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그녀는 체면도 무릅쓰고 성소현에게 소정남에 관한 얘기를 캐물었는데 소정남이 누군가를 다스리려면 상대는 죽지 못해 사는 꼴이 된다고 했다.그는 상대가 모든 걸 조금씩 잃어가고 그 속에서 차츰차츰 절망감을 느끼며 가슴을 후벼 파듯이 무척 괴롭힌다고 한다.하여 심효진은 만에 하나 소정남을 거절했다가 그의 심기를 건드려 괜한 전태윤만 괴롭힘을 당할까 봐 걱정했다.“일단 시도는 해볼게. 걱정 마. 나 자신을 무리하게 굴지는 않을 테니까.”심효진은 전태윤을 걱정하는 건 제쳐두고 절대 그녀 자신을 무리하게 몰아붙이진 않을 것이다.“예정아, 어젯밤에 소현 씨 집에 안 갔어? 예진 언니가 우빈이 데려왔을 때 모습 보고 나 깜짝 놀랐잖아.”그 일만 생각하면 하예정은 화가 울컥 치밀어 주씨 집안 사람들을 또 한 번 맹비난했다.김은희와 주서인이 언니네 회사에 찾아가지만 않았어도 하예정은 지금 전태윤과 싸울 일이 없었을 텐데!다만 전태윤의 성격대로라면 둘은 조만간 싸울 게 뻔하다. 얼마나 더 싸워야 서로 날 선 감정이 둥글둥글해질 수 있을까?“효진아, 저녁에 퇴근하고 우리 함께 바에 가서 술 한잔해.”심효진이 웃으며 대답했다.“남편이 출장 가고 없으니 너 제법 대범해졌다.”“집에 있어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우린 서로 신경 안 써.”말투가 이상한 걸 보아 부부싸움을 한 듯싶었다. 심효진은 입꼬리를 씩 올리며 하예정의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예정아, 태윤 씨랑 또 싸웠지?”심효진이 몸져누웠던 그날도 두 사람은 크게 한바탕 싸울 뻔했다.이유는 전태윤이 마침 김진우가 하예정에게 꽃을 선물하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이 일로 심효진은 또 친히 김진우를 찾아가 진지한 대화를 나눴다.여전히 마음을 접지 못하는 김진우를 보며 심효진도 내심 불안했다. 그렇게 열심히 설득했건만 동생은 전혀 새겨듣지 않았다.김진우는 지금 막다른 골목에 갇혀있다. 앞으로 나아가려 해도 더는 길이 없고 뒤로 물러서는 건 그가 원치 않았다. 하여 이렇게 버티고 있을 뿐
그녀는 몸을 홱 돌려 다시 사무실에 돌아갔다. 그 동료는 아직도 신이 나서 사람들과 수다를 떨었다.하예진은 곧게 그 동료에게 다가갔다.상대는 그제야 하예진이 다시 돌아온 걸 알아챘다.누구 험담을 하다가 당사자에게 바로 현장을 잡히는 건 실로 난감한 일이었다. 그 여자 동료는 어쩔 바를 몰랐다.“혹시 노 대표님을 짝사랑하세요?”하예진의 한마디에 그 여자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아니거든요.”상대가 부인했다.“그런데 왜 나랑 대표님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소문을 퍼뜨리는 건데요? 재미있어요 이 상황이? 나 방금 그쪽 말투에서 엄청 질투하고 있다는 걸 느꼈어요. 그쪽 대표님 짝사랑하는 게 틀림없어요. 그래서 항상 날 겨냥하는 거고요. 다들 믿거나 말거나 난 대표님께 아무 감정도 없어요. 맞아요, 나 이혼했어요. 쓰레기 같은 남자가 바람을 피웠는데 그럼 이혼을 안 하고 남겨뒀다가 함께 구정이라도 보내야 하나요? 내가 이혼했다는 이유만으로 대표님을 꼬시려는 것처럼 함부로 말해도 돼요? 다들 해도 해도 너무 하네요 진짜! 노 대표님은 정정당당한 분이세요. 나랑 대표님은 일말의 감정도 없어요. 만약 있었다고 해도 대표님이 굳이 당신들에게 숨길 가치가 있을까요?”하예진이 싸늘한 눈빛으로 사람들을 쳐다보며 냉랭하게 말했다.“한 번만 더 함부로 입을 놀리고 루머를 퍼뜨렸다가 비방죄로 확 고소해버릴 줄 알아요!”말을 마친 그녀는 곧게 사무실을 나섰다.여자 동료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다른 사람들은 전부 차갑게 자리를 떠난 하예진을 쳐다봤다. 다들 그녀가 좀 전에 했던 말을 똑똑히 들었다.왠지 모두에게 경고장을 날리는 듯한 기세였다.회사에서 하예진에 관한 루머가 너무 많아 진짜 비방죄로 그들을 전부 고소한다면...“얼굴 왜 그래?”하예진이 얼굴을 긁힌 상처가 아직 완전히 가라앉지 않았다. 이를 본 노동명이 관심 조로 그녀에게 물었다.“며칠 뒤면 나을 거예요. 관심해줘서 고마워요 대표님.”하예진은 그의 책상과 2미터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노동명이 망설임 없이 말했다.“내가 예진 씨를 채용한 바람에 회사에서 발걸음을 내딛기가 힘들다는 거 나도 알아. 하지만 다른 사람 신경 쓸 필요 없어. 예진 씨는 자기 일만 잘하면 돼.”“대표님, 저 일 그만두고 싶어요.”노동명이 그녀를 지긋이 바라보며 물었다.“이유가 뭐지?”하예진이 한참 동안 입을 꾹 다물다가 고개를 들고 노동명을 올려다보았다.“그때 저는 이혼 때문에 아들의 양육권을 가져야 해서 다른 사람들이 저를 낙하산이라고 수군거리고 뒤에서 몰래 모함해도 다 참았어요. 왜냐하면 안정된 일자리가 있어야 우빈의 양육권을 가져오는 데 유리하거든요.”“그러니까 지금 이혼도 하고 아들의 양육권도 가졌겠다, 그래서 그만두려고? 아직 수습 기간도 끝나지 않았어.”노동명이 계속하여 말을 이었다.“예진 씨는 능력 있는 사람이야. 직장 생활이 복잡하고 쉽지 않다는 걸 예진 씨도 알고 있을 거야. 다른 사람들이 뭐라 하든 예진 씨만 떳떳하면 되잖아, 휘둘릴 필요 없어.”“하지만 다들 제가 대표님한테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고 생각해요. 대표님의 명성에 누를 끼칠 순 없어요.”사람이 많은 곳에 이런저런 얘기가 떠돌기 마련이고 하예진도 잘 알고 있었다.전에 그녀는 재무 총괄 담당자였고 노씨 그룹에 들어온 것도 노동명이 직접 뽑은 것이라 다들 그녀를 낙하산이라고 뒤에서 수군거렸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의 상사도 그녀에게 자리를 빼앗길까 봐 잔뜩 경계했다.게다가 화려한 싱글인 노동명이 한 여자에게 관심을 많이 쏟는다면 그 여자는 자연스럽게 질투의 대상이 된다.그들과 다투고 싶지 않았던 하예진은 일을 그만두고 자신의 계획대로 창업하고 싶었다.그녀의 말에 노동명이 멈칫했다.“누가 그런 소리를 해? 예진 씨는 그냥 일만 열심히 해. 그런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하는 사람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 앞으로 누가 뒤에서 그딴 소리를 했다간 바로 해고할 거야. 날 건드린 대가가 뭔지 톡톡히 보여줘야지!”그때 하예진에게 이 일자리를 준 건 전태윤의 체면을 봐서였다.그
“어때? 할래? 만약 하겠다면 태윤의 처형인데 가겟세 싸게 해줄게. 하지만 다른 사람한테는 절대 얘기하지 마. 혹시라도 다른 사람들이 알게 돼서 가겟세 깎아달라고 하면 나만 손해니까.”하예진은 귀가 솔깃했다. 매일 출퇴근할 때마다 그 거리를 지나가야 하기에 유동 인구가 엄청났다. 그 길의 식당은 물론이고 커피숍도 장사가 아주 잘 됐다. 그녀는 그 거리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무척이나 부러워했었는데 전부 노동명의 가게일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가겟세가 얼마예요?”“관성 시 중심의 가겟세가 다른 데보다 훨씬 비싸. 가게 면적이 작은 건 십몇 평이고 큰 건 사십 평 정도 돼. 무슨 가게를 하려고?”“조식 가게요.”“그럼 너무 클 필요는 없겠네. 조식 가격이 비싸지 않으니까 십몇 평 정도 되는 가게면 될 것 같아. 이따가 그 노부부가 그만두는 가게가 면적이 얼마나 되는지 물어볼게. 한 달 가겟세는 160만 원만 줘. 절대 비밀이야, 알았지? 다른 사람한테서는 200만 원 넘게 받는단 말이야.”하예진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절대 남한테 얘기하지 않을게요, 대표님. 그나저나 이렇게 싸게 받아서 손해 보는 거 아니에요?”“가게를 산 원금은 진작 다 벌었어. 지금 들어오는 가겟세는 전부 수익이니까 부담 갖지 말고 열심히 해. 나중에 예진 씨가 원금을 벌어들이면 그때 스스로 알아서 가겟세를 올려줘도 되고.”그도 결국에는 장사꾼이기에 이익을 따져야 했다.하예진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알았어요. 나중에 원금을 다 벌면 다른 사람들이 내는 가겟세만큼 저도 낼게요. 대표님, 그 가게 제가 할게요. 지금 당장 가서 상사한테 일 그만두겠다고 얘기해야겠어요.”“그래. 다 정리하면 계약 담당자더러 예진 씨한테 연락하라고 할게.”노동명이 시원시원하게 말했다.“수습 기간이 채 끝나기 전에 그만두는 거니까 상사한테 얘기하면 바로 월급 계산해서 줄 거야.”“고마워요, 대표님.”하예진이 진심으로 고마워했다.“고맙긴. 나도 태윤이 체면을 봐서 싸게 내준 거야. 나중
“주형인, 너 혹시 고객들한테 무슨 잘못이라도 했어? 대체 뭘 한 거야?”주형인이 회사를 대신해 많은 계약을 체결하면서 회사에 적지 않은 돈을 벌어다 주었다. 게다가 졸업하자마자 유진 테크에 들어와 지금까지 일해온지라 대표는 고참인 그에게 믿음이 아주 두터웠다.회사의 수많은 사장 중에 주형인이 가장 어렸지만 회사에 많은 이익을 가져다주어 사장 자리에 앉게 되었다. 임원들은 질투와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감히 뭐라 할 수도 없었다.대표가 주형인을 어찌나 중히 여기는지 시간이 없어 초대받은 비즈니스 파티에 참석하지 못할 경우 주형인을 대신 참석하게 했다. 더 많은 걸 보고 배운다면 회사를 위해 더 많은 고객을 끌어들일 수 있으니까.주형인도 그를 실망하게 하지 않았다. 비즈니스 파티에 참석한 후로 정말로 많은 계약을 체결했다. 그랬던 그였는데 이젠 주형인의 주문이라면 전부 취소하거나 협력을 멈추려 했다. 다른 고객들도 마음을 바꾸긴 했지만 주형인이 담당하는 고객들이 번복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대표님, 전 아무 잘못도 한 게 없어요. 늘 고객님들을 깍듯이 모셨는데 잘못이라니요.”주형인이 계속하여 설명했다.“제가 다시 고객들을 찾아가서 얘기해볼게요. 최대한 다시 주문하게 해서 회사의 손해를 줄이도록 할게요.”“이 얘기만 벌써 몇 번째야! 아무런 효과도 없잖아. 유진 테크가 지금까지 오면서 이런 위기는 처음이야. 공장 직원들도 곧 휴가에 들어가는데 아직도 주문을 받지 못한다면 연후에 작업할 필요도 없어! 주형인, 잘 생각해 봐. 잘못을 저지른 게 있는지 없는지. 지금 회사 돌아가는 거 보면 누군가 일부러 억압을 주는 게 분명해. 예전부터 전씨 그룹의 한 계열사와 경쟁했었는데 이젠 그 계열사가 우리 주문까지 싹 다 빼앗아갔어.”대표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요즘 취소된 주문 건을 다시 만회하느라 주형인뿐만 아니라 대표도 애를 먹긴 마찬가지였다.분명 누군가 일부러 그들을 억압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누군지는 알 수가 없었다. 고객
김은희는 하예진에게 재벌가에 시집간 이모가 있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바로 후회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들의 이혼을 끝까지 뜯어말렸을 텐데.만약 이혼하지 않고 처가의 도움으로 성씨 그룹에 들어갔더라면 수입도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어쩌면 연봉이 20억이 넘을지도 모른다.그녀는 다시 하예진과 재결합하라고 아들에게 제안했지만 단칼에 거절당했고 서현주도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 후로 김은희는 대놓고 얘기하는 대신 손자를 이용할 계획이었다.주형인이 주우빈을 자주 데려오고 또 데려다준다면 하예진과 자주 마주치게 될 것이다. 어쨌거나 알고 지낸 지 12년이나 되고 두 사람 사이에 아들도 있어 서로 마음이 진정되면 재결합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엄마, 우빈이 보고 싶으면 누나한테 예정이 가게에 데려다 달라고 하면 되잖아. 굳이 우빈이를 데리고 올 필요 없어. 데려와봤자 애를 잘 달래지도 못하면서. 애가 또 놀라면 큰일이야.”주형인은 그녀의 꿍꿍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하예진의 이모가 이경혜라는 사실을 듣고 주형인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하예진과 이혼한 건 후회하지 않았다. 그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여자는 서현주니까.그는 서현주와 남은 인생을 함께 보내고 싶었다. 하여 구정 후인 밸런타인데이에 구청에 가서 혼인신고부터 하고 나중에 결혼식을 올릴 계획이었다. 그는 서현주에게 꼭 말한 대로 할 거라고 약속했었다.“엄마, 나 지금 바빠. 할 얘기 있으면 이따가 퇴근하고 다시 해.”더는 어머니의 잔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던 주형인은 그녀가 잔소리하기 전에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고개를 들자마자 서현주의 낯빛이 어두운 걸 보고는 재빨리 서현주를 잡아당겨 허벅지에 앉혔다.“현주야, 엄마가 뭐라 하든 신경 쓰지 마. 무슨 일이 있어도 내 마음은 변하지 않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너고 결혼할 여자는 너야. 엄마가 아니라.”“하예진한테 돈 많은 이모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 형인 씨 어머님이랑 누나 지금 다 후회하고 있죠? 걔는 정말 무슨 복이래요
그녀는 언니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평소와 같은 여동생의 모습에 하예진도 조금 마음이 놓였다.“제부가 너한테 잘해주는 걸 봐서는 그런 작은 일로 너랑 싸울 사람은 아니야. 싸우지 않았다니 언니도 마음이 놓여.”하예정이 속으로 중얼거렸다.‘고작 그런 작은 일로 나랑 싸우는 게 태윤 씨야.’종일 연락도 없는 사람에게 그녀도 먼저 말을 걸고 싶진 않았다. 하예정은 자신에게 아무 잘못이 없다고 생각했다.부부가 처음 냉전했을 때 아무런 느낌도 없었지만 지난번에 김진우가 그녀에게 고백하는 걸 들켰을 땐 당황함을 감추지 못하고 다짜고짜 회사로 쫓아가 그에게 설명했었다.그리고 지금은 너무도 속상했다. 아무래도 감정이 생겨서 그런 모양이다.“예정아, 우빈이 내가 데리고 갈게. 나 가게 차리기로 했어. 가서 계획서 쓰려고.”“알았어. 숙희 아주머니랑 같이 가. 그래야 우빈이 언니한테 떼를 안 쓰지.”하예진은 동생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익숙한 환경에서 주우빈은 장난이 심하여 누군가 옆에서 돌봐야 했다.사실 숙희 아주머니는 하예정과 심효진이 저녁에 술 먹으러 간다는 소리를 듣고 어느 술집으로 가는지 궁금하여 남고 싶었다. 그런데 하예진네 집으로 가라고 하니 그대로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혹시라도 하예정이 의심하면 안 되니까.“아주머니가 운전해서 언니랑 우빈이 데려다줘요.”하예정이 차 키를 숙희 아주머니에게 건넸다.“전 이따가 효진 씨 차 타면 돼요.”‘아니, 잠깐, 이따가 술집 가서 술을 마시면 효진이도 운전 못 하는데.’“알았어요.”숙희 아주머니는 차 키를 받고 하예진 모자와 함께 서점을 나섰다.하예진의 월세방에 도착한 후 숙희 아주머니는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로 전태윤에게 몰래 문자했다.「도련님, 사모님이랑 효진 씨 저녁에 술 마시러 술집 간대요.」엊저녁 밤을 새운 전태윤은 오전까지 버텼지만 오후에는 버티지 못하고 의자에 기대 잠을 잤다.숙희 아주머니가 보낸 문자를 받긴 했지만 깊이 잠든 바람에 문자 알림 소리를 듣지 못하여 답장
“예정아, 넌 나가지 말고 여기 있어. 내가 해결할게.”심효진은 한마디 말을 남기고는 쏜살같이 서점 문 앞으로 달려가 김진우를 잡아당기더니 밖으로 끌어냈다.“누나.”김진우는 맥 한번 쓰지 못하고 사촌 누나에게 질질 끌려갔다. 멈추려고 애를 썼지만 심효진은 온 힘을 다해 그를 차 앞까지 끌어냈다.“차 문 열어.”심효진이 차가운 얼굴로 명령하듯 말했다. 그녀를 쳐다보는 김진우의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다.“누나.”“차 문 열라고!”심효진이 다시 한번 진지하게 명령했다. 김진우보다 키가 훨씬 작았지만 기세만큼은 전혀 뒤지지 않았다. 그녀의 기에 짓눌린 김진우는 저도 모르게 차 문을 열었다.심효진은 차 문을 잡고 김진우를 가차 없이 밀어 넣었다.“난 누나 찾으러 온 거야. 예정 누나가 아니라.”심효진은 김진우를 억지로 조수석에 태운 후 안전벨트까지 매주었다.“제대로 앉아. 내리지 말고!”심효진은 조수석 차 문을 닫은 후 운전석에 탔다. 동작이 어찌나 깔끔하고 빠른지 아주 물 흐르듯이 단숨에 이루어졌다. 하예정이 가게에서 나왔을 때 심효진은 이미 차에 시동을 걸고 김진우와 가버렸다.하예정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김진우에게 여러 번이나 얘기했었지만 또 그녀를 찾으러 왔다. 이러다가 가게까지 옮겨야 하나? 심효진과의 사이가 틀어지게 만들려는 작정인가? 다행히 내일부터 학생들이 방학이라 가게에 나올 필요가 없이 집에서 공예품을 만들면 되었다.하예정은 이내 시선을 거두고 다시 정리에 몰두했다. 가게 문 앞에 놓인 진열대를 일일이 가게 안으로 옮겼다.심효진은 미친 듯이 차를 몰고 달렸다. 김진우가 여러 번이고 불렀지만 그녀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누나.”김진우도 살짝 화를 내기 시작했다.“지금 어디 가는 거야? 얘기하고 있잖아, 왜 대꾸도 안 해? 예정 누나를 더는 사랑해선 안 된다고 해서 사촌 누나를 만나러 와도 안 돼?”“예정이가 가게에 있을 땐 오지 마.”심효진이 고개를 돌려 그를 째려보았다.“진우야, 예정이가 가게를 옮기길 원해? 아니
그들은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었다.“고 대표님, 저는 회사의 프로젝트 협력에 대해 논의하러 왔어요. 방안을 가져왔으니 한번 보도록 하세요.”이윤미는 말하면서 자신 비서의 손에서 서류를 건네받은 뒤 두 손으로 고현에게 건넸다.고현은 서류를 받아 들고 자세히 훑어보기 시작했다.한참 후에 다 훑어본 서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그녀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말을 꺼냈다.“윤미 씨의 방안이 괜찮아 보이지만 이씨 그룹의 실력이 부족해서 별로 협력하고 싶지 않네요.”고현은 직설적으로 말했다.협력업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이윤미의 개인 회사와 협력하려 했던 것은 그냥 단순히 이윤미의 체면을 세워주려고 했던 것이었다.하예진의 회사도 설립되고 나면 고씨 그룹과 협력할 예정이었다.이윤미가 호탕하게 웃었다.“고 대표님, 우리 이씨 그룹이 귀사에 비해 조금 못하단 걸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우리 이씨 그룹도 강성에서 백 년을 이어온 명문가라서 뿌리가 깊어요. 저도 일부 프로젝트를 책임졌으니 어느 정도 발언권이 있어요. 고 대표님이 저와 협력한다면 서로 윈윈할 수 있을 거예요. 당연히 대표님의 발목을 잡는 일은 없을 거고요.”이윤미와 그녀의 비서는 협상에 진전이 없을 거란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고현에게 잘 보이려고 최선을 다했다.이씨 그룹을 아무리 추켜세워도 고현이 마음을 바꾸지 않자, 이윤미가 말했다.“고 대표님, 협력하지 않더라도 저와의 인연은 끊지 말았으면 좋겠네요. 이번에 비록 우리 이씨 그룹이 대표님의 눈에 들지 못했지만, 나중에는 협력할 기회가 생길지도 몰라요.”고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렇게 될 거예요.”이씨 가문이 권력에서 물러난다면 가능성이 있었다.이씨 그룹의 권력을 쥐고 있는 이씨 가문이 고씨 그룹과의 협력을 이용해 힘을 키우는 것이 두려워 고현은 협력하기 싫었던 것이었다.만약 이씨 그룹의 세력이 커진다면 하예진의 앞날이 더욱 험난해질 것 같았다.이윤미가 웃으며 말했다.“우리 이씨 그룹이 열심히 노력해서 하루빨
고빈은 몇 걸음 걷다가 고개를 돌려 이윤미를 쳐다보았다.한동안 보지 못해서 그런지 몰라도 자신감 넘치는 아우라를 발산하는 이윤미가 전보다 훨씬 예뻐 보였다.조금 전에 멈칫했던 것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애초부터 이런 모습이었다면 누나가 내게 소개해 줬을 때 거절하지 않았을 텐데.”고빈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물론 그녀에게 대시한다 해도 너무 늦지는 않았지만 이씨 가문과 엮이는 것이 싫어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이씨 가문에 이윤미 같은 인재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이씨 가문에서 자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그녀는 어릴 때부터 열악한 환경에서 자란 탓에 강인한 성격을 만들 수 있었다.그뿐만 아니라 상대를 방심하게 하여 허를 찌르는 데 능숙했다.고빈이 좋아하는 스타일은 이윤미처럼 가식이 많고 거짓말을 잘하는 여자가 아니라 순수한 여자였다.‘이윤미 같은 여자는 형에게 적합해. 둘이 함께 사람들의 뒤통수를 치면 누구도 당해내지 못해. 형이 이윤미를 높게 평가한 것을 감안할 때 둘이 충분히 한 쌍의 커플로 발전할 수 있어. 만약 그렇게 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놀아나겠지. 아니구나. 난 형이 없잖아! 강성의 사람들은 내게 형이 없고 누나만 있다는 사실을 다행으로 여겨야 해.’자신과 인사하는 것만으로 고빈이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할 줄을 이윤미는 당연히 알지 못했다.이윤미가 비서와 함께 사무실로 들어서자, 고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녀의 체면을 세워주었다.“윤미 씨, 뭐 드실래요? 비서에게 준비하라고 말할게요.”“따뜻한 물 한 잔이면 됩니다. 밤에 잠 못 잘까 봐 커피는 감히 마시지 못하겠네요.”고현은 두 사람을 소파에 앉으라고 말한 뒤 따뜻한 물을 따라주라고 자기 비서에게 지시했다.자리에 도로 앉은 고현이 커피잔을 들며 말했다.“저는 아침과 오후에 한 잔씩 마셔요. 습관 돼서 그런지 밤에 잠을 자는 데 별 지장은 없어요.”그녀는 보통 카페인이 효력이 사라진 자정이 되어서야 자는지라 걱정거리가 없는 한 수면에 큰 영향
“그러면 지금 바로 할머니께 전화할게. 퇴근 후 집에서 샤부샤부 먹겠으니, 집사에게 말하라고 말이야. 사람 좀 있어야 분위기도 나니까 이진 부부도 부를게. ”그러자 하예정이 말했다.“제가 할머니께 전화할 테니 당신은 가서 일 보세요. 아니면 오늘 밤 관성에 있는 사람 중 시간 있는 사람들을 와서 밥 먹으라고 가족 단톡방에 말 보낼게요. 하긴 사람이 많으면 시끌벅적하고 좋긴 하죠.”전태윤이 웃었다.“다들 바쁘니까 오지 못할 거야. 이진 부부만 불러.”“당신 말한 대로 할 테니 얼른 가서 일 보라니까요. 수중의 일부터 빨리 처리해야 나중에 그나마 수월해질 건데.”오랜만에 회사로 출근한 전태윤은 야근하지 않고 퇴근 시간에 맞춰 아내와 함께 집으로 가려 했다.아내의 거듭된 재촉에 전태윤은 마지못해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일을 시작했다.하예정은 할머니에게 전화하여 저녁에 전이진 부부를 불러 샤부샤부를 먹겠다고 말하자, 떠들썩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할머니는 당연히 기뻐하며 바로 승낙했다.강성, 이윤미가 타고 있던 차량이 고씨 그룹으로 향하고 있었다.차가 멈추자, 먼저 차에서 내린 이윤미의 비서는 뒷좌석의 차 문을 열어 이윤미가 차에서 내리는 것을 도왔다.이윤미는 자신의 비서와 함께 사무실 건물을 향해 걸어갔다.수십 층에 불과한 이씨 그룹의 청사와 달리 중심상업지역에 자리 잡은 고씨 그룹의 청사는 강성의 모든 대기업 중 가장 높은 층수를 자랑했다.이미 오기 전에 고현에게 전화하여 프로젝트 협력에 관해 이야기할 시간이 있는지 물어본 후, 이윤미가 자신의 비서를 데리고 찾아온 것이었다.고현이 자신의 계획을 꿰뚫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이윤미는 그래도 이씨 가문 딸의 신분으로 협력에 대해 논의하려고 했다.만약 그것이 통하지 않을 때 다시 사적으로 회사 대표의 신분으로 얘기해 볼 속셈이었다.고현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이윤미는 잘 알고 있었다.그녀와 척을 지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이윤미의 앞날에 먹구름이 낄 것이 뻔했다.이윤미가 여러
전태윤의 뒷부분 말을 들은 소정남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말하지 않으면 내가 얼마나 바쁘고 피곤한지 넌 모를걸. 약속 지켜. 네가 회사로 돌아오면 날 며칠 쉬게 하겠다고 약속했잖아. 네가 잊을 수 있으니 내가 계속 일깨워 주었을 뿐이야. 그리고 내년에 우리 효진이가 아이를 낳을 때 나에게 출산 휴가를 두 달 주기로 약속한 것도 잊지 마.”전태윤은 그를 꾸지람했다.“네가 아기를 낳는 것도 아닌데. 출산 휴가는 한 달이면 돼. 네 아내의 산후조리만 잘 돌보다가 바로 출근해. 게다가 너의 집에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은데 산후조리가 끝나면 굳이 네가 나서지 않아도 될걸. 내가 두 개월 휴가를 주는 것도 너무 길다고 생각하는데 적게 줬다고 생각하다니.”소정남은 바로 반박했다.“예정 씨가 아기를 낳을 때 네가 매일 회사에 돌아와서 평소처럼 일할 수 있고 예정 씨의 산후조리를 돌보지 않는다면 내가 출산 휴가를 한 달만 낼게. 내가 아기를 낳는 것은 아니지만 난 남편으로서 효진이가 날 가장 필요로 할 때 내가 반드시 곁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전태윤이 말을 이었다.“상황을 보면서 회사가 바쁘지 않으면 내가 3개월 휴가 줄게, 됐지?”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면 전태윤도 하예정이 출산하면 그녀의 옆에서 도와주고 싶었을 것이다.산후조리 때 특별히 잘 보살펴야 한다.소정남은 재빨리 말했다.“예정 씨, 들으셨죠? 태윤이가 저에게 출산 휴가 3개월을 주겠다고 약속했어요.”하예정은 웃으며 대답했다.“들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증인으로 되어드릴게요. 태윤 씨가 반드시 약속 지킬 거예요.”심효진의 임신 기간이 하예정보다 길었기에 내년 5월쯤에 아기가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이제 새해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소정남도 그의 상사와 내년 출산 휴가를 미리 상의하고 있었다.소정남은 그제야 시름을 놓으며 일어나 전태윤에게 말했다.“그럼 난 먼저 돌아가서 일할게. 오늘 업무를 전부 처리해 놓아야 내일 휴가를 잘 보낼 수 있을 테니까.”이틀간의 휴가를 얻은 소정남은
“준하 씨와 소현 언니가 바래다주러 가셨어요.”소정남이 말했다.“온 지 이틀도 안 됐는데 벌써 가셨어요? 제가 음식 대접할 시간도 없었네요.”하예정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시간 있을 때 A시에 가서 식사 초대하면 되죠. 준하 씨가 이번에 관성으로 온 이유는 단지 용정이가 우빈이와 함께 놀게 하려는 것뿐이에요.”소정남은 전씨 가문의 대표 부인 앞에서 그의 고통을 호소했다.“제가 시간이 전혀 없었어요. 태윤이가 결혼 휴가를 내서 오늘에야 출근했는데... 제가 너무 바빠서 물 한 잔 마실 시간도 없었어요. 제가 태윤에게 말할 틈이 없었는데 내일 제가 휴가를 내야겠어요. 좀 이따가 태윤이가 동의하지 않으면 예정 씨가 저를 도와주셔야 해요. 제가 한 달 동안 푹 쉬지 못했거든요. 내일 휴가를 내는 것도 휴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효진이와 함께 임신 검사받으러 가기 위해서예요.”하예정이 흔쾌히 대답했다.“좋아요. 태윤 씨가 정남 씨의 휴가를 허락하지 않는다면 제가 도와서 말씀드릴게요. 요즘 정말 수고 많으세요. 필요하시면 제가 태윤 씨에게 휴가 이틀 내주라고 설득할게요. 차라리 휴가 낼 필요 없이 내일 효진이와 함께 검사받으러 가세요.”전태윤 부부가 결혼식 후 편안한 신혼여행을 보내게 되었다. 비록 관성을 떠나지 않았지만,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소정남이 전태윤의 업무량을 분담한 덕이다.이제 전태윤이 회사로 돌아왔으니 적절한 시기에 가장 바삐 돌아쳤던 소정남을 쉬게 해야 했다.소정남이 대답했다.“이틀 쉴 수 있다면 더없이 좋죠. 날씨도 추워졌는데 효진이가 샤브샤브를 먹고 싶어 하더라고요. 제가 줄곧 데리고 나갈 시간이 없었어요. 집에서 먹을 수는 있지만, 저의 사촌 누나가 자꾸 잔소리를 늘어놓으셔서 먹는다고 해도 효진이가 불편해해서 늘 나가서 먹고 싶다고 했거든요. 내일 함께 검사를 받고 저녁에 샤브샤브 먹으러 가야겠어요. 효진이가 임신한 뒤로 뭐 먹고 싶을 때마다 즉시 입에 넣고 싶어 하던데 예정 씨도 그
우빈은 형이 될 사람이기 때문에 동생들을 사랑할 줄 알았다.“내가 그렇게 연약한 사람이 아니야. 네가 서너 살밖에 안 되는데 무거우면 얼마나 무겁다고.”하예정은 웃으며 우빈을 안았다.우빈은 뚱뚱하지 않다.녀석은 정말 졸렸는지 하예정에게 안긴 지 2분도 안 되어 금세 잠이 들었다.30분 후, 차 두 대가 전씨 그룹으로 들어섰다.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려고 생각했지만 고민 끝에 그를 놀라게 해주기로 했다.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저녁에 퇴근할 때 데리러 오겠다고 했지만 언제 올지는 알려주지 않았다.지금 앞당겨 도착한 그녀는 갑자기 그의 사무실에 갑자기 나타나 서프라이즈를 해주려고 했다.심효진은 부부가 함께 지내면서 때때로 상대방에게 서프라이즈 해주면 부부 감정을 두텁게 해준다고 말한 적 있다.소설을 많이 본 성소현은 서프라이즈를 해주는 능력이 하예정보다 더 대단했다.하예정은 성소현에게서 이런 것들을 많이 배웠다.“사모님, 제가 우빈을 안아드릴게요.”경호원은 하예정의 품에서 우빈을 안아오려고 했다.그러나 하예정이 거절했다.“괜찮아요. 제가 안으면 돼요. 1층에서 기다리세요. 만약 볼 일이 있으면 먼저 가서 일을 보셔도 돼요. 태윤 씨가 퇴근하기까지 기다려야 하거든요.”그녀는 남편의 차를 타고 집에 가도 된다고 생각했다.경호원은 공손히 대답했다.“다른 개인적인 일은 없습니다. 큰 사모님을 보호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하예정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경호원들과 함께 회사 안으로 건물로 들어섰다.들어가는 길에 하예정을 본 직원들은 전부 예의 바르게 그녀에게 인사했다.하예정은 우빈을 안고 엘리베이터에 들어갔고 경호원들은 1층 귀빈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는 하예정과 우빈을 싣고 곧장 맨 위층으로 올라갔다.우빈은 너무 정신없이 놀고 피곤한지 아주 달콤하게 잠들었다. 아마 깨우지 않으면 어두워질 때까지 잘 수 있을 것이다.전태윤은 하예정이 일찍 도착할 줄은 몰랐다.전태윤의 비서가 대표 사무실 문을 두드리고
모연정도 맞장구쳤다.“맞아요. 용정은 가끔 혼자 놀 때 아무도 그를 보고 있지 않고 인기척을 듣지 못할 때 용정을 찾아가 보면 분명 사고를 치고 있는 거예요. 한 번은 녀석이 제 립스틱으로 바닥에 그림을 그렸다니까요.”성소현은 아이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가장 많이 접하는 아이가 바로 우빈이였다.성소현은 우빈이가 항상 철이 들고 귀엽고 총명하다고만 느꼈지, 이런 면이 있을 줄은 몰랐다.그녀의 눈에는 어린아이들이 전부 천사로 보였다.성소현의 친조카처럼 막 태어났을 때는 그다지 예뻐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은 갈수록 예뻐지고 있다.그녀는 친조카의 성장 다큐멘터리를 찍어준다며 매일 조카의 사진을 몇 장씩 찍어두었다.다만 눈물이 좀 많을 뿐이다.배가 고프면 울고 응가 해도 울었다. 말을 못 한 탓으로 아기는 입만 벌리면 울었다.모연정과 하예정은 잠시 아기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데 갑자기 예지호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쌍둥이가 깨어난 것을 보자 모연정은 일어나서 아들을 안으러 갔다.딸은 이미 예준성에게 안겨 있었다.예준성은 한 손으로 딸을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캐리어를 끌었는데 예준하가 그의 뒤를 따라다니며 말했다.“형, 내가 도와줄게. 내가 지연이 안아줄게.”예준성은 캐리어를 예준하에게 건네면서 말했다.“캐리어를 밖으로 끌고 나가서 차에 실어줘. 이따가 우리를 서원 리조트로 데려다줘.”그들의 개인 비행기는 서원 리조트에 주차되었다.예준하의 별장에는 예준하 부부의 개인 비행기를 주차할 수 있는 큰 공간이 없다.예준하는 입을 삐쭉 내밀면서 중얼거렸다.“지연이를 안고 싶은데 자꾸 캐리어만 끌게 하다니. 곧 돌아갈 거면서 지연이를 안지도 못하게 해. 살이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중얼중얼하던 예준하는 결국 예준성을 도와 캐리어를 끌어갔다.예준성은 딸을 안고 하예정 자매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모연정이 예지호를 안고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모연정에게 말했다.“연정아, 가자. 용정은?”“밖에서 우빈이와 놀고 있어요. 나가서 불러오면 돼
하예정은 갑자기 점쟁이가 자신과 전태윤의 결혼을 지지하면서 두 사람이 행복하게 살 거라고, 아들딸을 낳을 거라는 말을 떠올렸다.만약 하예정이 딸을 낳으면 과연 잘 자랄 수 있을까?만약 전씨 가문의 어르신들처럼 딸을 낳아도 잘 키울 수 없다면 그녀는 아이를 낳지 않을지언정 아이가 자신의 앞에서 목숨을 잃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을 도려내는 고통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서원 리조트의 풍수에 문제가 있는 건가!그러나 점쟁이는 리조트의 풍수 문제가 아니라고 말했다.점쟁이는 서원 리조트의 풍수 구조가 사업과 자식들이 번창할 것이라고 말했다.“예정아, 왜 그래? 안색이 안 좋아.”하예정의 안색이 변한 것을 유심히 본 성소현이 걱정스레 물었다.“내가 전씨 가문에서 대대로 낳은 딸이 세상을 뜨는 일을 언급해서 그래? 걱정하지 마. 네 뱃속의 이 아이는 틀림없이 아들일 거야. 우빈이가 말했듯이 네 배 속의 아기는 남자 아기일 거야. 게다가 네가 딸을 낳았다고 해도 현재 의학이 발달하고 임신 중에 그렇게 많은 임신 검사를 받을 수 있어서 분명 건강하게 자랄 거야. 태윤 씨 조상들의 일은 옛날얘기잖아. 청나라 말기 때 의학 기술이 얼마나 뒤처졌는데, 감기에 걸리기만 해도 사람 목숨을 빼앗아 갈 수 있는 시기잖아.”고대 궁안의 생활도 아주 좋았지만 죽은 아기들도 얼마나 많았던가!말을 마친 성소현은 일부러 하예정의 어깨를 감싸며 계속해서 말을 건넸다.“너도 태윤 씨에게 딸을 낳을 만큼 그렇게 좋은 팔자를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을걸. 너희들은 아들을 낳을 운명인 거지. 안 좋은 일은 생각하지 마. 너 놀란 것 좀 봐. 잘 들어. 내가 아기에게 준비한 선물들은 전부 남자아이 물건들이니까 꼭 아들을 낳아야 해.”하예정은 겨우 마음을 안정시켰다.아직 딸을 낳지도 않았는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로 걱정할 필요 없었다.게다가 점쟁이는 하예정이 아들딸을 낳을 운명이라고 했기에 그녀가 딸을 낳는다고 해도 반드시 건강하게 키워 안전하게 어른으로 성장할 것이다.혹은 둘째를 가
하예정은 바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용정을 예준하 곁으로 먼저 보냈다. 예준성 부부는 관성에 온 뒤로 줄곧 예준하의 별장에 머물렀다.예준하의 집에 도착하여 용정을 모연정 부부의 손에 넘겨주고 나서야 하예정의 긴장했던 신경이 풀리기 시작했다.“아줌마, 저 여기서 좀 더 놀 수 있을까요?”친구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우빈은 아쉬워하며 용정과 한 시간이라도 더 놀고 싶어 했다.우빈이가 입을 열었다.“용정이가 이번에 떠나게 되면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저랑 놀 수 있거든요.”하예정은 모연정을 쳐다보았고 모연정이 말을 건넸다.“저희도 짐을 정리해야 해서 30분 정도 있다가 집으로 갈 거예요. 두 아이를 30분만 더 놀게 해요. 용정도 우빈이와 헤어지는 것을 아쉬워하지만 이렇게 계속 놀게 할 수는 없잖아요. 너무 신나게 놀면 마음을 거두어들이기 어려워져요.”“그러게요. 정신없이 놀다 보면 자꾸 놀 생각만 하고 유치원은 가기 싫어질 거예요. 용정과 비교되지 않았다면 우빈은 아마 그의 사촌 이모처럼 강제적으로 차에 태워야 했을걸요.”성소현이 어렸을 때 유치원에 다니는 것을 꺼린 사실이 언급되자 모연정도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성소현은 예준성 부부를 배웅하러 왔는데 하예정이 그녀의 과거 이야기를 꺼내자 바로 얼굴을 붉히며 하예정을 가볍게 때렸다.“예정아, 너 정말 못된 것만 배운 거 아니야? 누가 어릴 때 유치원에 가고 싶었겠어?”하예정은 히죽히죽 웃었다.“저는 아마 가기 싫어한 적 없을걸요. 어쨌든 우리 부모님께서 내가 어렸을 때 유치원에 가기 싫어했다는 말씀하신 적 없었어요. 우리 언니도 말 한 적 없는걸요.”하예정은 유치원에 간 기억이 없지만, 하예진이 5살 연상이라 하예정이 유치원에 가기 싫어한 경험이 있으면 그녀에게 말했을 것이다.“우빈아, 얼른 놀아. 시간이 30분밖에 없어. 우리 모 아줌마를 배웅해 드려야 해. 그리고 이모부 회사로 가서 이모부가 퇴근하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집에 가서 밥 먹자. 오늘 실컷 놀고 내일부터 유치원에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