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화장대 위에 있던 계약서가 사라졌다. 계약서 뒷면에 그림을 그렸던 것 같은데...어머!하예정은 곤히 잠든 전태윤을 노려봤다. 그가 무심코 그녀의 그림을 버렸는데 이는 둘 사이의 계약서, 아니, 그녀만의 계약서를 버린 거나 다름없다. 정작 전태윤 본인의 계약서는 보물처럼 고이 모셔두고 있을 것이다.하예정은 가볍게 그의 얼굴을 찔렀다. 그가 아무 반응 없자 그녀는 또다시 살짝 찌르며 중얼거렸다.“내 계약서는 무심결에 버려놓고 정작 당신 계약서는 아직도 간직하고 있네요. 이건 너무 불공평해요. 난 아무런 보장이 없잖아요.”‘이참에 태윤 씨 계약서도 훔쳐 와서 망가뜨릴까? 그럼 서로 공평해지잖아. 누구에게도 계약서가 없으니 서로 구속할 수 없어. 그래야 나도 마음이 놓일 것 같아.’다만 그녀는 전태윤의 방에 들어갈 기회조차 없었다. 순간 하예정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대체 어떻게 해야 그의 계약서를 훔쳐 와서 망가뜨릴 수 있을까?만취시킬까?기절시킬까?아니면 유혹해볼까?하예정은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해 봤지만 결국 다 포기하고 천천히 기회를 기다리기로 했다.그녀는 아직도 한참 더 기다려야 전태윤의 방으로 들어갈 수 있을 거로 여겼는데 뜻밖에도 그날 밤에 괜찮은 기회가 차려졌다.할머니는 갑자기 찾아오셨는데 전이진과 함께 호텔에서 식사를 마친 후 바로 하예정의 가게로 간 게 아니라 호텔에서 휴식하다가 밤 9시가 다 돼서야 전이진을 불러와 발렌시아 아파트로 보내 달라고 했다.밤 10시, 어르신은 캐리어를 끌고 전태윤의 집 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눌렀다.“누구세요, 잠시만요.”숙희 아주머니가 재빨리 달려가 문을 열었다.할머니를 본 숙희 아주머니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어르신, 여긴 어쩐 일이세요?”“태윤이랑 예정이 안에 없어?”“지금 돌아오는 중이에요. 아직 도착하지 못했어요. 제가 먼저 돌아왔어요.”매일 저녁 하예정이 퇴근하고 돌아와 주우빈을 데려가기에 숙희 아주머니는 가게에 더 머무를 필요가 없었다.숙희 아주머니는 어르신의 캐리어를
전태윤 아래로 남동생이 8명 더 있는 건 제쳐두고 전태윤 한 명만으로도 할머니는 속이 재가 되어간다.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아홉 손자를 일일이 분석하며 전태윤이 가장 효심 있지만 또 할머니를 가장 애태우게 한다고 하셨다. 만약 할머니가 전태윤의 혼사에 간섭하지 않으면 그 녀석은 아마 평생 독신으로 지낼 거라고 말씀하셨다.인제 보니 할아버지의 분석이 틀린 것 하나 없었다.“어르신, 사람 감정이라는 건 절대 다그칠 수 없어요. 인생의 큰일이고 평생을 함께 살아야 하잖아요. 예정 씨가 사람을 바로바로 알아보지 못하고 또 요즘 이혼이 대수이긴 하지만 청춘을 몇 년이나 허비하는 거라 대가가 너무 커요.”이때 밖에서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도련님, 사모님께서 돌아오셨어요.”어르신이 재빨리 그녀에게 말했다.“호칭 조심해.”숙희 아주머니가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전태윤 부부가 안으로 들어오자 숙희 아주머니와 할머니가 나란히 앉아 TV를 시청하고 있었다.“태윤 씨, 예정 씨, 오셨어요.”숙희 아주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활짝 웃었다.“태윤 씨, 할머님 오셨어요.”“할머니.”하예정도 가까이 다가갔다.“할머니 먼저 돌아오셨네요. 저 아까도 태윤 씨한테 할머니 왜 가게에 안 오시는지 물어봤거든요.”하예정은 전씨 집안에서 할머니와 가장 가깝다.두 사람은 마치 친할머니와 손녀처럼 대화가 끊이질 않았다. 이에 전태윤도 질투가 날 지경이었다.하예정은 그와 함께 있을 때 전혀 이런 모습이 아니었으니 말이다.‘할머니는 나한테서 예정이를 뺏어가려고 집에 들어오셨나?’“어머, 어떡해요!”하예정이 문득 뭔가 생각난 듯 전태윤의 다리를 툭 치며 말했다.“태윤 씨, 우리 집에 침대가 있는 침실이 단 세 개뿐인데 할머니 오늘 어디서 주무셔야 하죠?”숙희 아주머니께 침구 용품을 사드릴 때 그녀는 다른 손님방에도 침대를 하나 더 마련했어야 했다.할머니가 오니 마땅히 주무실 침대조차 없으니 말이다.전태윤은 제 다리를 내리친 그녀의 손을 보더니 다시 할머니
하예정의 방에서 그녀는 한창 할머니를 도와 캐리어 안의 물건을 꺼내 정리했다. 할머니는 그녀의 집에서 마실 물병까지 챙겨왔다.“할머니, 대체 무슨 일 때문에 나오셨어요?”“어휴, 말도 마라. 이게 다 내가 자식을 제대로 키우지 못해서지. 종일 속만 썩이고 잘해줘도 내 마음 몰라. 그래서 아예 다 내려놓고 당분간 너희 집에서 지내려고. 눈에 안 보이면 마음도 편해질 것 같아.”하예정은 물건을 다 정리한 후 욕실에 들어가 할머니를 위해 온수를 받았다.“할머니, 물 다 받았어요. 들어와서 따뜻하게 샤워하세요.”할머니는 알겠다고 대답하며 잠옷을 들고 욕실에 들어갔다.“이래서 딸이나 손녀가 필요하다니까. 여자애는 얼마나 세심해. 너도 봤지, 내가 오고 나서 태윤이 그 녀석 관심하는 말 한마디 없었어. 그래도 우리 예정이밖에 없네.”하예정이 웃으며 대답했다.“할머니 애초에 저랑 태윤 씨 엮어주실 때 태윤 씨가 엄청 자상하고 꼼꼼하다고 하셨잖아요. 자식들은 알아서 자기 인생 잘 사니까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할머니는 이젠 노후를 잘 보내시기만 하면 돼요. 불필요한 것들 신경 쓰지 말아요.”하예정이 볼 때 할머니의 아들, 며느리들은 다들 효심이 지극했다.“나도 그러고 싶은데 말처럼 쉽니? 내가 태윤이가 자상하고 꼼꼼하다고 했었어? 그럼 넌 어때? 걔가 정말 내 말처럼 자상하고 꼼꼼해?”하예정이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대답이 없었다.전태윤은 그녀를 신경 쓸 때 정말 꼼꼼하고 자상한 편이었다.어디 전태윤뿐이겠는가, 누구나 다 그럴 것이다. 몹시 신경 쓰이는 사람이 생기면 항상 그 사람만 주시하고 한없이 자상해지는 게 사람 마음이니까!어르신은 샤워를 마친 후 하예정의 침대에 누웠다.하예정이 욕실에서 나왔을 때 어르신은 이미 단꿈에 빠져 있었다.다만...어르신은 엄청 요란하게 코를 골았다.하예정은 속수무책해졌다.그녀는 술을 마셔야만 코를 골든 천둥이 치든 깊이 잠들지만 평상시엔 작은 인기척에도 밤잠을 설친다.하예정은 한숨을 쉬고 어쩔 수 없이 할
이제 막 몇 걸음 걸어갔는데 갑자기 방문이 열렸다.그녀의 방이 아니라 전태윤의 방이었다.그는 따뜻한 잠옷을 입고 물컵을 들고 나왔는데 보아하니 물 마시러 가려는 듯싶었다.정면으로 마주친 부부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전태윤은 불을 켜고 하예정에게 물었다.“아직 안 잤어?”하예정은 살짝 난처한 얼굴로 나지막이 속삭였다.“그게... 할머니가 코를 너무 심하게 골아서 도저히 잠들 수가 없어서요.”전태윤은 그녀의 방문 앞에 다가가 문을 열고 안을 힐긋 들여다보았다. 할머니의 요란한 코골이 소리가 일부러 연기하는 소리라는 걸 그는 바로 알아챘다. 전태윤은 방문을 닫고 하예정에게 물었다.“그럼 넌 어디서 자려고?”“숙희 아주머니 방에 들어가려 했는데 좀처럼 깨어나지 않으세요. 방문도 안으로 잠겨서 들어갈 수 없어요. 그냥 소파에서 자야죠 뭐.”전태윤이 물을 따르러 가면서 소파에 놓인 베개와 외투를 보았다.“오늘 밤 꽤 춥더라고요. 비까지 오니 발이 너무 차가워서 잠을 잘 수가 없어요. 방에 돌아가 양말 챙겨 신고 나오려고요. 태윤 씨, 우리 내일 이불 몇 개 더 사 와요. 손님방에 침대도 하나 마련하고요.”애초엔 부부가 각방을 쓰느라 손님방에 침대를 놓을 생각이 아예 없었다. 숙희 아주머니가 오신 후에도 아주머니의 침대와 옷장만 마련했을 뿐 다른 손님방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하여 오늘 밤 이 집안의 안주인 하예정은 잘 곳이 없어졌다.“태윤 씨 방에 물 있잖아요.”하예정은 그에게 얼굴을 씻겨줄 때 방을 한번 둘러보았는데 없는 게 없었다.전태윤이 담담하게 대답했다.“물은 있는데 아직 끓이지 않았어.”하예정이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그녀는 소파에 앉아서 물을 따르고 제 방으로 돌아가는 전태윤을 물끄러미 쳐다봤다.“태윤 씨.”문 앞까지 도착한 전태윤이 그녀의 부름에 걸음을 멈췄다. 그는 짙은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무슨 말을 할지 기대했다.“혹시... 태윤 씨 방에 이불 하나 더 있어요?”“없어.”“그럼... 태윤 씨 침대 시트
전태윤은 그녀가 옷 벗는 남자를 볼 때 비명을 지르기보다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심지어 손을 뻗어 대뜸 만지고 싶어 하는 여자인 걸 너무 잘 알았다.그는 허리를 곧게 펴고 더는 야릇한 자세로 그녀를 감싸지 않았다.어차피 그녀에게 아무 소용 없으니까.“귀마개 껴. 그럼 잘 수 있잖아.”하예정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그럼 불편해서 못 자요.”전태윤은 이불 없이 소파에서 자려는 그녀를 텅 빈 손님방에 보낼 수는 없었다. 그도 오늘 밤이 매우 쌀쌀했다. 잠시 고민하던 전태윤은 물컵을 들고 다시 제 방으로 걸어갔다.“내 방에서 자.”중저음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하예정은 흠칫 놀랐다.어쩌다 한번 정색하니 나름대로 효과가 있었다.전태윤은 문 앞에 다가가 걸음을 멈추더니 꿈쩍 않는 하예정을 바라보며 짙은 표정으로 쏘아붙였다.“싫으면 소파에서 자고.”그는 말하면서 방에 들어가 문을 닫으려 했다.이미 베개까지 챙긴 하예정은 쏜살같이 달려와 한쪽 발을 문틈에 비집어 전태윤이 문을 닫지 못하게 했다.그녀의 예쁜 얼굴에 아부가 담긴 미소가 지어졌다.“싫을 리가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전태윤은 굳은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봤다.하예정은 아무것도 못 본 척하며 베개를 챙기고 그를 스쳐지나 방 안에 들어갔다.아침에 전태윤을 도와 얼굴을 씻겨줄 땐 자세히 방을 둘러보지 못했는데 두 번째로 들어오니 저도 모르게 주변을 쭉 훑어보았다.그의 방은 하예정이 청소를 해줄 필요가 없었다. 전부 전태윤이 직접 하는데 먼지 하나 없었다. 할머니는 그가 결벽증이 조금 있다고 했는데 충분히 보아낼 수 있었다.방 구경을 마친 후 하예정은 곧바로 큰 침대에 털썩 누워 베개를 내려놓으며 영역표시를 했다. 그러고는 이불까지 끌어와 살포시 덮었다.편안한 침대에 따뜻한 이불까지 덮으니 완벽 그 자체였다.그녀는 누운 지 2분도 안 돼 다시 일어나 베개를 침대 끝에 내려놓고 방향을 바꿨다.“우리 서로 반대 방향으로 누워요. 내가 침대 끝에 누울게요.”전태윤이 다가와 굳은 표
전태윤은 몰래 한숨을 내쉬고 하예정의 옆에 누웠다.그녀를 갖고 싶어도 이런 식은 원하지 않았다.그녀가 달갑게 받아들일 때, 적어도 그녀가 맨정신일 때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비몽 사몽하게 관계를 해버리면 누가 저와 함께 잤는지조차 모를 테니까.하예정은 환경이 바뀌어도 잠만 잘 잤다. 다만 전태윤은 달랐다. 그는 단 한 번도 누군가와 한 침대에서 자본 적이 없었고 이토록 예쁘고 날씬한 여자가 옆에 누워본 적은 더더욱 없었다. 심지어 그 여자는 명실상부한 그의 아내였다.전태윤은 좀처럼 적응하지 못했다.잠든 하예정은 그에게 기대 몸을 따뜻하게 녹였다.전태윤은 살짝 짜증이 밀려와 손을 뻗어 그녀의 잠옷 단추를 풀어헤치려 했지만 단추 한 개만 풀고는 금세 포기했다.그는 예쁘게 잠든 하예정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그녀의 입에 살짝 입 맞추고는 마음껏 품에 파고들어 오게 내버려 두었다.‘그래, 난 참을 수 있어. 버티는 게 곧 이기는 거야!’전태윤은 끊임없이 묵념하며 마음을 다잡았다!‘하예정 너 두고 봐, 때 되면 나 절대 가만 안 둬!’결국 그도 너무 졸린 나머지 스르륵 잠이 들었다.두 사람은 그 시각 문 앞에서 누군가가 귀를 바짝 대고 인기척 소리를 엿듣는다는 걸 전혀 몰랐다.그 사람은 다름 아닌 할머니였다.“어때요?”문득 숙희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울렸다. 비록 아주 낮은 목소리지만 할머니는 여전히 놀라서 펄쩍 뛰었다.숙희 아주머니는 할머니가 이토록 놀라실 줄은 전혀 몰라 잇따라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할머니는 숙희 아주머니를 보더니 가슴을 두드리며 낮은 목소리로 질책했다.“숙희야, 왜 소리 없이 불쑥 나타나. 깜짝 놀랐잖아.”“어르신께서 저를 보신 줄 알았어요.”할머니는 손자의 방에서 무슨 인기척 소리가 들리는지 고도로 집중하느라 숙희 아주머니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가 이젠.”어르신이 나지막이 아주머니를 다그쳤다.“아무것도 안 들려. 태윤의 방에 틀림없이 방음 소재를 썼을 거야. 아무리 귀 기울여도 잠잠하잖아.”“두 사람
밤새 비가 내리더니 날이 밝자 멈췄다.하예정은 늘 정해진 시간에 잠에서 깼다.눈 뜨자마자 전태윤의 준수한 얼굴을 본 그녀는 흠칫 놀라며 어젯밤 일을 되새겼다. 그녀는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 살며시 밖으로 나가려 했다.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다시 고개 돌려 전태윤을 살짝 밀쳐보았는데 아주 곤히 잠들어 있었다. 어제 하루 커피로 겨우 버틴 그였기에 깊이 잠든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차피 그는 오늘 휴가까지 냈으니 푹 자게 내버려 두었다.하예정은 속으론 그를 방해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정작 하는 짓은 극심한 방해였다.그녀는 전태윤의 잘생긴 얼굴을 쳐다보더니 참지 못하고 몇 번 입맞춤하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어쩜 나보다 예뻐? 종일 차갑고 무뚝뚝한 표정만 짓지 않는다면 진작 당신을 덮쳤을 텐데. 내가 좀 더 용기 낼 수 있을 때 제대로 덮쳐볼게.”그녀는 몰래 뽀뽀한 후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떠올랐다. 전태윤의 방은 그녀의 금지구역인데 어렵게 들어오기도 했고 마침 그가 깊이 잠들었으니 이 기회에 계약서를 훔쳐서 없애버리기로 했다.그렇지 않으면 늘 본인만 아무런 보장이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계약서는 전태윤이 무심코 없애버렸으니까.여기까지 생각한 하예정은 전태윤이 잠든 틈을 타 그의 방에서 몰래 계약서를 찾아보았다. 그가 깰까 봐 아주 조심스럽게 움직였지만 침대 끝까지 훑어보아도 계약서라곤 보이질 않았다.그의 방에 금고가 하나 있는데 하예정은 열 수 없었다.“설마 금고에 넣어둔 거야?”하예정이 구시렁댔다. 계약서를 굳이 금고에 잠글 필요가 있을까?그녀의 예측이 맞았다. 전태윤은 정말 계약서를 보물처럼 여기며 금고에 넣어두었다.결국 하예정은 아무 성과 없이 베개를 안고 살며시 방을 나섰다. 이른 아침 다들 깨나지 않은 틈을 타 제 방에 돌아와 할머니와 하룻밤 잔 것처럼 연기하려 했다.그 시각 할머니는 코골이를 멈췄다.다만 날이 이미 밝았다.하예정이 옷을 갈아입고 세안을 마치자 할머니께서 깨어났다.“할머니, 잘 주무셨어요?”할
전태윤이 잠에서 깼을 때 하예정은 이미 밖에 나가버렸다. 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나랑 잤으면 내가 깨어날 때까지 있어 줘야 하는 거 아니야?”하예정이 그 말을 들었으면 어이가 없어 뒷목을 잡을 것이다.‘저기요, 태윤 씨, 뚫린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내뱉는 건 아니죠. 누가 누구랑 자요. 우린 단지 한 침대에서 잠을 잤을 뿐이라고요.’전태윤도 딱히 할 말이 없을 것이다.그가 밖으로 나왔을 때 온 집안에는 반려동물 강아지와 고양이를 제외하곤 세 여인 모두 보이지 않았다.보아하니 장 보러 간 게 틀림없었다.전태윤은 발코니의 그네에 앉아 어젯밤 아내와 함께 보낸 기억을 되새기며 몇 마디 요약했다.‘비록 적응되지 않지만 은근히 기대되네.’잠시 후 하예정 일행이 돌아왔다.그녀는 식자재 말고도 침구 용품까지 사 왔다. 가구점이 아직 문을 열지 않아 새 침대를 고르지 못했는데 이따가 다시 나가서 침대를 산 후 손님방에 놓아야만 안심하고 출근할 수 있을 것 같았다.‘아 참, 오늘 출근 안 하지.’전태윤은 오늘 휴가 내고 그녀와 함께 할머니를 모시고 바람 쐬러 펜션에 가기로 했다. 할머니를 즐겁게 해드려야 하니까.인기척 소리를 들은 전태윤은 그네에서 내려 방안으로 들어왔다. 와이프가 크고 작은 봉투를 한가득 들고 있었는데 죄다 침구 용품이었다. 그의 눈동자가 한없이 짙어졌지만 아무 말도 내뱉지 않았다.“태윤아, 너 아직 집에 있었어? 출근한 줄 알았더니.”어르신은 기대에 못 미치는 손주 녀석을 한심한 표정으로 쳐다봤다.‘못난 놈.’“할머니, 나 오늘 하루 휴가 냈어요. 이따 아침 먹고 광명 아파트에 우빈이 데리러 갔다가 우리 함께 서교에 있는 펜션으로 바람 쐬러 가요.”전태윤은 할머니의 싸늘한 눈빛을 뒤로한 채 가까이 다가오며 오늘의 스케줄을 얘기했다.그는 하예정의 손에 든 침구 용품까지 들어서 빈 손님방에 내려놓았다.그의 말을 들은 할머니가 되물었다.“며칠 있을 건데?”“딱 오늘 하루요.”“거긴 펜션이야. 하루만 가서 뭘 논
원림성 A시.전창빈은 모든 요리를 다 하고는 주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휴대전화를 꺼내 뉴스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는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온종일을 바쁘게 보냈다.정확히 말하면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이 전부 오늘 저녁 식사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그리고 저녁이 되어서야 주인공이 돌아왔다.잠시 기다린 후, 전이진이 오후 내내 준비한 요리들이 하나둘씩 하인들에 의해 운반되어 나갔다. 물론 그는 나갈 필요가 없었다.선우민아가 그의 요리를 맛본 후 만족스럽다면 전창빈을 불러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통보도 없이 주방에 머물다가 선우씨 가족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고 떠나면 집으로 돌아야 한다.비록 전창빈은 자신의 요리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지만 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는데도 선우민아의 면담 요청이 없었다.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뉴스를 보며 담담해 보였으나 속으로는 조금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그는 송일우처럼 세 번이나 도전하는 상황은 원치 않았다. 송일우는 몇 년이나 도전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 실패한 뒤로는 다시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신감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점점 들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한편 선우씨 가족들이 이미 식사를 마치고 있었다.선우민아도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던 선우민아의 어머니 한경주가 관심 있게 물었다.“민아야, 이번 지원자가 만든 음식은 어때?”선우민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한경주는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생각엔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채용하는 게 어때?”선우민아의 남동생 선우민기는 의자에 털썩 앉아 배를 만지며 말했다.“누나, 나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이번 요리는 정말 맛있었어. 오랜만에 이렇게 배불리 먹었어.”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선우민기의 배를 가볍게 톡 치며 눈가에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너는 굶은 적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많이 먹었어? 이번만 먹고 다음 끼니는 못 먹을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 좀 앉아 이따
도아영이 홀로 관성까지 찾아온 것도 전이혁을 위해서였다.관성에서 그녀의 안전은 그의 책임이다.앞으로 도아영과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아내 후보였다. 혹여 도아영이 관성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도씨 가문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은 물론 전씨 할머니께서도 그를 혼쭐 내실 것이 분명했다.전이혁은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태윤이 전화를 받자 전이혁이 조심스럽게 부탁했다.“형, 오늘은 형의 스위트 룸에서 하룻밤 자도 돼?”“안방만 빼고 다른 방은 마음대로 써.”전태윤은 거절하지 않았지만 안방 사용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평소 이곳에 머무를 때면 항상 안방을 사용했기 때문이다.“알았어. 고마워. 형.”“도아영 씨는 괜찮아?”“심하게 취해서 토하다가 물 달라고 하길래... 떠날 수 없어서 호텔에서 하룻밤 지내려고. 새벽에 아영 씨를 룸으로 데려다준 후 떠날 계획이야. 같이 묵었다는 사실을 알면 나에게 달라붙을까 봐 겁이 나.”전태윤이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진심으로 도아영 씨와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아. 그분 명성을 망가뜨리면 안 되지.”전이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형, 사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영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이고 할머니의 눈썰미는 틀린 적이 없으셨지. 도아영 씨와 함께 지내보니 나랑 잘 맞는 것 같긴 한데... 왠지 그 ‘여우’랑 함께 있을 때가 더 편안하단 말이야.”“‘여우’라고?”“내 꿈에 자꾸 등장하는 그 여자 말이야. 별명이 ‘여우 같은 여자’거든. 화장을 잘하는 건지... 본명도, 고향도, 행적도 전혀 알 수가 없어. 신비로운 느낌을 주어서 나도 자꾸 정복하고 싶어져.”전태윤이 말을 이었다.“이름도 모르는 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그분이 혹시 만성의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과 연관 있는 거 아니야?”만성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은 모연정의 사촌 형수이자 A시 허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인데 그녀도 이중생활로 유명한 인물이다.허씨 가문
“네.”우빈이는 전태윤의 말을 믿으며 다시 물었다.“이모부, 그 모기는 어디 갔어요?”전태윤은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우빈에게 보여주었지만 우빈은 모기를 찾을 수 없었다.“날아갔어. 이모부가 조금 늦는 바람에 잡지 못했어.”“그래요?”우빈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대답했다.하예정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우빈이가 아무리 영리해도 결국은 어린아이일 뿐, 어른을 이길 수는 없었다.“우빈아, 이모부는 일하러 가야 해. 우리도 집에 가자. 이모부한테 잘 가라고 인사해야지.”우빈은 바로 그의 작은 손을 흔들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모부, 잘 가요!”“집에 가서 빨리 쉬고 이모의 말도 잘 듣고. 이모를 귀찮게 하면 안 돼. 말 잘 들으면 겨울방학에 예진 리조트로 가서 용정이랑 놀게 해줄게.”우빈은 급히 약속했다.“절대로 이모 귀찮게 안 하고 말 잘 들을게요.”“여보, 빨리 일하러 가요. 우리도 갈게요.”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일하러 가라고 재촉한 뒤 운전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말했다.전태윤은 그 자리에 서서 차가 사랑하는 아내를 태우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차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비로소 자신의 차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전이혁과 도아영의 일에 대해서 전태윤은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도아영이 취하면 전이혁이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줄 것이니까.전이혁은 도아영을 그녀의 방까지 데려다주고 외투와 양말을 벗겨 준 뒤 편안한 자세로 눕혔다. 그리고 그가 떠나려던 참에 도아영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옆으로 토해버렸다.전이혁이 쓰레기통을 가져오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이미 바닥과 침대를 모두 더럽혔다. 그는 이 광경을 보자 정말로 토할 것 같았다.흠... 전이혁도 토했다. 그는 입을 막은 채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정신없이 토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코와 입을 가린 채로 나왔다.도아영은 시원하게 토한 뒤 다시 침대에 철썩 누워버렸다.전이혁은 침대 반대쪽으로 돌아가 구토물을 보지 않으려 애썼고 최대한 빨리 도아영을 일으켜 안고
도아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꿈나라에 들어가서 돌아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술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말을 안 듣더니 결국 취했네. 내일 아침이면 정말 고생할 텐데.”전이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도아영의 이마를 쿡쿡 찌르더니 체념했는지 그녀를 안아 들어 로얄 스위트룸 나섰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참! 난 도아영 씨가 어느 룸에 묵고 있는지 모르는데.'그는 걸음을 멈추고 도아영을 내려놓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부축하면서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하예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예정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형수님, 도아영 씨가 묵고 계신 룸 번호를 아세요?”하예정이 대답했다.“저도 잘 몰라요. 그냥 관성 호텔에 묵는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요. 아영이가 취했어요? 잠깐만요. 제가 알아볼게요.”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말했다.“여보, 아영의 룸 번호를 알아봐 줘요. 취했대요. 이혁 도련님이 아영이를 모셔다드리려고 하는데 룸 번호를 몰라서.”전태윤은 표정이 굳었다. 그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하예정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우빈의 손을 잡고 걸어 나갔다가 이내 돌아왔다. 그는 이미 전이혁과의 통화를 끝낸 상태였다.“알아봤어요?”“내가 이혁한테 이미 알려줬어.”전태윤은 여전히 표정이 굳은 표정으로 하예정에게 말을 건넸다.“아까 내가 물어볼 때 프런트 직원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마치 내가 바람피우는 거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내 동생이 도아영 씨를 데려다주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내가 대신 물어보는 거라고 설명까지 했어.”하예정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남편의 팔을 다정하게 끌며 달콤하게 웃었다.“설명했으면 그만이죠.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든 우리 감정엔 아무런 영향이 없는걸요. 제가 의심하지 않으면 되잖아요.”“다음부턴 이런 일 나에게 시키지 마. 이혁의 일은 이혁이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내가 왜 도와줘야 해? 나도 예전엔 아무 도움 없이 오직 내 진심과 깊은 정으로 너의 마음을 얻었는데.”“알았어요.
전이혁은 침묵했다.도아영은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왜요? 전이혁 씨는 그분을 보호하려고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 거예요? 안심하세요. 저는 공정하게 경쟁하고 싶을 뿐이에요. 수작 부릴 생각은 없어요. 저는 그런 건 못해요. 남자 하나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고. 제가 이렇게 남자를 좋아한 건 처음이라서 한번 도전해 보는 거예요. 다른 남자였다면 그냥 양보했을 거예요.”도아영이 눈여겨본 건 전이혁이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이혁의 뒤에 있는 전씨 가문이 마음에 들었다. 전씨 가문의 훌륭한 가풍은 소문이 자자했으니까.전씨 가문의 어르신들은 사상이 모두 개방적이어서 후손들이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지지해 주었다.심지어 반대한다고 해도 다른 집안 어르신들처럼 억지로 가로막지는 않았다.게다가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특히 아내를 아끼기로 유명했고 한번 정한 인연과 결혼은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이런 남자들이 흔치 않았다. 여자라면 누구든 한결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을 것이다.하여 도아영은 꼭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정말 안 된다면 그건 그녀와 전씨 가문의 인연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애초에 노력도 안 해보고 포기한다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도아영은 평생 후회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여자였다.전이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여우’의 이름을 몰랐으니까. 마음의 절반을 뺏긴 주제에 정작 상대방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니...도아영은 그가 연적을 보호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약간의 질투를 느꼈지만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전이혁 씨가 그녀를 보호할수록 저는 더 궁금해지네요. 도대체 누가 저 도아영을 이길 수 있는지. 근데 괜찮아요. 언젠가는 제 연적이 누군지 알게 될 거니까.”그녀는 전이혁에게 잔을 들며 말했다.“전이혁 씨, 자! 우리 한잔하죠.”전이혁은 잔을 들고일어나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잔과 부딪혔다. 그리고 도아영이 단숨에 그 술을 들이마시는 걸 지켜보았다.도아영은 더 이상 전이혁과 사랑에 관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도아영은 요즘도 이런 식으로 자식들의 혼사를 정하는 어르신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요즘은 연애와 결혼이 자유로운 시대인데 아직도 자식들의 혼사를 결정해 주는 집안이 있다고?’도아영은 곧바로 자기 집 안 어르신들을 떠올리더니 다시 묵묵히 조금 전의 의문을 거두어들였다.재벌 가문에서는 많은 혼사가 부모님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대부분 어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곤 한다.그들에게는 결혼의 자유가 많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건 이익뿐이었다. 두 가문 사이에서 이루어진 혼인으로 인해 두 회사에 얼마나 큰 이득을 가져다주느냐가 가장 관건이었다.“그럼 전이혁 씨 할머니께서 왜 저를 선택하셨어요? 저는 할머니를 본 적도 없는데.”도아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그녀는 전씨 할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아마 봤을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도아영을 유심히 관찰하고 알아본 뒤에야 전이혁의 미래 아내로 선택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사진을 전이혁에게 건네주며 도아영에게 구애하도록 하게 한 것이다.“저도 모르겠어요. 할머니께서는 나이가 많으시지만 아직도 자주 돌아다니시니까. 우리가 감당하기도 힘들 정도로 말이죠. 다행히 할머니의 건강은 좋으시고 관리도 잘 되어서 겉으로 보기엔 예순 정도로 보이세요.“전이혁도 할머니가 어떻게 도아영을 선택하셨는지 모른다.도아영만 궁금한 게 아니라 고현과 여운초도 전씨 할머니께서 언제 그녀들을 눈여겨보셨는지 궁금해했었다.“그래서 저를 알게 되었고 저를 쫓아다녔던 거예요? 전이혁 씨가 저에게 한 행동이 애정 공세가 아니라고 하면 당신 스스로도 믿지 못하겠죠?”전이혁은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인정해요. 제가 당신에게 구애했다는 것을.”전이혁은 도아영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모든 면에서 그와 잘 어울렸으니까.하지만...“그런데 왜 한동안 사라지고 저를 무시했어요? 일부러 관심을 끌려는 작전이었던 거예요?”전이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전이혁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도망가려고 해도 너무 늦었다.그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자리에 앉아서 몸만 돌려 옆에 앉은 도아영을 돌아보았다. 전이혁의 깊고 검은 눈빛은 도아영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게 했다.이때 도아영은 몸을 굽혀 천천히 전이혁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전이혁은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도아영이 어떤 향수를 뿌리는지는 몰랐지만 강하지 않은 은은한 향기가 너무 좋았다.“전이혁 씨.”도아영은 그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다.“말해봐요, 듣고 있어요.”그도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대답했다.“제가 한 가지만 물을게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저를 대하는 거예요? 저에게 잘해주는 게 저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예요? 저에게 애정 공세를 하면서 왜 또 저를 무시하는 거죠?”전이혁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한 가지 물음보다 더 많이 물어본 것 같은데.”잠시 침묵이 흐른 뒤로 전이혁이 말을 이었다.“저도 제 마음이 어떤지 모르겠다고 하면 도아영 씨는 저를 나쁜 놈이라고 욕할 거죠?”그는 그녀에게 구애하고 싶었다.전이혁은 도아영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할머니의 눈썰미가 결코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없었다면 전이혁은 도아영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도아영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당당함, 대담무쌍함, 의협심, 기발한 성격, 고요할 때의 차분함과 활발할 때의 성격은 전이혁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았던 것이다.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그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바로 그 ‘여우 같은 여자' 말이다. 도아영 같은 재벌가 따님이 아니라.도아영의 아름다운 눈이 반짝이며 전이혁이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못할 것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전이혁을 내려다보았다.전이혁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순간 도아영의 동작과 표정이 마
“예정 언니, 벌써 다 드셨어요?”하예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우리가 좀 빨리 먹는 편이긴 하지. 평일엔 일이 바빠서 먹는 시간도 쪼개 써야 하다 보니 빨리 먹는 버릇이 생긴 것 같아.”도아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예정은 우빈의 손을 잡고 남편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로얄 스위트룸을 빠져나왔고 거기에 문을 닫아주는 센스까지 보였다.전태윤은 경호원들에게도 식사하고 휴식을 취하라고 지시했다.전이혁과 도아영은 이 모든 것이 하예정이 그들에게 특별히 남겨준 기회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제 로얄 스위트룸 안에는 전이혁과 도아영만 남았다.도아영은 와인잔을 들어 우아하게 음미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전이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역시 피할 수 없었군.'전이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도아영 씨,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도아영은 대답 대신 잔을 기울이며 그를 바라만 보았다.‘정말 잘생겼어...'그녀는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잘생겼다는 소문을 들었다. 실제로 본 전태윤도 키가 훤칠한 미남이었지만 지나치게 차가운 인상에, 인사할 때 잠깐 마주친 뒤로는 도아영을 전혀 쳐다보지 않았다.오직 하예정만 바라보는 모습에서 ‘아내 바보'라는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전태윤의 차가운 카리스마와 달리 전이혁은 훨씬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다.전태윤 앞에서 전이혁은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단둘이 있을 때면 전이혁의 우수함이 빛을 발했다. 그는 도아영이 만난 남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였다.전이혁이 잘해줄 때면 도아영은 그에게 정말 빠져들 것만 같았지만 그녀를 소홀히 대할 때면 화가 치밀어 주먹으로 그를 한 대 패주고 싶을 지경이다.‘내가 무슨 애완동물도 아니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애완견이야?'마음 내키면 그녀와 잠시 놀아주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버리는 그의 태도에 도아영은 서서히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전이혁은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전이혁 씨, 왜 자리
하예정은 두 사람 사이의 암투를 모른 척하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좋은 술 두 병 시킵니다. 저는 임신 중이라 못 마셔요. 우리 배 속의 아기 건강 생각해서라도 저는 술을 마시지 못하거든요. 태윤 씨도 술을 잘 마시지 않기 때문에 이혁 도련님이 도아영 씨랑 같이 마실 수밖에 없네요. 도련님, 아영 씨를 잘 모셔야 해요. 저와 태윤 씨가 있으니 도련님이 취해도 괜찮아요. 저희가 책임질게요.”하예정은 도아영에게 윙크했다. 도아영은 슬쩍 OK라는 사인을 보내며 자신 있다는 듯 웃었다.하예정은 그제야 도아영의 주량이 꽤 괜찮음을 눈치채고 안심했다. 하예정은 도아영이 전이혁에게 꼬치꼬치 캐묻다가 술에 취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인데 도아영이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니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술과 여러ㅓ 요리가 나오자 도아영은 직접 전이혁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자! 전이혁 씨, 건배하죠.”전이혁은 잔을 받지 않고 오히려 도아영의 잔을 가져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도아영 씨, 공복에는 술에 취하기 쉬워요. 이 술은 독해서 마실 땐 괜찮다가도 나중에 훅 가버릴 수 있어요. 먼저 요리들을 좀 드시고 또 국물도 한 그릇 드세요.”그 말과 함께 전이혁은 도아영에게 국물을 떠주었다.“국물부터 드셔보세요.”도아영은 평소 국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전이혁이 떠준 거라 예의상 한 수저 떠먹었다.“하 대표님, 이 국물이 정말 맛있네요. 저 원래 국물을 잘 안 마시는데 이 국물은 진짜 맛있어요.”“그럼 많이 드세요. 우리 집은 항상 식사 때 국물을 준비하는 게 습관이에요.”하예정은 우빈에게도 국물을 떠주며 물었다. 식습관은 바꾸게 하기 어려운 법이다.도아영은 관성의 사람이 아니라서 관성의 식습관과 달랐다.국물을 마시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이 국물이 맛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니 그 국물이 정말로 맛있었던 모양이다.“몇 살이에요? 동갑인 것 같은데.”“하 대표님이랑 같은 해에 태어났어요. 제 생일은 연말이라 하 대표님보다 몇 개월 어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