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희 아주머니는 그 시큼한 매실을 옆에 놓으며 웃으며 말했다.“태윤 씨에게 비밀로 해야 해요. 태윤 씨가 제 월급을 깎으면 안 되거든요.”“저도 예정 씨를 위해 작은 디저트를 준비해 왔어요. 많지는 않지만 맛있게 드시라고 사 왔어요.”하예정은 숙희 아주머니가 가져온 맛있는 음식을 하나씩 꺼내는 것을 보고 또 옆에 놓인 한입에 금세 먹어치울 수 있는 작디작은 디저트들을 보며 말했다.“숙희 아주머니, 이렇게 작은 디저트와 매실 하나를 어떻게 맛있게 먹어요. 한 입이면 없어지는걸요. 너무 적어요.”전씨 할머니가 바로 말을 이었다.“태윤이가 네가 입덧한다고 가슴 아파하며 특별히 숙희 아주머니에게 당부했거든. 나에게도 어찌나 신신당부하던지. 널 너무 예뻐하면 안 된다면서 신맛, 단맛을 너무 먹이면 안 된다고 누누이 말했어. 아침에 네가 심하게 토했다며?”“숙희 아주머니가 몰래 너에게 매실 한 알이라도 챙겨 온 것에 감사해야 해.”하예정은 이내 수그러들었다.“그래요. 만족해야죠. 한 알이라도 있다는 게 어디에요.”“할머니, 숙희 아주머니랑 점심 드셨어요? 우리 함께 먹어요. 저 혼자 이렇게 많이 다 먹을 수 없어요.”“우리도 아직 안 먹었어. 그래서 이렇게 많은 음식을 챙겨 온 거야. 뭐든 같이 먹어야 맛있는 법이지.”전씨 할머니는 숙희 아주머니를 불러 함께 먹자고 했다.전태윤이 사무실에 없었기 때문에 숙희 아주머니는 한결 편안했고 전씨 할머니의 초대에도 거절하지 않았다.세 사람은 하예정의 사무실에서 무척 즐겁게 먹었다.하예정은 입덧한 탓으로 가끔 토하지만 먹을 때에는 또 잘 먹었다.하예정의 사무실에도 전태윤이 준비한 간식들이 많았다.소정남의 말에 의하면 임산부들은 식욕이 많아지기 때문에 반드시 음식을 먹어주어야 한다고 했다. 하예정도 심효진과 같은 먹보였기 때문에 임신하고 나면 더 잘 먹게 될 것이 뻔했다.하여 전태윤은 아내를 위해 많고 많은 간식을 사무실에 가져다 놓았다.“예정아.”하예진은 사무실 문을 두드리며 동생을 불렀다.사무
하예정은 하예진이 특별히 맛보게 해준다면서 챙겨온 새 요리를 집어 먹더니 저도 모르게 눈빛이 반짝거렸다.전씨 할머니도 그 요리들을 맛보더니 바로 하예지에게 물었다.“예진아, 내가 네 새 가게에서 회원 카드를 하나 만들어야겠어. 매일 네 요리를 먹게. 네 요리 솜씨가 정말 나날이 좋아지고 있구나.”하예정도 먹으면서 머리를 끄덕끄덕했다.“예정아, 천천히 먹어. 체할라.”여동생이 매우 즐겨 먹는 모습을 보면서 하예진도 빙그레 모르게 웃었다.“제가 요리 학원에 등록했거든요. 혼자 연습하고 나서 동명 씨도 맛보게 했고 맛있다는 평가를 받았거든요. 그래서 여기로 가져온 거예요.”“할머니께서 맛있다고 하시니 저도 안심되네요.”“언니 정말 최고야!”하예정은 언니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하예진은 점점 더 강인한 여자로 성장하고 있었다.하예진은 줄곧 우수한 여자였다.처음에는 남자의 거짓말에 속아서 바보같이 회사를 그만두고 전업주부로 되었고 종일 집안일을 하며 아이를 돌보느라 사회와 완전히 동떨어져 있었다.그러나 현재 하예진은 다시 직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젠 대표로 일하면서 홀로 요식업에 용감하게 뛰어들었다.훌륭한 사람은 그자에게 회복할 시간을 주기만 한다면 이내 다시 일어설 것이다.하예진의 얼굴이 조금 빨갛게 변했다.“아직도 많이 노력해야 해. 내일 새 가게 오픈하면 나도 셰프님들 도와드려야 해. 내가 셰프님 두 분을 초대했거든. 요리도 맛있게 하시는 분들이셔. 우리 세 사람의 요리 솜씨로 사람들의 입맛을 만족시킬 수 있으리라 난 굳게 믿거고 있거든.”그녀의 목표는 자신만의 호텔을 소유하는 것이다. 그리고 체인점을 관성에서, 심지어 전국에서 오픈하는 것이다.하예진은 언젠가 자신의 목표를 이룰 수 있기를 바랐다.따르릉!하예진의 휴대전화가 울렸다.그녀는 휴대전화를 꺼내 발신자 표시를 보았고 노동명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노 대표예요.”하예진은 모두에게 전화를 걸어 온 사람이 노동명임을 통쾌하게 알려주었다.얼마 전 전씨 할머니와
노동명은 또 하예진이 전남편을 보러 병원으로 간 줄 알았다.“그랬어? 예정 씨는 괜찮고?”“네, 괜찮아요. 제부가 말하길 예정이가 단맛과 신맛을 먹지 않으면 입덧도 잘 안 한대요.”노동명이 웃으며 말했다.“그래? 그럼 태윤이가 예정 씨를 먹게 할 리가 없겠네. 예정 씨가 입덧만 하면 태윤이가 가슴 아파서 단 하루도 출근하지 못할걸. 출근했다 해도 정신은 예정 씨한테로 날아가 있을 게 뻔하니까.”노동명도 회사로 출근하다가도 퇴근할 시간이 다가올 때면 그의 마음은 이미 하예진 곁으로 날아가 버린지 옛날이다.노동명은 가끔 회사에 출근하여 업무를 처리할 때면 그날 점심에는 반드시 하예진의 새 가게로 가서 요리를 시식해주곤 했다.하예정이 노동명의 점심을 책임진 거나 다름없었다.“제가 나오기 전에 직원들에게 동명 씨 점심밥도 같이 차려놓으라고 부탁했어요. 제가 남긴 요리들을 천천히 드세요. 좀 있다가 갈게요.”노동명은 빙그레 웃었다.“응, 알았어.”“그럼 이만 끊고 저도 밥 먹으러 갈게요.”“그래.”통화를 끊은 노동명은 그제야 안심하며 경호원에게 말했다.“가게 안으로 들어가줘. 예진이가 점심밥을 남겨놓았대.”경호원은 서둘러 그를 하예진의 새 가게 안으로 밀어 들어갔다.새 가게는 하루 토스트의 앞 두 글자를 따서 ‘하루 레스토랑’이라고 이름 지었다.하예진은 ‘하루’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체인점을 오픈해 하루 그룹을 만들고 싶었고 요식업계에서도 어느 정도 성과를 내고 싶었다.병원.병실에서 배불리 점심밥을 먹은 주형인은 부모의 부축을 받아 침대에서 내려와 소화할 겸 걸어 다녔다.주형인은 잘 회복되고 있었다. 저세상으로 갈뻔했던 경험이 있었기에 그는 요 며칠 동안 침대에서 내려와 천천히 걸어 다녔다. 너무 급하게 걸어 다니다가 상처를 건드렸다가 더 아플까 봐 두려웠다.“벌써 걸어 다닐 수 있구나!”주서인이 사과 한 봉지를 들고 병실로 들어오고 있는데 동생이 병실에서 천천히 걸어 다니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김은희는 걱정스레
“그런 걸 뭐하러 자꾸 말해!”주형인은 누나를 꾸짖었다.주서인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주경진은 바로 딸에게 경고했다.“더는 바보 같은 짓 하지 마. 다시 가서 일을 저지른다면 내가 널 절대 용서 안 할 거야!”딸은 X떡 같은 습관을 여전히 고치지 못하고 있다. 하예정이 동물원에서 정한이를 구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서인은 금세 감사한 마음을 뒤로 한 채 또 탐욕스러운 본성을 드러내놓기 시작했다.주경진은 딸이 또 일을 저지를까 봐 무척 걱정했다.주서인이 바로 말을 이었다.“아버지, 제가 어떻게 감히 또 일을 저지를 수 있겠어요. 예정의 신분을 봐서라도 제가 더는 사고 치면 안 되죠. 그러다가 제 가게도 망할 수도 있거든요. 저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 아니에요.”“그냥 질투해 볼 뿐이에요. 예진이가 오늘의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것도 우리 공로인걸요. 우리가 아니었더라면 예진이가 분발하여 오늘날의 사업을 이루지 못했을 거예요.”주서인의 파렴치함은 끝이 없었다.이 말을 들은 주서인의 부모님과 남동생마저도 그녀가 뻔뻔하기 그지없다고 속으로 욕했다.“형인아, 너도 빨리 독한 X이랑 이혼하고 예진...”“닥쳐!”주경진은 딸에게 호통쳤다.“앞으로 병실로 올 거면 조용히 앉아있다 돌아가! 형인이 일에 참견하지도 말고 걱정하지도 마. 나와 네 엄마가 있는 한 주씨 집안 일은 네가 관여할 필요 없을거야!”“제가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왜 그러세요. 저도 형인이를 위해서 이러는 거잖아요. 예진이와 노 대표 사이가 엄청 가까운데 나중에 우빈이가 성씨라도 바꾸게 되면 그때 가서 땅을 치며 후회해도 소용없어요.”주서인이 자꾸 이런 형편없는 말들을 되풀이하는 이유가 바로 동생과 하예진의 재혼을 통해 하예진의 몸에서 이익을 얻으려는 것이다.“우빈이 성씨가 무엇이든 우빈이는 여전히 나를 할아버지라 부를 테고 네 동생을 아버지라고 부를 거야. 혈육은 성씨가 변한다고 해서 쉽게 끊어지는 게 아니야.”주형인은 담담하게 말했다.“난 현주와 이혼하지 않을 거야. 현주
“정 선생님, 물 드세요.”정겨울은 물 잔을 건네받으며 인사했다.“고마워요.”“제가 더 고맙죠. 정 선생님께서 산후조리 하신 지도 얼마 안 되었는데 우리 아들이 또 이렇게 초대했네요. 제도 너무 미안해서 이진이를 꾸지람했다니까요..”정겨울도 목이 말랐는지 물 반 컵을 한꺼번에 마셔버렸다.“괜찮아요. 저도 산후조리 할 때 너무 심심했어요. 빨리 오고 싶었지만 우리 남편이 저더러 집에서 더 쉬라고 하는 바람에 이렇게 늦게 왔네요.”“저도 의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 제 몸을 제가 더 잘 돌볼 수 있는데도 자꾸 저보고 쉬라고 하세요. 이진 씨가 약혼녀분께 참 정이 깊은 모양이더라고요.”“운초 씨 눈을 치료해 주기 위해 우리 남편의 눈치를 보면서도 꿋꿋하게 저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하더군요. 저도 이진 씨 성의에 몹시 감동했거든요. 저도 운초 씨를 위해 기꺼이 도와드릴 겁니다.”“제가 운초 씨의 눈을 치료해 주어 이진 씨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게 해주고 싶어요.”여운초는 전이진과 약혼한 사이지만 약혼자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아직도 잘 모르고 있었다.정겨울은 여운초가 불쌍하기도 했다.게다가 두 가문에서도 사업상의 거래가 있었기 때문에 정겨울은 기꺼이 전이진을 도와 여운초의 눈을 치료해 주려 했다.“정말 고마워요!”명해은은 감사할 따름이다.그녀도 며느리의 눈이 치료되기를 바라고 있었다.명해은은 밖에서 패기 넘치게 예비 며느리를 보호하고 있었지만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이 고생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그녀의 장남은 무척 훌륭했고 며느리도 어느것 하난 뒤떨어질 게 없는 여자였다. 유독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아쉽기만 했다.명해은은 아들을 매우 가슴 아파했기에 며느리의 눈을 치료해 주는 기회가 생겼으니 기뻐할 수밖에 없었다.“사모님, 전씨 할머니와 예정 씨께서 오셨어요”하인이 들어와서 명해은에게 알려주었다.곧 전씨 할머니와 하예정이 들어왔다.“할머니.”전씨 할머니가 들어오시자 정겨울은 물컵을 내려놓으며 일어나 웃음 지으면서 인사했다.“정
“할머니, 안색이 정말 좋으세요.”정겨울은 전씨 할머니를 칭찬했다.예진 리조트에 있을 때 정겨울은 전씨 할머니의 맥을 짚어보았는데 어르신의 건강은 엄청나게 좋으셨다. 십여 년을 더 사셔도 문제없을 정도로 말이다.정겨울의 스승님께서도 진귀한 약재로 몸조리를 하셨기 때문에 몸이 아주 튼튼하셨다.스승님께서는 120세까지 살도록 노력하여 예훈이가 장가가고 자식들을 낳는 것까지 보고 싶다고 하셨다.예훈이가 아직 말도 못 하는 어린 아기인데도 말이다.전씨 할머니도 웃으며 정겨울의 손을 잡았다.“겨울 씨, 스승님께 장수할 수 있는 약이 있을까요? 저한테 몇 알 주시면 제가 좀 힘이 날 것 같은데. 120세까지 살게 하면 더 좋고요. 지금 세상에 백 세까지 사는 건 신기한 일도 아니잖아요.”“언제 증손녀를 안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증손녀를 안아야 제가 당당하게 우리 영감 만나러 갈 수 있을 텐데요. 저는 하얗고 부드러운 살결은 가진 여자 아기를 너무 좋아하거든요.”“지연이처럼 귀여운 증손녀를 한 보따리 줘도 저는 행복하기만 할 것 같은데.”정겨울이 웃으며 대답했다.“우리 스승님께서 지금 저의 아기를 돌봐주고 계시거든요. 제가 좀 있다가 돌아가서 스승님께 여쭤볼게요. 전씨 할머니께 120세까지 살 수 있는 약을 몇 알 달라고 해볼게요.”“전씨 할머니께서 증손녀를 안으시려면 아마 오래 기다리셔야 할걸요. 하지만 할머니께서 손자분 9명이나 계시니 9명의 며느리도 있다는 의미잖아요. 그럼 언젠가 그 9명의 며느리 중에서 증손녀를 낳아줄 분 계실 거에요.”정겨울은 확실하게 대답해 주지 못했다.정겨울도 전씨 가문으로 시집간 여자들이 아들만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적 있었다.전해 들은 바에 의하면 전씨 가문의 며느리들이 자신의 신체의 산 알칼리성을 조절해서 임신을 준비해도 결국 아들을 낳고 말았다고 한다.물론 지금은 의학이 발달한 시대라서 딸을 낳고 싶으면 인위적으로 간섭해 시험관 아기를 수술을 해도 될 것이다. 하지만 정겨울은 자연적으로 임신
여운초는 오랫동안 눈이 멀었기에 여준희를 따라다니며 진찰을 받았고 심지어 절에 가서 기도까지 한 적도 있었다.하지만 매번 실망하고 돌아왔기 때문에 실망의 횟수가 많아지다 보니 여운초는 희망 가질 용기조차 내지 못했다.여운초도 정겨울이 가족들이 품고 있는 마지막 희망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만약 결과가 좋지 않다면 그녀 혼자 실망하는 것은 상관없었다. 어쨌든 그녀는 익숙해졌으니까. 하지만 가족들도 그녀따라 함께 실망하는 것이 몹시 싫었다.“겁내지 마.”전이진은 두 팔을 벌려 그녀를 힘껏 껴안았고 그녀의 이마에 부드럽게 뽀뽀를 해주었다.“겁내지 마. 내가 있잖아.”여운초는 고개를 들어 전이진의 모습을 애써 보고 싶었지만 눈앞은 여전히 흐릿하여 잘 보이지 않았다.전의진의 말과 포옹 그리고 입맞춤은 여운초의 마음속으로 따뜻한 물결처럼 흘러들어와 그녀의 마음을 녹여주었다.여운초는 마침내 긴장을 풀었다.그리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전이진은 약혼녀의 손을 잡고 전씨 가문의 별장으로 들어갔다.따르릉...전이진의 핸드폰이 울렸다.전이진은 가족들의 재촉하는 전화인 줄 알았다.“우리 엄마 재촉하는 전화일 거야.”전이진이 휴대전화를 꺼내 보더니 어머니가 아닌 여천우에게서 걸려온 전화임을 발견했다.그의 처남이었다.전이진은 뜻밖이라고 생각했다.여천우가 대학에 있을 때만 해도 여운초와 가끔 장난도 치고 했다. 하지만 그 뒤로 여천우는 두 고모의 편을 들지는 않았지만 남매사이의 감정은 원래처럼 사이좋은 시절로 돌아가지 못했다.필경 여운초가 들여보낸 세 사람은 다름 아닌 여천우의 친부모와 새어머니의 딸이였기 때문이다.여천우는 예비 형부에 대한 태도는 그나마 좋았지만 예비 형부의 연락처를 요구한 적이 없었기에 도리상 전이진의 휴대번호를 알지 못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 여천우가 전이진이게 전화를 걸온 것이다.전이진은 뇌를 굴리는 것이 귀찮았다. 여천우가 진심으로 연락할 마음만 있다면 한동호에게 전화번호를 물어보면 이내 알아낼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정 선생님을 아직 만나지도 못했어. 정 선생님께서 오실 때 내가 마침 출장 갔거든. 지금 네 형부가 날 데리러 갔다가 방금 네 형부 별장으로 도착했어. 곧 정 선생님을 만나게 될 거야.”동생은 여전히 여운초를 걱정하고 있었다.이는 여운초를 기쁘게 만들었다.“누나, 결과가 어떻든 낙심하지 마. 정 선생님께서 방법이 없다고 하시면 우리가 더 좋은 의사를 찾아가면 되니까.”여천우는 누나를 위로하고 있었다.정겨울마저 누나의 눈을 치료하지 못하면 정말로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정겨울은 신의의 제자였다. 신의라고 불릴 수 있는 정도면 그 의술이 그 누구보다도 훌륭하다는 의미였다.여운초는 한참을 침묵하더니 오히려 동생을 위로했다.“천우야, 누나 속상하지 않아. 결과가 어떻든 난 다 견딜 수 있어. 어둠 속에서 이렇게 오래 살았으니 이젠 익숙해졌는걸. 네 형부가 억울하지. 그렇게 우수한 분이신데 나와 같이 눈이 먼 여자랑 결혼해야 하니까.”“운초 씨.”전이진은 고개를 숙여 말을 꺼냈다.“내가 뭐 억울할 게 있어. 내가 당신을 사랑하게 된 그날부터 당신 눈이 치료되든 말든 꼭 당신과 결혼하여 여생을 함께할 거라고 다짐했어. 당신이 회복될 수 있다면 더 좋은 거고 회복할 수 없다면 내가 당신 눈이 되어줄게.”여천우가 전화기 건너편에서 말했다.“난 형부의 인성을 믿어. 형부는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니까 아무 생각도 하지 마. 전씨 가문의 가풍이 어떤지 우리 모두 다 잘 알잖아. 누나 자신도 믿고 형부도 믿어봐.”여운초는 감동하여 눈물을 흘릴뻔했지만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꾹 참고 있었다. 그리고 한참 뒤에야 나지막이 대답했다.“알았어. 천우야, 학교에서 잘 지내는 거 맞지? 돈은 있고? 학교 밥은 맛있어? 맛이 없으면 밖에 나가서 먹어. 돈 없으면 누나가 보내 줄게.”“부족하지 않아. 누나가 정기적으로 내 계좌에 생활비를 이체해 주고 있잖아. 나도 아르바이트하면서 돈도 좀 벌고 있어서 충분해.”“돈이 부족해서 아르바이트하는 건 아니고
원림성 A시.전창빈은 모든 요리를 다 하고는 주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휴대전화를 꺼내 뉴스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는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온종일을 바쁘게 보냈다.정확히 말하면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이 전부 오늘 저녁 식사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그리고 저녁이 되어서야 주인공이 돌아왔다.잠시 기다린 후, 전이진이 오후 내내 준비한 요리들이 하나둘씩 하인들에 의해 운반되어 나갔다. 물론 그는 나갈 필요가 없었다.선우민아가 그의 요리를 맛본 후 만족스럽다면 전창빈을 불러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통보도 없이 주방에 머물다가 선우씨 가족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고 떠나면 집으로 돌아야 한다.비록 전창빈은 자신의 요리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지만 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는데도 선우민아의 면담 요청이 없었다.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뉴스를 보며 담담해 보였으나 속으로는 조금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그는 송일우처럼 세 번이나 도전하는 상황은 원치 않았다. 송일우는 몇 년이나 도전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 실패한 뒤로는 다시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신감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점점 들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한편 선우씨 가족들이 이미 식사를 마치고 있었다.선우민아도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던 선우민아의 어머니 한경주가 관심 있게 물었다.“민아야, 이번 지원자가 만든 음식은 어때?”선우민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한경주는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생각엔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채용하는 게 어때?”선우민아의 남동생 선우민기는 의자에 털썩 앉아 배를 만지며 말했다.“누나, 나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이번 요리는 정말 맛있었어. 오랜만에 이렇게 배불리 먹었어.”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선우민기의 배를 가볍게 톡 치며 눈가에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너는 굶은 적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많이 먹었어? 이번만 먹고 다음 끼니는 못 먹을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 좀 앉아 이따
도아영이 홀로 관성까지 찾아온 것도 전이혁을 위해서였다.관성에서 그녀의 안전은 그의 책임이다.앞으로 도아영과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아내 후보였다. 혹여 도아영이 관성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도씨 가문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은 물론 전씨 할머니께서도 그를 혼쭐 내실 것이 분명했다.전이혁은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태윤이 전화를 받자 전이혁이 조심스럽게 부탁했다.“형, 오늘은 형의 스위트 룸에서 하룻밤 자도 돼?”“안방만 빼고 다른 방은 마음대로 써.”전태윤은 거절하지 않았지만 안방 사용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평소 이곳에 머무를 때면 항상 안방을 사용했기 때문이다.“알았어. 고마워. 형.”“도아영 씨는 괜찮아?”“심하게 취해서 토하다가 물 달라고 하길래... 떠날 수 없어서 호텔에서 하룻밤 지내려고. 새벽에 아영 씨를 룸으로 데려다준 후 떠날 계획이야. 같이 묵었다는 사실을 알면 나에게 달라붙을까 봐 겁이 나.”전태윤이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진심으로 도아영 씨와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아. 그분 명성을 망가뜨리면 안 되지.”전이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형, 사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영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이고 할머니의 눈썰미는 틀린 적이 없으셨지. 도아영 씨와 함께 지내보니 나랑 잘 맞는 것 같긴 한데... 왠지 그 ‘여우’랑 함께 있을 때가 더 편안하단 말이야.”“‘여우’라고?”“내 꿈에 자꾸 등장하는 그 여자 말이야. 별명이 ‘여우 같은 여자’거든. 화장을 잘하는 건지... 본명도, 고향도, 행적도 전혀 알 수가 없어. 신비로운 느낌을 주어서 나도 자꾸 정복하고 싶어져.”전태윤이 말을 이었다.“이름도 모르는 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그분이 혹시 만성의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과 연관 있는 거 아니야?”만성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은 모연정의 사촌 형수이자 A시 허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인데 그녀도 이중생활로 유명한 인물이다.허씨 가문
“네.”우빈이는 전태윤의 말을 믿으며 다시 물었다.“이모부, 그 모기는 어디 갔어요?”전태윤은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우빈에게 보여주었지만 우빈은 모기를 찾을 수 없었다.“날아갔어. 이모부가 조금 늦는 바람에 잡지 못했어.”“그래요?”우빈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대답했다.하예정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우빈이가 아무리 영리해도 결국은 어린아이일 뿐, 어른을 이길 수는 없었다.“우빈아, 이모부는 일하러 가야 해. 우리도 집에 가자. 이모부한테 잘 가라고 인사해야지.”우빈은 바로 그의 작은 손을 흔들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모부, 잘 가요!”“집에 가서 빨리 쉬고 이모의 말도 잘 듣고. 이모를 귀찮게 하면 안 돼. 말 잘 들으면 겨울방학에 예진 리조트로 가서 용정이랑 놀게 해줄게.”우빈은 급히 약속했다.“절대로 이모 귀찮게 안 하고 말 잘 들을게요.”“여보, 빨리 일하러 가요. 우리도 갈게요.”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일하러 가라고 재촉한 뒤 운전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말했다.전태윤은 그 자리에 서서 차가 사랑하는 아내를 태우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차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비로소 자신의 차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전이혁과 도아영의 일에 대해서 전태윤은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도아영이 취하면 전이혁이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줄 것이니까.전이혁은 도아영을 그녀의 방까지 데려다주고 외투와 양말을 벗겨 준 뒤 편안한 자세로 눕혔다. 그리고 그가 떠나려던 참에 도아영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옆으로 토해버렸다.전이혁이 쓰레기통을 가져오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이미 바닥과 침대를 모두 더럽혔다. 그는 이 광경을 보자 정말로 토할 것 같았다.흠... 전이혁도 토했다. 그는 입을 막은 채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정신없이 토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코와 입을 가린 채로 나왔다.도아영은 시원하게 토한 뒤 다시 침대에 철썩 누워버렸다.전이혁은 침대 반대쪽으로 돌아가 구토물을 보지 않으려 애썼고 최대한 빨리 도아영을 일으켜 안고
도아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꿈나라에 들어가서 돌아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술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말을 안 듣더니 결국 취했네. 내일 아침이면 정말 고생할 텐데.”전이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도아영의 이마를 쿡쿡 찌르더니 체념했는지 그녀를 안아 들어 로얄 스위트룸 나섰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참! 난 도아영 씨가 어느 룸에 묵고 있는지 모르는데.'그는 걸음을 멈추고 도아영을 내려놓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부축하면서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하예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예정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형수님, 도아영 씨가 묵고 계신 룸 번호를 아세요?”하예정이 대답했다.“저도 잘 몰라요. 그냥 관성 호텔에 묵는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요. 아영이가 취했어요? 잠깐만요. 제가 알아볼게요.”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말했다.“여보, 아영의 룸 번호를 알아봐 줘요. 취했대요. 이혁 도련님이 아영이를 모셔다드리려고 하는데 룸 번호를 몰라서.”전태윤은 표정이 굳었다. 그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하예정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우빈의 손을 잡고 걸어 나갔다가 이내 돌아왔다. 그는 이미 전이혁과의 통화를 끝낸 상태였다.“알아봤어요?”“내가 이혁한테 이미 알려줬어.”전태윤은 여전히 표정이 굳은 표정으로 하예정에게 말을 건넸다.“아까 내가 물어볼 때 프런트 직원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마치 내가 바람피우는 거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내 동생이 도아영 씨를 데려다주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내가 대신 물어보는 거라고 설명까지 했어.”하예정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남편의 팔을 다정하게 끌며 달콤하게 웃었다.“설명했으면 그만이죠.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든 우리 감정엔 아무런 영향이 없는걸요. 제가 의심하지 않으면 되잖아요.”“다음부턴 이런 일 나에게 시키지 마. 이혁의 일은 이혁이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내가 왜 도와줘야 해? 나도 예전엔 아무 도움 없이 오직 내 진심과 깊은 정으로 너의 마음을 얻었는데.”“알았어요.
전이혁은 침묵했다.도아영은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왜요? 전이혁 씨는 그분을 보호하려고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 거예요? 안심하세요. 저는 공정하게 경쟁하고 싶을 뿐이에요. 수작 부릴 생각은 없어요. 저는 그런 건 못해요. 남자 하나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고. 제가 이렇게 남자를 좋아한 건 처음이라서 한번 도전해 보는 거예요. 다른 남자였다면 그냥 양보했을 거예요.”도아영이 눈여겨본 건 전이혁이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이혁의 뒤에 있는 전씨 가문이 마음에 들었다. 전씨 가문의 훌륭한 가풍은 소문이 자자했으니까.전씨 가문의 어르신들은 사상이 모두 개방적이어서 후손들이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지지해 주었다.심지어 반대한다고 해도 다른 집안 어르신들처럼 억지로 가로막지는 않았다.게다가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특히 아내를 아끼기로 유명했고 한번 정한 인연과 결혼은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이런 남자들이 흔치 않았다. 여자라면 누구든 한결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을 것이다.하여 도아영은 꼭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정말 안 된다면 그건 그녀와 전씨 가문의 인연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애초에 노력도 안 해보고 포기한다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도아영은 평생 후회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여자였다.전이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여우’의 이름을 몰랐으니까. 마음의 절반을 뺏긴 주제에 정작 상대방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니...도아영은 그가 연적을 보호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약간의 질투를 느꼈지만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전이혁 씨가 그녀를 보호할수록 저는 더 궁금해지네요. 도대체 누가 저 도아영을 이길 수 있는지. 근데 괜찮아요. 언젠가는 제 연적이 누군지 알게 될 거니까.”그녀는 전이혁에게 잔을 들며 말했다.“전이혁 씨, 자! 우리 한잔하죠.”전이혁은 잔을 들고일어나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잔과 부딪혔다. 그리고 도아영이 단숨에 그 술을 들이마시는 걸 지켜보았다.도아영은 더 이상 전이혁과 사랑에 관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도아영은 요즘도 이런 식으로 자식들의 혼사를 정하는 어르신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요즘은 연애와 결혼이 자유로운 시대인데 아직도 자식들의 혼사를 결정해 주는 집안이 있다고?’도아영은 곧바로 자기 집 안 어르신들을 떠올리더니 다시 묵묵히 조금 전의 의문을 거두어들였다.재벌 가문에서는 많은 혼사가 부모님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대부분 어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곤 한다.그들에게는 결혼의 자유가 많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건 이익뿐이었다. 두 가문 사이에서 이루어진 혼인으로 인해 두 회사에 얼마나 큰 이득을 가져다주느냐가 가장 관건이었다.“그럼 전이혁 씨 할머니께서 왜 저를 선택하셨어요? 저는 할머니를 본 적도 없는데.”도아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그녀는 전씨 할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아마 봤을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도아영을 유심히 관찰하고 알아본 뒤에야 전이혁의 미래 아내로 선택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사진을 전이혁에게 건네주며 도아영에게 구애하도록 하게 한 것이다.“저도 모르겠어요. 할머니께서는 나이가 많으시지만 아직도 자주 돌아다니시니까. 우리가 감당하기도 힘들 정도로 말이죠. 다행히 할머니의 건강은 좋으시고 관리도 잘 되어서 겉으로 보기엔 예순 정도로 보이세요.“전이혁도 할머니가 어떻게 도아영을 선택하셨는지 모른다.도아영만 궁금한 게 아니라 고현과 여운초도 전씨 할머니께서 언제 그녀들을 눈여겨보셨는지 궁금해했었다.“그래서 저를 알게 되었고 저를 쫓아다녔던 거예요? 전이혁 씨가 저에게 한 행동이 애정 공세가 아니라고 하면 당신 스스로도 믿지 못하겠죠?”전이혁은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인정해요. 제가 당신에게 구애했다는 것을.”전이혁은 도아영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모든 면에서 그와 잘 어울렸으니까.하지만...“그런데 왜 한동안 사라지고 저를 무시했어요? 일부러 관심을 끌려는 작전이었던 거예요?”전이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전이혁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도망가려고 해도 너무 늦었다.그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자리에 앉아서 몸만 돌려 옆에 앉은 도아영을 돌아보았다. 전이혁의 깊고 검은 눈빛은 도아영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게 했다.이때 도아영은 몸을 굽혀 천천히 전이혁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전이혁은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도아영이 어떤 향수를 뿌리는지는 몰랐지만 강하지 않은 은은한 향기가 너무 좋았다.“전이혁 씨.”도아영은 그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다.“말해봐요, 듣고 있어요.”그도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대답했다.“제가 한 가지만 물을게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저를 대하는 거예요? 저에게 잘해주는 게 저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예요? 저에게 애정 공세를 하면서 왜 또 저를 무시하는 거죠?”전이혁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한 가지 물음보다 더 많이 물어본 것 같은데.”잠시 침묵이 흐른 뒤로 전이혁이 말을 이었다.“저도 제 마음이 어떤지 모르겠다고 하면 도아영 씨는 저를 나쁜 놈이라고 욕할 거죠?”그는 그녀에게 구애하고 싶었다.전이혁은 도아영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할머니의 눈썰미가 결코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없었다면 전이혁은 도아영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도아영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당당함, 대담무쌍함, 의협심, 기발한 성격, 고요할 때의 차분함과 활발할 때의 성격은 전이혁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았던 것이다.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그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바로 그 ‘여우 같은 여자' 말이다. 도아영 같은 재벌가 따님이 아니라.도아영의 아름다운 눈이 반짝이며 전이혁이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못할 것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전이혁을 내려다보았다.전이혁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순간 도아영의 동작과 표정이 마
“예정 언니, 벌써 다 드셨어요?”하예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우리가 좀 빨리 먹는 편이긴 하지. 평일엔 일이 바빠서 먹는 시간도 쪼개 써야 하다 보니 빨리 먹는 버릇이 생긴 것 같아.”도아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예정은 우빈의 손을 잡고 남편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로얄 스위트룸을 빠져나왔고 거기에 문을 닫아주는 센스까지 보였다.전태윤은 경호원들에게도 식사하고 휴식을 취하라고 지시했다.전이혁과 도아영은 이 모든 것이 하예정이 그들에게 특별히 남겨준 기회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제 로얄 스위트룸 안에는 전이혁과 도아영만 남았다.도아영은 와인잔을 들어 우아하게 음미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전이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역시 피할 수 없었군.'전이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도아영 씨,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도아영은 대답 대신 잔을 기울이며 그를 바라만 보았다.‘정말 잘생겼어...'그녀는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잘생겼다는 소문을 들었다. 실제로 본 전태윤도 키가 훤칠한 미남이었지만 지나치게 차가운 인상에, 인사할 때 잠깐 마주친 뒤로는 도아영을 전혀 쳐다보지 않았다.오직 하예정만 바라보는 모습에서 ‘아내 바보'라는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전태윤의 차가운 카리스마와 달리 전이혁은 훨씬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다.전태윤 앞에서 전이혁은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단둘이 있을 때면 전이혁의 우수함이 빛을 발했다. 그는 도아영이 만난 남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였다.전이혁이 잘해줄 때면 도아영은 그에게 정말 빠져들 것만 같았지만 그녀를 소홀히 대할 때면 화가 치밀어 주먹으로 그를 한 대 패주고 싶을 지경이다.‘내가 무슨 애완동물도 아니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애완견이야?'마음 내키면 그녀와 잠시 놀아주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버리는 그의 태도에 도아영은 서서히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전이혁은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전이혁 씨, 왜 자리
하예정은 두 사람 사이의 암투를 모른 척하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좋은 술 두 병 시킵니다. 저는 임신 중이라 못 마셔요. 우리 배 속의 아기 건강 생각해서라도 저는 술을 마시지 못하거든요. 태윤 씨도 술을 잘 마시지 않기 때문에 이혁 도련님이 도아영 씨랑 같이 마실 수밖에 없네요. 도련님, 아영 씨를 잘 모셔야 해요. 저와 태윤 씨가 있으니 도련님이 취해도 괜찮아요. 저희가 책임질게요.”하예정은 도아영에게 윙크했다. 도아영은 슬쩍 OK라는 사인을 보내며 자신 있다는 듯 웃었다.하예정은 그제야 도아영의 주량이 꽤 괜찮음을 눈치채고 안심했다. 하예정은 도아영이 전이혁에게 꼬치꼬치 캐묻다가 술에 취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인데 도아영이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니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술과 여러ㅓ 요리가 나오자 도아영은 직접 전이혁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자! 전이혁 씨, 건배하죠.”전이혁은 잔을 받지 않고 오히려 도아영의 잔을 가져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도아영 씨, 공복에는 술에 취하기 쉬워요. 이 술은 독해서 마실 땐 괜찮다가도 나중에 훅 가버릴 수 있어요. 먼저 요리들을 좀 드시고 또 국물도 한 그릇 드세요.”그 말과 함께 전이혁은 도아영에게 국물을 떠주었다.“국물부터 드셔보세요.”도아영은 평소 국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전이혁이 떠준 거라 예의상 한 수저 떠먹었다.“하 대표님, 이 국물이 정말 맛있네요. 저 원래 국물을 잘 안 마시는데 이 국물은 진짜 맛있어요.”“그럼 많이 드세요. 우리 집은 항상 식사 때 국물을 준비하는 게 습관이에요.”하예정은 우빈에게도 국물을 떠주며 물었다. 식습관은 바꾸게 하기 어려운 법이다.도아영은 관성의 사람이 아니라서 관성의 식습관과 달랐다.국물을 마시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이 국물이 맛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니 그 국물이 정말로 맛있었던 모양이다.“몇 살이에요? 동갑인 것 같은데.”“하 대표님이랑 같은 해에 태어났어요. 제 생일은 연말이라 하 대표님보다 몇 개월 어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