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인이 가서 이것저것 가져오는 틈을 타 하윤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엄마, 뭐 하러 갔었어요? 왜 이번에는 이렇게 오래 있다가 온 거예요? 오빠랑 윤이 다 엄마 너무 보고 싶었는데.”윤아는 하윤의 뒤통수를 어루만지며 부드럽게 물었다.“하윤아?”하윤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윤아는 하윤의 옆에 앉아 있는 남자애를 바라봤다.서훈은 윤아와 시선을 마주하더니 엄마의 마음을 알아챘는지 이렇게 말했다.“엄마, 훈이도 엄마 너무 보고 싶었어요.”윤이의 이름을 안 윤아는 마침 다른 아이를 평소에 어떻게 부르는지 알아내려고 하던 참이었다.바로 묻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았다.아이들이 나이가 어려 모르는 게 많다고는 하지만 그만큼 내면도 민감했다. 윤아가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데 엄마가 되어서 아이의 이름을 바로 물으면 아이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아이들은 윤아가 기억을 잃었다는 생각은 못 해도 엄마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아니면 어떻게 자기 새끼의 이름을 까먹을 수 있단 말인가.하지만 서훈이 이 정도로 철이 들었을 줄은 몰랐다.윤아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서훈의 볼에 뽀뽀했다.“훈이 참 착하지.”옆에 있던 하윤이는 오빠는 뽀뽀해 주면서 자기는 안아만 주자 대뜸 뾰로통한 표정으로 윤아를 덮쳤다.“엄마 왜 오빠만 뽀뽀해 줘, 나도 뽀뽀해 줘.”윤아는 웃으며 하윤이를 안고 보들보들한 볼에 뽀뽀했다.뽀뽀하고 나니 하윤이의 성격이 겉보기랑 똑같다는 걸 알아챘다.외모도 귀엽게 생겼는데 성격도 애교가 많았다.아들도 생긴 것과 비슷했다. 조용하고 얌전한 편이었고 내색을 잘 안 했다.서훈도 엄마가 조금 변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서훈이 아무리 총명하다 해도 아이였기에 윤아가 애써 숨기고 있으니 도대체 어디가 변했는지 발견하지 못했다.단 하나, 엄마가 많이 야위었다는 건 알아챘다.서훈은 그런 윤아가 너무 마음 아파 먼저 윤아의 손을 잡으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엄마, 앞으로 밥 잘 먹어야
사진은 수현의 기다란 뒷모습을 메인 구도로 잡고 있어 수현의 눈빛과 옆모습도 담겨 있었다. 그 눈빛이 향한 곳엔 윤아가 아이들을 안고 있었다.“어때? 내가 너희 네 식구 분위기 있게 잘 찍지 않았어?”수현은 이선희의 말에 대꾸하는 대신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사진 보내주세요.”사진을 받은 수현은 그 사진을 바로 잠금화면으로 설정하고는 수십번이나 반복해서 열어봤다.그 모습을 본 이선희는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진씨 집안의 제일 뚜렷한 유전자가 바로 순정남이었고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면서 예외는 없었다. 와이프를 무척이나 잘해주는 건 물론이고 일편단심이었다. 한번 점 찍어둔 사람이면 평생 그 한 사람뿐이었다.아들이 자기 와이프한테는 잘해주면서 엄마인 자신은 나 몰라라 한다고 질투하는 엄마들이 많지만 결국 남편이 부실해서 그렇다. 남편이 잘해준다면 왜 아들에게서 위안을 찾겠느냔 말이다.이선희를 놓고 봐도 그렇다. 수현이 윤아에게 얼마나 잘해주든 전혀 눈꼴신 적이 없었고 아들을 잘못 키웠네 하는 생각이 든 적도 없었다.진태범이 충분히 잘해주니까 이선희도 젊은이들의 입장에 서서 고민하고 이해해 줄 수 있는 것이다.“자, 와서들 앉아.”이명인이 주방에서 물건을 한 아름 갖고 나오자 수현이 얼른 긴 다리로 성큼성큼 그쪽으로 걸어가 도왔다.윤아도 자리에서 일어나 도우려고 했지만 수현이 움직이자 그냥 자리에 앉아 있었다.테이블엔 이내 여러 가지 주전부리들로 가득 찼다. 시장에서 사 온 것도 있었고 직접 재배한 과일도 있었다. 그리고 이명인이 틈틈이 직접 만든 떡과 디저트들도 보였다.“자, 얼른 먹어. 많이 먹어. 너 너무 말랐어.”이명인은 여러 가지 먹거리들로 윤아를 맞이해줬다.윤아가 웃으며 이를 받아왔다. 육류나 비린내가 나는 음식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정말 참지 못하고 바로 구역질했을 수도 있다.윤아는 달짝지근한 떡을 한입 베어 물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이명인이 기대에 찬 눈빛을 보내오고 있었다.
수현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윤아의 손에 들린 떡을 뺏어 먹은 것도 모자라 이런 말까지 하자 윤아뿐만 아니라 이명인과 이선희도 낯 간지러워 표정이 부자연스러워졌다.한편으로는 사랑에 빠진 수현이 어른들도 있는데 이 정도로 닭살 돋을 수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했다.하지만 이내 이선희는 이상함을 눈치챘다.수현이 비록 교묘하게 덮으려고 하긴 했지만 결국은 윤아의 손에 들린 떡을 해결하기 위해서였고 윤아도 조금씩 베어 무는 걸 봐서는 아마 더는 먹기가 힘들어 그랬을 것이다.이를 알아챈 이선희는 마른기침하더니 이명인에게 이렇게 말했다.“엄마, 젊은이들이 죽고 못 사는 거 그만 보고 우리는 밖에 나가서 앉아 있어요.”이명인은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지 못하고 그저 손주와 손주며느리의 사이가 돈독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하고는 이에 응했다. 나가면서 하윤과 서훈이를 챙겨 나가는 것도 잊지 않았다.하윤이는 나가기 싫어했지만 이명인이 안아 올리자 할머니가 힘든 게 싫어서인지 그제야 같이 나가겠다고 했다.그들이 나가자 방엔 거의 밀착 상태로 소파에 앉아 있는 두 사람과 테이블을 가득 채운 과일과 주전부리들만 남았다.분위기가 조용해지자 후끈 달아올랐던 윤아의 얼굴도 점점 내려갔다.윤아는 그제야 한시름 놓으며 수현이 잡은 손을 빼내려 했다.하지만 수현은 윤아의 손을 꽉 잡고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윤아는 그런 수현을 힐끔 쳐다봤다. 수현은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수현은 윤아가 자신을 바라보자 눈썹을 추켜세우며 물었다.“쑥스러워?”어렵게 내려갔던 홍조가 수현의 말에 다시 윤아의 얼굴에 찾아들었다.“너 예전에도 어른들 앞에서 이랬었나?”기억을 잃어서 그런지 윤아는 전에 수현과 어떤 모드로 지냈는지 몰랐다.하지만 아까 수현이 보인 행동은 이미 윤아의 인식을 벗어난 행동이었다.윤아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같이 있으면 친밀한 스킨십을 할 수밖에 없다는 걸 말이다. 아까 둘이 방에 있을 때도 하마터면 키스할 뻔했고 윤아도 딱히 거부하지 않았고 오히려
“부끄러워하지 마. 우리 이것보다 더 한 짓도 했었어.”“...”윤아는 말문이 막혔다. 그러더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정말?”“근데 난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말이 끝나기 바쁘게 수현은 윤아를 자기 다리 위로 끌어당기더니 윤아의 손으로 윤아의 턱을 잡았다. 순간 수현의 뜨거운 숨결이 그녀를 덮쳤다. 그렇게 수현은 윤아의 입술에 키스했다.“읍.”윤아는 수현이 그저 장난에만 그칠 줄 알았는데 진심이었다.머릿속에서 뭔가 터지는 듯한 느낌에 윤아는 자기도 모르게 그의 옷깃을 꽉 움켜쥐었다.오랫동안 참아왔던 욕구가 이 키스로 한순간 풀리는 것 같았다.오는 길뿐만이 아니라 그녀가 곁에 없는 모든 순간이었다.수현은 이런 생각에 윤아를 점점 더 꽉 끌어안았다. 마치 그녀를 자신에게 녹아들게 하려는 것처럼 말이다.사실은 그저 윤아에게 장난을 치고 싶었는데 그녀와 살갗이 닿는 순간 뭔가에 쑥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놓아주기가 싫었고 그만하기 아쉬웠다. 그저 이렇게 계속 그녀를 공략하고 그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윤아는 수현이 여기서 이럴 줄 몰랐다. 키스가 점점 깊어지면서 윤아도 점점 떨려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저 수현의 옷깃을 잡던 윤아는 끝내 수현을 밀쳐냈다.안간힘을 써서야 수현을 밀어낸 윤아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이, 이러지 마. 그러다 누가 보면 어떡해.”두 사람의 집도 아니고 방에 들어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그렇게 밀쳐진 수현은 넋을 잃은 채 멍해서 윤아를 바라봤다. 눈동자는 아직도 욕구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수현도 윤아처럼 가빠진 숨을 골랐다. 아니 윤아보다 더 숨 가빠하고 있었다.“들어올 사람 없어. 녀석들 데리고 나간 것도 둘만의 공간을 만들어주려고 그러는 거야.”설명을 듣고 난 윤아는 귀부터 목까지 다 빨개졌다.“그, 그래도 안 돼.”녀석들을 데리고 나가긴 했지만 두 사람이 여기서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들이 여기서 뭘 하고 있는지 눈치챌 것이다.“뭐가 안 된다는 거야?”
수현의 큰 손이 윤아의 허리를 놓아주고 나서도 윤아는 한참을 멍해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정말 말한 대로 한다고? 이렇게 끝난다고?귓불에 아직 수현이 촉촉함이 남아 있는 것 같아 간질거렸고 마음도 덩달아 찌릿찌릿해 자기도 모르게 귓불을 살짝 만졌다.하지만 윤아는 손을 올리다 말고 다시 내렸다.안 돼, 만지면 안 돼.만지면 고약한 수현이 또 놀릴 게 뻔했다.윤아는 귓불을 만지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으며 마음을 진정시켰다.“왠지 실망한 표정이다?”수현이 또 예고 없이 다가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하다 말아서 실망한 건가?”“아니거든!”윤아가 쏘아붙였다.이렇게 부정한 윤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어금니를 깨물며 말했다.“혼자 여기 앉아 있어.”윤아는 이렇게 말하며 자리를 뜨려고 했다.그때 수현이 윤아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됐어. 화내지 마. 아까는 그냥 장난 좀 친 거야.”“이거 놔.”윤아는 자기 손을 빼려고 했다.수현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알았어. 난 그냥 네가 그 떡을 처치하기가 곤란해 보이길래.”수현에게서 벗어나려 발버둥 치던 윤아가 멈칫하더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뭐라고?”“먹기 힘들어했잖아. 그래서 내가 대신 먹어준 건데.”수현의 말에 윤아가 당황했다. 혹시 수현이 뭔가 알아챈 건가? 윤아가 자기도 모르게 반박했다.“먹기 힘들어하긴 뭐가?”“응?”수현이 눈썹을 추켜세우며 말했다.“힘들지 않다는 애가 그렇게 조금씩 천천히 먹었던 거야?”“나 원래 꼭꼭 씹어먹는 거 좋아하거든.”윤아가 반박했다.“그래, 그럼 내가 다른 건 먹기 싫은데 딱 네 손에 든 거 먹고 싶어서 그러는 거라고 치자.”수현도 윤아와 입씨름하기는 싫었다. 윤아가 숨기고 싶은 일이 있다면 수현도 계속 캐물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아니나 다를까 수현이 이렇게 인정하고 나니 윤아도 입을 꾹 닫았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한참이 지나도 아무 말이 없었다.얼마나 지났을까, 윤아가 고개를 들어 수현
“그래... 알았어.”윤아의 착각인지 몰라도 수현이 자신을 돕고 있는 건 맞지만 자꾸만 이상하게 희롱한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방에서 한참을 진정하고 나서야 난처한 기분은 조금 가라앉는 것 같았고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들을 찾으러 나갔다.거실에서 나오니 밖엔 커다란 정원이 펼쳐졌다.정원엔 큰 나무도 심겨 있었고 과수원과 텃밭도 보였다. 주방은 과수원 옆에 지어져 있었다. 두 어르신이 여기서 노년 생활을 즐기기엔 딱 맞는 것 같았다. 날씨가 안 좋을 때는 옆에 있는 텃밭에서 신선한 야채들을 따다가 해 먹으면 되니 유기농과 친환경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었다.윤아가 나갔을 땐 마침 이명인이 두 녀석을 데리고 텃밭에서 야채를 따고 있었다.하윤은 자그마한 엉덩이를 내밀고 허리를 숙인 채 야채 하나를 뽑고 있었고 서훈은 옆에서 이를 도왔다. 두 녀석은 그렇게 분주히 돌아치고 있었다.이 광경을 본 윤아는 마치 구름 위를 밟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현실이 아닌 것 같았다.“엄마!”두 녀석은 윤아를 보자마자 얼른 그녀를 그쪽으로 불렀고 윤아도 그쪽으로 걸어가 쪼그리고 앉았다.“이거 어떻게 하는 거예요? 저도 도울게요.”이명인이 윤아를 힐끔 쳐다보더니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괜찮다. 그 가느다란 팔다리로 뭘 하겠다고 그러니. 얼른 안에 들어가서 쉬면서 뭐 좀 먹고 있어. 여기는 나랑 선희만 있으면 돼. 조금 있다 너희 할아버지 돌아오면 할아버지가 밥하고 우리는 기다리면 된다.”이렇게 말하더니 윤아가 반응하기도 전에 이명인은 그녀를 텃밭 밖으로 밀어냈다. 윤아가 텃밭에서 나오는데 그쪽으로 걸어오는 이선희를 만났다.이선희가 웃으며 말했다.“안에 들어가서 쉬어. 여기는 우리가 있으면 돼.”윤아는 난처해서 뭔가 말하고 싶었지만 이선희가 이렇게 말했다.“사실 엄마는 아이들이랑 있을 시간을 더 만들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노인네가 녀석들을 무척이나 좋아하거든. 녀석들이 여기 오래 있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아서 시간만 나면 녀석들이랑 같이
이 말을 하던 두 사람은 멈칫했다.수현이 자기도 모르게 윤아를 바라봤다.윤아도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한참 동안 지나서야 이렇게 반응했다.“회사? 내가 회사가 있어?”이를 들은 수현은 윤아가 기억을 찾은 줄 알았지만 이는 윤아가 무의식중에 한 말이었다.윤아의 회사만 생각하면 그들이 다시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정말 우여곡절이 많을 때였다.하나님, 만약 그녀의 기억을 되찾게 해주신다면 먼저 다른 기억을 찾아주시고 일단 이건 뒤로 미뤄주세요.이것만 떠올리고 다른 건 떠올리지 못한다면 윤아는 수현에게 안 좋은 인상을 가지게 될 것이다.이렇게 생각한 수현은 얼른 입을 열었다.“회사 일은 내가 대신 처리해 주면 되지. 너는 놀러 오고 싶으면 놀러 와. 부담 가지지 말고.”“네가 나를 돕는다고?”윤아가 눈을 깜빡이더니 말했다.“근데 너도 해야 할 일이 있는 거 아니야?”“응, 내가 두 개 다 돌보면서 내 와이프 좀 보살피겠다는데 뭐 문제 되나?”수현은 이렇게 말하며 윤아의 허리를 잡더니 다른 데로 향했다. 수현은 혹시나 윤아가 애초에 자신이 그녀를 괴롭히던 기억들은 떠오르고 잘해줬던 기억은 떠오르지 않아 두 사람의 사이에 영향 줄까 봐 무서웠다.아니나 다를까 윤아의 생각은 수현의 말에 흐트러졌고 더는 회사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전에 자신이 잘 몰랐던 일에 관해 물어보기 시작했다.예를 들면 두 사람은 언제 결혼했는지, 또 언제 만났는지 같은 질문이었다.수현에게 유리한 질문이 들어오자 수현도 매우 흔쾌히 대답해 주었다. 윤아는 수현의 대답을 듣고 나니 이해가 되었다.“우리가 소꿉친구였다고?”“응.”수현이 윤아의 뒤통수를 어루만지며 말했다.“넌 어릴 때부터 내 뒤를 따라다니기 좋아했지.”“?”윤아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그럴 리가 있나?”“어허, 기억이 없다고 이렇게 부정하면 되나? 지금 너한테 나 좋아하는지 물어보면 설마 안 좋아한다고 대답할 건 아니지?”“그걸 질문이라고? 그리고 다른 얘기잖아.”윤아가 반
점심 때가 되자 이명인의 남편 차문섭, 수현의 외조부, 녀석들의 증조부가 돌아왔다.손에는 생선 두 마리가 들려 있었고 점심에 녀석들에게 맛있는 요리를 선보여주겠다고 했다.이명인의 말을 듣고 나서야 윤아와 수현이 왔다는 걸 안 차문섭은 얼른 방으로 들어와 두 사람과 조우했다.차문섭은 온화한 사람이었다. 두 사람과 잠시 대화를 나누다 이러다 밥때를 놓치겠다며 밥하러 갔다.그러더니 이내 부뚜막에 불을 지폈다.윤아는 문가에 서서 차문섭이 주방으로 향하는 걸 지켜봤다. 이명인은 옆에서 차문섭의 요리를 거들었다.평소에도 쭉 이렇게 지내온 것 같았다.“좋아?”수현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윤아가 반응하기도 전에 수현이 말을 이어갔다.“좋으면 앞으로 우리도 늙으면 이렇게 살자.”윤아는 수현이 노후 얘기를 꺼낼 줄은 몰랐지만 얼른 머릿속에 이를 그려보며 물었다.“할아버님 할머님처럼?”“응, 할아버지, 할머니처럼. 아니면 네가 원하는 것 뭐든지.”윤아가 이렇게 말했다.“그건 좀 어렵지 않을까? 너 밥 할 줄 알아?”이 문제에 수현은 말문이 막혔다.그렇게 수현이 말이 없어지자 윤아가 고개를 들어 이렇게 물었다.“왜 말이 없어? 요리할 줄 몰라?”한참을 더 침묵하던 수현이 이렇게 말했다.“지금은 모르지만 앞으로도 모른다는 법이 있나. 앞으로 나이 들어 노후 생활 즐길 때가 되면 그때부터 배우면 되지. 10첩 반상은 아니더라도 간단한 거부터 배우면 너 배불리 먹이는 데는 문제 없을 것 같은데.”이를 들은 윤아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다.“꼭 네가 요리해야 한다는 법은 없지.”“그럼 네가 하려고?”대충 그 장면을 그려본 수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안 돼. 네가 하게 놔둘 순 없어. 그냥 내가 할게.”가녀린 몸으로 주방에서 분주히 돌아치면서 하얗고 가느다란 손목으로 설거지하고 칼을 들 생각을 하니 벌써 걱정이 되는 수현이었다.다른 남자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수현은 윤아가 그러는 건 두고 볼 수 없었다.윤아는 수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