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화장대 위에 있던 계약서가 사라졌다. 계약서 뒷면에 그림을 그렸던 것 같은데...어머!하예정은 곤히 잠든 전태윤을 노려봤다. 그가 무심코 그녀의 그림을 버렸는데 이는 둘 사이의 계약서, 아니, 그녀만의 계약서를 버린 거나 다름없다. 정작 전태윤 본인의 계약서는 보물처럼 고이 모셔두고 있을 것이다.하예정은 가볍게 그의 얼굴을 찔렀다. 그가 아무 반응 없자 그녀는 또다시 살짝 찌르며 중얼거렸다.“내 계약서는 무심결에 버려놓고 정작 당신 계약서는 아직도 간직하고 있네요. 이건 너무 불공평해요. 난 아무런 보장이 없잖아요.”‘이참에 태윤 씨 계약서도 훔쳐 와서 망가뜨릴까? 그럼 서로 공평해지잖아. 누구에게도 계약서가 없으니 서로 구속할 수 없어. 그래야 나도 마음이 놓일 것 같아.’다만 그녀는 전태윤의 방에 들어갈 기회조차 없었다. 순간 하예정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대체 어떻게 해야 그의 계약서를 훔쳐 와서 망가뜨릴 수 있을까?만취시킬까?기절시킬까?아니면 유혹해볼까?하예정은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해 봤지만 결국 다 포기하고 천천히 기회를 기다리기로 했다.그녀는 아직도 한참 더 기다려야 전태윤의 방으로 들어갈 수 있을 거로 여겼는데 뜻밖에도 그날 밤에 괜찮은 기회가 차려졌다.할머니는 갑자기 찾아오셨는데 전이진과 함께 호텔에서 식사를 마친 후 바로 하예정의 가게로 간 게 아니라 호텔에서 휴식하다가 밤 9시가 다 돼서야 전이진을 불러와 발렌시아 아파트로 보내 달라고 했다.밤 10시, 어르신은 캐리어를 끌고 전태윤의 집 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눌렀다.“누구세요, 잠시만요.”숙희 아주머니가 재빨리 달려가 문을 열었다.할머니를 본 숙희 아주머니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어르신, 여긴 어쩐 일이세요?”“태윤이랑 예정이 안에 없어?”“지금 돌아오는 중이에요. 아직 도착하지 못했어요. 제가 먼저 돌아왔어요.”매일 저녁 하예정이 퇴근하고 돌아와 주우빈을 데려가기에 숙희 아주머니는 가게에 더 머무를 필요가 없었다.숙희 아주머니는 어르신의 캐리어를
전태윤 아래로 남동생이 8명 더 있는 건 제쳐두고 전태윤 한 명만으로도 할머니는 속이 재가 되어간다.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아홉 손자를 일일이 분석하며 전태윤이 가장 효심 있지만 또 할머니를 가장 애태우게 한다고 하셨다. 만약 할머니가 전태윤의 혼사에 간섭하지 않으면 그 녀석은 아마 평생 독신으로 지낼 거라고 말씀하셨다.인제 보니 할아버지의 분석이 틀린 것 하나 없었다.“어르신, 사람 감정이라는 건 절대 다그칠 수 없어요. 인생의 큰일이고 평생을 함께 살아야 하잖아요. 예정 씨가 사람을 바로바로 알아보지 못하고 또 요즘 이혼이 대수이긴 하지만 청춘을 몇 년이나 허비하는 거라 대가가 너무 커요.”이때 밖에서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도련님, 사모님께서 돌아오셨어요.”어르신이 재빨리 그녀에게 말했다.“호칭 조심해.”숙희 아주머니가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전태윤 부부가 안으로 들어오자 숙희 아주머니와 할머니가 나란히 앉아 TV를 시청하고 있었다.“태윤 씨, 예정 씨, 오셨어요.”숙희 아주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활짝 웃었다.“태윤 씨, 할머님 오셨어요.”“할머니.”하예정도 가까이 다가갔다.“할머니 먼저 돌아오셨네요. 저 아까도 태윤 씨한테 할머니 왜 가게에 안 오시는지 물어봤거든요.”하예정은 전씨 집안에서 할머니와 가장 가깝다.두 사람은 마치 친할머니와 손녀처럼 대화가 끊이질 않았다. 이에 전태윤도 질투가 날 지경이었다.하예정은 그와 함께 있을 때 전혀 이런 모습이 아니었으니 말이다.‘할머니는 나한테서 예정이를 뺏어가려고 집에 들어오셨나?’“어머, 어떡해요!”하예정이 문득 뭔가 생각난 듯 전태윤의 다리를 툭 치며 말했다.“태윤 씨, 우리 집에 침대가 있는 침실이 단 세 개뿐인데 할머니 오늘 어디서 주무셔야 하죠?”숙희 아주머니께 침구 용품을 사드릴 때 그녀는 다른 손님방에도 침대를 하나 더 마련했어야 했다.할머니가 오니 마땅히 주무실 침대조차 없으니 말이다.전태윤은 제 다리를 내리친 그녀의 손을 보더니 다시 할머니
하예정의 방에서 그녀는 한창 할머니를 도와 캐리어 안의 물건을 꺼내 정리했다. 할머니는 그녀의 집에서 마실 물병까지 챙겨왔다.“할머니, 대체 무슨 일 때문에 나오셨어요?”“어휴, 말도 마라. 이게 다 내가 자식을 제대로 키우지 못해서지. 종일 속만 썩이고 잘해줘도 내 마음 몰라. 그래서 아예 다 내려놓고 당분간 너희 집에서 지내려고. 눈에 안 보이면 마음도 편해질 것 같아.”하예정은 물건을 다 정리한 후 욕실에 들어가 할머니를 위해 온수를 받았다.“할머니, 물 다 받았어요. 들어와서 따뜻하게 샤워하세요.”할머니는 알겠다고 대답하며 잠옷을 들고 욕실에 들어갔다.“이래서 딸이나 손녀가 필요하다니까. 여자애는 얼마나 세심해. 너도 봤지, 내가 오고 나서 태윤이 그 녀석 관심하는 말 한마디 없었어. 그래도 우리 예정이밖에 없네.”하예정이 웃으며 대답했다.“할머니 애초에 저랑 태윤 씨 엮어주실 때 태윤 씨가 엄청 자상하고 꼼꼼하다고 하셨잖아요. 자식들은 알아서 자기 인생 잘 사니까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할머니는 이젠 노후를 잘 보내시기만 하면 돼요. 불필요한 것들 신경 쓰지 말아요.”하예정이 볼 때 할머니의 아들, 며느리들은 다들 효심이 지극했다.“나도 그러고 싶은데 말처럼 쉽니? 내가 태윤이가 자상하고 꼼꼼하다고 했었어? 그럼 넌 어때? 걔가 정말 내 말처럼 자상하고 꼼꼼해?”하예정이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대답이 없었다.전태윤은 그녀를 신경 쓸 때 정말 꼼꼼하고 자상한 편이었다.어디 전태윤뿐이겠는가, 누구나 다 그럴 것이다. 몹시 신경 쓰이는 사람이 생기면 항상 그 사람만 주시하고 한없이 자상해지는 게 사람 마음이니까!어르신은 샤워를 마친 후 하예정의 침대에 누웠다.하예정이 욕실에서 나왔을 때 어르신은 이미 단꿈에 빠져 있었다.다만...어르신은 엄청 요란하게 코를 골았다.하예정은 속수무책해졌다.그녀는 술을 마셔야만 코를 골든 천둥이 치든 깊이 잠들지만 평상시엔 작은 인기척에도 밤잠을 설친다.하예정은 한숨을 쉬고 어쩔 수 없이 할
이제 막 몇 걸음 걸어갔는데 갑자기 방문이 열렸다.그녀의 방이 아니라 전태윤의 방이었다.그는 따뜻한 잠옷을 입고 물컵을 들고 나왔는데 보아하니 물 마시러 가려는 듯싶었다.정면으로 마주친 부부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전태윤은 불을 켜고 하예정에게 물었다.“아직 안 잤어?”하예정은 살짝 난처한 얼굴로 나지막이 속삭였다.“그게... 할머니가 코를 너무 심하게 골아서 도저히 잠들 수가 없어서요.”전태윤은 그녀의 방문 앞에 다가가 문을 열고 안을 힐긋 들여다보았다. 할머니의 요란한 코골이 소리가 일부러 연기하는 소리라는 걸 그는 바로 알아챘다. 전태윤은 방문을 닫고 하예정에게 물었다.“그럼 넌 어디서 자려고?”“숙희 아주머니 방에 들어가려 했는데 좀처럼 깨어나지 않으세요. 방문도 안으로 잠겨서 들어갈 수 없어요. 그냥 소파에서 자야죠 뭐.”전태윤이 물을 따르러 가면서 소파에 놓인 베개와 외투를 보았다.“오늘 밤 꽤 춥더라고요. 비까지 오니 발이 너무 차가워서 잠을 잘 수가 없어요. 방에 돌아가 양말 챙겨 신고 나오려고요. 태윤 씨, 우리 내일 이불 몇 개 더 사 와요. 손님방에 침대도 하나 마련하고요.”애초엔 부부가 각방을 쓰느라 손님방에 침대를 놓을 생각이 아예 없었다. 숙희 아주머니가 오신 후에도 아주머니의 침대와 옷장만 마련했을 뿐 다른 손님방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하여 오늘 밤 이 집안의 안주인 하예정은 잘 곳이 없어졌다.“태윤 씨 방에 물 있잖아요.”하예정은 그에게 얼굴을 씻겨줄 때 방을 한번 둘러보았는데 없는 게 없었다.전태윤이 담담하게 대답했다.“물은 있는데 아직 끓이지 않았어.”하예정이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그녀는 소파에 앉아서 물을 따르고 제 방으로 돌아가는 전태윤을 물끄러미 쳐다봤다.“태윤 씨.”문 앞까지 도착한 전태윤이 그녀의 부름에 걸음을 멈췄다. 그는 짙은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무슨 말을 할지 기대했다.“혹시... 태윤 씨 방에 이불 하나 더 있어요?”“없어.”“그럼... 태윤 씨 침대 시트
전태윤은 그녀가 옷 벗는 남자를 볼 때 비명을 지르기보다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심지어 손을 뻗어 대뜸 만지고 싶어 하는 여자인 걸 너무 잘 알았다.그는 허리를 곧게 펴고 더는 야릇한 자세로 그녀를 감싸지 않았다.어차피 그녀에게 아무 소용 없으니까.“귀마개 껴. 그럼 잘 수 있잖아.”하예정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그럼 불편해서 못 자요.”전태윤은 이불 없이 소파에서 자려는 그녀를 텅 빈 손님방에 보낼 수는 없었다. 그도 오늘 밤이 매우 쌀쌀했다. 잠시 고민하던 전태윤은 물컵을 들고 다시 제 방으로 걸어갔다.“내 방에서 자.”중저음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하예정은 흠칫 놀랐다.어쩌다 한번 정색하니 나름대로 효과가 있었다.전태윤은 문 앞에 다가가 걸음을 멈추더니 꿈쩍 않는 하예정을 바라보며 짙은 표정으로 쏘아붙였다.“싫으면 소파에서 자고.”그는 말하면서 방에 들어가 문을 닫으려 했다.이미 베개까지 챙긴 하예정은 쏜살같이 달려와 한쪽 발을 문틈에 비집어 전태윤이 문을 닫지 못하게 했다.그녀의 예쁜 얼굴에 아부가 담긴 미소가 지어졌다.“싫을 리가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전태윤은 굳은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봤다.하예정은 아무것도 못 본 척하며 베개를 챙기고 그를 스쳐지나 방 안에 들어갔다.아침에 전태윤을 도와 얼굴을 씻겨줄 땐 자세히 방을 둘러보지 못했는데 두 번째로 들어오니 저도 모르게 주변을 쭉 훑어보았다.그의 방은 하예정이 청소를 해줄 필요가 없었다. 전부 전태윤이 직접 하는데 먼지 하나 없었다. 할머니는 그가 결벽증이 조금 있다고 했는데 충분히 보아낼 수 있었다.방 구경을 마친 후 하예정은 곧바로 큰 침대에 털썩 누워 베개를 내려놓으며 영역표시를 했다. 그러고는 이불까지 끌어와 살포시 덮었다.편안한 침대에 따뜻한 이불까지 덮으니 완벽 그 자체였다.그녀는 누운 지 2분도 안 돼 다시 일어나 베개를 침대 끝에 내려놓고 방향을 바꿨다.“우리 서로 반대 방향으로 누워요. 내가 침대 끝에 누울게요.”전태윤이 다가와 굳은 표
전태윤은 몰래 한숨을 내쉬고 하예정의 옆에 누웠다.그녀를 갖고 싶어도 이런 식은 원하지 않았다.그녀가 달갑게 받아들일 때, 적어도 그녀가 맨정신일 때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비몽 사몽하게 관계를 해버리면 누가 저와 함께 잤는지조차 모를 테니까.하예정은 환경이 바뀌어도 잠만 잘 잤다. 다만 전태윤은 달랐다. 그는 단 한 번도 누군가와 한 침대에서 자본 적이 없었고 이토록 예쁘고 날씬한 여자가 옆에 누워본 적은 더더욱 없었다. 심지어 그 여자는 명실상부한 그의 아내였다.전태윤은 좀처럼 적응하지 못했다.잠든 하예정은 그에게 기대 몸을 따뜻하게 녹였다.전태윤은 살짝 짜증이 밀려와 손을 뻗어 그녀의 잠옷 단추를 풀어헤치려 했지만 단추 한 개만 풀고는 금세 포기했다.그는 예쁘게 잠든 하예정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그녀의 입에 살짝 입 맞추고는 마음껏 품에 파고들어 오게 내버려 두었다.‘그래, 난 참을 수 있어. 버티는 게 곧 이기는 거야!’전태윤은 끊임없이 묵념하며 마음을 다잡았다!‘하예정 너 두고 봐, 때 되면 나 절대 가만 안 둬!’결국 그도 너무 졸린 나머지 스르륵 잠이 들었다.두 사람은 그 시각 문 앞에서 누군가가 귀를 바짝 대고 인기척 소리를 엿듣는다는 걸 전혀 몰랐다.그 사람은 다름 아닌 할머니였다.“어때요?”문득 숙희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울렸다. 비록 아주 낮은 목소리지만 할머니는 여전히 놀라서 펄쩍 뛰었다.숙희 아주머니는 할머니가 이토록 놀라실 줄은 전혀 몰라 잇따라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할머니는 숙희 아주머니를 보더니 가슴을 두드리며 낮은 목소리로 질책했다.“숙희야, 왜 소리 없이 불쑥 나타나. 깜짝 놀랐잖아.”“어르신께서 저를 보신 줄 알았어요.”할머니는 손자의 방에서 무슨 인기척 소리가 들리는지 고도로 집중하느라 숙희 아주머니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가 이젠.”어르신이 나지막이 아주머니를 다그쳤다.“아무것도 안 들려. 태윤의 방에 틀림없이 방음 소재를 썼을 거야. 아무리 귀 기울여도 잠잠하잖아.”“두 사람
밤새 비가 내리더니 날이 밝자 멈췄다.하예정은 늘 정해진 시간에 잠에서 깼다.눈 뜨자마자 전태윤의 준수한 얼굴을 본 그녀는 흠칫 놀라며 어젯밤 일을 되새겼다. 그녀는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 살며시 밖으로 나가려 했다.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다시 고개 돌려 전태윤을 살짝 밀쳐보았는데 아주 곤히 잠들어 있었다. 어제 하루 커피로 겨우 버틴 그였기에 깊이 잠든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차피 그는 오늘 휴가까지 냈으니 푹 자게 내버려 두었다.하예정은 속으론 그를 방해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정작 하는 짓은 극심한 방해였다.그녀는 전태윤의 잘생긴 얼굴을 쳐다보더니 참지 못하고 몇 번 입맞춤하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어쩜 나보다 예뻐? 종일 차갑고 무뚝뚝한 표정만 짓지 않는다면 진작 당신을 덮쳤을 텐데. 내가 좀 더 용기 낼 수 있을 때 제대로 덮쳐볼게.”그녀는 몰래 뽀뽀한 후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떠올랐다. 전태윤의 방은 그녀의 금지구역인데 어렵게 들어오기도 했고 마침 그가 깊이 잠들었으니 이 기회에 계약서를 훔쳐서 없애버리기로 했다.그렇지 않으면 늘 본인만 아무런 보장이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계약서는 전태윤이 무심코 없애버렸으니까.여기까지 생각한 하예정은 전태윤이 잠든 틈을 타 그의 방에서 몰래 계약서를 찾아보았다. 그가 깰까 봐 아주 조심스럽게 움직였지만 침대 끝까지 훑어보아도 계약서라곤 보이질 않았다.그의 방에 금고가 하나 있는데 하예정은 열 수 없었다.“설마 금고에 넣어둔 거야?”하예정이 구시렁댔다. 계약서를 굳이 금고에 잠글 필요가 있을까?그녀의 예측이 맞았다. 전태윤은 정말 계약서를 보물처럼 여기며 금고에 넣어두었다.결국 하예정은 아무 성과 없이 베개를 안고 살며시 방을 나섰다. 이른 아침 다들 깨나지 않은 틈을 타 제 방에 돌아와 할머니와 하룻밤 잔 것처럼 연기하려 했다.그 시각 할머니는 코골이를 멈췄다.다만 날이 이미 밝았다.하예정이 옷을 갈아입고 세안을 마치자 할머니께서 깨어났다.“할머니, 잘 주무셨어요?”할
전태윤이 잠에서 깼을 때 하예정은 이미 밖에 나가버렸다. 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나랑 잤으면 내가 깨어날 때까지 있어 줘야 하는 거 아니야?”하예정이 그 말을 들었으면 어이가 없어 뒷목을 잡을 것이다.‘저기요, 태윤 씨, 뚫린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내뱉는 건 아니죠. 누가 누구랑 자요. 우린 단지 한 침대에서 잠을 잤을 뿐이라고요.’전태윤도 딱히 할 말이 없을 것이다.그가 밖으로 나왔을 때 온 집안에는 반려동물 강아지와 고양이를 제외하곤 세 여인 모두 보이지 않았다.보아하니 장 보러 간 게 틀림없었다.전태윤은 발코니의 그네에 앉아 어젯밤 아내와 함께 보낸 기억을 되새기며 몇 마디 요약했다.‘비록 적응되지 않지만 은근히 기대되네.’잠시 후 하예정 일행이 돌아왔다.그녀는 식자재 말고도 침구 용품까지 사 왔다. 가구점이 아직 문을 열지 않아 새 침대를 고르지 못했는데 이따가 다시 나가서 침대를 산 후 손님방에 놓아야만 안심하고 출근할 수 있을 것 같았다.‘아 참, 오늘 출근 안 하지.’전태윤은 오늘 휴가 내고 그녀와 함께 할머니를 모시고 바람 쐬러 펜션에 가기로 했다. 할머니를 즐겁게 해드려야 하니까.인기척 소리를 들은 전태윤은 그네에서 내려 방안으로 들어왔다. 와이프가 크고 작은 봉투를 한가득 들고 있었는데 죄다 침구 용품이었다. 그의 눈동자가 한없이 짙어졌지만 아무 말도 내뱉지 않았다.“태윤아, 너 아직 집에 있었어? 출근한 줄 알았더니.”어르신은 기대에 못 미치는 손주 녀석을 한심한 표정으로 쳐다봤다.‘못난 놈.’“할머니, 나 오늘 하루 휴가 냈어요. 이따 아침 먹고 광명 아파트에 우빈이 데리러 갔다가 우리 함께 서교에 있는 펜션으로 바람 쐬러 가요.”전태윤은 할머니의 싸늘한 눈빛을 뒤로한 채 가까이 다가오며 오늘의 스케줄을 얘기했다.그는 하예정의 손에 든 침구 용품까지 들어서 빈 손님방에 내려놓았다.그의 말을 들은 할머니가 되물었다.“며칠 있을 건데?”“딱 오늘 하루요.”“거긴 펜션이야. 하루만 가서 뭘 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