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아침 일찍, 시후는 장을 보러 나가려고 하는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진설아였다.진설아는 "은 선생님, 혹시 지금 집에 계세요?"시후는 “네, 지금 집에 있습니다만.. 저에게 볼일이 있나요?"라고 물었다.진설아는 "아, 다름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한약재를 좀 전해 달라고 하셨거든요.. 얼마 전에 송 대표님께서 주문하신 약재라고.. 언제 여유가 되실 지 몰라서 제가 이렇게 먼저 확인하려 연락드렸어요."유나는 지금 작업실 일 때문에 외출을 했고, 장인 어른은 장모와 함께 별장의 리모델링과 인테리어가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하러 나갔기 때문에 시후는 지금 혼자 집에 있었기에 괜찮았다."지금 괜찮습니다. 집으로 오시겠어요?"진설아는 다급하게 "아! 그럼 은 선생님, 곧 가겠습니다!"라고 말했다.얼마 뒤 시후는 벨이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그가 문을 열자, 길게 늘어뜨린 웨이브 헤어 스타일에 베이지색 원피스를 입고 있는 아리따운 외모의 진설아가 서 있었다. 그녀는 현관문 앞에 커다란 트렁크를 둔 채 수줍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아... 은 선생님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죠? 진설아예요, 절 기억하고 계실지는 잘 모르겠지만..."설아는 지금 시후의 앞에서 매우 긴장한 채 서 있었다.어제 아버지와의 대화 중에 아버지가 자신에게 은 선생을 사위로 맞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말한 후부터, 그녀는 밤새 뒤척이며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머릿속은 온통 시후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이제 그녀도 이성에 많은 관심이 생길 나이였기에 그녀의 마음은 더욱 불타올랐다.어느 누가 잘생기고, 재력 있고, 능력도 좋은 남자를 남친이나 남편으로 삼고 싶지 않겠는가?그녀가 주위를 보아도 시후와 수준이 비슷한 남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러니 그는 정말 차원이 다른 사람이었다.사실 그녀의 아버지는 시후와 썸이 있기를 바라셨지만, 그런 압박이 아니더라도 설아는 그에게 반할 수밖에 없었다.시후는 설아가 왜 이
설아가 트렁크를 열자, 최고급 한약재들이 시후의 눈을 사로잡았다.심지어 시후 조차도 연줄이 없으면 절대 구할 수 없는 약재들이었다!시후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아니.. 어떻게 진 선생님께서 이렇게 좋은 약재를 많이 구해주신 겁니까?"설아는 재빨리 대답했다. "아, 저희 천진 그룹이 여러 가지 사업에 발을 담그고 있다는 걸 아직 모르셨죠? 그 사업 중 하나가 바로 한약재 유통업입니다.. 저희 집안이 통일 신라시대부터 대대로 약재상이었거든요.. 제가 알기로는 저희 조상님들이 8세기? 정도부터 일본으로 신라 인삼을 수출하셨다고 알고 있어요.. 고려인삼 아시죠? 그 신라시대의 인삼이 나중에 고려시대에 가서 유명한 고려인삼이 되었던 거래요.. 그래서 저희 집안은 그 때부터 약재를 수출하고, 수입하는 일을 하게 되었죠.. 그러니 국가를 따지지 않고 최고의 약재들을 구할 수 있도록 수없이 많은 유통망을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설아는 또 다시 다급하게 말했다. "아 참!! 저희 아버지가 은 선생님께서 앞으로 필요하신 어떤 약재라도 말씀만 하시면 전해주겠다고 하셨어요! 만약 말만 하시면 저희 천진 그룹은 최선을 다해 은 선생님의 요구 사항을 만족시켜 드리겠다고요!”시후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그는 우연히 《구현보감》을 얻어 읽어본 이후로 그 책의 신비함에 매료되었다. 그 책에는 약을 정제하는 기술과 처방은 매우 많았지만, 약재들은 기재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계속해서 이 재료들과 관련된 것 때문에 많은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진원호의 집안이 그렇게 오래 된 약재상이었다니!그러자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좋아요, 좋아! 앞으로 협조를 해주시면 제가 환약을 만드는 일이 훨씬 수월해질 것 같네요!!”설아는 시후의 이야기를 듣고 잠시 동안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어 땅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시후는 그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했다. "어.. 왜 이러는 거예요?? 얼른 일어나요!!"설아는
진원호도 진설아도, 그저 환약은 오직 한 알 만을 바라고 있었을 뿐이다.그들이 보기에, 그렇게 뛰어난 효과의 약을 하나만 얻어 오더라도 이미 대단한 일이었기 때문이다.이런 신비한 약을 손에 넣었으니, 앞으로 그들은 만약 숨이 꼴딱 넘어가는 사람이라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위기의 상황에서 사람을 구해낸다는 것은, 그들에게 매우 큰 의미가 있다.하지만 어느 누구도 시후가 두 알을 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설아는 시후의 말을 듣고 벼락을 맞은 듯 놀라 잠시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그녀는 아름다운 눈으로 시후를 바라보다가 커다란 눈에서 뚝뚝 눈물 방울을 떨어뜨렸다.설아는 눈물을 흘리며 "선생님... 정말이에요?""왜요? 제가 설아 씨를 속이는 게 두려워서 그러세요?"“아니요! 아니에요오!!!” 설아는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고, 그 눈물 방울을 모두 흩날려 버렸다. 시후는 그런 설아가 귀여워 보였다.설아는 흐르던 눈물을 닦으며, "그저 믿을 수가 없어서요... 정말 감사합니다! 너무 감사해요!!"라고 말했다.말을 마치자 설아는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그녀는 아마 자신의 아버지가 여기에 있었더라도 시후의 이야기를 들었다면 반드시 이렇게 인사를 했을 거라고 생각했다.시후는 흥분한 그녀의 모습에 빙긋 웃으며 "그럼 설아 씨 돌아가서 아버지께 말씀드려요, 저는 한 입으로 두 말하지는 않는 사람이라고.. 약을 만든 후에 두 알을 드리겠지만, 앞으로 제가 그룹에 원하는 재료가 있다면, 절대로 날 속이지 말고 정확하게 전달해 주실 것을 바란다고요..”설아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네 선생님, 잘 알아들었어요!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그러자 설아는 얼굴이 방그레 붉은 사과처럼 변했다. 그리고는 수줍게 말했다. "음.. 선생님.. 앞으로는 그냥 설아라고 불러 주시면 될 것 같아요.. 그리고 말도 편하게 해주세요.."시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설아야. 그럼 이제 일어나는 게 좋겠어.”
설아는 비할 바 없는 설렘을 안고 기쁨에 날뛰며 집으로 돌아왔다.진원호는 애타게 딸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딸이 이번에 약을 구하러 가는데, 시후가 과연 동의할 것인지 확신이 없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사실 목숨을 다 바쳐 시후의 명에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시후가 혹시나 자신의 기업을 얕볼까 봐 두렵기도 했다.천진 그룹은 로이드 그룹보다는 그 유통망과 영향이 조금 더 큰 편이었지만, 이룸 그룹에는 훨씬 못 미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게다가 최근 시후가 이룸 그룹과 관계가 좋아 보였기에 감히 자신들의 실력을 보여줄 기회가 있기라도 하겠는가?안절부절 못하고 있을 때 설아가 집으로 돌아왔다.설아의 차가 별장의 뜰에 멈추자 진원호는 쏜살같이 달려 나왔다.마침 설아가 차를 세우고 문을 밀고 차에서 내리자 진원호는 다급하게 "설아야, 어때? 선생님께서 허락하셨니?!"설아는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 은 선생님이 허락하셨어요!! 주시겠대요!!”"잘 됐다."진원호는 흥분해서 한바탕 크게 웃었다. 이렇게 마음이 흥분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이때 설아는 "아빠, 그리고 그거 아세요? 은 선생님이 우리에게 환약을 만들면 두 알이나 주겠다고 하셨다고요!!"라고 말했다."뭐??!" 진원호는 갑자기 어안이 벙벙해졌다."두 개?! 은 선생님은 우리에게 그 대단한 약을 두 알씩 준다고 하셨다고? 잘못 들은 거 아니야?!” 진원호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설아는 이때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말했다. "진짜 두 개나 준다고 하셨다니까요?? 잘못 들은 게 아니에요!!""세상에!" 진원호는 왈칵 눈물을 흘리며 "은 선생님, 우리를 인정해주시는 겁니까?"라고 하늘에 대고 물었다.설아는 바삐 "은 선생님이 앞으로 약재의 수요가 있을 것이니, 우리에게 잘 전해 달라고 하셨어요. 잘 부탁드린다면서.."라고 말했다.진원호는 "설아야 정말 좋다. 이렇게 되다니 정말 잘 됐어! 은 선생님이 우리 천진 그
시후가 약을 갈아야 하는 일은 몇몇 상위층 대기업과 관련해서 일어나고 있었다.로이드 그룹의 대표 임 대표, 그리고 여러 재벌가에서도 이 소식을 들었다.그들 대표는 모두 참지 못하고 시후에게 약을 구하려 했지만, 막상 입을 열 낯이 없었고 그저 입을 한 번 열어 볼 사람은 임 대표 한 사람뿐이었다. 임 대표는 자신감이 있었다. 왜냐하면 자신은 이미 시후에게 충심을 표했고, 심지어는 엄청난 금액의 별장도 시후에게 선물했기 때문이었다.그래서 그는 오후에 시후네 집으로 달려가 집에 있는 틈을 타 무릎을 꿇고 환약을 구할 생각이었다. 분명 시후는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아무튼 지금은 아무래도 자신이 쓰기 좋은 사람이니까.. 자신의 아들은 어리석은 짓을 했지만 이미 계산할 것들은 다 해버렸기에 지금 그는 고분고분하게 시중을 들고 있으니 시후가 그렇게 인색하지는 않을 것이다.그런데 임 대표는 시후에게 확답을 받았다. 그는 감격하여 시후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부자인 사람일수록, 가진 것이 많을 수록 죽음을 두려워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환약은 그들에게 있어 그야말로 만병통치약이었기에 누구나 맹신할 수밖에 없었다.임 대표에게 승낙하고 그를 보낸 후, 시후는 집에 있던 일부 약재를 꺼내서 환약 한 무더기를 제련하였다.이번에, 그는 약재의 10분의 1만 써서, 30알을 만들어냈다.게다가, 이번 약은 지난 번 보다 재료들이 많이 좋아져서 약효가 아마 10배 정도는 더 높을 것이다.그전 같으면 거의 대부분 중간 정도의 내상을 치료할 수 있었을 텐데. 이번 약은 아무리 치명적인 내상이라도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최 선생처럼 오랜 고질병을 앓은 사람이라도 반 알만 씹어 삼키면 그 병을 완쾌할 수 있을 것이다.만약 살인자에게 쫓기 더라도, 이 약을 먹으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것이고..약을 다 정련한 후에, 시후는 20알을 남기고, 10을 각각 포장해서 송민정, 최 선생, 진원호, 임 대표에게 전화로 알려주었다. 그리고 오늘 밤 헤븐 스프링스
시후가 참지 못하고, 민정을 몇 번 더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민정은 오늘 정말 깜짝 놀랄 정도로 아름다웠다.그녀를 유나와 비교하면, 두 사람은 생김새와 체격이 거의 비슷하지만 민정의 풍격과 아우라는 자신의 아내보다 훨씬 나았다. 민정은 이룸 그룹의 자제라 그런지 그녀가 내뿜는 아우라는 결코 범상치 않아 보통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설아는 이때도 얼굴을 붉히고 시후에게 다가가 예를 표했다.민정처럼 성숙하고 지적인 아름다움과 달리 설아의 자태는 색다른 느낌이었다.설아는 옅은 화장을 했는데, 그녀는 무술을 익혀 본래 빙산의 눈꽃과도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러나 마음속에 시후가 들어 앉은 그녀는, 봄 햇살 속에 피어나는 꽃송이 같았고 조금씩 여리여리함과 섬세함을 함께 뽐냈다.그녀가 시후를 바라보니, 두 뺨에 절로 새빨간 빛이 떠올랐다.그러자 민정의 눈동자에 어른거리는 뭔가가 있었다. 그녀는 육감적으로 설아를 경계해야겠다는 걸 느꼈다.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천진 그룹의 이 진설아라는 아이.. 설마 은 선생님을 마음에 두고 있는 건가? 할아버지께서도 은 선생님을 이룸 그룹의 사위로 만들어야 한다고 하셨는데.. 설마 저 설아라는 아이도 내 마음과 같은 거야?!’시후는 민정과 설아의 속마음을 모르고 그저 미소를 건네며 말했다. “앞으로 기억하세요.. 저와 함께 지내면 허례허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모든 것을 가볍게 여기니, 그냥 잘 지내기만 하면 그게 제일 좋지 않겠어요?”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듣자 얼른 손사래를 쳤다."은 선생님은 어떤 분이신데요.. 저희가 공손하게 모셔야지요!!"임 대표도 "은 선생님은 거의 탑급 아니십니까? 또 기다리면 이런 일이 있을 테니 군소리 않고 그냥 기다리고만 있겠습니다!”최 선생은 참지 못하고 "은 선생님은 의술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으신데.. 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미 선생님의 실력에 감탄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존경할 수 밖에 없지요..”그러자 시후
이렇게 많은 거물들이 한자리에 모였으니, 이화룡은 감히 큰소리로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설령 그가 가지고 있는 헤븐 스프링스라고 할지라도, 그는 그저 시후 앞에서 꼬리를 흔들며 자신을 한 번 더 쳐다보길 바랄 수밖에 없는 것이다.시후는 이화룡이 안절부절 못하며 마음을 쓰는 것처럼 보이자 빙긋 웃었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혹시 함께 하실래요?"이화룡은 시후의 말에 "아, 감사합니다!! 하지만 전 그저 선생님과 함께 일하는 것만으로도 정말 영광입니다!”시후는 고개를 약간 끄덕인 뒤 주인공 자리에 앉았다.이화룡은 그제서야 깍듯하게 "선생님 혹시 다른 분부가 있으십니까? 그냥 부르시면 제가 바로 준비해드리겠습니다.”말을 마치자, 그는 조심스럽게 룸에서 나가, 마치 웨이터처럼 다이아몬드 룸 입구를 지켰다.이화룡은, 서울에서 유명한 조폭 두목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겉으로 봐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시후와 밥을 먹는 이 거물들은 저마다 대단한 인물들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의 신분으로는 아직 테이블에 합석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고, 그저 시후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 만으로도 이화룡에게는 행복한 일이었다.시후가 자리에 앉자마자, 민정이 뒤를 따르더니 바로 시후의 오른쪽 자리에 앉았다.두 사람은 바싹 붙어 있었기에, 시후는 민정의 은은한 체취를 가까이에서 맡게 되었다.원래 식사 예절에 따르면, 가장 VIP가 주좌석에 앉은 뒤 그 다음 귀빈이 VIP의 양쪽에 앉기 마련이다.이 중에서 이룸 그룹이 가장 권력이 강하니 이룸 그룹의 대표인 민정이 당연히 시후와 함께 앉아야 했다.그러니 이 때 누가 시후의 다른 편에 앉을 수 있을지.. 속으로 서로 싸우고 있었다.이때 진원호는 설아를 밀치고, 빙그레 웃으며 시후에게 말했다."선생님, 당신은 신통하신 분입니다. 그러니 우리 딸 설아가 당신을 우상처럼 여기니, 요 녀석까지 선생님 옆에 앉혀 대접하면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보십니까?"이 말이 나오자, 민정은 보기
자신이 물려받은 의술보다 더 뛰어난 시후의 의술을 익힐 수 있다면 소희도 배울 기회가 적지 않을 것이다.사실 이것도 그가 소희를 데리고 식사에 참석한 목적 중의 하나였다. 물론 다른 목적은 시후에서 약을 구하는 것이었지만..그는 반평생을 자신의 상처에 시달렸는데, 지금은 마침내 그것을 일거에 완치시킬 기회가 생겼다.이를 생각한 최 선생은 소희에게 깊은 눈빛을 보내며 시후와 친해질 기회를 엿보라고 했다.소희가 어찌 외할아버지의 생각을 모를 수 있으랴, 그녀의 두 뺨에는 새빨간 빛이 떠올랐고, 그녀는 곧 부끄럽고, 뜨거워졌다.소희는 고개를 숙였지만 이내 속에서는 파도가 일었고, 고개를 들어 시후를 바라보며 손가락을 비비 꼬았다.시후는 그녀가 만나 본 가장 대단한 의사로, 인품이나 용모나 다 상급이며, 세상에 보기 드문..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다만 마음속으로는 자신이 어찌 시후와 어울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소희 외에도 설아와 민정 역시 시후를 바라보는 눈빛이 반짝였고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시후는 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못한 채 사람들을 보며 웃더니 잔을 들어 보이며 소리쳤다. "여러분, 제가 이곳에서 여러분을 알게 된 것도 인연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함께 해야 할 일이 많아요!"그의 손이 막 움직이자 테이블에 있던 사람들도 한 발 늦을까 봐 분분히 잔을 들었다.민정은 급히 시후에게 "은 선생님이 너무 겸손하셔요.. 그냥 무슨 일이 있으시면 알려주세요.."라고 말했다.최 선생 역시 "은 선생님은 의술이 천하에 달하셨고, 의술이 신통하여 저도 그저 놀랄 따름입니다.. 그러니 제가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시후는 싱긋 웃으며, "됐어요... 하하. 그럼 모두 이 잔을 비우시지요!"라고 말했다.“건배!!”여러 사람들은 함께 술잔을 기울인 뒤 공손히 잔을 들었지만, 시후를 쳐다보았다.시후는 이때 잔을 내려놓은 뒤 품에서 상자를 꺼냈다.이내 사람들은 모든 동
유가휘는 그동안 홍콩에서 여러 연애 관련 스캔들로 이름을 날렸고, 그와 사귀었던 모든 여성들은 마지막에 헤어지더라도 여전히 그를 보기 드문 신사라고 칭찬하곤 했다. 로맨틱한 재벌들은 많지만, 유가휘처럼 행동하는 이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이때, 홍콩은 이미 깊은 밤이었다. 유가휘는 비단으로 만든 잠옷을 입고 서재에 앉아 집사가 건넨 자료를 읽고 있었다. 자료를 몇 번이나 훑어본 그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 자식을 이렇게 오래 찾아다녔지만 못 찾았는데, 뉴욕의 한인 타운에서 식당을 운영하며 숨어 있었다니! 보아하니 꼴이 완전히 초라해졌겠군! 만약 그를 본다고 해도 아마 못 알아볼 정도일 거야!”집사는 급히 말했다. “대표님, 이중열이라는 자는 정말로 완벽하게 숨어 있었습니다. 들리는 말로는 20년 넘게 거의 면도를 하지 않고, 머리도 길게 기르며 분위기를 상당히 바꿨다고 하더군요. 이번에 미국 경찰이 그의 자료를 조사하지 않았다면, 그의 행방을 찾기도 어려웠을 겁니다.”유가휘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런데 미국 경찰이 왜 그를 조사했지? 미국에서 무슨 범죄라도 저질렀나?”집사가 대답했다. “제 정보통에 따르면, 며칠 전 뉴욕에서 일어난 사건과 관련해 경찰이 그를 의심한 것 같더군요. 게다가 미국에서 불법 체류자 신분이라 경찰이 그의 신원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홍콩에서의 과거 자료를 찾아낸 것 같습니다.”유가휘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이 멍청한 자식! 난 늘 그 놈의 뛰어난 두뇌로 분명 새로운 신분을 얻어 금융이나 주식 같은 본업으로 돌아가 재기를 할 줄 알았는데.. 그런데 이렇게 초라한 식당이나 운영하며 살고 있다니, 정말 한심한 놈이군!” 사실, 유가휘는 사람들에게 보이는 신사적인 모습과 달리 소심하고 앙심을 품는 성격이었다. 따라서 이중열에 대한 원한을 그는 지금까지 잊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중열이 너무 철저히 숨어 있는 바람에 오랜 세월 동안 그를 찾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유가휘가 사랑했던 여인은
이중열의 신분은 확인되었지만, 이는 오히려 제이크 한에게 약간의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그는 좀 더 특이하고, 뭔가 음모가 숨겨져 있을 법한 정보를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고 받은 내용은 그의 이중열에 대한 의심을 완전히 불식시키는 내용이었다. 베테랑 경찰관으로서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현재를 위장할 수 있을 지는 몰라도, 과거를 완벽히 숨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많은 범죄자들은 과거를 지우고 모두가 존경하는 성공한 인물이 되었음에도, 결국 과거의 죄로 인해 감옥에 가게 되는 것이다.20~30년 전의 이중열에게 일어난 일들까지 밝혀졌으니 그와 혜리의 관계를 충분히 증명할 수 있었다. 따라서 혜리가 그의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는 것도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또한 혜리가 식당에서 식사 중 우연히 안충주가 아버지의 건강이 위독한 상황을 언급하는 것을 듣고, 먼 길을 달려 약을 전달하러 온 것이라면, 이 역시도 납득할 수 있을만한 일이었다.이중열이 왜 CCTV의 하드웨어를 고의로 파손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제이크 한은 합리적인 설명을 할 수 있었다. 혜리는 유명한 스타이고, 이중열 역시 평범하지 않은 과거를 가진 인물인 만큼, 그는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혜리의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CCTV를 파손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 모든 일들이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었으므로, 이 노선은 더 이상 추적할 필요가 없어졌다.결국 제이크 한은 경찰이 블랙 드래곤의 단서를 통해 사건을 더 깊이 파헤쳐 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현재로선 블랙 드래곤이 가장 분명한 수사 방향이었다.그러나 부하의 목소리는 약간 무기력했다. “형님, 오늘 후임자인 브루노가 우리와 회의를 했습니다. 이 사건은 조사 방향을 피해자들의 신원 확인과 피해자 납치 사건의 구체적인 경위 조사로 완전히 전환하기로 했습니다. 페이셔스 그룹 쪽도 윗선과 이미 이야기를 끝났습니다. 그래서 블랙 드래곤에 대한 조사는 사실상 중단될 겁니다.”제이크
안충주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우리 그룹이 이 카펫 하나를 교체하는 데 드는 비용이 우리 총 자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네가 집에서 쓰레기통에 새 비닐봉지를 끼우는 정도와 비슷한 거야. 쓰레기 봉투 갈 때 아깝다고 생각하냐?”“젠장....” 제이크 한은 혀를 차며 욕설을 내뱉었다. “또 폼 잡고 있네..”안충주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난 사실대로 말한 것뿐이야.”이야기를 나누며 일행은 차례로 한식당에 도착했다. 안산은 제이크 한을 불러 자기 옆에 앉도록 했다.안태풍이 미리 지시한 덕분에, 일행들이 자리에 앉자마자 직원들은 준비된 음식을 곧바로 가져왔다. 안태풍은 직접 청주 한 병을 가져오게 하여, 형과 함께 제이크 한에게 술을 권하며 기분을 풀어주려 했다.안산은 제이크 한이 처한 현재 상황에 대해 계속해서 신경을 쓰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하지만 제이크 한은 상황에 대해 자세히 말하기 곤란했기에 그냥 최근 몇 가지 큰 사건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고 막연하게만 대답했다. 안산은 그가 더 이상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을 보고 더는 묻지 않았다.제이크 한은 그의 성격 때문에 평소에 친구가 많지 않은 편이었다. 게다가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고, 아버지 홀로 그를 키웠으며 재혼도 하지 않았기에 형제자매도 없었다. 최근 몇 년간 그의 아내가 아이를 데리고 휴스턴으로 떠난 후, 혼자 뉴욕에 남아 있었기에, 제이크 한은 더욱 외롭게 생활했다.비록 아버지 세대부터 그와 Samson 그룹은 친분이 두터웠지만, 신분 차이가 커서 제이크 한은 그들을 자주 방문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만약 최근 안충주가 한국에서 회춘단을 구입하다가 충격을 받지 않았고, 제이크 한이 배호영의 납치 사건으로 고민을 하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자주 만날 기회가 별로 없었을 것이다.그래서 지금 Samson 그룹 사람들 속에 앉아 있는 제이크 한은 고독했던 마음에 작은 위로를 받았으며, 억눌려 있던 마음도 조금씩 풀렸다.안충주, 안태풍, 안재남과
제이크 한의 말에서 뭔가 사연이 많음을 느낀 안산은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이야기가 길어도 괜찮아. 밥 먹으면서 천천히 얘기하자고.” 안산은 얼마 전 죽음의 문턱을 넘나든 데다 기억력이 심각하게 저하되어 최근에 미국에서 가장 화제가 되고 있는 사건들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제이크 한을 잘 알고 있었고, 그가 원래 성격이 매우 고집스러우며 웬만해서는 포기하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그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더 궁금해졌다.제이크 한도 몇 마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알았기에 대충 얼버무리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제 별 것 없는 이야기로 괜히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습니다. 대신에 이따 술 한 잔 드시면서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이 말을 듣고 시후의 외할머니가 급히 두 사람을 말렸다. “제이크, 회장님한테 술을 권하면 안 돼. 지금 정신이 이 모양인데 술이라도 마시면 나까지 못 알아볼지도 몰라.”“맞습니다, 맞습니다....” 제이크 한은 급히 깨닫고 사과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생각이 짧았네요.”안산은 웃으며 말했다. “네 놈이 이렇게 풀이 죽은 꼴을 보니, 술을 마시고 싶은 건 사실 너로구나!” 그러고는 안산은 안충주와 안태풍을 향해 말했다. “충주야, 태풍아, 이따 너희 둘이 제이크와 한 잔 하도록 해라. 나는 안 마실 테니.”두 형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버지.”안산은 제이크 한의 숨기지 못하는 우울한 기색을 보며 일부러 진지하게 말했다. “제이크 한! 정신 차려! 지금 이 꼴이 뭐냐? 네 아버지의 예전 모습을 조금이라도 닮아야지 말이야!”그러자 제이크 한은 재빨리 자세를 바로잡고 정중하게 말했다. “예, 회장님 말씀이 옳습니다....”안충주가 이때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 “아버지, 그럼 식사부터 하실까요? 천천히 이야기 나누시죠.”“그래 좋다.” 안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밥부터 먹자.”AB 빌딩 꼭대기 층은 건물 면적만 4천 평방미터에 달해 수백 명이 근무할 수 있을 정
시후의 외할머니는 무기력하게 한숨을 쉬며 단호하게 말했다. “여보, 분명히 말할 게요. 당신이 은 서방을 미워하는 건 내가 어찌할 수 없어요. 하지만 은 서방에 대한 당신의 태도는 앞으로 반드시 바뀌어야 해요!”안산은 완고한 성격이 발동하며 단호히 말했다. “나는 바꾸지 않아! 나중에 내가 죽더라도, 염라대왕이 옥황상제를 불러 나를 심문해도, 은 서방에 대한 태도는 절대 바꾸지 않을 거야!”시후의 외할머니는 화가 나서 말했다. “좋아요! 당신 참 대단하네! 안 바꾼다고요? 그럼 나중에 시후가 돌아오고 가족들이 예선이와 은 서방에 대해 이야기할 때, 시후 앞에서 또 그런 말을 하면 시후는 틀림없이 당신과 연을 끊고, 평생 다시 만나지 않을 거예요! 내가 어렵게 찾아낸 외손자를 당신이 쫓아낸다면, 나도 당신과의 관계를 당장 끊어 버릴 거예요! 믿지 못하겠으면 기다려 보던가요!”그러자 조금 전 까지만 해도 분노로 가득했던 안산은 이 말을 듣자 마치 바람 빠진 풍선처럼 힘이 빠져 버렸다. 그는 아내가 자신과 관계를 끊을 가능성은 없다고 알지만, 외손자인 시후가 돌아왔을 때, 자신이 여전히 이런 태도를 보인다면 외손자가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결국, 누구도 자신의 부모를 모욕하는 걸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에 이르자 안산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침울하게 말했다. “당신 말이 맞아.... 내가 바꿀게.... 꼭 바꿔야지....” 그리고는 안산은 다시 우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죽기 전에 시후를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겠군....”시후의 외할머니는 남편의 태도 변화에 안도하며 부드럽게 위로했다. “걱정 말아요. 내 생각엔 오래 걸리지 않아 시후가 돌아올 것 같아요.”안산은 급히 물었다. “왜 그렇게 확신하는 거야?”시후의 외할머니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은서가 이미 왔잖아요. 그러니 시후도 멀지 않았을 것 같아요. 은서가 이렇게 한결같은 마음을 보여줬으니, 하늘도 감동하여 반드시 시후를 돌아오게 할 거예
안산이 갑자기 화를 내자, 가족들 모두는 서로를 바라보며 어찌할 줄을 몰랐다.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은 안산이 평생 동안 마음에서 떨쳐내지 못한 문제였다는 것을... 그는 Samson 그룹의 당시 능력과 그들의 진심을 생각하면, 은서준이 왜 굳이 한국으로 돌아가려 한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하지만 다른 가족들은 안산의 생각은 너무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은서준을 대할 때 항상 자신이 더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유능한 사장이 100만 달러의 월급을 받고 다른 회사를 다니는 인재에게 100만 달러를 받는 직장을 그만두고 자신이 1천만 달러, 아니 그 이상을 제공할 수 있으니 회사를 옮기라고 하는 것과 같았다. 안산은 이렇게 하면 은서준이 자신을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은, 은서준이 그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다는 사실이었다. 이로 인해 안산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큰 좌절감을 느꼈고, 심지어 그 좌절감은 분노로 이어졌다. 원래 그는 은서준을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물론 은서준의 가문이 Samson 그룹보다 훨씬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는 은서준이 뛰어난 인재라는 것을 알았고, 자신의 세 아들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바로 이러한 인정 때문에 그는 은서준이 Samson 그룹으로 들어오는 것을 간절히 바랐다. 그는 자신의 장녀 안예선만이 가장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은서준은 자신의 딸과 비교해보면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뿐 아니라, 서로를 잘 보완할 수 있는 관계였다. 그러니 만약 그들이 함께 Samson 그룹에 머문다면, Samson 그룹은 분명히 날개를 달게 될 것이며, 시간이 지나면 사우디 왕실이나 로스차일드 가문과 같은 세계에서 유명한 집안들을 뛰어 넘어 세계 정상에 우뚝 서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믿었다.그러나 은서준은 그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은서준은 이미 야망과 포부가 있었고, Samso
이 세상에는 수많은 보험회사와 금융회사가 있지만, 땅값 비싸기로 유명한 맨해튼에 초고층 빌딩을 세운 보험회사와 금융회사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하지만 AB 그룹은 그중 하나였다.Samson 그룹은 비록 로스앤젤레스에서 사업을 시작했지만, 제대로 세력을 키우고 성장할 수 있었던 곳은 두 곳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나는 실리콘밸리이고, 다른 하나는 뉴욕인데, 과거 안예선은 실리콘밸리에서 매우 값싼 가격에 엄청난 잠재력을 가졌다고 판단한 회사들에 투자했다. 그리고 이 투자를 더욱 깊이 있는 자본 운용에 연결하기 위해, Samson 그룹은 미국 금융의 중심인 뉴욕으로 진출하게 되었고, Samson 그룹 전체 핵심이 되는 곳을 이곳에 세웠다. Samson 그룹에는 여러 그룹사들을 가지고 있는데, 투자한 기업들은 셀 수 없을 정도지만 Samson 그룹의 진정한 핵심 그룹은 바로 AB 그룹이었다. AB 그룹이 설립된 이후, 안예선은 실리콘밸리에 투자했던 자금을 AB 그룹과 합병하여, AB 그룹을 미국 최대의 인터넷 벤처 캐피털 기업으로 만들었다. 그와 동시에 AB 그룹은 Samson 그룹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기업이 되었다.시후의 외조부 안산은 은퇴하기 전까지 계속 AB 빌딩에서 근무했다. 이후 그는 경영권을 시후의 둘째 외삼촌인 안태풍에게 넘겼기 때문에, 이곳은 안태풍의 사무실이 되었다. 평소에 로스앤젤레스에서 노부부와 함께 지내는 사람은 바로 시후의 큰외삼촌 안충주 뿐이었다. 그 외에 시후의 둘째 외삼촌 안태풍, 셋째 외삼촌 안재남, 그리고 막내 이모 안유진은 모두 뉴욕에서 일하고 있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아버지의 건강이 점점 악화되자, 다른 가족들도 당분간 자신의 일을 내려놓고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와 아버지의 곁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이다. 안산은 은퇴 이후 노인성 치매로 고생했기에 몇 년 동안 이곳을 거의 찾지 못했다. 오랜만에 다시 이곳에 오니, 그는 잠시 회상에 잠긴 듯 창가로 걸어가 맨해튼의 풍경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건물은 여전
유나는 시후가 말하는 풍수 이론을 이해하는 듯하면서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것은 늘 겉으로 보기에 뭔가 이치가 있는 것 같지만, 동시에 약간 신비로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해서는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어떠한 질문도 하지 않았다. 한편, 아내의 곁에 있는 시후는 속으로 약간의 긴장감과 불안함을 느꼈다. 그는 저녁에 외가 식구들에게 자신의 정체가 노출될 것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뭔가 자제가 안 되고 고향 근처로 돌아온 듯한 미묘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시후는 비록 외가 식구들이 과거에 했던 행동들에 대해 약간의 원망을 품고 있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혈연의 정을 여전히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 오늘 밤은 시후가 지금까지의 시간 중에서 외가 식구들과 가장 가까이 마주하는 순간이 될 것이었다. 따라서 그가 느끼는 긴장감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그 시각, 시후의 외조부모는 자녀들과 함께 맨해튼에 위치한 AB 빌딩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는 동안, 안산은 감회에 젖어 아내와 자녀들에게 말했다. “예선이가 살아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이 빌딩에 엄청난 정성과 노력을 쏟았지만, 이 빌딩을 실제로 사용하기 시작한 이후에는 단 한 번도 와보지 못 했어....”그러자 시후의 외할머니는 급히 말했다. “큰 병에서 회복한 지 얼마 안 됐으니, 너무 슬픈 생각은 하지 마세요. 오늘 우리가 뉴욕에 온 이유를 잊지 마시고요.”안산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우리가 왜 왔더라?”시후의 외할머니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차 안에서 조금 전에 다 설명했잖아요! 오늘 우리는 시후 약혼녀의 콘서트를 보러 왔다고요!”“아....” 안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생각났네.... 시후 약혼녀의 콘서트를 보러....” 그는 말을 마치고 시후의 외할머니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시후도 오나?”시후의 외할머니는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시후는 아직 못 찾았잖아요!”안산은 민망한
시후는 이 이야기를 듣고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외가 식구들이 고은서의 콘서트를 보러 올 가능성이 있다는 것에 대해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었지만, 정말 그가 예상한 대로 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외가 식구들과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일을 피하고 싶어서 시후는 이번 콘서트를 보러 가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내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VIP 박스석도 있었기에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외할머니가 외할아버지까지 모시고 왔다는 말을 들은 그는 말했다. “손님이 오신 것이니, 혜리 씨께서 잘 대접해 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그러자 고은서가 대답했다. “은 선생님,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지금 다른 문제가 하나 더 생겨서요.. 두 노인들께서는 연세도 많으시고, 지위도 좀 특수하니, 관객석에서 제 공연을 보시는 건 적합하지 않을 것 같아요. 제 생각에는 연세 많은 두 분도 역시 VIP 박스석에 모셔야 할 것 같아요. 그래야 편안하게 관람하실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잠시 말을 멈춘 뒤 고은서는 다시 말했다. “그때 제가 지우 언니에게 먼저 은 선생님과 사모님께서 VIP 박스석으로 입장하도록 안내하고, 그 후에 두 분 노인을 들어오시게 하라고 할 생각이에요. 어차피 박스석 내부는 필요한 것들이 모두 다 갖춰져 있어서 공연 중간에 나오실 필요가 없으실 거예요. 공연이 끝나면 지우 언니가 두 분을 먼저 모시고 나가게 할 테니, 양쪽이 만날 일은 없을 겁니다. 이 계획은 어떠신가요?”시후는 잠시 고민한 후, 시원하게 동의하며 말했다. “그 계획 괜찮네요. 양쪽이 동시에 들어오거나 나가는 것만 피하면, 풍수적으로도 문제 없을 겁니다.”고은서는 시후의 말을 이해하고는 말했다. “그렇다면 제가 할머님께 명확히 말씀드릴게요. 그리고 제가 지우 언니에게 선생님과 사모님이 계신 박스석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할머님을 배치하도록 할 게요. 이러면 더 안전할 겁니다.”“그럴 필요 없습니다.” 시후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