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윤은 완벽한 남자가 아니면 그녀의 절친에게 감히 소개할 엄두가 안 난다고 했는데 역시 그의 말은 믿을만했다.소정남은 타이밍이 맞지 않은 것 같아 살짝 아쉬워했다.그는 심효진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심효진은 사람들에게 물건을 잘 옮기라고 지휘하다가 소정남을 보더니 곧바로 다가와 대범하게 인사했다.“정남 씨.”“효진 씨.”소정남은 미소 지으며 관심 조로 물었다.“감기는 다 나았어요?”“네, 걱정해줘서 고마워요.”하예정은 살며시 전태윤을 잡아당기며 자리를 피했다. 두 사람에게 얘기 나눌 공간을 마련해준 것이다.하예정은 사석에서 남편에게 칭찬을 남발했다.“태윤 씨 동료분 참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아요. 저분도 전씨 그룹에서 대표직을 맡고 있죠? 호텔에서 나올 때 저분도 봤어요.”“대표 맞아. 직급이 높아서 다들 소 대표라고 불러.”곧이어 그는 하예정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소 대표가 비밀로 하라고 했는데 우린 부부니까 말해도 되겠지. 소 대표는 우리 대표님의 오른팔이나 다름없어서 무한한 신뢰를 받고 있어. 우리 회사에서 대표님을 제외하고 소 대표의 직급이 가장 높을걸.”하예정이 눈을 깜빡거렸다.“그렇게 대단해요?”전태윤은 제법 그럴싸한 듯 머리를 끄덕였다.“대단하지. 회사 사람들 소 대표 말만 나오면 다들 경외하지 않는 자가 없다니까.”하예정은 다시 한번 소정남을 바라봤다.한편 전태윤은 그런 그녀의 얼굴을 되돌리고 재빨리 볼에 입맞춤하며 목소리를 내리깔았다.“보지 마. 내가 더 잘생겼어.”“전씨 그룹 도련님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 한 번 더 보려고 했던 거예요. 전씨 그룹 도련님의 주변 분들도 다 이렇게 대단한데 그 도련님은 얼마나 더 훌륭할까요? 그래서 소현 씨도 푹 빠져 쉽게 헤어나오지 못한 거였네요.”전태윤은 허리를 곧게 펴고 중저음의 목소리로 말했다.“소 대표처럼 훌륭한 분이 달갑게 보조 역할을 하고 있으니 전씨 그룹 대표님은 당연히 소 대표보다 더 뛰어나겠지.”“우리 언니를 도와 주형인의 외도 증거를 수집한 사
시끌벅적한 오후가 지나고 날이 어두워지자 다시 조용한 일상으로 돌아왔다.하예진은 애초에 이 집을 꾸밀 때 엄청 공들이며 적잖은 돈을 썼는데 막상 본인이 산 가전제품을 빼내니 셋집에 모두 담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주 쓰는 물건들만 남기고 나머지는 동생네 집에 맡긴 게 아니라 세일 가격으로 팔아치웠다.이것도 나름 과거와 작별하는 방식 중 하나였다.하예진의 셋집은 정리가 채 안 되어 요리하기가 불편했다. 그녀는 사람들을 데리고 호텔로 가서 음식을 대접했다.본인이 솔로가 된 걸 축하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하예진은 즐거운 마음으로 과거와 작별하고 있지만 주형인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돌아쳤다.밤 9시, 그는 서현주의 아파트에 도착했다.“현주야, 짐이 이게 다야?”주형인은 서현주의 물건이 많지 않은 걸 보더니 앞으로 다가가 캐리어를 밀며 그녀에게 물었다.“다 정리했어?”“나 평소에 혼자 살아서 물건이 많지 않아요. 다 정리 마쳤고 안 쓰는 물건들은 전부 버렸어요.”서현주는 애지중지 아끼는 가방을 메고 평소 잠잘 때 안고 자던 인형을 안은 채 주형인과 함께 방문을 나섰다.“이 집은 그냥 빼버려야겠어요.”“당연하지. 내가 사는 집은 여기보다 훨씬 좋아.”“예진 씨는 이미 나갔어요?”서현주는 아파트의 문을 잠그고 아파트 열쇠를 열쇠고리에서 빼내 아래층 경비원에게 건넸다. 아파트 대문을 지키는 경비는 집주인의 친척이었다.“집주인한테 방 뺄 거라고 얘기했어요. 집세, 수도세, 전기세 전부 완납했으니 아저씨는 방 청소만 해주시면 돼요. 내가 아직 쓸만한 실용적인 물건들을 빼지 않았어요.”이 말의 뜻인즉슨 경비원 아저씨더러 얼른 방 청소하러 가서 그녀가 쓰지 않는 실용적인 물건들을 주워 쓰라는 것이다.경비원 아저씨는 열쇠를 건네받고는 곧장 아내더러 방 청소하러 가라고 했다.주형인은 캐리어를 끌고 서현주와 함께 차 쪽으로 걸어갔다.“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예진이한테 문자 왔는데 이미 짐을 다 뺐대.”그리고 계좌번호도 보내주며 주형인더러 앞으로
“몇 층이에요?”“16층.”주형인은 서현주의 캐리어를 차에서 내려놓고 끌어가며 그녀와 함께 들어갔다. 그런데 마침 엘리베이터 문 앞에서 아는 이웃과 만나게 되었다. 서로 인사를 마친 후 이웃이 먼저 물었다.“예진 씨가 오후에 사람들을 가득 데려와서 이사하는 것 같던데 왜 다시 들어온 거예요?”“그 사람 짐만 옮긴 거예요.”이웃은 서현주를 힐끗 보더니 바로 알아챘는지 주형인을 향해 웃음을 짓고는 가던 길을 갔다.‘어쩐지 지난번에 예진 씨가 칼을 들고 형인 씨를 막 쫓아다닌다 했더니, 바람피운 거였구나. 이혼했나 본데?’하예진이 집을 나가자마자 주형인이 예쁜 여자를 데리고 왔다. 이혼한 게 아니라면 이렇게 대놓고 데리고 오지 못했을 것이다.“저 사람 혹시 뭐 알고 있는 게 아니에요?”아무래도 내연녀였던지라 당당하지 못하고 저도 모르게 주눅이 들었다. 주형인은 한 손으로 캐리어를 끌고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며 씩 웃었다.“나 오늘 오후에 뭘 했는지 잊었어? 예진이랑 이혼했고 이젠 싱글이야. 넌 이제부터 내 여자친구니까 당당하게 다니면 돼. 저 사람들이 알면 뭐? 현주야, 다른 사람이 뭐라 하든 우린 드디어 당당하게 함께 다닐 수 있어.”서현주가 말했다.“그렇죠, 정말. 형인 씨 이혼했죠.”그녀는 더 이상 숨어다닐 필요가 없었다.엘리베이터가 16층에 도착했다.“다 왔어.”주형인이 자기 집 문을 가리켰다.“저 집이야.”서현주는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주형인은 키를 꺼내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집안이 칠흑같이 어두운 게 잠깐이지만 기분이 뭔가 이상했다. 전에는 그가 몇 시에 들어오든 항상 그를 위한 등이 밝혀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등은 영원히 켜지지 않을 것이다.“너무 어두워요. 얼른 불 켜요.”주형인과 함께 안으로 들어온 서현주가 불을 켜라고 했다. 주형인이 익숙하게 문 뒤의 전등 스위치를 눌렀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는 제대로 누르지 못한 줄 알고 다시 한번 눌렀지만
“툭.”휴대 전화가 바닥에 떨어지면서 액정도 산산이 조각났다.주형인은 재빨리 허리를 숙여 휴대 전화를 주었다. 하지만 깨진 액정에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다시 한번 집안을 비춰보았다.서현주도 휴대 전화를 꺼내 플래시를 켰다.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는커녕 인테리어 전보다도 허름하기 그지없었다.“형인 씨, 정말 잘못 들어온 거 아니에요?”서현주는 아직도 요행을 바랐지만 주형인이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아니야. 잘못 들어왔으면 아예 문을 열 수가 없었지. 우리 집 왜 이렇게 됐지? 가전제품은 다 어디 가고 이것밖에 안 남았어?”주형인의 낯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본인이 직접 산 식탁 앞에 멍하니 서 있던 주형인은 뇌리에 뭔가 잠깐 스쳐 지나가더니 드디어 모든 걸 깨달았다.하예진의 짓임이 틀림없었다!“하예진이야!”그는 생각나는 대로 전부 내뱉었다.“하예진이 내 집을 부숴버렸어.”분노가 극에 달한 주형인을 보며 서현주가 말했다.“얼른 경찰에 신고해서 잡아가라고 해요. 배상도 받아내고요. 집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았는데 적어도 인테리어 비용은 물어달라고 해야죠.”‘인테리어 비용?’경찰에 신고하려던 주형인은 인테리어 비용이라는 그녀의 말에 더는 신고하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왜 신고 안 해요? 못하겠어요? 아직도 그 여자한테 미련이 남아있어요?”그가 전화를 걸다가 끊어버리자 분노가 치밀어 오른 서현주는 아무 막말이나 내뱉었다.그와 이 집에서 함께 살려고 서현주는 살던 집까지 뺐다. 원래는 인테리어도 고급스러운 집에서 살면서 가족들에게 자랑할 생각이었으나 눈 앞에 펼쳐진 건 인테리어 전보다도 허름한 집이었다.이건 기대 부푼 그녀의 마음에 찬물을 끼얹은 정도가 아니라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절망에 빠진 듯했다.“신고하면 안 돼. 애초에 이 집 인테리어 비용은 예진이가 냈어. 아마 8천만 넘게 들었을 거야. 이혼할 때 나한테 인테리어 비용을 돌려달라고 했었는데 내가 거절했거든.”주형인의 눈가에 원망이 스쳐 지나갔다.“자기만의 방식으로 인테리어
주형인은 말까지 더듬었다.“쓰... 쓰레기를 잔뜩 널어놓고 치우지도 않아?”그러자 하예진이 피식 웃었다.“그때 인터리어할 때도 쓰레기가 엄청 많았었는데 내가 내 돈으로 일하는 사람을 불러서 청소했어. 그 돈을 나한테 주지도 않았잖아. 그때 못 받은 돈을 다시 되돌려받은 것뿐이야.”“사람을 불러서 청소하는 게 얼마나 든다고 그것까지 다 계산해?”“왜 계산 안 해? 난 뭐 돈 벌기 쉬운 줄 알아? 왜 당신한테 줘야 하는데? 200원이라도 싹 다 받아낼 거야.”말문이 막힌 주형인은 한참이 지나서야 이를 꽉 깨물며 말했다.“그래, 내가 졌다!”“난 그저 인테리어 비용만 돌려받았을 뿐이야. 당신이 그 집을 살 때 그 모습 그대로 다시 돌려놓았어.”주형인은 씩씩거리며 전화를 뚝 끊었다. 그가 전화를 던지려 하자 눈치 빠른 서현주가 휴대 전화를 빼앗았다.“이건 내 휴대 전화예요. 던지지 말아요.”“성질나 죽겠어!”주형인은 끊임없이 화가 치밀었지만 화를 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하예진의 말대로 그녀는 인테리어 비용만 챙겼다. 그가 집을 샀을 땐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집이었으니 누굴 탓하겠는가?“형인 씨, 인제 어떡해요?”서현주도 하예진이 이 정도로 모진 사람일 줄은 몰랐다.‘이러니까 형인 씨한테 버림받았지. 너처럼 독한 여자는 평생 시집도 못 갈 거야.’서현주는 속으로 하예진에게 온갖 욕이란 욕은 다 퍼부었다.“난 형인 씨랑 이런 집에서 못 살아요.”그녀가 원하는 건 비싸고 고급스러운 집이었다.“방도 다 뺐는데 인제 어디 가서 살아요?”주형인은 짜증 섞인 얼굴로 자기 머리를 잡아 뜯으며 서현주에게 말했다.“일단 호텔로 가자. 내일 먼저 아파트부터 구하는 게 좋겠어. 이 집도 다시 인테리어 해야 해. 전의 인테리어도 전부 예진이 취향대로 한 거거든. 인테리어 다시 하면 우리 둘 취향으로 하자. 현주야, 너한테 지금 돈이 얼마 있어?”서현주가 본능적으로 말했다.“이건 형인 씨가 결혼 전에 산 집이잖아요. 그러니까
분통이 터진 주형인과 달리 하예정은 오늘따라 더욱 기분이 통쾌했다.언니가 새로 구한 집에서 나온 뒤로 하예정은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그녀의 그런 모습에 전태윤도 따라 웃었다.“너무 웃지 마. 그러다가 배꼽 빠질라.”“배꼽 빠져도 좋아요. 주형인 지금쯤 아마 집에 갔을 텐데 집 꼴을 보고 어떤 반응일지 궁금하네요. 무조건 집에 잘못 들어온 줄로 생각할걸요? 하하, 놀랄 모습을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와요. 잠깐만 크게 웃을게요. 하하하...”그녀의 말에 따라 웃던 전태윤은 하마터면 신호등과 부딪힐 뻔했다. 화들짝 놀란 그가 핸들을 확 꺾고 나서야 겨우 피했다.갑작스러운 상황에 배꼽 빠져라 웃던 하예정도 순간 정색했다가 안전해지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태윤 씨 운전 잘 못 해요? 못하겠으면 앞으로는 내가 할게요. 나 운전 잘하거든요. 레이싱도 문제없어요.”“나 성인이 되자마자 바로 운전면허 땄어. 지금까지 경력이 몇 년인데. 아까는 너 때문에 너무 웃겨서 잠깐 정신이 딴 데 팔렸을 뿐이야.”하예정이 말했다.“알았어요. 그만 얘기할 테니까 운전에 집중해요.”그녀는 고개를 돌려 뒷좌석에 앉은 할머니를 보았다. 할머니가 잠이 든 것 같자 남편에게 귀띔했다.“할머니 주무세요. 음악 좀 낮춰요.”숙희 아주머니는 그들을 따라나서지 않고 하예진네 집에 남아있기로 했다.전태윤은 그녀의 말을 고분고분 따랐다. 그때 하예정이 입을 쩍 벌리며 하품했다.“나도 졸려요.”“집에 거의 다 왔어.”“잠깐 눈 좀 붙일게요. 집에 도착하면 나 깨워요.”“너 잠깐 눈 붙이겠다고 하고선 내일까지 잘 거잖아. 그냥 자지 마. 10분이면 도착해. 그사이 얘기나 나누자.”그러자 하예정이 그를 흘겨보았다.“태윤 씨랑 얘기하면 지루해 죽어요.”어이가 없었던 전태윤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하예정, 지금까지 너 말고 나한테 이런 충격을 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난 사실만을 얘기했을 뿐이에요.”하예정은 의자에 기댄 채 휴대 전화로 동영상을 보았다. 영상
“예정아, 왜 그래?”이상함을 감지한 전태윤이 재빠르게 다가가 침대 옆에 앉더니 그녀를 토닥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어디 아파?”“배가 아파요.”“배? 야식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가?”하예정은 원망 섞인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아니야? 그럼 왜 배가 아파?”하예정은 홱 돌아누우며 그를 등졌다.“태윤 씨는 말해도 몰라요. 누워서 조금만 참으면 나아질 거예요.”전태윤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허리를 숙여 침대에 누워있는 하예정을 번쩍 안아 들고는 정색한 얼굴로 말했다.“내가 의학은 몰라도 의사는 알겠지. 지금 당장 병원 가자. 참으면 안 돼. 괜히 참았다가 큰 문제라도 생기면 나중에 후회해도 늦었어.”“병원 안 가도 돼요. 그냥... 생리통이에요.”전태윤이 말했다.“아... 생리... 알았어.”그는 다시 하예정을 침대에 눕혔다.“많이 아파?”집에 젊은 여자가 없어 그는 생리통이 뭔지도 사실 잘 알지 못했다. 부모뻘인 여성 말고는 젊은 여자와 가까이 지낸 적이 없는 탓에 정말 모르고 있었다.매번 하예정이 생리할 때마다 그는 대추차를 끓여주었다. 왜냐하면 전에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끓여주는 걸 봤었기 때문이다. 그 덕에 생리할 때 대추차를 마시면 좋다는 걸 알게 되었다.“낮에 여기저기 다니고 날씨도 추워서 그런가 봐요. 나 대추차 좀 끓여줄 수 있어요?”“알았어. 조금만 참아. 지금 바로 가서 끓여줄게.”대추차를 끓이러 주방에 간 전태윤은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태윤아, 엄마 잠들었어. 무슨 일 있으면 내일 다시 전화해.”전화를 받은 사람은 그의 아버지였다.“아빠, 엄마 좀 깨워주실래요? 엄마한테 뭐 좀 물어볼 게 있어서 그래요.”“대체 뭔데 하필 지금 물어보려는 건데? 엄마 잠들었으니까 깨우지 마. 뭔데 그래? 아빠가 해결할 수 있는지 보자.”전현림에게 있어서 아내의 꿀잠보다 더 중요한 건 없었다. 설령 아들에게 엄청난 큰일이 있어도 말이다.“아빠, 생리통 좀 완화할 수 있는 약이 어떤 게 있는지 아세요?”그러자 전현
하예정은 일어나 앉아 그가 놓고 간 대추차를 천천히 마셨다.전태윤의 사랑 때문인지 대추차가 작용을 일으킨 건지, 대추차를 마시고 잠깐 누워있었더니 아까보다 한결 나아졌다. 전태윤이 약을 사 왔을 땐 거의 멀쩡하게 휴대 전화로 뉴스를 보고 있었다.“아프다면서 휴대 전화를 봐?”전태윤은 그녀의 휴대 전화를 빼앗고는 약을 건넸다.“너무 늦어서 약국이 문 다 닫았더라고. 그래서 근처 병원 가서 의사한테 처방까지 떼서 사 왔어. 먹고 자.”하예정은 고개를 들고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왜 그래?”그녀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의 앞에 서더니 감동한 얼굴로 그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태윤 씨 나한테 너무 잘해주는 거 아니에요?”전태윤도 자연스럽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대추차를 다 마신 걸 보고 많이 나아졌을 거란 생각에 사랑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와이프한테 잘해주지 않으면 누구한테 잘해주겠어?”그의 진심을 알아주어 나중에 그녀를 속였다는 걸 알게 되더라도 떠나지 않길 바랐다. 그가 지금까지 잘해주었던 것을 떠올리면 용서해주지 않을까?할머니는 그녀의 마음을 움직이라고 했다. 달콤한 말 같은 건 그도 어색했고 하예정도 듣기 거북해했다. 아무래도 평소에 다정하게 잘해주면서 그녀의 마음을 녹이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하예정도 그에 대한 마음을 열고 점점 깊은 사랑에 빠져 미래도 있게 된다.“태윤 씨.”“응.”“아까 나갈 때 뭘 입고 나갔는지 알아요? 잠옷 차림으로 나갔어요.”화들짝 놀란 전태윤은 그녀를 밀어내며 고개를 숙여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확인했다. 그녀의 말대로 정말 잠옷 차림이었다.“거기에 슬리퍼까지 신고 나갔어요.”전태윤은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았다.‘어쩐지 아까 발가락이 자꾸 시리다 했더니, 슬리퍼 신은 채로 나갔었구나.’다행히 늦은 시간이라 그를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안 그러면 내일 관성 뉴스의 헤드라인에 뜰 뻔했다.“아까 나갈 때 네 걱정만 하느라 뭘 입고 있었는지 신경 쓸 새도 없었어.”전태
원림성 A시.전창빈은 모든 요리를 다 하고는 주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휴대전화를 꺼내 뉴스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는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온종일을 바쁘게 보냈다.정확히 말하면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이 전부 오늘 저녁 식사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그리고 저녁이 되어서야 주인공이 돌아왔다.잠시 기다린 후, 전이진이 오후 내내 준비한 요리들이 하나둘씩 하인들에 의해 운반되어 나갔다. 물론 그는 나갈 필요가 없었다.선우민아가 그의 요리를 맛본 후 만족스럽다면 전창빈을 불러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통보도 없이 주방에 머물다가 선우씨 가족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고 떠나면 집으로 돌아야 한다.비록 전창빈은 자신의 요리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지만 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는데도 선우민아의 면담 요청이 없었다.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뉴스를 보며 담담해 보였으나 속으로는 조금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그는 송일우처럼 세 번이나 도전하는 상황은 원치 않았다. 송일우는 몇 년이나 도전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 실패한 뒤로는 다시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신감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점점 들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한편 선우씨 가족들이 이미 식사를 마치고 있었다.선우민아도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던 선우민아의 어머니 한경주가 관심 있게 물었다.“민아야, 이번 지원자가 만든 음식은 어때?”선우민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한경주는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생각엔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채용하는 게 어때?”선우민아의 남동생 선우민기는 의자에 털썩 앉아 배를 만지며 말했다.“누나, 나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이번 요리는 정말 맛있었어. 오랜만에 이렇게 배불리 먹었어.”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선우민기의 배를 가볍게 톡 치며 눈가에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너는 굶은 적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많이 먹었어? 이번만 먹고 다음 끼니는 못 먹을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 좀 앉아 이따
도아영이 홀로 관성까지 찾아온 것도 전이혁을 위해서였다.관성에서 그녀의 안전은 그의 책임이다.앞으로 도아영과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아내 후보였다. 혹여 도아영이 관성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도씨 가문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은 물론 전씨 할머니께서도 그를 혼쭐 내실 것이 분명했다.전이혁은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태윤이 전화를 받자 전이혁이 조심스럽게 부탁했다.“형, 오늘은 형의 스위트 룸에서 하룻밤 자도 돼?”“안방만 빼고 다른 방은 마음대로 써.”전태윤은 거절하지 않았지만 안방 사용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평소 이곳에 머무를 때면 항상 안방을 사용했기 때문이다.“알았어. 고마워. 형.”“도아영 씨는 괜찮아?”“심하게 취해서 토하다가 물 달라고 하길래... 떠날 수 없어서 호텔에서 하룻밤 지내려고. 새벽에 아영 씨를 룸으로 데려다준 후 떠날 계획이야. 같이 묵었다는 사실을 알면 나에게 달라붙을까 봐 겁이 나.”전태윤이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진심으로 도아영 씨와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아. 그분 명성을 망가뜨리면 안 되지.”전이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형, 사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영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이고 할머니의 눈썰미는 틀린 적이 없으셨지. 도아영 씨와 함께 지내보니 나랑 잘 맞는 것 같긴 한데... 왠지 그 ‘여우’랑 함께 있을 때가 더 편안하단 말이야.”“‘여우’라고?”“내 꿈에 자꾸 등장하는 그 여자 말이야. 별명이 ‘여우 같은 여자’거든. 화장을 잘하는 건지... 본명도, 고향도, 행적도 전혀 알 수가 없어. 신비로운 느낌을 주어서 나도 자꾸 정복하고 싶어져.”전태윤이 말을 이었다.“이름도 모르는 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그분이 혹시 만성의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과 연관 있는 거 아니야?”만성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은 모연정의 사촌 형수이자 A시 허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인데 그녀도 이중생활로 유명한 인물이다.허씨 가문
“네.”우빈이는 전태윤의 말을 믿으며 다시 물었다.“이모부, 그 모기는 어디 갔어요?”전태윤은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우빈에게 보여주었지만 우빈은 모기를 찾을 수 없었다.“날아갔어. 이모부가 조금 늦는 바람에 잡지 못했어.”“그래요?”우빈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대답했다.하예정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우빈이가 아무리 영리해도 결국은 어린아이일 뿐, 어른을 이길 수는 없었다.“우빈아, 이모부는 일하러 가야 해. 우리도 집에 가자. 이모부한테 잘 가라고 인사해야지.”우빈은 바로 그의 작은 손을 흔들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모부, 잘 가요!”“집에 가서 빨리 쉬고 이모의 말도 잘 듣고. 이모를 귀찮게 하면 안 돼. 말 잘 들으면 겨울방학에 예진 리조트로 가서 용정이랑 놀게 해줄게.”우빈은 급히 약속했다.“절대로 이모 귀찮게 안 하고 말 잘 들을게요.”“여보, 빨리 일하러 가요. 우리도 갈게요.”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일하러 가라고 재촉한 뒤 운전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말했다.전태윤은 그 자리에 서서 차가 사랑하는 아내를 태우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차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비로소 자신의 차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전이혁과 도아영의 일에 대해서 전태윤은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도아영이 취하면 전이혁이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줄 것이니까.전이혁은 도아영을 그녀의 방까지 데려다주고 외투와 양말을 벗겨 준 뒤 편안한 자세로 눕혔다. 그리고 그가 떠나려던 참에 도아영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옆으로 토해버렸다.전이혁이 쓰레기통을 가져오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이미 바닥과 침대를 모두 더럽혔다. 그는 이 광경을 보자 정말로 토할 것 같았다.흠... 전이혁도 토했다. 그는 입을 막은 채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정신없이 토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코와 입을 가린 채로 나왔다.도아영은 시원하게 토한 뒤 다시 침대에 철썩 누워버렸다.전이혁은 침대 반대쪽으로 돌아가 구토물을 보지 않으려 애썼고 최대한 빨리 도아영을 일으켜 안고
도아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꿈나라에 들어가서 돌아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술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말을 안 듣더니 결국 취했네. 내일 아침이면 정말 고생할 텐데.”전이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도아영의 이마를 쿡쿡 찌르더니 체념했는지 그녀를 안아 들어 로얄 스위트룸 나섰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참! 난 도아영 씨가 어느 룸에 묵고 있는지 모르는데.'그는 걸음을 멈추고 도아영을 내려놓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부축하면서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하예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예정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형수님, 도아영 씨가 묵고 계신 룸 번호를 아세요?”하예정이 대답했다.“저도 잘 몰라요. 그냥 관성 호텔에 묵는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요. 아영이가 취했어요? 잠깐만요. 제가 알아볼게요.”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말했다.“여보, 아영의 룸 번호를 알아봐 줘요. 취했대요. 이혁 도련님이 아영이를 모셔다드리려고 하는데 룸 번호를 몰라서.”전태윤은 표정이 굳었다. 그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하예정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우빈의 손을 잡고 걸어 나갔다가 이내 돌아왔다. 그는 이미 전이혁과의 통화를 끝낸 상태였다.“알아봤어요?”“내가 이혁한테 이미 알려줬어.”전태윤은 여전히 표정이 굳은 표정으로 하예정에게 말을 건넸다.“아까 내가 물어볼 때 프런트 직원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마치 내가 바람피우는 거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내 동생이 도아영 씨를 데려다주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내가 대신 물어보는 거라고 설명까지 했어.”하예정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남편의 팔을 다정하게 끌며 달콤하게 웃었다.“설명했으면 그만이죠.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든 우리 감정엔 아무런 영향이 없는걸요. 제가 의심하지 않으면 되잖아요.”“다음부턴 이런 일 나에게 시키지 마. 이혁의 일은 이혁이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내가 왜 도와줘야 해? 나도 예전엔 아무 도움 없이 오직 내 진심과 깊은 정으로 너의 마음을 얻었는데.”“알았어요.
전이혁은 침묵했다.도아영은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왜요? 전이혁 씨는 그분을 보호하려고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 거예요? 안심하세요. 저는 공정하게 경쟁하고 싶을 뿐이에요. 수작 부릴 생각은 없어요. 저는 그런 건 못해요. 남자 하나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고. 제가 이렇게 남자를 좋아한 건 처음이라서 한번 도전해 보는 거예요. 다른 남자였다면 그냥 양보했을 거예요.”도아영이 눈여겨본 건 전이혁이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이혁의 뒤에 있는 전씨 가문이 마음에 들었다. 전씨 가문의 훌륭한 가풍은 소문이 자자했으니까.전씨 가문의 어르신들은 사상이 모두 개방적이어서 후손들이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지지해 주었다.심지어 반대한다고 해도 다른 집안 어르신들처럼 억지로 가로막지는 않았다.게다가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특히 아내를 아끼기로 유명했고 한번 정한 인연과 결혼은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이런 남자들이 흔치 않았다. 여자라면 누구든 한결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을 것이다.하여 도아영은 꼭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정말 안 된다면 그건 그녀와 전씨 가문의 인연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애초에 노력도 안 해보고 포기한다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도아영은 평생 후회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여자였다.전이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여우’의 이름을 몰랐으니까. 마음의 절반을 뺏긴 주제에 정작 상대방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니...도아영은 그가 연적을 보호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약간의 질투를 느꼈지만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전이혁 씨가 그녀를 보호할수록 저는 더 궁금해지네요. 도대체 누가 저 도아영을 이길 수 있는지. 근데 괜찮아요. 언젠가는 제 연적이 누군지 알게 될 거니까.”그녀는 전이혁에게 잔을 들며 말했다.“전이혁 씨, 자! 우리 한잔하죠.”전이혁은 잔을 들고일어나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잔과 부딪혔다. 그리고 도아영이 단숨에 그 술을 들이마시는 걸 지켜보았다.도아영은 더 이상 전이혁과 사랑에 관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도아영은 요즘도 이런 식으로 자식들의 혼사를 정하는 어르신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요즘은 연애와 결혼이 자유로운 시대인데 아직도 자식들의 혼사를 결정해 주는 집안이 있다고?’도아영은 곧바로 자기 집 안 어르신들을 떠올리더니 다시 묵묵히 조금 전의 의문을 거두어들였다.재벌 가문에서는 많은 혼사가 부모님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대부분 어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곤 한다.그들에게는 결혼의 자유가 많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건 이익뿐이었다. 두 가문 사이에서 이루어진 혼인으로 인해 두 회사에 얼마나 큰 이득을 가져다주느냐가 가장 관건이었다.“그럼 전이혁 씨 할머니께서 왜 저를 선택하셨어요? 저는 할머니를 본 적도 없는데.”도아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그녀는 전씨 할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아마 봤을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도아영을 유심히 관찰하고 알아본 뒤에야 전이혁의 미래 아내로 선택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사진을 전이혁에게 건네주며 도아영에게 구애하도록 하게 한 것이다.“저도 모르겠어요. 할머니께서는 나이가 많으시지만 아직도 자주 돌아다니시니까. 우리가 감당하기도 힘들 정도로 말이죠. 다행히 할머니의 건강은 좋으시고 관리도 잘 되어서 겉으로 보기엔 예순 정도로 보이세요.“전이혁도 할머니가 어떻게 도아영을 선택하셨는지 모른다.도아영만 궁금한 게 아니라 고현과 여운초도 전씨 할머니께서 언제 그녀들을 눈여겨보셨는지 궁금해했었다.“그래서 저를 알게 되었고 저를 쫓아다녔던 거예요? 전이혁 씨가 저에게 한 행동이 애정 공세가 아니라고 하면 당신 스스로도 믿지 못하겠죠?”전이혁은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인정해요. 제가 당신에게 구애했다는 것을.”전이혁은 도아영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모든 면에서 그와 잘 어울렸으니까.하지만...“그런데 왜 한동안 사라지고 저를 무시했어요? 일부러 관심을 끌려는 작전이었던 거예요?”전이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전이혁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도망가려고 해도 너무 늦었다.그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자리에 앉아서 몸만 돌려 옆에 앉은 도아영을 돌아보았다. 전이혁의 깊고 검은 눈빛은 도아영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게 했다.이때 도아영은 몸을 굽혀 천천히 전이혁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전이혁은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도아영이 어떤 향수를 뿌리는지는 몰랐지만 강하지 않은 은은한 향기가 너무 좋았다.“전이혁 씨.”도아영은 그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다.“말해봐요, 듣고 있어요.”그도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대답했다.“제가 한 가지만 물을게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저를 대하는 거예요? 저에게 잘해주는 게 저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예요? 저에게 애정 공세를 하면서 왜 또 저를 무시하는 거죠?”전이혁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한 가지 물음보다 더 많이 물어본 것 같은데.”잠시 침묵이 흐른 뒤로 전이혁이 말을 이었다.“저도 제 마음이 어떤지 모르겠다고 하면 도아영 씨는 저를 나쁜 놈이라고 욕할 거죠?”그는 그녀에게 구애하고 싶었다.전이혁은 도아영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할머니의 눈썰미가 결코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없었다면 전이혁은 도아영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도아영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당당함, 대담무쌍함, 의협심, 기발한 성격, 고요할 때의 차분함과 활발할 때의 성격은 전이혁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았던 것이다.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그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바로 그 ‘여우 같은 여자' 말이다. 도아영 같은 재벌가 따님이 아니라.도아영의 아름다운 눈이 반짝이며 전이혁이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못할 것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전이혁을 내려다보았다.전이혁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순간 도아영의 동작과 표정이 마
“예정 언니, 벌써 다 드셨어요?”하예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우리가 좀 빨리 먹는 편이긴 하지. 평일엔 일이 바빠서 먹는 시간도 쪼개 써야 하다 보니 빨리 먹는 버릇이 생긴 것 같아.”도아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예정은 우빈의 손을 잡고 남편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로얄 스위트룸을 빠져나왔고 거기에 문을 닫아주는 센스까지 보였다.전태윤은 경호원들에게도 식사하고 휴식을 취하라고 지시했다.전이혁과 도아영은 이 모든 것이 하예정이 그들에게 특별히 남겨준 기회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제 로얄 스위트룸 안에는 전이혁과 도아영만 남았다.도아영은 와인잔을 들어 우아하게 음미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전이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역시 피할 수 없었군.'전이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도아영 씨,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도아영은 대답 대신 잔을 기울이며 그를 바라만 보았다.‘정말 잘생겼어...'그녀는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잘생겼다는 소문을 들었다. 실제로 본 전태윤도 키가 훤칠한 미남이었지만 지나치게 차가운 인상에, 인사할 때 잠깐 마주친 뒤로는 도아영을 전혀 쳐다보지 않았다.오직 하예정만 바라보는 모습에서 ‘아내 바보'라는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전태윤의 차가운 카리스마와 달리 전이혁은 훨씬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다.전태윤 앞에서 전이혁은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단둘이 있을 때면 전이혁의 우수함이 빛을 발했다. 그는 도아영이 만난 남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였다.전이혁이 잘해줄 때면 도아영은 그에게 정말 빠져들 것만 같았지만 그녀를 소홀히 대할 때면 화가 치밀어 주먹으로 그를 한 대 패주고 싶을 지경이다.‘내가 무슨 애완동물도 아니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애완견이야?'마음 내키면 그녀와 잠시 놀아주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버리는 그의 태도에 도아영은 서서히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전이혁은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전이혁 씨, 왜 자리
하예정은 두 사람 사이의 암투를 모른 척하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좋은 술 두 병 시킵니다. 저는 임신 중이라 못 마셔요. 우리 배 속의 아기 건강 생각해서라도 저는 술을 마시지 못하거든요. 태윤 씨도 술을 잘 마시지 않기 때문에 이혁 도련님이 도아영 씨랑 같이 마실 수밖에 없네요. 도련님, 아영 씨를 잘 모셔야 해요. 저와 태윤 씨가 있으니 도련님이 취해도 괜찮아요. 저희가 책임질게요.”하예정은 도아영에게 윙크했다. 도아영은 슬쩍 OK라는 사인을 보내며 자신 있다는 듯 웃었다.하예정은 그제야 도아영의 주량이 꽤 괜찮음을 눈치채고 안심했다. 하예정은 도아영이 전이혁에게 꼬치꼬치 캐묻다가 술에 취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인데 도아영이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니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술과 여러ㅓ 요리가 나오자 도아영은 직접 전이혁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자! 전이혁 씨, 건배하죠.”전이혁은 잔을 받지 않고 오히려 도아영의 잔을 가져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도아영 씨, 공복에는 술에 취하기 쉬워요. 이 술은 독해서 마실 땐 괜찮다가도 나중에 훅 가버릴 수 있어요. 먼저 요리들을 좀 드시고 또 국물도 한 그릇 드세요.”그 말과 함께 전이혁은 도아영에게 국물을 떠주었다.“국물부터 드셔보세요.”도아영은 평소 국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전이혁이 떠준 거라 예의상 한 수저 떠먹었다.“하 대표님, 이 국물이 정말 맛있네요. 저 원래 국물을 잘 안 마시는데 이 국물은 진짜 맛있어요.”“그럼 많이 드세요. 우리 집은 항상 식사 때 국물을 준비하는 게 습관이에요.”하예정은 우빈에게도 국물을 떠주며 물었다. 식습관은 바꾸게 하기 어려운 법이다.도아영은 관성의 사람이 아니라서 관성의 식습관과 달랐다.국물을 마시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이 국물이 맛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니 그 국물이 정말로 맛있었던 모양이다.“몇 살이에요? 동갑인 것 같은데.”“하 대표님이랑 같은 해에 태어났어요. 제 생일은 연말이라 하 대표님보다 몇 개월 어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