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누군가가 숨겨준 것 같아. 아니면 어떤 호텔이든 식당이든 이렇게까지 종적을 감출 수 없거든. 그래서 내 생각에는 아마 세력이 꽤 센 사람이 그놈을 보호해 주고 있는 것 같아.”한지혜의 눈살이 순간 찌푸려졌다.‘하정국은 출소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대체 어떤 사람이 지금 그를 도와주고 있는 걸까?’‘그리고 왜 하정국 같은 사람을 도와줄까?’‘설마 도와준 뒤 다른 일이라도 시키려는 걸까?’여기까지 생각이 들던 한지혜는 머릿속에 갑자기 허가은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순간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 같았다.그리고 불길한 예감
허연후는 순간 온몸이 굳어지더니 금세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다시 사진을 빤히 들여다보았다.예전에 권성은한테도 두 사람이 닮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하지만 오늘 보니 닮은 수준이 아니라 거의 한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그는 멍한 얼굴로 한지혜에게 물었다.“아까 급하게 할 말이 있다던 게 이 일이었어요?”한지혜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두 사람이 너무 닮았다고 생각되지 않아요? 쌍둥이가 아닌 이상 너무 이상해서요.”“닮긴 했네요. 근데 저희 어머니는 분명 딸 한 명만 낳았어요.”“
한건우가 답했다.“맞아. 왜?”“마침 저도 시간이 나서 오랜만에 같이 이야기나 할 겸 점심은 집에서 먹을게요.”그녀의 말에 한건우가 웃으며 답했다.“이제 아저씨가 밉지 않나 보지?”“미울 게 뭐가 있어요. 결정은 다른 사람이 했는데. 저 20분 뒤면 집에 도착할 수 있어요.”20분 뒤.한지혜가 거실에 들어서니 허재용과 할아버지가 한창 바둑을 두고 있었다.그녀는 웃으며 다가가 그에게 인사했다.“안녕하세요. 아저씨.”허재용은 그녀를 보자마자 냉큼 바둑알을 내려놓고 반갑게 맞이했다.“지혜야, 아저씨가 너한테 줄 선물이
전화를 끊자마자 하지연은 돈을 가지고 재빨리 그쪽으로 달려갔다.그리고 한지혜에게 자신의 위치를 공유했다.누구보다도 자기 아버지는 돈이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다.돈 문제 이외에 혹시나 다른 목적이 있을까 그게 더 두려웠다.하지만 어머니의 안전을 위해 경찰에 신고는 못 하고 공유기만 켜두었다.혹시나 무슨 일이 터지면 한지혜가 사람을 데리고 그녀를 찾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하지연이 병원 입구에 도착해서 두리번거리며 길을 건너려던 이때, 누군가가 갑자기 그녀의 팔을 낚아채며 귀가에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허연후에게 마냥 고마웠던 하지연은 그가 행복하기만을 바랐다.만약 여동생이 계속 알맞은 심장을 못 찾아 혹시나 죽게 되면 그도 엄청 슬퍼할 것이다.여기까지 생각한 하지연은 결국 그들을 용서해 주기로 마음먹었다.어차피 이 목숨도 애초에 허연후가 구해준 것이다.하지만 자신이 죽으면 그리 좋아하던 고인우도 더 이상 볼 수 없고 자신한테는 항상 다정했던 허연후와 지혜 언니를 못 본다는 생각에 어느새 두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그녀는 가슴을 움켜쥐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다시 심장병이 발작했다는 걸 알고 있지만 지금은
하지연의 정신이 희미해져 갈 때쯤, 갑자기 웬 커다란 그림자가 그녀 쪽으로 달려오더니 다시 하정국을 발로 걷어차면서 차가운 소리로 명령했다.“더 세게 때려!”그러다가 다시 하지연 쪽으로 점점 다가오면서 겨우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그 남자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순간 하지연은 마치 어릴 적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이 사람과 얼굴이 똑 닮은 오빠가 자신의 차가운 몸을 끌어안고 끊임없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그녀는 그 남자아이를 오빠라고 불렀고 오빠라는 사람도 그녀의 말에 답했다.“가은아, 조금만 버텨. 오빠가 꼭
그리고 간호사에게 몇 가지 주의 사항을 더 말해준 뒤 한지혜의 손을 잡고 자기 사무실로 들어왔다.허연후는 의사 가운을 벗고 한껏 피곤한 얼굴로 한지혜를 품에 안더니 그녀의 어깨에 턱을 대고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지혜 씨, 저 너무 피곤해요.”며칠 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한 상황인데 방금 장시간의 수술까지 했으니 아무리 철인이라도 견디기 힘들 것이다.한지혜는 그런 허연후가 안쓰러워 그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줬다.“물 한 잔 따라줄게요. 마시고 조금 쉬어요.”“아니요. 이렇게 지혜 씨가 안아주면 괜찮을 것 같아요. 지혜 씨가
전화가 끊어지자마자 다시 울렸다.발신인을 확인한 허연후는 재빨리 통화 버튼을 눌렀고 수화기 너머에서는 허재용의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연후야, 지금 네 여동생의 심장병이 또 재발한 것 같아. 이번엔 좀 심각해 보여. 내가 이미 응급 실에 전화는 해놨는데 지금 빨리 수술하게 준비해.”그의 다급함에도 허연후는 덤덤하게 답했다.“사람이 그리 쉽게 죽나요? 걱정하지 마세요.”분명 이건 허가은이 짠 음모인 게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하지연을 납치한 뒤 자기 병이 재발했다고 거짓말해서 그 심장 수술을 자신이 받으려는 것이다.전
그 메시지를 받은 송학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리고 간단히 답장을 보냈다. [언제든지 괜찮아. 차 비서가 정해.] [오늘 저녁 괜찮을까요? 제가 아림이랑 천우 데리고 대표님이 좋아하는 그 레스토랑에 갈게요.] [그래. 좀 이따 보자.] 간단한 문자를 보며 ‘차 비서'라는 익숙한 말에 차서윤은 마음속에 물결이 일렁였다. 몇 년 전의 몇 장면이 떠올랐다. “차 비서, 커피에 왜 설탕을 넣은 거야?” “인생이 이미 너무 쓰니까요. 그걸 더 쓰게 만들 이유가 없잖아요.” 송학진은 커피를 한입에 다 마
차서윤은 싸늘한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 “한마디만 더 욕해봐. 출발하기 전에 이미 예약 전송 설정을 해뒀어. 지금이라도 바로 메일 보낼 수 있어. 누가 이 업계에서 사라지게 될지 한 번 볼까.” 그 말을 들은 이장우는 조금 겁이 났다. 그는 줄곧 차서윤이 그저 만만한 상대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 여자가 자신도 모르게 증거를 남겨뒀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를 악물며 거부하려던 순간 그의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발신자를 확인한 그는 급히 전화를 받았다. “송 대표님, 죄송합니다. 이 여자가 좀 말을
선생님이 웃으며 말했다. “아, 그러면 아림이 아버지시군요. 어쩐지 가족분들 모두가 그렇게 잘생기셨더라고요.” 천우는 고개를 들어 송학진을 향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외삼촌, 이건 제가 한 말이 아니에요. 선생님이 말씀하신 거예요!” 송학진은 웃으며 천우의 머리를 가볍게 톡 치고는 별다른 설명 없이 말했다. “자, 이제 동생 손잡고 얼른 들어가. 선생님 말씀 잘 듣고 말썽부리지 말고. 알았지?” 천우는 바로 아림의 손을 꼭 잡고 의젓하게 오빠다운 말투로 말했다. “동생아, 이제부터 오빠가 널 지켜줄게
차서윤은 이 제안을 거절하고 싶었다. 송학진에게 아무런 부담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송학진을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송 대표님, 좋은 제안 감사하지만 저는 가지 않겠어요. 이장우 쪽에서 일하는 건 그만두고 제 능력으로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일을 구하는 건 어렵지 않을 거예요. 단지 송 대표님께 부담드리고 싶지 않아요.”송학진은 그녀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차서윤, 정상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너의 전 직장 상사였고 지금 더 좋은 기회를 제시하는 건데 왜 거절하는 거야? 나한테 뭔가 숨기고 있는 일이
그 말을 들은 송학진은 눈이 촉촉해졌다. 그는 이 작은 아이가 그런 장면을 목격하고 그로 인해 마음에 얼마나 큰 상처를 입었을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지난 3년 동안 차서윤과 그녀의 딸이 어떤 삶을 살아왔을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는 아림을 꼭 끌어안고 큰 손으로 아림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 오늘 밤은 아저씨가 같이 있어 줄게.” 그는 아림을 다른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며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눈 감고 자. 아저씨는 계속 여기 있을 거야.”
정말 짐승 같은 놈이네!그는 바로 아이를 안심시키려고 말했다. “너희 엄마는 괜찮아. 술을 많이 마셔서 탈수된 거야. 링거 맞으면 금방 나을 거니까. 조금 있으면 엄마를 볼 수 있을 거야. 알겠지?”아림은 이해심이 깊은 아이였다.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저씨, 제가 암호를 하나 알려줄게요. 제가 문을 열어줄 때 그 암호를 말해야 문을 열어줄 거예요. 아니면 절대 문을 열지 않아요.”그 말을 듣고 송학진은 이 아이가 더욱 안쓰럽게 느껴졌다.그는 생각할 것도 없이 이 아이가 자주 혼자 집에 있을 거라는 걸 알 수
얇은 검은 천 아래로 드러난 여자의 새하얀 피부가 눈길을 끌었다. 그녀는 침대 위에서 몸을 자꾸 비틀며 저항하는 듯했지만 어쩐지 보는 이를 자극하는 모습이었다. 그 광경을 본 송학진의 눈빛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그는 곧장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눈을 가리고 있던 검은 천을 거칠게 벗겨냈다. 막 꾸짖으려던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눈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 그는 멈칫했다. 그녀의 입술은 떨리고 있었으며 이를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간신히 힘을 내어 부드럽고 연약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제발... 저를 건드
송학진은 즉시 아버지를 위로하며 말했다. “아버지, 인제 그만 우세요. 우리 작은 공주님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랄 수 있게 우리가 수아에게 못 줬던 사랑을 아이들에게 두 배로 주면 되잖아요.” “그래! 내 돈은 전부 세 아이한테 쓰겠다. 어차피 너는 결혼도 못 할 테니 네 몫으로 남겨둘 필요도 없겠지.” “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결혼을 못 한다니요? 언젠가 아내랑 아이들까지 데리고 올지 누가 알아요?” 이 말을 듣고 육문주가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그것도 나쁘지 않지. 천우가 너랑 아림 엄마랑 잘되
송학진은 바로 일어나 송군휘를 부축하며 말했다.“아빠, 급해 마시고 제가 부축할 테니 함께 마중 나가요.”“그래. 빨리 가자.”두 사람이 별장에서 나오자 조수아와 육문주는 이미 아이를 안고 차에서 내린 뒤였다.송군휘와 송학진이 다가오는 것을 본 조수아는 순간 눈빛이 어두워지며 송학진을 불렀다.“오빠.”그리고 이내 시선을 다시 송군휘 쪽으로 돌렸다.초점 없는 눈으로 조수아와 육문주의 방향을 보고 있는 송군휘는 많이 늙은 것 같았다.송군휘는 어색하면서도 조심스럽게 웃고 있었다.조수아는 겨우 입을 떼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