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남편에게 시집와서부터 30여 년 동안 줄곧 남편의 사랑을 받고 지냈다. 아직도 남편의 눈엔 아내인 그녀가 제일 소중한 존재이다.장소민이 한참 침묵하다가 말을 이었다.“왜? 엄마가 너 음식 하는 거 보고 네 마누라 게으르다고 잔소리할까 봐 그래? 출장 다녀와서 바로 회사 돌아가는 건 제쳐두고 며칠 내내 독감에 걸렸다가 인제 겨우 호전됐는데 어떻게 너한테 요리를 시켜? 엄마가 너더러 아내를 너무 아낀다고 뭐라 하는 건 아닌데 그래도 도가 지나치면 못써. 그러다 버릇 나빠져서 제멋대로 굴 수 있어. 나중에 잘난 척하며 밖에서 설쳐대다가 여기저기 사고 치고 다니면 어떡해?”전태윤의 낯빛이 확 어두워졌다.“알았어, 예정이 험담 안 할게. 네 표정 좀 봐, 엄마가 몇 마디 했다고 바로 정색하는 거야? 지금 그렇게 변했다는 게 아니라 미리 충고만 했을 뿐인데 너 자꾸 심각한 표정 지을래?”장소민은 하예정이 전씨 일가가 재벌 가문인 걸 알게 되어 팔자가 폈다고 괜히 흥분할까 봐 걱정됐다. 만에 하나 신분 상승했다고 밖에서 사고라도 치면 결국 전태윤이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뒷수습할 테니까.아들에게 몇 마디 주의를 환기했을 뿐인데 잘생긴 얼굴이 확 어두워졌다.“엄마는 예정이랑 함께 지내보지 못해서 그 애 인품을 잘 몰라요. 하지만 제 안목은 잘 아시잖아요. 예정이는 절대 신분이 높아졌다고 사람들을 하대할 성격이 아니에요.”하예진 자매는 부와 권력을 모두 거머쥔 이경혜 이모가 나타나도 마냥 겸손할 따름이다. 상류층 사람들만 그녀들이 이경혜의 외조카란 사실을 알 뿐, 외부인들은 전혀 모른다.아 참, 주씨 일가는 알고 있다.주형인의 부모와 누나는 지금쯤 후회가 사무치게 밀려올 것이다.전태윤의 압박으로 그들은 곧 직장을 잃게 된다.그때 되면 주씨 집안 사람들은 더더욱 후회할 것이다.“믿어, 엄마는 당연히 믿지. 방금 한 말 두 번 다시 안 할게.”장소민은 아들이 화내는 걸 원치 않았다.“너 컨디션 좋아 보인다, 살도 조금 찐 것 같네? 예정이가 잘 챙겨
다만 제 아들이 아내에게 이토록 자상하게 대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말이 아니었다.다행히 며느리가 아들보다 더 살가웠다.“그래, 맛 좀 보자.”장소민은 하예정이 집어준 요리를 흔쾌히 한 입 먹었다.아들이 한 요리가 며느리가 한 것보다 더 맛있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렇게 하는 건 너무 양심에 찔렸다. 그녀는 잠시 고민한 후 결국 솔직하게 말했다.“태윤의 요리 솜씨는 예정이보다 못해. 앞으로 시간 나면 좀 더 많이 연습해서 예정이한테 맛있는 음식을 차려줘.”그렇게 하면 부부의 감정도 더 승화할 테니까.“다만 평소엔 출근하느라 업무가 바쁘다 보니...”“그건 걱정 말아요, 어머님. 평일엔 절대 태윤 씨를 주방에 얼씬거리지도 못하게 할 거예요.”두 사람은 현재 숙희 아주머니와 함께 지낸다.하예정의 말을 들은 장소민은 매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엄마, 이 새우 드시려고요?”전태윤이 엄마한테 물었다.“엄마는 밥 다 먹고 왔어. 예정이가 너희 부부 요리 솜씨를 평가해달라고 해서 맛본 거야. 두 사람 먹고 있어. 난 TV 보러 간다.”장소민은 접시에 담긴 음식을 다 먹은 후 수저를 내려놓고 주방에서 나왔다.전태윤은 엄마가 나가자 다 바른 새우 한 접시를 하예정의 앞에 내밀며 다정하게 말했다.“여보, 천천히 먹어. 이 국물도 많이 마셔야 해. 몸보신하는 거야.”그는 눈썹을 들썩거리며 하예정에게 말했다.그런 그의 표정에 하예정은 너무 웃겨 하마터면 밥을 내뿜을 뻔했다.진지하기만 하던 그가 눈썹을 들썩거리는 날이 오다니.하예정은 마른기침을 두어 번 한 후 재빨리 거실 쪽을 바라봤다. 장소민이 우아하게 소파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자 그녀는 또다시 감탄을 연발했다.‘어머님은 기품이 차 넘쳐. 드라마에 나오는 사모님들보다 더 고고하셔. 앉아 있는 제스처까지 어떻게 저리도 우아하지?’전태윤이 가까이 다가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괜찮아, 우리 엄마 몰래 훔쳐보지 않아.”할머니가 계시면 두 사람을 곁눈질할 수도 있다.다만 장소민은 어릴
식사를 마친 후.전태윤이 그릇을 치우고 하예정이 식탁을 닦았다. 그녀는 의자까지 가지런히 정리한 후에야 주방에서 나와 시어머니의 맞은편에 앉았다.그녀는 시계를 보며 어머님께 말했다.“어머님, 차를 마당에 들여오고 오늘 밤은 여기서 지내세요.”“아니야, 이따가 돌아갈 거야. 내가 집에 없으면 네 아빠가 적응 못 해.”큰아들이 회사를 전수한 후 그녀의 남편은 회장 자리에서 물러나 부부가 종일 함께 지냈다. 아내가 집에 없는 건 진짜 적응하기 어려웠다.하예정은 시부모님의 감정이 너무 부러웠다.젊은 시절부터 함께 해온 부부가 늙어서도 옆에 있어 주니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결국 옆에 남는 건 배우자일 뿐이다.“어머님, 전에 태윤 씨가 이 별장을 샀다는 걸 아예 몰랐어요. 저한테 줄곧 안 알려줬거든요. 며칠 전에 겨우 말하더라고요. 이 별장은 발렌시아 아파트보다 훨씬 커서 저희 두 사람이 지내기엔 텅 빈 느낌이 들어요. 어머님, 아버님도 오셔서 함께 지내면 안 될까요?”장소민은 살짝 의외인 듯싶었다.“너 정말 시댁 식구랑 함께 살고 싶어?”대부분 젊은 며느리들은 시부모님과 함께 지내는 걸 꺼린다.며느리가 아니라 제가 낳은 세 아들도 어른이 되니 뿔뿔이 독립하고 본가에 돌아와 그들과 함께 있으려 하지 않는다.젊은 세대의 삶과 노년의 삶은 엄연히 다르니까.“네, 저는 괜찮아요.”장소민이 웃으며 말했다.“다만 태윤이가 우리랑 함께 지내는 걸 안 좋아해. 우린 그냥 본가에서 지내는 게 나아. 너희 젊은이들 방해하지 않고 말이야.”장소민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하예정을 탐탁지 않게 느끼는데 함께 지내다 보면 단점들이 더 확대될 것이고 며느리가 더 싫어질 수 있다.차라리 지금처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게 낫다. 하예정도 시어머니를 좋게 생각하고 그녀도 종일 며느리의 단점만 따지고 들지 않을 테니 서로에게 좋은 선택이다.전태윤이 나온 후 장소민도 자리를 뜨려 했다.“태윤아, 엄마 바래다줘.”하예정이 자동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 시어머니
장소민은 아들을 물끄러미 쳐다봤다.“네 일은 네가 알아서 해. 엄마는 단지 미리 충고할 뿐이야. 이만 돌아갈게, 네 아빠가 걱정하시겠어. 구정 때 너희 부부 돌아올 거지?”“할머니께서 말씀 안 하셨어요? 저 구정 전날에 예정이 데리고 본가로 가서 설 연휴 보낼 거예요.”“본가? 아, 그 본가를 말하는 거야? 어쩐지 요즘 너희 할머니가 자주 그리로 다니시더라니.”전태윤이 하예정을 데리고 전씨 일가의 진정한 본가에 돌아가 설 연휴를 보내기로 했다. 그곳은 아주 오래된 건물이다 보니 낡고 색이 바랬다.“너 언제까지 숨길 셈이야?”“엄마, 내가 다 생각이 있어요. 나중에 관성 전체에 나랑 예정이가 부부 사이란 걸 알릴 거예요.”그리고 결혼 준비도 이어갈 계획이다.전태윤의 계획은 완벽하나 현실은 어떻게 될지 미지수다.장소민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이만 돌아갈게.”“운전 조심하세요. 다음에 올 땐 미리 전화 주세요. 엄마 며느리를 놀라게 하지 말고요.”장소민이 겨우 말을 이었다.“날 악덕 시어머니로 몰아가지 마. 예정이 걔 호락호락한 애가 아니던데, 나랑 기 싸움까지 하고 말이야. 내가 어찌 걔를 놀라게 할 수 있겠어?”전태윤은 침묵하다가 엄마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새삼스럽게 왜 이래?”“며느리 흠집 찾지 않아서 고맙다고요.”장소민은 참지 못하고 발로 그를 가볍게 찼다.“엄마도 네가 잘 살길 바라. 너만 행복하면 돼. 예정이가 좋고 걔가 널 기쁘게 할 수만 있다면, 행복이 무엇인지 느끼게 해준다면 온몸에 단점투성이라도 엄마는 다 참을 수 있어. 기껏해야 친절하게 잘못된 점을 지적하겠지. 일부러 흠집 찾는 일은 없어.”화기애애한 전씨 일가에서 수십 년을 살아오다 보니 원래 심성이 착한 장소민도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젊었을 때보다 더 사리가 밝아졌다.굳이 흠집을 찾아내라면 큰아들네 부부가 서로 집안 배경이 너무 차이나고 그래서 하예정이 전태윤을 위해 조금 변화해주길 바랄 뿐이다. 예를 들어 예의범절을 배우고 재주도 여러 가지
성기현도 전화기 너머로 차갑게 말했다.“안 나오면 예정이한테 당신 정체 다 밝힐 거예요. 다른 건 숨겨도 다 괜찮지만 전씨 그룹 대표라는 사실을 숨기면 예정이 분명 엄청나게 화낼 거예요. 소현이까지 연루되는 일이니까요.”전태윤이 점점 더 일그러진 표정으로 쌀쌀맞게 말했다.“내가 간다고 했잖아요. 기다리기만 해요.”‘감히 날 협박해?!’“난 당신 사촌 형이에요. 먼저 가서 날 기다려야 하는 거 아닌가요?”전태윤이 싸늘하게 말했다.“더하루 호텔은 그쪽 집안 호텔이라 언제든지 갈 수 있잖아요. 장소 바꿔요 그럼. 관성 호텔에서 내가 미리 로얄 스위트룸 준비해서 당신 열렬하게 환영할게요.”“왜요? 찔렸어요? 두려워요? 일부러 이 형을 기다리게 하려고요?”“성기현 씨, 내 앞에서 형 노릇 작작 해요!”성기현이 하찮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난 원래 당신보다 나이도 많고 이젠 예정이까지 내 동생이 됐어요. 당신이 예정의 남편이 아니면 날 형이라 부르든 말든 아무 상관 안 해요. 하지만 예정의 남편이면서 날 형이라 부르지 않는 건 너무 예의 없는 행동이죠. 내가 예정이 앞에서 당신 해코지 할까 봐 두렵지도 않은가 봐요?”“감히 그러기만 해봐요!”성기현이 더 기고만장하게 웃었다.“못 그럴 게 또 뭔데요? 내가 정말 당신 같은 사촌 매부를 우러러보면서 한편으로 쩔쩔매는 것 같아요? 당장이라도 당신을 갈아치우고 싶다니까요. 내 동생한테 더 좋은 남자를 소개해주고 싶다고요.”“관성 전체에 나보다 더 훌륭하고 괜찮은 남자가 또 어디 있어요?”전태윤은 성기현이 그를 당장이라도 갈아치우고 싶어 한다는 걸 굳게 믿는다.지금 이 국면은 아무도 원하지 않으니까.“전 대표,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뻔뻔스러워졌어요? 당신이 관성 상업계에서 손꼽히는 인물이라는 건 알겠지만 그렇다고 관성에서 가장 잘난 남자인 건 아니죠.”전태윤이 담담하게 말했다.“유부남이 되면 다 뻔뻔스러워지는 법이에요.”성기현은 말을 잇지 못했다.그는 전태윤의 변화가 믿어지지 않을 지경이었
그는 전태윤과 전화에서 했던 말을 그대로 마누라에게 알려주었다. 마누라는 그제야 의심을 풀었고 그도 남녀를 가리지 않고 좋아한다는 혐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전태윤은 성기현이 만나자고 전화가 왔다는 사실을 하예정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는 방으로 돌아간 후 그녀와 함께 소파에 앉아 TV를 보았다.한참을 보다가 하예정이 하품하자 그는 바로 TV를 끄고 그녀를 안고 위층으로 올라갔다.방에 돌아간 후 그는 그녀와 함께 침대에 누워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가 더는 대답이 없자 고개를 돌려 쳐다보니 이미 꿈나라로 간듯하였다.전태윤은 몸을 반쯤 일으키며 가까이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하예정을 불렀다.“예정아, 예정아.”아무 반응이 없는 거로 봐서는 깊게 잠이 든 것 같았다.전태윤은 안심하며 그녀의 얼굴에 입을 맞추며 나지막이 말했다.“예정아, 잘 자.”그는 이불을 젖히고 침대에서 조용히 내려와 다시 하예정을 도와 이불을 덮고는 외투를 집어 들고 방을 나갔다.별장을 나온 후, 전태윤은 운전기사와 경호원에게 전화를 걸어 더하루 호텔 입구에서 그를 기다리라고 분부했다.성기현을 만나야 하는데 외적인 조건에서 상대방에게 져서는 안 되었다.성기현은 전태윤에게 새벽 0시에 더하루 호텔에 도착하라고 했고, 전태윤은 정말 1초도 늦지 않고 0시에 딱 맞춰 도착했다.“도련님.”경호팀은 전태윤을 보고 마중 나왔다.“가자.”전태윤은 차에서 내린 후 곧장 안으로 들어갔고 경호원들은 즉시 전태윤을 따라 더하루 호텔로 들어갔다.새벽이라 그런지 호텔 안은 조용했다.아니면 성기현이 미리 분부했는지 호텔 사람들은 전태윤의 도착에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전태윤은 귀빈 통로를 통하여 호텔 맨 위층에 도착했다.관성 호텔과 마찬가지로 더하루 호텔의 맨 위층에는 로얄 스위트룸이 있는데, 특별히 성기현을 위해 사용된다.맨 위층에 도착하자 전태윤은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여 로얄 스위트룸의 방문 앞에 도착했다.입구에는 검은 옷차림의 성씨 가문의 경호원이 두 명
“전 대표님.”그 경호원이 또 입을 열자, 전태윤은 그를 쳐다봤다.“저희 대표님께서 다른 이에게 심부름시키지 말고 직접 사 오면 더 성의 있어 보인다고 하셨습니다. 전 대표님께서 저희 대표님을 얼마나 존중하는가에 따라 하예정 씨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다고 하십니다.”말인즉, 전태윤이 직접 나가서 물건을 사지 않으면 성기현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고, 즉 하예정에 대한 사랑이 부족하다는 뜻이다.전태윤은 성기현의 괴롭힘에 이를 갈았는데, 하필 약점을 잡힌 셈이니 어쩔 수가 없었다.비록 하예정은 이경혜와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들 사이에 혈연관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성씨 가문을 마음에 두고 존중할 수밖에 없는 전태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서 첫 대면 선물을 사러 갔다.대형 슈퍼는 이미 오래전에 문을 닫았기에 24시간 영업하는 작은 슈퍼에 가서 물건을 살 수밖에 없었다.그는 경호원을 데리고 들어가 별생각 없이 보이는 대로 카트에 주어 넣었다.슈퍼의 점원은 갑자기 한 무리의 남자들이 엄숙한 표정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심지어 아이돌 스타처럼 잘생긴 전태윤의 얼굴을 보고도 혹시나 조폭을 만난 건 아닌가 하며 두려워했다.점원은 경계하며 수시로 경찰에 신고할 준비를 하였다.다행히도, 그들은 그저 진열대의 상품들을 한바탕 쓸어 카운터에 가득 쌓아 놓았고, 가장 잘생긴 얼굴에 가장 굳은 표정의 한 남자가 조용히 말했다.“계산!”조폭이 아닌 걸 확인한 점원은 마음을 놓았다.몇 분 후.전태윤은 경호원을 데리고 슈퍼를 떠났고, 경호원 모두가 손에 큰 주머니를 들었다.점원이 가게 안의 진열대를 훑어보니 그 사람들에 의해 거의 다 비워진 셈이었다.‘그 상품 중에는 생리대도 있는 거로 기억하는데, 남자 몇 명이 생리대를 사서 무얼 하려는 거지?’20분 후.전태윤은 비로소 성기현을 만났다.전태윤이 경호원을 데리고 물건들을 소탕하러 나간 동안, 성기현은 소파에 앉아 주전부리를 먹으며 TV를 틀어놓고 아주 한가하
무슨 물건인지 똑똑히 본 전태윤의 얼굴에는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다.그는 성기현의 괴롭힘에 마지못해 슈퍼에 갔고, 어떤 물건인지도 똑똑히 보지 않고 진열대를 깡그리 쓸어 가져왔다. 물건이 너무 많은 탓에 그중에 생리대가 끼어있는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아내가 있으니 가져다 써도 될 것 같네요.”전태윤이 생리대 봉지를 다시 성기현에게 던지자, 성기현은 참지 못하고 피식 웃었다.그 웃음소리에 전태윤은 당장이라도 일어나 덤벼들어 그의 목을 졸라 죽이고 싶었다.오랜 세월 동안 성기현을 상대하였지만, 그의 앞에서 이 정도로 난처한 경우는 없었다.성기현은 한참을 웃다가 겨우 웃음을 그쳤고, 자신의 배를 문지르며 전태윤에게 말했다.“혹시 절 웃겨 죽이고 제 재산을 물려받을 계획은 아니겠죠? 너무 웃어 배가 아플 정도네요.”“그럼 웃겨 죽기 전에 먼저 유언장을 작성하여 모든 재산을 저에게 상속해 줘요, 그다음 죽을 정도로 웃는다 해도 상관하지 않을게요.”이 말에 성기현은 또 웃었다.“제 재산이 마음에 차기나 하겠어요? 당신만큼 재산이 많지 않아서요.”“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그래도 자그마치 수천억이 되는데, 마음에 차다 말 다요.”더 앉아 있으면 진짜 웃겨 죽을 것 같던 성기현은 얼른 일어나 차를 타 주러 갔다.잠시 후, 그는 소파로 돌아와 차 한 잔을 진하게 따라 전태윤의 앞에 놓았고 자신한테는 미지근한 물 한 잔을 따랐다.한밤중에 차를 마시면 수면에 영향을 미쳐 잠을 못 자고 이튿날 출근할 정신이 없어질 것이다.전태윤은 마음속으로 성기현을 욕했다.이 정도로 진한 차라면 한 모금을 마셔도 밤에 잘 생각을 포기해야 할 것인데, 성기현은 스스로 미지근한 물을 마셨다.전태윤은 용이 개천에 빠지면 모기붙이 새끼가 엉겨 붙는다는 생각이 들었다.“절 이곳까지 부른 이유가 무슨 가르침이라도 있는 건가요”전태윤은 그 차를 마시지 않았다.여기서 몇 시간을 허비한다지만 그 차만 안 마시면 돌아가서는 아내를 껴안고 몇 시간 더 자고 출근할 수 있다.하지
“엄마.”고현은 진미리의 전화를 받았다.“현아, 퇴근했어?”“네, 막 퇴근하려고 그래요. 왜 그러세요?”“드레스 말고도 평소에 입을 옷도 몇 벌 더 사줄까?”고현은 생각하지도 않고 바로 거절했다.“필요 없어요.”고현은 단지 내일 저녁 연회에 드레스를 입고 참석하여 사람들에게 그녀가 사실 여자라는 것을 알려주어 전호영이 동성애자가 아닌 정상적인 남자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다. 사람들이 더는 색안경을 끼고 전호영을 보게 하고 싶지 않았다.다들 전호영이 고현을 삐뚤어지게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항상 색안경을 끼고 전호영을 바라보았으나 고현은 정상적인 남자라고 여겼다.진미리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왜 필요 없어? 여자 신분을 회복하려고 하는 거 아니었어? 내일 저녁에만 드레스 입고 계속 남자 옷을 입고 다니려고?”“네. 원래대로 다니려고요.”고현은 이제 그녀의 가짜 가슴 근육을 사용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약간 태평공주기 때문에 가슴 근육을 사용하지 않고 양복을 입어도 남자처럼 보였다.진미리는 계속해서 설득했다.“신분을 드러내기로 했는데 왜 또 남자 행세를 하려고 해? 얼마나 힘들어.”“엄마, 그건 제 습관이에요. 20년 동안의 습관을 단번에 고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엄마, 저의 요구대로 사주세요. 앞으로 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걱정하시려면 엄마 아드님 걱정 좀 하세요.”“빈이 그 자식은 걱정해도 소용없어. 그럼 엄마는 네 요구대로 드레스를 사줄게. 그리고 평소 입을 옷도 몇 벌 사 갈게. 옷장에 넣어두었다가 입고 싶을 때 꺼내서 입어.”“알겠어요.”“그래. 넌 퇴근해. 난 네 아빠랑 밥 좀 먹어야겠어. 네 아빠가 오랜만에 쇼핑하니 너무 힘들대. 먼저 밥 먹고 나서 다시 옷 보러 돌아다닐게.”진미리는 전화를 끊었다.고지호가 곁에 물었다.“현이가 싫대?”고진호 부부는 고현의 도도한 분위기에 어울리는 옷들을 많이 봤다.“현이가 싫다고 해도 우리가 집으로 사가서 현이 옷장에 넣어두
전호영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아니에요. 제가 고현 씨에게 꽃다발을 반년 넘게 보냈지만, 당신은 돈을 낭비한다면서 표정 한 번 변하지 않더니만 갑자기 이렇게 반응이 달라지니 놀라서 그러죠. 고현 씨가 제 꽃다발을 좋아한다고 하니 저도 기분이 너무 좋네요.”고현은 그를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몸을 일으켜 책상을 에돌아 꽃다발을 꽃병에 꽂았고 뒤로 몇 걸음 물러서서 보면서 말했다.“너무 예쁘네요. 이 꽃병에 마침 꽉 찼네요.”“그럼요. 저의 마음이니까요.”고현은 다시 돌아서서 책상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녀는 출근하기 전에도 책상 위가 깨끗해야 했고 퇴근할 때도 책상 위가 정연해야 했다.“가요. 밥 먹으러 가요. 예진 언니랑 노 대표님께서 오래 기다리게 해서는 안 돼요.”전호영은 그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으며 말했다.“제가 왔을 때 동명 형에게 전화했는데 예진 누나랑 지금 돌아오는 길이래요. 조금 먼 거리에 있어서 저희보다 조금 늦게 호텔에 돌아올 것 같다고 하더군요. 게다가 지금은 퇴근 시간대라 길이 막히기 쉽거든요.”두 사람은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고현은 남 비서에게 지시했다.“박 대표님께 미팅이 한 시간 늦어진다고 전해주세요.”“알겠습니다.”비서는 고현이 박 대표와의 미팅을 취소하는 줄 알았다. 다행히 박 대표와 미리 말을 해 놓았다.전호영은 고현에게 물었다.“저녁에도 또 일 보려고요?”고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전호영은 곧 그녀의 눈빛의 뜻을 알고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저도 사실 매우 바쁘거든요. 매일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놀부가 아니라고요.”전호영에게는 미래의 아내에게 구애하는 일도 큰일이었다.그는 매일 고현을 쫓아다니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정말 빈둥빈둥 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호영 씨는 제가 본 사람 중 가장 한가한 사람이에요. 전씨 할머니도 호영 씨보다 더 바쁘실걸요.”전호영은 걸어가면서 말을 이었다.“그건 그래요. 저는 우리 할머니에 비하면 덜 바쁘죠. 우리 어
저녁 무렵, 전호영은 그가 자주 사용하는 마이바흐를 몰고 제때 고씨 그룹에 들어섰다.고씨 그룹 건물 입구에서 차를 멈추었다.그는 꽃다발을 안고 차에서 내렸다.양복 차림의 전호영은 언제나 그랬듯 늘 멋졌다.“전 대표님.”그는 꽃다발을 안고 걸어 들어갔고 모두 그를 보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안부를 물었다.전호영이 지나가자 그 직원들은 웃음을 거두어들였다.전호영은 고씨 그룹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를 싫어하는지 잘 알고 있다.그의 신분이 높지 않았다면 그 직원들은 가짜 웃음조차 그에게 주기 싫었을 것이다.‘휴, 현이 씨가 여전히 여성 신분을 폭로하기 싫은 거로 보면 아무래도 내 노력이 너무 부족했나 싶다...’전호영은 계속 동성애자라는 누명을 쓰며 강성의 젊은 여성들의 증오와 미움을 견뎌야 했다.그러나 전호영은 곧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다.그는 고현을 따르기로 한 그날부터 단단히 마음 먹었다.남들이 뭐라고 하든 그는 아내를 쫓아다닐 거라고 다짐했다.이렇게 하면 사실 좋은 점도 있다. 바로 고현이 원래 여자였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기 때문에 진정한 연적이 없다는 점이다.그리고 여자 연적들에 대해서도 두려울 게 뭐가 있는가!고현의 여자 신분이 드러나게 되면 그 여자들의 마음은 아마 단번에 무너질 것이다.전호영은 그렇게 기분 좋게 엘리베이터에 들어가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엘리베이터에서 나온 전호영은 남 비서의 도움으로 문을 열고는 그녀에게 서프라이즈를 주려고 살금살금 들어갔다.“나가세요! 노크 다시 하고 들어와요!”고현의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전호영은 멈칫했다.고현의 청력이 정말 대단했다.“현이 씨...”고현은 고개를 들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전호영은 즉시 항복했다.“네네네, 나가겠나이다. 노크하고 다시 들어오겠나이다.”서프라이즈를 해주고 싶었지만, 고현은 문 여는 소리를 듣더니 다시 노크하고 들어오라고 했다.전호영은 어쩔 수 없이 사무실에서 나갔다.남 비서는 그가 들어가자마자 다시 나오는 모습을 보고 무
“그래, 일 봐. 엄마가 지금 네 아빠 불러서 함께 드레스랑 하이힐을 사러 갈게.”진미리는 기쁜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귓가에서 휴대전화를 떼자마자 진미리가 소리쳤다.“여보! 여보!”고진호가 밖에서 대답했다.“왜 그래?”고진호가 곧 밖에서 뛰어 들어왔다.“무슨 일이에요? 너무 큰 소리로 외쳐서 허둥지둥 달려왔는데.”“가요. 당장 옷 갈아입고 나가서 치마 좀 사요. 제가 직접 우리 딸을 위해 드레스를 골라줘야겠어요. 드디어 예쁜 치마를 사서 우리 딸을 예쁘게 꾸밀 수 있게 됐어요.”고진호도 웃으며 말을 이었다.“우리 현이가 그렇게 말했다고요? 너무 좋은 일이네요. 그럼, 사람 시켜 패션 디자인 사진을 가져오게 해요. 문 나설 필요 없이 사진만 고르면 되잖아요. 우리 현이가 입을 건데 당연히 가장 좋은 옷을 주문해서 제작해야죠.”“그러기엔 너무 늦었어요. 내일 저녁에 입을 드레스라서 시간이 안 돼요. 저한테도 드레스가 많지만, 중년 드레스라서 젊은이가 입기에는 어울리지 않아요. 우리 백화점에 가서 먼저 현물을 사고 나중에 천천히 주문 제작해요.”고진호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우리 현이가 치마를 입고 싶어 하다니... 호영이에게 미리 웨딩드레스를 맞추라고 알려줘야 겠어요. 그럼 곧 결혼할 수도 있겠네요. 우리도 큰 걱정거리를 해결할 수 있겠네요.”그리고 나서 고진호 부부는 집중적으로 매일 시시덕거리고 껄렁껄렁한 고빈을 혼내줄 수 있을 것이다.서른이 다 되어가는 고빈 주위에는 예쁜 미인들이 많지만 여자 친구는 단 한 명도 없었다.장녀 고현이 있기 때문에 진미리 부부는 잠시 고현의 인생 대사에 몰두하고 있었다.고현의 일이 곧 결실을 보게 되면 이번에는 고빈의 차례로 될 것이다.두 아이는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시각에 태어났다.“내일 저녁 현이가 드레스를 입고 연회에 참석하는 일은 당분간 호영에게 알리지 마세요. 제 생각에는 현이도 갑자기 치마를 입고 여성 신분을 모두에게 알리려는 것을 호영이가 모르는 것 같더라고요.”진미리는
“엄마, 사실 나도 좀 망설여져요.”고현의 말을 들은 진미리는 황급히 말을 이었다.“망설일 필요 없어. 너 원래 여자이고 원래 치마 입어도 되는 신분이야. 네가 20년 이상 남자 옷을 입었으니 진작 여자 옷을 입었어야 했어. 호영이도 네가 드레스를 입고 연회에 함께 참석하는 것을 알면 얼마나 기뻐하겠어. 그때 가서 다들 네가 여자라는 걸 알게 될 거고 너희 둘이 게이라고 수군대지도 않을 테고. 사실 사람들이 나한테 네가 그토록 훌륭한데 호영 때문에 삐뚤어진다는 말을 했거든. 네가 정상인데 호영 때문에 게이로 되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난 사실을 그들에게 진실을 알려주고 싶었어. 그런데 넌 여자 신분을 되찾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에 엄마는 늘 참고 있었지. 그리고 그런 말 하는 사람들을 멀리할 수밖에 없었어.”진미리 부부도 사실 큰 스트레스를 이겨내고 있었다.다른 사람의 말들은 고진호 부부가 무시하고 멀리하면 그뿐이지만 친척과 친구들이 와서 설득할 때면 그들은 정말 어쩔 수 없었다.진미리는 결국 고현이 이제 성인이 되었으니 딸이 행복하면 그뿐이라면서 딸의 의사를 존중해 주겠다고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이 때문에 그 친척들은 몇 년 지나면 고현이 후회할 것이라고 화를 내면서 진미리가 고현을 그대로 내버려 두면 고빈도 따라서 게이로 될 것이고 따라서 손주를 안고 싶어 해도 기회가 없을 거라는 심한 말을 내뱉기도 했다.이는 진미리를 화나게 했지만 그렇다고 또 어쩔 수도 없었다.“엄마가 좀 이따가 드레스 몇 벌 골라줄게. 네 취향대로 골라봐. 액세서리는 새것으로 살래? 엄마가 몇 벌 골라줄까? 하이힐도 몇 켤게 사줄게. 다 신어 봐.”고현이 대답했다.“엄마가 결정해 주시면 돼요. 제가 내일 오후에 쉬니 집으로 돌아가서 드레스와 하이힐을 신어 볼게요. 하이힐을 신어 본 경험이 없으니 걷는 연습도 해야겠어요. 아니면 추태를 보일지도 모르니까요.”진미리가 웃으며 대답했다.“하긴, 걷는 연습을 좀 해야겠네.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하이힐을 신고 몇 걸음도
전호영은 눈치채지 못했다. 고현도 일부러 그에게 명백하게 알려주지 않았다.내일 저녁에 그를 놀라게 해주고 싶었다.강성 전체 사람들도 분명 충격받을 것이다.고현은 이미 전호영에 대한 감정을 깨달았기 때문에 이변이 없다면 2년 안에 전호영에게 시집갈 것이다.그녀는 전호영을 사랑하기 때문에 더는 그가 동성애라자라는 누명을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전호영은 게이가 아니라 정상적인 남자였다.고현이 모든 사람을 속인 것이다.고현은 전호영을 위해 정정당당하게 여자로 되고 싶어 했다.그 또한 기뻐할 것이다.고현의 형상이 너무 남자다웠기 때문에 그녀가 아무리 여성 옷을 입고 연회에 참석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그녀가 전호영의 마음을 사기 위해 여자 행세를 하는 것으로 여길 것이라는 점을 고현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전호영도 그녀를 기쁘게 하려고 여자로 분장한 적 있다.당시 고씨 그룹 직원들은 여자 분장을 한 전호영이 매우 눈에 익다고 생각했다.전호영의 자매인 줄 알았지만 전씨 가문에는 딸이 없고 전호영에게도 자매가 없었다는 것을 반응한 사람들은 그제야 전호영이 분장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날 그 사실은 고씨 그룹에서 아주 큰 가십거리로 소문이 자자했다.전호영과 통화를 마친 고현은 진미리에게 전화를 걸었다.진미리가 전화를 받았지만 고현은 주저하며 말을 하지 않았다.“현아, 왜 그래?”고현이 여전히 말을 하지 않자 진미리는 놀라워하며 고현에게 무슨 사고라도 난 줄 알았다.고현은 어려서부터 철이 들어서 어떤 일이 있어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했다.“엄마, 시간 있어요? ”“있지. 난 언제나 시간 있지. 왜? 내가 뭐 도울 거라도 있어? 말해봐. 내가 다 해줄게.”고현이 먼저 도움을 청하는 일이라면 분명 큰일일 것이다.한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낸 진미리는 관심 있게 물었다.“생리 왔어? 배 아파?”고현은 때때로 생리통을 앓곤 한다.진미리는 한동안 몰래 고현에게 한약을 지어주면서 그녀를 돌보았다.“아니요. 엄마. 저 내일 저녁 연회
“호영 씨.”고현이 기분이 좋은 듯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휴대폰 너머에 있던 전호영도 덩달아 신이 나서 웃었다.“현이 씨, 뭐 좋은 일이 있나요? 제 이름을 부르면서까지 웃음기가 묻어나네요. 현이 씨를 오랫동안 알고 지냈지만, 이런 경우가 흔치 않은데.”고현이 전호영에게 감정이 있다고는 하나 성격이 워낙 무뚝뚝하다 보니 전호영을 대하는 태도는 항상 차가웠다.“제가 기분이 나빴으면 좋겠어요?”“그럴 리가요. 당연히 현이 씨가 날마다 즐겁고 행복하면 좋죠. 그렇지만 현이 씨는 짊어진 짐이 너무 무겁다 보니 하루 종일 웃지도 않잖아요. 시시덕거리는 고빈을 볼 때마다 테이프로 그의 주둥이를 틀어막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그가 사랑했던 여자는 고씨 그룹을 위해 매일 쉬지 않고 일하지만, 고빈은 틈만 나면 여자들을 만나느라 바빴다.그렇다고 해서 고빈이 결혼할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고현이 웃으며 말했다.“얼른 가서 그 입 틀어막지 않고 뭐 해요? 솔직히 말해서 아무 근심 걱정 없는 그의 모습을 볼 때면 가끔 부럽기는 해요.”자신이 맏이기 때문에 동생을 대신해 모든 책임을 떠맡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그녀의 머릿속에 꽉 박혀있었다.줄곧 남장하고 있었지만, 여자로 살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무거운 책임감을 안고 있다고는 하지만 동생을 즐겁고 행복하게 해주는 것만으로 그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전호영이 나타난 후부터 고현은 점차 동생이 부러워지기 시작했다.물론 동생에게 말했던 것처럼 고씨 그룹이 언젠가는 동생의 손에 넘어갈 것을 생각하고 가끔 동생에게 일을 맡기곤 했었지만.평생을 이렇게 버틴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란 것을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기대하고 의지할 사람이 필요했는데 전호영이 딱 그런 존재였다.“나중 가면 현이 씨 동생이 현이 씨를 부러워할 것이니 동생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어요. 현이 씨가 회사 일을 조금씩 그에게 맡긴다면 우리도 언젠가는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거예요. 아니면 저처럼 호
자신을 찾아온 사람이 이윤미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고현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온 후, 이윤미가 자신의 비서에게 말했다.“먼저 회사에 가 있어요. 요즘 가주가 시간 없다고 하니 제가 집안일 처리하러 집에 가야겠어요.”그녀의 어머니는 여전히 병원에서 아버지를 돌보고 있었다.이씨 가문에 일이 생겼다는 사실을 그녀의 비서 외에 회사 사람들은 다 모르고 있었다.이윤미만 회사에 나오고 가주와 그녀의 오빠들은 회사에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만 회사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이 대표가 비록 능력이 부족한 이 부대표를 못마땅하게 여긴다고 해도 어찌 됐든 자기 친딸이니 무슨 일을 저지른다 해도 이 대표가 뒷수습을 다 할 것으로 회사 사람들은 뒤에서 수군거렸다.이윤미가 이 대표의 자리를 물려받는 것을 막으려는 사람들은 온갖 망발을 늘어놓으며 그녀를 헐뜯기에 바빴다.그렇지만 이윤미는 가만있지 않았다.중요한 직위를 갖고 있지 않으면서 설치고 다니는 사람들을 그녀는 직접 해고하여 이씨 그룹에서 쫓아냈다.그리고 직위가 높은 사람들은 강등시키거나 급여를 깎았다.게다가 해고된 사람들이 대기업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블랙리스트에 올린 탓에 그들은 복지와 소득 면에서 이씨 그룹에 한참 미치지도 못하는 작은 회사만 전전해야 했다.조금의 손해를 볼지언정 이윤미는 그들을 용납할 수 없었다.이씨 그룹에서 쫓겨난 직원들을 보며 다른 직원들은 공포감을 느꼈다.모두가 부를 추구하고 부양해야 할 가족들이 있기 때문에 일자리를 잃을 수 없었다.누가 대표직에 오르든지 간에 모두 이씨 가문의 출신일 것이니 승급을 못 할 바에는 이씨 가문의 암투에 직원들은 끼어들 필요가 없었다.어차피 대우는 변하지 않으니 오히려 정직하게 일하는 것이 더 좋을지도 몰랐다.그렇게 한다면 해고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상사에게 더 주목받을 수도 있었다.“알았어요.”택시비를 보상해 주겠다며 말한 뒤 이윤미는 비서를 택시에 앉혀 보내고 자신은 차를 몰고 집으로 돌
그들은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었다.“고 대표님, 저는 회사의 프로젝트 협력에 대해 논의하러 왔어요. 방안을 가져왔으니 한번 보도록 하세요.”이윤미는 말하면서 자신 비서의 손에서 서류를 건네받은 뒤 두 손으로 고현에게 건넸다.고현은 서류를 받아 들고 자세히 훑어보기 시작했다.한참 후에 다 훑어본 서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그녀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말을 꺼냈다.“윤미 씨의 방안이 괜찮아 보이지만 이씨 그룹의 실력이 부족해서 별로 협력하고 싶지 않네요.”고현은 직설적으로 말했다.협력업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이윤미의 개인 회사와 협력하려 했던 것은 그냥 단순히 이윤미의 체면을 세워주려고 했던 것이었다.하예진의 회사도 설립되고 나면 고씨 그룹과 협력할 예정이었다.이윤미가 호탕하게 웃었다.“고 대표님, 우리 이씨 그룹이 귀사에 비해 조금 못하단 걸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우리 이씨 그룹도 강성에서 백 년을 이어온 명문가라서 뿌리가 깊어요. 저도 일부 프로젝트를 책임졌으니 어느 정도 발언권이 있어요. 고 대표님이 저와 협력한다면 서로 윈윈할 수 있을 거예요. 당연히 대표님의 발목을 잡는 일은 없을 거고요.”이윤미와 그녀의 비서는 협상에 진전이 없을 거란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고현에게 잘 보이려고 최선을 다했다.이씨 그룹을 아무리 추켜세워도 고현이 마음을 바꾸지 않자, 이윤미가 말했다.“고 대표님, 협력하지 않더라도 저와의 인연은 끊지 말았으면 좋겠네요. 이번에 비록 우리 이씨 그룹이 대표님의 눈에 들지 못했지만, 나중에는 협력할 기회가 생길지도 몰라요.”고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렇게 될 거예요.”이씨 가문이 권력에서 물러난다면 가능성이 있었다.이씨 그룹의 권력을 쥐고 있는 이씨 가문이 고씨 그룹과의 협력을 이용해 힘을 키우는 것이 두려워 고현은 협력하기 싫었던 것이었다.만약 이씨 그룹의 세력이 커진다면 하예진의 앞날이 더욱 험난해질 것 같았다.이윤미가 웃으며 말했다.“우리 이씨 그룹이 열심히 노력해서 하루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