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하지 마, 노씨 사모님이 날 찾아오는 일이 없도록 할게. 너도 그만 진정해.”“언니는 너무 착해서 문제예요. 나 같았으면 그런 눈으로 날 쳐다봤다간 절대 가만 안 뒀어요.”하예진이 피식 웃었다.그녀와 성소현을 어찌 비교할 수 있겠는가?성소현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재벌 집 딸이고 하예진은 일찍 부모를 여읜 외로운 딸인데.“아무튼 앞으로는 내가 언니를 지켜줄게요. 누가 언니한테 조금이라도 눈치를 주고 괴롭히면 당장 나한테 얘기해요. 내가 제대로 혼내줄 테니까.”“효진이 왔어.”심효진 남매를 본 하예진이 성소현에게 귀띔했다. 성소현은 그제야 하던 얘기를 멈췄다.심효진은 이번에도 남동생과 동행했다. 사실은 운전기사로 부려 먹을 생각이었다. 그러면 그녀는 파티에서 마음껏 먹고 마실 수 있으니까.그런데 아쉽게도 하예정이 관성에 있지 않았다.“효진아.”하예진과 성소현이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효진 씨, 왜 이제야 왔어요.”성소현이 가까이 다가가 심효진의 팔짱을 꼈다. 뭇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에게 향하더니 심효진인 걸 알아보고는 수군거리기 시작했다.“김씨 사모님의 친정집 조카 아니에요? 오랜만에 보네요.”“성씨 사모님이 효진 씨가 만취해서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나 봐요. 그러니까 파티에 초대했겠죠. 지난번처럼 파티에서 드러누우면 어쩌려고.”“심효진 씨랑 성씨 사모님의 조카가 절친이래요. 초대하는 것도 당연하죠.”“우린 멀리 떨어져 있어요. 저런 사람과 가까이하면 오히려 우리가 놀림당해요.”심효진은 자신이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많은 이의 이목을 끌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녀가 성소현에게 물었다.“내가 늦었어요? 초대장에 적힌 시간보다 일찍 온 것 같은데.”그러고는 하예진에게도 인사를 건넨 후 주우빈을 안으며 하예진을 칭찬했다.“예진 언니, 오늘 이렇게 입으니까 참 복스러워 보이네요.”“그냥 차라리 뚱뚱하다고 해도 괜찮아.”자신의 겉모습이 얼마나 뚱뚱한지 잘 알고 있었던 하예진은 다른 사람들의 경멸 어린 시선에 진작 익숙해졌고
하예진이 잔뜩 경계하기 시작하면서 싸늘하게 물었다.“누구한테서 들었어? 내가 결혼 후에 출근도 못 하고 아무런 수입도 없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많이 받아...”“네 시어머니가 그러더라. 예진아, 나 지금 사업이 잘 안 돼서 예전에 번 돈까지 전부 다 밑지는 바람에 자금이 부족하거든? 나한테 2억만 좀 빌려주라.”하예진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너털웃음을 지었다.인간의 얼굴이 아무리 두꺼워도 어떻게 이 정도로 두꺼울 수가 있지?그 집 식구들은 하예진네 자매에게 정말 지긋지긋하게도 달라붙는다.“지명 오빠, 오빠 얼굴이 얼마나 두꺼운지 거울 좀 봐봐. 우리 자매한테 뭘 잘해준 게 있다고 지금 뻔뻔스럽게 돈을 빌려달라고 해? 그래, 나한테 2억이 있어. 하지만 절대 안 빌려줘. 다른 사람한테 빌려줄지언정 오빠한테는 죽어도 못 빌려줘!”“이러지 마, 예진아. 아무리 그래도 난 네 사촌 오빠야. 그땐 너희 두 자매가 하도 고집을 부려서 네 남편 집에서 예물 돈도 주지 않고 널 데려갔잖아. 그래서 그 집 식구들이 네가 귀한 줄 모르는 거야. 나중에 재혼하면 꼭 남자 측에 예물 돈을 할아버지한테 드리라고 해.”“많은 돈을 주고 며느리를 들여야 귀한 줄 알고 함부로 버리지 않아. 너 지금 그 많은 돈을 어디에 쓸데도 없잖아. 나한테 먼저 2억 빌려줘. 자금이 원활하게 돌아갈 때 그때 돌려줄게. 그리고 내 사업이 이 지경이 된 게 다 너희 두 자매 때문이야. 너희 둘이 그런 글을 올려서 내 명성만 망가뜨리지 않았어도 내 사업이 휘청거리지 않았어. 너희 때문에 지금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맨날 적자만 나.”하예진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한 푼도 못 빌려줘!”“예진아...”하예진이 전화를 끊자 하지명은 냅다 욕설을 퍼부었다.“뭐래?”그의 아버지가 걱정스럽게 물었다.“예진이가 돈 빌려주겠대?”“아빠, 굳이 머리로 생각하지 않아도 걔가 안 빌려줄 거라는 걸 알겠어요. 아무리 관계가 좋은 사람이라고 해도 누가 흔쾌히 2억이나 빌려주겠어요?”하지명이 짜증 섞인
그리고 하지문이 아무리 물어도 성씨 그룹 말고 또 누가 그들에게 복수하려는지 절대 얘기하지 않았다.하지문은 하예정네 자매의 배후에 있는 조력자라고 확신했다. 처음에는 성소현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지금 보니 성소현 말고 더 엄청난 사람이 두 자매의 배후에 있는 것 같다.그 사람이 대체 누굴까?누구길래 그가 관성에서 일자리 하나도 못 찾게 만든 걸까?충격받은 하지문은 자신감이 밑바닥을 드러냈다. 일단 할머니가 퇴원하신 후에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본가로 모시고 간 다음 구정이 지나서 다시 생각해봐야겠다.“그럼 어떡해?”하순재가 근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예정네 자매 뒤에 대체 누가 있길래 이리 엄청난 거야? 일자리도 잃고 사업이 내리막길을 걷잖아. 네 사업이 그리 큰 사업이 아닌데도 엄청난 영향을 받았어. 지명아, 할머니가 퇴원하신 후에 우리 다시 얘기해보자. 예정이 요구대로 진심으로 사과한다면 화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그들이 두 자매를 어떻게 모함하고 명성을 어지럽혔으며 인터넷 악플 세례를 당하게 했으면 그대로 똑같이 당해야 한다고 하예정이 말했었다.하지명이 머뭇거렸다.“상황이 이 지경이 됐는데 인터넷에 공개 사과하는 게 뭐가 어렵다고 그래? 인터넷에 공개적으로 사과한 다음에 귀한 선물도 준비해서 예진네 자매한테 찾아가자. 이번에는 우리 전부 성질을 죽이고 진심으로 사과해야 해. 걔네 둘이 더는 문제 삼지 않겠다고 하면 아무 일도 없게 되는 거야.”하지명이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예진이랑 예정이 참 독한 애들이에요. 우리가 먼저 잘못한 건 사실이지만 이 정도까진 아니잖아요? 고작 인터넷에 글을 올려 댓글 알바를 구해서 악플 좀 달았을 뿐인데, 그리고 걔네들도 반격했잖아요. 요 두 달 우리도 힘들었고 손해가 엄청나단 말이에요. 이젠 비긴 거나 마찬가지인데 아직도 물고 늘어지네요. 우리를 벼랑 끝까지 내몰 생각인가 봐요.”하지명이 분통을 터뜨리며 말을 이었다.“걔네 둘 우리를 아직도 원망하고 그때 일을 기억하고 있어요. 아빠, 아무래도 걔네 둘이
하예진과 하지명의 통화 내용을 전부 다 들은 성소현이 분노를 터뜨렸다.“아직도 언니한테 돈을 요구해요?”“나한테 돈 빌려달래. 요즘 사업이 잘 안 돼서 엄청 밑졌다면서 2억 빌려달래.”“인간이 어떻게 그렇게 뻔뻔할 수가 있어요? 관성에 나보다 얼굴이 두꺼운 사람이 없는 줄 알았어요. 다른 사람들은 내가 뻔뻔하게 전 대표님을 쫓아다닌다는지, 파렴치하다는지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그 친척들에 비하면 난 정말 아무것도 아니네요.”하예진이 되레 성소현을 달랬다.“그런 사람들 때문에 화내지 마, 소현아. 나랑 예정이 평생 그 사람들이랑 화해 안 해. 죽든 말든 알 게 뭐야.”그 집 식구들이 지금 힘겨운 나날을 보내는 건 다 인과응보이다.“가요, 가서 맛있는 것도 먹고 술도 마셔요. 소현 씨네 집 파티셰가 만든 디저트가 너무 맛있어요. 나 오늘 밤 배터지게 먹을 거예요.”심효진이 화제를 돌리자 성소현이 웃으며 말했다.“단 거 많이 먹으면 살쪄요... 아, 예진 언니 말하는 건 아니었어요.”하예진은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단 거 먹으면 살이 많이 찌긴 해. 그래서 나 단 거 끊었어.”“난 매일 뛰며 운동해서 많이 먹어도 살이 잘 안 쪄요.”심효진은 성소현의 팔짱을 끼며 하예진네 모자에게도 안으로 들어가자고 했다.하예진은 이번에 큰 결심을 한 듯싶다. 파티의 맛있는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고 꾹 참았다. 적게 먹고 많이 움직여야만 다이어트에 성공할 수 있다.소정남이 도착했을 때 심효진은 이미 배부르게 먹었고 취기도 올라왔다.누나의 귀가를 책임지려고 따라온 심서준이 만취한 누나를 부축하여 나가던 그때 마침 소정남과 딱 마주쳤다. 많은 이들이 소정남을 둘러싸고 한껏 아부하고 있었다.소정남은 사람들의 이목을 끄려고 일부러 늦게 도착했는데 심효진이 먼저 가려 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그는 인제야 도착했는데...“소정남 씨.”심서준이 소정남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효진 씨 왜 이래요?”“우리 누나 취했어요.”소정남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하예진이 이경혜에게 말했다.“이모, 저랑 예진이 아직 젊고 사지도 멀쩡해서 이모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돼요. 저희 노력으로도 스스로 일어설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이모한테 부탁할 일이 하나 더 있어요. 저랑 예정이가 이모 외조카라는 사실을 너무 많은 사람들한테 알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저랑 예정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좋은 사람도 많이 만났지만 나쁜 사람도 수도 없이 만났었어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이용하여 이모랑 성씨 그룹을 해치려 할까 봐 걱정돼서 그래요.”이경혜가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말했다.“예진아, 이런 생각까지 해줘서 이모는 너무 기뻐. 너희 둘은 이모처럼 참 씩씩한 아이야. 이모 도움이 필요 없다고 했으니 이제부턴 이모도 더는 나서지 않을게. 하지만 어려운 일이 생기면 꼭 이모한테 얘기해야 해, 알았지? 다른 사람들이 우리 관계를 알든 말든 그건 상관없어. 하지만 하씨 집안 사람들한테는 얘기해야 해. 계속 너희들한테 돈을 달라고 귀찮게 굴게 할 수는 없어.”성씨 그룹의 명성이 그래도 꽤 쓸모는 있을 것이다.“내 뒤에 소현이가 있는 건 진작 알고 있어요.”성소현과 하씨 집안 사람들이 가게에서 언성을 높인 적이 있었다.“일부러 얘기하진 않을 거예요. 구정 후에 부모님 집을 되찾는 소송을 할 때나 이모의 명성을 빌려서 압력을 가할 거예요.”“소송은 언제 하려고? 소송할 때 이모한테 얘기해. 이모가 가장 잘하는 변호사를 구해줄게. 상속법대로 하면 너희들은 무조건 승소해.”하예진도 소송을 하면 두 자매가 부동산을 가질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하씨 집안 사람들이 하도 뻔뻔하고 파렴치한 인간들이라 소송을 하더라도 끝까지 버틸 것이다. 그때가 되면 정말로 이모의 신분을 빌려야 할지도 모른다.이경혜와 긴 시간 얘기를 나눈 후 이경혜는 직접 나서지 않고 뒤에서 두 조카를 묵묵히 지켜보겠다고 했다.기나긴 인생길은 그래도 스스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가야 한다.일주일 후, 전태윤의 독감이 드디어 말끔히 나았다.그가 입원하
사랑하는 여자가, 그것도 합법적인 아내가 맨날 눈앞에서 다니는데도 키스도 하지 못하는 마음을 누가 알까?전태윤도 그동안 많이 참아왔다. 이젠 독감도 다 나았으니 하예정을 꽉 끌어안고 억눌렀던 욕구를 마음껏 표현했다.잠시 후, 하예정은 그의 가슴팍에 기댄 채 호흡을 가다듬었다.“예정아.”하예정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진지한 표정과 마주한 순간 두 눈을 깜빡였다.‘낯빛이 한순간에 바뀌네?’그녀가 물었다.“왜 그래요? 표정이 왜 또 교감 선생님처럼 엄숙한데요? 날 도와주러 처음 우리 가게에 왔을 때 학생들이 무서워서 가게도 들어오지 못했던 게 기억나네요.”전태윤이 그녀의 볼을 살살 어루만지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그땐 자꾸 날 회사로 돌아가라고 해서 화나서 그랬어. 도와주겠다는 내 마음은 받아주지 않고 그냥 쫓아내기만 했잖아.”예전의 그는 그녀 앞에서 참으로 교만을 떨었다. 게다가 성격도 더러웠고 표정도 어찌나 얼음장같이 차가운지 모든 사람이 그에게 빚이라도 진 것처럼 싸늘했다.“태윤 씨, 나한테 할 얘기 있어요?”하예정은 그가 자신의 볼을 어루만지는 따스한 손길을 마음껏 느꼈다. 그의 눈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귀한 보물과도 같았다.“지금까지 너한테 하지 못한 얘기가 있어.”“그게 뭔데요?”전태윤이 한참 침묵하다가 말했다.“내가 얘기하면 절대 화내면 안 되고 후회해서도 안 돼.”두 사람은 서로를 빤히 바라보았다. 잠시 후, 하예정은 그를 밀어내며 멀리했다.“태윤 씨, 또 무슨 속셈이에요? 대체 무슨 얘기길래 말하기 전부터 화내선 안 되고 후회도 해선 안 된다고 하는 거예요? 만약 내가 엄청 화낼만한 일이라면 그래도 참으면서 억지로 웃어야 해요? 난 절대 참지 않을 거예요. 화나면 태윤 씨를 꼬집고 깨물 거예요!”전태윤이 손을 내밀어 그녀를 안으려 하자 하예정이 다시 밀쳐냈다.“터치하지 말아요. 얘기를 듣고 난 다음에 때릴지 말지 결정할게요.”전태윤이 망설이다가 말을 꺼냈다.“그러니까, 음... 내 명의로 된 집이 발렌시아
전태윤이 그런 곳에 별장 한 채를 갖고 있다니, 그것도 산꼭대기에 있는 별장이라고 한다. 뷰가 아주 기가 막힐 듯싶다.하예정은 휴대 전화를 외투 주머니에 넣고 소파에 앉더니 전태윤을 빤히 쳐다보았다. 전태윤의 시선도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그녀가 지금 화난 건지, 놀라면서도 기쁜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놀라면서도 기뻐하는 건 아닌 것 같다.“예정아, 우... 우리가 초고속 결혼을 해서...”전태윤이 그녀 옆에 다가가 앉았다. 하지만 그가 앉자마자 하예정이 옆으로 움직이며 그와 멀리했다.“그냥 거기 앉아있어요. 가까이 오지 말고요.”그녀가 얼굴을 찌푸리며 화를 냈다.“그동안 나한테 왜 숨겼는지는 나도 알아요. 태윤 씨한테 별장이 있는 걸 알고 태윤 씨 돈을 탐낼까 봐 그런 거겠죠. 전씨 그룹에서 임원으로 일하면 연봉이 얼마나 돼요? 적어도 몇십억은 되겠죠? 평소 일이 바빠서 계속 야근 아니면 술자리 나가던데 그 비용도 회사에서 내주죠? 여자친구도 없고 미혼인데다가 가정 형편도 나쁘지 않아서 태윤 씨가 집에 용돈을 드릴 필요도 없다고 했어요.”“그럼 지금까지 엄청 많은 돈을 모았겠네요? 그러면 수백억짜리 별장 하나쯤 사는 것도 이상할 건 없죠. 우리가 혼인신고 한 날부터 태윤 씨가 날 경계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어요. 날 태윤 씨 돈이나 욕심내는 그런 나쁜 여자로 의심했었죠.”얘기하던 하예정은 결국 참지 못하고 소파 위의 쿠션으로 전태윤을 냅다 때렸다.“별장이 있다는 사실을 나한테 숨겨요? 자기도 완전히 솔직하지 못하면서 그날 밤 나한테 그렇게 화를 낸 거예요? 뭐랬더라? 태윤 씨를 가족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더라?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에요?”전태윤은 그녀가 쿠션으로 마구 때려도 가만히 있었다. 어차피 아프지도 않으니까.그는 하예정에게 자신의 명의로 된 별장이 한 채가 아니라고 얘기하고 싶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한 채라고 밖에 얘기할 수 없었다. 일단은 그가 숨기는 게 있다는 걸 하예정이 알면 어떤 반응
전태윤이 잠시 입을 꾹 다물다가 대답했다.“별장이랑 발렌시아 아파트를 사니까 적금이 얼마 남지 않았더라고. 차는 어차피 그저 교통수단이니까 잘 굴러가기만 하면 돼. 비싼 자동차 같은 건 필요 없어.”전태윤은 식은땀이 삐질삐질 났다. 아직도 수많은 거짓말로 예전의 거짓말을 수습하고 있었다.하예정이 다시 한번 그를 밀어냈다.“일단 이 손 놔요.”“도망가는 건 아니지?”“내가 어딜 도망가겠어요? 도망갈 생각이었더라면 말도 없이 짐 챙겨서 나갔죠. 큰소리를 내면서 떠나는 건 그건 태윤 씨한테 겁주려고 일부러 그런 거예요. 진짜로 떠나는 건 소리 없이, 망설임 없이 떠나는 거죠.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게.”그녀의 말에 전태윤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아 조심스럽게 물었다.“예정아, 넌 어떤 상황에서 날 떠날 거야?”“나한테 미안한 짓을 하고 제 발 저려서 이렇게 묻는 거죠?”전태윤이 부정했다.“그게 아니라 확실하게 물어서 앞으로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네 마음을 다치게 하지 않으려고 그러는 거지. 절대 내 곁을 떠나지 않게 할 거야.”담담한 표정의 그를 보며 하예정은 그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그의 두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지만 뭔가 켕기는 게 있는 것 같진 않았다.그가 지금 솔직하게 얘기하는 건지, 아니면 떠보는 건지 도통 가늠이 가질 않았다.“내가 가장 못 참는 건 바람피우는 거랑 가정 폭력, 그리고 끝없는 거짓말이에요.”“난 바람피울 리도 없고 가정 폭력은 더더욱 없어.”전태윤이 바로 약속하자 하예정이 그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말했다.“약속 꼭 지켜요.”“시간으로 증명할게.”전태윤은 제 발 저린 듯 끝없는 거짓말은 자연스럽게 무시했다. 그녀를 속인 일은 하나였지만 그 거짓말을 덮으려고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했는지 모른다. 결국에는 무수한 거짓말이 돼버렸다.그는 원래는 그저 하예정의 반응만 살필 생각이었다. 그녀가 잠깐 화를 내다가 다시 풀리면 모든 걸 솔직하게 털어놓을 생각이었지만 그녀의 마지노선을 알게 된 지금 전태윤
“엄마, 사실 나도 좀 망설여져요.”고현의 말을 들은 진미리는 황급히 말을 이었다.“망설일 필요 없어. 너 원래 여자이고 원래 치마 입어도 되는 신분이야. 네가 20년 이상 남자 옷을 입었으니 진작 여자 옷을 입었어야 했어. 호영이도 네가 드레스를 입고 연회에 함께 참석하는 것을 알면 얼마나 기뻐하겠어. 그때 가서 다들 네가 여자라는 걸 알게 될 거고 너희 둘이 게이라고 수군대지도 않을 테고. 사실 사람들이 나한테 네가 그토록 훌륭한데 호영 때문에 삐뚤어진다는 말을 했거든. 네가 정상인데 호영 때문에 게이로 되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난 사실을 그들에게 진실을 알려주고 싶었어. 그런데 넌 여자 신분을 되찾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에 엄마는 늘 참고 있었지. 그리고 그런 말 하는 사람들을 멀리할 수밖에 없었어.”진미리 부부도 사실 큰 스트레스를 이겨내고 있었다.다른 사람의 말들은 고진호 부부가 무시하고 멀리하면 그뿐이지만 친척과 친구들이 와서 설득할 때면 그들은 정말 어쩔 수 없었다.진미리는 결국 고현이 이제 성인이 되었으니 딸이 행복하면 그뿐이라면서 딸의 의사를 존중해 주겠다고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이 때문에 그 친척들은 몇 년 지나면 고현이 후회할 것이라고 화를 내면서 진미리가 고현을 그대로 내버려 두면 고빈도 따라서 게이로 될 것이고 따라서 손주를 안고 싶어 해도 기회가 없을 거라는 심한 말을 내뱉기도 했다.이는 진미리를 화나게 했지만 그렇다고 또 어쩔 수도 없었다.“엄마가 좀 이따가 드레스 몇 벌 골라줄게. 네 취향대로 골라봐. 액세서리는 새것으로 살래? 엄마가 몇 벌 골라줄까? 하이힐도 몇 켤게 사줄게. 다 신어 봐.”고현이 대답했다.“엄마가 결정해 주시면 돼요. 제가 내일 오후에 쉬니 집으로 돌아가서 드레스와 하이힐을 신어 볼게요. 하이힐을 신어 본 경험이 없으니 걷는 연습도 해야겠어요. 아니면 추태를 보일지도 모르니까요.”진미리가 웃으며 대답했다.“하긴, 걷는 연습을 좀 해야겠네.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하이힐을 신고 몇 걸음도
전호영은 눈치채지 못했다. 고현도 일부러 그에게 명백하게 알려주지 않았다.내일 저녁에 그를 놀라게 해주고 싶었다.강성 전체 사람들도 분명 충격받을 것이다.고현은 이미 전호영에 대한 감정을 깨달았기 때문에 이변이 없다면 2년 안에 전호영에게 시집갈 것이다.그녀는 전호영을 사랑하기 때문에 더는 그가 동성애라자라는 누명을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전호영은 게이가 아니라 정상적인 남자였다.고현이 모든 사람을 속인 것이다.고현은 전호영을 위해 정정당당하게 여자로 되고 싶어 했다.그 또한 기뻐할 것이다.고현의 형상이 너무 남자다웠기 때문에 그녀가 아무리 여성 옷을 입고 연회에 참석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그녀가 전호영의 마음을 사기 위해 여자 행세를 하는 것으로 여길 것이라는 점을 고현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전호영도 그녀를 기쁘게 하려고 여자로 분장한 적 있다.당시 고씨 그룹 직원들은 여자 분장을 한 전호영이 매우 눈에 익다고 생각했다.전호영의 자매인 줄 알았지만 전씨 가문에는 딸이 없고 전호영에게도 자매가 없었다는 것을 반응한 사람들은 그제야 전호영이 분장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날 그 사실은 고씨 그룹에서 아주 큰 가십거리로 소문이 자자했다.전호영과 통화를 마친 고현은 진미리에게 전화를 걸었다.진미리가 전화를 받았지만 고현은 주저하며 말을 하지 않았다.“현아, 왜 그래?”고현이 여전히 말을 하지 않자 진미리는 놀라워하며 고현에게 무슨 사고라도 난 줄 알았다.고현은 어려서부터 철이 들어서 어떤 일이 있어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했다.“엄마, 시간 있어요? ”“있지. 난 언제나 시간 있지. 왜? 내가 뭐 도울 거라도 있어? 말해봐. 내가 다 해줄게.”고현이 먼저 도움을 청하는 일이라면 분명 큰일일 것이다.한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낸 진미리는 관심 있게 물었다.“생리 왔어? 배 아파?”고현은 때때로 생리통을 앓곤 한다.진미리는 한동안 몰래 고현에게 한약을 지어주면서 그녀를 돌보았다.“아니요. 엄마. 저 내일 저녁 연회
“호영 씨.”고현이 기분이 좋은 듯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휴대폰 너머에 있던 전호영도 덩달아 신이 나서 웃었다.“현이 씨, 뭐 좋은 일이 있나요? 제 이름을 부르면서까지 웃음기가 묻어나네요. 현이 씨를 오랫동안 알고 지냈지만, 이런 경우가 흔치 않은데.”고현이 전호영에게 감정이 있다고는 하나 성격이 워낙 무뚝뚝하다 보니 전호영을 대하는 태도는 항상 차가웠다.“제가 기분이 나빴으면 좋겠어요?”“그럴 리가요. 당연히 현이 씨가 날마다 즐겁고 행복하면 좋죠. 그렇지만 현이 씨는 짊어진 짐이 너무 무겁다 보니 하루 종일 웃지도 않잖아요. 시시덕거리는 고빈을 볼 때마다 테이프로 그의 주둥이를 틀어막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그가 사랑했던 여자는 고씨 그룹을 위해 매일 쉬지 않고 일하지만, 고빈은 틈만 나면 여자들을 만나느라 바빴다.그렇다고 해서 고빈이 결혼할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고현이 웃으며 말했다.“얼른 가서 그 입 틀어막지 않고 뭐 해요? 솔직히 말해서 아무 근심 걱정 없는 그의 모습을 볼 때면 가끔 부럽기는 해요.”자신이 맏이기 때문에 동생을 대신해 모든 책임을 떠맡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그녀의 머릿속에 꽉 박혀있었다.줄곧 남장하고 있었지만, 여자로 살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무거운 책임감을 안고 있다고는 하지만 동생을 즐겁고 행복하게 해주는 것만으로 그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전호영이 나타난 후부터 고현은 점차 동생이 부러워지기 시작했다.물론 동생에게 말했던 것처럼 고씨 그룹이 언젠가는 동생의 손에 넘어갈 것을 생각하고 가끔 동생에게 일을 맡기곤 했었지만.평생을 이렇게 버틴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란 것을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기대하고 의지할 사람이 필요했는데 전호영이 딱 그런 존재였다.“나중 가면 현이 씨 동생이 현이 씨를 부러워할 것이니 동생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어요. 현이 씨가 회사 일을 조금씩 그에게 맡긴다면 우리도 언젠가는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거예요. 아니면 저처럼 호
자신을 찾아온 사람이 이윤미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고현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온 후, 이윤미가 자신의 비서에게 말했다.“먼저 회사에 가 있어요. 요즘 가주가 시간 없다고 하니 제가 집안일 처리하러 집에 가야겠어요.”그녀의 어머니는 여전히 병원에서 아버지를 돌보고 있었다.이씨 가문에 일이 생겼다는 사실을 그녀의 비서 외에 회사 사람들은 다 모르고 있었다.이윤미만 회사에 나오고 가주와 그녀의 오빠들은 회사에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만 회사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이 대표가 비록 능력이 부족한 이 부대표를 못마땅하게 여긴다고 해도 어찌 됐든 자기 친딸이니 무슨 일을 저지른다 해도 이 대표가 뒷수습을 다 할 것으로 회사 사람들은 뒤에서 수군거렸다.이윤미가 이 대표의 자리를 물려받는 것을 막으려는 사람들은 온갖 망발을 늘어놓으며 그녀를 헐뜯기에 바빴다.그렇지만 이윤미는 가만있지 않았다.중요한 직위를 갖고 있지 않으면서 설치고 다니는 사람들을 그녀는 직접 해고하여 이씨 그룹에서 쫓아냈다.그리고 직위가 높은 사람들은 강등시키거나 급여를 깎았다.게다가 해고된 사람들이 대기업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블랙리스트에 올린 탓에 그들은 복지와 소득 면에서 이씨 그룹에 한참 미치지도 못하는 작은 회사만 전전해야 했다.조금의 손해를 볼지언정 이윤미는 그들을 용납할 수 없었다.이씨 그룹에서 쫓겨난 직원들을 보며 다른 직원들은 공포감을 느꼈다.모두가 부를 추구하고 부양해야 할 가족들이 있기 때문에 일자리를 잃을 수 없었다.누가 대표직에 오르든지 간에 모두 이씨 가문의 출신일 것이니 승급을 못 할 바에는 이씨 가문의 암투에 직원들은 끼어들 필요가 없었다.어차피 대우는 변하지 않으니 오히려 정직하게 일하는 것이 더 좋을지도 몰랐다.그렇게 한다면 해고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상사에게 더 주목받을 수도 있었다.“알았어요.”택시비를 보상해 주겠다며 말한 뒤 이윤미는 비서를 택시에 앉혀 보내고 자신은 차를 몰고 집으로 돌
그들은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었다.“고 대표님, 저는 회사의 프로젝트 협력에 대해 논의하러 왔어요. 방안을 가져왔으니 한번 보도록 하세요.”이윤미는 말하면서 자신 비서의 손에서 서류를 건네받은 뒤 두 손으로 고현에게 건넸다.고현은 서류를 받아 들고 자세히 훑어보기 시작했다.한참 후에 다 훑어본 서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그녀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말을 꺼냈다.“윤미 씨의 방안이 괜찮아 보이지만 이씨 그룹의 실력이 부족해서 별로 협력하고 싶지 않네요.”고현은 직설적으로 말했다.협력업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이윤미의 개인 회사와 협력하려 했던 것은 그냥 단순히 이윤미의 체면을 세워주려고 했던 것이었다.하예진의 회사도 설립되고 나면 고씨 그룹과 협력할 예정이었다.이윤미가 호탕하게 웃었다.“고 대표님, 우리 이씨 그룹이 귀사에 비해 조금 못하단 걸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우리 이씨 그룹도 강성에서 백 년을 이어온 명문가라서 뿌리가 깊어요. 저도 일부 프로젝트를 책임졌으니 어느 정도 발언권이 있어요. 고 대표님이 저와 협력한다면 서로 윈윈할 수 있을 거예요. 당연히 대표님의 발목을 잡는 일은 없을 거고요.”이윤미와 그녀의 비서는 협상에 진전이 없을 거란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고현에게 잘 보이려고 최선을 다했다.이씨 그룹을 아무리 추켜세워도 고현이 마음을 바꾸지 않자, 이윤미가 말했다.“고 대표님, 협력하지 않더라도 저와의 인연은 끊지 말았으면 좋겠네요. 이번에 비록 우리 이씨 그룹이 대표님의 눈에 들지 못했지만, 나중에는 협력할 기회가 생길지도 몰라요.”고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렇게 될 거예요.”이씨 가문이 권력에서 물러난다면 가능성이 있었다.이씨 그룹의 권력을 쥐고 있는 이씨 가문이 고씨 그룹과의 협력을 이용해 힘을 키우는 것이 두려워 고현은 협력하기 싫었던 것이었다.만약 이씨 그룹의 세력이 커진다면 하예진의 앞날이 더욱 험난해질 것 같았다.이윤미가 웃으며 말했다.“우리 이씨 그룹이 열심히 노력해서 하루빨
고빈은 몇 걸음 걷다가 고개를 돌려 이윤미를 쳐다보았다.한동안 보지 못해서 그런지 몰라도 자신감 넘치는 아우라를 발산하는 이윤미가 전보다 훨씬 예뻐 보였다.조금 전에 멈칫했던 것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애초부터 이런 모습이었다면 누나가 내게 소개해 줬을 때 거절하지 않았을 텐데.”고빈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물론 그녀에게 대시한다 해도 너무 늦지는 않았지만 이씨 가문과 엮이는 것이 싫어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이씨 가문에 이윤미 같은 인재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이씨 가문에서 자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그녀는 어릴 때부터 열악한 환경에서 자란 탓에 강인한 성격을 만들 수 있었다.그뿐만 아니라 상대를 방심하게 하여 허를 찌르는 데 능숙했다.고빈이 좋아하는 스타일은 이윤미처럼 가식이 많고 거짓말을 잘하는 여자가 아니라 순수한 여자였다.‘이윤미 같은 여자는 형에게 적합해. 둘이 함께 사람들의 뒤통수를 치면 누구도 당해내지 못해. 형이 이윤미를 높게 평가한 것을 감안할 때 둘이 충분히 한 쌍의 커플로 발전할 수 있어. 만약 그렇게 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놀아나겠지. 아니구나. 난 형이 없잖아! 강성의 사람들은 내게 형이 없고 누나만 있다는 사실을 다행으로 여겨야 해.’자신과 인사하는 것만으로 고빈이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할 줄을 이윤미는 당연히 알지 못했다.이윤미가 비서와 함께 사무실로 들어서자, 고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녀의 체면을 세워주었다.“윤미 씨, 뭐 드실래요? 비서에게 준비하라고 말할게요.”“따뜻한 물 한 잔이면 됩니다. 밤에 잠 못 잘까 봐 커피는 감히 마시지 못하겠네요.”고현은 두 사람을 소파에 앉으라고 말한 뒤 따뜻한 물을 따라주라고 자기 비서에게 지시했다.자리에 도로 앉은 고현이 커피잔을 들며 말했다.“저는 아침과 오후에 한 잔씩 마셔요. 습관 돼서 그런지 밤에 잠을 자는 데 별 지장은 없어요.”그녀는 보통 카페인이 효력이 사라진 자정이 되어서야 자는지라 걱정거리가 없는 한 수면에 큰 영향
“그러면 지금 바로 할머니께 전화할게. 퇴근 후 집에서 샤부샤부 먹겠으니, 집사에게 말하라고 말이야. 사람 좀 있어야 분위기도 나니까 이진 부부도 부를게. ”그러자 하예정이 말했다.“제가 할머니께 전화할 테니 당신은 가서 일 보세요. 아니면 오늘 밤 관성에 있는 사람 중 시간 있는 사람들을 와서 밥 먹으라고 가족 단톡방에 말 보낼게요. 하긴 사람이 많으면 시끌벅적하고 좋긴 하죠.”전태윤이 웃었다.“다들 바쁘니까 오지 못할 거야. 이진 부부만 불러.”“당신 말한 대로 할 테니 얼른 가서 일 보라니까요. 수중의 일부터 빨리 처리해야 나중에 그나마 수월해질 건데.”오랜만에 회사로 출근한 전태윤은 야근하지 않고 퇴근 시간에 맞춰 아내와 함께 집으로 가려 했다.아내의 거듭된 재촉에 전태윤은 마지못해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일을 시작했다.하예정은 할머니에게 전화하여 저녁에 전이진 부부를 불러 샤부샤부를 먹겠다고 말하자, 떠들썩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할머니는 당연히 기뻐하며 바로 승낙했다.강성, 이윤미가 타고 있던 차량이 고씨 그룹으로 향하고 있었다.차가 멈추자, 먼저 차에서 내린 이윤미의 비서는 뒷좌석의 차 문을 열어 이윤미가 차에서 내리는 것을 도왔다.이윤미는 자신의 비서와 함께 사무실 건물을 향해 걸어갔다.수십 층에 불과한 이씨 그룹의 청사와 달리 중심상업지역에 자리 잡은 고씨 그룹의 청사는 강성의 모든 대기업 중 가장 높은 층수를 자랑했다.이미 오기 전에 고현에게 전화하여 프로젝트 협력에 관해 이야기할 시간이 있는지 물어본 후, 이윤미가 자신의 비서를 데리고 찾아온 것이었다.고현이 자신의 계획을 꿰뚫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이윤미는 그래도 이씨 가문 딸의 신분으로 협력에 대해 논의하려고 했다.만약 그것이 통하지 않을 때 다시 사적으로 회사 대표의 신분으로 얘기해 볼 속셈이었다.고현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이윤미는 잘 알고 있었다.그녀와 척을 지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이윤미의 앞날에 먹구름이 낄 것이 뻔했다.이윤미가 여러
전태윤의 뒷부분 말을 들은 소정남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말하지 않으면 내가 얼마나 바쁘고 피곤한지 넌 모를걸. 약속 지켜. 네가 회사로 돌아오면 날 며칠 쉬게 하겠다고 약속했잖아. 네가 잊을 수 있으니 내가 계속 일깨워 주었을 뿐이야. 그리고 내년에 우리 효진이가 아이를 낳을 때 나에게 출산 휴가를 두 달 주기로 약속한 것도 잊지 마.”전태윤은 그를 꾸지람했다.“네가 아기를 낳는 것도 아닌데. 출산 휴가는 한 달이면 돼. 네 아내의 산후조리만 잘 돌보다가 바로 출근해. 게다가 너의 집에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은데 산후조리가 끝나면 굳이 네가 나서지 않아도 될걸. 내가 두 개월 휴가를 주는 것도 너무 길다고 생각하는데 적게 줬다고 생각하다니.”소정남은 바로 반박했다.“예정 씨가 아기를 낳을 때 네가 매일 회사에 돌아와서 평소처럼 일할 수 있고 예정 씨의 산후조리를 돌보지 않는다면 내가 출산 휴가를 한 달만 낼게. 내가 아기를 낳는 것은 아니지만 난 남편으로서 효진이가 날 가장 필요로 할 때 내가 반드시 곁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전태윤이 말을 이었다.“상황을 보면서 회사가 바쁘지 않으면 내가 3개월 휴가 줄게, 됐지?”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면 전태윤도 하예정이 출산하면 그녀의 옆에서 도와주고 싶었을 것이다.산후조리 때 특별히 잘 보살펴야 한다.소정남은 재빨리 말했다.“예정 씨, 들으셨죠? 태윤이가 저에게 출산 휴가 3개월을 주겠다고 약속했어요.”하예정은 웃으며 대답했다.“들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증인으로 되어드릴게요. 태윤 씨가 반드시 약속 지킬 거예요.”심효진의 임신 기간이 하예정보다 길었기에 내년 5월쯤에 아기가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이제 새해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소정남도 그의 상사와 내년 출산 휴가를 미리 상의하고 있었다.소정남은 그제야 시름을 놓으며 일어나 전태윤에게 말했다.“그럼 난 먼저 돌아가서 일할게. 오늘 업무를 전부 처리해 놓아야 내일 휴가를 잘 보낼 수 있을 테니까.”이틀간의 휴가를 얻은 소정남은
“준하 씨와 소현 언니가 바래다주러 가셨어요.”소정남이 말했다.“온 지 이틀도 안 됐는데 벌써 가셨어요? 제가 음식 대접할 시간도 없었네요.”하예정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시간 있을 때 A시에 가서 식사 초대하면 되죠. 준하 씨가 이번에 관성으로 온 이유는 단지 용정이가 우빈이와 함께 놀게 하려는 것뿐이에요.”소정남은 전씨 가문의 대표 부인 앞에서 그의 고통을 호소했다.“제가 시간이 전혀 없었어요. 태윤이가 결혼 휴가를 내서 오늘에야 출근했는데... 제가 너무 바빠서 물 한 잔 마실 시간도 없었어요. 제가 태윤에게 말할 틈이 없었는데 내일 제가 휴가를 내야겠어요. 좀 이따가 태윤이가 동의하지 않으면 예정 씨가 저를 도와주셔야 해요. 제가 한 달 동안 푹 쉬지 못했거든요. 내일 휴가를 내는 것도 휴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효진이와 함께 임신 검사받으러 가기 위해서예요.”하예정이 흔쾌히 대답했다.“좋아요. 태윤 씨가 정남 씨의 휴가를 허락하지 않는다면 제가 도와서 말씀드릴게요. 요즘 정말 수고 많으세요. 필요하시면 제가 태윤 씨에게 휴가 이틀 내주라고 설득할게요. 차라리 휴가 낼 필요 없이 내일 효진이와 함께 검사받으러 가세요.”전태윤 부부가 결혼식 후 편안한 신혼여행을 보내게 되었다. 비록 관성을 떠나지 않았지만,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소정남이 전태윤의 업무량을 분담한 덕이다.이제 전태윤이 회사로 돌아왔으니 적절한 시기에 가장 바삐 돌아쳤던 소정남을 쉬게 해야 했다.소정남이 대답했다.“이틀 쉴 수 있다면 더없이 좋죠. 날씨도 추워졌는데 효진이가 샤브샤브를 먹고 싶어 하더라고요. 제가 줄곧 데리고 나갈 시간이 없었어요. 집에서 먹을 수는 있지만, 저의 사촌 누나가 자꾸 잔소리를 늘어놓으셔서 먹는다고 해도 효진이가 불편해해서 늘 나가서 먹고 싶다고 했거든요. 내일 함께 검사를 받고 저녁에 샤브샤브 먹으러 가야겠어요. 효진이가 임신한 뒤로 뭐 먹고 싶을 때마다 즉시 입에 넣고 싶어 하던데 예정 씨도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