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이 지나고 정소민이 조금 안정되자 한진수 어머니는 집안 일을 하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일해도 돌아오는 것은 없었다.그때마다 한진수는 엄마를 바라보며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하지만 정소민의 배는 점점 커지고 있었기에 그녀와 싸울 수도 없었다.그렇게 또 여덟 달이 지나고 정소민은 사내아이를 출산했다.그리고 그 아이의 이름은 정해운으로 지었다.아이가 태어나고 모두가 기뻐했지만 유독 한 사람만 기분이 나빴다.네 살 된 정소민의 큰아들이었다.정해준은 동생의 출생이 달갑지 않았다. 아이는 어른들의 눈길을 피해 동생을 꼬집고 괴롭혔다.한진수는 그 모습을 몇 번이나 목격했지만 정해준을 야단칠 수 없어서 아내인 정소민에게 이 사실을 얘기했다.하지만 정소민은 큰아들을 꼭 껴안으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우리 왕자님은 참 의젓하기도 하지. 벌써 이렇게 싸움을 잘해? 앞으로 우리 왕자님이 엄마를 지켜줄 거지? 엄마 너무 든든해.”한진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정소민은 남편을 흘겨보며 짜증스럽게 말했다.“무슨 큰일이라고 애한테 그래? 쓰레기 같은 놈! 결혼 전에는 해준이를 자기 아들처럼 사랑해 주겠다고 했으면서! 벌써 차별하는 거야?”한진수도 부아가 치밀었다.“이렇게 어린애한테 동생을 때린 게 잘했다고 칭찬하는 당신은 정상이야? 애 크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해준이를 친아들로 생각하기 때문에 걱정돼서 그런 거잖아!”“그런 건 해운이한테나 써먹어!”말을 마친 정소민은 애꿎은 청소기를 발로 걷어차고는 시어머니에게 화풀이했다.“바닥이 이게 뭐예요? 오늘 하루 종일 뭐 했어요? 누워만 있었어요? 어떻게 모자가 하나 같이 이렇게 게을러요! 우리 집에 공짜 밥이나 얻어먹으려고 왔어요?”순간 분노한 한진수가 손을 치켜들며 소리쳤다.“정소민!”하지만 사람 좋은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말렸다.“진수야, 가족 소중한 줄 알아야지. 해운이도 어린데 벌써 이러면 어떡해.”한진수는 그렇게 15년을 정씨 가문의 만행을 참고 쥐 죽은 듯이 살았다.고등학
정해운은 한진수를 닮아 성실하고 학업 성적도 뛰어난 인재였다.하지만 그의 형인 정해준은 그와 정반대 성격의 소유자였다.정해운보다 세 살 이상인 정해준은 중학교를 졸업하고는 사회의 어중이떠중이들과 어울려 다녔다. 한진수는 큰아들을 야단치고 싶었지만 매번 아내인 정소민은 아들 편만 들었다.엄마 사랑을 독차지하면서도 정해준은 가족들이 정해운을 더 사랑한다고 앙심을 품었다.할머니라는 사람은 막내 정해운만 싸고 돌았다.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도 동생이 공부를 잘한다며 칭찬만 늘어놓았다.그를 가장 아끼는 엄마도 정해운을 자랑스러워하는 눈치였다.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는 열여덟 살의 정해준은 동생이 남성에서 가장 잘나가는 명문 고등학교에 입학한 다음 날, 칼로 동생을 수십 차례 찔렀다.의사와 구급차가 도착했을 때, 정해운은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형인 정해준은 그 자리에서 경찰서에 끌려갔다.그때 정해준의 나이는 열여덟 살이었다.법적 책임을 져야 하는 성인이었다.정씨 가문은 두 아이를 전부 잃게 되었다.상심한 나머지 한진수와 그의 어머니는 몇 번이나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그들은 그날 저녁에 집에서 쫓겨났다.장인은 모든 잘못을 한진수에게 돌렸다.“배은망덕한 자식! 해준이를 얼마나 차별했으면 애가 그런 생각을 했을까? 넌 네 아들만 아들이지? 해준이가 이 집에서 사랑 받고 자랐으면 그런 끔찍한 행동을 했겠어? 다 네 탓이야!”아내도 한진수를 손가락질하며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한진수, 이혼해! 당장 우리 집에서 나가! 너 때문에 나는 두 아들을 잃었어!”고통이 극에 달한 한진수는 당장이라도 아내와 장인 장모에게 주먹을 휘두르고 싶었다.하지만 그는 노쇠한 엄마를 돌봐야 했다.절대 충동적으로 사고를 쳐서는 안 된다.“그래, 이혼하자.”한진수는 그 말을 내뱉은 순간 해방감을 느꼈다.이혼 절차는 빠르게 진행되었다.한진수는 맨몸으로 가문에서 쫓겨났다.20년을 정씨 가문을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한진수도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
그뿐만 아니라 정소민에게 상해 배상금도 지불해야 했다.한진수는 8개월 유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배상금 때문에 그의 어머니는 모았던 돈 백만 원을 정소민에게 줘야 했다. 그건 한진수가 어려운 형편에 가끔 챙겨주던 용돈이었다.한진수가 징역을 사는 8개월 동안 그의 어머니는 갈곳도 없이 길거리 생활을 하며 아들을 기다렸다.그렇게 드디어 지옥 같았던 8개월이 지나고 한진수가 출소했을 때, 그의 어머니는 야위다 못해 체중이 40키로도 나가지 않았다.그들 모자에게는 남은 돈이 한 푼도 없었다.게다가 한진수는 직장을 구하려고 열심히 뛰어다녔지만 그를 받아주는 직장도 없었다. 모두가 그를 두 아들 인생을 망친 범죄자 취급했다.출소한 한진수와 그의 불행한 모친은 3일을 꼬박 굶었다.그러다가 그들은 전처와 마주쳤다.휠체어를 탄 그의 전처는 한진수를 보자마자 욕설부터 퍼부었다.분풀이를 다 한 그녀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크게 소리쳤다.“장애가 있는 몸으로 이 인간을 위해 자식까지 낳아주었는데 이 인간이 글쎄 저를 폭행해서 이빨까지 부러뜨렸어요.”전처의 말을 들은 행인들은 너도나도 한진수를 비난했다.한진수는 어쩔 수 없이 어머니를 데리고 사람들이 없는 곳을 찾아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갔다.한진수는 산 속에서 과일들을 찾아 잠시 주린 배를 채웠다.그러고는 어머니를 업고 있을 만한 곳을 찾다가 돌로 지은 집 한 채를 발견했다.누가 지은 건지는 모르나 갈 곳이 없었던 한진수는 어머니와 함께 이곳에 머무르기로 했다.그는 그 뒤로 산을 내려가지 않았다. 매일 일과는 나무를 베고 산짐승을 사냥하거나 과일을 찾아서 따는 일이었다.가끔은 꿩을 사냥해서 마을에 내려다 팔아 침대와 옷도 장만했다.그렇게 가난하지만 아늑한 삶이 한 동안 유지되었다.어머니도 조금씩 건강을 되찾았지만 70이 넘은 노인은 아들에게 도움을 못 주는 것 같아 못내 안타까웠다.그의 어머니는 집 밖에서 작은 닭장을 만들고 그 안에 닭을 키웠다.그렇게 반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한진수와 그의 어
“지… 진짜요?”사실 그는 별 기대 없이 한 말이었다.그냥 고윤희 혼자 산에서 생존하기 힘들 테고 그는 이 여자가 무사히 살아남기를 바랐다.하지만 고윤희는 그에게서 따뜻함을 느꼈다.그녀는 이미 구경민에게서 상처 받을 대로 받아 많이 지쳐 있었다.지금 그녀는 그냥 고생 좀 하더라도 안정적인 삶을 원했다.고윤희가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내 부모님은 내가 어렸을 때 나를 버렸죠. 그래서 줄곧 엄마 사랑이 간절했어요. 어르신을 양엄마로 모실게요. 앞으로 고향에 돌아가면 저도 직장을 구해서 일할 수 있어요. 제가 어머니를 보살필게요.”“아이고, 아가….”한진수의 어머니는 기쁨에 겨워 울먹였다.그녀도 고생만 하고 행복을 누려본 적 없었다.남성에 온 뒤로 항상 억눌린 삶을 살다가 결국엔 그토록 사랑하던 손자마저 잃었다.노인은 삶이 지치고 피곤했다.하지만 아들을 위해 이 악물고 버티는 중이었다.그런 노인에게 딸이 생겼다.노인은 무척 기분이 좋았다.그렇게 상의를 마친 뒤, 한진수는 어머니와 고윤희를 데리고 산을 넘어 남성을 떠났다.그들은 남성 근처의 작은 도시에 가서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갔다.한편, 구경민은 고윤희를 찾기 위해 남성 곳곳을 샅샅이 뒤졌다.호텔에서 허름한 모텔까지 놓치지 않았다.혹시나 하는 마음에 룸살롱까지 뒤졌다.하지만 어디에도 고윤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구경민은 날이 갈수록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그는 한 달 동안 서울에 돌아가지 않았다.서울 본사에는 그가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였지만 일에 집중할 기분이 아니었다.다행인 건, 그래도 친구인 부소경이 그의 옆을 지켜주었다.부소경은 구경민이 해야 할 업무들을 그를 대신해 깔끔하게 처리해 주었다. 구경민은 폐인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서울 본사는 여전히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진짜 친구란 이런 걸까.한 달 전, 신세희가 서씨 어르신의 압박을 받고 쫓길 때도 구경민은 물심양면 부소경을 도와주었다.그래서 신세희는 고윤희에게 상처 준 구경민이
그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는 약간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산을 다 뒤졌는데 사람을 찾지 못했어요. 산에 있다는 것도 거짓말 같아요!”신세희는 차가운 웃음을 머금으며 반박했다.“윤희 언니는 거짓말할 사람이 아니에요. 산에 있다고 했으면 산에 있는 거겠죠! 그냥 당신이 언니를 찾는다는 걸 알고 그곳을 떠난 걸 수도 있어요.”구경민은 순간 목이 꽉 막혔다.절망이 가슴에서 차오르고 있었다.그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그는 줄곧 자신과 고윤희 사이에 사랑은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다.그들은 어떻게 보면 협력관계에 더 가까웠다. 고윤희 자신도 진짜 여자친구가 돌아오면 알아서 사라질 거라고 말했었다.그리고 그의 여자친구가 돌아오자 그녀는 바로 사라져 버렸다.하지만 구경민의 생활은 모든 게 뒤죽박죽이 되었다.구경민은 미쳐버릴 것 같았다.그리고 이때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구경민은 고윤희의 소식인 줄 알고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수화기 너머로 평소 안부도 잘 묻지 않던 아버지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민아!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구경민은 잔뜩 실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무슨 일이시죠?”구씨 어르신은 답답하다는 듯이 아들을 꾸지람했다.“네가 고윤희랑 만날 때 난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다. 우리 가문에서 그 애를 홀대한 적도 없잖아. 둘이 잘 사는 줄 알았더니 헤어졌다면서? 그리고 여진이랑 잘해보겠다고 네가 장담했어!”“그런데 지금은? 너 여진이랑 헤어진다면서? 너 서른이 넘었어!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구경민은 차갑게 대꾸했다.“다른 일 없으면 끊을게요.”“당장 서울로 올라와!”어르신이 명령조로 말했다.“무슨 일인데 그러세요?”“돌아와서 여진이랑 결혼해! 내가 더 이상 못 기다리겠어! 아빠 말 들어!”사실 어르신은 아들의 사생활에 거의 간섭하지 않았다.어릴 때부터 영특한 구경민이었고 성인이 된 지금은 명실상부한 서울의 실세가 되었다.그래서 어르신은 무슨 일이 생겨도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수화기너머로 서준명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누군데요?”최여진이 말했다.“저 어르신 지인인데 진행하시던 일은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서요.”최근 최여진은 구경민과 고윤희에게만 신경을 쏟느라 남성에 있으면서도 서씨 어르신의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최여진은 마지막으로 구자현과 통화하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 구자현은 남성에 더러운 여자 4인방이 있는데 서씨 어르신과 그녀가 합심해서 그 4인방을 제거해야 한다고 얘기했었다.그래서 지금 서씨 어르신 쪽 상황이 무척 궁금했다.하지만 구자현에게 전화를 걸어도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날 여기까지 불러오더니 왜 겁쟁이처럼 다들 숨어버린 거야? 설마 나랑 경민이가 헤어진 거 다들 아는 건가?’하지만 구씨 어르신이라는 든든한 아군이 있으니 구경민이 아무리 헤어지자고 난리를 피워도 이제는 두렵지 않았다.한편, 서준명은 약간 불쾌한 목소리로 물었다.“도대체 누군데요?”“저는 구경민 씨 약혼녀 되는 사람이에요.”최여진은 아주 자랑스럽게 대답했다.‘구경민 약혼녀?’최근 고모가 할아버지의 연락을 잘 받아주지 않아서 그의 할아버지는 몸져누운 상태였다. 서준명과 그의 부모님은 앓는 할아버지를 보살피느라 구경민 신변에 무슨 변화가 생겼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할아버지가 구씨 가문과 왕래가 있는 건 알지만 그건 단지 구성훈 한 사람에만 해당되었다.하지만 서준명은 구경민과 부소경이 절친한 사이라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게다가 서준명 본인도 구경민의 조카인 구서준과 같이 건축사업을 진행하고 있었기에 상대가 자신을 구경민 약혼녀라고 소개하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그는 약간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대답했다.“죄송하지만 저희 할아버지는 최근 좀 아프셔서 병상에 계십니다. 용건이 있으면 저한테 얘기해 주셔도 됩니다.”“그쪽한테요?”최여진이 떨떠름한 말투로 물었다.서준명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되물었다.“저한테는 말씀하기 어려운 일인가요?”최여진은 오랜 기간 해외에서 지냈기에 자신보다 나이 어린 후배들의 상황은 모르
구자현이 묘사한 신세희는 그냥 외모만 믿고 함부로 몸을 굴리는 싸구려였다.구자현이 최여진을 국내로 부른 목적도 함께 힘을 합쳐 신세희를 제거하기 위함이었다.‘신세희! 망할 여자!’첫 만남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친구들과 딸을 시켜 최여진을 폭행한 여자였다.최여진은 구경민이 자신과 이별을 얘기한 이유도 신세희의 탓으로 돌렸다.물론 지금도 자신은 이 싸움에서 이길 자신이 있었다. ‘어떻게든 고윤희 떨거지들을 몽땅 제거해야 해!’최여진은 욕심이 많은 여자였다.그녀는 바로 행동에 옮기기로 했다.서준명과 통화를 마친 최여진은 가까운 피부샵으로 향했다.거금을 들여 관리한 효과는 아주 만족스러웠다.피부샵에서 나온 최여진은 깐 달걀처럼 매끄러워진 자신의 피부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만지작거렸다.‘지금 이 모습을 보면 구경민도 흔들릴 거야.’그녀는 곧장 핸드폰을 꺼내 구경민에게 전화를 걸었다.한편, 구경민은 부소경의 차를 타고 별장으로 돌아왔다.부소경은 구경민의 서재에서 그 대신 중요한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반면 만취 상태인 구경민은 침대에 누워서도 술을 내놓으라고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부소경의 지시를 받은 가정부는 그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그리고 이때, 구경민의 핸드폰이 울렸다.전화를 받은 구경민은 누군지 확인하지도 않고 짜증스럽게 말했다.“어떻게 됐어? 사람은 찾았어? 좋은 소식 없으면 돌아올 생각하지 마!”수화기 너머로 여자의 요염하고 간드러진 목소리가 들려왔다.“구경민, 나야. 최여진.”순간 구경민은 입을 꾹 다물었다.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취했지만 그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는 냉랭한 말투로 말했다.“무슨 일이지? 돈이 부족하면 얼마든 줄게. 원하는 금액만 애기해.”“구경민!”최여진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내가 그렇게 싫었어? 이제는 통화하는 것도 귀찮아?”구경민은 상대와 더 이야기하기도 싫어졌다.오랜 시간 그는 자신이 여전히 그녀를 사랑한다고 믿었다.하지만 그건 사랑이 아닌 가지지 못한
최여진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고개를 들고 반호영을 바라보았다.검은색 정장 차림에 여전히 냉기를 풀풀 풍기고 있는 남자.하지만 말투만큼은 섬뜩할 정도로 부드러웠다.“넌 참 더러운 여자야.”“다… 당신이 왜 여기 있어?”반호영은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최여진을 쏘아보며 말했다.“네가 여기 있는 줄 알았으면 오지도 않았어! 너 같이 역겨운 여자는 다시 만나기도 싫거든! 임신했다는 이상한 얘기는 하지 마! 임신했으면 아이 지워! 아이 안 지우고 나한테 들러붙을 생각이면 지옥이 뭔지 맛보게 될 거야!”“네가 인간이니….”퍽!남자는 가소롭다는 듯이 최여진을 걷어차고는 가던 길을 갔다.해외를 돌아다니며 수많은 남자를 만났지만 이처럼 무례하고 이기적인 남자는 처음이었다.최여진은 화가 나서 피를 토하고 싶은 심정이었다.예쁘게 관리를 받았더니 남자의 발길에 바닥을 구르며 한 동안 일어날 수조차 없었다.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았다. 최여진은 가까스로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거기 안 서?”하지만 반호영은 이미 멀리 가버린 뒤였다.그는 차를 타고 정처 없이 질주하고 있었다.이 땅을 다시 밟은 순간부터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그러고 보니 이 도시에는 그의 핏줄도 살고 있었다.그의 쌍둥이 형.그리고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짐승 같은 그의 아버지.반호영은 차를 운전하며 부성웅을 떠올렸다.그는 사실 이곳 지리에 익숙하지 않았다.가까스로 부씨 가문 본가에 도착한 그는 대문 밖에서 한참을 기다렸다.날이 어두워진 뒤에야 한 쌍의 노부부와 그리고 한 여자 세 명이 차에서 내려 본가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반호영은 남자의 얼굴을 똑똑히 보지 못했다.하지만 몸매나 걸음걸이는 여전히 건장하고 당당했다.‘그런 모습으로 젊었을 때 어머니를 유혹했구나!’그의 어머니!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땅 속에서 잠자고 있을까?참 불쌍한 여인이었다.반호영은 그녀를 탓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그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