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너 딱 기다려. 지금 바로 네 남편 회사에 찾아가서 돈 내놓으라고 소란 피울 거야. 네 남편이 안 주면 시댁에 가서 난리 쳐야지. 너의 체면을 모조리 짓밟아버리고 시댁 식구들도 네가 눈꼴사나워서 내쫓아버리게 할 거야!”하 영감이 으름장을 놓았다.그는 확실히 이렇게 할 작정이었다.여기 오기 전에 손자들이 미리 그를 일깨워주었다. 하예정 자매가 워낙 그들을 증오하다 보니 돈을 안 줄 가능성이 더 크다면서 작전 방안을 짜주었다.하예정은 인제 전씨 일가의 사모님이 되어서 체면을 매우 중시할 테니 그들이 눈 딱 감고 소란을 피우면 하예정도 시댁의 체면을 위해 선뜻 돈을 줄 거라고 했다.만약 안 주면 전태윤을 찾아가고 전씨 일가를 찾아가면 된다. 그녀가 비록 가족들과 사이가 틀어졌다고 하지만 어쨌거나 여전히 친정 식구들이기에 어느 시댁에서 이런 사돈 집안을 좋아하겠는가, 다들 창피하다고만 여기겠지.하예정은 원래 집안 형편이 안 좋아 전씨 일가에 시집와서 사모님으로 사는 것이 불안정할 따름이다. 시댁 식구들도 그런 그녀가 썩 탐탁지 않을 수 있으니 그들이 가서 소란을 피우면 전씨 일가도 잇따라 체면이 구겨지고 다들 하예정을 미워할 게 틀림없다.어쩌면 전태윤과 하예정의 이혼을 부추길지도 모른다.하지문은 할아버지에게 일단 이리로 와서 시도해보라고 건의했다. 하예정이 체면을 위해 일을 조용히 해결하려고 선뜻 돈을 준다면 앞으로 돈 떨어질 때마다 그녀를 찾아오면 된다. 어차피 전씨 일가에 돈이 차 넘치니 한 번 받은 돈으로 한동안 호의호식할 수 있다.만약 그녀가 안 주면 기자에게 연락해 그들이 전씨 그룹과 전씨 일가에 찾아가 소란을 피우는 모습을 몰래 촬영해서 인터넷에 퍼뜨리면 된다. 전씨 일가는 무조건 크게 분노할 테고 이는 하예정에게 불리하게 작용된다.다들 인제 직장도 잃어서 위협이 될만한 것이 없다. 이 세상에 잃을 것 없는 사람이 가장 두렵다는 말처럼 하예정과 끝까지 물고 늘어져 그녀가 전씨 일가에서 쫓겨나게 할 생각이었다!다들 힘들게 사는데
원수도 별 거 없었다.“손녀사위 왔군. 어서 자네 아내 좀 자제시켜. 어른을 공경할 줄도 모른다니까. 부모 없이 자란 애들은 역시나 교양이 없어. 자네는 재벌 가문 출신이니 자네 집안에서 가정 교육을 엄청 중시할 거야. 예정이처럼 버릇없는 애랑은 얼른 이혼해. 이혼을 못 해도 따끔하게 혼내줘. 말을 안 들으면 그냥 때려. 자고로 여자는 매를 맞아야 순종한댔어. 전에 얘 할미도 내 말을 안 들어서 매일 두들겨 팼더니 그제야 듣더라고. 예정이가 내 옷을 흠뻑 적셨어. 나 새 옷 몇 벌 사 입게 자네가 돈 좀 줘.”전태윤의 싸늘한 표정에 하 영감은 가슴이 움찔거렸지만 두려움도 무릅쓰고 파렴치한 말을 내뱉었다.심효진마저 빗자루로 그를 때리고 싶었다.세상에 이런 할아버지가 있다니.예정이네 아빠가 정말 하 영감의 친아들이 맞을까? 심효진은 진지하게 고민했다.화가 난 하예정은 물통을 들고 화장실에 들어가더니 또다시 물을 한 통 받았다.하 영감은 그녀가 또 물통을 들고나오자 이번엔 당하고만 있을 수 없었다!아까는 그녀가 감히 이렇게 나올 줄 몰랐기에 정신을 못 차리고 흠뻑 젖었지만 이번엔 곧바로 전태윤의 뒤에 숨으려 했다.“예정아, 물통이 얼마나 무거운데 얼른 나 줘.”좀 전까지 냉랭하게 서 있던 전태윤이 앞으로 몇 걸음 다가가 그녀 손에서 물통을 건네받으며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했다.“이런 힘 쓰는 일은 직접 하지 마. 말만 하면 내가 도와줄게.”하 영감은 말문이 막혔다.그는 황급히 서점 밖으로 도망쳤다.전태윤은 물통을 들고 그를 쫓아갔다.하 영감은 쏜살같이 달려가서 둘째 손자의 차에 냉큼 올라탔다. 하지문의 차가 고급 차라 앉기 편하여 그는 외출할 때마다 둘째 손자의 차를 즐겨 탄다.나름 있어 보이니까!손자가 능력이 있으니 할아버지인 그도 체면이 선다.한편 손녀는 재벌가에 시집갔지만 할아버지로서 그는 덕을 못 볼뿐더러 손녀와 손녀사위에게 물벼락까지 맞았다.하예진 자매는 역시나 손해 보는 녀석들이다!하예정이 태어난 그해, 하 영감은 사석에
하늘도 무심하시지. 다른 손녀들은 그래도 나름 효심이 있는데 하필이면 하예정 이 불효한 손녀가 재벌가에 시집가다니!하지문 일행은 할아버지가 도망치자 감히 더 머무르지 못했다.다들 차에 올라타고 줄행랑을 쳤다.전태윤은 물통을 바닥에 쾅 하고 내려놓았다. 동작이 너무 큰 탓에 통 안의 물이 밖으로 튀어 그의 바짓가랑이를 적셨다.“영감탱이가, 배짱 있으면 도망치지 마!”전태윤은 멀어져가는 차들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그는 원래 하 영감을 내쫓지 못하면 경호원들을 시켜 노인네를 강제로 차에 태우고 하씨 집안 사람들을 전부 돌려보낼 생각이었다.하 영감이 버티지 못하고 스스로 도망쳤으니 일이 훨씬 수월해졌다.하예정과 심효진도 밖으로 나왔고 심효진이 먼저 말을 꺼냈다.“예정아, 저 사람들 화해는커녕! 인터넷으로 공개사과를 해도 절대 용서하지 마. 다들 네가 잘 되는 걸 배 아파하는 인간들이야.”하예정은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난 한 번도 저들을 용서하고 화해할 생각 없었어. 화해할 수도 없지.”“저 사람 네 친할아버지 맞아? 나 방금 네 아빠가 친자가 맞는지 진지하게 고민했다니까. 세상에 어떤 친할아버지가 친손녀에게 이렇게 하냐고?”하예정은 한참 침묵하다가 말했다.“부모님이 살아계셨을 때, 엄마는 늘 내게 아빠가 할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았다고 하셨어. 영락없는 친부자였지. 우리 아빠는 맏이도 아니고 막내도 아닌 어중간한 처지라 줄곧 사랑받지 못했어.”그녀의 어린 시절 기억 속에서 할아버지, 할머니는 그녀의 부모님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의 집에서 먹고 지냈고 조금만 편찮아도 그녀의 부모님이 병원으로 모셨지만 돈과 정력을 모두 기울여도 사랑받지 못했다.큰어머니와 숙모가 명절 때마다 두 어르신께 닭고기 한 그릇을 보내오면 일 년 내내 칭찬을 입에 달고 산다. 큰아들과 작은아들은 효심이 지극하여 닭을 잡아도 잊지 않고 그들에게 한 그릇 가져다준다고 칭찬을 남발한다.한편 하예정네 집에서 닭을 잡을 때마다 닭 다리 두 개를 어르신 두 분께 드렸지
아내의 마음을 되돌리려면 체면을 모두 내려놔야 한다더니 정작 도련님은 체면이 여전히 중요한 듯싶었다.강일구는 재빨리 차에 돌아가 도련님이 준비한 꽃다발을 가져왔다.“도련님, 아직 사모님께 꽃을 드리지 못했어요.”그는 꽃다발을 전태윤에게 건넸다.전태윤은 그제야 정신을 가다듬고 하예정에게 꽃을 사 온 일이 생각났다.그는 강일구의 손에서 꽃다발을 건네받으며 나지막이 말했다.“양 집사한테 말해서 이번 달 네 보너스를 두 배로 줄게.”강일구는 매우 신났지만 겉으론 공손하게 대답했다.“도련님과 사모님이 화해만 한다면 저는 보너스 따위 중요하지 않아요.”“그럼 그 돈 아껴서 너희 사모님한테 꽃을 더 선물해야겠네.”강일구는 말을 잇지 못했다.충심을 표했을 뿐인데 도련님이 더블 보너스를 취소할 줄이야!뭇사람들은 머리를 돌리고 입을 막으며 키득키득 웃었다.전태윤은 꽃다발을 안고 가게에 들어가려다가 한 걸음 내디딘 후 바로 물러서며 경호팀에 말했다.“다들 돌아가. 너희들만 보면 예정이는 내가 저를 속였던 일만 생각날 거야.”그의 경호팀은 관성 사람들에게 제2의 전태윤이라는 느낌을 준다.경호원들은 말문이 막혔다.다만 전태윤은 억울해하는 경호원들을 신경 쓸 겨를 없이 꽃을 안고 가게에 들어갔다.하예정은 카운터에 앉아 공예품을 만들고 있었고 심효진은 그녀 맞은편에 앉아 양손으로 턱을 고이고 묵묵히 그녀를 바라봤다.전태윤이 들어오자 심효진은 바로 자리를 비켜주려 했다.이때 하예정이 고개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심효진은 곧바로 다시 제자리에 앉았다.‘안 비키길 잘했어. 하마터면 예정이를 배신할 뻔했잖아.’“예정아, 이 꽃 너 주려고 샀어.”전태윤은 꽃다발을 그녀 앞에 건넸다.“고맙지만 저는 필요 없으니 어서 나가주세요. 제 시선 막지 말고요.”하예정은 여전히 차분하게 말하며 전태윤을 바라봤다.“전태윤 씨, 저 분명 혼자 있고 싶다고 말한 것 같은데.”전태윤은 꽃다발을 건네려는 동작에서 멈춘 채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봤다.부부가 팽팽하게 맞
“태윤 씨가 왜 여기 있어요?”성소현이 의아해하며 물었다.전태윤의 신분으로 이런 곳에 나타날 리가 없는데 눈앞의 남자는 확실히 그였다.성소현은 본인이 잘못 본 건 아닌지 의심하며 눈을 깜빡이다가 다시 쳐다봤지만 그녀가 알고 있는 전태윤이 틀림없었다.전태윤과 하예정 사이에 꽃다발이 놓여있고 전태윤은 또 하예정의 한쪽 손을 잡고 있었다. 순간 성소현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내가 지금 뭘 본 거지? 이 남자 태윤 씨랑 아주 많이 닮았지만 사실 태윤 씨가 아니었나? 그 차가운 성격에 외출할 때마다 경호팀을 거느리고 다니고 가족 이외의 젊은 여자는 3미터 안으로 접근하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는데 그런 사람이 손을 먼저... 아 참, 깜빡했네. 태윤 씨 유부남이었지. 게다가 아내한테 엄청 잘해서 다들 팔불출이라고 하잖아. 내가 아직 태윤 씨 아내분을 본 적이 없지만 이 사람이 팔불출이란 건 완전히 믿어. 태윤 씨 같은 성격의 남자는 일단 사랑에 빠지면 평생 갈 테니까.’성소현은 전태윤이 팔불출이란 소문을 듣고 전혀 이상해하지 않았다.아쉬운 것은 그녀가 전태윤의 사랑을 받는 여자가 될 수 없었다.‘잠깐, 예정이랑 초고속 결혼한 남편도 성이 전씨인데 설마 그 사람이 바로 태윤 씨였던 거야?’성소현은 갑자기 깨닫고는 손에 들었던 쇼핑백들을 전부 바닥에 떨어트렸다.그녀는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해지며 전태윤 부부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잡힌 손을 빼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를 돌아 나오려고 했는데 미처 나오기도 전에 성소현이 불쑥 전태윤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전태윤의 손목을 힘껏 잡아당기며 그와 눈을 맞추려 했다.전태윤은 그녀의 손을 뿌리치더니 방금 그녀가 만졌던 옷깃을 툭툭 털며 차갑게 쏘아붙였다.“성소현 씨, 지금 뭐 하는 짓이죠? 당장 멀리 떨어져요!”성소현은 어두운 표정으로 쓴웃음을 지었다.“나한테 뭐 하는 짓이냐고 물었어요? 그건 내가 물을 말인데, 태윤 씨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에요?”그녀는 전태윤보다 훨씬 화났다.
“예정아, 태윤 씨 평소에 널 어떻게 속였어? 자기가 일반 직장인이라고 늘 그렇게 말했지?”하예정은 성소현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되면 엄청 화내며 그녀와도 사이가 틀어질 줄 알았는데 정작 성소현이 화난 이유는 전태윤이 양쪽 모두 속인 것 때문이다. 그가 만약 기혼 사실을 밝혔다면 성소현은 바로 마음을 접었을 텐데 줄곧 아무 말 없이 있으니 싱글인 줄 알고 끈질기게 집착했다. 결국 그녀만 남의 결혼에 끼어든 제삼자가 돼버렸고 게다가 친구 같은 사촌 여동생의 결혼생활을 훼방한 격이 되었다.“예정아, 두 사람 언제 혼인 신고했어?”성소현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하예정이 대답했다.“추석 연휴 끝나고 다음 날인가 사흘째인가 그쯤이었어요.”그 당시 하예정은 대충 함께 살 사람이 필요해서 초고속결혼을 한 것뿐이니 혼인신고 날짜를 일부러 새겨두지 않았다. 그저 추석 연휴가 지나고 며칠 안 돼 혼인신고를 마쳤다는 것만 알고 있다.“예정아, 우리 결혼기념일은 매년 10월 10일이야.”성소현에게 질책당하던 전태윤이 대신 말했다. 그는 이젠 결혼기념일을 단단히 외워놓았다.“그러니까 두 사람 혼인 신고한 후에야 내가 공개 고백을 한 거네요. 태윤 씨 아주 작정을 했군요!”성소현은 자신이 먼저 고백하고 전태윤이 혼인신고를 했다면 이해라도 할 텐데 두 사람이 혼인 신고한 후에야 그에게 고백했다.전태윤은 그녀의 진심 어린 고백을 거절하긴 했지만 본인의 기혼 사실을 알리진 않았다. 후에 성소현이 하도 집착해서 결혼반지를 보여줬고 그제야 그녀도 마음을 접었다.전태윤이 목소리를 내리깔고 물었다.“나랑 예정이 사이의 일을 성소현 씨한테 보고해야 해요?”“그럴 필요는 없지만 태윤 씨가 유부남이니 나더러 멀리 꺼지라고 했어야죠. 결혼했으면서 아무 내색 안 하고 내가 집착하는 걸 귀찮아하면서도 그냥 내버려 뒀잖아요. 이런 식으로 남자의 자존심을 채운 거예요?”전태윤은 침을 꼴깍 삼키며 긴장한 눈빛으로 하예정을 바라봤다.하예정도 그를 마주 보았다.“예정아, 우리가 처음에 잠시 비
하예정이 고개 들어 그를 쳐다볼 때 전태윤은 몸을 홱 돌리고 가버렸다.하예정은 성큼성큼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가슴이 쿡 찔린 듯 아팠다.다만 그를 위해서인지 아니면 자신을 위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심효진과 성소현이 밖에서 얘기를 나눌 때 전태윤이 심각한 표정으로 서점을 나왔다. 그는 두 여자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늘 타던 롤스로이스로 곧게 걸어갔다.경호팀은 그의 명령대로 다 가고 없지만 기사는 전태윤이 차를 쓸까 봐 감히 떠나지 못했다.전태윤이 다가오자 기사는 얼른 차에서 내려 그에게 차 문을 열어주었다.2분도 안 될 사이에 전태윤은 롤스로이스를 타고 성소현과 심효진의 눈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두 여자는 서로 마주 보다가 곧장 서점 안으로 들어갔다.카운터에 하예정은 안 보이고 그녀가 공예품을 만들 때 사용하는 공구들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테이블 위에 피가 몇 방울 떨어졌고 가위에도 핏자국이 있었다.하예정이 다친 걸까?“예정아.”“예정아.”심효진과 성소현은 그녀를 애타게 부르며 안으로 걸어갔다.하예정은 화장실에 있었다.방금 전태윤이 갑자기 그녀에게 버럭 화냈고 그녀가 고개 들어 그를 마주 보려 할 때 전태윤은 몸을 홱 돌리고 서점을 나섰다.하예정은 순간 정신이 팔려 가위로 손가락을 찔렀는데 상처가 꽤 깊어 그 자리에서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그녀는 재빨리 서랍에서 늘 쟁여뒀던 지혈제와 밴드, 소독약을 꺼내고 면봉으로 간단히 소독한 후 상처에 지혈 크림을 바르고는 밴드를 붙였다.피가 너무 많이 흘러 책상에도 떨어지고 그녀의 다른 손가락에도 잔뜩 묻었다. 그녀는 화장실에 들어가 손에 묻은 핏자국을 씻고 있었다.“나 여기 있어.”하예정이 대답하며 화장실에서 나왔다.“어디 다쳤어?”심효진이 관심 조로 물었다.“이리 봐봐.”하예정은 밴드를 붙인 손가락을 보여주며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가끔 가위에 찔릴 때도 있어. 피를 몇 방울 흘렸을 뿐이야. 괜찮아, 아무 일도 아니니까.”심효진은 하예정의 다친
“그 사람과는 상관없어. 내가 부주의로 찌른 것뿐이야.”하예정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성소현에게도 말했다.“언니, 저랑 태윤 씨 일은...”“예정아, 난 널 탓하지 않아. 그러니까 너도 내게 해명할 필요 없고 사과할 필요도 없어. 우리가 알고 지낸 지 하루 이틀이니? 난 그저 태윤 씨가 양쪽 모두 숨겨가며 우릴 농락한 게 화날 뿐이야.”방금 심효진이 성소현에게 그간 하예정이 전태윤의 진짜 신분을 알고 어떤 일을 겪었는지 모조리 알려주었다. 성소현은 사촌 동생이 안쓰러워 죽을 지경이었다.전태윤에게 감쪽같이 속아버렸으니 말이다.“예정아, 난 일찌감치 태윤 씨한테 마음 접었어. 태윤 씨가 결혼한 걸 알았을 때부터 바로 마음 접었고 한동안은 찾아가서 집착하지도 않고 생각조차 안 하려고 애썼어. 지금은 마음이 훨씬 홀가분해졌어. 나 때문에 네 진심을 외면하지는 마. 태윤 씨가 널 속인 걸 떠나 그 사람은 네가 평생을 믿고 맡길 가치가 있어. 물론 널 감쪽같이 속였으니 나도 네가 너무 빨리 용서해주는 건 원치 않아. 이참에 따끔하게 혼나야 해.”성소현은 다음에 전태윤을 만나면 바로 호칭을 고쳐서 누나라고 부르게 할 생각이었다. 그녀는 사촌 동생을 대신해 전태윤을 제대로 한번 다스려야 할 듯싶었다.“이건 단지 내 생각이고 네가 어떻게 할지는 네가 결정해. 난 절대 간섭 안 해.”성소현은 그녀의 다친 손가락을 살펴보았다.“아직도 피가 안 멈춘 것 같은데 얼른 병원 가서 꿰매야겠다. 너 안색이 다 창백해졌어. 내가 병원까지 데려다줄게.”하예정은 상처가 얼마나 아프던 한사코 거절했다.손이 아픈들 마음만 할까. 그녀는 방금 가위로 너무 세게 찔러서 하마터면 손가락이 잘릴 뻔했다.“내가 네 언니야. 내 말 들어.”성소현은 강제로 그녀를 끌고 나갔다.심효진도 성소현과 한편이 되어 하예정에게 얼른 병원 가서 상처를 다시 소독하고 꿰매라고 다그쳤다.두 친구의 설득에 못 이겨 하예정은 결국 순순히 성소현을 따라 병원에 갔다.한편 전태윤은 거만을 떨며 서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