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화장대 위에 있던 계약서가 사라졌다. 계약서 뒷면에 그림을 그렸던 것 같은데...어머!하예정은 곤히 잠든 전태윤을 노려봤다. 그가 무심코 그녀의 그림을 버렸는데 이는 둘 사이의 계약서, 아니, 그녀만의 계약서를 버린 거나 다름없다. 정작 전태윤 본인의 계약서는 보물처럼 고이 모셔두고 있을 것이다.하예정은 가볍게 그의 얼굴을 찔렀다. 그가 아무 반응 없자 그녀는 또다시 살짝 찌르며 중얼거렸다.“내 계약서는 무심결에 버려놓고 정작 당신 계약서는 아직도 간직하고 있네요. 이건 너무 불공평해요. 난 아무런 보장이 없잖아요.”‘이참에 태윤 씨 계약서도 훔쳐 와서 망가뜨릴까? 그럼 서로 공평해지잖아. 누구에게도 계약서가 없으니 서로 구속할 수 없어. 그래야 나도 마음이 놓일 것 같아.’다만 그녀는 전태윤의 방에 들어갈 기회조차 없었다. 순간 하예정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대체 어떻게 해야 그의 계약서를 훔쳐 와서 망가뜨릴 수 있을까?만취시킬까?기절시킬까?아니면 유혹해볼까?하예정은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해 봤지만 결국 다 포기하고 천천히 기회를 기다리기로 했다.그녀는 아직도 한참 더 기다려야 전태윤의 방으로 들어갈 수 있을 거로 여겼는데 뜻밖에도 그날 밤에 괜찮은 기회가 차려졌다.할머니는 갑자기 찾아오셨는데 전이진과 함께 호텔에서 식사를 마친 후 바로 하예정의 가게로 간 게 아니라 호텔에서 휴식하다가 밤 9시가 다 돼서야 전이진을 불러와 발렌시아 아파트로 보내 달라고 했다.밤 10시, 어르신은 캐리어를 끌고 전태윤의 집 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눌렀다.“누구세요, 잠시만요.”숙희 아주머니가 재빨리 달려가 문을 열었다.할머니를 본 숙희 아주머니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어르신, 여긴 어쩐 일이세요?”“태윤이랑 예정이 안에 없어?”“지금 돌아오는 중이에요. 아직 도착하지 못했어요. 제가 먼저 돌아왔어요.”매일 저녁 하예정이 퇴근하고 돌아와 주우빈을 데려가기에 숙희 아주머니는 가게에 더 머무를 필요가 없었다.숙희 아주머니는 어르신의 캐리어를
전태윤 아래로 남동생이 8명 더 있는 건 제쳐두고 전태윤 한 명만으로도 할머니는 속이 재가 되어간다.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아홉 손자를 일일이 분석하며 전태윤이 가장 효심 있지만 또 할머니를 가장 애태우게 한다고 하셨다. 만약 할머니가 전태윤의 혼사에 간섭하지 않으면 그 녀석은 아마 평생 독신으로 지낼 거라고 말씀하셨다.인제 보니 할아버지의 분석이 틀린 것 하나 없었다.“어르신, 사람 감정이라는 건 절대 다그칠 수 없어요. 인생의 큰일이고 평생을 함께 살아야 하잖아요. 예정 씨가 사람을 바로바로 알아보지 못하고 또 요즘 이혼이 대수이긴 하지만 청춘을 몇 년이나 허비하는 거라 대가가 너무 커요.”이때 밖에서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도련님, 사모님께서 돌아오셨어요.”어르신이 재빨리 그녀에게 말했다.“호칭 조심해.”숙희 아주머니가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전태윤 부부가 안으로 들어오자 숙희 아주머니와 할머니가 나란히 앉아 TV를 시청하고 있었다.“태윤 씨, 예정 씨, 오셨어요.”숙희 아주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활짝 웃었다.“태윤 씨, 할머님 오셨어요.”“할머니.”하예정도 가까이 다가갔다.“할머니 먼저 돌아오셨네요. 저 아까도 태윤 씨한테 할머니 왜 가게에 안 오시는지 물어봤거든요.”하예정은 전씨 집안에서 할머니와 가장 가깝다.두 사람은 마치 친할머니와 손녀처럼 대화가 끊이질 않았다. 이에 전태윤도 질투가 날 지경이었다.하예정은 그와 함께 있을 때 전혀 이런 모습이 아니었으니 말이다.‘할머니는 나한테서 예정이를 뺏어가려고 집에 들어오셨나?’“어머, 어떡해요!”하예정이 문득 뭔가 생각난 듯 전태윤의 다리를 툭 치며 말했다.“태윤 씨, 우리 집에 침대가 있는 침실이 단 세 개뿐인데 할머니 오늘 어디서 주무셔야 하죠?”숙희 아주머니께 침구 용품을 사드릴 때 그녀는 다른 손님방에도 침대를 하나 더 마련했어야 했다.할머니가 오니 마땅히 주무실 침대조차 없으니 말이다.전태윤은 제 다리를 내리친 그녀의 손을 보더니 다시 할머니
하예정의 방에서 그녀는 한창 할머니를 도와 캐리어 안의 물건을 꺼내 정리했다. 할머니는 그녀의 집에서 마실 물병까지 챙겨왔다.“할머니, 대체 무슨 일 때문에 나오셨어요?”“어휴, 말도 마라. 이게 다 내가 자식을 제대로 키우지 못해서지. 종일 속만 썩이고 잘해줘도 내 마음 몰라. 그래서 아예 다 내려놓고 당분간 너희 집에서 지내려고. 눈에 안 보이면 마음도 편해질 것 같아.”하예정은 물건을 다 정리한 후 욕실에 들어가 할머니를 위해 온수를 받았다.“할머니, 물 다 받았어요. 들어와서 따뜻하게 샤워하세요.”할머니는 알겠다고 대답하며 잠옷을 들고 욕실에 들어갔다.“이래서 딸이나 손녀가 필요하다니까. 여자애는 얼마나 세심해. 너도 봤지, 내가 오고 나서 태윤이 그 녀석 관심하는 말 한마디 없었어. 그래도 우리 예정이밖에 없네.”하예정이 웃으며 대답했다.“할머니 애초에 저랑 태윤 씨 엮어주실 때 태윤 씨가 엄청 자상하고 꼼꼼하다고 하셨잖아요. 자식들은 알아서 자기 인생 잘 사니까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할머니는 이젠 노후를 잘 보내시기만 하면 돼요. 불필요한 것들 신경 쓰지 말아요.”하예정이 볼 때 할머니의 아들, 며느리들은 다들 효심이 지극했다.“나도 그러고 싶은데 말처럼 쉽니? 내가 태윤이가 자상하고 꼼꼼하다고 했었어? 그럼 넌 어때? 걔가 정말 내 말처럼 자상하고 꼼꼼해?”하예정이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대답이 없었다.전태윤은 그녀를 신경 쓸 때 정말 꼼꼼하고 자상한 편이었다.어디 전태윤뿐이겠는가, 누구나 다 그럴 것이다. 몹시 신경 쓰이는 사람이 생기면 항상 그 사람만 주시하고 한없이 자상해지는 게 사람 마음이니까!어르신은 샤워를 마친 후 하예정의 침대에 누웠다.하예정이 욕실에서 나왔을 때 어르신은 이미 단꿈에 빠져 있었다.다만...어르신은 엄청 요란하게 코를 골았다.하예정은 속수무책해졌다.그녀는 술을 마셔야만 코를 골든 천둥이 치든 깊이 잠들지만 평상시엔 작은 인기척에도 밤잠을 설친다.하예정은 한숨을 쉬고 어쩔 수 없이 할
이제 막 몇 걸음 걸어갔는데 갑자기 방문이 열렸다.그녀의 방이 아니라 전태윤의 방이었다.그는 따뜻한 잠옷을 입고 물컵을 들고 나왔는데 보아하니 물 마시러 가려는 듯싶었다.정면으로 마주친 부부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전태윤은 불을 켜고 하예정에게 물었다.“아직 안 잤어?”하예정은 살짝 난처한 얼굴로 나지막이 속삭였다.“그게... 할머니가 코를 너무 심하게 골아서 도저히 잠들 수가 없어서요.”전태윤은 그녀의 방문 앞에 다가가 문을 열고 안을 힐긋 들여다보았다. 할머니의 요란한 코골이 소리가 일부러 연기하는 소리라는 걸 그는 바로 알아챘다. 전태윤은 방문을 닫고 하예정에게 물었다.“그럼 넌 어디서 자려고?”“숙희 아주머니 방에 들어가려 했는데 좀처럼 깨어나지 않으세요. 방문도 안으로 잠겨서 들어갈 수 없어요. 그냥 소파에서 자야죠 뭐.”전태윤이 물을 따르러 가면서 소파에 놓인 베개와 외투를 보았다.“오늘 밤 꽤 춥더라고요. 비까지 오니 발이 너무 차가워서 잠을 잘 수가 없어요. 방에 돌아가 양말 챙겨 신고 나오려고요. 태윤 씨, 우리 내일 이불 몇 개 더 사 와요. 손님방에 침대도 하나 마련하고요.”애초엔 부부가 각방을 쓰느라 손님방에 침대를 놓을 생각이 아예 없었다. 숙희 아주머니가 오신 후에도 아주머니의 침대와 옷장만 마련했을 뿐 다른 손님방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하여 오늘 밤 이 집안의 안주인 하예정은 잘 곳이 없어졌다.“태윤 씨 방에 물 있잖아요.”하예정은 그에게 얼굴을 씻겨줄 때 방을 한번 둘러보았는데 없는 게 없었다.전태윤이 담담하게 대답했다.“물은 있는데 아직 끓이지 않았어.”하예정이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그녀는 소파에 앉아서 물을 따르고 제 방으로 돌아가는 전태윤을 물끄러미 쳐다봤다.“태윤 씨.”문 앞까지 도착한 전태윤이 그녀의 부름에 걸음을 멈췄다. 그는 짙은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무슨 말을 할지 기대했다.“혹시... 태윤 씨 방에 이불 하나 더 있어요?”“없어.”“그럼... 태윤 씨 침대 시트
전태윤은 그녀가 옷 벗는 남자를 볼 때 비명을 지르기보다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심지어 손을 뻗어 대뜸 만지고 싶어 하는 여자인 걸 너무 잘 알았다.그는 허리를 곧게 펴고 더는 야릇한 자세로 그녀를 감싸지 않았다.어차피 그녀에게 아무 소용 없으니까.“귀마개 껴. 그럼 잘 수 있잖아.”하예정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그럼 불편해서 못 자요.”전태윤은 이불 없이 소파에서 자려는 그녀를 텅 빈 손님방에 보낼 수는 없었다. 그도 오늘 밤이 매우 쌀쌀했다. 잠시 고민하던 전태윤은 물컵을 들고 다시 제 방으로 걸어갔다.“내 방에서 자.”중저음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하예정은 흠칫 놀랐다.어쩌다 한번 정색하니 나름대로 효과가 있었다.전태윤은 문 앞에 다가가 걸음을 멈추더니 꿈쩍 않는 하예정을 바라보며 짙은 표정으로 쏘아붙였다.“싫으면 소파에서 자고.”그는 말하면서 방에 들어가 문을 닫으려 했다.이미 베개까지 챙긴 하예정은 쏜살같이 달려와 한쪽 발을 문틈에 비집어 전태윤이 문을 닫지 못하게 했다.그녀의 예쁜 얼굴에 아부가 담긴 미소가 지어졌다.“싫을 리가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전태윤은 굳은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봤다.하예정은 아무것도 못 본 척하며 베개를 챙기고 그를 스쳐지나 방 안에 들어갔다.아침에 전태윤을 도와 얼굴을 씻겨줄 땐 자세히 방을 둘러보지 못했는데 두 번째로 들어오니 저도 모르게 주변을 쭉 훑어보았다.그의 방은 하예정이 청소를 해줄 필요가 없었다. 전부 전태윤이 직접 하는데 먼지 하나 없었다. 할머니는 그가 결벽증이 조금 있다고 했는데 충분히 보아낼 수 있었다.방 구경을 마친 후 하예정은 곧바로 큰 침대에 털썩 누워 베개를 내려놓으며 영역표시를 했다. 그러고는 이불까지 끌어와 살포시 덮었다.편안한 침대에 따뜻한 이불까지 덮으니 완벽 그 자체였다.그녀는 누운 지 2분도 안 돼 다시 일어나 베개를 침대 끝에 내려놓고 방향을 바꿨다.“우리 서로 반대 방향으로 누워요. 내가 침대 끝에 누울게요.”전태윤이 다가와 굳은 표
전태윤은 몰래 한숨을 내쉬고 하예정의 옆에 누웠다.그녀를 갖고 싶어도 이런 식은 원하지 않았다.그녀가 달갑게 받아들일 때, 적어도 그녀가 맨정신일 때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비몽 사몽하게 관계를 해버리면 누가 저와 함께 잤는지조차 모를 테니까.하예정은 환경이 바뀌어도 잠만 잘 잤다. 다만 전태윤은 달랐다. 그는 단 한 번도 누군가와 한 침대에서 자본 적이 없었고 이토록 예쁘고 날씬한 여자가 옆에 누워본 적은 더더욱 없었다. 심지어 그 여자는 명실상부한 그의 아내였다.전태윤은 좀처럼 적응하지 못했다.잠든 하예정은 그에게 기대 몸을 따뜻하게 녹였다.전태윤은 살짝 짜증이 밀려와 손을 뻗어 그녀의 잠옷 단추를 풀어헤치려 했지만 단추 한 개만 풀고는 금세 포기했다.그는 예쁘게 잠든 하예정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그녀의 입에 살짝 입 맞추고는 마음껏 품에 파고들어 오게 내버려 두었다.‘그래, 난 참을 수 있어. 버티는 게 곧 이기는 거야!’전태윤은 끊임없이 묵념하며 마음을 다잡았다!‘하예정 너 두고 봐, 때 되면 나 절대 가만 안 둬!’결국 그도 너무 졸린 나머지 스르륵 잠이 들었다.두 사람은 그 시각 문 앞에서 누군가가 귀를 바짝 대고 인기척 소리를 엿듣는다는 걸 전혀 몰랐다.그 사람은 다름 아닌 할머니였다.“어때요?”문득 숙희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울렸다. 비록 아주 낮은 목소리지만 할머니는 여전히 놀라서 펄쩍 뛰었다.숙희 아주머니는 할머니가 이토록 놀라실 줄은 전혀 몰라 잇따라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할머니는 숙희 아주머니를 보더니 가슴을 두드리며 낮은 목소리로 질책했다.“숙희야, 왜 소리 없이 불쑥 나타나. 깜짝 놀랐잖아.”“어르신께서 저를 보신 줄 알았어요.”할머니는 손자의 방에서 무슨 인기척 소리가 들리는지 고도로 집중하느라 숙희 아주머니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가 이젠.”어르신이 나지막이 아주머니를 다그쳤다.“아무것도 안 들려. 태윤의 방에 틀림없이 방음 소재를 썼을 거야. 아무리 귀 기울여도 잠잠하잖아.”“두 사람
밤새 비가 내리더니 날이 밝자 멈췄다.하예정은 늘 정해진 시간에 잠에서 깼다.눈 뜨자마자 전태윤의 준수한 얼굴을 본 그녀는 흠칫 놀라며 어젯밤 일을 되새겼다. 그녀는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 살며시 밖으로 나가려 했다.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다시 고개 돌려 전태윤을 살짝 밀쳐보았는데 아주 곤히 잠들어 있었다. 어제 하루 커피로 겨우 버틴 그였기에 깊이 잠든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차피 그는 오늘 휴가까지 냈으니 푹 자게 내버려 두었다.하예정은 속으론 그를 방해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정작 하는 짓은 극심한 방해였다.그녀는 전태윤의 잘생긴 얼굴을 쳐다보더니 참지 못하고 몇 번 입맞춤하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어쩜 나보다 예뻐? 종일 차갑고 무뚝뚝한 표정만 짓지 않는다면 진작 당신을 덮쳤을 텐데. 내가 좀 더 용기 낼 수 있을 때 제대로 덮쳐볼게.”그녀는 몰래 뽀뽀한 후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떠올랐다. 전태윤의 방은 그녀의 금지구역인데 어렵게 들어오기도 했고 마침 그가 깊이 잠들었으니 이 기회에 계약서를 훔쳐서 없애버리기로 했다.그렇지 않으면 늘 본인만 아무런 보장이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계약서는 전태윤이 무심코 없애버렸으니까.여기까지 생각한 하예정은 전태윤이 잠든 틈을 타 그의 방에서 몰래 계약서를 찾아보았다. 그가 깰까 봐 아주 조심스럽게 움직였지만 침대 끝까지 훑어보아도 계약서라곤 보이질 않았다.그의 방에 금고가 하나 있는데 하예정은 열 수 없었다.“설마 금고에 넣어둔 거야?”하예정이 구시렁댔다. 계약서를 굳이 금고에 잠글 필요가 있을까?그녀의 예측이 맞았다. 전태윤은 정말 계약서를 보물처럼 여기며 금고에 넣어두었다.결국 하예정은 아무 성과 없이 베개를 안고 살며시 방을 나섰다. 이른 아침 다들 깨나지 않은 틈을 타 제 방에 돌아와 할머니와 하룻밤 잔 것처럼 연기하려 했다.그 시각 할머니는 코골이를 멈췄다.다만 날이 이미 밝았다.하예정이 옷을 갈아입고 세안을 마치자 할머니께서 깨어났다.“할머니, 잘 주무셨어요?”할
전태윤이 잠에서 깼을 때 하예정은 이미 밖에 나가버렸다. 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나랑 잤으면 내가 깨어날 때까지 있어 줘야 하는 거 아니야?”하예정이 그 말을 들었으면 어이가 없어 뒷목을 잡을 것이다.‘저기요, 태윤 씨, 뚫린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내뱉는 건 아니죠. 누가 누구랑 자요. 우린 단지 한 침대에서 잠을 잤을 뿐이라고요.’전태윤도 딱히 할 말이 없을 것이다.그가 밖으로 나왔을 때 온 집안에는 반려동물 강아지와 고양이를 제외하곤 세 여인 모두 보이지 않았다.보아하니 장 보러 간 게 틀림없었다.전태윤은 발코니의 그네에 앉아 어젯밤 아내와 함께 보낸 기억을 되새기며 몇 마디 요약했다.‘비록 적응되지 않지만 은근히 기대되네.’잠시 후 하예정 일행이 돌아왔다.그녀는 식자재 말고도 침구 용품까지 사 왔다. 가구점이 아직 문을 열지 않아 새 침대를 고르지 못했는데 이따가 다시 나가서 침대를 산 후 손님방에 놓아야만 안심하고 출근할 수 있을 것 같았다.‘아 참, 오늘 출근 안 하지.’전태윤은 오늘 휴가 내고 그녀와 함께 할머니를 모시고 바람 쐬러 펜션에 가기로 했다. 할머니를 즐겁게 해드려야 하니까.인기척 소리를 들은 전태윤은 그네에서 내려 방안으로 들어왔다. 와이프가 크고 작은 봉투를 한가득 들고 있었는데 죄다 침구 용품이었다. 그의 눈동자가 한없이 짙어졌지만 아무 말도 내뱉지 않았다.“태윤아, 너 아직 집에 있었어? 출근한 줄 알았더니.”어르신은 기대에 못 미치는 손주 녀석을 한심한 표정으로 쳐다봤다.‘못난 놈.’“할머니, 나 오늘 하루 휴가 냈어요. 이따 아침 먹고 광명 아파트에 우빈이 데리러 갔다가 우리 함께 서교에 있는 펜션으로 바람 쐬러 가요.”전태윤은 할머니의 싸늘한 눈빛을 뒤로한 채 가까이 다가오며 오늘의 스케줄을 얘기했다.그는 하예정의 손에 든 침구 용품까지 들어서 빈 손님방에 내려놓았다.그의 말을 들은 할머니가 되물었다.“며칠 있을 건데?”“딱 오늘 하루요.”“거긴 펜션이야. 하루만 가서 뭘 논
전호영은 꽃다발을 안고 사무실로 들어갔다.퇴근 시간이었기 때문에 많은 직원이 밖으로 나가면서 전호영이 꽃다발을 안고 들어오는 보습을 보았지만 모두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만약 전호영을 보지 못한다면 아마도 이상한 일로 여길 것이다.“전 대표님.”다들 마음속으로 아무리 전호영을 비웃을지라도 겉으로는 여전히 공손하게 대했다.전호영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곧 그는 고씨네 남매에게 다가갔다.“현이 씨, 퇴근하시죠. 제가 데리러 왔어요. 같이 밥 먹으러 가요. 자, 받아요.”전호영은 꽃다발을 고현 앞으로 내밀었다.고현은 담담하게 말했다.“제가 말했어요. 제가 꽃다발을 좋아하지 않는다고요. 매번 올 때마다 꽃다발을 사 오지 마세요. 제 사무실이 곧 꽃집이 될 것 같으니까요.”전호영은 심지어 하루에 꽃다발을 여러 번 선물한 적도 있었다.고현은 전호영이 보낸 꽃다발을 쓰레기통에 버리면 전호영은 보복으로 그녀에게 더 많은 꽃을 보냈다.고현은 자신이 이 남자에게 곧 먹혀 죽을 것만 같았다.“꽃병을 더 사서 사무실로 보내드릴게요.”“저를 꽃병이라고 비아냥거리시려는 거에요? 제 사무실에는 꽃병이 가득 놓여 있거든요.”전호영이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제가 잘못했네요. 다음에는 이런 꽃들을 보내지 않고 다루기 쉬운 꽃들로 보낼게요. 현이 씨 사무실에 있는 그 꽃병들을 집으로 몇 개 가져가면 사무실이 꽃병이 줄어들 거 아니에요.”옆에 서 있던 고빈이 말을 이었다.“우리 형은 꽃다발을 좋아하지 않지만 제가 무척 좋아해요. 저에게 주세요. 제가 이 꽃들을 저의 여성 지인들이게 줄 테니까요. 돈도 절약할 수 있으니 너무 좋을 것 같아요.”“고빈 씨는 아직 퇴근 안 하셨군요.”전호영은 꽃다발을 고현의 품에 안겨주며 자연스럽게 고현의 손을 잡았다.고빈은 일부러 과장되게 말했다.“설마 이제야 저를 보신 건 아니죠? 혹시 시력에 문제가 있으신 건 아니죠? 잘 고려해 보고 짝을 찾으셔야지 아니면 시각장애인을 고를 수도 있어요.”“그건 제 눈에 현이 씨만
장 대표가 전호영의 차를 얼핏 보더니 말을 이었다.“전씨 가문의 셋째 도련님의 차였군요. 셋째 도련님은 정말 매일 고씨 그룹에 가서 고 대표님을 귀찮게 하는군요. 저는 그저 헛소문인 줄로만 알았는데.”“사실이에요. 고 대표님은 우리 장성에서 가장 젊고 우수한 대기업 대표님이죠. 그의 잘생긴 외모는 얼마나 많은 여자를 사로잡았는지 몰라요. 고 대표님은 강성의 모든 젊은 여자들의 이상형일걸요. 여자들도 해내지 못한 일을 전호영 도련님이 해내게 될 줄은 몰랐네요.”“하지만 외모로 보면 전호영 도련님과 고현 대표님은 참 잘 어울려요. 두 사람 중 한 명이 여자라면 정말 천생연분이죠. 하지만 아쉽게도 두 사람 모두 남자네요. 너무 아쉬워요.”두 사람의 만남은 수많은 얼마나 많은 여자의 부러움을 자아냈는지 모른다.강성의 명문 아가씨들도 전호영이라는 남자에게 진 것이 자못 못마땅했다.“두 분이 이미 서로 남녀 관계를 확정하셨나요?”장 대표는 계속해서 물었다.“제가 듣기로는 전호영 도련님이 아직도 고현 대표님께 구애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전호영 도련님의 일방적인 짝사랑 아닐까요? 사실 고현 대표님이 정상적인 남자인데 전호영 도련님이 게이일 수도 있죠.”“저도 잘 몰라요. 진실한 사실이 어떠할지 누가 알겠어요. 고 대표님은 냉담한 분으로서 수많은 대표님과 접촉하시지만 진정으로 친한 친구는 얼마 없어요. 고 대표님 속마음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정말 없거든요.”“하지만 고현 대표님께서 전호영 도련님을 점점 더 포용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전호영 도련님이 고 대표님을 위해 여성 옷을 입으며 여자로 분장한 적이 있거든요. 그 두 사람 중에서 아마 전호영 도련님이 더 비정상인 것 같아요. 고 대표님께서 좋아하는 사람이 여성이기 때문에 전호영 도련님이 여성 옷을 입었을 거라고 봐요.”전호영은 여성 옷차림으로 고씨 그룹에 왔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그 현장을 목격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전호영을 위해 비밀을 지킬 수 없었을 것이다. 누군가가 소문을 퍼뜨리고 그렇게 일파
멀리 장성에 있는 전호영도 전이진이 보낸 카카오 스토리를 보았다. 그는 여운초와 전이진이 혼인 신고서를 받은 모습을 보고 무척 부러워했다.그는 결국 다시 자리를 떠나 호텔 사무실을 나오더니 차를 몰고 고씨 그룹으로 향했다.이때 고현이 사업에 관한 얘기를 방금 마쳤을 때였다.그녀는 일어나서 손을 뻗어 고객과 악수하며 부드럽게 말했다.“장 대표님, 수고하셨어요.”장 대표도 이내 대답했다.“즐거운 협력이 되길 바랍니다.”고현은 예의 바르게 말했다.“벌써 식사 시간이 되었네요. 우리 함께 식사하는 건 어때요? 제가 대접해 드릴게요.”“감사합니다, 고 대표님. 제가 이번에도 일정이 너무 빡빡해서 도저히 시간을 낼 수가 없네요. 곧 비행기를 타야 할 시간이거든요. 다음에요. 다음에 제가 고 대표님께 음식 대접해 드릴게요.”고현은 이해하며 말했다.“장 대표님께서 오신다면 당연히 제가 음식 대접해 드려야죠. 다음에 오시면 꼭 저에게 대접할 기회를 주셔야 해요.”“당연하죠. 약속드릴게요.”장 대표는 웃으며 대답했다.고현이 고빈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쳐다보자 고빈은 눈치껏 일어나사 미리 준비한 특산품을 장 대표에게 가져다주었다.“장 대표님, 이것은 우리가 장 대표님을 위해 준비한 강성의 특산품이에요. 귀한 물건은 아니고 우리 강성의 특색이에요. 한 번 맛보세요.”장 대표는 사양하다가 웃으며 선물을 받았다.“고 대표님, 고마워요.”고현과 사업해 본 사람들은 비록 고씨 그룹의 오더를 따내기가 쉽지 않지만, 고현의 인품은 흠잡을 데가 없다고 했다.고현은 사람이 엄숙하고 차갑지만, 그녀와 사업을 해본 사람들 모두 그녀를 칭찬하곤 했다.하지만 이렇게 좋은 청년 인재가 동성애자라니... 아깝기만 했다.고현을 마음에 두고 있었던 많은 대표가 아마 정말 크게 실망했을 것이다.고현이 게이가 아니라면 그들은 모두 자신의 딸과 고현을 맞세워주고 싶어 했다.고현 남매와 고위층 몇 명 인사들이 함께 장 대표를 고씨 그룹 앞까지 배웅하고 장 대표 일행을 미리 준비
“이제 밥 먹으러 가자. 엄마가 관성 호텔에 예약해 놓았어. 가서 축하할 겸 밥 먹자. 그리고 모두한테도 관성 호텔에 오라고 전화해 놨어. 할머니께서도 너희 두 사람이 혼인 신고한 일을 아시고 무척 기뻐하셨어. 운초야, 내가 방금 네 고모도 초대했어. 너와 이진이 결혼에 관해 상의하려고. 아직 설이 몇 달 남았는데 그 전에 결혼식 좀 올리자.”명해은이 무척 급했던 모양이다.전이진과 여운초가 혼인 신고하자마자 바로 결혼에 관한 일을 상의하려고 했다.여운초의 새아버지와 친어머니는 아직 감옥에 있는데다 여운초가 그들에게 원한을 품고 있어 명해은은 혼례 문제에 관해서 여준희와 상의하려 했다.하지만 추미자는 결국 여운초의 친어머니였기에 명해은은 여운초의 뜻을 물었다.“운초야, 네 어머니께 말씀드려야 되지 않을까?”명해은은 추미자한테 축복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지 않기에 그냥 결혼 사실을 알려주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여운초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이진 씨와 함께 감옥으로 만나러 가서 말할게요. 저와 이진 씨 결혼에 대한 모든 일은 저의 작은 고모와 상의하면 돼요. 여씨 가문에 사람들이 수많지만, 저를 진심으로 생각해 주는 건 제 작은고모뿐이거든요.”여천우도 여운초와 사이가 가까웠지만, 아직 어리기에 이런 일에 관해 잘 모를 것이다.명해은은 웃으며 말을 건넸다.“그래. 알았어. 네 작은고모도 너희들이 혼인 신고한 사실을 아시고 무척 기뻐하셨어. 오후에 오신다고 하셨어.”여운초 전이진이 약혼한 뒤로 전씨 가문은 여운초의 배후에 서 있게 되었고 눈도 좋아지기 시작했다. 여준희는 이 가엽고 운이 좋은 조카를 전이진에 맡기게 되니 매우 안심했다.여준희도 그녀의 집안에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친정집에 가는 횟수가 예전보다 줄었다.여운초 남매는 서로 자주 연락했다.여운초는 작은고모를 어머니로 여기고 있었다.그녀는 친어머니에게서 받지 못한 모성애를 여준희에게서 느꼈다.“언제 면회를 하러 가려고?”“오후에 가려고요. 감옥에 가서 보고
전현민도 벙글벙글 웃으면서 말했다.“그래, 이건 세상에 둘도 없는 경사야. 우리는 기뻐서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다. 이진아, 이미 이르지 않으니 어서 운초랑 들어가 절차부터 밟아. 직원들 퇴근 시간이 다 되어간다.”부모님의 재촉을 받은 전이진은 여운초의 손을 잡고 어머니 손으로부터 가족관계등록부와 다이아몬드 반지를 받아서 구청 안으로 걸어갔다.명해은 부부는 돌아가지 않고 밖에 서서 두 사람이 나오기를 기다렸다.전현민은 아내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이러고 있으니 32년 전에 우리 둘이 이곳에 와서 결혼 증명서를 받던 날이 생각나네. 마치 어제 발생한 일과 같은데, 벌써 우리 큰아들이 이곳에 오다니... 세월이 참 빠르긴 빨라. 우리도 늙을 때가 되긴 됐나 보네.”그는 아내의 손을 잡으면서 말을 이었다.“난 당신과 백년해로하겠다고 약속했었지.”명해은도 감격해서 말했다.“그러게요, 세월이 유수와 같다는 말이 딱 맞아요. 난 아직도 자신이 18살인가 하는데 우리 큰아들이 벌써 서른이네요. 우린 정말 늙었나 봐요. 부인하려야 부인할 수가 없네요.”“당신은 조금도 안 늙었어. 내 눈에는 당신이 관음보살과 같이 해마다 18살이야.”명해은은 몸 관리를 잘해서 전이진과 함께 나가면 모르는 사람들이 두 사람을 남매로 착각할 정도였다.전현민도 몸 관리를 잘하는 편이었지만, 젊은 시절에 전씨 가문의 사업에 몰두했기에 심신이 많이 상해서 귀밑머리가 희끗희끗 해졌다.은퇴한 후,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몇 번 염색은 했었지만, 그래도 아내와 같이 서면 아내보다 10살은 더 많아 보였다. 사실, 두 내외는 불과 한 살 차였다. 명해은은 남편의 칭찬에 웃음보를 터뜨렸다.“나도 해마다 18살이 되고 싶지만 그렇게 안 되네요. 내가 아무리 몸 관리를 잘한다 해도 늙기 마련인걸요.”“내가 당신과 함께 늙어 갈 테니 두려워하지 마. 내가 당신보다 훨씬 늙어 보여.”명해은은 웃으면서 말했다.“전 두려울 것 없어요. 당신만 내 곁에 있어 준다면 하늘이 무너
여운초도 더는 사양하지 않았다.그녀는 다만 전이진을 대신하여 은행카드만 보관할 뿐일 것이었다. 그가 돈 쓰는 것을 제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녀도 그의 돈을 쓸 일이 없을 테였다.전이진은 그녀의 볼에 입을 맞추고 나서 다시 그녀를 보면서 벙글벙글 웃었다.보면 볼수록 사랑스럽기만 했다.“왜 계속 날 보면서 웃어요?”“좋으니까. 운초 씨, 나 지금 너무 좋아. 그냥 웃고 싶은 걸 어떻게 참아?”이렇게 대답하면서도 그는 또 웃었다.그러는 전이진을 지켜보는 여운초도 참지 못해 웃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다.둘이서 한참 동안 알콩달콩한 후 전이진이 시계를 보니 어머니가 도착할 시간이 다 되었다. 그는 약혼녀를 보면서 말했다.“운초 씨, 엄마가 곧 도착할 것 같으니 우리 지금 출발해. 우리가 구청에 도착하면 아마 엄마도 도착하실 거야.”그는 꽃집에 가서 장미꽃 한 다발을 사야 했다.여운초가 불시에 결혼 신고하자는 바람에 그가 아직 준비는 못 했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서둘러야 했다.꽃다발, 다이아몬드 반지 둘 중 하나도 빠뜨리지 않을 것이었다.그녀는 자신이 한평생 소중히 여길 여자임으로 절대로 서운하게 할 수 없었다.“그래요.”그가 일어나면서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자, 여운초도 편안하게 자신의 손을 그의 커다란 손바닥에 올려놓은 채 그에게 이끌려 일어섰다.두 사람은 손을 꼭 잡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자고로‘그대의 손만 잡고 이생의 끝까지 살아간다.’라고 했다.그녀는 전이진과 백년해로하고 평생 금실이 좋기를 원했다. 시부모님처럼 애들이 부러울 정도로 몇십 년 동안의 결혼생활을 첫 사람처럼 달콤하게 지내길 원했다.여운초는 저의 집에 있는 차를 안 타고 전이진이 운전하는 차를 타기로 했다.그녀에게는 운전면허증이 없었다. 그녀가 16살 때부터 앞을 보지 못했기에 운전면허를 딸수 없었던 것이었다.집에 있는 운전기사는 전이진이 그녀에게 보낸 경호원인데 그녀를 보호할 수 있을 뿐만아니라 운전도 해줄 수 있었다.20분 뒤.구청 입구명해
“운초씨, 잠깐만 기다려. 내가 엄마한테 당장 전화할게.”전이진은 약혼녀의 볼에 입을 맞춘 후, 바로 어머니한테 전화를 걸었다.명해은은 전화벨이 한참 울린 뒤에야 전화를 받았다.“엄마, 오늘 시간 돼요?”“이제 방금 일어났어. 오늘은 별일 없어서 시간이 남아돌아. 왜? 아들, 엄마 도움이 필요해?”명해은이 잠기가 채 가셔지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아들이 다 크니 부모로서 해줄 수 있는 일이 점점 적어졌다.애들한테 더는 필요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명해은은 너무 일찍 맛봤다.“저와 운초 씨가 점심 전에 혼인신고를 마치려 하는데 제가 가족관계등록부를 안 가져왔어요. 엄마 혹은 아버지가 지금 저한테 가져다줄 수 있어요? 혹은 누군가에게 부탁해서 보내줘도 되고요. 제가 돌아가서 가져오면 시간이 지체되어 아마도 오후나 돼야 절차를 밟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오후까지 못 기다리겠어요.”가족관계등록부만 손에 가지고 있다면, 전이진은 지금이라도 여운초를 데리고 혼인 신고하러 갔을 테였다.진정으로 여운초가 좋아진 그 시각부터 그는 그녀와 결혼하기를 원했다.하지만 그때의 여운초는 앞을 보지 못했기에 훌륭한 전이진을 앞두고 자비감에 모대기었다. 전이진의 사랑마저 그녀는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받아들인 것이었다.그녀는 전이진이 자신의 눈을 고쳐주기 위해 정 선생을 찾으러 여러 번 예진 리조트를 드나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남은 인생을 그와 함께하기로 하고 약혼을 한 것이었다.그래도 그녀는 진정으로 그를 볼 수 있을 때 가서 결혼하기를 원했다.그녀는 자기와 결혼할 남자가 어떻게 생겼는가를 알고 싶다고 했다.전이진이 곧 시어머니로 될 사람에게 하는 말을 들은 여운초의 얼굴은 또다시 붉게 물들었다.‘이 사람 뭐가 그리 급해...’이 반가운 소식을 들은 명해은은 순식간에 잠기가 싹 사라진 듯했다. 그녀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시간이 있고말고, 엄마 시간은 남아돌고 있으니 금방 가져다줄게. 넌 지금 여씨 저택에 있니? 아니면 회사에 있니?” “저는 지금
그는 자신의 사람 보는 안목을 믿을 뿐만 아니라, 할머니도 믿었다. 그는 그녀와 긴 시간을 함께하면서 그녀의 인품, 일하는 스타일 등을 천천히 알게 되었다.“혼인신고를 하고 나면 한평생 같이 살아야 해요. 나는 이혼 따위는 할 마음이 없으니 잘 생각해서 결정해요. 당신처럼 훌륭한 남자는 앞으로도 나보다 더 좋고, 당신한테 더 잘 어울리는 여자를 만날 수도 있어요. 그때 가서 이 결혼은 할머니가 강요하셔서 한 거라고 하면서 그 여자야말로 당신의 진정한 사랑이니 어쩌니 해도 난 당신을 놓아주지 않을 거예요.”전이진은 손가락으로 가볍게 그녀의 코끝을 살짝 건드리면서 말했다.“넌 아직도 바깥사람들이 우리 전씨 집안 남자들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몰라? 전씨 집안 남자들은 모두 아내한테 일편단심이야. 전씨 집안의 가훈에는 결혼 후 한평생 가정에 충실해야 하고 혼인에 충실해야 하며 바람을 피워선 안 되고 이혼도 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되어 있어.”“누구든 가훈을 어기는 즉시, 전씨 가문에서 쫓겨나서 더는 전씨 일가와 상관없는 사람으로 돼버려.”“그리고 내가 당신과 결혼하는 것은 할머니가 당신을 선택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이야. 그렇지 않다면 할머니가 강요하셔도 소용없어.”전이진은 핸드폰을 꺼내 들고 전화를 걸었다.“누구한테 전화하려고요?”여운초는 그가 할머니에게 전화 드리려나 싶어서 한마디 물었다.“내가 가족관계등록부를 몸에 지니고 다니진 않아. 우리가 혼인신고를 하려면 내 가족관계등록부도 필요할 거 아니야. 내가 엄마한테 전화해서 급히 가져다 달라 하면 우리가 점심 전에 혼인신고 절차를 다 끝낼 수 있을 거 같아.”결혼 증명서를 받고 나면 그들은 합법적인 부부가 될 것이었다.전이진은 여태 자기가 한시 급히 여운초랑 결혼하여 그녀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싶어 한다는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었다.애초에 여운초는 시력이 회복되어 그를 볼 수 있어야만 결혼할 수 있다고 말했다.그래서 그는 이날을 기다리고 또 기다려왔다. 끝내 그녀의 눈
게다가 그의 아버지는 또 법을 어기는 일까지 했다.비록 모든 불법적인 장사는 이미 압류당했고 관련된 금액도 그다지 큰 편은 아니었지만, 이로 인해 여씨 그룹의 이미지가 크게 훼손되어 주가가 폭락하고 매출액이 바닥을 쳤으며 여씨 그룹의 재산도 많이 수축했다.큰누나가 여씨 그룹을 이어받은 후, 한동호 형님과 힘을 합쳐 천신만고 끝에 여씨 그룹을 이끌고 이 힘든 고비를 넘긴 셈이었다.이런 얘기를 큰누나는 그한테 한 적 없었지만, 그는 한동호 형님과 매형을 통해서 알게되었다.비로소 그는 큰누나의 홀가분해 보이는 말투 속에 얼마나 많은 쓰라림이 숨겨져 있는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비록 큰누나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감방으로 보내긴 했지만, 그것은 그의 부모님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비록 큰누나의 대의멸친을 받아들이긴 힘들었지만, 이해만은 할 수 있었다.현재 여씨 그룹은 큰누나가 통제하고 있지만, 큰누나가 그에게 한 말이 있었다. 자기가 가져야 할 재산은 한 푼도 양보하지 않지만, 자기가 가지지 말아야 할 재산은 한 푼도 탐하지 않는다고. 그가 물려받아야 할 재산은 언젠가는 돌려줄 것이었다.설사 둘째 누나가 소송을 일으킨다 해도 그와 둘째 누나 단둘의 소송일 것이었다.큰누나는 단지 여천우 부모님에게 속하는 재산만 그에게 돌려줄 것이었다. 그의 부모님에게 자식이라곤 그와 둘째 누나밖에 없으니 설사 둘째 누나가 소송을 일으킨다 해도 상대는 그일 수밖에 없었다.“누나, 나 먼저 수업 들으러 들게. 수업이 끝나는 대로 휴가 내서 돌아갈 테니 그때 천천히 얘기해.”“알았어, 얼른 가서 수업 봐.”동생과의 통화를 마친 여운초는 동생의 말대로 그의 부모님의 물건들을 그의 방으로 옮겨 놓았다.여운별 방의 물건은 여운초가 기분을 봐서 언제든 연락하여 가져가라고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앞으로 그와 여운별은 남남일 것이었다.“아가씨, 진씨 가문의 둘째 도련님이 오셨습니다.”여운초는 알았다고 하면서 핸드폰을 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