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윤은 아쉬운 표정으로 시선을 하예정에게서 떼고 묵묵히 처형을 따라갔다.하예정은 종이 위에 사과의 말과 자신의 이름, 그리고 휴대폰 번호를 남겼고, 그 밑에 내일 연락하면 수리비를 배상할 것이라 적고는 메모지를 붙여놓았다.이 모든 것을 다 하고 차고에서 나온 그녀는 언니와 조카만 보이고 전태윤이 보이지 않자 곧바로 물었다.“언니, 태윤 씨는 ?”“네가 산 물건이 좀 많다고 하니 자진해서 물건을 위층으로 가져갔어.”하예정은 입술을 앙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좀 돌고 온다더니 결국엔 마트에 갔구나. 너하고 우빈이가 같이 마트에 가면 항상 마트를 통째로 들어오지 못해 한스러워하더라.”하예진은 아들을 안고 여동생과 위층으로 올라갔다.“기분이 안 좋을 때 마트에 가서 물건을 사면 기분이 훨씬 나아지는 것 같아.”하예진이 웃음을 터뜨렸다.“너희 둘 먹보라고 할 땐 인정하지 않더니.”두 자매가 위층으로 올라가자, 전태윤이 현관문을 활짝 열고 집 앞에서 두 자매를 기다리고 있었다.“처형, 물건 다 놔뒀어요.”전태윤은 하예진에게 말했지만, 시선은 하예정에게로 향했다.“수고 많았어요.”“앞으로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지 전화해요, 바로 달려올게요.”하예진이 웃으며 말했다.“힘든 일 없어요. 추운데 여기 서 있지 말고 들어가서 따뜻한 물 한 잔 마시고 돌아가세요.”전태윤이 하예정을 바라보며 그녀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지만, 그녀는 그저 주우빈을 안고 방으로 들어가는 언니의 뒤를 따라 가면서 전태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주방으로 들어가 버렸다.전태윤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선 채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한참 후, 하예정은 주방에서 더운물이 담긴 유리컵을 들고 나오더니 재빨리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손이 너무 뜨거웠다. “언니, 내일 가게에 나가야 하니 먼저 방에 들어가서 쉴게.”그녀는 전태윤을 쳐다보지도 않고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갔다하예정이 방문을 닫자, 하예진이 목석같이 서 있는 전태윤을 불렀다.“제부, 예정이가 더운물을
‘예정이가 컵이 이렇게 뜨거운데도 깨뜨리지 않고 가져온 것은 나보고 더운물을 마시고 몸을 녹이라는 뜻이 아닐까?’그녀는 화가 나서 그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입으로 떠들었지만, 사소한 행동에서 오히려 그녀가 말한 것처럼 그를 그렇게 미워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다.이렇게 생각하니 전태윤의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주우빈의 작은 몸이 앞으로 기울자, 전태윤은 그가 그 뜨거운 컵을 엎지를까 봐 급히 컵을 옆으로 옮겼다.주우빈은 간식이 가득 담긴 가방을 열고 싶었다.전태윤은 주우빈이 가방을 여는 것을 도왔다.“고마워요, 이모부.”주우빈은 가방에서 감자칩 한 봉지를 꺼내 전태윤에게 주었다.“이모부, 드셔보세요, 이모가 맛있다고 했어요.”이모는 감자칩은 애들이 너무 많이 먹으면 좋지 않다고 하면서 거의 사주지 않았다.그런데 이모는 왜 자주 드셔도 되는 걸까?전태윤이 감자칩을 건네받자, 주우빈은 또 몇 가지 간식을 꺼내 전태윤에게 주고는 그의 허벅지에서 내려 힘겹게 간식이 든 가방을 끌고 가며 말했다.“이건 우빈이 거예요.”하예진이 웃으며 아들의 가방을 들어주었다.“가방보다도 가벼운 녀석이 욕심은. 일단 여기 놔둬. 한꺼번에 다 먹어버리면 밥 먹기 싫어질 거야. 오늘 저녁은 안되고 내일은 조금 먹을 수 있어.”그러고는 전태윤에게 말했다.“우빈이는 간식에 집착이 심해서, 어쩌다 가끔 자기 걸 친구들한테 나눠주기는 하지만 웬만해서는 어른들에게 주려 하지 않아요.”전태윤이 주우빈 앞에서 하루 종일 엄숙한 표정을 지었지만, 주우빈은 그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하지만 노동명과는 여러 번 만났지만, 주우빈은 그를 볼 때마다 두려워했다.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정말 알 수 없다.전태윤은 주우빈이 나눠준 간식을 주우빈한테 도로 주었다.“우빈아, 이모부는 간식을 싫어하니 너 다 가져.”주우빈은 즉시 그 몇 가지 간식을 집어 가방에 다시 넣었는데 그 작은 행동에 전태윤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즐거워 났다.주우빈이 엄마 품으로 파고들었다.나이가 어려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든 전태윤은 서둘러 불을 켜고 하예정의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방 안의 물건들은 제자리에 있었고, 그녀의 일상용품들도 여전히 그대로였다.그녀의 옷장을 열어보니, 옷 몇 벌만 적어졌을 뿐, 트렁크는 여전히 옷장 옆에 놓여 있었다.전태윤은 그제야 크게 숨을 내쉬었다.누군가를 잃는다는 것이 이렇게 두려운 것은 처음이다.그는 하예정의 침대에 앉아서 마치 그녀를 어루만지듯 가볍게 침대를 만졌다.“예정아...”그는 하예정의 이름을 낮게 불렀다.“앞으로는 절대 당신을 속이지 않을 것을 행동으로 보여 줄게! 만약 내가 다시 당신을 속이고 다치게 하는 일을 한다면, 당신이 1년 동안 나를 무시하도록 허락할 거야. 아니, 1년은 너무 길고, 3개월.”하지만 생각해 보니, 하예정이 3개월 동안 그를 무시하면 미칠 것 같아서, 전태윤은 다시 중얼거렸다.“아무래도 일주일로 하는 게 낫겠어. 당신이 하루만 나를 무시해도 이렇게 미치는데 일주일 동안 무시하면 나는 완전히 돌아버릴 거야. 이건 너무 해.”하예정이 만약 그 자리에서 그의 혼잣말을 듣는다면, 어이가 없을 것이다.한참 지나서야 전태윤은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았지만, 잠그지는 않았다. 마음 한구석에서 여전히 혹시라도 하예정이 한밤중에 추우면 그의 따뜻한 품이 생각나서 찾아올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에...물론 이것은 이루어지기 어려운 망상에 불과할 뿐이다.하예정이 그를 상대한다고 해도 부부 관계가 곧바로 달콤한 그때로 돌아갈 수는 없다.이날 밤, 전태윤은 하예정의 방에서 밤을 보냈다.다음 날 아침, 하예정은 언니 집에 있을 때처럼 일찍 일어나 언니와 조카에게 아침 식사를 차려주고는 차 키와 휴대폰을 들고 집을 나섰다.오늘 그녀는 가게로 돌아가 전부터 고객이 심하게 독촉하던 주문을 맞춰야 한다.사랑의 상처는 별 거 아니니 그녀가 돈을 버는 데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되었고, 잡친 기분을 털어내는 것도 어제 하루의 시간이면 충분했다.아직 이른 시간이어서, 거리에는 차가 몇 대 없었다.하
하예정이 웃었다.“어떻게 문을 닫을 수가 있겠어요?”“모두 네가 전씨 가문 큰 사모님이란 걸 알고 나서 무조건 서점을 양도하고 앞으로 부잣집 사모님 노릇을 할 것으로 생각했어. 그리고 모두 너의 가게가 풍수가 좋다고 생각하며 비싼 가격이라도 살 거라고 하는데 이게 어디 가게의 풍수가 좋은 거야? 네가 좋은 팔자를 가지고 태어난 거지.”그 사람들이 하예정의 가게를 인수한다고 해서 하예정처럼 부잣집에 들어갈 수 있을까?하지만, 전 씨 큰 사모님의 덕은 얼마 동안 볼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전 씨 큰 사모님이 운영했던 가게이니까.“정 아저씨, 저는 여전히 저예요. 이 서점은 저와 효진이의 몇 년간의 심혈이에요. 이렇게 오랫동안 운영해 왔는데, 포기할 수 없어요.”“부잣집 사모님은 일하러 나갈 수 없다고 들었는데, 큰 도련님께서 허락하실까?”하예정은 한참 생각하다 대답했다.“그건 제 자유예요.”전태윤과 그의 가족들은 4개월 넘게 그녀를 속여왔다.만약 그녀가 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시댁 식구들은 더 전에 허점을 드러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들 전씨 가문에서는 여자가 나와 일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 같았다.비록 전태윤이 그녀를 속인 것은 화났지만, 하예정은 전씨 가문의 사람들이 모두 수양 있는 사람들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지금에 와서야 그녀는 그들이 진정한 부잣집 가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품격과 그 고귀함은 타고난 것으로서 보통 사람들이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시어머니가 왜 예의를 배우라고 권했는지도 알 것 같았다.알고 보니 그들의 집 문턱이 너무 높았기 때문이다.하예정은 격차가 너무 크다는 압박감을 느꼈다.정 씨 아저씨가 웃으며 말했다.“나도 그렇게 말했어. 그리고 또 나와 내기를 걸자 하였는데, 난 네가 계속 가게를 열 거라고 했고, 그들은 네가 가게를 양도한다고 했어. 네가 한평생 써도 다 쓸 수 없는 돈이 있으니, 더 이상 이 가게를 지킬 필요가 없다면서.”하예정이 웃었다.“그럼, 돈을 크게 거세
심효진이 웃었다.“이게 바로 내가 아는 하예정이지.”그녀는 차를 세우고 하예정과 함께 진열대를 꺼내 진열했다.“태윤 씨가 너를 시끄럽게 하지 않았어?”심효진이 관심하며 물었다.먼지떨이로 책장 우의 먼지를 털던 하예정이 친구의 말에 대답했다.“그의 성격으로 정말 나를 며칠 동안이나 가만둘 수 있을 것 같아?”“아니.”심효진이 다시 말했다.“처음처럼 너를 기절시키고, 집에 감금하려 하지 않는다면 좀 봐줘. 태윤 씨도 너를 잃을까 봐 무서워서 그런 거야 .”하예정은 대답이 없었다.그녀가 감정에 관해 이야기할 마음이 없는 것을 보고, 심효진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드디어 문을 열었구나.”문 어구에서 하예정이 가장 싫어하는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곧이어 하 씨 영감이 한 무리 아들 손주들을 데리고 빙그레 웃으며 서점 안으로 들어왔다.“예정아.” 마치 금산을 보는 것처럼 하씨 영감의 쭈글쭈글한 얼굴에 활짝 웃음을 띠었고 희뿌연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셋째 아들 집 딸이 이렇게 좋은 팔자일 줄은 몰랐다. 집안 배경도 없이 자매가 서로 의지하면서 살더니 봉황이 될 줄이야.갑부 전씨 가문이라니!손자의 말에 의하면 억만장자라고 한다!억만장자가 무슨 개념인지, 하 씨 영감은 계산기로도 그게 얼마나 많은 돈인지 계산이 안 되었다.아들, 손자의 부추김에 하 씨 영감은 잠시도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어 즉시 하예정에게 손 내밀려고 달려왔다. 아니, 손녀로 인정하려고 왔다.물론, 돈을 받아내면 더 좋고...지금 하예정의 손가락 틈으로 새어 나오는 돈으로도 노후를 편안하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더 이상 돈이 없어 노후를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지명아, 지문아, 내가 예정에게 가져온 고향 특산물들을 들여오거라.”하 씨 영감은 웃으며 손자들에게 분부하고 나서 다시 하예정에게 말했다.“예정아, 할아버지가 우리 고향 특산물들을 가져왔다. 너의 부모가 살아있을 때 아주 좋아하던 거니 꺼리지 말어.”하예정이 눈살을 찌푸렸다.주형인이 어젯밤에
하 영감이 말했다.“그래, 그럼 배달음식 시켜 먹지 뭐. 이따가 예정이가 돈 내.”하예정은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이 인간들은 참 한결같이 뻔뻔스럽게 그녀에게 빌붙으려 한다.하예정이 차갑게 쏘아붙였다.“배달시킨 사람이 돈 내요.”하지명과 하지문이 자칭 고향 특산이라며 들고 온 물건도 봉투를 꽉 매지 않아 안에 힐긋 쳐다봤는데 하나는 고구마, 다른 하나는 옥수수였다.고작 이런 걸 들고 오면서 그녀의 가게에서 돈 받을 생각이나 하다니?감히 이런 망상을 하는 사람도 그녀의 할아버지뿐이다.“예정아, 지나간 일은 다 잊어. 우리도 전부 내려놨으니 앙금을 품지 말아 주렴. 어찌 됐든 난 너의 친할아버지이고 우리가 선뜻 사과하러 왔잖니. 우리더러 인터넷에서 공개 사과하라고 했었지? 내가 지문이한테 사과문을 쓰라고 시켰어. 이제 곧 인터넷에서 공개사과할 거야. 오해가 풀리면 우린 여전히 한 가족이야. 너도 이젠 팔자 폈어. 네 남편 집안에 돈이 그렇게 많다면서? 재산이 무려 십조억이라고 했지! 얼른 네 남편에게 말해서 더는 너희 삼촌이랑 큰아버지, 사촌들까지 괴롭히지 말라고 해. 다들 정상적으로 사업하고 출근할 수 있게 하란 말이야.”“지문이는 회사 임원이라 연봉이 2억인데 너 때문에 직장을 잃었어. 원래는 너에게 경제적 손실을 배상받아야 하지만 두 사람 남매인 걸 봐서 배상을 포기한 거야. 그러니까 예정아, 지문이랑 지명이를 원래 회사에 돌아가서 계속 임원직을 맡게 해줘. 너 인제 돈 많잖아. 우리한테 아침밥을 사준다고 얼마나 쓰겠니? 통장 잔고가 꿈쩍하지도 않겠지. 자꾸 그렇게 인색하게 굴지 말고 시시콜콜 따지려 들지도 마. 아 참, 우리 손녀사위는 어디 있어? 손녀사위를 처음 볼 때부터 비범한 인물일 거로 생각했어. 단연코 사람들 속에서 가장 빛나는 별이겠지. 하하, 역시 예정이가 보는 눈이 있다니까. 너희 남편 밑으로 사촌 남동생이 8명이나 있다던데 이참에 네 사촌 여동생들 도와서 소개팅 좀 시켜줘! 걔네들도 전씨 일가에 시집가서 사모님 노릇을 한다면
인간쓰레기 같은 하씨 일가가 하예진 자매에게 저질렀던 만행은 관성에서 모르는 자가 없다.전태윤이 전씨 도련님이란 걸 알게 되자 친정 식구라는 같잖은 명분을 내세우며 거만을 떨다니. 그야말로 파렴치함이 하늘을 치솟을 수준이다.“다들 미쳐도 제대로 미쳤네요. 나가는 문 저쪽이니까 지금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하예정은 그들의 파렴치한 몰골에 화가 제대로 나서 예의고 뭐고 그냥 다 꺼지라고 했다.하지문 일행은 본능적으로 몇 걸음 물러섰지만 완전히 서점 밖을 나간 것은 아니었다.다들 하 영감만 덩그러니 앞장세웠다.어차피 할아버지가 연세가 있으시니 하예정이 아무리 화나도 절대 손을 대지는 못할 테니까.“하예정!”하 영감이 어두운 표정으로 그녀의 이름을 외쳤다. 하예정이 그를 바라보자 드디어 입을 열었다.“네가 가라면 갈게. 단 2억 원 먼저 내놔. 그럼 지금 바로 고향에 내려가서 네 할머니 보살필게. 너 돈 안 주면 얘네들 데리고 네 남편 회사에 찾아가서 한바탕 소란을 피울 거야. 돈을 못 가져도 좋아. 회사를 발칵 뒤집어서 네 체면을 짓밟고 웃음거리로 전락하게 하면 돼. 너 그럼 앞으로 시댁에서도 머리 들고 다닐 수 없겠지.”하예정은 곧장 빗자루를 챙기러 갔다.하지문 일행은 그녀가 움직이는 걸 보더니 재빨리 서점을 뛰쳐나왔다.하지만 하 영감은 그녀가 못 때릴 줄 알고 제자리에 앉아서 꿈쩍하지 않았다. 그녀가 때리면 오히려 돈을 더 많이 뜯어낼 수 있다.하예정은 결국 그를 때리지 않았다.그녀는 빗자루를 내려놓고 자리를 떠났다.하 영감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노인네가 떡하니 앉아있으니 그녀는 머리카락조차 건드릴 엄두가 안 났다.하 영감처럼 뻔뻔스러운 영감탱이를 상대할 땐 강하게 나오면 안 된다. 그녀는 화장실에 들어가 물통에 물을 가득 담아서 들고나오더니 하 영감에게 냅다 쏟아부었다.하 영감은 그녀가 이런 수작을 부릴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다.촤르륵 물소리와 함께 하 영감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었다.하씨 일가의 인간쓰레기
“너... 너 딱 기다려. 지금 바로 네 남편 회사에 찾아가서 돈 내놓으라고 소란 피울 거야. 네 남편이 안 주면 시댁에 가서 난리 쳐야지. 너의 체면을 모조리 짓밟아버리고 시댁 식구들도 네가 눈꼴사나워서 내쫓아버리게 할 거야!”하 영감이 으름장을 놓았다.그는 확실히 이렇게 할 작정이었다.여기 오기 전에 손자들이 미리 그를 일깨워주었다. 하예정 자매가 워낙 그들을 증오하다 보니 돈을 안 줄 가능성이 더 크다면서 작전 방안을 짜주었다.하예정은 인제 전씨 일가의 사모님이 되어서 체면을 매우 중시할 테니 그들이 눈 딱 감고 소란을 피우면 하예정도 시댁의 체면을 위해 선뜻 돈을 줄 거라고 했다.만약 안 주면 전태윤을 찾아가고 전씨 일가를 찾아가면 된다. 그녀가 비록 가족들과 사이가 틀어졌다고 하지만 어쨌거나 여전히 친정 식구들이기에 어느 시댁에서 이런 사돈 집안을 좋아하겠는가, 다들 창피하다고만 여기겠지.하예정은 원래 집안 형편이 안 좋아 전씨 일가에 시집와서 사모님으로 사는 것이 불안정할 따름이다. 시댁 식구들도 그런 그녀가 썩 탐탁지 않을 수 있으니 그들이 가서 소란을 피우면 전씨 일가도 잇따라 체면이 구겨지고 다들 하예정을 미워할 게 틀림없다.어쩌면 전태윤과 하예정의 이혼을 부추길지도 모른다.하지문은 할아버지에게 일단 이리로 와서 시도해보라고 건의했다. 하예정이 체면을 위해 일을 조용히 해결하려고 선뜻 돈을 준다면 앞으로 돈 떨어질 때마다 그녀를 찾아오면 된다. 어차피 전씨 일가에 돈이 차 넘치니 한 번 받은 돈으로 한동안 호의호식할 수 있다.만약 그녀가 안 주면 기자에게 연락해 그들이 전씨 그룹과 전씨 일가에 찾아가 소란을 피우는 모습을 몰래 촬영해서 인터넷에 퍼뜨리면 된다. 전씨 일가는 무조건 크게 분노할 테고 이는 하예정에게 불리하게 작용된다.다들 인제 직장도 잃어서 위협이 될만한 것이 없다. 이 세상에 잃을 것 없는 사람이 가장 두렵다는 말처럼 하예정과 끝까지 물고 늘어져 그녀가 전씨 일가에서 쫓겨나게 할 생각이었다!다들 힘들게 사는데
고현이 입을 열었다.“호영 씨는 너무 뻔뻔스럽네요.”전호영은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제가 뻔뻔스럽지 않았다면 고현 씨의 마음을 훔치지 못했을걸요. 우리 큰형을 따라 배웠거든요. 우리 형이 형수님에게 구애한 적 없지만 뻔뻔스럽게 자신의 미래 아내를 쫓아다녀야 한다고 저에게 말했거든요. 우리 큰형도 옛날에 체면을 중요시하게 여겼지만, 우리 형수님과 지내면서 점점 뻔뻔스럽게 되었어요.”전태윤 부부가 금방 결혼했을 때 많은 갈등이 있었고 냉전도 자주 했었다.전호영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감히 더 깊이 알아보지 못했을 뿐이다.때로는 전태윤 부부가 싸움이 심해질 때면 전씨 할머니까지 나서야 했다.고현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전 대표님께서 호영 씨가 자신을 뻔뻔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 아마 호영 씨는 이 세상에서 없어질지도 몰라요.”고현은 전씨 가문의 형제들이 맏형 전태윤을 유난히 존중했고 또 가장 두려워한다고 전해 들었다.전태윤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여전히 차갑고 도도한 모습이지만 하예정 앞에서는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전씨 가문은 형제들은 서원 리조트에서 함께 산 덕분에 사촌 형제지간일지라도 정이 아주 깊었다.따라서 맏형 전태윤의 지위도 높았고 그의 형제들도 그를 잘 따랐다.“큰형이 지금 여기에 없는데요 뭐. 그리고 제가 한 말도 사실인걸요. 우리 형도 형수님이 생긴 뒤로 뻔뻔해졌거든요. 우리도 따라 한 것뿐이에요.”고현은 여전히 웃으며 말을 건넸다.“호영 씨가 뻔뻔한 사실을 남에게 밀지 마세요. 그만하고 우리 얼른 가요. 호영 씨, 네가 오늘 제가 드레스 입고 하이힐을 신는다면 남들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까요? 제가 비웃음을 당해도 괜찮겠어요?”전호영은 그녀가 벗은 하이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제가 뭘 더 신경 쓰겠어요? 제가 언제 다른 사람이 비웃을까 봐 두려워했었나요? 저는 남들 시선이 두렵지 않고 제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사람이에요. 남들이 시선이 신경 쓰였다면 오늘 같은 달콤함도 없었을 거예요.”전호영은 다른 사
사실 전호영은 차를 세울 때 고현이 평소에 자주 타는 그 마이바흐 차를 보았다.“집 안에 있어. 들어가 봐.”진미리는 물건을 들여 집 안으로 들어가려다 다시 전호영의 손에 물건을 전호영 손에 쥐여주었다.“난 꽃에 물을 좀 주고 들어갈게. 날도 어두워질 것 같으니 먼저 들어가 봐.”전호영은 자주 고씨 가문의 저택으로 왔고 진작에 고씨 가문을 그의 두 번째 집으로 생각했다.전호영은 혼자 집 안으로 들어갔다.집에 들어서자 그는 한 여자가 소파에 앉아 휴대전화를 들고 메시지를 보내는 모습을 보았다.그 여자는 고현과 정말 똑같이 생겼다.만약 고현이 치마를 입고 가발을 쓴다면 저렇게 예쁠 것이다.고현은 원래 긴 가발을 쓰고 싶지 않았지만, 전호영이 말하는 소리를 듣더니 재빨리 가발을 쓰고 앉아 있었다.전호영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알고 싶었다.그녀는 전호영 앞에서 치마를 입은 적 있었다.당시 고현은 그날이 전호영 앞에서 치마를 입는 유일한 날이라고 생각했었다.그러나 고현은 지금 또 치마를 입고 있다.그녀는 전호영을 위해 한 번이고 두 번이고 늘 그녀의 원칙을 깨뜨렸다.아니, 눈앞의 여자가 바로 그의 고현이었다.전호영은 씩 웃었다.그는 다가가더니 먼저 손에 들고 있던 가방들을 내려놓고 꽃다발을 고현에게 건네주며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여신님, 이 꽃다발을 당신에게 드릴게요.”고현의 시선은 꽃다발에 가려져 더는 휴대전화를 쳐다보지 못했다. 그녀는 휴대전화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전호영을 올려다보며 빙그레 웃는 그의 얼굴을 보며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서프라이즈도 해주고 싶었는데, 호영 씨 표정을 보니 놀라지 않은 것 같네요.”“현이 씨가 저를 위해 치마를 한 번 갈아입었을 때 제가 재빨리 현이 씨 도도한 모습을 기억해 버렸죠.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전호영은 고현이 꽃다발을 받기를 기다렸다가 뒤로 몇 걸음 물러서서 그녀를 진지하게 바라보며 물었다.“준비되었다고 했는데 정말 이렇게 나가려고요? ”고현은 지금 드레스를 입고 가발을 착용
잠시 후, 진미리가 말했다.“됐어. 나도 상관 안 할래.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엄마는 몇 년 더 살고 싶어.”“엄마, 저는 효녀거든요.”진미리가 입을 열었다.“난 네가 불효녀라고 말 한 적 없어. 네가 여자 신분을 회복하는 일에 엄마가 더는 신경 쓰지 않겠다는 말이야. 더 관여하면 내가 열 받아서 죽을 것 같아. 내가 몇 년을 더 살아서 네가 결혼하고 자식까지 낳는 것을 보려면 너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 게 좋겠어. 네가 여자로 살든 남자로 살든 네가 개의치 않는데 나도 더는 상관하지 않을래. 내가 진작에 상관하지 말았어야 했어.”말을 마친 진미리는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엄마, 어디 가세요?”“엄마 바람 좀 쐬면서 기분 전환 좀 할게. 네 아빠한테 잔소리 좀 해야겠어.”고진호는 밖에서 꽃들에 물을 주고 있었다.그러자 고현이 말을 건넸다.“그럼 나가서 아빠에게 몇 마디 잔소리하고 오세요. 잔소리하시고 나면 그래도 제가 가장 좋다고 생각하실걸요.”진미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꽃에 물을 주던 고진호는 진미리가 나오는 것을 보더니 물었다.“현이가 연습 잘하고 있어요?”“휴, 말도 마세요. 지금에야 와서 가르치려고 하니 너무 어려워요. 오후 몇 시간 만에 20년이 넘는 습관을 고치려고 하니 너무 어려워요.”고진호가 웃으면서 말을 건넸다.“그럴 줄 알았어요. 됐어요. 내버려 둬요. 현이가 행복하기만 하면 현이가 어떤 신분으로 살아가든 상관없잖아요.”갑자기 고현이 여자라는 일이 드러나게 되면 아마 강성 전체가 뒤흔들릴지도 모른다.전화 폭격을 당할 장면을 미리 생각한 고진호도 미리 전원을 끄려고 계획했다.“현이가 드레스는 입고 싶지만, 하이힐 대신 구두를 신겠대요. 휴... 진작 알았다면 애당초 현이가 소란 피울 때 반대했야 했는데. 벌써 20년이 흘러 멀쩡한 딸이 아들로 변하게 되다니...”“현이가 입고 싶은 대로 입게 놔둬요. 다른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대상은 현이지, 우리가 아니잖아요.”고진호는 고현이
“걱정하지 마세요. 준비하고 계세요. 저랑 함께 연회에 가요.”고현이 말을 이었다.“그럼 집에서 기다릴게요.”“좀 이따가 봐요.”그는 고현이 왜 반나절 휴가를 냈는지 전호영은 더는 묻지 않았다.전호영은 먼저 서둘러 고씨 가문의 저택으로 간 다음 다시 얘기하려고 했다.전호영과의 통화를 마친 고현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으려다가 맞은편에 앉아 있는 진미리를 보더니 다시 휴대전화를 집어 들어 전호영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척했다.“메시지 보내는 척 하지 마.”진미리는 일어나서 걸어가더니 손을 뻗어 고현의 휴대전화를 가져다가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엄마, 저는 핸드폰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회사에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저를 찾아야 하거든요.”고현은 다시 휴대전화를 방패막이로 삼고 싶어 했다.“회사 일 전부 고빈에게 맡겼잖아. 고빈이가 처리하게 놔둬. 빈이가 오늘 저녁 연회에 참석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리고 빈이는 너보다 어리지 않아. 너보다 겨우 10분 정도 어릴 뿐이야. 게다가 남자로서 빈이는 당연히 그 무거운 짐을 짊어져야 해. 남존여비라고 당연히 남자가 무거운 짐을 지게 해야지.”고현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엄마, 그 생각은 너무 보수적이에요.”“남들에게는 보수적인 사상일지 모르지만, 우리 집에서는 남자가 무거운 짐을 지게 하고 딸이 가볍게 행복하게 살게 하는 것이 우리 집안의 규칙이야.”진미리는 고현 옆에 앉았다.고현은 진미리와 논쟁하려 하지 않고 바로 머리를 수그렸다.“네네, 우리 엄마는 가장 예뻐요. 우리 엄마가 하신 모든 말은 다 정확해요.”진미리는 고현을 노려보고 있었다.“엄마, 또 왜요? 오후 내내 저를 노려보신 횟수가 지난 20여 년을 합친 것보다 더 많아요.”진미리는 딸의 허벅지를 툭툭 치며 꾸지람했다.“똑바로 앉아! 사나이처럼 앉지 마. 넌 지금 우리 가문의 딸이야. 고씨 가문의 아들이 아닌 딸이라고! 그리고 앉자마자 하이힐을 벗지 마. 어느 집 딸이 자리에 앉자마자 하이힐을 벗는 것을 봤어?”고현은 투덜댔다.“
전호영의 전화를 받은 고현은 잠시 멈추고 쉴 수 있는 핑계를 주었다.고현은 자신의 하이힐을 신고 걸어 다니는 자태를 감시하고 있는 진미리에게 말했다.“엄마, 호영 씨 전화예요.”“그래.”고현은 소파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와 앉았고 그녀의 걸음걸이 자태를 보던 진미리는 눈살을 찌푸리며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따라왔다.남자의 분장에 익숙해진 고현이 치마로 갈아입고 하이힐을 신으면 진미리의 요구대로 잘 걸을 수 없었다. 재벌가 딸들의 우아한 자태로 걷는다는 것은 하늘을 오르는 것보다 더 어려웠다.고현은 하이힐을 신고 삐뚤삐뚤 걸어 다녔다.어쨌든 진미리는 고현이 하이힐을 신고 걷는 모습이 매우 못마땅했다.고현은 소파에 앉자마자 바로 하이힐을 벗어 던졌다.진미리는 고현의 상황을 살피지도 않은 채 하늘을 찌르는 듯한 굽 높은 신발을 신고 걷는 연습을 시켰다. 비록 연회에 참석할 때 신을 하이힐은 그렇게 높지 않지만 말이다.고현은 내심 불만이었다.하지만 진미리는 굽 높은 신발로 연습을 해야 연회 때 신어야 할 하이힐을 쉽게 신을 수 있다고 했다.“호영 씨.”고현은 부드럽게 전호영을 불렀다. 그녀는 지금처럼 전호영의 전화를 기다린 적이 없었고 또한 이렇게 부드러운 말투로 전호영의 이름을 부른 적도 없었다.그녀는 성격이 차가운 편이라 전호영을 사랑하게 되더라도 그에게 부드럽게 대하지 않을뿐더러 다른 여자들처럼 애교도 부리지 않았다.가끔 고현이 전호영과 이야기할 때 약간의 웃음을 띠면서 말을 건네기만 해도 전호영은 며칠 동안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다.“오후에 회사에 돌아가지 않았어요. 반나절을 쉬려고 우리 부모님 집으로 왔어요.”고현의 부드러움은 전호영이라는 이름을 부를 때만 사용됐고 다시 입을 열어 말했을 때는 말투가 정상으로 돌아갔다.전호영이 물었다.“괜찮으세요? 어디 아픈 건 아니죠?”그녀는 워커홀릭이라 결혼하기 전의 전태윤처럼 평일에 쉬는 일이 거의 없었다. 주말이 되어 집에서 쉰다 해도 사실 업무를 처리하기 위함이었다.고현은 가끔
임원들은 고빈의 주위에는 적어도 여성 지인들이 많아 그녀들과 만나면서 먹고 놀 수 있다지만, 고현은 그야말로 전호영에 의해 망가졌다고 생각했다.전호영이 아주 훌륭하고 관성의 제일 갑부인 전씨 가문 출신이라고 해도 뭐가 소용 있겠는가!동성연애는 국내 사람들이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데...“상상력이 풍부하시네요. 고빈 씨에게 드리는 꽃이 아니거든요. 고현 씨는 회사에 없어요? 나가셨어요?”전호영이 물었다.고빈은 손이 전호영에 의해 뿌리쳐졌지만, 화도 내지 않고 일부러 전호영에게 말했다.“우리 형에게 매달리더니 너무 심하게 매달린 건 아닌가 봐요? 우리 형이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다니. 우리 형이 오후에 회사에 돌아오지도 않았어요. 모르셨어요?”전호영은 정말 몰랐다.그는 고현이 오늘 저녁에 그녀와 함께 연회에 참석해야 한다는 사실밖에 몰랐다.오늘 밤 두 사람이 참석하는 연회는 강성에 있는 한 재벌가의 저택에서 열리기 때문에 전호영은 일을 마치자마자 서둘러 달려왔다.그는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바로 왔다.전호영은 매일 양복을 입고 다녔기 때문에 갈아입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그는 선천적으로 잘생긴 외모로 옷을 대충 입어도 쉽게 사람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곤 했다.“호영 씨 표정을 보니 우리 형이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은 모양이네요. 하하! 우리 형을 반년 넘게 귀찮게 하여 동성애자로 만들더니 결국 우리 형의 마음을 완전히 움직이지는 못했네요.”고빈은 동정 어린 표정으로 전호영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시간이 없어서 잔소리 그만할게요.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그럼 저는 이만.”고빈은 전호영을 뒤로 한 채 임원들과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리를 떠났다.전호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프런트 데스크로 돌아와 아직 퇴근하지 않은 직원에게 물었다.“고 대표님께서 오늘 오후 정말로 회사로 돌아오지 않았어요?”“네, 오후에 돌아오지 않으셨어요.”전호영이 다시 물었다.“어디로 가신다는 말은 안 하셨어요? 사업 때문에 나가신 거예요?”전
하예진은 말을 잇지 못하고 살며시 노동명을 안아주었다.잠시 후 노동명은 그녀를 가볍게 밀어내며 부드럽게 말했다.“돌아가서 쉬어.”“잘 자요. 동명 씨도 내일 관성으로 돌아가야 하잖아요.”두 사람은 서로 인사한 뒤 하예진은 노동명의 방을 나섰다. 노동명은 휠체어를 타고 그녀를 현관문 밖으로 나와 그녀가 옆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문을 닫았다.밤새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 말도 오고 가지 않았다.다음 날 노동명은 아침 식사를 마친 후 하예진의 배웅을 받으며 차를 타고 하루 호텔을 떠났다.하예진은 공항까지 따라가지 않고 노동명을 차에 태우고 호텔 입구에 서서 그를 배웅했다.공항까지 배웅하면 더 아쉬울 것 같았다.노동명이 타고 있던 차가 보이지 않게 되자 하예진은 그제야 경호원들과 함께 전호영이 안배해 준 차를 향해 걸어갔다.노동명이 관성으로 돌아갔으니 그녀도 계속 일을 해야 했다.바쁠 때는 시간이 유난히 빨리 지난다.날이 조금 전에 밝은 것 같았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또 저녁이 되었다.전호영은 고현이 오후에 회사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그는 평소처럼 저녁 무렵 차를 몰고 고씨 그룹으로 가서 고현이 퇴근할 때까지 기다렸다.그리고 같이 밥 먹으러 가려고 했다.고현은 사업이 무척 바빠서 전호영에게 줄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매일 식사 시간이 바로 그와 고현이 정을 쌓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간이다.그의 차는 고씨 그룹에 들어가서 늘 주차하던 곳에 멈춰 섰고 전호영은 조수석에서 꽃다발을 안아 들고 차에서 내렸다.전호영은 사무실 건물 입구에서 밖으로 나가는 고빈을 만났다. 고빈은 회사 임원 몇 명과 함께 걸으면서 얘기를 나누었다.전호영을 본 고현 일행은 멈추어 섰다.“회사엔 왜 왔어요?”고빈이 입을 열자마자 물었다.전호영은 그 물음에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제가 왜 당신 회사에 올 수 없어요?”전호영은 매일 고씨 그룹으로 왔다.그럼 전호영을 쫓아내기라도 하겠다는 의미인가!고빈이 감히 그를 쫓아낸
“응, 내일 돌아가려고. 예진이도 너무 바빠서 영향 줄까 봐 그래. 관성으로 돌아가서 우빈이도 돌봐야 예진이가 걱정하지 않지. 내가 강성으로 돌아가서 나와 우빈을 위해 강산을 다스려야 되거든. 하하!”노동명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옆에서 듣고 있던 하예진이 말했다.“나중에 빚이 쌓일까 봐 두렵네요.”노동명이 되물었다.“뭐가 두려워? 수십 조의 빚만 아니라면 다 갚아줄 수 있어. 넌 마음 놓고 가서 일해. 하늘이 무너져도 내가 버텨줄 테니까. 파산될 걱정은 하지 마.”수십 조의 빚이라고?하예진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현재 하예진의 상황으로 놓고 보면 수억 원의 빚만 져도 그녀는 너무 걱정되어 흰머리가 나올 것 같았다.전태윤은 또 음성메시지를 보내왔다.“우리 처형에게 너 같은 후원자가 있으니 반드시 강성에서 성공할 거야.”노동명은 하예진에게 전태윤의 음성메시지를 들려주며 말했다.“들어봐, 태윤이가 너를 엄청나게 믿고 있어.”“항상 저를 이렇게 믿어주시는데 제가 더 열심히 해야 기대에 부응할 수 있겠네요.”“너도 혼자 견디지 말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나에게 도움을 청해. 내가 다리를 다쳤지만 머리가 다친 건 아니거든. 나도 너 대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어.”하예진은 노동명이 다리를 다쳤다는 둥 머리를 다쳤다는 둥 그런 말을 하는 것을 싫어했다.“동명 씨의 다리는 좋아질 거예요. 저는 그런 말 듣기 싫어요. 앞으로 절대로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동명 씨가 다리 나아지면 저랑 결혼도 하셔야죠.”노동명은 싱글벙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네가 그런 말을 해 주니 내 다리도 분명 나아질 거야.”하예진은 얼굴이 붉어지더니 부끄러워하며 대답했다.“너무 오래 얘기하지 마세요. 일찍 쉬어요. 저도 방에 가서 쉴게요. 내일 또 회사 일로 많이 뛰어다녀야 하거든요.”“응, 가. 잘 자.”노동명은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그녀에게 굿나잇 키스를 해달라고 암시했다.하예진은 다가가서 허리를 굽히더니 노동명의 칼자국이 있는 얼굴에 입을 맞추
“형인 씨 마음속엔 아직 네가 있을지도 몰라.”노동명이 말했다.그는 오히려 주형인이 우빈 앞에서 그의 험담을 하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주형인이 험담하면 할수록 우빈은 그를 싫어할 것이고 오히려 노동명과 우빈의 정이 더 깊어져만 갈 테니까.노동명은 마침내 우빈이 주씨 집에서 돌아올 때마다 그에게 무척 잘해준 이유를 알게 되었다.우빈도 미안했던 모양이다.주형인이 그의 험담을 했기 때문이다.“형인 씨는 저에 대한 사랑이 사라진 지 오래되었을 거예요. 저를 사랑했다면 저를 배신하고 상처를 주는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주씨 집안 가족들이 저를 괴롭히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았을 거예요. 남자가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어떻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있겠어요? 시어머니와 갈등이 생긴다 해도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노력했을 텐데. 어떻게 시어머니와 그의 누나가 저를 비난하도록 내버려 둘 수 있었겠어요?”“그 사람은 마음이 편치 않았을 뿐이에요. 제가 처음에 말했던 것처럼 만약 형인 씨와 서현주 씨가 아주 행복하게 잘 지내고 그렇게 많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지금쯤은 행복하게 살면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기를 기다렸을 텐데. 제가 죽든 살든 상관했겠어요? 우빈에 대한 감정조차 옅어졌을걸요. 그들만의 아기가 생기면 우빈에 대한 감정이 워낙 깊지 않은데다 감정이 있으면 얼마나 있다고...”노동명은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문득 화제를 돌렸다.“맞아. 그런 기분 나쁘게 하는 사람과 일들을 생각하지 말자. 나 내일 관성으로 돌아갈 거야. 예진아, 나랑 같이 가서 새 옷 몇 벌 사 오자. 우빈에게 줄 장난감도 좀 골라줘. 내가 매번 선물한 장난감을 녀석이 좋아하지 않는 것 같더라고.”하예진도 전남편 얘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다. 그녀도 진작에 태연하게 모든 것을 받아들였지만 노동명 앞에서 전남편 얘기를 꺼내면 노동명이 질투할까 봐 걱정했다.교통사고를 당한 후 노동명도 많이 연약해졌다.주로 다리 장애로 자신감을 잃은 노동명은 마음이 매우 약해졌다.노동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