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마음을 되돌리려면 체면을 모두 내려놔야 한다더니 정작 도련님은 체면이 여전히 중요한 듯싶었다.강일구는 재빨리 차에 돌아가 도련님이 준비한 꽃다발을 가져왔다.“도련님, 아직 사모님께 꽃을 드리지 못했어요.”그는 꽃다발을 전태윤에게 건넸다.전태윤은 그제야 정신을 가다듬고 하예정에게 꽃을 사 온 일이 생각났다.그는 강일구의 손에서 꽃다발을 건네받으며 나지막이 말했다.“양 집사한테 말해서 이번 달 네 보너스를 두 배로 줄게.”강일구는 매우 신났지만 겉으론 공손하게 대답했다.“도련님과 사모님이 화해만 한다면 저는 보너스 따위 중요하지 않아요.”“그럼 그 돈 아껴서 너희 사모님한테 꽃을 더 선물해야겠네.”강일구는 말을 잇지 못했다.충심을 표했을 뿐인데 도련님이 더블 보너스를 취소할 줄이야!뭇사람들은 머리를 돌리고 입을 막으며 키득키득 웃었다.전태윤은 꽃다발을 안고 가게에 들어가려다가 한 걸음 내디딘 후 바로 물러서며 경호팀에 말했다.“다들 돌아가. 너희들만 보면 예정이는 내가 저를 속였던 일만 생각날 거야.”그의 경호팀은 관성 사람들에게 제2의 전태윤이라는 느낌을 준다.경호원들은 말문이 막혔다.다만 전태윤은 억울해하는 경호원들을 신경 쓸 겨를 없이 꽃을 안고 가게에 들어갔다.하예정은 카운터에 앉아 공예품을 만들고 있었고 심효진은 그녀 맞은편에 앉아 양손으로 턱을 고이고 묵묵히 그녀를 바라봤다.전태윤이 들어오자 심효진은 바로 자리를 비켜주려 했다.이때 하예정이 고개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심효진은 곧바로 다시 제자리에 앉았다.‘안 비키길 잘했어. 하마터면 예정이를 배신할 뻔했잖아.’“예정아, 이 꽃 너 주려고 샀어.”전태윤은 꽃다발을 그녀 앞에 건넸다.“고맙지만 저는 필요 없으니 어서 나가주세요. 제 시선 막지 말고요.”하예정은 여전히 차분하게 말하며 전태윤을 바라봤다.“전태윤 씨, 저 분명 혼자 있고 싶다고 말한 것 같은데.”전태윤은 꽃다발을 건네려는 동작에서 멈춘 채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봤다.부부가 팽팽하게 맞
“태윤 씨가 왜 여기 있어요?”성소현이 의아해하며 물었다.전태윤의 신분으로 이런 곳에 나타날 리가 없는데 눈앞의 남자는 확실히 그였다.성소현은 본인이 잘못 본 건 아닌지 의심하며 눈을 깜빡이다가 다시 쳐다봤지만 그녀가 알고 있는 전태윤이 틀림없었다.전태윤과 하예정 사이에 꽃다발이 놓여있고 전태윤은 또 하예정의 한쪽 손을 잡고 있었다. 순간 성소현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내가 지금 뭘 본 거지? 이 남자 태윤 씨랑 아주 많이 닮았지만 사실 태윤 씨가 아니었나? 그 차가운 성격에 외출할 때마다 경호팀을 거느리고 다니고 가족 이외의 젊은 여자는 3미터 안으로 접근하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는데 그런 사람이 손을 먼저... 아 참, 깜빡했네. 태윤 씨 유부남이었지. 게다가 아내한테 엄청 잘해서 다들 팔불출이라고 하잖아. 내가 아직 태윤 씨 아내분을 본 적이 없지만 이 사람이 팔불출이란 건 완전히 믿어. 태윤 씨 같은 성격의 남자는 일단 사랑에 빠지면 평생 갈 테니까.’성소현은 전태윤이 팔불출이란 소문을 듣고 전혀 이상해하지 않았다.아쉬운 것은 그녀가 전태윤의 사랑을 받는 여자가 될 수 없었다.‘잠깐, 예정이랑 초고속 결혼한 남편도 성이 전씨인데 설마 그 사람이 바로 태윤 씨였던 거야?’성소현은 갑자기 깨닫고는 손에 들었던 쇼핑백들을 전부 바닥에 떨어트렸다.그녀는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해지며 전태윤 부부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잡힌 손을 빼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를 돌아 나오려고 했는데 미처 나오기도 전에 성소현이 불쑥 전태윤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전태윤의 손목을 힘껏 잡아당기며 그와 눈을 맞추려 했다.전태윤은 그녀의 손을 뿌리치더니 방금 그녀가 만졌던 옷깃을 툭툭 털며 차갑게 쏘아붙였다.“성소현 씨, 지금 뭐 하는 짓이죠? 당장 멀리 떨어져요!”성소현은 어두운 표정으로 쓴웃음을 지었다.“나한테 뭐 하는 짓이냐고 물었어요? 그건 내가 물을 말인데, 태윤 씨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에요?”그녀는 전태윤보다 훨씬 화났다.
“예정아, 태윤 씨 평소에 널 어떻게 속였어? 자기가 일반 직장인이라고 늘 그렇게 말했지?”하예정은 성소현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되면 엄청 화내며 그녀와도 사이가 틀어질 줄 알았는데 정작 성소현이 화난 이유는 전태윤이 양쪽 모두 속인 것 때문이다. 그가 만약 기혼 사실을 밝혔다면 성소현은 바로 마음을 접었을 텐데 줄곧 아무 말 없이 있으니 싱글인 줄 알고 끈질기게 집착했다. 결국 그녀만 남의 결혼에 끼어든 제삼자가 돼버렸고 게다가 친구 같은 사촌 여동생의 결혼생활을 훼방한 격이 되었다.“예정아, 두 사람 언제 혼인 신고했어?”성소현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하예정이 대답했다.“추석 연휴 끝나고 다음 날인가 사흘째인가 그쯤이었어요.”그 당시 하예정은 대충 함께 살 사람이 필요해서 초고속결혼을 한 것뿐이니 혼인신고 날짜를 일부러 새겨두지 않았다. 그저 추석 연휴가 지나고 며칠 안 돼 혼인신고를 마쳤다는 것만 알고 있다.“예정아, 우리 결혼기념일은 매년 10월 10일이야.”성소현에게 질책당하던 전태윤이 대신 말했다. 그는 이젠 결혼기념일을 단단히 외워놓았다.“그러니까 두 사람 혼인 신고한 후에야 내가 공개 고백을 한 거네요. 태윤 씨 아주 작정을 했군요!”성소현은 자신이 먼저 고백하고 전태윤이 혼인신고를 했다면 이해라도 할 텐데 두 사람이 혼인 신고한 후에야 그에게 고백했다.전태윤은 그녀의 진심 어린 고백을 거절하긴 했지만 본인의 기혼 사실을 알리진 않았다. 후에 성소현이 하도 집착해서 결혼반지를 보여줬고 그제야 그녀도 마음을 접었다.전태윤이 목소리를 내리깔고 물었다.“나랑 예정이 사이의 일을 성소현 씨한테 보고해야 해요?”“그럴 필요는 없지만 태윤 씨가 유부남이니 나더러 멀리 꺼지라고 했어야죠. 결혼했으면서 아무 내색 안 하고 내가 집착하는 걸 귀찮아하면서도 그냥 내버려 뒀잖아요. 이런 식으로 남자의 자존심을 채운 거예요?”전태윤은 침을 꼴깍 삼키며 긴장한 눈빛으로 하예정을 바라봤다.하예정도 그를 마주 보았다.“예정아, 우리가 처음에 잠시 비
하예정이 고개 들어 그를 쳐다볼 때 전태윤은 몸을 홱 돌리고 가버렸다.하예정은 성큼성큼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가슴이 쿡 찔린 듯 아팠다.다만 그를 위해서인지 아니면 자신을 위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심효진과 성소현이 밖에서 얘기를 나눌 때 전태윤이 심각한 표정으로 서점을 나왔다. 그는 두 여자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늘 타던 롤스로이스로 곧게 걸어갔다.경호팀은 그의 명령대로 다 가고 없지만 기사는 전태윤이 차를 쓸까 봐 감히 떠나지 못했다.전태윤이 다가오자 기사는 얼른 차에서 내려 그에게 차 문을 열어주었다.2분도 안 될 사이에 전태윤은 롤스로이스를 타고 성소현과 심효진의 눈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두 여자는 서로 마주 보다가 곧장 서점 안으로 들어갔다.카운터에 하예정은 안 보이고 그녀가 공예품을 만들 때 사용하는 공구들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테이블 위에 피가 몇 방울 떨어졌고 가위에도 핏자국이 있었다.하예정이 다친 걸까?“예정아.”“예정아.”심효진과 성소현은 그녀를 애타게 부르며 안으로 걸어갔다.하예정은 화장실에 있었다.방금 전태윤이 갑자기 그녀에게 버럭 화냈고 그녀가 고개 들어 그를 마주 보려 할 때 전태윤은 몸을 홱 돌리고 서점을 나섰다.하예정은 순간 정신이 팔려 가위로 손가락을 찔렀는데 상처가 꽤 깊어 그 자리에서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그녀는 재빨리 서랍에서 늘 쟁여뒀던 지혈제와 밴드, 소독약을 꺼내고 면봉으로 간단히 소독한 후 상처에 지혈 크림을 바르고는 밴드를 붙였다.피가 너무 많이 흘러 책상에도 떨어지고 그녀의 다른 손가락에도 잔뜩 묻었다. 그녀는 화장실에 들어가 손에 묻은 핏자국을 씻고 있었다.“나 여기 있어.”하예정이 대답하며 화장실에서 나왔다.“어디 다쳤어?”심효진이 관심 조로 물었다.“이리 봐봐.”하예정은 밴드를 붙인 손가락을 보여주며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가끔 가위에 찔릴 때도 있어. 피를 몇 방울 흘렸을 뿐이야. 괜찮아, 아무 일도 아니니까.”심효진은 하예정의 다친
“그 사람과는 상관없어. 내가 부주의로 찌른 것뿐이야.”하예정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성소현에게도 말했다.“언니, 저랑 태윤 씨 일은...”“예정아, 난 널 탓하지 않아. 그러니까 너도 내게 해명할 필요 없고 사과할 필요도 없어. 우리가 알고 지낸 지 하루 이틀이니? 난 그저 태윤 씨가 양쪽 모두 숨겨가며 우릴 농락한 게 화날 뿐이야.”방금 심효진이 성소현에게 그간 하예정이 전태윤의 진짜 신분을 알고 어떤 일을 겪었는지 모조리 알려주었다. 성소현은 사촌 동생이 안쓰러워 죽을 지경이었다.전태윤에게 감쪽같이 속아버렸으니 말이다.“예정아, 난 일찌감치 태윤 씨한테 마음 접었어. 태윤 씨가 결혼한 걸 알았을 때부터 바로 마음 접었고 한동안은 찾아가서 집착하지도 않고 생각조차 안 하려고 애썼어. 지금은 마음이 훨씬 홀가분해졌어. 나 때문에 네 진심을 외면하지는 마. 태윤 씨가 널 속인 걸 떠나 그 사람은 네가 평생을 믿고 맡길 가치가 있어. 물론 널 감쪽같이 속였으니 나도 네가 너무 빨리 용서해주는 건 원치 않아. 이참에 따끔하게 혼나야 해.”성소현은 다음에 전태윤을 만나면 바로 호칭을 고쳐서 누나라고 부르게 할 생각이었다. 그녀는 사촌 동생을 대신해 전태윤을 제대로 한번 다스려야 할 듯싶었다.“이건 단지 내 생각이고 네가 어떻게 할지는 네가 결정해. 난 절대 간섭 안 해.”성소현은 그녀의 다친 손가락을 살펴보았다.“아직도 피가 안 멈춘 것 같은데 얼른 병원 가서 꿰매야겠다. 너 안색이 다 창백해졌어. 내가 병원까지 데려다줄게.”하예정은 상처가 얼마나 아프던 한사코 거절했다.손이 아픈들 마음만 할까. 그녀는 방금 가위로 너무 세게 찔러서 하마터면 손가락이 잘릴 뻔했다.“내가 네 언니야. 내 말 들어.”성소현은 강제로 그녀를 끌고 나갔다.심효진도 성소현과 한편이 되어 하예정에게 얼른 병원 가서 상처를 다시 소독하고 꿰매라고 다그쳤다.두 친구의 설득에 못 이겨 하예정은 결국 순순히 성소현을 따라 병원에 갔다.한편 전태윤은 거만을 떨며 서점을
전태윤은 굳은 얼굴로 아무 말 없었다.이를 본 소정남도 더는 설득하기 귀찮아 그에게 제안했다.“아니면 너 그냥 회사에 남아있어. 내가 가서 염탐해볼게. 넌 지금 뭐라도 해서 주의력을 분산시켜야 해. 너랑 예정 씨의 모순은 하루 이틀에 해결될 일이 아니니 급해도 소용없어. 급할수록 실수만 더 늘어나.”전태윤은 지금 확실히 무언가를 해서 주의력을 분산시켜야 한다. 그는 약간 무기력해진 말투로 말했다.“땡땡이치고 싶으면 그냥 그렇다고 말해. 날 위해 염탐하러 간다는 식으로 말 돌리지 말고.”소정남은 배시시 웃었다.“내가 널 위해 수년간 소처럼 일만 해왔는데 인제 두 날 정도는 쉬게 해줘야지.”그와 심효진은 아직도 제자리걸음이다.어쩌면 전태윤과 하예정 때문일지도 모른다. 소정남은 심효진이 늘 그를 지켜보고 호감도 있지만 이 감정을 꾹 짓누르고 감히 그에게 마음을 열지 못한다는 걸 충분히 느낄 수 있다.‘어휴! 다 내 팔자지 뭐. 효진 씨를 향한 내 마음을 계속 보여줘야지 어쩌겠어. 길이 멀어야 말의 힘을 알고 시간이 오래 흘러야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듯이 그 언젠가 효진 씨도 내 마음을 받아들일 날이 오겠지.’소정남은 흐뭇하게 웃으며 걸어갔다.그는 수중의 업무를 모조리 전태윤에게 넘기고 우선 꽃가게에 들러 꽃 한 다발 산 뒤 케이크 가게에서 심효진이 잘 먹는 디저트도 몇 개 사서 서점으로 출발했다.성소현과 하예정은 상처를 꿰매러 병원에 갔고 심효진은 홀로 남아 가게를 지켰다. 그녀는 책상에 묻은 핏자국을 깨끗이 닦고 카운터에 앉아 소설을 봤다.“꽤 한가하네요?”이때 익숙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심효진은 고개를 들고 소정남을 보더니 책을 내려놓으며 활짝 웃었다.“정남 씨가 여긴 어쩐 일이에요? 오늘은 스케줄 없어요?”“설 연휴가 막 지났고 설전에 밀린 업무가 너무 많아서 아직 처리하지 못했어요. 오늘 야근해야 내일 쉴 수 있어요.”심효진은 알겠다며 머리를 끄덕였다.“난 또 주말 이틀은 다 쉬는 줄 알았어요.”“평상시엔 다
소정남이 이 시점에 온 걸 보니 전태윤은 아마도 서점을 떠나 회사로 돌아간 모양이다.“소현 씨는 태윤이가 예정 씨 남편인 걸 알더니 뭐라고 하던가요? 어떻게 나왔을지 궁금하네요.”소정남은 사진을 찍고 곧장 전태윤에게 전송하지 않았다.어차피 성소현이 하예정을 데리고 병원에 가서 다시 처치하고 있으니 지금 이 사진을 보내면 전태윤은 그를 당장 회사로 불러들이고 본인만 병원에 달려가 아내를 챙겨줄 게 뻔하다.소정남은 이기적으로 생각했다.‘반나절만 내 시간을 가질 거야.’그는 일단 심효진과 단둘이 시간을 보내다가 회사에 돌아가 전태윤의 일꾼이 되기로 했다.‘내가 전생에 태윤이한테 신세 진 게 많아서 그래. 이번 생에 태윤이를 위해 수많은 일을 하면서도 달갑게 받아들이잖아.’“그저 태윤 씨가 예정이를 속여서는 안 된다고 질책만 했어요. 다른 건 딱히 없어요. 태윤 씨도 더 해명하지 않았고 해명할 것도 없었겠죠. 거짓말한 건 사실이니까요.”심효진은 소정남을 빤히 쳐다봤다.“당신들처럼 돈 많고 세력 있는 남자들은 작정하고 거짓말할 때 연기가 남우주연상 급이라니까요.”이들은 주로 딴사람들의 입을 통제할 수 있는 권력을 충분히 갖고 있어 속은 사람은 계속 속고만 산다.일반인들은 이렇게 오랫동안 숨길 능력이 없다.“효진 씨, 난 효진 씨를 속인 적 없어요. 내가 이사라는 신분으로 다가오는 게 싫다고 해서 전부 내려놨어요. 효진 씨 앞에서 난 한 치의 거짓도 없다고요.”심효진은 디저트를 한 조각 먹으며 말했다.“정남 씨는 이미 내 뒷조사를 깔끔하게 마쳤잖아요. 인제 와서 이사 신분을 내려놓았다고 해도 이미 나에 관한 모든 걸 알고 있잖아요.”소정남은 배시시 웃었다.그는 어느덧 습관이 돼버렸다.한 사람을 눈여겨보기 시작하면 바로 인맥을 동원하여 그 사람의 내막을 싹 다 캐낸다.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니까.“요즘 뭐 새로운 가십거리 없어요?”심효진은 디저트를 한입 먹은 후 한 조각 더 집고는 박스를 소정남의 앞으로 내밀었다. 그도 함께 먹으라는 뜻이
소정남의 잘생긴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심효진과 몇 번이나 데이트 약속을 잡고 함께 밥을 먹었지만 그녀의 부모님은 여전히 그가 심효진에게 대시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눈치다.아마 심효진의 엄마는 소정남이 심서준에게 밥 사주는 거로 생각할 듯싶다.여기까지 생각한 소정남은 말문이 막혔다.심효진이 전화를 받고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여보세요, 어마마마께서 무슨 분부이신가요?”“장난 그만 치고 저녁에 일찍 돌아와. 너희 고모 집에 가서 밥 먹을 거야.”심효진이 경계하며 되물었다.“오늘 무슨 날이에요? 왜 고모네 집에서 밥 먹어요?”심효진의 엄마는 잠시 침묵하다가 목소리를 내리깔고 물었다.“예정이 지금 옆에 있어?”“아니요, 없어요.”“다행이네. 진우 돌아왔거든. 두세 날만 있다가 바로 간대. 걔 H시에 간 이후로 너희 고모 밤낮없이 그리워했어. 엄마는 다 그래, 멀리 떠난 자식 걱정뿐이지. 진우가 오랜만에 돌아왔다고 너희 고모가 우릴 집으로 초대했어.”심효진은 안색이 살짝 변하면서 소정남을 힐긋 보다가 결국 질문을 건넸다.“엄마, 진우 돌아온 거 다른 뜻은 없죠?”전태윤과 하예정이 아직 화해도 못 했는데 바보 같은 동생 진우가 끼어들면 비참하게 죽을 게 뻔하다.어쨌거나 사촌지간이니 심효진은 진우가 너무 비참해지는 걸 원치 않았다.고모 말로는 진우를 H시 계열사로 보내고 김씨 집안 도련님이란 신분을 숨긴 채 밑바닥부터 시작하게 했다고 한다. 김진우는 절대 H시를 마음대로 떠날 수 없고 관성에 돌아오는 것도 사전에 반드시 부모의 동의를 걸쳐야 한다.고모는 진우의 은행카드를 전부 정지하고 용돈도 안 주고 차도 안 줬다. 돈을 쓰고 싶으면 열심히 출근해서 성실하게 월급을 받으며 살아가라고 했다.계열사에서도 진우에게 숙박을 제공하지 않아 반드시 셋집을 구해야만 했다. 매달 집세와 전기세, 수도세는 전부 그의 월급에서 지출해야 한다.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김진우에게 이보다 더 힘든 나날은 없었다.다만 그의 부모님은 이렇게 혹독한 방식으
“아버지, 만약 윤정이가 끝내 떠나지 않겠다고 하면 어쩌죠?”거의 삼십 년을 이윤정과 남매로 지내왔기에 정일범은 그녀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는 이윤정이 쉽게 떠나지 않을 것이라 짐작했다. 그럴 만도 한 게 그녀는 아직도 어머니의 용서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게다가 지금 이윤정에게는 수입원이 없었다. 그런데 그녀더러 강성을 떠나라고 한다면 어떻게 살아가란 말인가?물론 이윤정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생계를 이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평생 안락한 환경에서 자라며 콧대를 높여왔다. 그런 그녀가 남의 밑에서 일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잠시 침묵하던 정군호가 입을 열었다.“더 이상 강성에 머물게 하지 말고 최대한 설득해서 보내도록 해.”“알겠습니다. 사람을 보내서 윤정이를 찾아보고, 찾으면 몰래 돈을 쥐여주고 강성을 떠나게 하죠.”“아버지, 이젠 좀 쉬세요. 저도 좀 피곤해서 잠깐 쉬려고요.”정일범이 말했다.“그래, 밖의 소파에서 눈 좀 붙이렴.”정군호는 그래도 아들을 생각하는 듯했다. 정군호는 아들의 피곤한 얼굴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거실 소파에서 편히 쉬라고 권했다.그리고 정군호도 곧 잠에 빠져들었다.관성은 어느덧 오후 세 시 반이 되었다. 하예정이 심효진에게 말했다.“효진아, 나 우빈이 데리러 유치원 좀 갔다 올게.”심효진이 가볍게 답했다.“그래, 다녀와. 우빈이 데리고 바로 집에 가. 여기서는 사람들이 도와줄 거니까 굳이 다시 오지 않아도 돼.”심효진은 친구가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는 게 마음에 걸렸다.하예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응, 우빈이 데리고 큰이모 집에 들를 거야. 아기도 보고.”겸사겸사 아기도 볼 수 있었다.우빈은 아기 보는 걸 참 좋아했다.매번 아기를 보고 나면, 그 작은 생명은 언제 나와서 자신과 함께 놀 수 있을지 묻곤 했다.그러면서 자신의 많은 장난감들을 아기한테 주겠다고 말하기도 했다.하예정은 두 명의 경호원과 함께 서점을 나섰다. 떠나기 전, 심
비록 하예진과 고현이 위층에 올라가지 않았다고 해도 전호영이 위층에 올라갔기 때문에 분명 그 일을 그녀들에게 알려주었을 것이다.정군호가 입을 열었다.“하예진은 네 큰이모의 후손이야. 분명 가주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돌아온 사람이지. 하예진은 반드시 우리 이씨 가문의 이런 일들을 남에게 알려줄 거야. 우리 가문을 망신시켜 경쟁자를 하나라도 줄이려고. 윤정은 비록 내 친딸은 아니지만, 어릴 때부터 우리 집에서 자라온 아이야. 2년 전, 윤정이가 우리 가문의 친딸이 아니라는 것을 몰랐을 때만 해도 20여 년 동안의 감정도 있고 하니 네 엄마가 윤정이를 가주 자리에 앉혀 놓을 기회가 있었을 텐데. 지금 와서 보니 그런 기회가 이제 없을 것 같아.”정일범이 말을 건넸다.“아빠, 우리 형제들에게도 기회가 있을까요? 우리가 바람을 피우다 발견된 후로 엄마는 윤미를 더욱 중히 여기세요. 이제 윤미 곁에 방 비서가 배정되었으니 방 비서의 도움으로 윤미가 이씨 가문에서 자리를 잘 잡고 있어요. 하여 우리도 중심 세력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고요. 윤미는 우리에게 잘해주지 않거든요. 윤미의 마음속에서 저의 지위는 아마 매우 낮을걸요. 저도 윤미를 동생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해요. 윤미가 정말로 가주 자리에 앉게 된다면 우리는 더 잘 지내지 못할 거예요.”정군호가 말을 이었다.“윤미가 가주 자리에 앉게 되는 것이 하예진이 그룹을 이어받는 것보다는 나아. 하예진은 네 큰이모의 후손이야. 사람들이 네 엄마가 큰이모를 죽였다고 말하고 있어. 하예진이 이번에 강성으로 온 이유도 가주 자리를 빼앗으려는 것 외에도 진실을 조사하고 복수하려고 왔을 거야. 그런데 윤미는 너의 친동생이잖아. 너희들이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한 여기에서 무사히 살아갈 수는 있을걸.”정군호는 한숨을 쉬며 계속해서 말했다.“이씨 가문의 규정이라 어쩔 수도 없어. 이씨 가문을 아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아닌 딸에게 물려주는 규정이 대대로 지켜왔거든. 너희들이 엄마 뱃속에서 이씨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으니
정군호는 이윤미를 바라보며 말했다.“윤미야, 일범도 왔으니 얼른 가봐. 요즘 네 엄마가 기분이 안 좋으셔서 회사에 돌아가지도 않으시고 집안일도 신경 쓰지 않으셨어. 너도 힘들 테니 얼른 가서 쉬어.”정일범도 맞장구쳤다.“그래, 윤미야. 내가 여기서 아빠랑 같이 있으면 돼.”이윤미도 더는 이곳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정군호와 부녀간의 정이 없었다.이윤미가 만약 정군호의 친딸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이 늙은 영감을 만나기도 싫었을 것이다.“오빠, 그럼 난 가볼게. 무슨 일 있으면 다시 전화 줘.”“알았어. 차 조심하고.”정일범은 한 마디 당부하면서 이윤미와 방윤림을 배웅했다.두 사람이 멀리 떠난 뒤에야 정일범은 몸을 돌려 정군호에게 말했다.“아빠, 윤미와 방 비서가 돌아갔어요.”정군호가 다시 말을 건넸다.“2분 후에 다시 한번 둘러봐.”정일범은 정군호가 이윤정에 관해 묻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아채고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몇 분 후, 정일범은 밖으로 나가 병실 근처를 모두 둘러본 후, 이윤미와 방윤림이 모두 떠났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병실로 돌아왔다.“아빠, 정말 갔어요. 몸은 좀 어때요? 엄마가 뭘 하셨는데요?”정일범은 문을 열고 병실로 들어가면서 정군호에게 말했다.정일범은 병상 앞에 앉으며 계속해서 말했다.“엄마가 아빠에 관해 아무것도 묻지 말라고 해서 우리는 아빠가 다친 것 외 얼마나 심하게 다치셨는지 몰랐어요.”정일범은 정구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지만 어디가 아픈지 전혀 찾지 못했다.팔다리는 멀쩡하고, 얼굴의 손바닥 자국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다만 정신 상태가 조금 나빴을 뿐이다.정군호는 정일범에 자신이 내시가 되었다는 것을 알리지 않고 가벼운 말만 꺼냈다.“내 몸이 좀 불편해서 며칠 입원했는데 회복도 잘 되어서 며칠 후면 퇴원할 수 있을 거야. 네 엄마가 그 당시 너무 화가 나서 나에게 잔인한 행동을 하신 것뿐이야. 내가 다치자 네 엄마도 무척 가슴 아파하셨어. 날 병원에 데려다주고 직접 밥도 먹여 주면서 잘
이윤미에 대한 방윤림의 마음을 이윤미는 전혀 몰랐다.알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윤미가 그를 사랑한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야만 방윤림도 그의 마음을 드러낼 것이다.어릴 때부터 받은 교육 덕분에 방윤림은 어떻게 사랑을 표현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묵묵히 이윤미를 돌보고 지켜줄 수밖에 없었다.만약 이윤미가 나중에 다른 남자랑 결혼한다고 해도, 방윤림은 진심으로 그들의 행복을 축복할 것이고 여전히 이윤미의 가장 강력하고 신뢰할 수 있는 특별 비서로 일할 것이다.앞으로 이윤미가 한 아이의 어머니로 되면 방윤림은 그 작은 주인마저 돌봐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이번 생에 그는 이윤미의 사람이었다.그의 생명이 끝날 때까지 이윤미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네.”이윤미는 정일범일 것으로 추측했지만 가서 문을 열어주지 않고 그가 직접 들어오게 했다.문을 밀고 들어온 사람은 역시 정일범이었다.그는 한 손에 꽃다발을 들고 다른 손에 과일 바구니를 들고 들어왔는데 이윤미와 방윤림이 병실 안방이 아닌 거실에 있는 모습을 보더니 그녀에게 물었다.“윤미야, 아빠는?”이윤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침대에서 누워 계시는 데 주무셨을 거예요.”정일범은 방윤림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고는 꽃다발과 과일 바구니를 든 채로 안으로 걸어갔다.이윤미도 따라 들어갔다.정군호는 침대에 누워 휴대전화로 영상을 보고 있었다. 소리가 꽤 크게 켜 놓은 것으로 보면 이윤미와 방윤림의 대화를 듣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들리지도 않았다.이윤미와 방윤림이 말하는 소리가 크지 않았다. 정군호는 결국 70대 노인이었기에 청력에 다소 문제가 있어서 조금 전에 이윤미와 방윤림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들을 수 없었다. 들리지 않을 거면 차라리 동영상 볼륨을 크게 틀어놓고 재미있게 보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정일범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나서야 정군호는 휴대전화 볼륨을 조금 낮추며 아들에게 말했다.“일범아, 진짜로 왔구나.”정일범은 과일 바
이윤미는 갑자기 고개를 돌려 방윤림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방윤림에게 물었다“방 비서, 혹시 좋아하는 사람 있으세요?”방윤림은 이은화가 이윤미에게 배정해준 사람이었다. 이은화는 이윤미에게 방윤림이 그녀의 곁에 머문 순간부터 방윤림을 믿을 수 있고 그 또한 절대로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이윤미가 앞으로 이씨 가문의 가주가 되지 못하더라도 방윤림은 그녀와 평생 함께할 것이며 다시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이윤미는 여러 번 방윤림을 시험한 뒤에야 방윤림을 믿기로 했다.역시 방윤림은 특별 비서직을 맡기 위해 특별히 양성된 사람답게 정말 못 하는 것이 없었다.아주 유능한 사람이었다.이윤미는 이씨 그룹이 점점 못해지고 있지만, 선조들이 세운 훈련 기지는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훈련 기지의 책임자가 어디서 이렇게 대단한 아이를 찾아 기지로 데려와서 조금씩 유능한 비서로 양성했는지 모른다.문무를 겸비했을 뿐만 아니라 비주얼도 아주 훌륭했다.방윤림은 비록 전씨 가문의 도련님들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잘생긴 남자라고 칭찬받을 만큼 멋지다.이윤미가 이씨 가문에 돌아온 지 2년이나 되었지만, 이씨 가문의 비서를 양성하는 훈련 기지가 어디에 있는지 아직도 알아내지 못했다.그녀는 이은화에게 물었지만, 이은화는 그녀에게 훈련 기지가 어디인지 알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다만 그 훈련 기지를 담당하는 사람은 이씨 가문에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사람들이고 가문의 사람들과 사적으로 교류하지 않지만, 누구에게도 치우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만 알면 된다고 했다.전심전력으로 역대 가주들을 위해 최고의 특별 비서를 양성했다.이윤미는 이씨 가문의 재무 보고서를 보았지만, 교육 기지에 돈을 썼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하지만 매년 이씨 가문에서는 큰돈이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었지만, 돈의 행방을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누군가가 단 한 번도 의문을 제기한 적 없었다.이윤미는 그 돈이 바로 훈련 기지에서 인재를 양성하는 데 지급되리라 추측했다.훈련 기지도 자급
한참을 울다가 이윤정은 그제야 울음을 그치고 일어섰다. 그녀는 40만 원을 세어보더니 더도 말고 딱 40만 원이었다.과거에는 40만 원은 그녀의 눈에는 돈에 속하지도 않았다.그러나 지금 40만 원이라는 돈은 이윤미의 한 달 숙박비와 식비일 수도 있다.지금의 이윤정은 관성의 여운별도 더 못한 삶을 살고 있었다.여운별은 비록 용태호에게 이용당하고 있었지만 적어도 친동생 여천우가 매달 그녀에게 생활비를 주기 때문에 굶지는 않았다.그러나 이윤정이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없었다.하지만 그녀는 강성을 떠나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이윤정은 돌아가서 그녀의 세 형수에게 복수하리라 다짐했다.정군호 형제는 정군호의 유전자를 이어받아 밖에서 내연녀를 두기 좋아했다.이윤정은 그들의 취향을 잘 알고 있었고 그들의 성질도 잘 알고 있었다. 정일범 형제 또한 이윤정에 대한 정도 깊었기 때문에 그녀가 조금만 꼬드겨도 금세 넘어올 것이다.그들 형제가 전부 이윤정에게 빠져들게 해서 세 형수님이 죽도록 화나게 하고 싶었다.어차피 이윤정의 몸은 이제 깨끗하지 않으니까.이윤정은 이씨 가문의 친자식이 아니기 때문에 정일범 형제와도 혈연관계가 없었다.그들이 이윤정에게 돈을 주고 그녀를 내연녀로 삼기만 하면 그뿐이었다. 그러면 조윤 일행도 기가 막혀 죽을 지경일 것이다.이윤정은 될 대로 되라고 중얼거리면서 병원을 떠났다.고급 병실의 거실 창문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이윤미는 이윤정이 이은화를 쫓아다니며 해명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이윤정은 큰 소리로 울며 “엄마”라고 부르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이은화가 경호원에게 이윤정 손에 돈을 좀 쥐여주라고 하고 자리를 떠난 모습을 본 이윤미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저 모습을 보니 아마 포기하지 않은 모양이에요. 무슨 일을 저지를지도 몰라요.”이윤미 옆에 서 있는 방윤림이 이윤미의 반응을 살피며 조용히 말했다.이윤미는 그를 쳐다보지 않았지만, 그의 말에 동의했다.“윤정이는 지금 유일하게 잡을 수 있는 건 바로 세 오빠일 거
“엄마, 누가 저와 아버지를 해쳤는지 알아요. 세 형수님이에요. 그 술은 큰오빠가 방에서 아버지께 가져다드린 술인데 큰오빠가 그렇게 할 이유가 없잖아요. 분명 형수님들일 거예요. 엄마!”이은화가 차에 올랐다.이윤정이 앞으로 덤벼들었지만 차 문도 만질 수 없었다.운전기사가 차를 몰기 전에 이은화는 창문을 눌러 경호원들에게 이윤정을 풀어주고 이윤정이 가까이 오도록 지시했다.이윤정은 웃음 지으며 경호원을 물리치고 얼른 앞으로 다가갔다.“엄마, 저 믿으시는 거죠? 제가 말한 것은 모두 사실이에요. 엄마는 계속 병원에서 아버지를 돌보느라 아직 조사할 시간이 없으셨겠지만, 집으로 돌아가셔서 조사하기만 하면 금방 진실이 밝혀질 거예요.”이은화는 이윤정을 바라보며 대답했다.“너와 군호 씨가 남의 계략에 빠졌다는 사실을 나도 알아.”이윤정이 더욱 기뻐했다.이은화의 아이큐로 모를 리가 없었으니까.“하지만 뭐? 너희 두 사람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될 수는 없잖아.”이윤정의 희망이 갑자기 사라져버렸다.“엄마.”이윤정의 눈시울이 바로 붉어졌다.그녀는 누구보다도 고통스러웠다.이윤정의 처음은 한 영감탱이에게 빼앗겨버리고 말았다.“넌 내 딸이 아니야. 네 몸에는 우리 이씨 가문의 피가 흐르지도 않고 정씨 집안의 피도 없어. 넌 나와 군호 씨 딸이 아니거든.”“하지만, 저는 엄마와 아빠가 키운 딸인걸요. 한때 저를 소중한 보물로 여기면서 저를 아끼고 사랑해 주셨잖아요.”이은화는 피식 웃었다.“그건 우리가 네 친아버지한테 속았기 때문이야. 원망하려면 네 친아버지를 원망해. 날 원망하면 안 되지. 넌 시종 우리 가문의 딸이 아니었다. 일범이는 내 친아들이고 일범의 아내도 내 며느리야. 너의 형수님들이 널 모함했는데, 그래서 뭐? 나에게는 핏줄이 가장 중요해.”이은화는 이윤정의 창백한 얼굴을 무시하고 경호원에게 분부했다.“얘한테 돈 40만 원 줘서 보내. 얼른 가자!”이은화도 속으로 화가 났지만, 조윤과 이윤정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그
정군호는 이윤미가 자신과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걸 눈치채고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말을 이었다.“영화도 좀 보고 쉬어야겠어.”이윤미는 아버지를 눕히고 싶어 했고 방윤림이 그녀의 뜻을 알아듣고 대신 정군호를 눕혀 주었다.“아버지, 저와 방 비서는 거실에 있을게요. 무슨 일이 있으면 불러주세요. 이따가 큰오빠도 오실 거에요.”정군호가 의아해하며 물었다.“네 오빠가 왜 와? 네가 날 이틀 동안 돌보겠다고 하지 않았어? 왜 돌보기 싫어서 그래?”“큰오빠도 아버지 아들인데 아버지께서 입원하셨는데 오빠가 와서 돌보는 게 당연한 거 아니에요? 제가 돌보기 싫은 것과 상관없는 것 같은데요. 아버지는 저 혼자만의 아버지가 아니잖아요.”정군호는 목이 메어 잠시 할 말을 잃었다.“네 오빠는 출근하시잖아.”“저도 출근해야죠. 제가 큰오빠보다 더 바빠요.”정군호가 또 무슨 말을 하려 하자 이윤미는 이은화를 내세우며 계속해서 말했다.“엄마가 저 보고 병원으로 와서 아빠와 좀 이야기도 나누라고 했어요. 한 시간 뒤에 오빠가 오신다고 하셨고요.”정군호는 이은화의 계획이라는 말을 듣고는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정군호는 이윤정의 정황을 묻고 싶었지만 감히 이윤미에게 묻지 못했다.이윤정은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그녀는 지금 입원 병동 입구 근처에 숨어 대문을 바라보며 이은화를 기다리고 있었다.드디어 이은화가 나타났다!이은화가 경호원들과 함께 입원 병동을 나서자 이윤정은 재빨리 나타나 쏜살같이 달려갔다.이은화 곁의 경호원들도 만만한 실력이 아니었기에 이윤정이 다가오기도 전에 먼저 발을 내밀었다.다행히 이윤정은 반응이 빨라 경호원이 날린 발차기를 재빨리 피했다.“엄마, 나야. 윤정이.”이윤정은 큰소리로 외쳤다.이윤정이라는 말을 들은 경호원들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지만, 여전히 이윤정을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게 했다.“엄마, 엄마!”이은화의 발걸음은 여전히 멈추지 않고 계속 걸어가자 이윤정은 소리를 지르며 따라갔다.“엄마, 제 말 좀 들어주세요. 엄마,
이윤미가 입을 열었다.“삼촌들의 삶은 여전히 행복하게 살고 계세요.”이윤미는 정군호가 정씨 집안의 미래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정씨 집안의 미래를 위해서, 그리고 이은화의 복수 수단을 두려워했던 정군호는 스스로 그 부분을 잘라 혼인 생활을 지키기로 했다. 앞으로 같은 침대에 있더라도 아무 짓도 못 하는 점에 대해 정군호도 받아들였다.조심했어야 했는데.“그럼 됐어. 윤미야, 비록 넌 네 엄마의 이씨 성을 따르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 정씨 집안의 피가 흐르고 있거든. 앞으로 정씨 집안에 무슨 일이 생기면 절대로 수수방관해서는 안 돼. 네 삼촌과 고모들도 너에게 잘 대해 주시잖아.”이윤미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그분들도 지금 그들만의 일자리가 있잖아요. 그분들이 열심히 일하고 안전하게 지내시기만 한다면 생활이 나쁘지 않을 거예요. 만약 급한 일이 생기면 제가 도울 수 있는 부분은 도와드려야죠.”만약 이윤미가 도울 수 없는 일이라면 예외가 없을 것이다.정군호도 이윤미의 말뜻을 알아챘다.이윤미는 이은화처럼 매우 냉정하고 정씨 집안 사람들과 감정이 없다는 점도 잘 알고 있었다.정씨 집안에 가장 정이 깊은 사람이 바로 이윤정이였다.이윤정은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정군호는 부드럽게 웃었다.“성실하게 생활을 꾸려나가는 사람들이셔. 그리고 저의 사촌 형제들도 전부 성실한 사람들이지.”성실하거나 말거나 이윤미가 관여할 바는 아니지만, 그들이 이씨 가문의 명목으로 함부로 행동하면 절대로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다.이윤미는 남들이 그녀를 바둑판의 바둑알로 이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아버지, 저도 알아요.”정군호는 이윤미를 한참 바라보다가 다시 방윤림을 힐끗 쳐다보았다. 정군호는 말을 할까 말까 망설였고 그의 모습을 본 이윤미가 먼저 입을 열었다.“아버지, 하시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세요. 우리가 친부녀 사이인데 못할 말이 어디 있겠어요?”“윤미야, 사실 네 엄마 마음속에도 한 남자가 들어있어. 다만 그 남자가 자취를 감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