 있었지만 이젠 그가 없으니 윤아는 온몸으로 그의 시선을 받아내야 했다.그때, 사무실 문을 열고 나가려던 강찬영이 고개를 돌려 윤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윤아야, 내일 점심에도 데리러 올까?”그의 말에 윤아는 잠시 움찔했다. 진서현도 무언가 의식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대표님, 저와 윤아 씨가 한두 마디 정도 나눠도 괜찮죠?”윤아는 입술을 깨물었다.‘지금 뭐 하려는 거지.’윤아가 반응하기도 전에 진서현은 이미 불쾌한 듯 서늘한 눈빛으로 말했다.“업무시간엔 자제하지.”“네?”예상치 못한 그의 대답에 강찬영은 당황한 듯 보였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잇는 찬영.“그렇다면 퇴근 후에 다시 찾아와야겠네요.”강찬영은 말을 마치고 사무실을 떠났다. 그가 떠난 후 사무실은 얼어붙은 듯 고요해져 숨소리마저 유독 크게 들려왔다. 진서현은 불쾌한 듯 윤아를 서늘하게 쳐다봤다.“점심에 같이 나간 사람이 저 사람이었어?”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찬영과의 관계는 떳떳하니 감출 필요가 없었다. 수현은 미간을 찌푸렸다.“둘이 나가서 뭐 했는데?”“그냥 밥 먹었어. 어제 업무 얘기도 좀 하고.”업무 얘기에 잔뜩 구겨졌던 그의 인상이 살짝 풀렸다. 둘 다 진 씨 그룹 직원이니 업무적인 대화를 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진서현은 그래도 어딘가 불쾌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심윤아. 밥 먹을 때도 일 얘기라니. 누가 들으면 내가 널 괴롭히기라도 하는 줄 알겠어.”그의 말에 윤아는 저도 모르게 말했다.“안 괴롭힌 줄 아나.”윤아의 한마디에 둘은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 윤아는 자신의 혀를 확 깨물어버리고 싶다는 충
그게 아니면 그저 없던 일인 척하려는 건가.“왜 말을 안 해?”진수현은 생각에 잠긴 윤아를 보고 그녀의 턱을 살짝 잡으며 말했다.‘왜?”진수현은 가자미눈을 하며 그녀를 내려다봤다. 윤아는 눈앞의 익숙한 그의 얼굴을 보며 선홍빛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결국 입을 떼지 않는 그녀. 사실 윤아는 묻고 싶은 것들이 많았지만 막상 물으려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말을 했다가 그가 한심하게 쳐다보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앞섰다. “네 체면을 지켜주기 위해 모르는 척 해주는 거야. 심윤아, 왜 이렇게 눈치가 없지?”‘이렇게 말하면 어떡하지?’윤아의 뇌리에는 이미 최악의 상황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윤아는 이대로 둘 다 없었던 일인 척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아무것도 아니야.”고개를 젓는 윤아. 그런 윤아를 바라보는 진수현의 검은 눈동자는 어쩐지 평소보다 더 어두워 보였다. 그녀는 매번 이런 식이다. 슬픈 듯 보이다가도 다가가면 선을 긋는다. 정신 차려보면 어느새 둘 사이 거리는 더 멀어져 있었다. 윤아는 매번 그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어느덧 둘 사이에 흐르던 미묘한 기류는 사라졌다. 진수현은 윤아의 턱을 잡고 있던 손을 내려놓고 몸을 뒤로했다.“그럼 난 이만 가볼게.”“잠깐.”몸을 돌려 나가려던 윤아를 다시 불러세우는 진수현.“왜?”“올해 연차 아직 안 썼지?”윤아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응”“내일부터 쉬어.”“내일?”“응. 너 요즘 몸 안 좋잖아. 연차 쓰고 한동안 쉬면서 기분전환도 하고 그래.”진수현은 요즘 윤아의 기분이 안 좋은 걸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열까지 났으니 미리 쉬게 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윤아의 귀에는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윤아가 매년 이때 연차를 쓰진 않는다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앞당겨 쉬게 하려는 건...‘일종의 경고인가? 이참에 아이를 처리하라는...’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터라 윤아는 진수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는다.
윤아의 말에 현아도 어느 정도 흥분이 가라앉았다. 몇 년 지기 친구다 보니 그녀도 윤아를 잘 알고 있었다. 윤아는 충분한 생각 후에 행동하는 현명한 사람이었다. 이런 결과도 그는 사실 진작 예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현아는 윤아가 안쓰러웠다.현아는 걱정스레 말했다.“하지만... 넌 그래도 괜찮아?”“내가 안 괜찮다고 해도 뭘 어쩌겠어.”윤아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사실 괜찮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을 바꿀 수는 없을지 생각도 안 해본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실은 무정하게도 그녀의 망상을 깨부숴버렸다.“내일 시간 있어? 나랑 병원 좀 같이 가줄래?”잠시 멈칫하는 윤아, 살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혼자 가기 싫어서.”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내가 네 유일한 베푼 데 시간 없어도 같이 가줘야지. 이런 걸 뭘 물어? 그냥 같이 가자고 하면 되는걸.”윤아는 그녀의 말에 싱긋 웃었다.“밥 먹어. 오늘은 일찍 돌아가서 쉬고.”슬픈 내색 하나 없이 침착함을 유지하는 윤아를 보며 현아는 코가 시큰거리고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심씨 가문이 망했을 당시 윤아는 이런 모습이 아녔다. 전형적인 재벌 아가씨답게 모든 감정이 얼굴에 드러났었다. 분노, 증오, 슬픔까지…. 하지만 지금의 윤아는 끊임없이 절제하고 자신을 감췄다. 그때는 윤아를 감싸주는 든든한 심씨 가문이 있었지만, 지금의 그녀는 돛대 없이 바다 위에 외로이 떠도는 작은 배 같았다.“윤아야, 힘들면 울어도 돼. 이 방에 우리밖에 없어. 난 네 절친이잖아, 약한 모습 보여도 돼.”현아의 말에 윤아는 잠시 멈칫했다. ‘울어?’집안이 망한 뒤 그녀는 사실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때 깨달았다. 우는 건 그 어떤 문제도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눈물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그저 남들에게 짓밟힐 웃음거리만 된다는 것을. 그래서 윤아는 다시는 남들 앞에서 쉽게 눈물을 보이지 않겠다 결심했다. 그 사람이 설령 내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라 해도.윤아는 웃으며 말했다.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