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윤의 차량 행렬이 지나가자 여운별은 급히 좌석에 몸을 낮추어 바깥에서 그녀를 볼 수 없도록 했다.사실 전태윤은 그녀를 알아보지 못할 가능성이 컸지만 여운별은 마치 도둑이 제 발 저리듯 상대방이 자신을 알아볼까, 자신이 저지른 일이 들통날까 걱정했다.하예정이 그녀를 감옥에 보낸 이유는 단순히 그녀가 방심해 하예정의 무술 실력을 몰랐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가장 큰 이유는 하예정 뒤에 전태윤이라는 강력한 후원자가 있었기 때문이다.지금은 여운별 역시 용 사장을 등에 업었지만 전태윤의 전용 차량을 보기만 하면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끼고 숨고 싶어 했다.전태윤의 차량이 지나가자 조수석에 앉아 있던 경호원이 고개를 돌려 의자에 몸을 움츠리고 있는 여운별을 발견했다. 바깥에서 보면 마치 뒷좌석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지금 뭐 하는 겁니까?”경호원이 불만 가득한 어조로 물었다.여운별은 고개를 들어 차창 밖을 몰래 살폈다. 전태윤의 차량이 보이지 않자 그녀는 안도하며 자세를 바로 세우고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급히 몸을 숨기느라 옷이 약간 구겨졌는데 모두 명품 옷이라 그녀는 저절로 조심스럽게 다뤘다.“방금 지나간 차들, 누구 차인지 아세요? 그 롤스로이스는 전태윤이 자주 사용하는 차량이에요. 뒤따라온 차량들은 그의 경호팀 차량이고요. 그의 경호팀은 항상 그를 따라다녀요.”여운별은 긴장한 얼굴로 설명했다.전태윤이 경호팀을 대동하는 이유는 과거 그의 열렬한 팬들이 과도하게 따라붙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결혼 후에도 그는 경호팀을 유지했는데 이는 젊은 여성들이 그에게 가까이 다가와 아내의 오해를 사는 일을 막기 위함이었다.특히 과거 도차연 사건은 전태윤과 하예정에게 깊은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전태윤과 도 대표가 사업을 논의하면서 도차연에게 접근할 기회를 줬고 하예정의 자리를 넘보고 있던 도차연은 전태윤과 비슷한 외모를 가진 남자를 찾아 애정 행각이 담긴 사진을 찍어 하예정에게 보냈다.경호원은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아가씨, 자신의 얼굴을 만져
용태호는 여운별에게 약속했다.만약 예씨 가문 사모님의 양자가 자신들이 찾고 있는 사람임이 확인되어 그 아이를 데려오게 되면 여씨 가문의 모든 재산을 여운별에게 넘기겠다고 했다.뿐만 아니라 전씨 가문의 큰 며느리도 여운별에게 맡기겠으니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그러나 용태호는 자신이 뱉은 약속을 지킬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일이 끝난 후 여운별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불확실했지만 그녀는 용태호가 자신을 위해 전씨 가문과 소씨 가문을 적으로 돌릴 것이라고 허황한 꿈을 꾸고 있었다.경호원들 또한 용태호의 진짜 속내를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여운별을 감시하고 돕는 역할만 맡고 있었다. 진실을 말하지 않고 그녀가 꿈을 꿀 수 있도록 놔두는 것이 그들한테는 최선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여운별은 용 사장을 위해 일할 동기를 잃을 게 뻔했다.여운별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알겠어요. 하지만 왜 저한테 이렇게 냉정하고 무정하게 대하는 거죠? 사람들 앞에서는 저를 ‘사모님’이라고 불러야 할 거 아니에요.”경호원들은 사람들 앞에서는 그녀에게 공손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했지만 사적인 자리에서는 마치 관리인처럼 그녀를 철저히 통제했다. 그들은 싸움에도 능했고 여운별은 그들과의 대결에서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었다.한 번은 그녀가 용태호에게 그들에 대해 고자질했지만 용태호는 그녀에게 경호원들을 화나게 하지 말라고만 조언했다.“그들은 무식하고 자비를 모르는 자들이야. 손에 피를 묻혀본 경험도 많지.”이 말에 겁이 난 여운별은 다시는 그들을 건드리지 않았다.경호원 중 한 명이 냉정하게 말했다.“오늘 당신은 새로운 얼굴로 하예정 씨 앞에 나타났습니다. 이제 여운별의 신분으로 돌아가 언니를 다시 한번 도발하세요. 그들이 여운별의 소식을 놓치면 곧바로 사장님의 부인 신분을 의심할 겁니다.”여운별이 실종된 상태에서 낯선 용씨 가문의 사모님이 갑작스레 나타난다면 두 사람을 연결 지으려는 의심이 생길 가능성이 있었다.여운별은 경호원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
“그놈이 후회할 날이 올 거야! 분명 내가 친누나인데 이복누나인 여운초를 믿다니!”여운별은 속으로 분노를 삭이고 있었다.한편, 하예정은 방금 서점에서 책을 구매한 젊은 주부가 정교한 인피 가면을 쓴 여운별이라는 사실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사실 하예정은 여운별과 개인적으로 잘 알지도 못했다. 변장한 여운별의 체형이 어딘가 낯익다는 느낌은 받았지만 그녀가 누구인지 끝내 떠올리지 못했다. 하예정의 친한 지인 범위에는 여운별이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익숙하고도 차분한 발소리가 들리자 하예정은 서점 밖으로 나갔다.“태윤 씨!”하예정은 환한 미소를 띠며 남편을 향해 걸어갔다. 전태윤은 눈웃음을 지으며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를 안아주었다. 그리고 낮고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여보, 보고 싶었어.”그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나서야 그녀를 놓아주었다.하예정이 작게 말했다.“다들 보고 있잖아요. 매일 보는데 뭐가 그렇게 보고 싶다고 그래요.”전태윤과 함께 온 경호원 한 명이 봉투 두 개를 들고 서 있었다. 봉투 안에는 포장된 음식이 들어 있었고 그는 그것을 서점 입구에 있는 직원에게 건넸다.전태윤이 직접 아내를 데리러 왔기 때문에 직원들은 자연스럽게 서점에 남아 가게를 봐주기로 했고 음식을 준비한 것도 직원들이 서점에서 식사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전태윤은 아내의 손을 잡고 차로 향하며 물었다.“피곤하지 않아?”“안 피곤해요. 저 그렇게 약하고 여리지 않아요.”하예정은 어려운 시절을 겪었던 사람답게 단호히 말했다.전태윤은 그녀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웃었다.“그럼, 우리 아내가 얼마나 강하고 대단한데.”“말만 번지르르하네요.”전태윤은 그녀를 차에 태웠다. 하예정이 올라타자 그도 따라 탔고 문을 닫은 뒤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그는 아내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장난스레 말했다.“그럼 벌로 뽀뽀 한 번 해줘야겠네.”하예정이 그를 살짝 밀어내며 작게 말했다.“사람들이 웃어요.”“아참. 방금 당신 오기 10분 전
전태윤은 큰 손으로 그녀의 손등을 덮으며 말했다.“얼굴만 비추고 대략 30분 정도 머물렀다가 바로 자리를 뜨자. 당신은 술 마시지 말고 그 여자들과도 멀리 떨어져 있어. 가장 좋은 건 내 옆에서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는 거야.”“그럼 태윤 씨 말대로 30분만 머물러요. 하지만 당신 옆에 딱 붙어 있을 필요는 없어요. 내가 있는 곳엔 사람들이 알아서 몇 미터씩 떨어지니까요.”모두가 그녀가 전태윤이 애지중지하는 아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겨우 임신에 성공한 그녀의 아이는 매우 귀한 존재였다. 그래서 누구도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려 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그녀가 실수로 넘어지거나 무슨 일이 생기면 자신들이 연루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하예정은 이 상황이 과도하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달랐다.관성 상류층 사람들은 그녀와 거리를 유지하며 아기를 낳고 나서야 모임에 나오라고 권했다.전태윤이 그녀를 달래듯 말했다.“그 사람들이 현명한 거야. 거리를 유지하는 게 나아. 그들 중 많은 사람이 담배를 피우는데 간접흡연을 많이 하면 좋을 게 없잖아.”하예정이 임신한 후, 전태윤은 그녀를 사교 모임에 데려가지 않았다. 간접흡연이 아이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까 봐서였다.“그럼 그냥 안 갈게요. 아기를 낳고 나서 당신이랑 모임에 나가죠 뭐. 사실 그 여자가 누군지 저랑은 아무 관계도 없잖아요. 낯익다고 느끼긴 했지만 어디서 봤는지는 모르겠어요. 아마 만난 적이 있어도 제대로 알지 못해서 누군지 떠오르지 않는 거겠죠.”전태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아직도 서로 모르는 걸 보면 전에도 잘 안 맞았을 거야. 그렇지 않았다면 이미 친구가 되었겠지.”하예정은 많은 귀부인들과 잘 맞지 않았고 그들과는 가볍게 인사만 나누는 정도였다. 그녀는 일부 사람들에게는 아예 관심도 없었고 그들이 누구인지조차 몰랐다.사실 전태윤도 아내가 사교 모임에 가지 않는 것을 더 바랐다. 만약 그녀가 참석하면 그는 그녀가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며 시간을 보낼 동안 옆에서 지켜야 했다. 그러
관성의 10월 날씨는 여전히 덥고 아침과 저녁에만 늦가을의 시원함을 느낄 수 있다. 하예정은 아침 일찍 일어나 언니네 세 식구에게 아침 식사를 차려준 뒤 주민등록증을 챙겨 조용히 떠났다."오늘부터 우리 더치페이로 해, 생활비든, 주택 대출이든, 자동차 대출이든 모두 더치페이로 해! 여동생도 우리 집에 얹혀사니 절반쯤을 내놓으라고 해, 한 달에 30여만 원을 주면 뭐 해? 공짜로 먹고사는 거랑 뭐가 다른데? ”어젯밤 언니와 형부가 다퉜을 때 그녀가 형부에게 들은 말이다.언니 집에서 나가야 해!하지만 언니를 걱정시키지 않으려면 방법은 단 하나, 누군가에게 시집을 가는 것뿐....예정은 비록 남친도 하나 없지만, 단기간에 시집을 가기 위하여 우연히 구한 적이 있는 전씨 할머니의 부탁을 듣고 결혼이 어렵다는 큰 손자 전태윤에게 시집을 가기로 했다.20분 후, 그녀는 구청 입구에서 내렸다.”예정아.”차에서 내린 그녀은 익숙한 목소리를 들었는데 전씨 할머니셨다.”전 할머니.”빠른 걸음으로 다가간 예정은 전씨 할머니 옆에 서 있는 키가 크고 차가워 보이는 한 남자에게 눈길이 끌렸는데, 바로 그녀의 결혼 대상인 전태윤이 아닐까 싶다.가까이 다가간 그녀는 태윤의 모습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전씨 할머니의 말에 따르면 큰 손자인 태윤은 서른이 다 되도록 여자 친구 하나 없어 자신을 크게 걱정시킨다고 했었다. 예정은 아마도 매우 못생긴 남자이리라 추측했었다.들은데 의하면 어느 큰 그룹의 경영자로 수입도 아주 높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지금 직접 만나보고 나서야 자신이 오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차가워 보이는 성격으로, 전씨 할머니 옆에 서서 어두운 얼굴로 마치 낯선 사람 접근 금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시선을 살짝 돌려 보니, 멀지 않은 곳에 검은색 승용차가 한대 서 있었다. 다행히도 억대의 고급차는 아닌 보통 수준의 자가용이었다. 이를 본 예정은 그녀와 태윤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고 느껴졌
"약속하였으니 지킬게요."예정도 며칠을 고민한 끝에 결정을 내린 거라 다시 후회할 생각은 없었다.태윤은 이 말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의 주민등록증를 꺼내 앞에 내놓았다.예정도 마찬가지로 주민등록증을 꺼내 놓았다.두 사람은 10분도 채 되지 않는 사이에 재빠르게 결혼 절차를 밟았다.혼인 신고가 끝나자 태윤은 바지 주머니에서 미리 준비해둔 열쇠를 꺼내 예정에게 건넸다. "주택은 발렌시아 아파트구에 있는데 할머니한테서 관성 중학교 입구에 서점을 차렸다고 들었어, 그쪽에서 그리 멀지 않으니깐 버스로 십여 분이면 갈 수 있을 거야.""운전면허증은 있어? 운전면허가 있으면 차 한 대를 제공해 줄게, 계약금은 내가 내줄 테니 매달 차 대출금을 갚아, 차를 가지고 다니면 출퇴근이 편할 거야.""나는 일이 바빠 보통 아침 일찍 나가고 저녁 늦게 들어와, 그리고 때로는 출장을 가기도 하는데, 자기 절로 제 몸만 잘 챙기면 돼. 생활비는 매달 10일에 급여 받으면 넘겨줄게.""그리고 시끄럽지 않게 결혼한 사실은 잠시 비밀로 해줘."태윤은 회사에서 남을 부리는 게 습관이 됐는지 그녀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연달아 분부하였다.예정이 초고속 결혼을 한 이유는 언니가 형부와 다투는 것을 원치 않아 하루빨리 결혼하여 언니 집에서 나와 언니를 안심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녀에게 이 결혼은 그저 계약 결혼에 지나지 않았다.태윤이 집 열쇠를 주자 예정은 사양치 않고 열쇠를 건너 받았다."운전면허증은 가지고 있어요, 하지만 당분간은 차를 살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 제가 평소 오토바이를 타고 출퇴근하고 다녔었는데 금방 새 오토바이로 바꿨어요."“저기...... 태윤씨, 우리도 생활비를 더치페이로 할까요 ?"언니와 형부는 좋은 사이인데도 불구하고 형부가 더치페이란 말을 꺼내는 걸 보면...... 아마도 형부는 언니가 자신을 이용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는 것 같다.아이 하나 잘 돌보고, 장보고, 밥하고 거기에 집 청소까지 하는 데 시간이
"네, 할머니."비록 전씨 할머니가 평소 잘해주긴 하지만, 아무래도 태윤이는 친손자이고, 자기는 그저 손자며느리에 불과한데, 혹여 갈등이 발생하면 며느리 편을 들어주기나 할까?예정은 전혀 믿지 않았다.마치 언니의 시부모들처럼 말이다.결혼 전에 그들도 언니에게 친딸이 질투할 정도로 엄청나게 잘해주었지만.... 결혼 후엔 태도가 확 달라지더니 언니랑 형부가 갈등이 있을 때마다 시어머니는 언니에게만 아내노릇을 잘 하지 못한다고 비난했다.아들은 언제나 한집 식구이고, 며느리는 그냥 남인 것이다."이제 출근하러 가야겠네? 그럼 할머니는 그만 가 볼게. 그리고 저녁에 태윤이한테 데리러 가라 할게, 같이 밥이라도 먹자""할머니, 제가 가게 문을 늦게 닫아서 아마 식사는 어려울 것 같아요. 주말은 어떨까요?"주말에 학교가 쉬면 학교에 의존하여 먹고사는 서점들은 장사가 잘되지 않는다. 그래서 주말엔 문을 닫아도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전씨 할머니는 그 말을 자상하게 받아주셨다."그럼 주말에 다시 보자, 먼저 일 보거라."그러고는 먼저 전화를 끊었다.예정은 바로 가게로 가지 않고, 먼저 절친인 심효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점심에 학생들이 학교에서 나오기 전에 가게로 돌아간다고 했다.인생의 큰일을 해결한 예정은 아무래도 돌아가서 언니에게 말하고 나서 언니의 집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십여 분 후,언니의 집에 도착했다.형부는 이미 출근하였고 언니는 베란다에서 빨래를 널고 있었다. 그녀가 집으로 돌아온 것을 본 언니는 걱정되는 듯 물었다."예정아, 왜 벌써 돌아왔어? 오늘 가게 안 열어?""점심때 다시 갈 거야, 점심때가 가장 바빠. 우빈인 아직 안 깼어?주우빈은 예정의 조카로 이제 막 두 살이 된 장난꾸러기이다."아직이야. 그 녀석이 깨어나면 집안이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어."예정은 언니를 도와 옷을 널면서 어젯밤에 일었던 일을 조심스레 물어봤다.“예정아, 형부가 널 쫓아내려는 게 아니라 스트레스가 너무
"언니, 그건 태윤의 개인재산이야, 나는 한 푼도 내지 않았어, 공동소유라니 이건 말도 안 돼."혼인신고를 하지 마자 태윤은 집 열쇠를 주었고 이로하여 즉시 이사하여 더는 형부의 눈치를 보며 살지 않게 된 예정은 이걸로도 아주 만족하고 있다.그녀는 태윤에게 먼저 공동소유를 제안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만일 태윤이가 먼저 제안하면 거절할 생각도 없고 말이다. 이제 부부인 만큼 평생 함께 살기로 결심했다.예진도 그저 한번 말해보았을 뿐이다. 동생은 이런 것들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이렇게 묻고 답하면서 잠시 뒤에야 예정은 언니의 집에서 이사를 할 수가 있었다.언니는 발렌시아 아파트까지 데려다주려고 하였지만 그때 마침 조카 우빈이 깨어나 울면서 엄마를 찾았다."언니, 먼저 우빈이부터 챙겨, 물건이 그리 많지 않으니 혼자 갈 수 있어"예진은 아들에게 밥을 먹여줘야 하고, 그러고 나서 또 점심 식사도 준비해야 했다. 남편이 점심에 돌아올 때 식사가 차려져 있지 않으면 또 집에 있으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나무랄 것이다."그럼 조심해서 가 알았지? 점심은 어떡할래? 네 남편 불러다 같이 먹을까?""언니, 나 점심엔 가게로 돌아가야 해, 태윤인 일이 바빠서....오후엔 출장 가야 한다고 하던데, 아무래도 시간이 좀 지나야 언니 만나러 올 수 있을 것 같아."예정은 거짓말을 했다.태윤에 대해 아직 잘 모르지만, 전 할머니의 말에 의하면 태윤은 일이 바빠 아침 일찍 나가 저녁 늦게 돌아온다고 한다, 때로는 출장을 가는데 한번 출장을 가면 열흘이나 보름이 지나서 돌아온다고 한다. 예정은 태윤이 언제 시간이 될지 몰라 언니랑 약속을 잡을 수 없었다."오늘 혼인신고 하자마자 출장을 가다니...."예정은 태윤이 동생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다고 생각이 들었다."우린 그냥 신고만 하였지 아직 결혼식도 올리지 않았잖아, 출장 가서 돈 많이 벌면 좋지 뭐....앞으로 돈 쓸데도 많아질 거야. 언니, 나 먼저 가
전태윤은 큰 손으로 그녀의 손등을 덮으며 말했다.“얼굴만 비추고 대략 30분 정도 머물렀다가 바로 자리를 뜨자. 당신은 술 마시지 말고 그 여자들과도 멀리 떨어져 있어. 가장 좋은 건 내 옆에서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는 거야.”“그럼 태윤 씨 말대로 30분만 머물러요. 하지만 당신 옆에 딱 붙어 있을 필요는 없어요. 내가 있는 곳엔 사람들이 알아서 몇 미터씩 떨어지니까요.”모두가 그녀가 전태윤이 애지중지하는 아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겨우 임신에 성공한 그녀의 아이는 매우 귀한 존재였다. 그래서 누구도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려 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그녀가 실수로 넘어지거나 무슨 일이 생기면 자신들이 연루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하예정은 이 상황이 과도하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달랐다.관성 상류층 사람들은 그녀와 거리를 유지하며 아기를 낳고 나서야 모임에 나오라고 권했다.전태윤이 그녀를 달래듯 말했다.“그 사람들이 현명한 거야. 거리를 유지하는 게 나아. 그들 중 많은 사람이 담배를 피우는데 간접흡연을 많이 하면 좋을 게 없잖아.”하예정이 임신한 후, 전태윤은 그녀를 사교 모임에 데려가지 않았다. 간접흡연이 아이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까 봐서였다.“그럼 그냥 안 갈게요. 아기를 낳고 나서 당신이랑 모임에 나가죠 뭐. 사실 그 여자가 누군지 저랑은 아무 관계도 없잖아요. 낯익다고 느끼긴 했지만 어디서 봤는지는 모르겠어요. 아마 만난 적이 있어도 제대로 알지 못해서 누군지 떠오르지 않는 거겠죠.”전태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아직도 서로 모르는 걸 보면 전에도 잘 안 맞았을 거야. 그렇지 않았다면 이미 친구가 되었겠지.”하예정은 많은 귀부인들과 잘 맞지 않았고 그들과는 가볍게 인사만 나누는 정도였다. 그녀는 일부 사람들에게는 아예 관심도 없었고 그들이 누구인지조차 몰랐다.사실 전태윤도 아내가 사교 모임에 가지 않는 것을 더 바랐다. 만약 그녀가 참석하면 그는 그녀가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며 시간을 보낼 동안 옆에서 지켜야 했다. 그러
“그놈이 후회할 날이 올 거야! 분명 내가 친누나인데 이복누나인 여운초를 믿다니!”여운별은 속으로 분노를 삭이고 있었다.한편, 하예정은 방금 서점에서 책을 구매한 젊은 주부가 정교한 인피 가면을 쓴 여운별이라는 사실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사실 하예정은 여운별과 개인적으로 잘 알지도 못했다. 변장한 여운별의 체형이 어딘가 낯익다는 느낌은 받았지만 그녀가 누구인지 끝내 떠올리지 못했다. 하예정의 친한 지인 범위에는 여운별이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익숙하고도 차분한 발소리가 들리자 하예정은 서점 밖으로 나갔다.“태윤 씨!”하예정은 환한 미소를 띠며 남편을 향해 걸어갔다. 전태윤은 눈웃음을 지으며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를 안아주었다. 그리고 낮고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여보, 보고 싶었어.”그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나서야 그녀를 놓아주었다.하예정이 작게 말했다.“다들 보고 있잖아요. 매일 보는데 뭐가 그렇게 보고 싶다고 그래요.”전태윤과 함께 온 경호원 한 명이 봉투 두 개를 들고 서 있었다. 봉투 안에는 포장된 음식이 들어 있었고 그는 그것을 서점 입구에 있는 직원에게 건넸다.전태윤이 직접 아내를 데리러 왔기 때문에 직원들은 자연스럽게 서점에 남아 가게를 봐주기로 했고 음식을 준비한 것도 직원들이 서점에서 식사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전태윤은 아내의 손을 잡고 차로 향하며 물었다.“피곤하지 않아?”“안 피곤해요. 저 그렇게 약하고 여리지 않아요.”하예정은 어려운 시절을 겪었던 사람답게 단호히 말했다.전태윤은 그녀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웃었다.“그럼, 우리 아내가 얼마나 강하고 대단한데.”“말만 번지르르하네요.”전태윤은 그녀를 차에 태웠다. 하예정이 올라타자 그도 따라 탔고 문을 닫은 뒤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그는 아내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장난스레 말했다.“그럼 벌로 뽀뽀 한 번 해줘야겠네.”하예정이 그를 살짝 밀어내며 작게 말했다.“사람들이 웃어요.”“아참. 방금 당신 오기 10분 전
용태호는 여운별에게 약속했다.만약 예씨 가문 사모님의 양자가 자신들이 찾고 있는 사람임이 확인되어 그 아이를 데려오게 되면 여씨 가문의 모든 재산을 여운별에게 넘기겠다고 했다.뿐만 아니라 전씨 가문의 큰 며느리도 여운별에게 맡기겠으니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그러나 용태호는 자신이 뱉은 약속을 지킬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일이 끝난 후 여운별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불확실했지만 그녀는 용태호가 자신을 위해 전씨 가문과 소씨 가문을 적으로 돌릴 것이라고 허황한 꿈을 꾸고 있었다.경호원들 또한 용태호의 진짜 속내를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여운별을 감시하고 돕는 역할만 맡고 있었다. 진실을 말하지 않고 그녀가 꿈을 꿀 수 있도록 놔두는 것이 그들한테는 최선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여운별은 용 사장을 위해 일할 동기를 잃을 게 뻔했다.여운별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알겠어요. 하지만 왜 저한테 이렇게 냉정하고 무정하게 대하는 거죠? 사람들 앞에서는 저를 ‘사모님’이라고 불러야 할 거 아니에요.”경호원들은 사람들 앞에서는 그녀에게 공손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했지만 사적인 자리에서는 마치 관리인처럼 그녀를 철저히 통제했다. 그들은 싸움에도 능했고 여운별은 그들과의 대결에서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었다.한 번은 그녀가 용태호에게 그들에 대해 고자질했지만 용태호는 그녀에게 경호원들을 화나게 하지 말라고만 조언했다.“그들은 무식하고 자비를 모르는 자들이야. 손에 피를 묻혀본 경험도 많지.”이 말에 겁이 난 여운별은 다시는 그들을 건드리지 않았다.경호원 중 한 명이 냉정하게 말했다.“오늘 당신은 새로운 얼굴로 하예정 씨 앞에 나타났습니다. 이제 여운별의 신분으로 돌아가 언니를 다시 한번 도발하세요. 그들이 여운별의 소식을 놓치면 곧바로 사장님의 부인 신분을 의심할 겁니다.”여운별이 실종된 상태에서 낯선 용씨 가문의 사모님이 갑작스레 나타난다면 두 사람을 연결 지으려는 의심이 생길 가능성이 있었다.여운별은 경호원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
전태윤의 차량 행렬이 지나가자 여운별은 급히 좌석에 몸을 낮추어 바깥에서 그녀를 볼 수 없도록 했다.사실 전태윤은 그녀를 알아보지 못할 가능성이 컸지만 여운별은 마치 도둑이 제 발 저리듯 상대방이 자신을 알아볼까, 자신이 저지른 일이 들통날까 걱정했다.하예정이 그녀를 감옥에 보낸 이유는 단순히 그녀가 방심해 하예정의 무술 실력을 몰랐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가장 큰 이유는 하예정 뒤에 전태윤이라는 강력한 후원자가 있었기 때문이다.지금은 여운별 역시 용 사장을 등에 업었지만 전태윤의 전용 차량을 보기만 하면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끼고 숨고 싶어 했다.전태윤의 차량이 지나가자 조수석에 앉아 있던 경호원이 고개를 돌려 의자에 몸을 움츠리고 있는 여운별을 발견했다. 바깥에서 보면 마치 뒷좌석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지금 뭐 하는 겁니까?”경호원이 불만 가득한 어조로 물었다.여운별은 고개를 들어 차창 밖을 몰래 살폈다. 전태윤의 차량이 보이지 않자 그녀는 안도하며 자세를 바로 세우고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급히 몸을 숨기느라 옷이 약간 구겨졌는데 모두 명품 옷이라 그녀는 저절로 조심스럽게 다뤘다.“방금 지나간 차들, 누구 차인지 아세요? 그 롤스로이스는 전태윤이 자주 사용하는 차량이에요. 뒤따라온 차량들은 그의 경호팀 차량이고요. 그의 경호팀은 항상 그를 따라다녀요.”여운별은 긴장한 얼굴로 설명했다.전태윤이 경호팀을 대동하는 이유는 과거 그의 열렬한 팬들이 과도하게 따라붙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결혼 후에도 그는 경호팀을 유지했는데 이는 젊은 여성들이 그에게 가까이 다가와 아내의 오해를 사는 일을 막기 위함이었다.특히 과거 도차연 사건은 전태윤과 하예정에게 깊은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전태윤과 도 대표가 사업을 논의하면서 도차연에게 접근할 기회를 줬고 하예정의 자리를 넘보고 있던 도차연은 전태윤과 비슷한 외모를 가진 남자를 찾아 애정 행각이 담긴 사진을 찍어 하예정에게 보냈다.경호원은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아가씨, 자신의 얼굴을 만져
“사장님께서는 아가씨에게 더 많이 배우고 자신의 능력을 키우라고 하셨습니다. 성격도 고치고 온화하며 품위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하며 귀부인의 태도를 갖추라고 하셨죠. 예전처럼 오만하고 거칠게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상류층 귀부인들 사이로 들어가기는 어려울 것입니다.”경호원의 말에 여운별은 입을 삐죽이며 불만을 드러냈다.“당신들은 그 귀부인들이 오만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사실 그 여자들도 꽤 오만한 점이 있어요. 당신들이 직접 만나보지 못했을 뿐이죠.”“우리 여씨 가문도 명문가라고요. 나는 단지 나이가 어리고 성격이 좀 강해서 그렇지 품위가 없는 건 아니에요. 나도 품위를 지킬 줄 알아요. 예전 내 사교계에도 다 명문가의 딸들과 부잣집 아가씨들뿐이었죠.”비록 여운별의 어머니가 형부와 재혼하며 사교계에서 좋은 평판을 받지 못했지만 이로 인해 여씨 가문의 둘째 딸로서 그녀가 관성의 상류층에서 차지한 지위가 크게 흔들리지는 않았다.여운별은 자신이 성소현 같은 이들과는 비교될 수 없더라도, 많은 부잣집 딸들보다 훨씬 낫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그녀는 여전히 자신감이 넘쳤고 자신의 기품과 교양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어릴 적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고, 지금은 스무 살로 한창 꽃다운 시기였다. 조금 오만하다고 해도 그것이 무슨 큰 문제냐는 태도를 유지했다.“아가씨, 지금은 관성에 있으니 더 이상 여씨 가문의 부잣집 아가씨 행실을 하면 안 됩니다. 이를 꼭 명심하세요. 만약 사장님께서 지시하신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정체가 드러난다면 매우 끔찍한 결과를 맞게 될 것입니다. 사장님은 성격이 별로 좋지 않으시거든요.”경호원의 경고는 이어졌다.“게다가 사모님의 수완도 뛰어나십니다. 사장님이 직접 나서지 않고 사모님께 아가씨를 넘기시면, 차라리 죽는 게 나을 만큼 고통스러운 일이 생길 겁니다. 사모님은 당신이 어느 명문의 딸인지 개의치 않으십니다. 당신의 목숨은 사모님의 한마디에 달려 있죠.”이 말을 들은 여운별의 얼굴이 굳
“우리 가게에는 유아용 교재가 없어서요. 다른 문구 방에 가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하예정의 서점은 중학교 앞에 위치해 주 고객층이 중학생이었고 유치원용 책은 들여놓지 않았다.“아, 그렇군요. 그럼 잠시 후 다른 문구 방에 가봐야겠어요.”젊은 여자는 책값을 지불하고 책을 들고 나가며 감사 인사를 건넸다. 그녀가 가게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며 하예정은 어딘가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아마도 전태윤과 함께 행사에 참석했을 때 스치듯 본 적이 있을지 몰랐지만 깊이 알지는 못해 기억나지 않는 것이라 여겼다.‘잠시 후 태윤 씨한테 물어봐야겠다. 어떤 가문일까? 장남은 결혼했고 작은아들은 중학생이고 막내딸은 유치원이라니...’젊은 여자는 스물한두 살쯤으로 보였고 남편도 젊을 가능성이 컸다. 하예정은 임신 전 상류층 모임에 자주 참석했지만 어느 집안 자제가 그렇게 일찍 결혼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그녀가 아는 젊은 여자들은 대체로 그보다 나이가 많았기에 방금 본 여자가 속한 가문은 아직 명문으로 자리 잡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여자의 차는 근처에 주차된 흰색 BMW7 시리즈였다. 차 앞에는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 두 명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자가 가까이 다가가자 두 남자는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경의를 표했다. 그녀의 경호원과 운전기사인 듯했다.“출발하죠.”여자는 차에 올라 운전사에게 지시했다. 차가 멀리 떠난 후, 그녀는 가게 쪽을 돌아보았다. 하예정이 더 이상 자신을 보지 못할 거리라고 판단한 순간, 여자는 얼굴을 만지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그 젊은 여자는 바로 여씨 가문의 둘째 딸, 여운별이었다. 그녀는 현재 용태호의 스폰녀로 지내고 있었지만 사교계에서는 용씨 가문 사모님을 사칭하며 활동 중이었다. 이는 용태호가 모든 의심을 피하기 위해 마련한 조치였다.여운별은 용태호가 준 인피가면 덕분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녀의 임무는 하예정에게 접근해 친구가 된 후 용정이라는
“저도 마음이 놓이네요. 엄마, 윤하가 아직 소 대표의 고백을 받아주지 않은 거 맞죠? 제가 대신 받아주고 싶네요. 소씨네 식구들 성격이 다들 시원시원해서 우리 윤하한테 잘 맞는 거 같아요. 윤하도 덜렁덜렁 거리는게 저 집안과 바이브가 맞아요.”윤하 어머니는 혁진에게 말했다. “네 동생 일생의 큰 일이야. 우리가 잘 체크해주고 나머지는 윤하한테 맡겨야지. 지훈한테 시집가는 사람도 윤하도 한평생 같이 살 사람도 윤하 자신이니까 걔가 좋아야 되지. 그리고 윤하 다음은 너랑 혁주야. 너희 둘도 이제 슬슬 준비해야지.”“엄마, 저 쌀 씻으러 갈게요.” 윤하 어머니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결혼 잔소리를 했고 혁진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들어갔다.그런 혁진을 보고 어머니는 몇 마디 나무랐다.연성의 겨울은 눈 내린 광경을 어디서나 볼 수 있지만 관성은 아직도 최고 기온이 25도나 되는 여름이어서 길거리에는 반팔티를 입고 걸어 다니는 사람이 많았다.하예정은 서점에서 남편이 데리러 오기를 기다렸다. 두 사람은 관성 호텔에 가서 점심을 먹을 계획이었다.그녀는 이제 더 이상 공예품을 만들지 않았다. 온라인 쇼핑몰도 전에 그녀를 도왔던 아기엄마한테 양도했다.지금은 서점에서 일하고 있고 학생들이 수업이 끝나면 조금 바빠질 뿐, 다른 시간에는 아주 한가해서 옆 가게 탐방도 자주 하곤 했다. 비록 경호원들이 뒤따르지는 않지만 행여나 무슨 일이 생길까 항상 주시하고 있었다.심효진은 소설을 좋아해서 그녀가 서점을 지키고 있을 때는 하루 종일 앉아 소설을 읽곤 했다.하예정은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고전 작품 한 권을 골라 읽었지만 자꾸만 하품이 나와 결국 읽기를 포기했다.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를 지나 책장 앞에 다가가 먼지털이로 책우의 먼지를 털기 시작했다. 사실 먼지가 별로 없었지만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할 일을 찾아야 했다.그때, 밖으로부터 또깍또깍 하이힐 소리가 들려왔다.처음 보는 젊은 부인이 서점으로 들어왔다. 손에는 에르메스 백을 들고 있었고
혁진은 거실에서 지훈이 부모님이랑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지훈이 아버지는 성격이 아주 호탕한 분이셨다. 혁진이랑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만 두 사람은 말이 잘 통했다.지훈이 마침 아침밥을 들고나오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의형제를 맺을 기세였다.지훈이 어머니는 그런 남편을 몇 번이나 눈치를 주었다.이 양반이 지금 여기가 어디인지 까먹은 거 아니야?여기는 윤하네 집, 예비 사돈댁이라고. 혁진은 예비 며느리 친오빠고, 두 사람이 형제를 맺으면 나중에 아들더러 어떻게 처신하라는 거야. 아주 그냥 엉망진창이네.“아버지, 어머니, 윤하 씨 어머님께서 아침을 준비해 주셨어요. 따뜻할 때 드세요. 저희는 이미 먹었어요.”지훈은 부모님을 주방으로 불렀다. “점심은 여기서 먹어요. 조금 있다가 윤하 씨랑 제가 장 봐 올게요.”지훈이 어머님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좋아, 나도 나가서 눈이 내리는 걸 보고 싶어. 지훈이 아버지, 당신도 같이 가요. 짐도 들어줄 겸.”남편의 의견을 물어보는 듯했지만 사실상 답정너였다. 집에 두고 갔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장 보고 돌아올 땐 이미 혁진이랑 형제를 맺었을지도 모른다.“그래요.”지훈이 아버지는 흔쾌히 대답했다.윤하 어머니는 주방에서 나오며 민망한 듯 말했다. “두 분께서 오시는 줄을 몰라서 제대로 준비 못 했어요. 점심에는 뭘 드시고 싶으세요? 말만 하세요, 제가 다 할 수 있어요. 가족이라 생각하고 편히 말씀하세요. 내외할 것 없어요.”지훈이 어머니는 미소를 띠며 말했다. “ 저희 안 그래요. 이제는 가족이나 마찬가진데요. 저희는 뭐든 잘 먹어요. 아무거나 다 돼요.”“사돈, 윤하는 정말 훌륭한 아가씨예요. 저희 지훈이랑은 비교가 안 돼요. 지훈이 때문에 저희 두 사람 속 많이 태웠어요.”지훈이 어머니는 실수도 사돈이라고 불렀지만 윤하 어머니는 개의치 않았다. “과찬이세요. 저희 윤하도 속 썩일 때가 많았어요. 지훈이야말로 성숙하고 성격도 온화하고 너그럽고 유망한 청년이죠. 저희 윤하보다 훨씬 나은 걸
원래부터 지훈을 마음에 들어 하던 윤하 어머니는 지훈의 특별한 사정을 알고 나서 더욱 자신의 사윗감이라는 확신이 들었다.윤하와 결혼을 하게 되면 지훈은 그녀를 더욱 소중히 아낄 것이 분명했기에 윤하 어머니는 딸이 멀리 관성에 시집가서 마음고생할 거라는 걱정이 사라졌다.윤하와 어머니는 주방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지훈이 부모님을 대접할 아침을 준비했다.지훈도 주방으로 들어와 일손을 도왔다.“지훈 씨, 안 도와줘도 돼요. 가서 부모님이랑 얘기 나눠요.”윤하는 지훈을 밀어냈다.“부모님이 저더러 도와주라고 해서 들어왔는데 저를 또 저쪽으로 보내시면 어떻해요? 누구 장단에 맞춰야 해요? 아차! 아버님이랑 큰형님이 안 보이시는데 아직 주무시나요? 아니면 도장에 일찍 나가셨어요?”지훈은 그 두 사람이 보이지 않자 물어보았다. 아까는 그럴 겨를조차 없었다.“두 사람 볼일이 있어서 아침 일찍 공항에 갔어. 이쯤 되면 아마 비행기에 올랐을 거야.”윤하 어머니가 대답했다.지훈은 별생각 없었다. 고백도 했고 부모님도 인사하러 오셨고 지금은 그저 윤하의 답변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사실 지훈도 내심 많이 긴장됐다.그도 윤하가 자신을 밀어내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옷도 사주고 고백 후에 도망치지도 않았기에 희망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윤하가 명확히 대답하기 전까지는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었다. 만에 하나 거절할 수도 있기에 두려웠다.윤하가 설령 거절한다고 해도 지훈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할 것이다.질병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렇지 않다고 해도 그가 선택한 사람이라면 평생 그 한 사람한테만 마음을 줄 그런 사람이었다. “어머님, 준비 많이 하시지 마세요. 두 분 간단히 요기하면 돼요. 제가 이따가 두 분 호텔로 모셔다드릴 거예요. 거기서 식사하시면 돼요.”“귀한 손님들이 멀리서 오셨는데 점심은 내가 대접해야지. 외식할까 아니면 집에서 먹을까?”윤하 어머니는 물었다.“집에서 먹으면 윤하랑 혁진이는 오늘 도장 나가지 말고 장 좀 봐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