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혁이 재수 없다고 한 건 바로 나와 뱃속에 있는 아이였다. 당장이라도 멱살을 잡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영혼으로 떠도는 나는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의사가 박주혁 앞을 막아서고 화장 비용을 지불하라고 하자 시어머니가 소리를 질렀다.“이 양심 없는 병원 같으니라고, 의사 마음대로 돈을 받는 병원이 어딨어요!”박주혁은 인상을 찌푸렸고 나만 알아볼 수 있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박주혁은 지금 시어머니가 창피했고 심기가 몹시 불편했다. 박주혁은 돈을 쓰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고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박주혁 씨, 심은하 씨는...”박주혁은 또다시 의사의 말을 끊었다.“그 여자 연기에 맞춰줄 생각 없으니까 적당히 하라고 전하세요.”박주혁은 시체 손에 끼워진 반지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것은 우리가 결혼할 때 박주혁이 나에게 준 40만도 안 되는 반지였다. 나는 잔뜩 긴장한 채 지켜보았고 박주혁이 그 반지를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정말 구려.”그 말 한마디에 나의 심장은 찢기는 듯 아팠다.박주혁이 창립한 박성 그룹은 두 번째 재무 위기를 겪었다. 첫 번째는 나의 아버지가 일으킨 것이었다. 조현서한테 차인 박주혁을 위해 나는 기꺼이 술집에서 일했고 분노한 아버지는 매체에 박성 그룹의 약점을 폭로했다. 그로 인해 고부갈등은 점점 심해졌고 시어머니는 내가 박주혁의 앞날을 막은 재앙 같은 여자라고 했다. 그때 박주혁은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사람 취급하지 않았다.“당신이 아니었다면 회사가 손해 볼 일도 없었어! 심은하, 당신을 사랑한 게 너무 후회돼.”하지만 박주혁은 내가 목숨으로 월급쟁이 아버지를 협박해서 얻은 몇천만을 사업 자금에 보탰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조현서가 울먹이면서 사무실로 들어갔고 박주혁이 도시락을 던지자 깜짝 놀랐다.“이런 것도 밥이라고 가져와? 예전에 먹던 그 식당에 연락해!”김 비서는 쭈뼛거리면서 사실대로 말하지 못했다. 박주혁은 오래전에 위병에 걸렸고 나는 박주혁을 위해 위에 무리가
나는 허공에서 박주혁을 내려다보았고 마음 한켠이 점점 아팠다. 박주혁의 전화를 기다리다가 잠든 멍청한 여자는 이제 이 세상에 없다.박주혁은 협력 상대와 자주 술자리를 가졌고 조현서의 데이트 신청을 여러 번 거절했다. 술자리에서 순순히 사실대로 말하는 사람이 없었고 모두 박주혁을 떠보고 있었다.“거의 10시가 되어가는데 평소에 전화하던 형수님이 잠잠하네요.”협력 상대 중 한 명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박주혁의 협력 상대들은 내가 저녁 9시만 되면 집에 들어오라고 전화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나를 박주혁이 좋아할 리가 없었지만 내 아이의 죽음은 너무나도 억울하고 비통했다.술잔을 들고 있던 박주혁의 손이 살짝 떨렸고 나에 관한 말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싫어하는 내색을 드러내지 않았다.“삐쳐서 전화 안 한다네요.”내 착각인지는 몰라도 박주혁이 피식 웃은 것 같았다. 협력 상대는 어떻게 아내를 달래야 하는지 가르쳐주었고 사업에 관한 말은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박주혁은 술을 많이 마셔서 여러 번 게웠지만 갖고 간 계약서가 무색해질 만큼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그러나 박주혁은 기분이 좋아 보였고 집과 멀리 떨어졌지만 내가 좋아하는 가게의 호두과자를 사 왔다. 연애할 때 호두과자를 사러 가자고 몇 번이나 졸랐지만 박주혁은 바쁘다는 이유로 거절했었다.“은하야, 네가 좋아하는 호두과자 사 왔어.”박주혁은 봉투를 들고 비틀거리면서 집으로 들어왔고 집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어느 곳에도 나는 없었다. 인내심이 바닥난 박주혁은 봉투를 바닥에 던졌고 호두과자가 바닥에 널브러졌다. 이때 전화벨 소리가 정적을 깼다. 박주혁은 히죽 웃으면서 전화를 받았지만 목소리를 가다듬고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하지만 내가 아닌 낯선 사람의 목소리에 크게 실망한 듯싶었다.“은하야, 은하 아니야?”“박주혁 씨, 안녕하세요. 심은하 씨께서 박주혁 씨 전화번호를 남기셨는데 결혼 10주년 기념 파티 원래대로 진행할까요?”내가 죽기 전에 박주혁과 결혼 10주년 기념일을 위해 준비한
나는 시어머니가 나의 아버지를 모욕하는 것을 듣고 화가 솟구쳐 올랐다. 아무 말도 하지 않던 박주혁은 시어머니에게 휴대폰을 건넸다. 시어머니가 나의 아버지한테 전화를 걸자 익숙한 컬러링이 들려왔다. 그것은 바로 내가 18살 생일 때 노래하던 녹음 파일이었는데 아버지가 나의 노랫소리를 컬러링으로 설정할 줄 몰랐다.나는 그동안 박주혁을 위해 아버지와 연락을 끊었고 몇 년 동안 아버지한테 전화 한 번 걸지 않았다. “당신 딸이 잘 지내기를 바란다면 당장 입금해.”부모는 자식을 위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시어머니의 무리한 요구를 들어주었고 박주혁에게 문자를 보냈다.[심태호: 그 아이를 더 많이 사랑해주렴.]아버지의 문자에 나는 가슴을 부여잡고 울었고 10년 동안 부모님을 찾아뵙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박주혁은 문자를 보고 한참 생각하더니 나에게 음성 메시지를 남겼다.박주혁은 낮은 목소리로 명령하듯 말했다.“심은하, 이제는 당신이랑 잘살아 보려고 해. 내가 당신을 용서했다고...”박주혁은 상처투성이가 된 내 마음에 비수를 꽂았다. 거만한 태도로 내가 잘못했다는 듯이 말하는 박주혁이 미웠다.내가 죽은 후 7일이 지났다. 박주혁은 갑자기 위에 통증을 느꼈고 배를 부여잡은 채 휴대폰을 들고 부르짖었다.“심은하, 더는 못 봐줘!”박주혁은 온종일 집에서 업무를 보았다. 갑자기 초인종 소리가 들렸고 문 앞에 해맑게 웃고 있는 조현서가 서 있었다.“주혁 오빠, 괜찮아? 은하 언니는 어디로 간 거야?”조현서는 집 안을 힐끗 쳐다보더니 박주혁을 와락 안았다.“그 술집 여자 얘기는 꺼내지도 마, 재수 없는 여자니까...”박주혁은 조현서를 데리고 안방으로 향했고 침대에 눕혀 거칠게 옷을 찢었다.“넌 이제부터 내 여자야.”박주혁은 애틋한 눈빛을 하고서 조현서를 쳐다보았다. 우리 결혼사진이 걸린 방 안에서 박주혁은 다른 여자와 사랑을 나누었다. 박주혁의 품에 안긴 조현서는 입을 삐죽 내민 채 투덜거렸다.“주혁 오빠,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나는 순간 내가 잘못 본 줄 알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왔다는 말에 박주혁이 기뻐할 리 없었기 때문이다. “주혁 오빠, 아니면 나 먼저 갈까? 은하 언니가 오해할까 봐 그래.”조현서는 박주혁이 아무런 반응도 없자 계속해서 말했다. 박주혁은 조현서를 품에 안았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괜찮아, 감히 그러지도 못하는 사람이야.”나는 박주혁이 자신만만해하는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이 별장은 내가 결혼하는 해에 아버지가 사준 것이었고 시댁에서 괴롭힘당할까 봐 평생 모은 돈으로 우리를 위해 장만해 준 것이었다. 나와 박주혁을 제외하고는 아버지만 이 집 열쇠를 갖고 있었다.난 진작에 죽었으니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아버지일 것이다. 나는 박주혁이 나를 어떻게 말하든 상관없으니 당장 숨으라고 말하고 싶었다. 나는 아버지가 이 잔인한 상황을 몰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아버님,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세요?”박주혁은 내가 아닌 아버지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거만하게 말했다. 아버지는 씩씩대더니 파르르 떨리는 손가락으로 박주혁과 조현서를 가리켰다.“은하는 어디에 있어? 어디에 있는 거냐고! 난 은하를 데리고 갈 거야, 네가 감히 은하를 두고 다른 여자랑 놀아나?”나는 아버지의 다리를 붙잡고 애원했지만 소용없었다. 나는 그동안 불효자로 살았고 부모님을 제대로 찾아뵙지도 못했으면서 걱정만 끼쳤다. “아버님 딸은 집에 들어오지도 않았어요, 다른 남자랑 같이 있을지도 모르죠.” 박주혁은 회사가 잘 되고 나서부터 사람들의 환대를 받았기에 비난 같은 건 들어줄 리가 없었다. 조현서도 곁에서 한마디 거들었다.“아저씨, 은하 언니는 집에 들어오지도 않고 주혁 오빠가 아픈데도 상관하지 않았어요. 도대체 딸을 어떻게 가르치신 거예요?”나는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조현서의 뺨을 마구 후려갈기고 싶었다. 불륜녀 주제에 감히 내 아버지를 모욕하다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내 말 못 들었어? 당장 예전에 주문했던 그 식당 밥을 가져오라고!”김 비서는 박주혁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두려웠지만 더 이상 숨길 수 없어서 솔직하게 말했다.“대표님, 사실 예전에 대표님이 드시던 밥은 사모님이 직접 요리한 것이에요. 그런데 최근에는 가져다주지 않았고요.”박주혁은 처음 듣는 말에 깜짝 놀랐고 김 비서한테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심은하, 대체 언제까지 고집부릴 거야?”박주혁은 나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내가 고집부린다고 여겼다. 김 비서를 시켜 나의 아버지를 만나고 싶다는 말을 전했지만 아버지는 단번에 거절했다.“주혁 오빠, 은하 언니 정말 죽은 건 아니겠지?”조현서는 박주혁의 품에 안겨서 해맑게 웃고 있었다. 조현서의 어깨를 부여잡은 박주혁의 손에 힘이 들어가자 조현서는 인상을 찌푸렸고 입을 삐죽 내밀었다. 박주혁은 대충 사과하고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나쁜 짓을 저지른 나도 멀쩡하게 살아있는데 네가 어떻게 죽을 수가 있어...”애써 미소 짓는 박주혁이 어쩐지 낯설게만 느껴졌다. 박주혁은 매일 집에 일찍 돌아왔고 조현서가 집에 들어오지 못하고 막았다.“현서야, 은하가 요즘 화가 나서 집에 들어오지 않고 있어. 당분간 만나지 말자, 다시는 우리 집에 찾아오지 말았으면 좋겠어.”조현서는 눈물을 흘렸고 믿기지 않는 듯 두 손을 덜덜 떨었다. 조현서가 아니라 나조차도 믿기지 않았다. 박주혁이 나를 위해 조현서를 거절하다니, 참으로 희한한 일이었다.조현서가 대답하기도 전에 박주혁이 문을 닫았다. 쓰레기에 곰팡이가 생겼지만 못 본 척 고개를 돌렸고 위스키를 꺼내 반병을 한 번에 다 마셨다. 술기운이 올라오자 박주혁은 비틀거리면서 말했다.“심은하, 이제는 집에 돌아와. 앞으로 그 여자랑 안 만나기로 했으니까...”박주혁은 여태껏 내가 화나서 집에 돌아오지 않는 줄 알았다. 적막이 흐르자 박주혁은 나머지 반병마저 다 마셨고 위병이 도져서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심은하, 이제야 만족해? 내가 당신 없이 못 살 것 같아?”
갑작스러운 나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박주현은 목 놓아 울었다. 환하게 웃고 있는 나의 영정 사진을 끌어안고는 조심스럽게 나의 얼굴을 매만졌다. 영정 사진 옆에 내가 끼던 결혼반지가 놓여 있었는데 박주혁이 사준 반지였다. 다른 하나는 박주혁이 가지고 있었고 구차해 보인다고 하면서 껴본 적이 없었다.박주혁은 바닥에 주저앉아 부르짖었고 영정 사진을 손에서 내려놓지 않았다.“심은하, 당신 정말 이럴 거야? 어떻게 죽음으로 나에게 벌을 줄 수가 있어!”박주혁이 나의 장례식에서 우는 모습이 인터넷에 공개되었고 박주혁은 집에서 한 발짝도 나오려 하지 않았다. 배고프면 쓰레기통을 뒤져서 버렸던 반찬을 그대로 주워 먹었고 화분의 흙이 묻었는지도 모른 채 계속해서 입에 넣더니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은하야, 나 배고파. 맛있는 요리 해준다면서 왜 안 와?”허공에 떠 있는 나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죽고 나서야 박주혁은 나를 사랑해 주었다. 술집 여자로 욕먹던 나는 박주혁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을 것이고 박주혁이 살아있는 한 나를 떠올릴 때마다 고통스러울 것이다. 박주혁은 매일 술에 찌들어 살다가 구급차에 실려 갔고 병원으로 가는 길 내내 미소를 잃지 않았다. “은하야, 나도 너만큼 아파보니까 알겠어. 이제는 돌아와 줄 거지?”박주혁은 허공을 보면서 애원했고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은하야, 술을 마셔도 네가 보이지 않아. 어떡해?”박성 그룹의 주가가 폭락했고 주주들은 박주혁이 회사를 운영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박주혁은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상관하지 않고 내가 먹이를 챙겨주던 유기견을 찾아갔다. 유기견은 박주혁이 가져온 비싼 사료를 입에 대지도 않더니 박주혁의 머플러를 물었다. 지난겨울에 내가 박주혁을 위해 직접 만든 머플러인데 박주혁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내가 죽고 나서 찾아온 뜨거운 여름에 박주혁은 머플러를 끼기 시작했다. 언제나 어긋나는 우리의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유기견은 머플러를 물고 뒤쪽에 가져다 놓았
“어머니, 제가 은하한테 잘못한 거니까 아버님을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박주혁은 하룻밤 사이에 양심이 생겼는지 시어머니를 데리고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가자 조현서는 박주혁의 아내라도 된 것처럼 행동했다. 나의 물건은 전부 사라졌고 옷장에는 조현서와 박주혁의 옷으로 가득 찼다.“주혁 오빠, 술집 여자 물건은 내가 다 알아서 버렸으니 걱정하지 마. 앞으로 나랑 뱃속의 아이가 오빠 곁에 있어 줄게.”박주혁은 화가 솟구쳐 올랐고 조현서의 뺨을 후려갈겼다.“네가 뭔데 은하 물건에 손을 대?”조현서와 시어머니는 그 자리에 굳었고 아무도 박주혁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박주혁은 조현서가 보는 앞에서 조현서의 물건을 전부 문밖으로 던졌고 소리를 질렀다.“은하 물건 어디에 버린 거야!”“주혁아, 현서 뱃속에 네 아이가 있다잖아.”시어머니는 손주한테 영향 줄까 봐 박주혁을 말리려 했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난 은하를 닮은 아이만 원해요. 조현서 뱃속에 있는 건 사생아잖아요!”박주혁은 책상 위의 물건을 전부 쓰러뜨리면서 화풀이했고 그 모습을 본 조현서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박주혁은 조현서가 울든 말든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조현서와 시어머니가 자리를 피했고 박주혁은 집안 서랍을 다 뒤지면서 나랑 맞추었던 결혼반지를 찾으려 했다. “반지, 내 반지 어디 갔어!”반지를 찾은 박주혁은 눈물을 흘렸고 차가운 반지를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은하야, 날 용서해 줘. 나랑 결혼해 줄래?”박주혁은 입을 맞춘 반지를 들고 한 쪽 무릎을 꿇은 채 허공에 대고 말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 이 반지는 40만도 채 되지 않았지만 돈이 없었던 박주혁이 그때 나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었다.“은하야, 그동안 고생 많았어. 이제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당신에게 줄게.”그때 박주혁은 나에게 고마운 마음 정도는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재산과 명예가 아니라 변함없는 박주혁의 사랑이었다.박주혁은 준비를 마친 뒤 회사로 향했고 김 비서는
박주혁은 운전대를 잡고 나의 아버지 집으로 향했다. 아버지는 박주혁의 고집에 못 이겨 나의 묘비로 데리고 갔다. 박주혁은 무릎을 꿇은 채 울먹였다.“은하야, 조금만 더 기다려줘. 전부 해결되면 당신을 찾으러 갈게!”아버지는 부채를 든 채 박주혁을 차가운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박주혁은 진실을 알게 되었고 나의 묘비를 안고서 끊임없이 용서를 빌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죽었기에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어머니, 저 현서랑 결혼할게요.”박주혁은 주먹을 꽉 쥐었고 복수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몇 분 후, 조현서가 전화를 걸어왔고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주혁 오빠, 잘 생각했어! 오빠가 사랑하는 여자는 바로 나야.”박주혁은 조현서의 말에 피식 웃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난 이제야 누구를 사랑하는지 알게 되었거든.”결혼식장을 고를 때 박주혁은 자세히 둘러보지도 않고 대충 정했다. 그러자 조현서가 투덜거렸고 박주혁은 미소를 지으면서 차가운 말을 내뱉었다.“은하는 이렇게 까다롭지 않았어.”예전에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뻤기에 다른 것은 신경 쓰지 않았다. 박주혁은 입에 담배를 문 채 미간을 찌푸렸고 나와 맞춘 결혼반지를 매만지면서 다시 미소를 지었다.“은하야, 조금만 기다려줘.”나는 여태껏 바보처럼 박주혁이 나를 돌아봐 주길 기다렸었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결혼식 날, 박주혁은 고급스러운 정장을 입고 나타났다. 박주혁은 우리가 결혼할 때 입은 정장은 옷장에 걸어두고 매일 옷장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그다음 순서는 신랑 신부의 영상이 나올 차례였는데 갑자기 조현서가 바람난 현장 영상이 나타났다. 영상 속의 조현서는 옷을 벗어 던졌고 낯선 남자와 침대에서 뒹굴었다. 하객들이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할 때, 오직 박주혁만이 덤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체면을 중요하게 생각하던 박주혁은 하객들이 수군거려도 그 자리에 꿋꿋이 서 있었다.시어머니는 달려가서 조현서를 마구 때렸고 모진 말을 뱉었다.“몸을 함부로 굴리는 년이
박주혁은 운전대를 잡고 나의 아버지 집으로 향했다. 아버지는 박주혁의 고집에 못 이겨 나의 묘비로 데리고 갔다. 박주혁은 무릎을 꿇은 채 울먹였다.“은하야, 조금만 더 기다려줘. 전부 해결되면 당신을 찾으러 갈게!”아버지는 부채를 든 채 박주혁을 차가운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박주혁은 진실을 알게 되었고 나의 묘비를 안고서 끊임없이 용서를 빌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죽었기에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어머니, 저 현서랑 결혼할게요.”박주혁은 주먹을 꽉 쥐었고 복수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몇 분 후, 조현서가 전화를 걸어왔고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주혁 오빠, 잘 생각했어! 오빠가 사랑하는 여자는 바로 나야.”박주혁은 조현서의 말에 피식 웃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난 이제야 누구를 사랑하는지 알게 되었거든.”결혼식장을 고를 때 박주혁은 자세히 둘러보지도 않고 대충 정했다. 그러자 조현서가 투덜거렸고 박주혁은 미소를 지으면서 차가운 말을 내뱉었다.“은하는 이렇게 까다롭지 않았어.”예전에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뻤기에 다른 것은 신경 쓰지 않았다. 박주혁은 입에 담배를 문 채 미간을 찌푸렸고 나와 맞춘 결혼반지를 매만지면서 다시 미소를 지었다.“은하야, 조금만 기다려줘.”나는 여태껏 바보처럼 박주혁이 나를 돌아봐 주길 기다렸었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결혼식 날, 박주혁은 고급스러운 정장을 입고 나타났다. 박주혁은 우리가 결혼할 때 입은 정장은 옷장에 걸어두고 매일 옷장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그다음 순서는 신랑 신부의 영상이 나올 차례였는데 갑자기 조현서가 바람난 현장 영상이 나타났다. 영상 속의 조현서는 옷을 벗어 던졌고 낯선 남자와 침대에서 뒹굴었다. 하객들이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할 때, 오직 박주혁만이 덤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체면을 중요하게 생각하던 박주혁은 하객들이 수군거려도 그 자리에 꿋꿋이 서 있었다.시어머니는 달려가서 조현서를 마구 때렸고 모진 말을 뱉었다.“몸을 함부로 굴리는 년이
“어머니, 제가 은하한테 잘못한 거니까 아버님을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박주혁은 하룻밤 사이에 양심이 생겼는지 시어머니를 데리고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가자 조현서는 박주혁의 아내라도 된 것처럼 행동했다. 나의 물건은 전부 사라졌고 옷장에는 조현서와 박주혁의 옷으로 가득 찼다.“주혁 오빠, 술집 여자 물건은 내가 다 알아서 버렸으니 걱정하지 마. 앞으로 나랑 뱃속의 아이가 오빠 곁에 있어 줄게.”박주혁은 화가 솟구쳐 올랐고 조현서의 뺨을 후려갈겼다.“네가 뭔데 은하 물건에 손을 대?”조현서와 시어머니는 그 자리에 굳었고 아무도 박주혁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박주혁은 조현서가 보는 앞에서 조현서의 물건을 전부 문밖으로 던졌고 소리를 질렀다.“은하 물건 어디에 버린 거야!”“주혁아, 현서 뱃속에 네 아이가 있다잖아.”시어머니는 손주한테 영향 줄까 봐 박주혁을 말리려 했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난 은하를 닮은 아이만 원해요. 조현서 뱃속에 있는 건 사생아잖아요!”박주혁은 책상 위의 물건을 전부 쓰러뜨리면서 화풀이했고 그 모습을 본 조현서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박주혁은 조현서가 울든 말든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조현서와 시어머니가 자리를 피했고 박주혁은 집안 서랍을 다 뒤지면서 나랑 맞추었던 결혼반지를 찾으려 했다. “반지, 내 반지 어디 갔어!”반지를 찾은 박주혁은 눈물을 흘렸고 차가운 반지를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은하야, 날 용서해 줘. 나랑 결혼해 줄래?”박주혁은 입을 맞춘 반지를 들고 한 쪽 무릎을 꿇은 채 허공에 대고 말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 이 반지는 40만도 채 되지 않았지만 돈이 없었던 박주혁이 그때 나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었다.“은하야, 그동안 고생 많았어. 이제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당신에게 줄게.”그때 박주혁은 나에게 고마운 마음 정도는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재산과 명예가 아니라 변함없는 박주혁의 사랑이었다.박주혁은 준비를 마친 뒤 회사로 향했고 김 비서는
갑작스러운 나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박주현은 목 놓아 울었다. 환하게 웃고 있는 나의 영정 사진을 끌어안고는 조심스럽게 나의 얼굴을 매만졌다. 영정 사진 옆에 내가 끼던 결혼반지가 놓여 있었는데 박주혁이 사준 반지였다. 다른 하나는 박주혁이 가지고 있었고 구차해 보인다고 하면서 껴본 적이 없었다.박주혁은 바닥에 주저앉아 부르짖었고 영정 사진을 손에서 내려놓지 않았다.“심은하, 당신 정말 이럴 거야? 어떻게 죽음으로 나에게 벌을 줄 수가 있어!”박주혁이 나의 장례식에서 우는 모습이 인터넷에 공개되었고 박주혁은 집에서 한 발짝도 나오려 하지 않았다. 배고프면 쓰레기통을 뒤져서 버렸던 반찬을 그대로 주워 먹었고 화분의 흙이 묻었는지도 모른 채 계속해서 입에 넣더니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은하야, 나 배고파. 맛있는 요리 해준다면서 왜 안 와?”허공에 떠 있는 나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죽고 나서야 박주혁은 나를 사랑해 주었다. 술집 여자로 욕먹던 나는 박주혁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을 것이고 박주혁이 살아있는 한 나를 떠올릴 때마다 고통스러울 것이다. 박주혁은 매일 술에 찌들어 살다가 구급차에 실려 갔고 병원으로 가는 길 내내 미소를 잃지 않았다. “은하야, 나도 너만큼 아파보니까 알겠어. 이제는 돌아와 줄 거지?”박주혁은 허공을 보면서 애원했고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은하야, 술을 마셔도 네가 보이지 않아. 어떡해?”박성 그룹의 주가가 폭락했고 주주들은 박주혁이 회사를 운영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박주혁은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상관하지 않고 내가 먹이를 챙겨주던 유기견을 찾아갔다. 유기견은 박주혁이 가져온 비싼 사료를 입에 대지도 않더니 박주혁의 머플러를 물었다. 지난겨울에 내가 박주혁을 위해 직접 만든 머플러인데 박주혁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내가 죽고 나서 찾아온 뜨거운 여름에 박주혁은 머플러를 끼기 시작했다. 언제나 어긋나는 우리의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유기견은 머플러를 물고 뒤쪽에 가져다 놓았
“내 말 못 들었어? 당장 예전에 주문했던 그 식당 밥을 가져오라고!”김 비서는 박주혁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두려웠지만 더 이상 숨길 수 없어서 솔직하게 말했다.“대표님, 사실 예전에 대표님이 드시던 밥은 사모님이 직접 요리한 것이에요. 그런데 최근에는 가져다주지 않았고요.”박주혁은 처음 듣는 말에 깜짝 놀랐고 김 비서한테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심은하, 대체 언제까지 고집부릴 거야?”박주혁은 나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내가 고집부린다고 여겼다. 김 비서를 시켜 나의 아버지를 만나고 싶다는 말을 전했지만 아버지는 단번에 거절했다.“주혁 오빠, 은하 언니 정말 죽은 건 아니겠지?”조현서는 박주혁의 품에 안겨서 해맑게 웃고 있었다. 조현서의 어깨를 부여잡은 박주혁의 손에 힘이 들어가자 조현서는 인상을 찌푸렸고 입을 삐죽 내밀었다. 박주혁은 대충 사과하고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나쁜 짓을 저지른 나도 멀쩡하게 살아있는데 네가 어떻게 죽을 수가 있어...”애써 미소 짓는 박주혁이 어쩐지 낯설게만 느껴졌다. 박주혁은 매일 집에 일찍 돌아왔고 조현서가 집에 들어오지 못하고 막았다.“현서야, 은하가 요즘 화가 나서 집에 들어오지 않고 있어. 당분간 만나지 말자, 다시는 우리 집에 찾아오지 말았으면 좋겠어.”조현서는 눈물을 흘렸고 믿기지 않는 듯 두 손을 덜덜 떨었다. 조현서가 아니라 나조차도 믿기지 않았다. 박주혁이 나를 위해 조현서를 거절하다니, 참으로 희한한 일이었다.조현서가 대답하기도 전에 박주혁이 문을 닫았다. 쓰레기에 곰팡이가 생겼지만 못 본 척 고개를 돌렸고 위스키를 꺼내 반병을 한 번에 다 마셨다. 술기운이 올라오자 박주혁은 비틀거리면서 말했다.“심은하, 이제는 집에 돌아와. 앞으로 그 여자랑 안 만나기로 했으니까...”박주혁은 여태껏 내가 화나서 집에 돌아오지 않는 줄 알았다. 적막이 흐르자 박주혁은 나머지 반병마저 다 마셨고 위병이 도져서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심은하, 이제야 만족해? 내가 당신 없이 못 살 것 같아?”
나는 순간 내가 잘못 본 줄 알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왔다는 말에 박주혁이 기뻐할 리 없었기 때문이다. “주혁 오빠, 아니면 나 먼저 갈까? 은하 언니가 오해할까 봐 그래.”조현서는 박주혁이 아무런 반응도 없자 계속해서 말했다. 박주혁은 조현서를 품에 안았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괜찮아, 감히 그러지도 못하는 사람이야.”나는 박주혁이 자신만만해하는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이 별장은 내가 결혼하는 해에 아버지가 사준 것이었고 시댁에서 괴롭힘당할까 봐 평생 모은 돈으로 우리를 위해 장만해 준 것이었다. 나와 박주혁을 제외하고는 아버지만 이 집 열쇠를 갖고 있었다.난 진작에 죽었으니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아버지일 것이다. 나는 박주혁이 나를 어떻게 말하든 상관없으니 당장 숨으라고 말하고 싶었다. 나는 아버지가 이 잔인한 상황을 몰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아버님,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세요?”박주혁은 내가 아닌 아버지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거만하게 말했다. 아버지는 씩씩대더니 파르르 떨리는 손가락으로 박주혁과 조현서를 가리켰다.“은하는 어디에 있어? 어디에 있는 거냐고! 난 은하를 데리고 갈 거야, 네가 감히 은하를 두고 다른 여자랑 놀아나?”나는 아버지의 다리를 붙잡고 애원했지만 소용없었다. 나는 그동안 불효자로 살았고 부모님을 제대로 찾아뵙지도 못했으면서 걱정만 끼쳤다. “아버님 딸은 집에 들어오지도 않았어요, 다른 남자랑 같이 있을지도 모르죠.” 박주혁은 회사가 잘 되고 나서부터 사람들의 환대를 받았기에 비난 같은 건 들어줄 리가 없었다. 조현서도 곁에서 한마디 거들었다.“아저씨, 은하 언니는 집에 들어오지도 않고 주혁 오빠가 아픈데도 상관하지 않았어요. 도대체 딸을 어떻게 가르치신 거예요?”나는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조현서의 뺨을 마구 후려갈기고 싶었다. 불륜녀 주제에 감히 내 아버지를 모욕하다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나는 시어머니가 나의 아버지를 모욕하는 것을 듣고 화가 솟구쳐 올랐다. 아무 말도 하지 않던 박주혁은 시어머니에게 휴대폰을 건넸다. 시어머니가 나의 아버지한테 전화를 걸자 익숙한 컬러링이 들려왔다. 그것은 바로 내가 18살 생일 때 노래하던 녹음 파일이었는데 아버지가 나의 노랫소리를 컬러링으로 설정할 줄 몰랐다.나는 그동안 박주혁을 위해 아버지와 연락을 끊었고 몇 년 동안 아버지한테 전화 한 번 걸지 않았다. “당신 딸이 잘 지내기를 바란다면 당장 입금해.”부모는 자식을 위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시어머니의 무리한 요구를 들어주었고 박주혁에게 문자를 보냈다.[심태호: 그 아이를 더 많이 사랑해주렴.]아버지의 문자에 나는 가슴을 부여잡고 울었고 10년 동안 부모님을 찾아뵙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박주혁은 문자를 보고 한참 생각하더니 나에게 음성 메시지를 남겼다.박주혁은 낮은 목소리로 명령하듯 말했다.“심은하, 이제는 당신이랑 잘살아 보려고 해. 내가 당신을 용서했다고...”박주혁은 상처투성이가 된 내 마음에 비수를 꽂았다. 거만한 태도로 내가 잘못했다는 듯이 말하는 박주혁이 미웠다.내가 죽은 후 7일이 지났다. 박주혁은 갑자기 위에 통증을 느꼈고 배를 부여잡은 채 휴대폰을 들고 부르짖었다.“심은하, 더는 못 봐줘!”박주혁은 온종일 집에서 업무를 보았다. 갑자기 초인종 소리가 들렸고 문 앞에 해맑게 웃고 있는 조현서가 서 있었다.“주혁 오빠, 괜찮아? 은하 언니는 어디로 간 거야?”조현서는 집 안을 힐끗 쳐다보더니 박주혁을 와락 안았다.“그 술집 여자 얘기는 꺼내지도 마, 재수 없는 여자니까...”박주혁은 조현서를 데리고 안방으로 향했고 침대에 눕혀 거칠게 옷을 찢었다.“넌 이제부터 내 여자야.”박주혁은 애틋한 눈빛을 하고서 조현서를 쳐다보았다. 우리 결혼사진이 걸린 방 안에서 박주혁은 다른 여자와 사랑을 나누었다. 박주혁의 품에 안긴 조현서는 입을 삐죽 내민 채 투덜거렸다.“주혁 오빠,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나는 허공에서 박주혁을 내려다보았고 마음 한켠이 점점 아팠다. 박주혁의 전화를 기다리다가 잠든 멍청한 여자는 이제 이 세상에 없다.박주혁은 협력 상대와 자주 술자리를 가졌고 조현서의 데이트 신청을 여러 번 거절했다. 술자리에서 순순히 사실대로 말하는 사람이 없었고 모두 박주혁을 떠보고 있었다.“거의 10시가 되어가는데 평소에 전화하던 형수님이 잠잠하네요.”협력 상대 중 한 명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박주혁의 협력 상대들은 내가 저녁 9시만 되면 집에 들어오라고 전화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나를 박주혁이 좋아할 리가 없었지만 내 아이의 죽음은 너무나도 억울하고 비통했다.술잔을 들고 있던 박주혁의 손이 살짝 떨렸고 나에 관한 말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싫어하는 내색을 드러내지 않았다.“삐쳐서 전화 안 한다네요.”내 착각인지는 몰라도 박주혁이 피식 웃은 것 같았다. 협력 상대는 어떻게 아내를 달래야 하는지 가르쳐주었고 사업에 관한 말은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박주혁은 술을 많이 마셔서 여러 번 게웠지만 갖고 간 계약서가 무색해질 만큼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그러나 박주혁은 기분이 좋아 보였고 집과 멀리 떨어졌지만 내가 좋아하는 가게의 호두과자를 사 왔다. 연애할 때 호두과자를 사러 가자고 몇 번이나 졸랐지만 박주혁은 바쁘다는 이유로 거절했었다.“은하야, 네가 좋아하는 호두과자 사 왔어.”박주혁은 봉투를 들고 비틀거리면서 집으로 들어왔고 집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어느 곳에도 나는 없었다. 인내심이 바닥난 박주혁은 봉투를 바닥에 던졌고 호두과자가 바닥에 널브러졌다. 이때 전화벨 소리가 정적을 깼다. 박주혁은 히죽 웃으면서 전화를 받았지만 목소리를 가다듬고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하지만 내가 아닌 낯선 사람의 목소리에 크게 실망한 듯싶었다.“은하야, 은하 아니야?”“박주혁 씨, 안녕하세요. 심은하 씨께서 박주혁 씨 전화번호를 남기셨는데 결혼 10주년 기념 파티 원래대로 진행할까요?”내가 죽기 전에 박주혁과 결혼 10주년 기념일을 위해 준비한
박주혁이 재수 없다고 한 건 바로 나와 뱃속에 있는 아이였다. 당장이라도 멱살을 잡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영혼으로 떠도는 나는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의사가 박주혁 앞을 막아서고 화장 비용을 지불하라고 하자 시어머니가 소리를 질렀다.“이 양심 없는 병원 같으니라고, 의사 마음대로 돈을 받는 병원이 어딨어요!”박주혁은 인상을 찌푸렸고 나만 알아볼 수 있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박주혁은 지금 시어머니가 창피했고 심기가 몹시 불편했다. 박주혁은 돈을 쓰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고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박주혁 씨, 심은하 씨는...”박주혁은 또다시 의사의 말을 끊었다.“그 여자 연기에 맞춰줄 생각 없으니까 적당히 하라고 전하세요.”박주혁은 시체 손에 끼워진 반지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것은 우리가 결혼할 때 박주혁이 나에게 준 40만도 안 되는 반지였다. 나는 잔뜩 긴장한 채 지켜보았고 박주혁이 그 반지를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정말 구려.”그 말 한마디에 나의 심장은 찢기는 듯 아팠다.박주혁이 창립한 박성 그룹은 두 번째 재무 위기를 겪었다. 첫 번째는 나의 아버지가 일으킨 것이었다. 조현서한테 차인 박주혁을 위해 나는 기꺼이 술집에서 일했고 분노한 아버지는 매체에 박성 그룹의 약점을 폭로했다. 그로 인해 고부갈등은 점점 심해졌고 시어머니는 내가 박주혁의 앞날을 막은 재앙 같은 여자라고 했다. 그때 박주혁은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사람 취급하지 않았다.“당신이 아니었다면 회사가 손해 볼 일도 없었어! 심은하, 당신을 사랑한 게 너무 후회돼.”하지만 박주혁은 내가 목숨으로 월급쟁이 아버지를 협박해서 얻은 몇천만을 사업 자금에 보탰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조현서가 울먹이면서 사무실로 들어갔고 박주혁이 도시락을 던지자 깜짝 놀랐다.“이런 것도 밥이라고 가져와? 예전에 먹던 그 식당에 연락해!”김 비서는 쭈뼛거리면서 사실대로 말하지 못했다. 박주혁은 오래전에 위병에 걸렸고 나는 박주혁을 위해 위에 무리가
나는 박주혁이 나를 단 한 번도 진심으로 사랑한 적이 없었을까 봐 겁났다. 박주혁은 내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달콤한 말로 나를 현혹했다.“바보야, 난 당신 남편인데 당연히 당신을 사랑하지.”나는 간신히 미소를 지으면서 깊은 잠에 빠졌다. 골수 이식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조현서는 회복에 전념했다. 나는 아이를 지키지 못했고 외로운 영혼이 되어 이 세상을 떠돌았다. 아이는 아직 사람 모양조차 나타나지 않았을 정도로 작아서 영혼으로 남아 내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 박주혁을 만난 순간에 운을 다 써버려서 아직 이 세상을 한 눈도 보지 못한 아이를 지켜주지 못했고 허망하게 수술대에서 숨을 거두었다.내 뱃속에 사랑스러운 아이가 잠들어 있었지만 양심 없는 의사가 골수 이식 수술을 하기 위해 진실을 숨겼고 나와 내 아이를 죽였다. 박주혁은 조금 전까지 나한테 사랑한다고 해놓고 뒤돌아서 조현서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나는 분명 죽었는데도 그 모습을 보고 심장이 찢어질 듯 아팠다. 이때 시어머니 이영화가 달려오더니 문을 열고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나와 박주혁의 결혼식 날에 몸이 안 좋다는 핑계로 참석하지 않았는데 그것도 결국 거짓말이었다. “현서는 그 술집 여자랑 다르게 마음도 예쁘고 착해. 볼수록 우리 주혁이랑 잘 어울리는구나.”시어머니는 내가 박주혁을 위해 술집에서 일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곁에서 듣고 있던 간호사가 의사한테 사실을 알려주라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그 의사는 나를 수술해 준 의사가 아닌 것 같았다. 이때 의사가 입을 열었다.“박주혁 씨, 심은하 씨는...”의사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박주혁이 말을 끊었다.“얼마면 되죠?”시어머니는 어깨를 으쓱했고 의사한테 얼마를 주든지 관심 없었다.“왜 그 여자 얘기를 꺼내는 거죠? 지금 분위기도 좋았는데, 평소에 눈치가 없는 편인가 봐요?”의사는 내가 생전에 박주혁의 이름만 부르던 것이 생각나서 말했다.“심은하 씨는 숨을 거두기 전까지 박주혁 씨만 찾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