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 내 곁에 있어준 사람은 바로 고윤희야. 그러니까 내 집에서 나가. 내가 너한테 손을 대기 전에 당장 나가!”“오빠…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최여진은 믿기지 않았다.구경민은 비아냥거리며 말했다.“내가 거절한 여자가 얼마나 많은지 넌 영원히 모를 거야.”“그러니까 당장 꺼져!”“여진이를 어디로 보낼 셈이야!”그때, 구씨 어르신이 나타나 말했다.구경민은 바로 몸을 돌렸다.“아버지!”“여진이한테 우리 집에서 지내도 된다고 말한 사람이 나야. 그런데 네가 왜 여진이를 쫓아내는 거야?”어르신은 구경민을 추궁하며 물었다.구경민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최여진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구씨 가문에 있는 동안 어르신들의 예쁨을 받으라는 진문옥의 지시였다.“구경민과 결혼하고 싶다면 제일 먼저 구경민의 부모 동의를 받아야 해. 구씨 어르신이 너를 예뻐하면 반은 성공한 것과 같아. 그 집에서 지내는 동안 어르신들의 예쁨을 받고 구경민과 가깝게 지내.”역시, 진문옥이 그녀한테 알려 준 계획은 아주 성공적이었다.구경민이 그녀를 쫓아버리고 싶어도 구씨 어르신이 동의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최여진의 예상대로 구경민은 구씨 어르신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아버지가 동의하셨다니까 여진이가 편하게 지낼 수 있게 아버지가 도와주세요.”말을 마친 구경민은 바로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너 이 자식! 어디로 가는 거야!”구경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도 하지 않았다.“너 이리 와! 너 아직 너의 엄마도 만나 뵙지 않았어. 밥도 먹지 않고 어딜 가는 거야? 또 그 여자 만나러 가는 거야?”“당장 이리 와!”구씨 어르신은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지만 구경민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예전부터 자신의 아버지를 무서워하지 않던 구경민이다. 하물며 최여진도 집에 들였으니 이제 더 이상 그 집에서 지낼 이유가 없다.구경민이 구씨 가문을 나서자 열몇 대의 차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구경민은 제일 앞에 주차된 차에 올라타고 물었다.“동북 마을
구경민의 부하들은 이미 구경민과 함께 오랫동안 일을 한 사람들이다.부소경보다 구경민에 대해 더욱 많이 알고 있다고 자부해 왔다. 오랜 시간 동안, 구경민은 밖에서 함부로 여자를 만나고 다니지 않았다.하물며 구경민은 여자들한테 관심도 있어 보이지 않았다.구경민과 제일 오랫동안 함께 했던 주광수도 구경민이 자신한테 다가온 인기 스타의 체면도 봐주지 않은 적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신민지가 톱스타가 되지 못했던 이유도 항상 자신한테 있다고 했다.스폰서를 받지 않고 깨끗한 몸을 유지하고 있어 톱스타가 되는 길에 걸림돌이 되었다.5년 전, 신민지는 구경민과 함께 한 파티장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두 사람은 누구도 먼저 다가가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구경민은 자신의 마음에 드는 연예인을 발견하지 못했다. 성격이 워낙 유별났기 때문이다.신민지도 구경민을 주의 깊게 보지 못했다.연회가 거의 끝날 무렵, 신민지는 전화를 받으며 다급하게 밖으로 뛰쳐나가는 길에 구경민과 부딪쳐 바닥에 쓰러지며 비명을 질렀다.구경민이라면 먼저 신민지의 허리를 감싸고 쓰러지지 않게 도와줄 수 있지만 그는 그저 차갑게 내려다볼 뿐이었다.신민지는 바닥에 넘어져 처참한 몰골이었다.그녀는 바로 바닥에서 몸을 일으켜 구경민을 향해 쏘아붙였다.“이런! 앞을 제대로 보지도 않아요?”구경민은 그런 신민지를 가만히 쳐다보았다.그러자 곁에 있던 고윤희가 말했다.“괜찮으세요? 근데요, 아가씨. 우리 도련님은 아까 전부터 이곳에 있었어요. 앞을 못보고 달려온 사람은 아가씨죠.”하지만 신민지는 고윤희에게 삿대질을 하며 말했다.“지금 내가 일부러 와서 부딪쳤다는 거예요? 나 그런 여자 아니에요! 그리고 당신은 누군데 나한테 함부로 말을 하는 거죠?”“저는…”그때, 신민지의 뒤에 있던 매니저가 코웃음을 쳤다.“오늘 연회에 참석한 도련님들 시중 들러 온 화류계 아가씨겠죠. 너 까짓 게 뭐라고 감히 우리 민지 아가씨한테 함부로야! 우리 아가씨가 어떤 사람인데! 절대 실수따위는 하지 않는다
신민지는 곧장 드레스 자락을 잡고 도망치려 했다.“잠깐!”구경민이 차가운 목소리로 호통쳤다.겁에 질린 신민지는 울먹이며 고개를 돌렸다.“구… 구 대표님, 다음에는 다시 안 그럴게요.”“내 파트너한테 사과도 안 했잖아!”고윤희가 말했다.“그만해.”구경민은 말없이 신민지를 쏘아보았다.신민지는 수치스러워서 땅굴이라도 파고 들어가고 싶었다.그녀는 서울에서 잘나가는 남자에게 접근하기 위해 일부러 도도한 이미지를 유지했다. 구경민이 잠시 솔로라는 정보도 미리 입수했다.그렇게 힘들게 파티 초대장을 얻어 들어왔는데 두 시간이나 지나는 동안 구경민은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받으며 밖으로 나가는 척, 연기했던 것이다.사람들이 보기에 그렇게 의심스러운 모습도 아니었는데 구경민은 그것 마저 싫은 눈치였다.그것도 부족해서 현장에서 그녀에게 망신을 주었다.사과?오늘 사과를 하지 않고는 이곳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결국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고윤희에게 사과했다.“죄송해요, 제가 실수했어요. 용서해 주세요.”그 사건이 있은 뒤로 구경민은 신민지를 저격했고 서울에서 내쫓았다.파티에서 그녀가 자신의 눈에 너무 띄었고 술잔을 들고 비틀거리던 모습이 거슬린다는 게 이유였다.그 사건으로 서울 연예계는 크게 소란이 있었다.그 뒤로 서울 사람들은 평소에는 부드럽고 침착해 보이는 구경민이 짜증 나게 하는 여자에게 절대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그리고 이 세상에서 구경민의 마음을 움직이는 여자는 한 명뿐이라는 것도 알았다.그 여자가 바로 해외에 있는 최여진이었다.그리고 구경민 신변의 지인이나 부하직원들도 그렇게 생각했다.그런데 오늘 그들이 알던 구경민이 변했다.그는 자신의 아내와 아이를 찾으러 가겠다고 말했다.고윤희 씨를 찾으러 간다고?주광수는 고윤희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 좋은 여자이고 가여운 여자였다.상사가 직접 지방에 내려가서 고윤희를 찾겠다고 고집을 피우자 주광수는 머뭇거리며 그를 말리려
최여진을 태운 운전기사는 그녀가 구성훈의 부하들 중에서 고른 믿음직한 정찰 요원이었다.그래서 그들이 계속 구경민의 차를 쫓고 있었음에도 들키지 않았다.하지만 쫓아간 지 얼마되지도 않아서 최여진은 구경민의 차량 대오가 천천히 흩어지는 것을 보았다.일부 차량들은 산 속으로 진입하고 있었고 일부는 시내로 향하는 교차로로 달렸다.구경민의 차량만 여전히 동부 지방을 향하는 국도를 달리고 있었다.운전기사가 의아한 표정으로 최여진에게 물었다.“아가씨, 구 대표님은 왜….”최여진도 구경민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계속 따라가! 구경민 차만 쫓아가면 돼!”운전기사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네, 아가씨!”앞에서 달리는 구경민은 누군가가 쫓아온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그의 모든 신경이 고윤희에게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내를 찾으러 가는 길이고 어디 전쟁터를 나가는 게 아니었기에 경계가 느슨했던 것도 있었다.게다가 오늘 운전대를 잡은 사람은 평소 구경민을 보필하던 감각이 예민한 운전기사도 아니었다.구경민은 동부 지방으로 향하며 핸드폰으로 계속 지시를 내렸다.“각자 흩어져서 찾아. 사람들 놀라지 않게 조심하고. 사람들 눈에 띄면 윤희가 또 놀라서 도망갈지도 모르니까.”“담 기사는 내 차 맡지 말고 다른 차를 맡아. 윤희가 자네 얼굴을 잘 아니까 나랑 떨어져서 움직이는 게 좋겠어.”“주 팀장 자네의 얼굴도 윤희가 알고 있으니까 우리 셋이 흩어져서 찾자. 소란 부리지 말고 사람들 주의 끌지 않게 꼭 조심해. 현지 시민들 눈에 띄면 안 돼. 단서를 찾으면 바로 나한테 보고하고.”모든 부하직원들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구경민의 새 운전기사 송 기사는 동부 지방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읍으로 향했다.구경민은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고윤희가 있을만한 곳을 물색하기 시작했다.그의 여자.고윤희와 살을 맞대고 산지 몇 년이나 지났지만 그때는 그녀가 아내처럼 느껴지지 않았다.그는 줄곧 자신이 결혼할 사람은 최여진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녀가 사라진
그녀는 배가 조금 나온 것이 임신 5개월 정도로 보였다.여자는 뭐가 화가 났는지 씩씩거리며 걷고 있었다.그 뒤에서 기골이 장대한 남자가 내리더니 성큼성큼 여자를 따라가서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그러더니 다짜고짜 큰 손을 들어올려 여자의 뺨을 때리며 말했다.“고집 피우지 말고 나랑 돌아가!”뺨을 맞은 여자는 비틀거리더니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하지만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지 않았다.뒤에서 달려온 구경민이 여자의 어깨를 꽉 끌어안더니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드디어 찾았어! 윤희야, 내가 얼마나 힘들게 찾아다녔는지 알아?”“배가 벌써 나왔네? 이제 5개월인가?”“남자친구를 사귀었구나. 왜 그렇게 사람을 잘 믿어? 저 남자가 당신 때렸지?”말을 마친 구경민은 여자의 대답도 듣지 않고 그녀를 부축해서 버스정류장에 비치된 의자에 앉혔다. 그러고는 여자를 때렸던 남자를 노려보았다.“다… 당신 누구야? 시퍼런 대낮에 왜 남의 와이프를 안고 난리야? 죽고 싶어?”남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구경민은 남자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남자는 주먹을 맞고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코에서는 코피가 나고 있었다.구경민은 남자의 멱살을 잡고 부하를 향해 소리쳤다.“송 기사! 이 쓰레기 같은 자식을 당장 하수구에 던져버려!”놀란 여자가 울음을 터뜨리며 소리질렀다.“악! 여기 누가 사람을 죽이려 해요! 이 살인자! 당신 누구야? 왜 가만히 있는 내 남편을 때러? 당신 누구야?”남편을 사랑하는 여자는 남편에게 뺨을 맞았으면서도 남편이 쓰러지자 미친 듯이 구경민에게 달려들어 손을 물어뜯었다.다행히 행동이 빠른 담 기사가 여자를 제지했고 그녀의 두 손을 뒤로 비틀어 제압했다.구경민은 그제야 여자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그녀는 뒷모습만 고윤희와 조금 닮았을 뿐 전혀 다른 여자였다.잠시 침묵이 흐른 후, 구경민은 잔뜩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송 기사, 놓아줘.”“대표님….”“저 여자 임신했어!”송 기사는 바로 여자를 풀어주었고 구경민 일행의 상대가
구경민은 귀를 쫑긋 세우며 다급히 물었다.“뭐… 뭐라고 했어?”주광수는 기쁨을 금치 못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해변 마을에서 사모님을 봤어요. 그런데 대표님 계신 곳이랑은 거리가 좀 있네요.”“바로 가지!”구경민이 말했다.“알겠습니다.”“잠깐!”구경민이 또 말했다.“네, 대표님!”“절대 그 여자 눈에 띄지 마!”“알겠습니다, 대표님!”전화를 끊은 뒤, 구경민은 바로 송 기사를 불렀다.“송 기사, 출발하자!”송 기사는 바로 차에 시동을 걸었다. 하지만 차는 몇 미터 안 가고 다시 멈추었다. 차에서 내린 구경민은 부부에게 다가가서 현금뭉치를 남자에게 건넸다.“아내에게 잘해줘!”말을 마친 그는 쿨하게 뒤돌아섰다.남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한참이 지난 뒤, 임산부가 중얼거리듯 물었다.“여보, 나… 꿈을 꾸는 거 아니지?”“무려 4천만 원이나….”두 사람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차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밤새 달린 차는 동부지구에서 가장 서울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해변가 마을로 도착했다.목적지에 도착한 구경민이 감개무량해서 중얼거렸다.“정말 가까운 곳에 있었네. 이렇게 가까운데 내가 몰랐다고?”바다로 둘러싸인 이곳은 진강 시.이곳에서 서울까지는 돌아서 가도 고작 100km밖에 되지 않았다.만약 바닷가에서 서울까지 직선거리를 낸다면 70km 정도 될 것이다.구경민은 고윤희가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사실 고윤희와 한진수, 그리고 그의 어머니도 이곳에 온지 얼마되지 않았다.고윤희는 신세희와 통화한 뒤로 구경민이 자신을 찾아다닌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그녀를 평생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통화를 마친 뒤, 그녀는 한진수와 노인이 있는 거처로 돌아가서 눈물을 흘리며 그들에게 말했다.“어머니, 진수 오빠, 저는 이곳에 있으면 안 돼요. 어머니와 진수 오빠한테까지 피해를 줄 수는 없어요. 다음 생에 가족으로 만나요. 저는 가야겠어요.”“윤희야, 또 왜 그래?”한진수
그래서 그녀는 한진수와 그의 어머니에게 피해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고윤희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상관없어! 구경민 그 자식이 네 목숨을 노리면 내가 그 자식 죽여버릴 거야! 어차피 더 잃을 것도 없는데 두려울 게 뭐가 있어!”고윤희는 울며 고개를 흔들었다.“진수 오빠가 몰라서 그래요. 그 사람 정말 잔인한 사람이에요. 나랑 같이 목숨을 내걸 필요는 없어요.”한진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네가 틀렸어, 윤희야. 난… 아들을 잃었을 때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어. 내가 여태 살 수 있었던 건 어머니 때문이야. 어머니가 이제 더 사시면 몇 년을 더 사시겠어?”“우리가 남성 근처의 산 속에 있을 때 난 그렇게 생각했어. 어머니 돌아가시면 나도 그 옆에서 자결하겠다고. 혼자 사는 거 정말 재미없을 것 같았거든.”“윤희 네가 나타나고 나와 내 어머니는 다시 희망이 생겼어. 너까지 가면 우린 무슨 재미로 살아?”고윤희는 그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어차피 죽을 거, 우리 셋이 같이 가는 거야. 어디 가든 서로 보살펴 줄 수 있잖아. 정말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면 그때는 같이 죽는 거지. 저승에 가서도 서로 말동무가 되어줄 수 있잖아.”한진수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고윤희는 감정에 북받쳐 그의 품에 안겼다.“오빠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평생을 다 바쳐도 이 은혜에 보답하지 못할 거예요.”한진수는 웃으며 말했다.“보답을 바라고 한 건 아니야. 우린 가족이고 평생 함께하는 거로 만족해.”고윤희도 울며 말했다.“맞아요. 영원히 같이 있어요.”그렇게 일가족은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감정을 가라앉힌 뒤, 고윤희가 말했다.“진수 오빠, 어쨌든 이 마을에서는 더 못살 것 같아요. 구경민의 사람들을 봤어요. 언젠가는 그들이 우리를 발견할 거예요. 시내로 가는 게 좋겠어요. 사람이 많으면 찾기도 힘들 거예요.”“제가 생각 좀 해봤는데요. 구경민이랑 가까운 곳일수록 더 안전할 것 같아요. 제가 간도 크게 자기 근처에 살 거라고 생각지
4개월 사이 그녀는 많이 야위어 있었다.다른 사람들은 임신하면 잘 먹어서 살도 찐다는데 고윤희는 야위어서 뼈만 남은 상태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작은 주근깨가 좀 있었다.하지만 여전히 아름다웠다.아니, 지금의 그녀는 아름답다는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행복해 보이고 미소가 달콤해 보인다는 표현이 적절했다. 하지만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구경민은 그 모습을 보니 안쓰러웠다.여자는 큰 키에 비해 발은 아주 작은 편이었다. 평소에는 235 사이즈의 하이힐을 자주 신었다.그런데 지금 교각 아래에 걸터앉은 그녀는 사이즈도 맞지 않는 큰 신발을 신고 있었다. 그것도 건설 현장에서나 신는 남성용 검은색 작업화였다.신발 안쪽에는 실밥이 약간씩 보였는데 아마 다 해진 신발에 천을 덧대서 꿰맨 것 같았다. 물론 그렇게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구경민은 워낙 시력이 좋았다.여기저기 꿰맨 그 신발은 딱 봐도 260 이상은 되어 보였다. 발이 작은 고윤희가 그런 걸 신고 있으니 그렇게 거슬릴 수 없었다.신발이 벗겨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그녀는 신발끈을 아주 타이트하게 묶었는데 그래서 더 괴상하게 보였다.구경민은 그 모습을 보며 가슴이 쓰리고 아팠다.고윤희는 할머니들이나 입는 얇은 솜바지를 입고 있었다. 구경민 옆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차림이었다.세상에나!이런 옷은 시골 마을 장터에서나 볼 수 있을법한 옷이었다. 아마 많이 쳐줘도 3천원 이상은 아닐 것이다.나이가 많은 할머니들이나 구매할 옷을 고윤희가 입고 있었다.그래도 걸치고 있는 롱 패딩은 그나마 나았다.무릎을 살짝 덮는 길이에 촌스러운 붉은색 패딩이었다.패딩에 달린 모자는 변두리가 하얀색 털로 되어 있었다. 커다란 모자는 안 그래도 작은 고윤희의 얼굴을 더욱 작아 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그녀는 화장을 하지 않았다.얼굴은 창백하고 입술마저 핏기가 없이 푸른색을 띠고 있었다. 그런 모습이 구경민의 마음을 더욱 안타깝게 했다.구경민은 가슴이 너무 아팠다.뒤에 있던 송 기사가 그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