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예정은 영상통화를 끊었다.‘...우빈이도 못 보게 하네. 계속 우빈이랑 장난 칠 걸 그랬어. 적어도 예정이가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말이야.'하예진은 하예정을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하예정을 집에 데려온 후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동생이 얘기하고 싶을 때 말할 거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아들의 작은 얼굴에 밥알이 가득 붙어있는 것을 발견한 하예진은 웃으며 아들의 얼굴에 붙은 밥알을 떼주었다.식사 후 하예정은 나갈 준비를 하였다.“어디 가?”하예진은 설거지하면서 물었다.“속이 좀 복잡하고 답답해서 나가 찬 바람이나 쐬려고. 언니 스쿠터 타고 갔다 올게.”“너무 멀리 가지는 마. 배터리 다 나가면 밀고 와야 해. 옷 많이 입고, 스쿠터 타면 바람이 차가우니.”“알았어.”“심효진을 찾아가 술을 마시지는 말고. 태윤 씨가 널 너무 걱정하길래 나도 태윤 씨랑 약속했어, 너 술 못 마시게 하고 차도 운전 못 하게 하겠다고.”전태윤 그 사기꾼을 생각만 하면 하예정은 기분이 나빠졌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그를 머릿속에서 쫓아낼 수 없었고, 무슨 일을 하든 항상 그가 생각났다.하예정은 불만이 가득해서 말했다.“언니, 언니 친동생은 나인데 왜 남을 도와 날 돌봐주고 있는 거야?”“누구를 돕는 게 아니라, 너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거야. 넌 기분이 좋지 않으면 차를 아주 날것처럼 운전하잖아. 그럼 사고가 나기 쉬워. 술을 마실 때도 주량이 좋지 않아 두 잔도 채 못 마시며 술에 취해서는 다음날 일어나 또 머리 아프다 그러고.”“이모, 나도 갈래요.”주우빈은 이모가 바람 쐬러 간다는 말을 듣고 바로 달려와 하예정의 다리를 껴안고 따라가겠다고 졸라댔다.하예정은 조카를 안아 들고 어린이용 스쿠터 좌석 의자를 가져오면서 하예진에게 말했다.“언니, 우빈이를 데리고 나가서 두 바퀴 돌고 올게.”“조심해, 우빈이에게 모자 씌우고. 외투에 모자가 달려있을 거야.”“알았어.”하예정은 조카를 데리고 나갔다.그러나 스쿠터를 밀
하예정은 주우빈을 데리고 근처를 두 바퀴 돌다가 결국 인근 대형 슈퍼에 가서 많은 간식과 우유 한 상자를 샀고 둘은 짐을 가득 싣고 돌아왔다.하예정은 하예진이 세 들어 사는 건물 입구에 차를 세우고는 본능적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는데 전태윤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안심되는 한편 마음이 복잡하기도 했다.“우빈아, 먼저 내려와 있어. 이모가 차를 세워놓고 올게. ”1층에는 공용차고가 있어 이곳에 세 들어 사는 세입자들에게 차를 세울 자리를 마련해주었다.하예정은 먼저 조카를 스쿠터에서 안아 내린 후 마트에서 산 간식과 우유 상자를 주우빈 옆의 바닥에 놓았다.주우빈은 이 모든 것이 이모가 자신에게 사준 것으로 생각하며 바로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아 한 손은 간식 위에 놓고, 다른 한 손은 우유 상자 위에 올려놓았는데 자신의 물건을 지키려는 모습이 역력했다.“우빈아.”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주우빈은 고개를 돌려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전태윤을 발견하고는 곧 일어나 기쁜 목소리로 불렀다.“이모부.”그리고 그는 두 팔을 벌려 전태윤에게 안아달라고 했다.하예정이 스쿠터를 몰고 차고로 들어가자마자 전태윤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그녀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는데 전태윤이 주우빈을 안아 드는 모습이 보였다.그녀는 잠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순간 스쿠터로 옆에 세워져 있는 여성용 오토바이를 들이받아 넘어뜨렸고, 자신도 스쿠터와 함께 그쪽으로 넘어졌다.“예정아!”전태윤은 하예정을 부르며 바로 주우빈을 땅에 내려놓고는 빠른 걸음으로 차고 안으로 뛰어들었다.“예정아, 괜찮아? 다친 곳은 없어? 어디 봐봐.”전태윤은 하예정을 일으켜 세우고 얼른 그녀의 몸에 다친 곳은 있는지 확인했다.“전 대표님, 관심해줘서 고마워요.”하예정은 전태윤의 손을 밀치고는 차를 일으키러 가려 했다.전태윤은 그녀의 거리감으로 가득 찬 호칭과 담담한 표정을 보며 마음이 아파 났다.“예정아.”하예정이 자기를 쳐다보자, 전태윤은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그게... 내가 차를 일으
전태윤은 아쉬운 표정으로 시선을 하예정에게서 떼고 묵묵히 처형을 따라갔다.하예정은 종이 위에 사과의 말과 자신의 이름, 그리고 휴대폰 번호를 남겼고, 그 밑에 내일 연락하면 수리비를 배상할 것이라 적고는 메모지를 붙여놓았다.이 모든 것을 다 하고 차고에서 나온 그녀는 언니와 조카만 보이고 전태윤이 보이지 않자 곧바로 물었다.“언니, 태윤 씨는 ?”“네가 산 물건이 좀 많다고 하니 자진해서 물건을 위층으로 가져갔어.”하예정은 입술을 앙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좀 돌고 온다더니 결국엔 마트에 갔구나. 너하고 우빈이가 같이 마트에 가면 항상 마트를 통째로 들어오지 못해 한스러워하더라.”하예진은 아들을 안고 여동생과 위층으로 올라갔다.“기분이 안 좋을 때 마트에 가서 물건을 사면 기분이 훨씬 나아지는 것 같아.”하예진이 웃음을 터뜨렸다.“너희 둘 먹보라고 할 땐 인정하지 않더니.”두 자매가 위층으로 올라가자, 전태윤이 현관문을 활짝 열고 집 앞에서 두 자매를 기다리고 있었다.“처형, 물건 다 놔뒀어요.”전태윤은 하예진에게 말했지만, 시선은 하예정에게로 향했다.“수고 많았어요.”“앞으로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지 전화해요, 바로 달려올게요.”하예진이 웃으며 말했다.“힘든 일 없어요. 추운데 여기 서 있지 말고 들어가서 따뜻한 물 한 잔 마시고 돌아가세요.”전태윤이 하예정을 바라보며 그녀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지만, 그녀는 그저 주우빈을 안고 방으로 들어가는 언니의 뒤를 따라 가면서 전태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주방으로 들어가 버렸다.전태윤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선 채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한참 후, 하예정은 주방에서 더운물이 담긴 유리컵을 들고 나오더니 재빨리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손이 너무 뜨거웠다. “언니, 내일 가게에 나가야 하니 먼저 방에 들어가서 쉴게.”그녀는 전태윤을 쳐다보지도 않고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갔다하예정이 방문을 닫자, 하예진이 목석같이 서 있는 전태윤을 불렀다.“제부, 예정이가 더운물을
‘예정이가 컵이 이렇게 뜨거운데도 깨뜨리지 않고 가져온 것은 나보고 더운물을 마시고 몸을 녹이라는 뜻이 아닐까?’그녀는 화가 나서 그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입으로 떠들었지만, 사소한 행동에서 오히려 그녀가 말한 것처럼 그를 그렇게 미워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다.이렇게 생각하니 전태윤의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주우빈의 작은 몸이 앞으로 기울자, 전태윤은 그가 그 뜨거운 컵을 엎지를까 봐 급히 컵을 옆으로 옮겼다.주우빈은 간식이 가득 담긴 가방을 열고 싶었다.전태윤은 주우빈이 가방을 여는 것을 도왔다.“고마워요, 이모부.”주우빈은 가방에서 감자칩 한 봉지를 꺼내 전태윤에게 주었다.“이모부, 드셔보세요, 이모가 맛있다고 했어요.”이모는 감자칩은 애들이 너무 많이 먹으면 좋지 않다고 하면서 거의 사주지 않았다.그런데 이모는 왜 자주 드셔도 되는 걸까?전태윤이 감자칩을 건네받자, 주우빈은 또 몇 가지 간식을 꺼내 전태윤에게 주고는 그의 허벅지에서 내려 힘겹게 간식이 든 가방을 끌고 가며 말했다.“이건 우빈이 거예요.”하예진이 웃으며 아들의 가방을 들어주었다.“가방보다도 가벼운 녀석이 욕심은. 일단 여기 놔둬. 한꺼번에 다 먹어버리면 밥 먹기 싫어질 거야. 오늘 저녁은 안되고 내일은 조금 먹을 수 있어.”그러고는 전태윤에게 말했다.“우빈이는 간식에 집착이 심해서, 어쩌다 가끔 자기 걸 친구들한테 나눠주기는 하지만 웬만해서는 어른들에게 주려 하지 않아요.”전태윤이 주우빈 앞에서 하루 종일 엄숙한 표정을 지었지만, 주우빈은 그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하지만 노동명과는 여러 번 만났지만, 주우빈은 그를 볼 때마다 두려워했다.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정말 알 수 없다.전태윤은 주우빈이 나눠준 간식을 주우빈한테 도로 주었다.“우빈아, 이모부는 간식을 싫어하니 너 다 가져.”주우빈은 즉시 그 몇 가지 간식을 집어 가방에 다시 넣었는데 그 작은 행동에 전태윤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즐거워 났다.주우빈이 엄마 품으로 파고들었다.나이가 어려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든 전태윤은 서둘러 불을 켜고 하예정의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방 안의 물건들은 제자리에 있었고, 그녀의 일상용품들도 여전히 그대로였다.그녀의 옷장을 열어보니, 옷 몇 벌만 적어졌을 뿐, 트렁크는 여전히 옷장 옆에 놓여 있었다.전태윤은 그제야 크게 숨을 내쉬었다.누군가를 잃는다는 것이 이렇게 두려운 것은 처음이다.그는 하예정의 침대에 앉아서 마치 그녀를 어루만지듯 가볍게 침대를 만졌다.“예정아...”그는 하예정의 이름을 낮게 불렀다.“앞으로는 절대 당신을 속이지 않을 것을 행동으로 보여 줄게! 만약 내가 다시 당신을 속이고 다치게 하는 일을 한다면, 당신이 1년 동안 나를 무시하도록 허락할 거야. 아니, 1년은 너무 길고, 3개월.”하지만 생각해 보니, 하예정이 3개월 동안 그를 무시하면 미칠 것 같아서, 전태윤은 다시 중얼거렸다.“아무래도 일주일로 하는 게 낫겠어. 당신이 하루만 나를 무시해도 이렇게 미치는데 일주일 동안 무시하면 나는 완전히 돌아버릴 거야. 이건 너무 해.”하예정이 만약 그 자리에서 그의 혼잣말을 듣는다면, 어이가 없을 것이다.한참 지나서야 전태윤은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았지만, 잠그지는 않았다. 마음 한구석에서 여전히 혹시라도 하예정이 한밤중에 추우면 그의 따뜻한 품이 생각나서 찾아올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에...물론 이것은 이루어지기 어려운 망상에 불과할 뿐이다.하예정이 그를 상대한다고 해도 부부 관계가 곧바로 달콤한 그때로 돌아갈 수는 없다.이날 밤, 전태윤은 하예정의 방에서 밤을 보냈다.다음 날 아침, 하예정은 언니 집에 있을 때처럼 일찍 일어나 언니와 조카에게 아침 식사를 차려주고는 차 키와 휴대폰을 들고 집을 나섰다.오늘 그녀는 가게로 돌아가 전부터 고객이 심하게 독촉하던 주문을 맞춰야 한다.사랑의 상처는 별 거 아니니 그녀가 돈을 버는 데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되었고, 잡친 기분을 털어내는 것도 어제 하루의 시간이면 충분했다.아직 이른 시간이어서, 거리에는 차가 몇 대 없었다.하
하예정이 웃었다.“어떻게 문을 닫을 수가 있겠어요?”“모두 네가 전씨 가문 큰 사모님이란 걸 알고 나서 무조건 서점을 양도하고 앞으로 부잣집 사모님 노릇을 할 것으로 생각했어. 그리고 모두 너의 가게가 풍수가 좋다고 생각하며 비싼 가격이라도 살 거라고 하는데 이게 어디 가게의 풍수가 좋은 거야? 네가 좋은 팔자를 가지고 태어난 거지.”그 사람들이 하예정의 가게를 인수한다고 해서 하예정처럼 부잣집에 들어갈 수 있을까?하지만, 전 씨 큰 사모님의 덕은 얼마 동안 볼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전 씨 큰 사모님이 운영했던 가게이니까.“정 아저씨, 저는 여전히 저예요. 이 서점은 저와 효진이의 몇 년간의 심혈이에요. 이렇게 오랫동안 운영해 왔는데, 포기할 수 없어요.”“부잣집 사모님은 일하러 나갈 수 없다고 들었는데, 큰 도련님께서 허락하실까?”하예정은 한참 생각하다 대답했다.“그건 제 자유예요.”전태윤과 그의 가족들은 4개월 넘게 그녀를 속여왔다.만약 그녀가 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시댁 식구들은 더 전에 허점을 드러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들 전씨 가문에서는 여자가 나와 일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 같았다.비록 전태윤이 그녀를 속인 것은 화났지만, 하예정은 전씨 가문의 사람들이 모두 수양 있는 사람들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지금에 와서야 그녀는 그들이 진정한 부잣집 가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품격과 그 고귀함은 타고난 것으로서 보통 사람들이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시어머니가 왜 예의를 배우라고 권했는지도 알 것 같았다.알고 보니 그들의 집 문턱이 너무 높았기 때문이다.하예정은 격차가 너무 크다는 압박감을 느꼈다.정 씨 아저씨가 웃으며 말했다.“나도 그렇게 말했어. 그리고 또 나와 내기를 걸자 하였는데, 난 네가 계속 가게를 열 거라고 했고, 그들은 네가 가게를 양도한다고 했어. 네가 한평생 써도 다 쓸 수 없는 돈이 있으니, 더 이상 이 가게를 지킬 필요가 없다면서.”하예정이 웃었다.“그럼, 돈을 크게 거세
심효진이 웃었다.“이게 바로 내가 아는 하예정이지.”그녀는 차를 세우고 하예정과 함께 진열대를 꺼내 진열했다.“태윤 씨가 너를 시끄럽게 하지 않았어?”심효진이 관심하며 물었다.먼지떨이로 책장 우의 먼지를 털던 하예정이 친구의 말에 대답했다.“그의 성격으로 정말 나를 며칠 동안이나 가만둘 수 있을 것 같아?”“아니.”심효진이 다시 말했다.“처음처럼 너를 기절시키고, 집에 감금하려 하지 않는다면 좀 봐줘. 태윤 씨도 너를 잃을까 봐 무서워서 그런 거야 .”하예정은 대답이 없었다.그녀가 감정에 관해 이야기할 마음이 없는 것을 보고, 심효진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드디어 문을 열었구나.”문 어구에서 하예정이 가장 싫어하는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곧이어 하 씨 영감이 한 무리 아들 손주들을 데리고 빙그레 웃으며 서점 안으로 들어왔다.“예정아.” 마치 금산을 보는 것처럼 하씨 영감의 쭈글쭈글한 얼굴에 활짝 웃음을 띠었고 희뿌연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셋째 아들 집 딸이 이렇게 좋은 팔자일 줄은 몰랐다. 집안 배경도 없이 자매가 서로 의지하면서 살더니 봉황이 될 줄이야.갑부 전씨 가문이라니!손자의 말에 의하면 억만장자라고 한다!억만장자가 무슨 개념인지, 하 씨 영감은 계산기로도 그게 얼마나 많은 돈인지 계산이 안 되었다.아들, 손자의 부추김에 하 씨 영감은 잠시도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어 즉시 하예정에게 손 내밀려고 달려왔다. 아니, 손녀로 인정하려고 왔다.물론, 돈을 받아내면 더 좋고...지금 하예정의 손가락 틈으로 새어 나오는 돈으로도 노후를 편안하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더 이상 돈이 없어 노후를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지명아, 지문아, 내가 예정에게 가져온 고향 특산물들을 들여오거라.”하 씨 영감은 웃으며 손자들에게 분부하고 나서 다시 하예정에게 말했다.“예정아, 할아버지가 우리 고향 특산물들을 가져왔다. 너의 부모가 살아있을 때 아주 좋아하던 거니 꺼리지 말어.”하예정이 눈살을 찌푸렸다.주형인이 어젯밤에
하 영감이 말했다.“그래, 그럼 배달음식 시켜 먹지 뭐. 이따가 예정이가 돈 내.”하예정은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이 인간들은 참 한결같이 뻔뻔스럽게 그녀에게 빌붙으려 한다.하예정이 차갑게 쏘아붙였다.“배달시킨 사람이 돈 내요.”하지명과 하지문이 자칭 고향 특산이라며 들고 온 물건도 봉투를 꽉 매지 않아 안에 힐긋 쳐다봤는데 하나는 고구마, 다른 하나는 옥수수였다.고작 이런 걸 들고 오면서 그녀의 가게에서 돈 받을 생각이나 하다니?감히 이런 망상을 하는 사람도 그녀의 할아버지뿐이다.“예정아, 지나간 일은 다 잊어. 우리도 전부 내려놨으니 앙금을 품지 말아 주렴. 어찌 됐든 난 너의 친할아버지이고 우리가 선뜻 사과하러 왔잖니. 우리더러 인터넷에서 공개 사과하라고 했었지? 내가 지문이한테 사과문을 쓰라고 시켰어. 이제 곧 인터넷에서 공개사과할 거야. 오해가 풀리면 우린 여전히 한 가족이야. 너도 이젠 팔자 폈어. 네 남편 집안에 돈이 그렇게 많다면서? 재산이 무려 십조억이라고 했지! 얼른 네 남편에게 말해서 더는 너희 삼촌이랑 큰아버지, 사촌들까지 괴롭히지 말라고 해. 다들 정상적으로 사업하고 출근할 수 있게 하란 말이야.”“지문이는 회사 임원이라 연봉이 2억인데 너 때문에 직장을 잃었어. 원래는 너에게 경제적 손실을 배상받아야 하지만 두 사람 남매인 걸 봐서 배상을 포기한 거야. 그러니까 예정아, 지문이랑 지명이를 원래 회사에 돌아가서 계속 임원직을 맡게 해줘. 너 인제 돈 많잖아. 우리한테 아침밥을 사준다고 얼마나 쓰겠니? 통장 잔고가 꿈쩍하지도 않겠지. 자꾸 그렇게 인색하게 굴지 말고 시시콜콜 따지려 들지도 마. 아 참, 우리 손녀사위는 어디 있어? 손녀사위를 처음 볼 때부터 비범한 인물일 거로 생각했어. 단연코 사람들 속에서 가장 빛나는 별이겠지. 하하, 역시 예정이가 보는 눈이 있다니까. 너희 남편 밑으로 사촌 남동생이 8명이나 있다던데 이참에 네 사촌 여동생들 도와서 소개팅 좀 시켜줘! 걔네들도 전씨 일가에 시집가서 사모님 노릇을 한다면
원림성 A시.전창빈은 모든 요리를 다 하고는 주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휴대전화를 꺼내 뉴스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는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온종일을 바쁘게 보냈다.정확히 말하면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이 전부 오늘 저녁 식사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그리고 저녁이 되어서야 주인공이 돌아왔다.잠시 기다린 후, 전이진이 오후 내내 준비한 요리들이 하나둘씩 하인들에 의해 운반되어 나갔다. 물론 그는 나갈 필요가 없었다.선우민아가 그의 요리를 맛본 후 만족스럽다면 전창빈을 불러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통보도 없이 주방에 머물다가 선우씨 가족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고 떠나면 집으로 돌아야 한다.비록 전창빈은 자신의 요리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지만 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는데도 선우민아의 면담 요청이 없었다.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뉴스를 보며 담담해 보였으나 속으로는 조금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그는 송일우처럼 세 번이나 도전하는 상황은 원치 않았다. 송일우는 몇 년이나 도전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 실패한 뒤로는 다시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신감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점점 들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한편 선우씨 가족들이 이미 식사를 마치고 있었다.선우민아도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던 선우민아의 어머니 한경주가 관심 있게 물었다.“민아야, 이번 지원자가 만든 음식은 어때?”선우민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한경주는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생각엔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채용하는 게 어때?”선우민아의 남동생 선우민기는 의자에 털썩 앉아 배를 만지며 말했다.“누나, 나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이번 요리는 정말 맛있었어. 오랜만에 이렇게 배불리 먹었어.”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선우민기의 배를 가볍게 톡 치며 눈가에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너는 굶은 적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많이 먹었어? 이번만 먹고 다음 끼니는 못 먹을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 좀 앉아 이따
도아영이 홀로 관성까지 찾아온 것도 전이혁을 위해서였다.관성에서 그녀의 안전은 그의 책임이다.앞으로 도아영과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아내 후보였다. 혹여 도아영이 관성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도씨 가문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은 물론 전씨 할머니께서도 그를 혼쭐 내실 것이 분명했다.전이혁은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태윤이 전화를 받자 전이혁이 조심스럽게 부탁했다.“형, 오늘은 형의 스위트 룸에서 하룻밤 자도 돼?”“안방만 빼고 다른 방은 마음대로 써.”전태윤은 거절하지 않았지만 안방 사용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평소 이곳에 머무를 때면 항상 안방을 사용했기 때문이다.“알았어. 고마워. 형.”“도아영 씨는 괜찮아?”“심하게 취해서 토하다가 물 달라고 하길래... 떠날 수 없어서 호텔에서 하룻밤 지내려고. 새벽에 아영 씨를 룸으로 데려다준 후 떠날 계획이야. 같이 묵었다는 사실을 알면 나에게 달라붙을까 봐 겁이 나.”전태윤이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진심으로 도아영 씨와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아. 그분 명성을 망가뜨리면 안 되지.”전이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형, 사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영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이고 할머니의 눈썰미는 틀린 적이 없으셨지. 도아영 씨와 함께 지내보니 나랑 잘 맞는 것 같긴 한데... 왠지 그 ‘여우’랑 함께 있을 때가 더 편안하단 말이야.”“‘여우’라고?”“내 꿈에 자꾸 등장하는 그 여자 말이야. 별명이 ‘여우 같은 여자’거든. 화장을 잘하는 건지... 본명도, 고향도, 행적도 전혀 알 수가 없어. 신비로운 느낌을 주어서 나도 자꾸 정복하고 싶어져.”전태윤이 말을 이었다.“이름도 모르는 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그분이 혹시 만성의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과 연관 있는 거 아니야?”만성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은 모연정의 사촌 형수이자 A시 허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인데 그녀도 이중생활로 유명한 인물이다.허씨 가문
“네.”우빈이는 전태윤의 말을 믿으며 다시 물었다.“이모부, 그 모기는 어디 갔어요?”전태윤은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우빈에게 보여주었지만 우빈은 모기를 찾을 수 없었다.“날아갔어. 이모부가 조금 늦는 바람에 잡지 못했어.”“그래요?”우빈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대답했다.하예정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우빈이가 아무리 영리해도 결국은 어린아이일 뿐, 어른을 이길 수는 없었다.“우빈아, 이모부는 일하러 가야 해. 우리도 집에 가자. 이모부한테 잘 가라고 인사해야지.”우빈은 바로 그의 작은 손을 흔들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모부, 잘 가요!”“집에 가서 빨리 쉬고 이모의 말도 잘 듣고. 이모를 귀찮게 하면 안 돼. 말 잘 들으면 겨울방학에 예진 리조트로 가서 용정이랑 놀게 해줄게.”우빈은 급히 약속했다.“절대로 이모 귀찮게 안 하고 말 잘 들을게요.”“여보, 빨리 일하러 가요. 우리도 갈게요.”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일하러 가라고 재촉한 뒤 운전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말했다.전태윤은 그 자리에 서서 차가 사랑하는 아내를 태우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차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비로소 자신의 차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전이혁과 도아영의 일에 대해서 전태윤은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도아영이 취하면 전이혁이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줄 것이니까.전이혁은 도아영을 그녀의 방까지 데려다주고 외투와 양말을 벗겨 준 뒤 편안한 자세로 눕혔다. 그리고 그가 떠나려던 참에 도아영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옆으로 토해버렸다.전이혁이 쓰레기통을 가져오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이미 바닥과 침대를 모두 더럽혔다. 그는 이 광경을 보자 정말로 토할 것 같았다.흠... 전이혁도 토했다. 그는 입을 막은 채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정신없이 토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코와 입을 가린 채로 나왔다.도아영은 시원하게 토한 뒤 다시 침대에 철썩 누워버렸다.전이혁은 침대 반대쪽으로 돌아가 구토물을 보지 않으려 애썼고 최대한 빨리 도아영을 일으켜 안고
도아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꿈나라에 들어가서 돌아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술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말을 안 듣더니 결국 취했네. 내일 아침이면 정말 고생할 텐데.”전이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도아영의 이마를 쿡쿡 찌르더니 체념했는지 그녀를 안아 들어 로얄 스위트룸 나섰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참! 난 도아영 씨가 어느 룸에 묵고 있는지 모르는데.'그는 걸음을 멈추고 도아영을 내려놓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부축하면서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하예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예정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형수님, 도아영 씨가 묵고 계신 룸 번호를 아세요?”하예정이 대답했다.“저도 잘 몰라요. 그냥 관성 호텔에 묵는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요. 아영이가 취했어요? 잠깐만요. 제가 알아볼게요.”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말했다.“여보, 아영의 룸 번호를 알아봐 줘요. 취했대요. 이혁 도련님이 아영이를 모셔다드리려고 하는데 룸 번호를 몰라서.”전태윤은 표정이 굳었다. 그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하예정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우빈의 손을 잡고 걸어 나갔다가 이내 돌아왔다. 그는 이미 전이혁과의 통화를 끝낸 상태였다.“알아봤어요?”“내가 이혁한테 이미 알려줬어.”전태윤은 여전히 표정이 굳은 표정으로 하예정에게 말을 건넸다.“아까 내가 물어볼 때 프런트 직원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마치 내가 바람피우는 거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내 동생이 도아영 씨를 데려다주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내가 대신 물어보는 거라고 설명까지 했어.”하예정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남편의 팔을 다정하게 끌며 달콤하게 웃었다.“설명했으면 그만이죠.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든 우리 감정엔 아무런 영향이 없는걸요. 제가 의심하지 않으면 되잖아요.”“다음부턴 이런 일 나에게 시키지 마. 이혁의 일은 이혁이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내가 왜 도와줘야 해? 나도 예전엔 아무 도움 없이 오직 내 진심과 깊은 정으로 너의 마음을 얻었는데.”“알았어요.
전이혁은 침묵했다.도아영은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왜요? 전이혁 씨는 그분을 보호하려고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 거예요? 안심하세요. 저는 공정하게 경쟁하고 싶을 뿐이에요. 수작 부릴 생각은 없어요. 저는 그런 건 못해요. 남자 하나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고. 제가 이렇게 남자를 좋아한 건 처음이라서 한번 도전해 보는 거예요. 다른 남자였다면 그냥 양보했을 거예요.”도아영이 눈여겨본 건 전이혁이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이혁의 뒤에 있는 전씨 가문이 마음에 들었다. 전씨 가문의 훌륭한 가풍은 소문이 자자했으니까.전씨 가문의 어르신들은 사상이 모두 개방적이어서 후손들이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지지해 주었다.심지어 반대한다고 해도 다른 집안 어르신들처럼 억지로 가로막지는 않았다.게다가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특히 아내를 아끼기로 유명했고 한번 정한 인연과 결혼은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이런 남자들이 흔치 않았다. 여자라면 누구든 한결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을 것이다.하여 도아영은 꼭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정말 안 된다면 그건 그녀와 전씨 가문의 인연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애초에 노력도 안 해보고 포기한다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도아영은 평생 후회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여자였다.전이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여우’의 이름을 몰랐으니까. 마음의 절반을 뺏긴 주제에 정작 상대방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니...도아영은 그가 연적을 보호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약간의 질투를 느꼈지만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전이혁 씨가 그녀를 보호할수록 저는 더 궁금해지네요. 도대체 누가 저 도아영을 이길 수 있는지. 근데 괜찮아요. 언젠가는 제 연적이 누군지 알게 될 거니까.”그녀는 전이혁에게 잔을 들며 말했다.“전이혁 씨, 자! 우리 한잔하죠.”전이혁은 잔을 들고일어나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잔과 부딪혔다. 그리고 도아영이 단숨에 그 술을 들이마시는 걸 지켜보았다.도아영은 더 이상 전이혁과 사랑에 관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도아영은 요즘도 이런 식으로 자식들의 혼사를 정하는 어르신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요즘은 연애와 결혼이 자유로운 시대인데 아직도 자식들의 혼사를 결정해 주는 집안이 있다고?’도아영은 곧바로 자기 집 안 어르신들을 떠올리더니 다시 묵묵히 조금 전의 의문을 거두어들였다.재벌 가문에서는 많은 혼사가 부모님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대부분 어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곤 한다.그들에게는 결혼의 자유가 많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건 이익뿐이었다. 두 가문 사이에서 이루어진 혼인으로 인해 두 회사에 얼마나 큰 이득을 가져다주느냐가 가장 관건이었다.“그럼 전이혁 씨 할머니께서 왜 저를 선택하셨어요? 저는 할머니를 본 적도 없는데.”도아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그녀는 전씨 할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아마 봤을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도아영을 유심히 관찰하고 알아본 뒤에야 전이혁의 미래 아내로 선택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사진을 전이혁에게 건네주며 도아영에게 구애하도록 하게 한 것이다.“저도 모르겠어요. 할머니께서는 나이가 많으시지만 아직도 자주 돌아다니시니까. 우리가 감당하기도 힘들 정도로 말이죠. 다행히 할머니의 건강은 좋으시고 관리도 잘 되어서 겉으로 보기엔 예순 정도로 보이세요.“전이혁도 할머니가 어떻게 도아영을 선택하셨는지 모른다.도아영만 궁금한 게 아니라 고현과 여운초도 전씨 할머니께서 언제 그녀들을 눈여겨보셨는지 궁금해했었다.“그래서 저를 알게 되었고 저를 쫓아다녔던 거예요? 전이혁 씨가 저에게 한 행동이 애정 공세가 아니라고 하면 당신 스스로도 믿지 못하겠죠?”전이혁은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인정해요. 제가 당신에게 구애했다는 것을.”전이혁은 도아영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모든 면에서 그와 잘 어울렸으니까.하지만...“그런데 왜 한동안 사라지고 저를 무시했어요? 일부러 관심을 끌려는 작전이었던 거예요?”전이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전이혁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도망가려고 해도 너무 늦었다.그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자리에 앉아서 몸만 돌려 옆에 앉은 도아영을 돌아보았다. 전이혁의 깊고 검은 눈빛은 도아영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게 했다.이때 도아영은 몸을 굽혀 천천히 전이혁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전이혁은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도아영이 어떤 향수를 뿌리는지는 몰랐지만 강하지 않은 은은한 향기가 너무 좋았다.“전이혁 씨.”도아영은 그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다.“말해봐요, 듣고 있어요.”그도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대답했다.“제가 한 가지만 물을게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저를 대하는 거예요? 저에게 잘해주는 게 저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예요? 저에게 애정 공세를 하면서 왜 또 저를 무시하는 거죠?”전이혁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한 가지 물음보다 더 많이 물어본 것 같은데.”잠시 침묵이 흐른 뒤로 전이혁이 말을 이었다.“저도 제 마음이 어떤지 모르겠다고 하면 도아영 씨는 저를 나쁜 놈이라고 욕할 거죠?”그는 그녀에게 구애하고 싶었다.전이혁은 도아영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할머니의 눈썰미가 결코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없었다면 전이혁은 도아영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도아영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당당함, 대담무쌍함, 의협심, 기발한 성격, 고요할 때의 차분함과 활발할 때의 성격은 전이혁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았던 것이다.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그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바로 그 ‘여우 같은 여자' 말이다. 도아영 같은 재벌가 따님이 아니라.도아영의 아름다운 눈이 반짝이며 전이혁이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못할 것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전이혁을 내려다보았다.전이혁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순간 도아영의 동작과 표정이 마
“예정 언니, 벌써 다 드셨어요?”하예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우리가 좀 빨리 먹는 편이긴 하지. 평일엔 일이 바빠서 먹는 시간도 쪼개 써야 하다 보니 빨리 먹는 버릇이 생긴 것 같아.”도아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예정은 우빈의 손을 잡고 남편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로얄 스위트룸을 빠져나왔고 거기에 문을 닫아주는 센스까지 보였다.전태윤은 경호원들에게도 식사하고 휴식을 취하라고 지시했다.전이혁과 도아영은 이 모든 것이 하예정이 그들에게 특별히 남겨준 기회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제 로얄 스위트룸 안에는 전이혁과 도아영만 남았다.도아영은 와인잔을 들어 우아하게 음미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전이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역시 피할 수 없었군.'전이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도아영 씨,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도아영은 대답 대신 잔을 기울이며 그를 바라만 보았다.‘정말 잘생겼어...'그녀는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잘생겼다는 소문을 들었다. 실제로 본 전태윤도 키가 훤칠한 미남이었지만 지나치게 차가운 인상에, 인사할 때 잠깐 마주친 뒤로는 도아영을 전혀 쳐다보지 않았다.오직 하예정만 바라보는 모습에서 ‘아내 바보'라는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전태윤의 차가운 카리스마와 달리 전이혁은 훨씬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다.전태윤 앞에서 전이혁은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단둘이 있을 때면 전이혁의 우수함이 빛을 발했다. 그는 도아영이 만난 남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였다.전이혁이 잘해줄 때면 도아영은 그에게 정말 빠져들 것만 같았지만 그녀를 소홀히 대할 때면 화가 치밀어 주먹으로 그를 한 대 패주고 싶을 지경이다.‘내가 무슨 애완동물도 아니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애완견이야?'마음 내키면 그녀와 잠시 놀아주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버리는 그의 태도에 도아영은 서서히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전이혁은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전이혁 씨, 왜 자리
하예정은 두 사람 사이의 암투를 모른 척하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좋은 술 두 병 시킵니다. 저는 임신 중이라 못 마셔요. 우리 배 속의 아기 건강 생각해서라도 저는 술을 마시지 못하거든요. 태윤 씨도 술을 잘 마시지 않기 때문에 이혁 도련님이 도아영 씨랑 같이 마실 수밖에 없네요. 도련님, 아영 씨를 잘 모셔야 해요. 저와 태윤 씨가 있으니 도련님이 취해도 괜찮아요. 저희가 책임질게요.”하예정은 도아영에게 윙크했다. 도아영은 슬쩍 OK라는 사인을 보내며 자신 있다는 듯 웃었다.하예정은 그제야 도아영의 주량이 꽤 괜찮음을 눈치채고 안심했다. 하예정은 도아영이 전이혁에게 꼬치꼬치 캐묻다가 술에 취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인데 도아영이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니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술과 여러ㅓ 요리가 나오자 도아영은 직접 전이혁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자! 전이혁 씨, 건배하죠.”전이혁은 잔을 받지 않고 오히려 도아영의 잔을 가져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도아영 씨, 공복에는 술에 취하기 쉬워요. 이 술은 독해서 마실 땐 괜찮다가도 나중에 훅 가버릴 수 있어요. 먼저 요리들을 좀 드시고 또 국물도 한 그릇 드세요.”그 말과 함께 전이혁은 도아영에게 국물을 떠주었다.“국물부터 드셔보세요.”도아영은 평소 국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전이혁이 떠준 거라 예의상 한 수저 떠먹었다.“하 대표님, 이 국물이 정말 맛있네요. 저 원래 국물을 잘 안 마시는데 이 국물은 진짜 맛있어요.”“그럼 많이 드세요. 우리 집은 항상 식사 때 국물을 준비하는 게 습관이에요.”하예정은 우빈에게도 국물을 떠주며 물었다. 식습관은 바꾸게 하기 어려운 법이다.도아영은 관성의 사람이 아니라서 관성의 식습관과 달랐다.국물을 마시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이 국물이 맛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니 그 국물이 정말로 맛있었던 모양이다.“몇 살이에요? 동갑인 것 같은데.”“하 대표님이랑 같은 해에 태어났어요. 제 생일은 연말이라 하 대표님보다 몇 개월 어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