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아닐 것이다.하지만 반원명은 왜 이 목소리를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것 같은 걸까?원래 평온해야 할 주치의는 수술실에 들어서기 전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갓 자란 여자아이였다.여자아이는 아주 못생겼다.주근깨로 가득한 얼굴.낮은 콧대.작디작은 눈에 울어서 빨갛게 달아오른 코까지.그녀는 마치 길 잃은 아이가 가족을 발견한 것처럼 그렁그렁하면서도 기쁨에 어린 표정으로 팔을 뻗은 채 그에게 달려왔다.그녀는 대체 그를 누구로 여긴 걸까?그 순간 반원명은 20대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자신을 아빠로 여긴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아빠?아니.그녀는 조금 전 그를 넷째 삼촌이라고 불렀다.그렇다.그녀는 그를 아버지 버금인 삼촌으로 여겼다.그는 늘 자식을 원했다.하지만 줄곧 자식이 없었다.그는 이미 자식을 포기하고 남은 생을 모두 의술개발에 전념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이미 과거를 완전히 청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여자아이의 등장에 아빠가 되고 싶었던 그의 마음을 서서히 불러일으켰다.반원명은 아주 이성적인 의사였다.오늘은 그의 첫 수술이 있는 날이기 때문에 다른 잡생각에 휩싸여서는 안 된다 다짐했다. 이번 수술은 그에게 있어 아주 중요했다.때문에 그는 단호하게 그 여자아이를 무시하고 수술실로 들어갔다. 모든 잡생각을 뒤로 하고 오로지 환자에게만 집중했다.수술은 총 여섯 시간 동안 진행되었다.칼을 대는 순간 그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건 그가 가장 사랑하는 직업이었다.환자의 목숨을 구하는 건 그의 취미중 하나였다. 수술 하나를 성공적으로 마칠 때마다 마치 어려운 문제를 푼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그는 그 과정을 즐겼을뿐더러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에 자신감이 샘솟았다.6시간 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봉합을 마친 순간 반원명도 지쳐서 긴장이 풀렸다. 입술은 갈라질 대로 갈라졌고 두 다리와 팔도 후들후들 떨렸다.하지만 마음은 후련했다.너무 후련한 나머지 못생겼지만 귀엽고 불쌍한 동시에 콧등이 빨개서 울고 있던 여
남성 병원 주위에 있는 한 레스토랑에서 반원명은 한 시간 너머 부소경에게 자신의 과거를 얘기해주었다.그는 눈앞에 앉아있는 남자가 왜 이리도 할 얘기가 많은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그는 F그룹 부 대표를 알고 있었다.단지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처럼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의사가 남성에서 가장 유명한 남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뿐이었다.자세히 관찰하던 끝에 반원명은 아주 중요한 점을 발견했다.그는 그와 부소경이 아주 닮은 것을 발견했다.이건?어떤 인연이지?짧디짧은 하루라는 시간 동안.그의 인생은 마치 지구에서 다른 행성으로 옮긴 것처럼 느껴졌다. 원래 살던 지구에는 가족이 없었다.하지만 또 다른 행성에선 가족들에게 둘러싸인 느낌이었다."부 대표님, 전... 전 그냥 얼마 전 남성 병원에 취직하게 된 의사입니다. 20여 년 전 처음 남성에 발을 디뎌 대학 공부와 대학원 공부를 7년에 거쳐 마쳤고 최근에야 남성에 자리 잡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남성에 오자마자... 이렇게 가족분들을 만나 뵐 줄은 몰랐네요."말을 마친 반원명은 신유리를 바라보며 물었다."이분은... 대표님 따님인가요?"부소경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미소를 지은 채 반원명을 바라보았다.그는 사실 웃음이 적은 사람이었다. 회사나 다른 장소에서도 부소경은 즐겨 웃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오로지 가족 앞에서만 자신의 부드러운 면을 드러내 보이곤 했다.그런데 반원명 앞에서 그는 활짝 미소를 짓고 있었다.반원명은 두 시간을 거쳐 자신의 과거를 얘기해주었다. 그리고 부소경도 반원명의 밝은 성격과 너그러운 마음을 알게 되었다.반원명은 그의 동생 반호영과 아주 닮았다.신기할 정도로 닮았다.하지만 그는 반호영보다 부드럽고 마음이 너그러웠다.반호영은 귀한 집 도련님 같은 이미지인 데다 우울한 성격을 갖고 있었다.게다가 반호영은 자신이 당하면 반드시 되갚아 주어야 하는 성격이었다.되갚아 줄 때 그는 형인 부소경처럼 절대 봐준다는 의식이 없었다.하지만 반원
그는 줄곧 자신이 가져야 할 것과 가지지 말아야 할 것을 잘 알고 있었다.부씨 가문 반쪽 재산이 과연 숫자로 셀 수 있는 존재란 말인가?게다가 부씨 가문이 지금처럼 유명해지게 된 것도 최근 10년 동안 부소경이 쌓아 올린 공 덕분이었다. 부소경 덕분에 부씨 가문 재산이 열 배로 늘어나게 되었다.한낱 외부인인 그가 무슨 이유로 열심히 쌓아올린 남의 재산을 거저 가진단 말인가?싫다.그는 가족 사랑 하나로 충분했다.반원명은 담담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이윽고 편안한 중저음 목소리로 대답했다."아닙니다, 부 대표님. 저는 사실 돈은 많은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먹고 사는 데 문제없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남성 최고 병원에서 주치의로 일하면서 받는 월급도 이 도시에선 중고소득에 속합니다. 남성에 집 한 채 하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말을 마친 반원명은 지영주와 반명선을 바라보았다.그는 지영주가 자신을 반호영으로 착각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사실 그도 그를 반호영이라 생각하고 있었다.지영주와 반명선을 만나기 전까진 그저 꿈이라 여겼었다. 하지만 지영주와 반명선을 만난 뒤에는 우주에서 일어난 기적이라고 여기게 되었다.예를 들면 환혼?이걸 환혼이라고 할 수 있는가?현대 의학자인 반원명은 이에 믿음이 가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또 너그럽게 이를 받아들였다.그의 뇌는 이미 손상을 입었고 현재 그의 뇌는 그의 것이 아니었다.그의 뇌 속에는 또 다른 사람의 영혼이 들어있었다.그 사람이 바로 반호영이다.반호영은 자신의 조카딸이 대학 공부를 할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그는 자신을 사랑하는 여자가 속상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때문에 반원명이 해야 할 일은 지영주를 아내로 맞이하는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버림받은 여자에게 가족을 선물한다면, 앞으로 아이도 많이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반명선.그는 그녀의 대학 생활 모든 비용을 대줄 예정이다앞으로 그녀가 졸업한 뒤에도 자신의 의술을 그대로 물려줄 생각이었다.그의 실력
지영주는 반원명에게 절대적인 믿음을 품고 있었다.그녀가 그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녀는 매 세포 하나하나가 반호영을 그리워하듯 그를 뼛속 깊이 그리워했다.그녀의 눈앞에 있는 건 반원명이 아니라 반호영이다."호영 씨, 나... 당신이랑 가고 싶어."서른 살 넘는 여자도 감정 문제 앞에선 백지장이 되듯 그녀가 반원명을 마주했을 때 말투도 응석 부리는 여자아이 같았다.아련하고.기대 가득하면서도.불쌍하고.맑았다.반원명의 심장은 사르륵 녹고 말았다.눈앞에 서 있는 여자는 전세린처럼 세련되지도, 똑똑하지도, 값비싸게 굴지도 않았다. 전세린처럼 예쁜 외모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하지만 지영주는 반원명의 차갑게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줄 수 있었다.반원명은 심지어 자신의 목숨을 다 바쳐 이 가엾은 여자를 지켜줘야겠다는 다짐까지 하게 되었다.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부드러운 미소로 지영주에게 말했다."좋아, 나랑 가자. 앞으로 거기가 당신 집이야.""응."지영주는 순간 눈물을 왈칵 쏟았다.그녀는 울면서 물었다."앞으로 나한테도 집이 있는 거야?""그래, 앞으로 당신도 돌아갈 집이 있어.""나 더 이상 외로운 사람 아니지?""맞아, 당신은 더 이상 외롭지 않아.""아무도 나 괴롭히지 못하는 거 맞지?""아무도 당신을 괴롭히지 못해.""더 이상 나 혼자 떠돌아다니지 않아도 되는 거지?""더 이상 혼자 떠돌아다닐 필요 없어. 그냥 집에서 편하게 드라마 보고 미용도 하면서 지내면 돼. 심심하면, 나한테 연락해도 돼. 그런데 이건 기억해. 난 바쁜 사람이야. 특히 수술하면 휴대폰 전원을 꺼둬서 몇 시간 동안 연락이 안 될 수도 있어. 그러니까 너무 속상해하지는 마.""흑... 흑흑흑."지영주는 갑자기 소리 내 울기 시작했다.그녀는 사람들의 시선을 뒤로 하고 다짜고짜 반원명의 품에 안겼다,"난 그렇게 철없게 굴지 않아. 난 청소할 줄도 알고 집을 깨끗하게 정리해 줄 수 있어. 우리 집 베란다에 꽃도 심고 매일 당신
그녀에게 돈을 줄 때도 아주 쌀쌀맞았었다.항상 온갖 쌀쌀맞은 태도로 그녀를 대하곤 했다.하지만 반원명은 달리 아주 부드러웠다.반명선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삼촌, 나도 날 챙길 수 있었어요. 호영 삼촌에 비해 저를 더 아껴주시네요. 호영 삼촌은 단 한 번도 내가 어디에 사는지 궁금해하지도 않으셨어요. 늘 저한테 다른 사람한테 돈 빌리면서 살지 말라고 혼내셨어요! 한 푼도! 양아치로 살면 제 다리를 분질러 버리겠다고 하셨거든요! 늘 이런 식으로 얘기했어요.""그럼 앞으로 나도 널 많이 관리해야겠네. 제대로 공부 안 하면 때릴 줄 알아!"반원명은 곧바로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히히히, 삼촌..."반명선은 누구보다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그럼... 나는?"등 뒤로 신유리가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반원명을 바라보며 물었다.반원명은 곧바로 엄숙한 표정으로 신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신유리! 난 네 넷째 삼촌이야! 공부 열심히 안 하면 네 아빠는 마음 아파서 널 못 때릴 수 있어도 난 혼낼 수 있어. 그러니까 공부 열심히 해.""헤헤헤, 걱정하지 마, 삼촌, 나 신유리는 줄곧 전교 1등이었어!"신유리가 자랑스럽게 말했다."그렇다면 삼촌한테 혼날 일은 없겠네."반원명이 잔뜩 풀이 죽은 말투로 대답했다."하하하, 삼촌 너무 재밌어. 당연히 삼촌한테 나를 혼낼 기회는 주지 말아야지! 하지만 나한테 동생들이 있으니까 걔네들은 마음껏 혼내도 되."신유리는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동시에 집에 있는 동생들을 팔아넘겼다.반원명은 그 말을 듣고 웃음을 터뜨렸다."녀석도 참!""삼촌, 영주 이모랑 함께 가는 거 맞지? 난 두 사람이 남동생을ㅇ 낳아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어. 아니야, 남동생은 너무 많으니깐..! 여동생 가지고 싶어."신유리는 내친김에 자신의 속마음까지 얘기했다.지영주는 그 말을 듣고 순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바로 그때 신세희가 나서서 상황을 모면했다."우리 이만 가자. 반 선생 피곤해 보이는 데 서둘러 쉬게 해줘야지. 반
그 목소리는 반원명이 간절히 잊고 싶었고 심지어 이젠 다 잊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다시 들으니 너무나 역겨웠다. 그건 바로 전세린의 목소리이다. 전세린은 휴대폰 너머로 예전처럼 다시 그를 불렀다."여보..."반원명은 곧바로 차가운 말투로 대답했다."죄송합니다만 뭔가 잊으신 것 같은데 우리 이제 아무런 사이도 아닙니다. 이만 끊겠습니다."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전화를 끊어버렸다.그는 이미 전세린과 이혼했다.그들은 이제 아무런 사이도 아니다. 과거는 다시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그는 이미 과거에서 벗어난 사람이다.그의 미래는 남성에 있다.그가 앞으로 돌봐야 할 여자는 눈앞에 있는 지영주였다.지영주가 부드러운 말투로 물었다."호영 씨, 누구야?"반호영은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대답했다."전 와이프, 이미 이혼했어. 재산과 부동산에 아무런 분쟁도 없으니까 연락할 필요도 없어."지영주는 고개를 끄덕였다."응, 앞으로는 내가 있잖아. 당신 마음속엔 나만 있으면 돼.""알겠어."남자는 말하면서 팔을 뻗어 지영주를 품에 안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반나절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반원명은 지영주에게 더 이상 낯설다는 느낌을 가지지 않았다. 되레 지영주가 가슴 아프게 느껴졌다.지영주도 마찬가지였다.그녀에겐 오직 그뿐이었다.엘리베이터에 타고 반원명의 새집에 도착했다. 반원명도 새집이라 익숙치 않았고 안에 물건도 널브러져 있었지만, 지영주는 마치 제 집 들어오듯 익숙하게 들어갔다.그녀는 아주 기뻤다.그녀는 활짝 미소를 지으며 반원명에게 말했다."호영 씨, 피곤할 텐데 먼저 소파에서 쉬어. 정리는 내가 할게. 정리 마치고 식사 준비할 거야. 냉장고에 식재료 있어?"반호영은 흠칫 놀랐다.그러고는 낮은 중저음 목소리로 부드럽게 말했다."있어. 어제 장 보러 가는 김에 사서 냉장고에 넣어뒀어."사실 그 혼자 요리해 먹을 생각도 없었다.하지만 살림살이에 익숙한 사람이라 어제 마트에서 장 보면서 식재료와 식기들을 사두었던 것이다.그저 사기
그때 얼마나 긴장했으면 지금 마음이 이리도 편한것인가. 소파에 누워 잤는데도 반원명은 꿈을 꾸었다.꿈속에서 그는 자신과 똑 닮은 그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는 활짝 미소를 지은 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네... 네가 호영이야? F그룹 대표 부소경의 친동생?"반원명이 물었다.남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반원명은 또다시 되물었다.그 사람은 뒤로 물러서더니 점점 멀어져갔다. 반원명의 시야가 흐릿해질 때쯤 그가 입을 열었다."그 사람이 바로 너야. 네가 가리키는 그 사람이 바로 너 자신이야. 네가 나고 내가 너인 것처럼...""가지 마, 가지 말란 말이야! 지금 무슨 상황인지 알려줘. 어떻게 된 일인지 네가..."그 그림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잘 돌봐줘..."마지막으로 사라지기 전 또 이 한마디가 들려왔다."가지 마..."반원명은 벌떡 꿈에서 깼다.깨난 순간 그는 탄 냄새를 맡게 되었다.주방으로부터 흘러나온 냄새였는데 아무래도 음식 탄 냄새 같았다.왜 탄 냄새가 나는 거지?반원명은 이성을 되찾기도 전에 흠칫 놀랐다.시선이 닿는 곳마다 아주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단지 집안에 화분이 부족할 뿐이었다.시간 내어 가서 사와야 했다.그러면 이 집에 인간미가 풍길 것이다.너무 좋았다.단지 이 탄 냄새는?반원명은 냄새를 따라 주방으로 향했다.그는 그제야 주방에서 연주처럼 들려오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그는 몸을 일으켜 느긋하게 주방으로 걸어갔다. 가는 내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거실에서 안방으로 향하는 길에 원래 각종 옷이 널브러진 옷걸이와 세수용 물건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깨끗하다 못해 빛이 반짝반짝할 정도였다.반원명은 원래 주방 탄 냄새 때문에 이끌려 갔다가 지금은 몸을 돌려 안방으로 걸어갔다. 안방 침대는 이미 정리를 마친 뒤였고 그 위에는 회색 이불이 덮여있었다.마치 그가 오래전부터 이곳에서 살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아주 포근했다.그는 몸을 돌
반원명의 폭소에 지영주는 민망하기 그지없었다.그녀는 우물쭈물해하며 대답했다."호영 씨, 미안해. 여자로서 요리는 할 줄 알아야 하는데.. 호영씨가 배고플 수도 있으니까 내가 맛난 음식 준비해 주려고 했는데..."그녀는 반원명이 냉장고에 넣어둔 식재료를 몽땅 써버렸지만, 정작 완성된 요리는 하나도 없었다.그녀는 고윤희가 집에서 한가할 때 토마토와 고수를 넣어 만든 수제비를 떠올렸다. 그 수제비는 아주 맛있었다.그리고 수제비는 만들기도 쉬웠다. 반죽과 물만 있으면 되었고 끓이기만 하면 되니 말이다.하지만 지영주는 반원명이 사 온 밀가루를 몽땅 써버렸고 수제비도 만들지 못했다.되레 얼굴, 머리, 그리고 앞치마에 밀가루만 덕지덕지 묻혔다.수제비는 실패한 것 같아 계란찜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지영주는 고윤희가 아이들에게 맛있는 계란찜을 만들어 주던 모습을 떠올렸다. 고윤희는 계란찜을 만들 때 아이 외에 매번 지영주에게도 요리 해줬었다.계란 세네개로 지영주는 매번 맛나게 먹었었다.계란찜 만들기는 또 얼마나 쉬운가, 계란을 휙휙 저어 찌기만 하면 된다.하지만 지영주가 만들어 낸 계란찜은 까만색인 데다 거품이 가득했다. 계란찜 특유의 탱탱함은 아예 찾아 볼 수도 없었다.절망적이었다.한 시간이나 지났으니 이젠 반호영이 깰 시간이었다.‘어떡하지, 어떡하지?’지영주는 다급한 마음에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하지만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켜야만 했다.그녀는 오늘 반드시 반호영에게 저녁 식사를 준비해 줘야 한다!‘상관없어! 그냥 하는 거야!’그녀는 프라이팬을 씻고 고윤희가 계란후라이를 만들던 방법을 떠올렸다. 그녀는 기름을 약간 쏟은 다음 곧바로 계란을 깨뜨려 넣었다.‘됐다! 하하!’지영주는 프라이팬 뚜껑을 닫고 앞에서 기다렸다.그녀는 계란이 얼마나 지나야 익는지 몰랐다.그녀는 얌전히 기다렸다. 사실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겨우 몇분만에 일어난 일 이었다.뚜껑을 열자마자 이미 타버린 계란을 발견했다.아!지영주는 힘이 빠졌다.어찌할 바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