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인이 요즘 회사 일이 잘 안 풀린다는데요? 회사에서 줄곧 잘나갔잖아요. 대체 무슨 일이죠?”김은희는 입으로 중얼거리면서 바로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주서인은 전화를 받자마자 짜증 섞인 말투로 말했다.“나도 대체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 자꾸만 일부러 내 흠을 잡는 것 같고 종일 제대로 되는 일이 없어. 엄마, 형인이 이혼하겠다면 그냥 이혼하게 놔둬. 어차피 엄마 아들 훌륭하잖아, 재혼 못 할 걱정은 없어.”“예진이가 어디서 증거를 모았는지 네 동생한테 엄청 불리해. 협박까지 당해서 네 동생이 하는 수 없이 걔 모든 조건을 들어주기로 했어. 이혼하면 2억 원 넘게 줘야 하고 우빈이 양육권도 예진이한테 넘어갈 뿐만 아니라 매달 우빈이 양육비를 60만 원씩 줘야 해.”“형인이한테 돈이 그렇게나 많았어?”주서인마저 처음 듣는 소리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형인이가 예전부터 재산을 빼돌린 증거를 예진이가 갖고 있어. 됐어, 너 기분도 안 좋고 일도 잘 안 풀리는데 같이 안 가도 돼. 내일 아침 나랑 네 아빠 예진이네 자매를 찾아가서 얘기해볼게.”주서인이 말했다.“엄마, 차라리 하예정을 찾아가. 하예정을 설득하면 동서를 설득한 거나 마찬가지야.”“엄마도 그렇게 생각해.”두 모녀는 한참 동안 통화하고 나서야 전화를 끊었다....퇴근 후 하예정은 먼저 언니네 집에 가서 주씨 가문을 나온 후 머무를 곳을 상의했다. 역시 그녀의 예상대로 하예진은 동생네 집에서 지내지 않으려 했다.“형인 씨가 돈만 많이 주면 너희 집에서 안 살아도 돼. 일단 월세를 구한 다음 집 보러 다니다가 대출해서 작은 집을 살 거야. 그리고 노씨 그룹에서 계속 일할 수 있으면 하고 정 안 되면 사직해서 나머지 돈으로 조식 식당 같은 거 차릴 생각이야.”하예정은 그녀를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언니, 만약 돈이 부족하면 나한테 말해. 급한 돈은 내가 빌려줄게.”“걱정하지 마. 부족하면 너한테 빌려달라고 할게.”하예정은 언니 품에 안겨있는 조카를 어루만졌다.“이모.”“이모가
휴대 전화도 침대에 떨어진 걸 보니 기다리긴 했지만 자면서 기다리는 격이 돼버렸다.기대에 부풀었던 그의 마음이 한순간에 식어버렸다. 할머니에게서 산 다이아몬드 반지를 오늘 저녁에 하예정에게 끼워줄 생각이었지만 그녀는 깊이 잠들어버렸다.전태윤은 침대 옆에 앉아 하예정의 얼굴을 어루만졌다.“누가 업어가도 모르게 자네.”그러고는 상체를 숙여 하예정의 볼에 입맞춤했다가 입술에도 키스한 후 그녀의 휴대 전화를 침대 머리맡 서랍장 위에 올려놓았다.비록 아내가 잠이 들긴 했지만 그의 방에서 기다린 것이라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다.이튿날 아침 잠에서 깬 하예정은 문득 눈앞에 나타난 꽃다발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꽃다발 뒤에는 전태윤의 잘생긴 얼굴이 있었다.하예정은 두 눈을 깜빡이며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눈앞의 남자가 전태윤인 걸 확인하고는 벌떡 일어나 앉더니 생긋 웃었다.“왔어요?”“여보, 굿모닝.”‘굿모닝?’“벌써 날이 밝았어요? 날 밝을 때까지 야근한 거예요?”“아니, 어젯밤에 들어왔어. 날 기다리겠다고 하더니 먼저 쿨쿨 자더라?”하예정은 민망한 웃음을 지으며 예쁜 꽃다발을 받았다.“꽃가게가 참 일찍 오픈하네요?”“내가 사고 싶으면 언제든지 살 수 있어.”그녀가 꽃다발을 받자 전태윤은 상체를 숙이고 그녀의 아리따운 얼굴을 그윽하게 쳐다보면서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모닝 키스라도 해줘야 하지 않아?”그녀에게 선물한 꽃은 본가의 양 집사에게 전화하여 본가의 정원에서 가장 예쁜 꽃을 잘라서 포장하여 전용차로 보내달라고 한 것이었다.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꽃다발을 받은 하예정은 전태윤의 정성과 낭만적인 모습에 감동하여 모닝 키스를 아낌없이 해주었다.“예정아.”“하고 싶은 얘기 있으면 해요.”하예정은 예쁜 꽃을 마음껏 감상했다.“어느 꽃가게에서 샀어요? 참 예쁘게도 피었네요. 내가 발코니에서 기르는 것보다 훨씬 더 예뻐요.”“내가 특별히 꽃밭을 가꾸는 분한테 연락해서 주문한 꽃다발이야. 그분이 전용차로 가져다주셨어. 이른 시간이라
“예정아.”하예정이 그에게 반지를 끼워줄 때 전태윤이 매력적인 중저음으로 말했다.“앞으로 무슨 일이 있든 절대 헤어지지 말고 이혼 얘기 꺼내지도 말자, 응?”하예정은 두 반지가 그들에게 참 어울린다고 생각하여 그가 보는 눈이 있다고 속으로 칭찬하고 있었다. 그녀와 함께 고르지 않아도 그녀에게 어울리는 걸 골랐으니 말이다. 그러다가 그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들고 말했다.“이건 약속할 수 없어요. 만약 태윤 씨가 주형인처럼 인간쓰레기만도 못한 짓을 저질러도 이혼 얘기 못 꺼내요? 바람피운 남자는 한시라도 빨리 차버리는 게 나아요. 남겨둬봤자 역겹기만 하니까.”전태윤은 나중에 자신의 정체를 밝혔을 때 하예정이 떠나지 않게 하려고 그녀의 약속을 받아내려 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이 방법이 그녀에게 전혀 먹히지 않았다. 이렇게나 감동적인 상황에서도 그녀는 냉철한 판단을 했다. 역시 전태윤이 사랑한 여자는 달랐다.“그럼 내가 바람피우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무슨 일이 있든 절대 이혼 얘기 꺼내면 안 돼. 우리 평생 부부로 함께 지내자.”전태윤은 절대 바람을 피울 남자가 아니다. 그의 성격에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 평생 그 여자만을 사랑할 것이다.바로 이것 때문에 그는 더욱 두려웠다. 나중에 그녀가 그의 정체를 알게 된 후 가차 없이 차버릴까 봐.“나한테 무슨 미안한 짓을 했어요?”하예정이 되물었다.“오늘 참 이상해요. 아침부터 꽃을 선물하지 않나, 결혼반지도 주지 않나... 비록 내가 다이아몬드를 감별할 줄은 몰라도 이 반지가 엄청 비싸다는 건 알아요. 평소랑 너무 다르니까 의심하게 되잖아요. 나한테 무슨 미안한 짓을 했죠? 그래서 지금 이런 이벤트로 날 감동하게 해서 대충 넘어갈 심산인 거죠?”전태윤은 입을 꾹 다문 채 그녀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참 상상력도 풍부하단 말이야. 큰마음 먹고 낭만적인 분위기를 만들었더니 음모론이나 제기하고.”“내 예측이 틀렸어요?”그의 표정이 전혀 흔들림이 없자
“그건 아직 모르겠어. 일만 처리하면 바로 올 거야.”“그럼 출장 가는 날에 나한테 얘기해요. 내가 짐도 챙겨주고 공항까지 바래다줄게요.”그의 방에 그녀의 옷이 없어 하예정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씻고 옷을 갈아입으려 했다. 그녀가 방을 나서려 하자 전태윤은 손을 내밀어 잡더니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의 아리따운 얼굴을 바라보았다.“고작 그뿐이야?”그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하예정은 눈만 깜빡였다.‘그러면 뭘 더 바라는데요? 출장 가는 도시까지 바래다줄 수는 없잖아요.’“가족이 함께 따라가도 돼요?”전태윤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공항까지 바래다주면 안 돼요?”전태윤은 그녀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하예정은 그의 손을 내려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요즘 말 좀 잘하나 싶더니 또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거예요? 자꾸 나한테 맞춰보라고 하지 말아요. 나 머리가 나빠서 모른단 말이에요. 방에 가서 옷 갈아입고 나올게요. 아침은 이따가 나가서 먹을래요, 아니면 직접 해 먹을래요?”하예정이 밖으로 나가며 물었다.“네가 알아서 해.”삐진 듯한 그의 말투에 하예정은 방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그의 눈치를 살핀 후에야 방문을 열고 나갔다.전씨 할머니와 마주친 하예정은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인사했다.“할머니, 굿모닝이에요.”“그래, 굿모닝.”할머니는 손자의 방에서 나오는 하예정을 흐뭇하게 쳐다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아무 일이 없었다고 해도 한 침대에서 자는 것만으로도 아주 큰 발전이었다.그들은 집에서 아침을 먹기로 했다. 하예정은 할머니와 전태윤에게 간단하게 국수를 만들어주었다.“따르릉.”하예정의 휴대 전화가 울렸다. 언니의 전화인 줄 알고 휴대 전화를 꺼내 보았는데 낯선 번호였다. 그녀의 낯빛이 순식간이 어두워졌다. 요즘 걸려오는 낯선 전화는 대부분 그녀 본가의 친척들이었다.지난번에 성소현이 나서서 한마디 한 후에 한동안은 잠잠했다. 그런데 오늘은 또 무슨 일로 전화한 것일까?전화를 받고 싶지 않았던 하예정이 전화를 끊어버리자 곧바로 또 울
“전 그런 얘기 한 적 없어요. 할아버지가 하신 거예요.”하 영감은 잠깐 말문이 막혔다.“너 지금 어디야? 시간이 몇 시인데 아직도 가게 문 안 열었어? 다른 사람은 진작 돈 벌었겠다.”“태윤 씨, 할아버지가 가게 문 언제 여냐고 내 걱정하세요. 해가 서쪽에서 뜬 건 아니죠? 얼른 발코니 가서 봐봐요, 해가 서쪽에서 뜨나. 서쪽에서 뜨면 기이한 광경을 찍어서 남겨야죠.”하 영감이 굳은 얼굴로 욕설을 퍼부었다.“하예정, 말 돌리지 마, 할아버지가 얘기하고 있잖아. 나 지금 네 삼촌, 외숙모들이랑 가게 문 앞에 있어. 당장 와서 문 열어! 우리 아직 아침도 못 먹었으니까 올 때 아침도 사 와.”“근처에 조식 식당이 많아요. 식당 가서 드시기 싫으면 그냥 굶으세요.”그녀는 그들에게 아침까지 사다 바칠 마음이 없었다. 아침을 배불리 먹고 힘이 남아돌아서 더 욕하려고?하 영감은 하예정의 태도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계속 욕하려는데 하지문이 휴대 전화를 낚아채고 다정하게 말했다.“예정아, 나 둘째 사촌오빠야. 우리 지금 가게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얼른 와. 너한테 할 얘기 있어.”“아침 다 먹고 갈게.”“그래. 기다릴게.”하지문은 용건만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친정집 친척들이 또 찾아왔어?”전태윤은 하예정이 휴대 전화를 내려놓는 걸 보고 어두운 목소리로 물었다. 전태윤이 뒤에서 몰래 복수한 탓에 일도 뜻대로 풀리지 않을 텐데 감히 또 찾아온다고?소정남의 말대로 빈털터리가 된 그들이 더는 두려울 게 없어서 하예정에게 뻔뻔스럽게 돈을 요구하는 건가?“네, 아무래도 온 가족이 총출동해서 가게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요. 대체 왜 저러는 건지... 나한테 할머니 병원비를 감당하라고 하는데 그건 절대 불가능해요. 저들이 머릿수로 밀어붙여도 난 두렵지 않아요.”할머니에게 효심이 가득한 손자가 그렇게나 많은데 할머니의 예쁨도 받지 못한 손녀가 병원비를 낸다는 게 말이 되는가?그녀의 사촌오빠들은 하예정 자매보다 훨씬 더 나은 삶을 보내
하예정은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하늘이 무섭지도 않아요? 그러다 벌 받아요.’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곧 그 죄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그 사람들이 널 찾아온 목적이 뭐든 같이 가. 싸움이 일어나면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야 하잖아.”전씨 할머니는 하예정과 함께 가겠다고 고집했다. 하예정은 자신이 싸움을 꽤 잘한다고 얘기하고 싶었지만 만만치 않은 친척들과 가게 앞에서 정말 싸우기라도 한다면 혼자서는 당해내기 힘들 거로 생각하여 더는 할머니를 말리지 않았다.언니에게서 할머니가 엄청 대단하고 만만한 분이 아니라는 얘기를 들었었다.셋이 국수를 뚝딱 비우고 하예정이 설거지하려 하자 할머니가 손자에게 눈치를 주었다. 전태윤은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나 하예정의 손에서 그릇을 받고는 설거지하러 주방으로 들어갔다.“예정아, 태윤이한테 뭐든지 다 해주지 마.”할머니가 하예정에게 가르쳤다.“쟤한테 집안일도 좀 시켜. 이 집은 너희 두 사람 것이고 부부가 함께 꾸려나가야지. 쟤가 밖에서 일하느라 힘들겠지만 너도 출근하잖아. 넌 안 힘들어? 집에서 손가락 까딱 안 하게 하지 말고 집안일도 시키면서 부려 먹어. 그래야 네가 덜 힘들지.”“할머니, 태윤 씨 지금도 잘하고 있어요. 가끔 집안일도 도와줘요.”퇴근하고 집에 와서 손가락 까딱 안 하는 건 그녀의 쓰레기 같은 형부였다. 무슨 일이든 다 언니에게 맡겼고 손발이 멀쩡하면서 왜 아무것도 하지 않냐고 한마디 하면 종일 출근하느라 힘들다면서 집에서는 쉬고 싶다고 당당하게 얘기했었다.그리고 맨날 집에서 애만 보는 게 얼마나 쉬운데 집안일까지 도와달라고 한다고 언니를 게으른 여자라고 욕하기도 했다...인간쓰레기만도 못한 남자를 이젠 욕하기도 귀찮을 지경이었다. 그녀의 언니는 이젠 그에게서 벗어나 서현주에게 그대로 넘겨주기만 하면 된다.서현주 같은 여자를 만난 주형인이 과연 집안일에 손을 대지 않아도 될까?“쟤네 몇몇 형제들한테 내가 어릴 적부터 자립 능력을 가르쳐서 뭐든지 다 잘해. 쟤가 밖에서 힘들게 일한다고 네가
전태윤은 주방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전부 다 들었다. 할머니가 하예정을 편애하는 건 이미 진작 익숙해졌다. 할머니는 손녀가 생기길 무척이나 바라셨지만 결국 손자가 아홉이나 생겼다.할머니는 하예정을 보자마자 첫눈에 마음에 들어 하예정을 손녀로 삼고 싶어 했다. 그러다가 나중에 손녀를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바로 생각을 바꾸었다. 할머니는 하예정을 자신의 손자며느리로 만들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다. 그러면 평생 전씨 가문의 사람이 될 테니까.전태윤은 설거지를 마친 후 싱크대 주변도 빛이 날 정도로 깨끗하게 닦았다. 그다음 세정제로 행주를 말끔하게 빨고는 손까지 씻고 주방에서 나왔다.하예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양복 외투와 넥타이를 가져다주었다. 비록 아직 넥타이를 맬 줄은 모르지만 그녀의 적극적인 모습에 전태윤도 흐뭇했다.설거지하면 미인의 사랑을 누릴 수 있으니 꽤 괜찮은 것 같다.할머니도 하예정의 모습이 만족스러웠다. 전태윤에게 적당한 보상을 주면 전태윤도 앞으로 그녀 말만 들을 것이다.부부라면 서로 아껴주고 희생해야만 영원히 함께할 수 있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헌신하고 다른 한쪽은 누리기만 한다면 헌신한 쪽이 언젠가는 마음이 식어가게 돼 있다.30분 후, 가게에 도착해보니 가게 문이 열려있었다. 심효진이 먼저 와서 가게 문을 열었는데 하씨 가문 사람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하 영감은 하지명에게 가게로 들어가서 의자 하나를 가져오라고 했다. 그렇게 하 영감만 의자에 앉아있었고 다른 이들은 문 앞에 서 있거나 쪼그리고 앉아서 기다렸다. 그들의 얼굴에 저마다 짜증이 잔뜩 섞여 있었다.하지문은 하예정을 기다리며 담배를 몇 대나 피웠는지 모른다.전씨 가문 도련님에게 익명의 편지를 보낸 후 그는 자신이 전씨 그룹에 입사할 줄 알고 자신만만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전씨 그룹은커녕 다른 작은 회사도 그를 받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업자가 된 하지문 말고도 가족들이 하던 일도 전부 영향을 받
“하예정.”하지명과 하지문이 할아버지와 함께 가게 안으로 들어왔고 나머지 친척들은 밖에서 대기했다.“네 남편이야?”하 영감은 전태윤을 한참 동안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왠지 하예정의 남편이 하예진의 남편보다 훨씬 더 나아 보였다. 그와 동시에 두 손녀를 시집보내면서 예물을 일전 한 푼도 받지 못하고 남 좋은 노릇만 했다는 생각에 불만도 생겼다. 만약 셋째 아들이 저승에서 알았더라면 아마 화가 나서 살아 돌아올지도 모른다.하예정의 부모는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아직 생전이라 예물은 당연히 두 사람의 몫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하예진 자매는 일전 한 푼도 그들에게 주지 않았다.“할아버지 손자사위예요. 어때요? 잘생겼죠?”하예정은 전태윤 옆으로 다가가 한 손을 전태윤의 어깨에 걸치면서 일부러 할아버지에게 물었다.“우리 부부 참 잘 어울리죠?”하 영감은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한참 후에 전씨 할머니에게 물었다.“그쪽은 누구시죠?”“사돈.”‘남자 쪽 가족이구나.’하 영감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두어 모금 피운 뒤 말을 이었다.“예정이가 결혼했다는 사실을 우리한테 얘기하지 않아서 사돈의 존재도 모르고 있었어요. 오늘 처음 뵙네요. 아직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다면서요? 그럼 사돈댁에서 우리 예정이한테 예물을 얼마 정도 줄 계획인가요? 집이랑 자동차는 이미 다 준비했겠죠? 예정이 부모가 일찍 돌아가긴 했지만 할아버지 할머니는 아직 살아있어요. 예전에 서로 얼굴을 붉힌 일이 있어도 내가 쟤 할아비란 사실은 변함이 없어요. 그러니까 예정이한테 주는 예물은 우리한테 주는 게 당연해요.”대부분의 재벌 집 할머니라면 하 영감처럼 만나자마자 돈 얘기부터 꺼내면 당장 얼굴을 붉히고 자리를 박차고 떠났을 것이다. 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았다.“사돈댁, 예물은 당연히 드려야지요. 하지만 예물은 예정이한테 줄 겁니다. 예정이가 예물을 어떻게 쓰는지는 예정이가 알아서 할 일이니 우린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좋겠어요.”그 말인즉슨 예물을
원림성 A시.전창빈은 모든 요리를 다 하고는 주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휴대전화를 꺼내 뉴스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는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온종일을 바쁘게 보냈다.정확히 말하면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이 전부 오늘 저녁 식사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그리고 저녁이 되어서야 주인공이 돌아왔다.잠시 기다린 후, 전이진이 오후 내내 준비한 요리들이 하나둘씩 하인들에 의해 운반되어 나갔다. 물론 그는 나갈 필요가 없었다.선우민아가 그의 요리를 맛본 후 만족스럽다면 전창빈을 불러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통보도 없이 주방에 머물다가 선우씨 가족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고 떠나면 집으로 돌아야 한다.비록 전창빈은 자신의 요리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지만 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는데도 선우민아의 면담 요청이 없었다.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뉴스를 보며 담담해 보였으나 속으로는 조금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그는 송일우처럼 세 번이나 도전하는 상황은 원치 않았다. 송일우는 몇 년이나 도전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 실패한 뒤로는 다시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신감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점점 들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한편 선우씨 가족들이 이미 식사를 마치고 있었다.선우민아도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던 선우민아의 어머니 한경주가 관심 있게 물었다.“민아야, 이번 지원자가 만든 음식은 어때?”선우민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한경주는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생각엔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채용하는 게 어때?”선우민아의 남동생 선우민기는 의자에 털썩 앉아 배를 만지며 말했다.“누나, 나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이번 요리는 정말 맛있었어. 오랜만에 이렇게 배불리 먹었어.”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선우민기의 배를 가볍게 톡 치며 눈가에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너는 굶은 적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많이 먹었어? 이번만 먹고 다음 끼니는 못 먹을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 좀 앉아 이따
도아영이 홀로 관성까지 찾아온 것도 전이혁을 위해서였다.관성에서 그녀의 안전은 그의 책임이다.앞으로 도아영과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아내 후보였다. 혹여 도아영이 관성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도씨 가문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은 물론 전씨 할머니께서도 그를 혼쭐 내실 것이 분명했다.전이혁은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태윤이 전화를 받자 전이혁이 조심스럽게 부탁했다.“형, 오늘은 형의 스위트 룸에서 하룻밤 자도 돼?”“안방만 빼고 다른 방은 마음대로 써.”전태윤은 거절하지 않았지만 안방 사용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평소 이곳에 머무를 때면 항상 안방을 사용했기 때문이다.“알았어. 고마워. 형.”“도아영 씨는 괜찮아?”“심하게 취해서 토하다가 물 달라고 하길래... 떠날 수 없어서 호텔에서 하룻밤 지내려고. 새벽에 아영 씨를 룸으로 데려다준 후 떠날 계획이야. 같이 묵었다는 사실을 알면 나에게 달라붙을까 봐 겁이 나.”전태윤이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진심으로 도아영 씨와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아. 그분 명성을 망가뜨리면 안 되지.”전이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형, 사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영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이고 할머니의 눈썰미는 틀린 적이 없으셨지. 도아영 씨와 함께 지내보니 나랑 잘 맞는 것 같긴 한데... 왠지 그 ‘여우’랑 함께 있을 때가 더 편안하단 말이야.”“‘여우’라고?”“내 꿈에 자꾸 등장하는 그 여자 말이야. 별명이 ‘여우 같은 여자’거든. 화장을 잘하는 건지... 본명도, 고향도, 행적도 전혀 알 수가 없어. 신비로운 느낌을 주어서 나도 자꾸 정복하고 싶어져.”전태윤이 말을 이었다.“이름도 모르는 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그분이 혹시 만성의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과 연관 있는 거 아니야?”만성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은 모연정의 사촌 형수이자 A시 허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인데 그녀도 이중생활로 유명한 인물이다.허씨 가문
“네.”우빈이는 전태윤의 말을 믿으며 다시 물었다.“이모부, 그 모기는 어디 갔어요?”전태윤은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우빈에게 보여주었지만 우빈은 모기를 찾을 수 없었다.“날아갔어. 이모부가 조금 늦는 바람에 잡지 못했어.”“그래요?”우빈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대답했다.하예정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우빈이가 아무리 영리해도 결국은 어린아이일 뿐, 어른을 이길 수는 없었다.“우빈아, 이모부는 일하러 가야 해. 우리도 집에 가자. 이모부한테 잘 가라고 인사해야지.”우빈은 바로 그의 작은 손을 흔들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모부, 잘 가요!”“집에 가서 빨리 쉬고 이모의 말도 잘 듣고. 이모를 귀찮게 하면 안 돼. 말 잘 들으면 겨울방학에 예진 리조트로 가서 용정이랑 놀게 해줄게.”우빈은 급히 약속했다.“절대로 이모 귀찮게 안 하고 말 잘 들을게요.”“여보, 빨리 일하러 가요. 우리도 갈게요.”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일하러 가라고 재촉한 뒤 운전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말했다.전태윤은 그 자리에 서서 차가 사랑하는 아내를 태우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차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비로소 자신의 차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전이혁과 도아영의 일에 대해서 전태윤은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도아영이 취하면 전이혁이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줄 것이니까.전이혁은 도아영을 그녀의 방까지 데려다주고 외투와 양말을 벗겨 준 뒤 편안한 자세로 눕혔다. 그리고 그가 떠나려던 참에 도아영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옆으로 토해버렸다.전이혁이 쓰레기통을 가져오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이미 바닥과 침대를 모두 더럽혔다. 그는 이 광경을 보자 정말로 토할 것 같았다.흠... 전이혁도 토했다. 그는 입을 막은 채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정신없이 토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코와 입을 가린 채로 나왔다.도아영은 시원하게 토한 뒤 다시 침대에 철썩 누워버렸다.전이혁은 침대 반대쪽으로 돌아가 구토물을 보지 않으려 애썼고 최대한 빨리 도아영을 일으켜 안고
도아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꿈나라에 들어가서 돌아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술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말을 안 듣더니 결국 취했네. 내일 아침이면 정말 고생할 텐데.”전이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도아영의 이마를 쿡쿡 찌르더니 체념했는지 그녀를 안아 들어 로얄 스위트룸 나섰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참! 난 도아영 씨가 어느 룸에 묵고 있는지 모르는데.'그는 걸음을 멈추고 도아영을 내려놓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부축하면서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하예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예정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형수님, 도아영 씨가 묵고 계신 룸 번호를 아세요?”하예정이 대답했다.“저도 잘 몰라요. 그냥 관성 호텔에 묵는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요. 아영이가 취했어요? 잠깐만요. 제가 알아볼게요.”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말했다.“여보, 아영의 룸 번호를 알아봐 줘요. 취했대요. 이혁 도련님이 아영이를 모셔다드리려고 하는데 룸 번호를 몰라서.”전태윤은 표정이 굳었다. 그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하예정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우빈의 손을 잡고 걸어 나갔다가 이내 돌아왔다. 그는 이미 전이혁과의 통화를 끝낸 상태였다.“알아봤어요?”“내가 이혁한테 이미 알려줬어.”전태윤은 여전히 표정이 굳은 표정으로 하예정에게 말을 건넸다.“아까 내가 물어볼 때 프런트 직원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마치 내가 바람피우는 거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내 동생이 도아영 씨를 데려다주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내가 대신 물어보는 거라고 설명까지 했어.”하예정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남편의 팔을 다정하게 끌며 달콤하게 웃었다.“설명했으면 그만이죠.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든 우리 감정엔 아무런 영향이 없는걸요. 제가 의심하지 않으면 되잖아요.”“다음부턴 이런 일 나에게 시키지 마. 이혁의 일은 이혁이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내가 왜 도와줘야 해? 나도 예전엔 아무 도움 없이 오직 내 진심과 깊은 정으로 너의 마음을 얻었는데.”“알았어요.
전이혁은 침묵했다.도아영은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왜요? 전이혁 씨는 그분을 보호하려고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 거예요? 안심하세요. 저는 공정하게 경쟁하고 싶을 뿐이에요. 수작 부릴 생각은 없어요. 저는 그런 건 못해요. 남자 하나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고. 제가 이렇게 남자를 좋아한 건 처음이라서 한번 도전해 보는 거예요. 다른 남자였다면 그냥 양보했을 거예요.”도아영이 눈여겨본 건 전이혁이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이혁의 뒤에 있는 전씨 가문이 마음에 들었다. 전씨 가문의 훌륭한 가풍은 소문이 자자했으니까.전씨 가문의 어르신들은 사상이 모두 개방적이어서 후손들이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지지해 주었다.심지어 반대한다고 해도 다른 집안 어르신들처럼 억지로 가로막지는 않았다.게다가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특히 아내를 아끼기로 유명했고 한번 정한 인연과 결혼은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이런 남자들이 흔치 않았다. 여자라면 누구든 한결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을 것이다.하여 도아영은 꼭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정말 안 된다면 그건 그녀와 전씨 가문의 인연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애초에 노력도 안 해보고 포기한다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도아영은 평생 후회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여자였다.전이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여우’의 이름을 몰랐으니까. 마음의 절반을 뺏긴 주제에 정작 상대방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니...도아영은 그가 연적을 보호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약간의 질투를 느꼈지만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전이혁 씨가 그녀를 보호할수록 저는 더 궁금해지네요. 도대체 누가 저 도아영을 이길 수 있는지. 근데 괜찮아요. 언젠가는 제 연적이 누군지 알게 될 거니까.”그녀는 전이혁에게 잔을 들며 말했다.“전이혁 씨, 자! 우리 한잔하죠.”전이혁은 잔을 들고일어나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잔과 부딪혔다. 그리고 도아영이 단숨에 그 술을 들이마시는 걸 지켜보았다.도아영은 더 이상 전이혁과 사랑에 관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도아영은 요즘도 이런 식으로 자식들의 혼사를 정하는 어르신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요즘은 연애와 결혼이 자유로운 시대인데 아직도 자식들의 혼사를 결정해 주는 집안이 있다고?’도아영은 곧바로 자기 집 안 어르신들을 떠올리더니 다시 묵묵히 조금 전의 의문을 거두어들였다.재벌 가문에서는 많은 혼사가 부모님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대부분 어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곤 한다.그들에게는 결혼의 자유가 많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건 이익뿐이었다. 두 가문 사이에서 이루어진 혼인으로 인해 두 회사에 얼마나 큰 이득을 가져다주느냐가 가장 관건이었다.“그럼 전이혁 씨 할머니께서 왜 저를 선택하셨어요? 저는 할머니를 본 적도 없는데.”도아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그녀는 전씨 할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아마 봤을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도아영을 유심히 관찰하고 알아본 뒤에야 전이혁의 미래 아내로 선택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사진을 전이혁에게 건네주며 도아영에게 구애하도록 하게 한 것이다.“저도 모르겠어요. 할머니께서는 나이가 많으시지만 아직도 자주 돌아다니시니까. 우리가 감당하기도 힘들 정도로 말이죠. 다행히 할머니의 건강은 좋으시고 관리도 잘 되어서 겉으로 보기엔 예순 정도로 보이세요.“전이혁도 할머니가 어떻게 도아영을 선택하셨는지 모른다.도아영만 궁금한 게 아니라 고현과 여운초도 전씨 할머니께서 언제 그녀들을 눈여겨보셨는지 궁금해했었다.“그래서 저를 알게 되었고 저를 쫓아다녔던 거예요? 전이혁 씨가 저에게 한 행동이 애정 공세가 아니라고 하면 당신 스스로도 믿지 못하겠죠?”전이혁은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인정해요. 제가 당신에게 구애했다는 것을.”전이혁은 도아영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모든 면에서 그와 잘 어울렸으니까.하지만...“그런데 왜 한동안 사라지고 저를 무시했어요? 일부러 관심을 끌려는 작전이었던 거예요?”전이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전이혁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도망가려고 해도 너무 늦었다.그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자리에 앉아서 몸만 돌려 옆에 앉은 도아영을 돌아보았다. 전이혁의 깊고 검은 눈빛은 도아영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게 했다.이때 도아영은 몸을 굽혀 천천히 전이혁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전이혁은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도아영이 어떤 향수를 뿌리는지는 몰랐지만 강하지 않은 은은한 향기가 너무 좋았다.“전이혁 씨.”도아영은 그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다.“말해봐요, 듣고 있어요.”그도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대답했다.“제가 한 가지만 물을게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저를 대하는 거예요? 저에게 잘해주는 게 저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예요? 저에게 애정 공세를 하면서 왜 또 저를 무시하는 거죠?”전이혁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한 가지 물음보다 더 많이 물어본 것 같은데.”잠시 침묵이 흐른 뒤로 전이혁이 말을 이었다.“저도 제 마음이 어떤지 모르겠다고 하면 도아영 씨는 저를 나쁜 놈이라고 욕할 거죠?”그는 그녀에게 구애하고 싶었다.전이혁은 도아영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할머니의 눈썰미가 결코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없었다면 전이혁은 도아영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도아영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당당함, 대담무쌍함, 의협심, 기발한 성격, 고요할 때의 차분함과 활발할 때의 성격은 전이혁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았던 것이다.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그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바로 그 ‘여우 같은 여자' 말이다. 도아영 같은 재벌가 따님이 아니라.도아영의 아름다운 눈이 반짝이며 전이혁이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못할 것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전이혁을 내려다보았다.전이혁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순간 도아영의 동작과 표정이 마
“예정 언니, 벌써 다 드셨어요?”하예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우리가 좀 빨리 먹는 편이긴 하지. 평일엔 일이 바빠서 먹는 시간도 쪼개 써야 하다 보니 빨리 먹는 버릇이 생긴 것 같아.”도아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예정은 우빈의 손을 잡고 남편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로얄 스위트룸을 빠져나왔고 거기에 문을 닫아주는 센스까지 보였다.전태윤은 경호원들에게도 식사하고 휴식을 취하라고 지시했다.전이혁과 도아영은 이 모든 것이 하예정이 그들에게 특별히 남겨준 기회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제 로얄 스위트룸 안에는 전이혁과 도아영만 남았다.도아영은 와인잔을 들어 우아하게 음미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전이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역시 피할 수 없었군.'전이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도아영 씨,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도아영은 대답 대신 잔을 기울이며 그를 바라만 보았다.‘정말 잘생겼어...'그녀는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잘생겼다는 소문을 들었다. 실제로 본 전태윤도 키가 훤칠한 미남이었지만 지나치게 차가운 인상에, 인사할 때 잠깐 마주친 뒤로는 도아영을 전혀 쳐다보지 않았다.오직 하예정만 바라보는 모습에서 ‘아내 바보'라는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전태윤의 차가운 카리스마와 달리 전이혁은 훨씬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다.전태윤 앞에서 전이혁은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단둘이 있을 때면 전이혁의 우수함이 빛을 발했다. 그는 도아영이 만난 남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였다.전이혁이 잘해줄 때면 도아영은 그에게 정말 빠져들 것만 같았지만 그녀를 소홀히 대할 때면 화가 치밀어 주먹으로 그를 한 대 패주고 싶을 지경이다.‘내가 무슨 애완동물도 아니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애완견이야?'마음 내키면 그녀와 잠시 놀아주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버리는 그의 태도에 도아영은 서서히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전이혁은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전이혁 씨, 왜 자리
하예정은 두 사람 사이의 암투를 모른 척하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좋은 술 두 병 시킵니다. 저는 임신 중이라 못 마셔요. 우리 배 속의 아기 건강 생각해서라도 저는 술을 마시지 못하거든요. 태윤 씨도 술을 잘 마시지 않기 때문에 이혁 도련님이 도아영 씨랑 같이 마실 수밖에 없네요. 도련님, 아영 씨를 잘 모셔야 해요. 저와 태윤 씨가 있으니 도련님이 취해도 괜찮아요. 저희가 책임질게요.”하예정은 도아영에게 윙크했다. 도아영은 슬쩍 OK라는 사인을 보내며 자신 있다는 듯 웃었다.하예정은 그제야 도아영의 주량이 꽤 괜찮음을 눈치채고 안심했다. 하예정은 도아영이 전이혁에게 꼬치꼬치 캐묻다가 술에 취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인데 도아영이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니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술과 여러ㅓ 요리가 나오자 도아영은 직접 전이혁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자! 전이혁 씨, 건배하죠.”전이혁은 잔을 받지 않고 오히려 도아영의 잔을 가져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도아영 씨, 공복에는 술에 취하기 쉬워요. 이 술은 독해서 마실 땐 괜찮다가도 나중에 훅 가버릴 수 있어요. 먼저 요리들을 좀 드시고 또 국물도 한 그릇 드세요.”그 말과 함께 전이혁은 도아영에게 국물을 떠주었다.“국물부터 드셔보세요.”도아영은 평소 국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전이혁이 떠준 거라 예의상 한 수저 떠먹었다.“하 대표님, 이 국물이 정말 맛있네요. 저 원래 국물을 잘 안 마시는데 이 국물은 진짜 맛있어요.”“그럼 많이 드세요. 우리 집은 항상 식사 때 국물을 준비하는 게 습관이에요.”하예정은 우빈에게도 국물을 떠주며 물었다. 식습관은 바꾸게 하기 어려운 법이다.도아영은 관성의 사람이 아니라서 관성의 식습관과 달랐다.국물을 마시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이 국물이 맛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니 그 국물이 정말로 맛있었던 모양이다.“몇 살이에요? 동갑인 것 같은데.”“하 대표님이랑 같은 해에 태어났어요. 제 생일은 연말이라 하 대표님보다 몇 개월 어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