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문을 여니, 조심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전태윤의 잘생긴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평소 늘 엄숙한 얼굴을 하고 있던 그가 갑자기 억지웃음을 지으니 가식적으로 보였다.“여보, 갈아입을 옷을 가져왔어.”전태윤은 두 손으로 옷을 받쳐서 들고 있었는데, 한 벌은 잠옷이고, 또 한 벌은 내일 입을 옷이었다.“내가 방안까지 가져다줄까?”하예정은 옷을 받아 들고 두 걸음 뒤로 물러서더니 방문을 쾅 닫아버렸다. 그를 들여놓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전태윤은 떠나지 않고 문어구에 서서 속으로 시간을 계산하며, 그녀가 다시 문을 열 거로 생각했다.과연, 2분도 안 되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그는 허리를 펴고 잘생긴 얼굴에 다시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문을 여는 순간, 부드럽게 말했다.“여보, 뭐 더 필요한 거 없어? 편하게 말해, 오늘은 내가 다 서비스해 줄 테니.”“옷 서너 벌과 다른 생활용품도 더 가져다줘요.”“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금방 가져다줄게.”빠른 걸음으로 돌아서 간 전태윤은 조금 지나 물건들을 가지고 다시 돌아왔다.“여보, 뭐가 빠졌는지 한번 확인해 봐, 내가 바로 가져다줄 테니.”얼추 살펴본 하예정은 다시 뒤로 물러서며 문을 닫으려고 했다.“여보”전태윤은 한쪽 다리를 문 안에 들여놓고 몸으로 그녀가 문을 닫지 못하도록 막으며 손을 비비며 애원했다.“여보, 비록 봄이라지만 요 며칠 날씨가 추워. 이 방에 보일러도 없는데, 당신 혼자 자면 추울 거야. 내가 당신의 보일러가 돼줄까? 절대 허튼짓하지 않을게.”하예정은 뻔뻔한 전태윤의 말에 어이없어 웃음을 지었다.이 사기꾼한테 이런 모습도 있다니...“여보, 제발 나란 보일러를 들여보내 줘. 봐, 방이 이렇게 큰데 당신이 창문을 닫아도 몹시 추울 거야. 지금 바로 이 보일러가 필요할 때잖아.”“필요 없어요! 당신 그 다리 치워요! 안 그러면 내가 닫는 문에 다리가 부러져도 상관 못 해요. 그럼 나도 당신을 버릴 이유가 생겨서 좋네요.”“여보!”“여보라고
전태윤의 낯빛이 어두워졌다.“예정아, 나도 모든 걸 속인 건 아니야. 어떤 말은 진심이었어. 널 사랑한다는 말은 무조건 진심이야.”“그래요, 사랑하겠죠. 날 속이는 걸 사랑할 뿐이죠. 비켜요! 안 비키면 다리를 확 부러트릴라!”하예정이 싸늘하게 말을 내뱉은 후 문을 확 닫았다.전태윤은 감히 고육지책을 쓰지 못하고 얌전히 발을 거두어들였다. 그는 하예정이 방문을 안으로 잠그는 걸 덩그러니 지켜보았다.그는 한참 후에야 제방으로 돌아가 샤워를 마치고는 싱글 소파를 들고 다시 하예정의 방문 쪽으로 걸어갔다. 이어서 이불까지 챙겨와 소파에 앉아서 문을 막고 자려고 했다.그가 잠든 후에 하예정이 몰래 빠져나가서 담벼락을 뛰어넘을까 봐 불안했던 것이다.아니나 다를까 하예정은 진짜 그럴 생각이 있었다.밤이 깊어지자 그녀는 몰래 문 쪽에 다가와 가볍게 문을 열었는데 전태윤이 글쎄 소파에 앉아 이불을 덮고 자고 있었다. 화들짝 놀란 그녀는 곧장 문을 닫았다.“사기꾼! 이 사기꾼아, 어떻게 문까지 막을 수 있어.”하예정은 그를 수만 번도 더 욕했지만 결국 아무 가망 없이 순순히 침대로 돌아갔다.기분이 상한 탓인지 그녀는 줄곧 악몽만 꿨다. 꿈에서 밤새도록 전태윤과 싸웠는데 다음날 깨났을 때 그녀조차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렸다.눈가가 촉촉이 젖어있어 손으로 쓱 만져보았더니 눈물이 흥건했다.밤새 다투는 꿈을 꾸다 보니 아마도 꼬박 운 듯싶었다.그녀는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밤새 문 앞을 막고 있던 전태윤도 깨나서 방문을 두드렸지만 하예정이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는 문 앞에 한동안 서 있다가 결국 소파를 들고 제 방으로 돌아갔다.“띠리링...”전태윤의 휴대폰이 울렸다.그는 액정을 힐긋 보더니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정남아, 좋은 방법 생각해놨어? 얼른 말해봐. 내가 어떻게 해야 예정이가 용서해줄까? 인제 그만 냉전 하고 싶단 말이야.”소정남이 물었다.“나 지금 전화 끊어도 돼?”전태윤의 낯빛이 확 어두워졌다.“태윤아, 너희 부부 지
전태윤은 그를 이곳에 오게 할 수 없다.성기현은 아직 그가 하예정의 인신 자유를 제한하고 있다는 걸 모른다. 아마 그녀가 성기현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을 하지 못한 듯싶다. 만약 성기현이 집에 오면 바로 알아버린다.전태윤은 딴 사람들이 전혀 안중에 없다.다만 성기현 모자는 경시하면 안 된다.이경혜는 하예정의 이모이자 그녀의 친정 어르신이다.하여 하예정을 대신해 앞장설 자격과 이유가 충분하다.“알았어, 그렇게 전할게.”소정남은 얼른 전화를 끊었다. 자칫 머뭇거리다가 전태윤이 또다시 그에게 방법을 구할까 봐...정작 그의 제안은 들어주지도 않으면서 대체 어쩌라는 건지!전태윤은 곧바로 별장을 나섰다. 그는 장씨 아저씨에게 하예정의 아침을 꼭 챙기라고 했다.게다가 경호팀 절반을 별장에 남겨두었다. 그가 집을 비운 사이에 하예정이 도망칠까 봐 경호원들에게 문단속을 단단히 시켰다.40분 후.전씨 그룹, 대표 사무실.전태윤과 성기현은 거의 나란히 사무실에 들어섰다.전태윤은 곧게 본인 책상 앞으로 다가가 검은색 의자에 앉았고 성기현도 뒤따라오며 제멋대로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조 비서가 두 사람에게 각각 온수 한 잔씩 따라왔고 투명인간처럼 바로 물러갔다.두 명의 대표는 전부 험상궂은 얼굴이었고 소정남마저 감히 구경하러 오지 못했으니 조 비서는 더더욱 남아있을 엄두가 안 났다.“전 대표, 내가 한 말 귓등으로 흘렸어요? 소현이가 아직 전 대표에 대한 감정을 완전히 내려놓지 못했는데 예정이한테 싹 다 털어놓은 거예요? 다들 소현이 생각은 전혀 안 하나요? 내일이면 곧 돌아와요. 가장 친한 친구가 라이벌이 되어 자신이 제일 사랑한 남자를 빼앗아간 사실을 알게 된다면 소현이는 아마 미쳐버릴 거라고요.”성기현은 너무 화나서 거침없이 말을 내뱉었다.전태윤이 신분을 밝힌 후 하예정이 어떤 반응이었는지 아직 기사가 나오지 않았다. 성기현은 그녀에게 연락해보려고 했지만 배터리가 다 되어 휴대폰이 꺼진 상태였다. 그는 하예정이 기자들에게 방해받고 싶지 않아 일부
한참 후, 성기현이 물었다.“예정이는 전 대표의 신분을 알고 어떤 반응이던가요? 도통 전화를 받지 않네요. 계속 꺼진 상태에요.”전태윤이 비난 조로 말했다.“역시 뒤늦게 찾은 사촌 동생이다 보니 신경을 덜 쓰는군요. 예정의 휴대폰은 어젯밤부터 통화 가능했어요. 계속 꺼진 상태라고 하는데 과연 전화를 몇 통이나 걸었어요? 예정이가 무슨 반응인지 성 대표한테 알려줘야 해요? 그건 나랑 예정이 사이의 일이지 당신들이랑 무관해요.”이경혜가 하예정의 이모라고 해도 다들 금방 친척관계인 걸 확인했으니 그다지 정이 깊지 않다.전태윤은 오직 하예진만이 그를 질책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성씨 일가의 사람들은 아직 그럴 자격이 없다.성기현은 말문이 막혀서 또 한참 침묵하다가 겨우 말했다.“전 대표, 오늘 이렇게 찾아와서 번거롭게 굴었네요. 내가 한 말도 조금 이기적이었어요. 그저 소현의 기분만 고려했지 예정의 기분은 미처 고려하지 못했어요. 전 대표는 나보다 예정이에 대해 더 잘 알 테니 걔가 어떤 성격인지도 알고 있겠죠. 전 대표의 신분을 알게 된 후 예정이가 만약 달갑게 받아들인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고 만약 화를 낸다고 해도 걔를 원망하지 말고 생각을 할 시간을 좀 줘요. 난 비록 예정이에 대해 잘 모르지만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도 쭉 밝은 성격으로 살아온 건 예정이가 아주 강한 사람이란 걸 말해주잖아요. 인생의 풍파를 늘 웃어넘기잖아요. 그러니까 전 대표가 거짓말한 것도 예정이는 꼭 태연하게 마주할 거예요.”성기현이 하예정을 위해 말해주자 전태윤은 오히려 침묵했다.그가 아무 말 없으니 성기현도 입을 다물었고 사무실 안에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전태윤이 갑자기 낮은 목소리로 성기현에게 물었다.“그해, 성 대표 아내가 성 대표에게 구애하는 걸 포기했을 때, 어떻게 아내분 마음을 되돌려서 계속 사랑하게 했나요?”성기현이 두 눈을 껌뻑였다. 전태윤은 지금 그에게 경험을 묻는 걸까? “진심은 꼭 통한다고 봐요. 아내가 애초
“만약 두 달 전이라면 나도 예정 씨가 쿨하게 이혼하고 뒤도 안 돌아볼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쉽게 이혼하지 못할 걸. 감정이라는 게 어찌 그리 쉽게 내려놓을 수 있겠어.”소정남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오지랖 넓게 물었다.“예정 씨 임신은 했어?”전태윤이 답했다.“아직이야...”둘은 피임조치도 안 취했고 전태윤도 애 만들려고 열심히 노력했지만 종무소식이었다.아직 아이와 인연이 닿지 않은 듯싶다.“아이가 없으니 오직 너 스스로 해결해야겠네. 태윤아, 넌 어리석은 게 아니야. 일이 발생하고 지금까지 네가 했던 일련의 행동들은 단지 너의 본능적인 반응이야.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봐, 네가 만약 예정 씨였다면 감쪽같이 속은 후 감금을 당하고 기절까지 했는데 너라면 무슨 기분일 것 같아? 지금은 네가 거짓말을 한 것 때문에 골치 아파할 때가 아니야. 이 문제는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문제야. 중요한 건 네가 잘못을 저지른 후 일련의 행위가 예정 씨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거야. 이혼이 두려워서 감금하면 예정 씨가 생각이 바뀔 것 같아? 두 사람 사이의 갈등만 점점 더 격화될 뿐이야.”“예정 씨 그만 풀어주고 떨어져서 며칠 지내. 너희 부부 지금 마음을 식힐 필요가 있어. 너도 차분하게 잘 생각해봐. 이후에 어떻게 해야 예정 씨가 다시 널 믿어줄지. 이번에 거짓말한 일로 예정 씨는 너에 대한 신뢰가 전부 깨졌을 거야. 예정 씨도 일단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서야 네가 그간 잘해줬던 것들과 두 사람이 함께 쌓아온 추억들이 생각날 거야. 그리고 매번 예정 씨가 어려운 일에 부딪혔을 때 네가 옆에 있어 주고 묵묵히 도와줬어. 이것들도 다 너희 부부가 쌓아온 추억들이야.”“네가 잘해준 것들을 되새길 때 그때 너도 다시 분발해서 깨졌던 믿음을 조금씩 쌓아 올리란 말이야. 그러면서 슬슬 화해하는 거 아닐까? 너 계속 예정 씨를 감금하면 예정 씨도 온통 너의 단점들만 되뇌고 너에게 속았다는 사실만 곱씹을 거야. 그러면 네가 잘해줬던 일들은 아예 생각도 안 날
“예정 씨가 지금 이혼을 언급해도 전혀 불안할 것 없어. 두 사람 아직 실천에 옮기지도 않았잖아. 고작 이혼합의서를 쓴 것뿐인데 뭐가 두려워? 이혼절차를 밟지 않는 한 두 사람 충분히 되돌아설 여지가 있어. 네가 어떻게 처리하는가에 달렸지. 한번 잘 생각해봐. 난 나가서 먹을 것 좀 사 올게. 거울 좀 봐봐, 고작 하루 사이에 예전의 카리스마를 전부 잃고 의기소침해졌잖아. 보는 내가 다 속상해. 어휴, 너 차라리 날 사랑하지 그랬어. 그랬더라면 난 절대 널 이렇게 힘들게 하지 않았을 텐데.”전태윤이 책상 위의 물건을 집어 들고 소정남에게 내던졌다. 그는 어이가 없어 실소를 터트리며 질책했다.“난 여자를 좋아하니까 작작 꼬드겨. 효진 씨가 너 이러는 거 알면 바로 마음 접을걸.”그가 웃자 소정남이 말했다.“웃는 걸 보니 나도 마음이 놓이네.”소정남은 나가서 전태윤이 먹을 음식을 사 왔다.전태윤은 마음이 따뜻해졌다.소정남이라는 친구가 있다는 게 너무 행복하고 뿌듯했다.사무실에 홀로 남은 전태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가더니 저 멀리에 있는 고층건물을 바라보았다.한 걸음 물러나면 모든 게 해결된다고 했거늘 정말 그가 너무 꽉 잡고 있었던 걸까?뒤로 두어 걸음 물러서면 바로 해결될까?전태윤은 소정남과 처형이 했던 말을 곰곰이 되새기더니 자신의 행동이 정말 하예정과의 관계만 악화시키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처형이든 심효진이든, 또 혹은 소정남이든 전부 똑같은 말만 했다. 하예정은 절대 문제를 회피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단지 지금 마음을 진정시킬 필요가 있다고 말이다.처형은 그가 모래알을 꽉 잡듯이 하예정을 잡고 있는데 세게 잡을수록 모래는 더 빨리 새어나간다고 했다.그를 타일렀던 사람들은 전부 그가 지나치게 일방적이란 걸 암묵적으로 일깨워줬다.“띠리링...”전태윤의 휴대폰이 울렸다.장씨 아저씨한테서 걸려온 전화였다.전태윤은 하예정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황급히 전화를 받았다.“도련님, 사모님 친구분 심효진 씨가 오셨어요..
전태윤은 조 비서가 안고 있는 서류 뭉치를 보면서 분부했다.“전이진한테 보내서 처리하라고 해. 만약 결정을 못 내리겠으면 걔더러 할머니를 찾아가라고 전해. 그리고 나 요즘 회사에 자주 못 나오니까 걔한테도 말해. 전이진도 전씨 가문의 남자이니 마땅히 날 위해 전씨 그룹의 중임을 분담할 의무가 있어.”조 비서가 알겠다며 머리를 끄덕였다.대표님은 수중의 업무를 내려놓고 오롯이 사모님께 전념하려는 걸까?전태윤은 비서에게 분부한 후 엘리베이터로 성큼성큼 걸어갔다.몇 분 후, 그는 전용차를 타고 전씨 그룹을 떠났다.그 시각 조 비서도 부대표 사무실 문을 두드리고 안에 들어가 전태윤이 한 말을 모조리 전이진에게 전했다.전이진은 조 비서가 안고 있는 한 뭉치 서류를 보더니 표정이 확 굳었다.“여기 놓고 가. 다 처리하면 가지러 오라고 다시 통지할게.”“고마워요, 부대표님. 아 그리고 대표님께서 요즘 회사에 자주 못 나오시고 부대표님도 전씨 가문의 남자이니 마땅히 대표님을 위해 전씨 그룹의 중임을 분담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전이진이 이해한다는 듯이 대답했다.“알았어. 가서 볼일 봐.”그는 일찌감치 예감이 들었다.큰형은 형수님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회사의 중임을 그에게 맡길 게 뻔하다.아홉 형제 중에서 전태윤과 전이진만 회사의 핵심 인물이다. 다른 남동생들은 계열사를 책임지거나 호텔 운영을 책임지고 또 일부는 아예 가족 기업에서 근무하지 않고 스타트업에 뛰어들었다.전태윤이 여유가 없으면 전이진이 나서야 한다.게다가 그는 아직 솔로이니까!듣기로 할머니가 최근에 그와 어울리는 여자친구를 사방으로 물색하고 있다고 한다...전이진은 몸이 움찔거렸다. 큰형이 사랑의 늪에 빠지더니 이성까지 잃었다. 그는 쭉 이렇게 솔로로 지내는 것도 좋을 듯싶었다.만약 그 언젠가 정말 결혼하게 된다면 전이진은 상대에게 자신의 진짜 신분을 솔직하게 밝히리라 다짐했다. 절대 큰형처럼 신분을 숨기지 않을 것이다.전태윤의 일은 전씨 일가의 형제들에게 큰 깨우침을 줬다.
전태윤의 눈가에 슬픔이 스쳤지만 어제처럼 격하게 반응하진 않았다.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예정아, 정말 저 동물들을 키우고 싶어? 그럼 내가 장씨 아저씨더러 길을 안내해서 너랑 효진 씨를 데리고 우리 집 과수원들을 구경시켜줄게. 닭을 키우기 적합한 곳이 있으면 바로 거기서 키워. 네가 직접 돌보고 싶으면 직접 돌보고 그게 아니면 도우미들이 돌봐줘도 돼.”하예정이 미간을 찌푸렸다.“구정 때 당신 본가에서 보냈는데 과수원을 전혀 못 봤어요.”“서원 리조트 옆에 산이 몇 개 있는데 과수를 많이 심었어. 그게 바로 과수원이야. 거긴 우리 집안의 대저택이라 매년 구정 때마다 거기서 보내.”시댁에 뜬금없이 리조트가 하나 생겨도 하예정은 더이상 놀랄 것 없었다.갑부니까.모든 분야로 돈만 벌 수 있다면 그들은 전부 섭렵할 것이다.“날 이 별장에서 내보내려고요?”하예정은 뒤늦게 전태윤의 말에서 요점을 포착했다.전태윤은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녀도 마주 봤다. 부부가 서로 마주 본 순간 하예정은 그제야 전태윤도 요 이틀 얼마나 수척해졌는지 알아챘다. 그녀가 힘든 만큼 그도 똑같이 괴로웠다.“예정아, 미안하단 말을 수없이 해왔지만 그래도 여전히 사과하고 싶어. 널 그렇게 오랫동안 속이지 말아야 했어. 나에 대한 믿음이 다 깨졌잖아. 지금 당장 날 용서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내는 건 바라지도 않아. 단지 나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내가 그 믿음을 다시 쌓아 올릴 수 있게. 그리고 쉽게 이혼 얘기를 꺼내지 말아 줄래?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너무 아파.”진짜 이혼할 지경에 이르지 않는 한 말다툼하고 감정이 격해질 때 이혼 얘기를 꺼내면 상대의 마음에 비수를 꽂는 것과 다름없다.하예정은 한참 침묵한 후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나 지금 머리가 너무 복잡해서 내가 한 말과 행동에 가끔 후회하기도 해요... 태윤 씨, 나 인제 더는 태윤 씨랑 할 얘기 없으니까 제발 여기서 나가게 해줘요. 돌아가서 마음을 좀 진정하고 싶어요. 우리 결혼 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