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도 무심하시지. 다른 손녀들은 그래도 나름 효심이 있는데 하필이면 하예정 이 불효한 손녀가 재벌가에 시집가다니!하지문 일행은 할아버지가 도망치자 감히 더 머무르지 못했다.다들 차에 올라타고 줄행랑을 쳤다.전태윤은 물통을 바닥에 쾅 하고 내려놓았다. 동작이 너무 큰 탓에 통 안의 물이 밖으로 튀어 그의 바짓가랑이를 적셨다.“영감탱이가, 배짱 있으면 도망치지 마!”전태윤은 멀어져가는 차들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그는 원래 하 영감을 내쫓지 못하면 경호원들을 시켜 노인네를 강제로 차에 태우고 하씨 집안 사람들을 전부 돌려보낼 생각이었다.하 영감이 버티지 못하고 스스로 도망쳤으니 일이 훨씬 수월해졌다.하예정과 심효진도 밖으로 나왔고 심효진이 먼저 말을 꺼냈다.“예정아, 저 사람들 화해는커녕! 인터넷으로 공개사과를 해도 절대 용서하지 마. 다들 네가 잘 되는 걸 배 아파하는 인간들이야.”하예정은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난 한 번도 저들을 용서하고 화해할 생각 없었어. 화해할 수도 없지.”“저 사람 네 친할아버지 맞아? 나 방금 네 아빠가 친자가 맞는지 진지하게 고민했다니까. 세상에 어떤 친할아버지가 친손녀에게 이렇게 하냐고?”하예정은 한참 침묵하다가 말했다.“부모님이 살아계셨을 때, 엄마는 늘 내게 아빠가 할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았다고 하셨어. 영락없는 친부자였지. 우리 아빠는 맏이도 아니고 막내도 아닌 어중간한 처지라 줄곧 사랑받지 못했어.”그녀의 어린 시절 기억 속에서 할아버지, 할머니는 그녀의 부모님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의 집에서 먹고 지냈고 조금만 편찮아도 그녀의 부모님이 병원으로 모셨지만 돈과 정력을 모두 기울여도 사랑받지 못했다.큰어머니와 숙모가 명절 때마다 두 어르신께 닭고기 한 그릇을 보내오면 일 년 내내 칭찬을 입에 달고 산다. 큰아들과 작은아들은 효심이 지극하여 닭을 잡아도 잊지 않고 그들에게 한 그릇 가져다준다고 칭찬을 남발한다.한편 하예정네 집에서 닭을 잡을 때마다 닭 다리 두 개를 어르신 두 분께 드렸지
아내의 마음을 되돌리려면 체면을 모두 내려놔야 한다더니 정작 도련님은 체면이 여전히 중요한 듯싶었다.강일구는 재빨리 차에 돌아가 도련님이 준비한 꽃다발을 가져왔다.“도련님, 아직 사모님께 꽃을 드리지 못했어요.”그는 꽃다발을 전태윤에게 건넸다.전태윤은 그제야 정신을 가다듬고 하예정에게 꽃을 사 온 일이 생각났다.그는 강일구의 손에서 꽃다발을 건네받으며 나지막이 말했다.“양 집사한테 말해서 이번 달 네 보너스를 두 배로 줄게.”강일구는 매우 신났지만 겉으론 공손하게 대답했다.“도련님과 사모님이 화해만 한다면 저는 보너스 따위 중요하지 않아요.”“그럼 그 돈 아껴서 너희 사모님한테 꽃을 더 선물해야겠네.”강일구는 말을 잇지 못했다.충심을 표했을 뿐인데 도련님이 더블 보너스를 취소할 줄이야!뭇사람들은 머리를 돌리고 입을 막으며 키득키득 웃었다.전태윤은 꽃다발을 안고 가게에 들어가려다가 한 걸음 내디딘 후 바로 물러서며 경호팀에 말했다.“다들 돌아가. 너희들만 보면 예정이는 내가 저를 속였던 일만 생각날 거야.”그의 경호팀은 관성 사람들에게 제2의 전태윤이라는 느낌을 준다.경호원들은 말문이 막혔다.다만 전태윤은 억울해하는 경호원들을 신경 쓸 겨를 없이 꽃을 안고 가게에 들어갔다.하예정은 카운터에 앉아 공예품을 만들고 있었고 심효진은 그녀 맞은편에 앉아 양손으로 턱을 고이고 묵묵히 그녀를 바라봤다.전태윤이 들어오자 심효진은 바로 자리를 비켜주려 했다.이때 하예정이 고개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심효진은 곧바로 다시 제자리에 앉았다.‘안 비키길 잘했어. 하마터면 예정이를 배신할 뻔했잖아.’“예정아, 이 꽃 너 주려고 샀어.”전태윤은 꽃다발을 그녀 앞에 건넸다.“고맙지만 저는 필요 없으니 어서 나가주세요. 제 시선 막지 말고요.”하예정은 여전히 차분하게 말하며 전태윤을 바라봤다.“전태윤 씨, 저 분명 혼자 있고 싶다고 말한 것 같은데.”전태윤은 꽃다발을 건네려는 동작에서 멈춘 채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봤다.부부가 팽팽하게 맞
“태윤 씨가 왜 여기 있어요?”성소현이 의아해하며 물었다.전태윤의 신분으로 이런 곳에 나타날 리가 없는데 눈앞의 남자는 확실히 그였다.성소현은 본인이 잘못 본 건 아닌지 의심하며 눈을 깜빡이다가 다시 쳐다봤지만 그녀가 알고 있는 전태윤이 틀림없었다.전태윤과 하예정 사이에 꽃다발이 놓여있고 전태윤은 또 하예정의 한쪽 손을 잡고 있었다. 순간 성소현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내가 지금 뭘 본 거지? 이 남자 태윤 씨랑 아주 많이 닮았지만 사실 태윤 씨가 아니었나? 그 차가운 성격에 외출할 때마다 경호팀을 거느리고 다니고 가족 이외의 젊은 여자는 3미터 안으로 접근하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는데 그런 사람이 손을 먼저... 아 참, 깜빡했네. 태윤 씨 유부남이었지. 게다가 아내한테 엄청 잘해서 다들 팔불출이라고 하잖아. 내가 아직 태윤 씨 아내분을 본 적이 없지만 이 사람이 팔불출이란 건 완전히 믿어. 태윤 씨 같은 성격의 남자는 일단 사랑에 빠지면 평생 갈 테니까.’성소현은 전태윤이 팔불출이란 소문을 듣고 전혀 이상해하지 않았다.아쉬운 것은 그녀가 전태윤의 사랑을 받는 여자가 될 수 없었다.‘잠깐, 예정이랑 초고속 결혼한 남편도 성이 전씨인데 설마 그 사람이 바로 태윤 씨였던 거야?’성소현은 갑자기 깨닫고는 손에 들었던 쇼핑백들을 전부 바닥에 떨어트렸다.그녀는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해지며 전태윤 부부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잡힌 손을 빼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를 돌아 나오려고 했는데 미처 나오기도 전에 성소현이 불쑥 전태윤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전태윤의 손목을 힘껏 잡아당기며 그와 눈을 맞추려 했다.전태윤은 그녀의 손을 뿌리치더니 방금 그녀가 만졌던 옷깃을 툭툭 털며 차갑게 쏘아붙였다.“성소현 씨, 지금 뭐 하는 짓이죠? 당장 멀리 떨어져요!”성소현은 어두운 표정으로 쓴웃음을 지었다.“나한테 뭐 하는 짓이냐고 물었어요? 그건 내가 물을 말인데, 태윤 씨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에요?”그녀는 전태윤보다 훨씬 화났다.
“예정아, 태윤 씨 평소에 널 어떻게 속였어? 자기가 일반 직장인이라고 늘 그렇게 말했지?”하예정은 성소현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되면 엄청 화내며 그녀와도 사이가 틀어질 줄 알았는데 정작 성소현이 화난 이유는 전태윤이 양쪽 모두 속인 것 때문이다. 그가 만약 기혼 사실을 밝혔다면 성소현은 바로 마음을 접었을 텐데 줄곧 아무 말 없이 있으니 싱글인 줄 알고 끈질기게 집착했다. 결국 그녀만 남의 결혼에 끼어든 제삼자가 돼버렸고 게다가 친구 같은 사촌 여동생의 결혼생활을 훼방한 격이 되었다.“예정아, 두 사람 언제 혼인 신고했어?”성소현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하예정이 대답했다.“추석 연휴 끝나고 다음 날인가 사흘째인가 그쯤이었어요.”그 당시 하예정은 대충 함께 살 사람이 필요해서 초고속결혼을 한 것뿐이니 혼인신고 날짜를 일부러 새겨두지 않았다. 그저 추석 연휴가 지나고 며칠 안 돼 혼인신고를 마쳤다는 것만 알고 있다.“예정아, 우리 결혼기념일은 매년 10월 10일이야.”성소현에게 질책당하던 전태윤이 대신 말했다. 그는 이젠 결혼기념일을 단단히 외워놓았다.“그러니까 두 사람 혼인 신고한 후에야 내가 공개 고백을 한 거네요. 태윤 씨 아주 작정을 했군요!”성소현은 자신이 먼저 고백하고 전태윤이 혼인신고를 했다면 이해라도 할 텐데 두 사람이 혼인 신고한 후에야 그에게 고백했다.전태윤은 그녀의 진심 어린 고백을 거절하긴 했지만 본인의 기혼 사실을 알리진 않았다. 후에 성소현이 하도 집착해서 결혼반지를 보여줬고 그제야 그녀도 마음을 접었다.전태윤이 목소리를 내리깔고 물었다.“나랑 예정이 사이의 일을 성소현 씨한테 보고해야 해요?”“그럴 필요는 없지만 태윤 씨가 유부남이니 나더러 멀리 꺼지라고 했어야죠. 결혼했으면서 아무 내색 안 하고 내가 집착하는 걸 귀찮아하면서도 그냥 내버려 뒀잖아요. 이런 식으로 남자의 자존심을 채운 거예요?”전태윤은 침을 꼴깍 삼키며 긴장한 눈빛으로 하예정을 바라봤다.하예정도 그를 마주 보았다.“예정아, 우리가 처음에 잠시 비
하예정이 고개 들어 그를 쳐다볼 때 전태윤은 몸을 홱 돌리고 가버렸다.하예정은 성큼성큼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가슴이 쿡 찔린 듯 아팠다.다만 그를 위해서인지 아니면 자신을 위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심효진과 성소현이 밖에서 얘기를 나눌 때 전태윤이 심각한 표정으로 서점을 나왔다. 그는 두 여자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늘 타던 롤스로이스로 곧게 걸어갔다.경호팀은 그의 명령대로 다 가고 없지만 기사는 전태윤이 차를 쓸까 봐 감히 떠나지 못했다.전태윤이 다가오자 기사는 얼른 차에서 내려 그에게 차 문을 열어주었다.2분도 안 될 사이에 전태윤은 롤스로이스를 타고 성소현과 심효진의 눈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두 여자는 서로 마주 보다가 곧장 서점 안으로 들어갔다.카운터에 하예정은 안 보이고 그녀가 공예품을 만들 때 사용하는 공구들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테이블 위에 피가 몇 방울 떨어졌고 가위에도 핏자국이 있었다.하예정이 다친 걸까?“예정아.”“예정아.”심효진과 성소현은 그녀를 애타게 부르며 안으로 걸어갔다.하예정은 화장실에 있었다.방금 전태윤이 갑자기 그녀에게 버럭 화냈고 그녀가 고개 들어 그를 마주 보려 할 때 전태윤은 몸을 홱 돌리고 서점을 나섰다.하예정은 순간 정신이 팔려 가위로 손가락을 찔렀는데 상처가 꽤 깊어 그 자리에서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그녀는 재빨리 서랍에서 늘 쟁여뒀던 지혈제와 밴드, 소독약을 꺼내고 면봉으로 간단히 소독한 후 상처에 지혈 크림을 바르고는 밴드를 붙였다.피가 너무 많이 흘러 책상에도 떨어지고 그녀의 다른 손가락에도 잔뜩 묻었다. 그녀는 화장실에 들어가 손에 묻은 핏자국을 씻고 있었다.“나 여기 있어.”하예정이 대답하며 화장실에서 나왔다.“어디 다쳤어?”심효진이 관심 조로 물었다.“이리 봐봐.”하예정은 밴드를 붙인 손가락을 보여주며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가끔 가위에 찔릴 때도 있어. 피를 몇 방울 흘렸을 뿐이야. 괜찮아, 아무 일도 아니니까.”심효진은 하예정의 다친
“그 사람과는 상관없어. 내가 부주의로 찌른 것뿐이야.”하예정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성소현에게도 말했다.“언니, 저랑 태윤 씨 일은...”“예정아, 난 널 탓하지 않아. 그러니까 너도 내게 해명할 필요 없고 사과할 필요도 없어. 우리가 알고 지낸 지 하루 이틀이니? 난 그저 태윤 씨가 양쪽 모두 숨겨가며 우릴 농락한 게 화날 뿐이야.”방금 심효진이 성소현에게 그간 하예정이 전태윤의 진짜 신분을 알고 어떤 일을 겪었는지 모조리 알려주었다. 성소현은 사촌 동생이 안쓰러워 죽을 지경이었다.전태윤에게 감쪽같이 속아버렸으니 말이다.“예정아, 난 일찌감치 태윤 씨한테 마음 접었어. 태윤 씨가 결혼한 걸 알았을 때부터 바로 마음 접었고 한동안은 찾아가서 집착하지도 않고 생각조차 안 하려고 애썼어. 지금은 마음이 훨씬 홀가분해졌어. 나 때문에 네 진심을 외면하지는 마. 태윤 씨가 널 속인 걸 떠나 그 사람은 네가 평생을 믿고 맡길 가치가 있어. 물론 널 감쪽같이 속였으니 나도 네가 너무 빨리 용서해주는 건 원치 않아. 이참에 따끔하게 혼나야 해.”성소현은 다음에 전태윤을 만나면 바로 호칭을 고쳐서 누나라고 부르게 할 생각이었다. 그녀는 사촌 동생을 대신해 전태윤을 제대로 한번 다스려야 할 듯싶었다.“이건 단지 내 생각이고 네가 어떻게 할지는 네가 결정해. 난 절대 간섭 안 해.”성소현은 그녀의 다친 손가락을 살펴보았다.“아직도 피가 안 멈춘 것 같은데 얼른 병원 가서 꿰매야겠다. 너 안색이 다 창백해졌어. 내가 병원까지 데려다줄게.”하예정은 상처가 얼마나 아프던 한사코 거절했다.손이 아픈들 마음만 할까. 그녀는 방금 가위로 너무 세게 찔러서 하마터면 손가락이 잘릴 뻔했다.“내가 네 언니야. 내 말 들어.”성소현은 강제로 그녀를 끌고 나갔다.심효진도 성소현과 한편이 되어 하예정에게 얼른 병원 가서 상처를 다시 소독하고 꿰매라고 다그쳤다.두 친구의 설득에 못 이겨 하예정은 결국 순순히 성소현을 따라 병원에 갔다.한편 전태윤은 거만을 떨며 서점을
전태윤은 굳은 얼굴로 아무 말 없었다.이를 본 소정남도 더는 설득하기 귀찮아 그에게 제안했다.“아니면 너 그냥 회사에 남아있어. 내가 가서 염탐해볼게. 넌 지금 뭐라도 해서 주의력을 분산시켜야 해. 너랑 예정 씨의 모순은 하루 이틀에 해결될 일이 아니니 급해도 소용없어. 급할수록 실수만 더 늘어나.”전태윤은 지금 확실히 무언가를 해서 주의력을 분산시켜야 한다. 그는 약간 무기력해진 말투로 말했다.“땡땡이치고 싶으면 그냥 그렇다고 말해. 날 위해 염탐하러 간다는 식으로 말 돌리지 말고.”소정남은 배시시 웃었다.“내가 널 위해 수년간 소처럼 일만 해왔는데 인제 두 날 정도는 쉬게 해줘야지.”그와 심효진은 아직도 제자리걸음이다.어쩌면 전태윤과 하예정 때문일지도 모른다. 소정남은 심효진이 늘 그를 지켜보고 호감도 있지만 이 감정을 꾹 짓누르고 감히 그에게 마음을 열지 못한다는 걸 충분히 느낄 수 있다.‘어휴! 다 내 팔자지 뭐. 효진 씨를 향한 내 마음을 계속 보여줘야지 어쩌겠어. 길이 멀어야 말의 힘을 알고 시간이 오래 흘러야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듯이 그 언젠가 효진 씨도 내 마음을 받아들일 날이 오겠지.’소정남은 흐뭇하게 웃으며 걸어갔다.그는 수중의 업무를 모조리 전태윤에게 넘기고 우선 꽃가게에 들러 꽃 한 다발 산 뒤 케이크 가게에서 심효진이 잘 먹는 디저트도 몇 개 사서 서점으로 출발했다.성소현과 하예정은 상처를 꿰매러 병원에 갔고 심효진은 홀로 남아 가게를 지켰다. 그녀는 책상에 묻은 핏자국을 깨끗이 닦고 카운터에 앉아 소설을 봤다.“꽤 한가하네요?”이때 익숙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심효진은 고개를 들고 소정남을 보더니 책을 내려놓으며 활짝 웃었다.“정남 씨가 여긴 어쩐 일이에요? 오늘은 스케줄 없어요?”“설 연휴가 막 지났고 설전에 밀린 업무가 너무 많아서 아직 처리하지 못했어요. 오늘 야근해야 내일 쉴 수 있어요.”심효진은 알겠다며 머리를 끄덕였다.“난 또 주말 이틀은 다 쉬는 줄 알았어요.”“평상시엔 다
소정남이 이 시점에 온 걸 보니 전태윤은 아마도 서점을 떠나 회사로 돌아간 모양이다.“소현 씨는 태윤이가 예정 씨 남편인 걸 알더니 뭐라고 하던가요? 어떻게 나왔을지 궁금하네요.”소정남은 사진을 찍고 곧장 전태윤에게 전송하지 않았다.어차피 성소현이 하예정을 데리고 병원에 가서 다시 처치하고 있으니 지금 이 사진을 보내면 전태윤은 그를 당장 회사로 불러들이고 본인만 병원에 달려가 아내를 챙겨줄 게 뻔하다.소정남은 이기적으로 생각했다.‘반나절만 내 시간을 가질 거야.’그는 일단 심효진과 단둘이 시간을 보내다가 회사에 돌아가 전태윤의 일꾼이 되기로 했다.‘내가 전생에 태윤이한테 신세 진 게 많아서 그래. 이번 생에 태윤이를 위해 수많은 일을 하면서도 달갑게 받아들이잖아.’“그저 태윤 씨가 예정이를 속여서는 안 된다고 질책만 했어요. 다른 건 딱히 없어요. 태윤 씨도 더 해명하지 않았고 해명할 것도 없었겠죠. 거짓말한 건 사실이니까요.”심효진은 소정남을 빤히 쳐다봤다.“당신들처럼 돈 많고 세력 있는 남자들은 작정하고 거짓말할 때 연기가 남우주연상 급이라니까요.”이들은 주로 딴사람들의 입을 통제할 수 있는 권력을 충분히 갖고 있어 속은 사람은 계속 속고만 산다.일반인들은 이렇게 오랫동안 숨길 능력이 없다.“효진 씨, 난 효진 씨를 속인 적 없어요. 내가 이사라는 신분으로 다가오는 게 싫다고 해서 전부 내려놨어요. 효진 씨 앞에서 난 한 치의 거짓도 없다고요.”심효진은 디저트를 한 조각 먹으며 말했다.“정남 씨는 이미 내 뒷조사를 깔끔하게 마쳤잖아요. 인제 와서 이사 신분을 내려놓았다고 해도 이미 나에 관한 모든 걸 알고 있잖아요.”소정남은 배시시 웃었다.그는 어느덧 습관이 돼버렸다.한 사람을 눈여겨보기 시작하면 바로 인맥을 동원하여 그 사람의 내막을 싹 다 캐낸다.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니까.“요즘 뭐 새로운 가십거리 없어요?”심효진은 디저트를 한입 먹은 후 한 조각 더 집고는 박스를 소정남의 앞으로 내밀었다. 그도 함께 먹으라는 뜻이
고현이 입을 열었다.“호영 씨는 너무 뻔뻔스럽네요.”전호영은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제가 뻔뻔스럽지 않았다면 고현 씨의 마음을 훔치지 못했을걸요. 우리 큰형을 따라 배웠거든요. 우리 형이 형수님에게 구애한 적 없지만 뻔뻔스럽게 자신의 미래 아내를 쫓아다녀야 한다고 저에게 말했거든요. 우리 큰형도 옛날에 체면을 중요시하게 여겼지만, 우리 형수님과 지내면서 점점 뻔뻔스럽게 되었어요.”전태윤 부부가 금방 결혼했을 때 많은 갈등이 있었고 냉전도 자주 했었다.전호영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감히 더 깊이 알아보지 못했을 뿐이다.때로는 전태윤 부부가 싸움이 심해질 때면 전씨 할머니까지 나서야 했다.고현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전 대표님께서 호영 씨가 자신을 뻔뻔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 아마 호영 씨는 이 세상에서 없어질지도 몰라요.”고현은 전씨 가문의 형제들이 맏형 전태윤을 유난히 존중했고 또 가장 두려워한다고 전해 들었다.전태윤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여전히 차갑고 도도한 모습이지만 하예정 앞에서는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전씨 가문은 형제들은 서원 리조트에서 함께 산 덕분에 사촌 형제지간일지라도 정이 아주 깊었다.따라서 맏형 전태윤의 지위도 높았고 그의 형제들도 그를 잘 따랐다.“큰형이 지금 여기에 없는데요 뭐. 그리고 제가 한 말도 사실인걸요. 우리 형도 형수님이 생긴 뒤로 뻔뻔해졌거든요. 우리도 따라 한 것뿐이에요.”고현은 여전히 웃으며 말을 건넸다.“호영 씨가 뻔뻔한 사실을 남에게 밀지 마세요. 그만하고 우리 얼른 가요. 호영 씨, 네가 오늘 제가 드레스 입고 하이힐을 신는다면 남들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까요? 제가 비웃음을 당해도 괜찮겠어요?”전호영은 그녀가 벗은 하이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제가 뭘 더 신경 쓰겠어요? 제가 언제 다른 사람이 비웃을까 봐 두려워했었나요? 저는 남들 시선이 두렵지 않고 제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사람이에요. 남들이 시선이 신경 쓰였다면 오늘 같은 달콤함도 없었을 거예요.”전호영은 다른 사
사실 전호영은 차를 세울 때 고현이 평소에 자주 타는 그 마이바흐 차를 보았다.“집 안에 있어. 들어가 봐.”진미리는 물건을 들여 집 안으로 들어가려다 다시 전호영의 손에 물건을 전호영 손에 쥐여주었다.“난 꽃에 물을 좀 주고 들어갈게. 날도 어두워질 것 같으니 먼저 들어가 봐.”전호영은 자주 고씨 가문의 저택으로 왔고 진작에 고씨 가문을 그의 두 번째 집으로 생각했다.전호영은 혼자 집 안으로 들어갔다.집에 들어서자 그는 한 여자가 소파에 앉아 휴대전화를 들고 메시지를 보내는 모습을 보았다.그 여자는 고현과 정말 똑같이 생겼다.만약 고현이 치마를 입고 가발을 쓴다면 저렇게 예쁠 것이다.고현은 원래 긴 가발을 쓰고 싶지 않았지만, 전호영이 말하는 소리를 듣더니 재빨리 가발을 쓰고 앉아 있었다.전호영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알고 싶었다.그녀는 전호영 앞에서 치마를 입은 적 있었다.당시 고현은 그날이 전호영 앞에서 치마를 입는 유일한 날이라고 생각했었다.그러나 고현은 지금 또 치마를 입고 있다.그녀는 전호영을 위해 한 번이고 두 번이고 늘 그녀의 원칙을 깨뜨렸다.아니, 눈앞의 여자가 바로 그의 고현이었다.전호영은 씩 웃었다.그는 다가가더니 먼저 손에 들고 있던 가방들을 내려놓고 꽃다발을 고현에게 건네주며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여신님, 이 꽃다발을 당신에게 드릴게요.”고현의 시선은 꽃다발에 가려져 더는 휴대전화를 쳐다보지 못했다. 그녀는 휴대전화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전호영을 올려다보며 빙그레 웃는 그의 얼굴을 보며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서프라이즈도 해주고 싶었는데, 호영 씨 표정을 보니 놀라지 않은 것 같네요.”“현이 씨가 저를 위해 치마를 한 번 갈아입었을 때 제가 재빨리 현이 씨 도도한 모습을 기억해 버렸죠.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전호영은 고현이 꽃다발을 받기를 기다렸다가 뒤로 몇 걸음 물러서서 그녀를 진지하게 바라보며 물었다.“준비되었다고 했는데 정말 이렇게 나가려고요? ”고현은 지금 드레스를 입고 가발을 착용
잠시 후, 진미리가 말했다.“됐어. 나도 상관 안 할래.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엄마는 몇 년 더 살고 싶어.”“엄마, 저는 효녀거든요.”진미리가 입을 열었다.“난 네가 불효녀라고 말 한 적 없어. 네가 여자 신분을 회복하는 일에 엄마가 더는 신경 쓰지 않겠다는 말이야. 더 관여하면 내가 열 받아서 죽을 것 같아. 내가 몇 년을 더 살아서 네가 결혼하고 자식까지 낳는 것을 보려면 너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 게 좋겠어. 네가 여자로 살든 남자로 살든 네가 개의치 않는데 나도 더는 상관하지 않을래. 내가 진작에 상관하지 말았어야 했어.”말을 마친 진미리는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엄마, 어디 가세요?”“엄마 바람 좀 쐬면서 기분 전환 좀 할게. 네 아빠한테 잔소리 좀 해야겠어.”고진호는 밖에서 꽃들에 물을 주고 있었다.그러자 고현이 말을 건넸다.“그럼 나가서 아빠에게 몇 마디 잔소리하고 오세요. 잔소리하시고 나면 그래도 제가 가장 좋다고 생각하실걸요.”진미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꽃에 물을 주던 고진호는 진미리가 나오는 것을 보더니 물었다.“현이가 연습 잘하고 있어요?”“휴, 말도 마세요. 지금에야 와서 가르치려고 하니 너무 어려워요. 오후 몇 시간 만에 20년이 넘는 습관을 고치려고 하니 너무 어려워요.”고진호가 웃으면서 말을 건넸다.“그럴 줄 알았어요. 됐어요. 내버려 둬요. 현이가 행복하기만 하면 현이가 어떤 신분으로 살아가든 상관없잖아요.”갑자기 고현이 여자라는 일이 드러나게 되면 아마 강성 전체가 뒤흔들릴지도 모른다.전화 폭격을 당할 장면을 미리 생각한 고진호도 미리 전원을 끄려고 계획했다.“현이가 드레스는 입고 싶지만, 하이힐 대신 구두를 신겠대요. 휴... 진작 알았다면 애당초 현이가 소란 피울 때 반대했야 했는데. 벌써 20년이 흘러 멀쩡한 딸이 아들로 변하게 되다니...”“현이가 입고 싶은 대로 입게 놔둬요. 다른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대상은 현이지, 우리가 아니잖아요.”고진호는 고현이
“걱정하지 마세요. 준비하고 계세요. 저랑 함께 연회에 가요.”고현이 말을 이었다.“그럼 집에서 기다릴게요.”“좀 이따가 봐요.”그는 고현이 왜 반나절 휴가를 냈는지 전호영은 더는 묻지 않았다.전호영은 먼저 서둘러 고씨 가문의 저택으로 간 다음 다시 얘기하려고 했다.전호영과의 통화를 마친 고현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으려다가 맞은편에 앉아 있는 진미리를 보더니 다시 휴대전화를 집어 들어 전호영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척했다.“메시지 보내는 척 하지 마.”진미리는 일어나서 걸어가더니 손을 뻗어 고현의 휴대전화를 가져다가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엄마, 저는 핸드폰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회사에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저를 찾아야 하거든요.”고현은 다시 휴대전화를 방패막이로 삼고 싶어 했다.“회사 일 전부 고빈에게 맡겼잖아. 고빈이가 처리하게 놔둬. 빈이가 오늘 저녁 연회에 참석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리고 빈이는 너보다 어리지 않아. 너보다 겨우 10분 정도 어릴 뿐이야. 게다가 남자로서 빈이는 당연히 그 무거운 짐을 짊어져야 해. 남존여비라고 당연히 남자가 무거운 짐을 지게 해야지.”고현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엄마, 그 생각은 너무 보수적이에요.”“남들에게는 보수적인 사상일지 모르지만, 우리 집에서는 남자가 무거운 짐을 지게 하고 딸이 가볍게 행복하게 살게 하는 것이 우리 집안의 규칙이야.”진미리는 고현 옆에 앉았다.고현은 진미리와 논쟁하려 하지 않고 바로 머리를 수그렸다.“네네, 우리 엄마는 가장 예뻐요. 우리 엄마가 하신 모든 말은 다 정확해요.”진미리는 고현을 노려보고 있었다.“엄마, 또 왜요? 오후 내내 저를 노려보신 횟수가 지난 20여 년을 합친 것보다 더 많아요.”진미리는 딸의 허벅지를 툭툭 치며 꾸지람했다.“똑바로 앉아! 사나이처럼 앉지 마. 넌 지금 우리 가문의 딸이야. 고씨 가문의 아들이 아닌 딸이라고! 그리고 앉자마자 하이힐을 벗지 마. 어느 집 딸이 자리에 앉자마자 하이힐을 벗는 것을 봤어?”고현은 투덜댔다.“
전호영의 전화를 받은 고현은 잠시 멈추고 쉴 수 있는 핑계를 주었다.고현은 자신의 하이힐을 신고 걸어 다니는 자태를 감시하고 있는 진미리에게 말했다.“엄마, 호영 씨 전화예요.”“그래.”고현은 소파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와 앉았고 그녀의 걸음걸이 자태를 보던 진미리는 눈살을 찌푸리며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따라왔다.남자의 분장에 익숙해진 고현이 치마로 갈아입고 하이힐을 신으면 진미리의 요구대로 잘 걸을 수 없었다. 재벌가 딸들의 우아한 자태로 걷는다는 것은 하늘을 오르는 것보다 더 어려웠다.고현은 하이힐을 신고 삐뚤삐뚤 걸어 다녔다.어쨌든 진미리는 고현이 하이힐을 신고 걷는 모습이 매우 못마땅했다.고현은 소파에 앉자마자 바로 하이힐을 벗어 던졌다.진미리는 고현의 상황을 살피지도 않은 채 하늘을 찌르는 듯한 굽 높은 신발을 신고 걷는 연습을 시켰다. 비록 연회에 참석할 때 신을 하이힐은 그렇게 높지 않지만 말이다.고현은 내심 불만이었다.하지만 진미리는 굽 높은 신발로 연습을 해야 연회 때 신어야 할 하이힐을 쉽게 신을 수 있다고 했다.“호영 씨.”고현은 부드럽게 전호영을 불렀다. 그녀는 지금처럼 전호영의 전화를 기다린 적이 없었고 또한 이렇게 부드러운 말투로 전호영의 이름을 부른 적도 없었다.그녀는 성격이 차가운 편이라 전호영을 사랑하게 되더라도 그에게 부드럽게 대하지 않을뿐더러 다른 여자들처럼 애교도 부리지 않았다.가끔 고현이 전호영과 이야기할 때 약간의 웃음을 띠면서 말을 건네기만 해도 전호영은 며칠 동안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다.“오후에 회사에 돌아가지 않았어요. 반나절을 쉬려고 우리 부모님 집으로 왔어요.”고현의 부드러움은 전호영이라는 이름을 부를 때만 사용됐고 다시 입을 열어 말했을 때는 말투가 정상으로 돌아갔다.전호영이 물었다.“괜찮으세요? 어디 아픈 건 아니죠?”그녀는 워커홀릭이라 결혼하기 전의 전태윤처럼 평일에 쉬는 일이 거의 없었다. 주말이 되어 집에서 쉰다 해도 사실 업무를 처리하기 위함이었다.고현은 가끔
임원들은 고빈의 주위에는 적어도 여성 지인들이 많아 그녀들과 만나면서 먹고 놀 수 있다지만, 고현은 그야말로 전호영에 의해 망가졌다고 생각했다.전호영이 아주 훌륭하고 관성의 제일 갑부인 전씨 가문 출신이라고 해도 뭐가 소용 있겠는가!동성연애는 국내 사람들이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데...“상상력이 풍부하시네요. 고빈 씨에게 드리는 꽃이 아니거든요. 고현 씨는 회사에 없어요? 나가셨어요?”전호영이 물었다.고빈은 손이 전호영에 의해 뿌리쳐졌지만, 화도 내지 않고 일부러 전호영에게 말했다.“우리 형에게 매달리더니 너무 심하게 매달린 건 아닌가 봐요? 우리 형이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다니. 우리 형이 오후에 회사에 돌아오지도 않았어요. 모르셨어요?”전호영은 정말 몰랐다.그는 고현이 오늘 저녁에 그녀와 함께 연회에 참석해야 한다는 사실밖에 몰랐다.오늘 밤 두 사람이 참석하는 연회는 강성에 있는 한 재벌가의 저택에서 열리기 때문에 전호영은 일을 마치자마자 서둘러 달려왔다.그는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바로 왔다.전호영은 매일 양복을 입고 다녔기 때문에 갈아입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그는 선천적으로 잘생긴 외모로 옷을 대충 입어도 쉽게 사람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곤 했다.“호영 씨 표정을 보니 우리 형이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은 모양이네요. 하하! 우리 형을 반년 넘게 귀찮게 하여 동성애자로 만들더니 결국 우리 형의 마음을 완전히 움직이지는 못했네요.”고빈은 동정 어린 표정으로 전호영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시간이 없어서 잔소리 그만할게요.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그럼 저는 이만.”고빈은 전호영을 뒤로 한 채 임원들과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리를 떠났다.전호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프런트 데스크로 돌아와 아직 퇴근하지 않은 직원에게 물었다.“고 대표님께서 오늘 오후 정말로 회사로 돌아오지 않았어요?”“네, 오후에 돌아오지 않으셨어요.”전호영이 다시 물었다.“어디로 가신다는 말은 안 하셨어요? 사업 때문에 나가신 거예요?”전
하예진은 말을 잇지 못하고 살며시 노동명을 안아주었다.잠시 후 노동명은 그녀를 가볍게 밀어내며 부드럽게 말했다.“돌아가서 쉬어.”“잘 자요. 동명 씨도 내일 관성으로 돌아가야 하잖아요.”두 사람은 서로 인사한 뒤 하예진은 노동명의 방을 나섰다. 노동명은 휠체어를 타고 그녀를 현관문 밖으로 나와 그녀가 옆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문을 닫았다.밤새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 말도 오고 가지 않았다.다음 날 노동명은 아침 식사를 마친 후 하예진의 배웅을 받으며 차를 타고 하루 호텔을 떠났다.하예진은 공항까지 따라가지 않고 노동명을 차에 태우고 호텔 입구에 서서 그를 배웅했다.공항까지 배웅하면 더 아쉬울 것 같았다.노동명이 타고 있던 차가 보이지 않게 되자 하예진은 그제야 경호원들과 함께 전호영이 안배해 준 차를 향해 걸어갔다.노동명이 관성으로 돌아갔으니 그녀도 계속 일을 해야 했다.바쁠 때는 시간이 유난히 빨리 지난다.날이 조금 전에 밝은 것 같았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또 저녁이 되었다.전호영은 고현이 오후에 회사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그는 평소처럼 저녁 무렵 차를 몰고 고씨 그룹으로 가서 고현이 퇴근할 때까지 기다렸다.그리고 같이 밥 먹으러 가려고 했다.고현은 사업이 무척 바빠서 전호영에게 줄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매일 식사 시간이 바로 그와 고현이 정을 쌓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간이다.그의 차는 고씨 그룹에 들어가서 늘 주차하던 곳에 멈춰 섰고 전호영은 조수석에서 꽃다발을 안아 들고 차에서 내렸다.전호영은 사무실 건물 입구에서 밖으로 나가는 고빈을 만났다. 고빈은 회사 임원 몇 명과 함께 걸으면서 얘기를 나누었다.전호영을 본 고현 일행은 멈추어 섰다.“회사엔 왜 왔어요?”고빈이 입을 열자마자 물었다.전호영은 그 물음에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제가 왜 당신 회사에 올 수 없어요?”전호영은 매일 고씨 그룹으로 왔다.그럼 전호영을 쫓아내기라도 하겠다는 의미인가!고빈이 감히 그를 쫓아낸
“응, 내일 돌아가려고. 예진이도 너무 바빠서 영향 줄까 봐 그래. 관성으로 돌아가서 우빈이도 돌봐야 예진이가 걱정하지 않지. 내가 강성으로 돌아가서 나와 우빈을 위해 강산을 다스려야 되거든. 하하!”노동명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옆에서 듣고 있던 하예진이 말했다.“나중에 빚이 쌓일까 봐 두렵네요.”노동명이 되물었다.“뭐가 두려워? 수십 조의 빚만 아니라면 다 갚아줄 수 있어. 넌 마음 놓고 가서 일해. 하늘이 무너져도 내가 버텨줄 테니까. 파산될 걱정은 하지 마.”수십 조의 빚이라고?하예진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현재 하예진의 상황으로 놓고 보면 수억 원의 빚만 져도 그녀는 너무 걱정되어 흰머리가 나올 것 같았다.전태윤은 또 음성메시지를 보내왔다.“우리 처형에게 너 같은 후원자가 있으니 반드시 강성에서 성공할 거야.”노동명은 하예진에게 전태윤의 음성메시지를 들려주며 말했다.“들어봐, 태윤이가 너를 엄청나게 믿고 있어.”“항상 저를 이렇게 믿어주시는데 제가 더 열심히 해야 기대에 부응할 수 있겠네요.”“너도 혼자 견디지 말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나에게 도움을 청해. 내가 다리를 다쳤지만 머리가 다친 건 아니거든. 나도 너 대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어.”하예진은 노동명이 다리를 다쳤다는 둥 머리를 다쳤다는 둥 그런 말을 하는 것을 싫어했다.“동명 씨의 다리는 좋아질 거예요. 저는 그런 말 듣기 싫어요. 앞으로 절대로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동명 씨가 다리 나아지면 저랑 결혼도 하셔야죠.”노동명은 싱글벙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네가 그런 말을 해 주니 내 다리도 분명 나아질 거야.”하예진은 얼굴이 붉어지더니 부끄러워하며 대답했다.“너무 오래 얘기하지 마세요. 일찍 쉬어요. 저도 방에 가서 쉴게요. 내일 또 회사 일로 많이 뛰어다녀야 하거든요.”“응, 가. 잘 자.”노동명은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그녀에게 굿나잇 키스를 해달라고 암시했다.하예진은 다가가서 허리를 굽히더니 노동명의 칼자국이 있는 얼굴에 입을 맞추
“형인 씨 마음속엔 아직 네가 있을지도 몰라.”노동명이 말했다.그는 오히려 주형인이 우빈 앞에서 그의 험담을 하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주형인이 험담하면 할수록 우빈은 그를 싫어할 것이고 오히려 노동명과 우빈의 정이 더 깊어져만 갈 테니까.노동명은 마침내 우빈이 주씨 집에서 돌아올 때마다 그에게 무척 잘해준 이유를 알게 되었다.우빈도 미안했던 모양이다.주형인이 그의 험담을 했기 때문이다.“형인 씨는 저에 대한 사랑이 사라진 지 오래되었을 거예요. 저를 사랑했다면 저를 배신하고 상처를 주는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주씨 집안 가족들이 저를 괴롭히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았을 거예요. 남자가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어떻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있겠어요? 시어머니와 갈등이 생긴다 해도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노력했을 텐데. 어떻게 시어머니와 그의 누나가 저를 비난하도록 내버려 둘 수 있었겠어요?”“그 사람은 마음이 편치 않았을 뿐이에요. 제가 처음에 말했던 것처럼 만약 형인 씨와 서현주 씨가 아주 행복하게 잘 지내고 그렇게 많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지금쯤은 행복하게 살면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기를 기다렸을 텐데. 제가 죽든 살든 상관했겠어요? 우빈에 대한 감정조차 옅어졌을걸요. 그들만의 아기가 생기면 우빈에 대한 감정이 워낙 깊지 않은데다 감정이 있으면 얼마나 있다고...”노동명은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문득 화제를 돌렸다.“맞아. 그런 기분 나쁘게 하는 사람과 일들을 생각하지 말자. 나 내일 관성으로 돌아갈 거야. 예진아, 나랑 같이 가서 새 옷 몇 벌 사 오자. 우빈에게 줄 장난감도 좀 골라줘. 내가 매번 선물한 장난감을 녀석이 좋아하지 않는 것 같더라고.”하예진도 전남편 얘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다. 그녀도 진작에 태연하게 모든 것을 받아들였지만 노동명 앞에서 전남편 얘기를 꺼내면 노동명이 질투할까 봐 걱정했다.교통사고를 당한 후 노동명도 많이 연약해졌다.주로 다리 장애로 자신감을 잃은 노동명은 마음이 매우 약해졌다.노동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