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아니면 그저 없던 일인 척하려는 건가.“왜 말을 안 해?”진수현은 생각에 잠긴 윤아를 보고 그녀의 턱을 살짝 잡으며 말했다.‘왜?”진수현은 가자미눈을 하며 그녀를 내려다봤다. 윤아는 눈앞의 익숙한 그의 얼굴을 보며 선홍빛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결국 입을 떼지 않는 그녀. 사실 윤아는 묻고 싶은 것들이 많았지만 막상 물으려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말을 했다가 그가 한심하게 쳐다보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앞섰다. “네 체면을 지켜주기 위해 모르는 척 해주는 거야. 심윤아, 왜 이렇게 눈치가 없지?”‘이렇게 말하면 어떡하지?’윤아의 뇌리에는 이미 최악의 상황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윤아는 이대로 둘 다 없었던 일인 척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아무것도 아니야.”고개를 젓는 윤아. 그런 윤아를 바라보는 진수현의 검은 눈동자는 어쩐지 평소보다 더 어두워 보였다. 그녀는 매번 이런 식이다. 슬픈 듯 보이다가도 다가가면 선을 긋는다. 정신 차려보면 어느새 둘 사이 거리는 더 멀어져 있었다. 윤아는 매번 그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어느덧 둘 사이에 흐르던 미묘한 기류는 사라졌다. 진수현은 윤아의 턱을 잡고 있던 손을 내려놓고 몸을 뒤로했다.“그럼 난 이만 가볼게.”“잠깐.”몸을 돌려 나가려던 윤아를 다시 불러세우는 진수현.“왜?”“올해 연차 아직 안 썼지?”윤아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응”“내일부터 쉬어.”“내일?”“응. 너 요즘 몸 안 좋잖아. 연차 쓰고 한동안 쉬면서 기분전환도 하고 그래.”진수현은 요즘 윤아의 기분이 안 좋은 걸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열까지 났으니 미리 쉬게 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윤아의 귀에는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윤아가 매년 이때 연차를 쓰진 않는다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앞당겨 쉬게 하려는 건...‘일종의 경고인가? 이참에 아이를 처리하라는...’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터라 윤아는 진수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는다.
윤아의 말에 현아도 어느 정도 흥분이 가라앉았다. 몇 년 지기 친구다 보니 그녀도 윤아를 잘 알고 있었다. 윤아는 충분한 생각 후에 행동하는 현명한 사람이었다. 이런 결과도 그는 사실 진작 예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현아는 윤아가 안쓰러웠다.현아는 걱정스레 말했다.“하지만... 넌 그래도 괜찮아?”“내가 안 괜찮다고 해도 뭘 어쩌겠어.”윤아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사실 괜찮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을 바꿀 수는 없을지 생각도 안 해본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실은 무정하게도 그녀의 망상을 깨부숴버렸다.“내일 시간 있어? 나랑 병원 좀 같이 가줄래?”잠시 멈칫하는 윤아, 살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혼자 가기 싫어서.”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내가 네 유일한 베푼 데 시간 없어도 같이 가줘야지. 이런 걸 뭘 물어? 그냥 같이 가자고 하면 되는걸.”윤아는 그녀의 말에 싱긋 웃었다.“밥 먹어. 오늘은 일찍 돌아가서 쉬고.”슬픈 내색 하나 없이 침착함을 유지하는 윤아를 보며 현아는 코가 시큰거리고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심씨 가문이 망했을 당시 윤아는 이런 모습이 아녔다. 전형적인 재벌 아가씨답게 모든 감정이 얼굴에 드러났었다. 분노, 증오, 슬픔까지…. 하지만 지금의 윤아는 끊임없이 절제하고 자신을 감췄다. 그때는 윤아를 감싸주는 든든한 심씨 가문이 있었지만, 지금의 그녀는 돛대 없이 바다 위에 외로이 떠도는 작은 배 같았다.“윤아야, 힘들면 울어도 돼. 이 방에 우리밖에 없어. 난 네 절친이잖아, 약한 모습 보여도 돼.”현아의 말에 윤아는 잠시 멈칫했다. ‘울어?’집안이 망한 뒤 그녀는 사실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때 깨달았다. 우는 건 그 어떤 문제도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눈물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그저 남들에게 짓밟힐 웃음거리만 된다는 것을. 그래서 윤아는 다시는 남들 앞에서 쉽게 눈물을 보이지 않겠다 결심했다. 그 사람이 설령 내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라 해도.윤아는 웃으며 말했다.
윤아는 완전히 뻗어버린 진수현을 부축해 간신히 방에 도착했다. 이제 막 침대에 눕히려던 그때, 술에 취한 탓인지 아니면 힘이 빠져서인지 그만 중심을 못 잡고 넘어져 버리는 윤아. 그는 그대로 수현의 품에 폭 안겼다. 그 순간, 어느 포인트에서 진수현의 불씨가 타올랐는지 알 수 없지만, 그의 큼지막한 손은 어느새 그녀의 허리를 감싸왔다. 이윽고 몸을 돌려 윤아의 위로 올라탔다. 그는 슬림하면서도 단단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체중을 실어 윤아의 몸을 꾹 누르는 수현. 알코올의 작용인지 윤아의 얼굴은 어느새 붉게 열이 올랐다. 윤아는 수현을 밀어내려고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수현의 뜨거운 입술이 그녀에게 닿았다. 윤아는 머리가 멍해지는 걸 느꼈다.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어느새 수현과 맞닿아 있는 윤아의 입술도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 순간 윤아는 이성의 끈이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윤아도 이미 수현을 허락했다. 수현은 메말라 있던 물고기처럼 그녀를 탐했고 온 힘을 다해 품에 안았다.그날 밤, 윤아는 자신을 완전히 놓아버렸다.다음 날 윤아가 수현의 품에서 눈을 떴을 땐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수현이 보였다. 윤아가 깬 것을 보자 그는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그 모습을 본 윤아가 먼저 말을 꺼냈다.“어제는 둘 다 많이 취해있었으니까 그냥 실수였던 걸로 하자.”그의 말에 진수현의 눈동자에 묘한 감정이 언뜻 스쳤다.“실수?”“그래. 그냥 실수였던 거야.”사실 실수가 맞긴 하지. 둘은 원래 계약관계기에. 어떠한 속박이라도 생긴다면 현재 그들의 관계는 유지되지 못할 것이다. 더군다나 윤아는 진수현이 그가 흑심을 품고 있다고 생각하고 떠나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냥 실수였다고 생각하자는 윤아의 말에 진수현은 순간 얼굴이 구겨졌다. 한참 뒤에야 마음을 가라앉히고 입을 떼는 수현.“여자 쪽이 손해지. 뭐 갖고 싶은 거 있어?”그의 쌀쌀맞은 말에 윤아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내가 뭘 달라고 할 거로 생각해
병원에 도착한 후 주위를 둘러보던 현아는 의아한 듯 윤아에게 물었다.“왜 큰 병원에 안 가고 여기에 왔어? 이런 작은 곳에서 했다가 몸에 문제라도 생기면 어떡해?”윤아는 담담하게 말했다.“큰 병원은 불편해서.”사실 큰 병원에는 큰 사모님이 아시는 분이 계셔서 가기가 불편한 거였다. 저번에는 임신일 줄 모르고 갔었던 거지만 이번엔 낙태를 위해 병원을 찾은 것이니 그곳엔 갈 수 없었다. 만약 큰 사모님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윤아는 작은 병원에서 진행하려던 것이다. 수납은 현아가 윤아 대신 마치고 둘은 의자에 앉아 검사를 받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무슨 일인지 이따금 고개를 돌려 윤아를 바라보는 현아. 그렇게 몇 분 내내 몇십 번을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현아에 윤아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왜 자꾸 쳐다봐?”현아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너 언제 이렇게 매정해졌어…”그 말에 윤아는 잠시 멈칫했다. 현아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이 아이도 네 아이잖아.”현아의 말에 윤아는 심장이 철렁했다. 손을 들어 배를 만져보는 윤아.‘그래…내 아이지…’윤아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하지만 현재로선 달리 방도가 없었다. 생각에 잠긴 윤아를 본 현아는 이 틈을 타 그를 설득했다.“윤아야, 너도 이러고 싶지 않잖아. 우리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자. 응?”“다른 방법?”윤아는 혼란스러웠다. 이미 궁지에 몰린 그에게 무슨 방법이 있을까.“응.”현아는 윤아의 어깨를 꼭 잡으며 말했다.“우리 방법을 생각해 보자. 분명 더 좋은 선택이 있을 거야. 난 알아. 네가 그 누구보다 이 아이를 놓지 않고 싶어 한다는 걸. 어차피 이제 막 알게 된 건데 우리 조급해하지 말고 조금만 더 생각해 보자. 나중에 후회하지 않게. 응?”윤아가 고개를 끄덕이려 하는데 마침 안쪽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일찍 온 데다 사람도 적어 대기시간이 생각보다 짧았다.“나 먼저 검사하고 올게.”윤아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아직 명확한 결과가 나온
”빈혈 때문인가 봐.”“그럼 내가 먹을 것 좀 사다 줄게.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현아가 떠나간 후 윤아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피곤한 듯 두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는 두 가지 목소리가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뭘 생각 하는 거야? 이미 결정 한 거 아니었어? 병원까지 왔으면서 뭘 망설여? 지금 처리하지 않으면 평생 널 괴롭힐 거야. 벌써 잊은 건 아니지? 그 사람은 이미 이혼 얘기를 꺼냈어.”“이혼이 뭐? 윤아도 이제 성인이야. 아이 하나 먹여 살릴 능력도 없어 보여?”“아이 키우는데 경제적 능력만 있으면 되는 줄 알아? 정신은? 심리는?”“아이에게 아빠가 없는 게 걱정이라면 새로 찾을 수 있잖아. 넌 아직 이렇게 젊은데 새 남편 하나 못 찾겠어?”빈혈에 내적 갈등까지 더해져 윤아는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그때, 윤아에게 들려오는 하나의 목소리.“윤아야?”“윤아 너니?”윤아는 처음엔 잘 못 들은 줄 알았지만, 그 목소리는 점점 가깝게, 또 선명하게 들려왔다. 윤아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40대쯤으로 보이는 한 아줌마가 윤아를 쳐다보고 있었다. 윤아는 그분을 한참 동안 보고서야 누군지 알아봤다. 임진숙 아줌마. 진씨 가문의 큰 사모님과 자주 함께 계시는 분이다. 윤아는 낯빛이 새파랗게 질린 채 얼른 아픈 몸을 간신히 일으켰다.“세상에, 정말 너구나.”임진숙은 아는 사람을 만나 기쁜 마음에 윤아에게 한달음에 다가갔다.“아까 멀리서 널 봤을 땐 내가 잘못 본 줄 알았어. 정말 너일 줄이야. 근데 너 여기엔 무슨 일로 왔니?”윤아는 억지로 웃어보려 했으나 입꼬리가 좀처럼 올라가지 않았다. 아는 사람이라도 만날까 봐 일부러 작은 병원으로 온건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건지 윤아는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게다가 하필이면 할머님과 자주 함께 계시는 진숙 아줌마라니. 인제 와서 피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윤아는 애써 진정하고 머리를 굴렸다.“안녕하세요, 저 친구가 검사하러 오는데 함께 와준 거예요.”현아는 음식을 사러 갔으니
”엄마.”임진숙의 말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진료실에서 한 여자아이가 불쑥 나왔다. 아이의 목소리에 의기양양하던 진숙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윤아는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눈에 봐도 그의 딸 조보아임을 알 수 있었다. 보아는 손에 검사표를 들고 있었고 얼굴은 유난히 창백했다. 언뜻 보기에도 건강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방금까지도 콧대를 세우며 윤아를 조롱하던 진숙은 재빨리 몸을 돌려 아이를 데리고 가버렸다. 뭐에 쫓기기라도 하는듯한 그녀의 행동에서 윤아는 뭔갈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러나 남의 사적인 일에 별 관심이 없는 윤아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잠시 후, 딸은 어디에 두고 왔는지 홀로 다시 돌아온 임진숙. 그녀는 윤아의 앞으로 다가와 잔뜩 구겨진 표정으로 말했다.“윤아 아가씨, 넌 똑똑한 사람이니 알겠지. 쓸데없는 말들은 입에 올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윤아는 그가 다시 돌아올걸 예상하고 있었다. 윤아는 입꼬리를 가볍게 올린 채 여유롭게 머리를 쓸어넘기며 말했다.“아줌마, 제가 똑똑한 사람일지 아닐지는 제 기분에 따라 바뀌는 거라서요. 누가 제 심기를 건드린다면 저도 제 정신상태가 어떻게 될지 몰라요. 정신이 홱 돌아버려서 무슨 말을 뱉을지는 저도 모르는 일이죠.”이 병원에 오는 사람들이 대부분 뭘 하려는 건지 둘 다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윤아의 말에 임진숙은 표정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임윤아. 너 감히 날 협박해?”“제가 어떻게 감히 협박하겠어요. 그저 거래를 하는 거죠.”분노로 치를 떠는 임진숙.“네 일이 우리 보아보다 훨씬 커.”“그런가요?”윤아는 코웃음을 쳤다.“확실해요? 제 기억이 맞았다면 당신 딸은 아직 대학교도 가지 않았죠?”윤아의 말 한마디에 임진숙은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윤아의 저 여유만만한 얼굴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 임진숙은 안 그래도 모든 걸 다 가진 이선아가 못마땅하던 차에 큰 건수 하나 잡아 진씨 가문을 풍비박산 낼 생각이었으나 하필이면 그때 딸이 나오는 바람에
그들은 이미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기에 윤아는 더는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간식을 한 아름 사 들고 돌아오는 현아.“윤아야. 샌드위치랑 우유 그리고 사탕들도 샀어. 여기 매점엔 뭐가 많이 없더라고 이거라도 얼른 먹어.”현아는 포장을 일일이 까주며 말했다.“얼른 먹어. 배고프겠다.”윤아는 그런 현아를 보며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을 느꼈다.“고마워.”어찌 보면 현아가 윤아의 친엄마보다 더 마음 써주는 사람이었다.“고맙긴 뭘!”역시나 이번에도 현아가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우리 사이에 고맙다는 말이 필요해? 고마운 거로 따지면 내가 너보다 더하지. 그때 네가 아니었으면 난 대학교도 못 다녔어.”윤아는 말없이 그저 웃었다. 윤아와 현아는 고등학교 때 처음 알게 돼 대학교까지 같은 곳에 붙게 된 끈끈한 인연이었다.그러다 어느 방학 때 현아의 아버지가 도박에 손을 대면서 현아의 집은 순식간에 빚더미에 앉게 되었다. 별수 없이 휴학하고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던 현아를 도와준 사람이 바로 윤아였다. 그는 현아의 사정을 알게 된 후 그녀를 대신해 빚을 갚아주고 직접 현아를 학교까지 데려다줬었다.오랜만에 옛 생각에 잠기기는 현아도 마찬가지였다. 한참을 추억에 잠겨있다고 말을 떼는 현아.“그거 알아? 나 그때 엄청 고마웠어. 네가 없었으면 난 지금쯤 어디에 있을지 몰라. 진작에 빚쟁이들에게 쫓겨 죽어버렸을지도 모르지. 넌 내 절친을 넘어 내 은인이야. 평생 잊지 못할.”현아의 고백에 기쁘기도 잠시, 그의 말을 들은 윤아는 저도 모르게 진수현을 떠올렸다. ‘그도 현아처럼 강소영을 평생 잊지 못할까?’이런 생각이 들자 윤아는 현아에게 생뚱맞은 질문을 했다.“내가 만약 남자라면 너 나한테 시집올 거야?”그 말의 속내를 알 리 없는 현아는 단번에 대답했다.“당연하지 자기야. 네가 남자였다면 난 너한테 흠뻑 빠져있었을걸? 아쉽게 여자라 절친밖에 못 하지만.”윤아는 그 말에 고개를 떨궜다.‘그렇구나. 진수현도 그럼 그렇게 생각
윤아는 입맛이 전혀 없었지만 현아의 닦달에 별수 없이 꾸역꾸역 우유와 샌드위치를 입에 넣었다. 현아는 윤아가 더는 못 먹겠다 하자 더는 강요하지 않고 주섬주섬 물건들을 정리했다.“어때? 좀 나아졌어?”“응.”현아는 목을 가다듬고 슬쩍 물었다.“그럼 오늘은 일단 돌아갈까?”윤아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현아는 그런 윤아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돌아가자.”“그래.”윤아는 지금 안개 속을 거니는 듯 혼란스러웠다. 누군가가 나타나 그녀를 어딘가로 끌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어느 쪽이든 말이다.윤아는 몸을 일으켜 현아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마침 코너를 돌던 그때, 윤아는 주변이 소란스러운 것을 느꼈다.“하지만 엄마, 전 그 사람을 좋아해요.”한 여자아이가 애처로운 목소리로 말했다.”닥쳐!”그녀의 말에 대답하는 건 한 여자의 냉랭한 목소리였다.“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내가 널 그렇게 가르쳤니? 넌 그놈한테 홀딱 넘어간 거야. 아직도 모르겠어?”“엄마...”“이번 일이 지나면 너 다시는 그놈과 만날 생각 하지 말아라. 그딴 놈은 어차피 너와 어울리지 않았어. 누가 알게 되기라도 하면 앞으로 네 혼삿길은 는 거야.”여자의 호통 속에서 아이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저 유리알 같은 눈물이 두 볼을 타고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윤아는 그 모습을 보다 고개를 돌렸다. 현아도 잠시 눈길을 주더니 이내 시선을 돌렸다. 병원을 빠져나와서야 입을 떼는 현아.“아까 그 여자애 말이야. 아직 학생 같던데 참, 아직 어려서 그런가. 참 어리석네.”윤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거리가 멀었지만, 윤아는 그 아이가 조금 전에 봤던 조보아임을 알아봤다.그때, 윤아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 소리에 바짝 다가오는 현아.“너 전화 오는데 혹시 진수현? 벌써 후회하는 거 아냐?”진수현이 아니다. 발신 미상의 번호였다.“누구야?”왜인지 모르게 윤아는 이 낯선 번호를 보며 불쾌한 예감이 들었다. 머뭇거리다 전화를 받은 윤아.“심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