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안에서 아들 한진수는 화려하게 차려 입고 결혼식을 올리고 있었다.그의 모친은 밭일을 오래 한 탓에 구부정한 허리로 로비 입구에 서서 흐뭇한 표정으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그 모습을 본 한진수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갑자기 드는 생각은 재벌가에 데릴사위로 들어가는 게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었다.처갓집 사람들은 태생이 우월감으로 똘똘 뭉쳐서 시골에서 온 그를 무시하고 통제하려 들었다.평생 평민들을 무시하며 살아왔으니 아마 그들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사람들에게 그는 출세한 것으로 보일지 몰라도 내적 고통은 가난했을 때보다 두 배로 늘었다.한진수와 눈이 마주친 그의 모친은 그를 향해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조용히 뒤돌아섰다.사실 그의 모친은 출세한 아들의 모습을 보고 행복했다.좋은 대학을 나온 아이들이 대도시에서 결혼한 뒤로 시골 부모님과 소원해진다는 말을 그녀도 들은 적 있었다.하지만 그의 아들은 직접 전화까지 했고 며느리가 임신 중이라 어쩔 수 없이 이런 선택을 했다고 생각하니 딱히 서운한 건 없었다.하지만 한진수 본인에게 이 결혼식은 고통 그 자체였다.그는 어떻게 시간이 흘러가는 줄도 몰랐다. 하객들과 인사를 나누고 술잔을 기울일 때도 거의 영혼이 반쯤 나간 상태였다.그의 아내도 그런 그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결혼식이 끝나자마자 정소민은 불같이 화를 냈다.“한진수!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내 결혼식에서 그게 무슨 똥 씹은 표정이야! 내가 만만해?”평소 한진수를 아빠라고 부르며 따르던 아내의 아들도 그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한진수! 우리 엄마랑 결혼하기 싫으면 그만둬! 당장 우리 집에서 꺼지라고!”한진수는 그들의 횡포를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정소민은 예의 없이 구는 아이를 혼내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아들을 품에 안으며 칭찬했다.“우리 아들 언제 이렇게 컸을까? 이제 겨우 세 살인 애가 엄마 편도 들 줄 알고. 역시 내가 아들 하나는 잘 키웠다니까! 엄마는 네가 있어서 너무 행복해!”
그는 돈을 위해 자존심까지 버리는 인간은 아니었다.집을 나온 한진수는 호텔 근처에서 어머니를 찾았다.다행히도 어머니를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어머니는 가장 싼 어느 모텔에 묵고 있었다.“엄마도 참 대단해요. 어떻게 혼자 남성까지 올 생각을 하셨어요? 호텔까지 찾아온 것도 신기하네.”한진수는 어머니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어머니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들! 네 엄마 이제 겨우 오십이 좀 넘었어. 아직 늙은 할망구는 아니라고. 일을 좀 많이 해서 등이 굽고 흰머리도 좀 나긴 했지만, 도시에서 관리 잘 받은 사람은 내 또래는 할머니 소리도 못 들어.”“네가 생활비로 쓰라고 보낸 돈으로 버스를 타고 시내로 갔지. 시내에서 다시 고속버스를 타고 남성에 왔고. 그렇게 어렵지도 않던걸?”어머니가 그렇게 말할수록 한진수는 죄책감이 들었다.그의 어머니가 시골 밖을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글을 조금 읽는다고는 하지만 겨우 초등학교 수준이었다. 그것도 한진수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 그의 교과서로 조금 읽힌 게 전부였다.나중에 한진수가 중학교에 입학하고 또 고등학교에 가면서 공부가 어려워지자 어머니도 배움을 그만두었다.하지만 밖에서 간판을 읽고 길을 찾아가는 건 충분했다.건강도 시원치 않은 몸으로 아들 결혼식을 본다고 그 먼 시골에서 여기까지 온 어머니였다.“아들, 이제 네 결혼식도 봤으니 엄마는 만족해. 엄마는 내일 돌아갈게. 엄마 걱정은 하지 마. 혼자서도 잘 살 수 있어. 네 덕분에 남성 구경도 해보고 참 좋네.”어머니가 말했다.한진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엄마, 우리랑 그 사람들은 너무 달라요. 왜 비슷한 사람끼리 결혼하라고 했는지 이제 알겠어요. 조건이 너무 심하게 차이 나면 서로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어요. 그 집 사람들은 우리를 사람 취급도 안 하잖아요. 이 결혼 행복할 것 같지 않아요.”그러자 어머니가 눈물을 흘렸다.“아들, 네 결혼식을 보면서 엄마가 얼마나 기뻤는데! 네가 좋은 사람을 만나 잘사는
한진수가 장인, 장모에게 이혼 얘기를 꺼내려는데 그의 어머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진수야, 집사람이 임신까지 했는데 이혼 얘기를 꺼낸 건 네 잘못이야. 당장 장인어른께 사과드리고 집에 돌아가!”평생 시골 구석을 벗어난 적 없는 어머니였지만 가정의 평화가 소중하다는 이치는 잘 아는 사람이었다.어머니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장인도 한진수를 나무람했다.“나쁜 자식!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부부가 살면서 싸우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야. 조금 싸웠다고 이혼 얘기부터 꺼내면 어떡해? 그것도 네 아이를 배고 있는 여자에게! 네가 그러고도 남자야?”한진수도 자신의 잘못을 알기에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장인어른, 죄송합니다.”“집에 가!”장인어른이 불호령을 내렸다.“사돈도 오셨는데 같이 집으로 모셔가. 사돈도 고향에 돌아갈 필요 없겠어요. 소민이가 좀 예민한 시기이기도 하고 집에 어린애까지 있어서 집안을 돌볼 사람이 필요하긴 했거든요. 안 그래요, 사돈?”한진수의 어머니는 그 말을 듣고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사돈어른 말씀이 맞아요. 제가 민폐가 되지 않는다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민폐라니 가당치도 않습니다. 사돈, 같이 집으로 가시죠.”한진수의 장인이 말했다.그렇게 한진수의 어머니는 정재민과 함께 한진수의 신혼집으로 돌아갔다.집에 돌아와 보니 정소민은 지금도 울고 있었다. 그녀의 어린 아들은 악의로 가득 찬 눈빛으로 한진수와 그의 어머니를 노려보았다.아이는 촌스러운 늙은 여자와 함께 나타난 한진수를 보자 다짜고짜 한진수의 어머니를 발로 걷어찼다.한진수는 화가 치밀어 얼굴까지 빨개졌지만 그의 어머니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 애들이 뭘 알겠어. 아가, 넌 이름이 뭐니? 할머니랑 같이 자러 갈까?”어쨌든 한진수를 아빠라고 부르는 아이인데 한진수 어머니도 아이를 손자처럼 대해주기로 했다.“누가 당신 같은 사람이랑 같이 잔대! 더러워!”아이는 달려가서 엄마의 품에 안겼다.한진수 어머니는 어색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정소민
한 달이 지나고 정소민이 조금 안정되자 한진수 어머니는 집안 일을 하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일해도 돌아오는 것은 없었다.그때마다 한진수는 엄마를 바라보며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하지만 정소민의 배는 점점 커지고 있었기에 그녀와 싸울 수도 없었다.그렇게 또 여덟 달이 지나고 정소민은 사내아이를 출산했다.그리고 그 아이의 이름은 정해운으로 지었다.아이가 태어나고 모두가 기뻐했지만 유독 한 사람만 기분이 나빴다.네 살 된 정소민의 큰아들이었다.정해준은 동생의 출생이 달갑지 않았다. 아이는 어른들의 눈길을 피해 동생을 꼬집고 괴롭혔다.한진수는 그 모습을 몇 번이나 목격했지만 정해준을 야단칠 수 없어서 아내인 정소민에게 이 사실을 얘기했다.하지만 정소민은 큰아들을 꼭 껴안으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우리 왕자님은 참 의젓하기도 하지. 벌써 이렇게 싸움을 잘해? 앞으로 우리 왕자님이 엄마를 지켜줄 거지? 엄마 너무 든든해.”한진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정소민은 남편을 흘겨보며 짜증스럽게 말했다.“무슨 큰일이라고 애한테 그래? 쓰레기 같은 놈! 결혼 전에는 해준이를 자기 아들처럼 사랑해 주겠다고 했으면서! 벌써 차별하는 거야?”한진수도 부아가 치밀었다.“이렇게 어린애한테 동생을 때린 게 잘했다고 칭찬하는 당신은 정상이야? 애 크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해준이를 친아들로 생각하기 때문에 걱정돼서 그런 거잖아!”“그런 건 해운이한테나 써먹어!”말을 마친 정소민은 애꿎은 청소기를 발로 걷어차고는 시어머니에게 화풀이했다.“바닥이 이게 뭐예요? 오늘 하루 종일 뭐 했어요? 누워만 있었어요? 어떻게 모자가 하나 같이 이렇게 게을러요! 우리 집에 공짜 밥이나 얻어먹으려고 왔어요?”순간 분노한 한진수가 손을 치켜들며 소리쳤다.“정소민!”하지만 사람 좋은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말렸다.“진수야, 가족 소중한 줄 알아야지. 해운이도 어린데 벌써 이러면 어떡해.”한진수는 그렇게 15년을 정씨 가문의 만행을 참고 쥐 죽은 듯이 살았다.고등학
정해운은 한진수를 닮아 성실하고 학업 성적도 뛰어난 인재였다.하지만 그의 형인 정해준은 그와 정반대 성격의 소유자였다.정해운보다 세 살 이상인 정해준은 중학교를 졸업하고는 사회의 어중이떠중이들과 어울려 다녔다. 한진수는 큰아들을 야단치고 싶었지만 매번 아내인 정소민은 아들 편만 들었다.엄마 사랑을 독차지하면서도 정해준은 가족들이 정해운을 더 사랑한다고 앙심을 품었다.할머니라는 사람은 막내 정해운만 싸고 돌았다.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도 동생이 공부를 잘한다며 칭찬만 늘어놓았다.그를 가장 아끼는 엄마도 정해운을 자랑스러워하는 눈치였다.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는 열여덟 살의 정해준은 동생이 남성에서 가장 잘나가는 명문 고등학교에 입학한 다음 날, 칼로 동생을 수십 차례 찔렀다.의사와 구급차가 도착했을 때, 정해운은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형인 정해준은 그 자리에서 경찰서에 끌려갔다.그때 정해준의 나이는 열여덟 살이었다.법적 책임을 져야 하는 성인이었다.정씨 가문은 두 아이를 전부 잃게 되었다.상심한 나머지 한진수와 그의 어머니는 몇 번이나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그들은 그날 저녁에 집에서 쫓겨났다.장인은 모든 잘못을 한진수에게 돌렸다.“배은망덕한 자식! 해준이를 얼마나 차별했으면 애가 그런 생각을 했을까? 넌 네 아들만 아들이지? 해준이가 이 집에서 사랑 받고 자랐으면 그런 끔찍한 행동을 했겠어? 다 네 탓이야!”아내도 한진수를 손가락질하며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한진수, 이혼해! 당장 우리 집에서 나가! 너 때문에 나는 두 아들을 잃었어!”고통이 극에 달한 한진수는 당장이라도 아내와 장인 장모에게 주먹을 휘두르고 싶었다.하지만 그는 노쇠한 엄마를 돌봐야 했다.절대 충동적으로 사고를 쳐서는 안 된다.“그래, 이혼하자.”한진수는 그 말을 내뱉은 순간 해방감을 느꼈다.이혼 절차는 빠르게 진행되었다.한진수는 맨몸으로 가문에서 쫓겨났다.20년을 정씨 가문을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한진수도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
그뿐만 아니라 정소민에게 상해 배상금도 지불해야 했다.한진수는 8개월 유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배상금 때문에 그의 어머니는 모았던 돈 백만 원을 정소민에게 줘야 했다. 그건 한진수가 어려운 형편에 가끔 챙겨주던 용돈이었다.한진수가 징역을 사는 8개월 동안 그의 어머니는 갈곳도 없이 길거리 생활을 하며 아들을 기다렸다.그렇게 드디어 지옥 같았던 8개월이 지나고 한진수가 출소했을 때, 그의 어머니는 야위다 못해 체중이 40키로도 나가지 않았다.그들 모자에게는 남은 돈이 한 푼도 없었다.게다가 한진수는 직장을 구하려고 열심히 뛰어다녔지만 그를 받아주는 직장도 없었다. 모두가 그를 두 아들 인생을 망친 범죄자 취급했다.출소한 한진수와 그의 불행한 모친은 3일을 꼬박 굶었다.그러다가 그들은 전처와 마주쳤다.휠체어를 탄 그의 전처는 한진수를 보자마자 욕설부터 퍼부었다.분풀이를 다 한 그녀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크게 소리쳤다.“장애가 있는 몸으로 이 인간을 위해 자식까지 낳아주었는데 이 인간이 글쎄 저를 폭행해서 이빨까지 부러뜨렸어요.”전처의 말을 들은 행인들은 너도나도 한진수를 비난했다.한진수는 어쩔 수 없이 어머니를 데리고 사람들이 없는 곳을 찾아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갔다.한진수는 산 속에서 과일들을 찾아 잠시 주린 배를 채웠다.그러고는 어머니를 업고 있을 만한 곳을 찾다가 돌로 지은 집 한 채를 발견했다.누가 지은 건지는 모르나 갈 곳이 없었던 한진수는 어머니와 함께 이곳에 머무르기로 했다.그는 그 뒤로 산을 내려가지 않았다. 매일 일과는 나무를 베고 산짐승을 사냥하거나 과일을 찾아서 따는 일이었다.가끔은 꿩을 사냥해서 마을에 내려다 팔아 침대와 옷도 장만했다.그렇게 가난하지만 아늑한 삶이 한 동안 유지되었다.어머니도 조금씩 건강을 되찾았지만 70이 넘은 노인은 아들에게 도움을 못 주는 것 같아 못내 안타까웠다.그의 어머니는 집 밖에서 작은 닭장을 만들고 그 안에 닭을 키웠다.그렇게 반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한진수와 그의 어
“지… 진짜요?”사실 그는 별 기대 없이 한 말이었다.그냥 고윤희 혼자 산에서 생존하기 힘들 테고 그는 이 여자가 무사히 살아남기를 바랐다.하지만 고윤희는 그에게서 따뜻함을 느꼈다.그녀는 이미 구경민에게서 상처 받을 대로 받아 많이 지쳐 있었다.지금 그녀는 그냥 고생 좀 하더라도 안정적인 삶을 원했다.고윤희가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내 부모님은 내가 어렸을 때 나를 버렸죠. 그래서 줄곧 엄마 사랑이 간절했어요. 어르신을 양엄마로 모실게요. 앞으로 고향에 돌아가면 저도 직장을 구해서 일할 수 있어요. 제가 어머니를 보살필게요.”“아이고, 아가….”한진수의 어머니는 기쁨에 겨워 울먹였다.그녀도 고생만 하고 행복을 누려본 적 없었다.남성에 온 뒤로 항상 억눌린 삶을 살다가 결국엔 그토록 사랑하던 손자마저 잃었다.노인은 삶이 지치고 피곤했다.하지만 아들을 위해 이 악물고 버티는 중이었다.그런 노인에게 딸이 생겼다.노인은 무척 기분이 좋았다.그렇게 상의를 마친 뒤, 한진수는 어머니와 고윤희를 데리고 산을 넘어 남성을 떠났다.그들은 남성 근처의 작은 도시에 가서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갔다.한편, 구경민은 고윤희를 찾기 위해 남성 곳곳을 샅샅이 뒤졌다.호텔에서 허름한 모텔까지 놓치지 않았다.혹시나 하는 마음에 룸살롱까지 뒤졌다.하지만 어디에도 고윤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구경민은 날이 갈수록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그는 한 달 동안 서울에 돌아가지 않았다.서울 본사에는 그가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였지만 일에 집중할 기분이 아니었다.다행인 건, 그래도 친구인 부소경이 그의 옆을 지켜주었다.부소경은 구경민이 해야 할 업무들을 그를 대신해 깔끔하게 처리해 주었다. 구경민은 폐인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서울 본사는 여전히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진짜 친구란 이런 걸까.한 달 전, 신세희가 서씨 어르신의 압박을 받고 쫓길 때도 구경민은 물심양면 부소경을 도와주었다.그래서 신세희는 고윤희에게 상처 준 구경민이
그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는 약간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산을 다 뒤졌는데 사람을 찾지 못했어요. 산에 있다는 것도 거짓말 같아요!”신세희는 차가운 웃음을 머금으며 반박했다.“윤희 언니는 거짓말할 사람이 아니에요. 산에 있다고 했으면 산에 있는 거겠죠! 그냥 당신이 언니를 찾는다는 걸 알고 그곳을 떠난 걸 수도 있어요.”구경민은 순간 목이 꽉 막혔다.절망이 가슴에서 차오르고 있었다.그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그는 줄곧 자신과 고윤희 사이에 사랑은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다.그들은 어떻게 보면 협력관계에 더 가까웠다. 고윤희 자신도 진짜 여자친구가 돌아오면 알아서 사라질 거라고 말했었다.그리고 그의 여자친구가 돌아오자 그녀는 바로 사라져 버렸다.하지만 구경민의 생활은 모든 게 뒤죽박죽이 되었다.구경민은 미쳐버릴 것 같았다.그리고 이때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구경민은 고윤희의 소식인 줄 알고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수화기 너머로 평소 안부도 잘 묻지 않던 아버지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민아!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구경민은 잔뜩 실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무슨 일이시죠?”구씨 어르신은 답답하다는 듯이 아들을 꾸지람했다.“네가 고윤희랑 만날 때 난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다. 우리 가문에서 그 애를 홀대한 적도 없잖아. 둘이 잘 사는 줄 알았더니 헤어졌다면서? 그리고 여진이랑 잘해보겠다고 네가 장담했어!”“그런데 지금은? 너 여진이랑 헤어진다면서? 너 서른이 넘었어!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구경민은 차갑게 대꾸했다.“다른 일 없으면 끊을게요.”“당장 서울로 올라와!”어르신이 명령조로 말했다.“무슨 일인데 그러세요?”“돌아와서 여진이랑 결혼해! 내가 더 이상 못 기다리겠어! 아빠 말 들어!”사실 어르신은 아들의 사생활에 거의 간섭하지 않았다.어릴 때부터 영특한 구경민이었고 성인이 된 지금은 명실상부한 서울의 실세가 되었다.그래서 어르신은 무슨 일이 생겨도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