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은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얼굴에 미소를 머금으며 말을 했고 서준혁은 그녀를 보며 찌푸렸던 미간을 천천히 풀었지만 눈빛에는 아무런 흔들림이 보이지 않았다.“전 그쪽이랑 이런 재미없는 게임 놀아줄 생각 전혀 없습니다.”서준혁은 말을 마치고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갔고 주현은 그의 단호함에 뾰로통한 표정을 짓더니 발 빠르게 그의 뒤를 따랐다.이신과 신유리는 곧장 화원으로 향했고 멀리서부터 이나와 어느 할머니 한분이 같이 서있는 모습을 발견했다.할머니는 희끗희끗한 머리에 꽃무늬 안경을 끼고 있었고 이신은 신유리에게 할머니를 소개시켜줬다.“내 할머니야.”이신의 할머니는 인자한 인상을 지니고 있으신 분이었지만 나이가 드는 바람에 청력이 좋지만은 않아 그들의 말을 온전히 알아듣지는 못했다.그러나 신유리를 보는 눈빛만큼은 유독 자상하고 즐거워했다.신유리 그녀조차도 도통 자신이 왜 이렇게 나이가 있으신 분들에게 인기가 많은지를 이해하지를 못했다.그녀는 할머니와 조금 동안 얘기를 나눈 뒤, 시간도 많이 흘렀고 기온도 그다지 높지만은 않은 날씨였기에 이나는 할머니를 모시고 방으로 들어갔다.서씨 가문의 사람들은 모두 인물이 출중한지라 어디를 가도 한 눈에 보일만큼 유별났다.주현과 문성경, 그리고 하정숙은 환한 미소와 함께 얘기를 나누고 있었고 옆에는 서준혁과 서창범이 서있었는데 화목하고 단결된 한 가족 같아 보이는 장면이었다.이나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는 신유리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우리 할아버지께서 이번 생일파티에 거의 뭐 이 분야사람들 절반은 넘게 부르신 것 같아, 서 씨 가문은 너도 잘 알지?”“네, 사회생활이라는게 다 이렇죠 뭐.”신유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네가 괜찮다면 됐네.”신유리는 주동적으로 먼저 서준혁을 찾아갈 생각이 눈꼽 만큼도 없었으니 딱히 신경을 쓸 생각이 전혀 없었다.그러나 신유리도 이신의 아버지는 오늘 처음 만났는데 서창범과는 달리 부드러운 미소로 그녀를 반겨주며 자상하게 대해줬다.이신이 신유리를 데려가 인사를
주현의 말투는 누가 들어도 불쾌하기 그지없었고 그녀는 신유리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어갔다.“뭐가 됐든 준혁 씨 아이가 아니면 됐어요, 저랑 그 사람 곧 약혼할 사이라 이 시기에 아이가 갑자기 툭 튀어나오면 귀찮잖아요.”신유리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서있었고 주현이 가까이 다가오자 핸드폰을 꽉 쥐더니 허리를 곧게 폈다.주현 또한 키가 꽤 컸고 거기에 하이힐까지 신은 탓에 신유리보다 더 커보였는데 주현은 신유리를 하대하듯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우리 같은 가정에서는 밖에 여자가 있는 거는 참아도 아이가 있는건 못 참는거 잘 아시잖아요.”주현은 잠시 멈칫대다가 신유리의 배를 힐끔 쳐다보고는 다른 곳에 시선을 돌렸고 그대로 베란다를 떠나버렸다.폭죽은 여전히 화려하고 예쁘게 터지고 있었지만 신유리는 그저 차디찬 바람만 느껴졌다.주현의 경고의 말들을 잘 알아들은 신유리는 평평한 자신의 배를 바라보며 생각했다.[신기하네, 여기 안에 새 생명이 들어있다니...]그 순간,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의 진동이 울렸고 임아중과 곡연이 채팅방에 문자를 보내왔다는 것을 확인한 신유리는 몸을 돌려 베란다를 떠났다.실내에 들어서자 마침 이신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것을 발견했고 그의 손에는 외투 한 벌도 들려있었다.그도 신유리를 발견하고는 발걸음을 천천히 멈추며 말을 했다.“밖에 기온이 낮아서... 난 네가 안 들어온 줄 알았어.”신유리는 멀지 않은 곳에서 환하게 웃으며 서준혁에게 다가가는 주현을 보았고 원래 서창범과 얘기를 나누고 있던 서준혁은 갑자기 고개를 돌려 주현을 쳐다봤다.그리고 늘 엄숙하고 진지한 표정이던 서창범은 주현을 보는 순간 표정이 인자하고 자상하게 바뀌었다.신유리는 그들에게서 시선을 돌리려 이신에게 물었다.“조금 있다 다른 스케줄 있어?”이신은 신유리가 피곤해 보이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들고 있던 외투를 걸쳐주며 말했다.“아니, 이젠 없어. 집에 데려다줄게.”그의 몸에서 나는 은은한 레몬과 같은 향과 갓 밖에서
서창범의 눈빛에 가득한 경계를 본 신유리는 이 상황이 웃기기 시작했다.[아니, 내가 임신한게 도대체 무슨 상관이지?]주현은 얼굴에 미소를 띠며 신유리와 서창범을 번갈아가며 보다가 서창범의 눈빛을 확인하고 나서야 다시 입을 뗐다.“유리 씨, 우리 운명이라면 운명이지 않나요? 나중에 아이 태어나면 제가 정말 잘해줄 자신 있는데... 제일 좋은 이모해줘도 돼요?”신유리는 주현이 일부로 자신을 조롱하고 놀리려는 의도로 말을 한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고 굳이 주현과 엮이고 싶지 않아 대꾸하기가 싫었다.그리고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 하정숙의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현아,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 저쪽에서는 너랑 말도 섞기 싫어하는데 너는 왜 자꾸 치근덕거리려고 해?”“제일 좋은 이모 같은 소리한다, 나중에 너랑 준혁이가 아이 낳으면 그 누구보다 더 잘난 아이일거야. 쟤 뱃속에 아이가 무슨 핏줄일줄 알고?”신유리는 자신을 깔보는 것이 아닌 뱃속 아이까지 건드리는 하정숙의 말에 심기가 불편해졌고 미간을 팍 찌푸리며 입을 뗐다.“하 여사님, 말 좀 가려서 하시죠?”주현은 이런 신유리의 모습이 의외인 듯 그녀를 휙 돌아보았다.하정숙은 날선 신유리의 말에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내가 조심하긴 뭘 조심해? 너 혹시 무슨 수를 써서 준혁이 아이를 임신하고는 아이 엄마라는 명분으로 우리 서 씨 가문에 들어오고 싶은거 아니야?”“신유리, 만약 그런게 맞다면 얼른 그 마음 접기를 바랄게. 네가 보기에는 네 아이가 참 잘나고 소중하겠지만 네 뱃속에서 나오는 아이를 우리 집안사람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을 거야.”하정숙의 말에는 온갖 조롱과 불평불만이 가득했고 신유리는 들끓어 오르는 분노를 꾹 참아보려 했지만 결국 폭발해버리고 말았다.“하 여사님, 망상증 있으시면 얼른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네요. 제 아이는 서준혁 씨, 그리고 서 씨 가문과는 전혀 아무런 상관이 없으니 명심해두세요!”그녀의 표정과 목소리는 주변 공기마저
신유리가 성남에 돌아오고 나서부터는 신기철과 아예 연락을 뚝 끊었었다.그는 예전과 별 다른 점 없이 깔끔하고 신사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고 신유리는 먼발치에서 신기철이 아무런 표정 없이 문성경의 허리를 감싸 안는 것을 두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자연스러운 두 사람의 스킨십은 마치 둘의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암시해주는 것 같았고 신유리의 뜨거운 시선이 신기철에게도 느껴졌는지 그는 신유리쪽을 돌아보았다.그러자 신유리와 눈이 딱 마주친 신기철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버렸다.원래 신기철의 품에 폭 안겨있던 문성경 또한 신기철의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는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신유리를 발견한 문성경은 안색이 조금 어두워지더니 입을 열었다.“신유리 씨? 당신이 왜 여기에...”문성경의 물음에 답해려주던 신유리가 입을 떼기도 전에 신기철이 중간에서 가로채버리며 말을 했다.“선경아, 먼저 들어가서 나 기다려줘. 내가 처리할 일이 생겨서 말이야.”문성경의 시선은 신기철과 신유리 사이를 방황했고 그러다 뭔가 알아차린 듯 물었다.“신유리 씨가 당신이 말한 그 전 와이프 딸이라는 애야?”그녀의 눈빛과 말투는 마치 신기철의 머리 꼭대기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하였다.신유리가 신기철을 다시 볼 때에는 그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문선경을 달래기 바빴다.문선경은 두 사람을 조롱하기라도 하는 듯 피식 웃더니 신기철의 말대로 먼저 안으로 들어섰고 신유리는 신기철과 문선경 사이가 뭐가 됐건 자신이랑 상관이 없으니 그냥 제 갈길을 가려는 생각뿐이었다.하지만 그녀가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기도 전, 뒤에서 급하게 달려오는 발걸음소리와 신기철의 다급한 부름소리가 들려왔다.“유리야, 잠간만! 기다려.”그의 목소리에 신유리는 발걸음을 멈췄고 신기철은 빠르게 다가와 그녀를 옆으로 잡아당기더니 말했다.“할 말이 있어.”신유리는 자신을 당기는 강한 힘에 흔들려 겨우겨우 중심을 잡은 뒤, 호텔 입구 앞으로 시선을 돌렸고 그곳엔 문선경의 모습은 보이지가 않았다.[잘 달랬나
주현은 협박어린 눈빛으로 서준혁을 바라보며 물었는데 그녀의 목소리는 오직 서준혁과 본인만 들을 수 있게 아주 나지막했다.조금 떨어진 곳에 서있던 신유리는 주현이 뭐라고 하는지 전혀 들리지가 않았고 서준혁과 생글생글 웃고 있는 주현을 보다가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때마침 식당 밖으로 나오고 있던 이신은 뒤돌아선 신유리와 마주쳤다.“나와서 너 좀 찾으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 없었네.”이신이 먼저 신유리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여기 야경이 너무 예쁘다던데, 같이 가서 구경이나 할래?”그의 말에 신유리는 마침 바람을 쐬고 싶은 마음에 빠르게 허락했고 식당을 멀리 떠나서야 반응이 온건지 이신에게 물었다.“곡연 씨랑 다른 사람들은?”“조금 잇다가 술집 간다더라, 유명한 가수가 있다나 뭐라나...”신유리는 술집 같은 사람이 많이 모여 있는 장소는 질색이라 이신과 함께 산책을 나온 것이 꽤나 잘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곡연 씨가 너 기분 안 좋아 보인다고 하던데... 맞아?”이신이 머뭇거리며 계속 물었다.“왜 안 좋은지 나한테 말해줄 수 있어?”신유리가 아까 나간 시간에 이신은 마침 걸려온 전화를 받으려고 자리를 비웠고 그러는 바람에 서준혁과 주현, 그들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었다.신유리는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입을 굳게 닫아버렸고 신기철과 문선경 사이는 솔직하게 말해서 자신이랑 큰 상관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하지만 자꾸만 신기철이 말한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내가 성남으로 돌아가지 않는건 다 이유가 있어서야, 나도 힘들다고!]신기철이 힘든 이유는 다 신유리 때문이었을까?성남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사람이 지금 성남을 건너뛰고 바로 시한에 떡하니 머물고 있으니 말이 안 되는 일이지 않는가?신유리는 신기철에 대한 믿음과 희망 따위는 이미 없어진지 오래였지만 그의 말을 생각하고 그의 모습을 떠올릴수록 마음이 불편했다.다음날 새벽, 신유리는 눈을 뜨자마자 바로 아래로 내려갔고 어제저녁에 다
양예슬과의 대화를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아 곡연이 찾아왔다. 버닝 스타가 이전에 시한에서 만났던 고객이 식사 초대를 해서 신유리와 함께 가자고 했다. 신유리는 시한에서 이신을 처음 만났던 당시를 떠올렸다. 그는 전시회를 하고 있었다.그런데 오늘 운이 좋지 않았는지 호텔 문을 막 나서자마자 신기철을 마주쳤다. 신기철은 신유리를 보자마자 얼굴이 굳어지더니 입술을 우물쭈물하며 무언가 말하려는 듯했으나 밖을 한 번 쳐다보고는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신기철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신유리도 굳이 말을 걸지 않았다. 그냥 신기철을 못 본 척 지나쳤다. 다만 신기철은 호텔을 나가자마자 차에 올라타면서 차 문을 여는 순간 한 여성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아마도 문선경일 것이다.고객과의 식사 장소는 시한에서 유명한 한 음식점이었다. 모두가 아는 사이여서 식사 시간 내내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이신은 신유리 옆에 앉아 그녀에게 술을 권하는 고객들을 모두 막아주었다.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유리 씨는 술을 마실 수 없습니다.”고객은 순간 놀랐지만 이내 크게 웃었다. “이 대표님, 정말, 제가 기억하기로는 버닝 스타에 이런 사람이 없었는데? 언제 새로 추가된 겁니까? 내가 당신을 알기 시작한 이후로 버닝 스타에는 새로운 직원이 없었던 것 같은데.”그는 다 아는 척하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신유리와 이신을 번갈아 보았다.신유리는 조금 놀랐는지 이신에게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버닝 스타는 계속 사람을 뽑지 않았어?"그녀는 버닝 스타도 화인 그룹처럼 정기적으로 인턴을 채용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버닝 스타에 있는 동안 그런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이신은 고객과 함께 술을 마셨지만 많이 마시지 않아 은은한 술 냄새만 풍겼다. 그는 일부러 신유리와 거리를 두고 있었지만 그녀의 질문에 가까이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뽑아.”신유리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럼 언제 뽑아? 캠퍼스 리크루트도 해?”이신은 깊은 눈빛으로
금방 문을 나서자마자 신기철이 옆에서 다가왔다.그는 얼굴에 분노가 가득한 채 신유리를 보는 순간 표정이 더욱 어두워져서 물었다.“여기 와서 뭐 하는 거냐, 혹시 몰래 나 따라온 거야? 그리고 아까 문선경이랑 무슨 말을 했는데?”그는 한바탕 밀어붙이더니 표정도 잔뜩 꼬여서는 마치 신유리에게 약점이라도 잡힌 듯 불안해했다.그녀는 신기철이 숨을 돌리고 나서야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내가 문선경이랑 무슨 말을 할까 봐 두렵나 봐요?”신유리는 잔뜩 긴장한 신기철을 보고 단번에 알아챘다.그의 당황스러운 말투는 확실히 수상했다.그녀는 눈알을 굴리며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물었다.“해령에 관한 얘기를 했을까 봐 두려운 거예요? 아니면 부산시에 와이프가 따로 있는 것 때문인가요?”신기철이 부산시에 와이프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게다가 이 사실은 신연이 그녀에게 알려준 것이다.그녀가 부산시에 있는 와이프를 언급하자 신기철은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이내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당장이라도 그녀의 뺨을 향해 내리칠 듯 손을 뻗었다.“다시 말해 봐.”신유리는 화가 난 신기철이 그저 우습기만 했다. 그녀가 당시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충분히 느꼈다.여자를 위해 가족까지 버리는 남자란.그때의 이연지나 지금의 와이프 문선경이나 신기철을 만난 것은 재수 없는 일이었다.갑자기 뼈마디가 뚜렷한 손이 날아와 신기철의 손목을 낚아채 버렸다.언제 따라왔는지 서준혁은 손을 뻗은 채 신유리의 앞을 가로막은 채 무겁게 말했다.“손찌검하는 습관은 언제 고치실 겁니까?”신기철은 갑자기 나타난 서준혁을 보더니 잠시 멈칫했다.“당신 아까 들어간 거 아니었어?”서준혁은 그를 대꾸하지도 않은 채 고개를 돌려 신유리를 바라보며 물었다.“괜찮아?”신유리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서준혁을 흘겨보고는 신기철을 쳐다봤다.그녀는 수시로 나타나 귀찮게 구는 신기철이 싫증이 났다. 분명히 그녀는 그의 일에 일말의 관심도 없는데 기어코 나타나 트집을 잡으려 했다.다만 신기철 같은 사
서창범 역시 신유리를 보더니 양미간을 찌푸리며 원래부터 엄숙한 기색에 불쾌감을 감추지 못했다.신유리는 그의 시선을 맞받으며 가버렸다.저녁은 홀에서 먹기로 했는데 마침 윤아가 전화를 걸어왔다.홀로 갔을 때 문 앞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있었다.하정숙은 주현의 손을 잡고 웃음을 머금은 채 앞장섰고 뒤에는 서창범과 서준혁이 있었다.하정숙은 신유리를 보더니 얼굴의 웃음이 사라지며 표정이 굳어져 버렸다. 그녀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비아냥거렸다.“계속 따라다니나 봐? 껌딱지도 아니고.”주현은 하정숙의 뒤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동자에 넘치는 미소는 고고한 자태를 뽐냈다.신유리는 두 사람을 흘겨보고는 덤덤하게 말했다.“사모님께서 많이 한가하신 모양입니다. 서 대표님 영업부에서 환영할 것 같네요.”신유리는 최근 임아중한테서 비아냥거리는 것을 배웠다. 하정숙은 순식간에 표정이 굳어졌다.그녀는 힐끗 보고는 곧장 로비로 들어갔다.비록 신유리는 고개를 돌려보지 않았지만 뒤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하정숙은 신유리의 뒷모습을 한참 노려보더니 얼굴에 불쾌감을 드러내며 말했다.“주현아, 이게 가정교육 받지 못한 사람의 밑바닥이야.”주현이 그녀를 달래려는 순간 서준혁은 그들의 곁을 지나치고는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차가운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먼저 시비를 걸어놓고 오히려 유리가 가정교육을 못 받았다고?”하정숙은 말문이 막힌 채 얼굴이 굳어져 버렸다. 곁에 있는 주현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그녀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서준혁의 뒷모습을 쳐다보더니 이내 신유리가 떠난 방향을 바라봤다.그녀는 금세 감정을 정리하고 입술을 깨문 채 한숨을 내쉬었다.“아무래도 준혁 씨는 아직도 유리 씨에게 관심이 많나 봐요. 유리 씨 배 속의 아이가 준혁 씨 아이인지 의심이 들 정도예요.”비록 그녀는 갑자기 말을 꺼냈지만 하정숙은 깜짝 놀랐다.주현은 이내 웃으며 말했다.“그냥 해본 말이에요. 아버님, 어머님께서 그냥 흘려보내세요. 전 그저 준혁 씨가 유
태송백은 신연을 향해 내리치려 했다.태지연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신연을 밀어내며 그의 앞을 막아섰다.태송백은 태지연을 보더니 급하게 행동을 멈췄다.그러나 이미 큰 힘을 실은 탓에 갑자기 멈추려 해도 늦었다. 그는 급히 방향을 틀었지만 결국 태지연의 어깨에 맞았다.뼈가 부딪히는 고통에 태지연은 휘청거리며 균형을 잃었다. 팔을 타고 내려오는 통증에 그녀는 눈앞이 어지러워지더니 옆으로 쓰러지며 머리를 부딪혔다. 곧이어 머리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바닥에는 유리 파편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모든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신연이 반응했을 때 태지연은 이미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쥐 죽은 듯 고요한 방 안에는 태지연의 신음소리만 울려 퍼졌다.“아파...”신연의 눈에는 깊고 검은 파도가 일었다. 그는 태지연의 곁에 무릎을 꿇은 채 다급하게 소리쳤다.“성한빈, 당장 구급차 불러! 지금 당장!”그는 태지연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다칠까 봐 두려웠다.신연은 이내 고개를 들어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태송백을 노려보며 당장이라도 그를 죽일 것 같은 기세였다.태송백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급히 다가왔다.“태지연... 지연아...”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아까의 광기 어린 얼굴은 온데간데없어진 채 공포에 질려 있었다.태지연은 그를 바라보더니 손을 들어 태송백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힘겹게 말을 꺼냈다.“오빠... 내 말부터 들어줄래?”태송백은 숨을 죽이며 말했다.“그래, 네 말 들을게. 오빠가 나빴어. 오빠가 미안해... 지연아, 나 진짜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알아. 오빠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는 거. 오빠는 항상 나를 제일 아껴줬잖아.”태지연은 여전히 고통에 시달린 채 서서히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정신이 점점 혼미해져 갔지만 그녀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며 낮게 말했다.“오빠, 난 신연 편을 들고 싶은 게 아니었어. 그저 엄마 아빠가 더 이상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야. 우리 가족이 다시
태송백은 한층 더 날카로운 눈빛으로 신연을 노려봤다. 한참 후에야 이를 악문 채 말을 내뱉었다.“뒤에서 숨고만 있다가 부하들만 짖게 놔두더니 이제야 직접 나선 거냐? 나한테 기회를 준다고? 신연, 너 진짜 죽을 때까지 정신 못 차리는구나?”태송백은 태지연을 흘겨보며 비웃음을 흘렸다.“너 내 동생을 완전히 속였잖아. 지금도 태지연이 여기까지 와서 헛소리나 지껄이고 있고.”태송백의 말은 가시처럼 날카롭게 태지연의 가슴에 박혔다. 그녀는 주먹을 움켜쥐며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오빠, 제발 진정 좀 해요.”“태지연, 넌 입 다물어. 계속해서 그 새끼 편을 들면 넌 더 이상 내 여동생도 태씨 가문의 딸도 아니야!”태송백은 격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우리 태씨 가문이 이 꼴이 된 건 전부 그 새끼 때문이야! 아버지께서 지금 병원에 누워 있는 데다 나도 집에 돌아가지 못한 채 숨어 다녀야 하지. 내가 밖에서 무슨 꼴을 당하는지 알기나 해? 모든 게 다 저 새끼 때문이라고.”“엄마는 창녀에 아빠는 손님이고. 참, 너도 신유리 알지? 걘 얼마나 똑똑한지 저 새끼랑 상종도 안 해. 너 혼자 보물인 양 여기고 있는 거야.”태송백은 쌓여 있던 울분을 쏟아냈다. 둘 사이의 갈등은 이미 단순히 말로 풀 수 있는 정도가 아닌 자존심 문제였다.그는 반드시 신연에게 자신이 당한 굴욕을 몇 배로 돌려주겠다고 결심했다.태송백은 한 마디 한 마디에 독설을 내뱉었다.“태지연, 넌 더럽지 않냐?”그녀는 마치 얼어붙은 듯 제자리 굳어버린 채 태송백을 바라보며 연신 고개를 저었다.“오빠, 그만해요... 제발 그만 말하세요.”그녀는 차마 신연을 돌아볼 용기도 없었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는 목이 바싹 말라오더니 눈앞이 흐려졌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신연 앞을 막아서며 무시해 버리라고 하고 싶었지만 마치 나무 말뚝에 묶인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태송백의 독설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악의 어린 말들이 허공에 울려 퍼지
성한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둘째 도련님께서 문이 열릴 때마다... 전에 우리 쪽 사람들이 다친 적도 있었습니다. 도저히 대화가 통하지 않습니다.”신연은 바닥에 부서진 유리 조각들을 흘겨보더니 무표정으로 말했다.“아직도 부술 게 남아있어?”성한빈은 순간 안색이 굳어졌다.태지연은 그들의 대화를 신경 쓰지도 못한 채 바닥에 흩어진 유리 조각들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잠시 자리 좀 비켜줄 수 있어? 오빠랑 단둘이 얘기하고 싶어.”신연은 눈을 내리깔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약속하듯 말했다.“아무것도 안 할게. 믿어줘, 응?”“아직 불안정할 텐데. 너희 둘만 남겨둘 수 없어.”“걱정 마. 아무 짓도 안 할 거야. 그래도 내 오빠잖아. 어렸을 때부터 나를 가장 아껴주던 사람이야.”태지연은 신연을 바라보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물건을 너한테 돌려주겠다고 약속했잖아. 나야말로 누구보다도 이 일이 빨리 끝나길 바라고 있어.”“우리도 빨리 예전으로 돌아가자. 아무리 예전처럼 되지 못하더라도 이 일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어.”태지연의 목소리는 다소 지친 듯했다.“연아, 나 정말 너무 힘들어.”신연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한참 지나서야 그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한번 얘기해 봐.”태지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신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근데 나가진 않을 거야. 보다시피 최근 태송백 상태가 불안정해. 단둘이 두는 건 불안해서 안 되겠어. 여기서 기다릴게.”현관에서는 안쪽 상황을 볼 수 없었다.그녀는 신연이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걸 알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바닥의 유리 조각들을 피하며 안으로 들어갔다.안쪽은 더 엉망이었다. 바닥에는 온갖 유리 파편들과 장식품들이 흩어져 있었다.태송백은 원래 성격이 좋지 않은 편인데 얼마나 화가 났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녀는 바닥의 유리 조각들을 피해 가며 간신히 거실까지 다가갔다. 순간 태송백의 격앙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내가 나가라고
다음 날 아침, 신연은 평소처럼 아침을 준비해 두었다.테이블 위에는 더 이상 초콜릿케이크가 보이지 않았고 신연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행동했다.그는 우유 한 잔을 따라 식탁 위에 놓더니 입을 열었다.“얼른 씻고 아침 먹어. 나 오늘은 일이 있어서 점심에 못 올 거야. 점심은 호텔에서 보내줄 거야.”태지연은 순간 마음이 움찔하며 신연에게 물었다.“회사? 아니면 어디?”신연은 동작을 멈추더니 속눈썹을 내리깐 채 일부러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응, 회사.”“연아.”태지연은 의자 등받이를 꽉 잡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어젯밤 한 말은 전부 진심이야. 만약 네가 오빠를 건드리면 절대 용서 못 해.”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가라앉았고 손가락이 하얘질 정도로 의자 등받이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신연은 그제야 동작을 멈추고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태지연은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말했다.“만약 네가 오빠를 건드리면 나중에 내가 부모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 있어?”조금 이기적일 수도 있는 말이지만 그녀는 어쩔 수 없었다. 어젯밤에 들은 말로만 신연이 정확히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의 태도를 봐서는 만약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면 태송백을 순순히 놓아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태지연은 손에 힘을 풀더니 힘겹게 신연 곁으로 다가갔다.“연아, 원하는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대신 찾아줄게.”순간 신연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목젖을 울렁이며 태지연을 내려다보았다.“내가 물건을 찾고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태지연은 잠시 멈췄다가 대답했다.“오빠가 말했어. 자기 손에 너한테 아주 중요한 게 있다고. 연아... 내가 찾아줄게. 내 오빠잖아, 내가 말해볼게.”어젯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그녀의 안색은 좋지 않았고 목소리도 다소 잠겨 있었다.순간 머릿속이 약간 혼란스러워졌다.신연은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마음이 급해진 그녀는
태지연은 말을 마치고 신연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신연은 눈을 내리깐 채 무심한 시선으로 그녀를 훑어보더니 일으켜 세웠다.“네가 좋아하는 케이크 사 왔어. 얼른 먹어봐.”태지연은 믿기지 않는 눈빛으로 신연을 쳐다보며 손을 뿌리치려고 했으나 되레 단단히 잡혔다.신연은 식탁 앞으로 가서 조심스레 케이크 상자를 열고는 라즈베리 초콜릿케이크를 꺼냈다.태지연이 가장 좋아하는 가게의 케이크였다. 평소에도 그녀는 신연한테 퇴근길에 케이크를 사 오라고 조르기도 했었다.하지만 그녀는 가장 즐겨 먹던 케이크를 보면서도 전혀 입맛이 돌지 않았다.그녀는 태송백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다. “오빠가...”그러나 신연이 바로 말을 끊어버렸다. “케이크 가게 주인이 또 둘째를 낳았대. 너도 기억하더라. 시간 되면 한번 들르라고 하길래 내가 대신 대답했어.”“신연...”“맛 좀 봐.”신연은 케이크를 그녀 앞에 건네며 뜨거운 눈빛으로 바라봤다.태지연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지금 먹고 싶지 않아. 연아, 다시는 나한테 거짓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그러니까 솔직하게 대답해 줘. 네가 오빠를 데려갔어?”태지연의 말이 끝나자 거실에는 침묵만이 흘렀다.신연은 그녀를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이것뿐이야?”태지연은 한 글자씩 또박또박 뱉어냈다. “대답해.”신연은 말했다. “일단 케이크부터 먹어봐.”태지연은 움직이지 않고 애써 차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그녀는 이 상황에 점점 지쳐갔다.순간 가족과 신연 사이에서 고민하며 최선의 해결책을 찾으려 했던 자신이 우스꽝스러웠다.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신연과 가족이 서로 평화롭게 지내길 바랐다.하지만 그녀는 이제야 그토록 바라던 작은 소망이 애초에 이룰 수 없는 꿈이었음을 깨달았다.신연과 태씨 가문은 이미 끊어진 실처럼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사이였다.모두가 이제는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오직 그녀만이 되돌릴 수 있다는
태은정은 안색이 어두워진 채 눈 밑에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다.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일들이 그녀를 지치게 했다. 그녀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지연아, 신연이 송백을 어디로 데려갔는지 알고 있어?”태지연은 잠시 멍해 있다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언니, 왜 항상 무슨 일만 생기면 내가 무조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마치 사람들이 모든 걸 나에게 털어놓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태지연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사실 진실을 모르는 사람은 유일하게 그녀뿐이었는데 말이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태은정은 멈칫하더니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무언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태지연을 한참 바라보더니 갑자기 반응하며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피곤한 듯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말했다.“그래. 내가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미안해. 지연아, 내가 너무 급했나 봐.”태은정은 미안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눈썹을 만지작거렸는데 이는 태은정이 곤란할 때 나오는 작은 습관이었다.태지연은 고개를 저었다.“방금 신연이 오빠를 데려갔다고? 그게 무슨 뜻이야?”태은정은 지금도 상황이 엉망진창이라고 느꼈다. 태송백은 이미 이틀째 연락 두절인 상태였고 아무리 연락을 해도 닿지 않았다.전혜린과 태성민은 신연의 짓이라고 확신했다. 게다가 태지연과도 연락이 닿지 않다 보니 한편으로는 부모님을 달래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태송백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연락을 돌려야 했다.게다가 업친 데 덮친 격으로 자신의 문제까지 해결해야 했다. 그녀는 외국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도 이렇게 바쁜 적이 없었다.태은정은 한숨을 내쉬며 신중하게 말을 이어갔다.“그럼 신연이 요즘 뭐 하고 있는지는 알아?”태지연은 대답했다.“대부분은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어. 그리고 나머지 시간엔 회사에 있을 거야.”그녀는 잠시 멈춘 후 덧붙였다.“근데 나도 확신할 수 없어. 보통 자세한 건 나한테 말하지 않
태지연은 마땅한 핑계조차 찾을 수 없었다. 신연은 그녀에 대해 잘 알다 못해 속마음까지 꿰뚫고 있을 정도였다.태지연은 눈물을 흘리며 처량한 모습으로 바라봤다.“왜겠어? 연아, 네가 생각해 봐.”“우리 아빠는 지금 병원에 있고 엄마랑 오빠는 널 원수처럼 대하는데 도대체 내가 어떡해야 하는 건데?”“누굴 탓해야 할까? 내 의사를 물어본 사람은 있어? 나도 모르겠어. 일이 왜 이 지경까지 되어버렸는지...”다들 그녀가 당연히 자신의 편에 서야 할 뿐만아니라 자신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누구도 그녀의 의사에 대해 물어본 적이 없었다.태지연은 바닥에 다리를 웅크리고 앉은 채 서로 사랑하던 사람이 갑자기 왜 그녀의 가족을 해치려는 사람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때 그녀를 아껴주던 부모와 오빠조차 이제는 그녀를 이용하려고만 했다.모두 그녀를 속이면서 정작 그녀한테는 진심을 다하라고 요구했다.태지연은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쉬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왜 내가 불공평하다고 느끼는 일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거야?”“날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면서 날 속이는데 왜 난 그걸 받아들여야만 하는 거야? 난 전혀 원하지 않는다고. 진실만을 원할 뿐이야. 그게 다야.”“이렇게 간단한 일조차 해줄 수 없는 거야?”“왜? 내가 바보 같아? 난 그냥 진실을 알고 싶었을 뿐인데 왜 너희는 날 바보 취급하는 거야?”그녀의 눈물은 순식간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머리를 무릎에 묻은 채 어깨가 떨릴 정도로 흐느꼈다.진실이 그녀 앞에 명백히 놓여 있었지만 누구도 진실을 말하려 하지 않았다.그들은 태지연이 절망에 빠진 채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도 계속해서 속이려고만 했다.무언의 눈물에서 작게 흐느끼다 마지막에는 이를 악문 채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태지연은 자신이 고집하는 게 과연 무엇인지 몰랐다. 그저 입술이 터져 피비린내가 느껴질 때까지 입술을 깨물었다.그 순간, 누군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신연은 그녀의
신연은 언제나 태지연에게 다정하게 대했다.그의 눈빛은 차분했고 그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하지만 태지연은 마치 약점을 찔린 듯 몸이 굳어버린 채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신연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지나치게 평온한 시선이 되레 태지연의 마음을 한껏 졸여왔다.“왜?”신연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지연아, 너도 그 계약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는 거지?”“착하지, 그만 돌려줘.”신연은 아이를 타이르듯 다정하게 말했다. “너한테 있는 거 알아.”“...없어.”태지연은 점점 눈빛이 흐려지더니 힘겹게 입을 뗐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 계약서라니, 난 모르는 일이야.”그녀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그제야 의지와는 다르게 부들부들 떨려오는 손을 진정시켰다.그녀는 오빠가 신연을 해치지 않기를 바랐고 마찬가지로 신연이 오빠에게 어떤 해를 끼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태지연은 누구에게도 그 계약서를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그녀는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며 모든 생각을 숨기려 했다.신연은 한참 그녀를 바라보더니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연아, 나 거짓말하는 거 제일 싫어해.”태지연은 순간 몸이 굳었지만 여전히 고집스럽게 말했다. “나 아니야...”“정말이야?”신연이 다시 물었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응.””그럼 이게 뭔지 설명해 줄 수 있겠어?”신연은 말을 마치고 서랍에서 약병과 약을 꺼내 테이블 위에 던졌다.그녀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전에 침대 옆 서랍에 숨겨둔 비타민 약병과 피임약이었다.최근에 산 피임약을 아직 비타민 약병에 넣을 시간이 없었다. 태송백이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깜빡 잊고 있었다.신연은 순간적으로 창백해진 그녀의 얼굴을 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지연아, 말해 봐. 집에 왜 이런 약이 있는 거야?”그녀는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신연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잠긴 목소리로 변명했
태지연은 눈앞이 흐려진 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앞만 보고 계속 걸어갔다. 머릿속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고 오직 신연만이 떠올랐다.그렇게 자존심 강한 사람이 어떻게 그런 가정에서 자랐을까? 신연이 그렇게 말하기를 꺼렸던 그의 가정은 도대체 어떤 모습이었을까? 더군다나 신기철이 진정 신연에게 미안하다면 왜 그에게 한 번도 어떤 보상을 하지 않았을까?모두가 신연이 차갑다고 말했지만 태지연만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신연은 단지 그녀 앞에 갑작스럽게 나타나 자신을 지켜준 소년만이 아니었다. 사실 그 역시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그녀는 고등학교 뒤편 작은 정원에 항상 떠돌이 고양이들이 많았던 게 기억났다. 그리고 신연이 작은 난간에 기댄 채 고양이들에게 사료를 나누어주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새끼 고양이들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항상 신연 주위에 모여서는 그의 다리를 비볐다.그는 분명 귀찮아하는 표정이 있었지만 고양이들을 밀어내지 않았고 마지막에는 새끼 고양이가 그의 발치에서 잠드는 것도 허락했다. 동물들의 감각은 예리한 법이다. 그들은 항상 신연을 잘 따랐다.그런 신연의 모습이 계속해서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며 애써 억눌렀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그녀가 사랑했던 신연은 분명 좋은 사람이었다. 너무나도 좋은 사람이었다....갑자기 손목이 세차게 잡히며 태지연은 발걸음을 멈췄다. 그제야 눈앞의 상황이 서서히 선명해지며 뒤에서 태은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딜 그렇게 급하게 뛰어가는 거야?”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엘리베이터 앞까지 와 있었다. 방금 태은정이 그녀를 붙잡지 않았더라면 환자를 밀고 지나가던 간호사랑 부딪힐 뻔했다.그녀는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태은정은 그녀를 흘겨보더니 아무 말 없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데려갔다.차에 타고 나서야 태지연은 정신을 차리고 나지막이 속삭였다.“고마워.”“고맙긴. 내가 네 언니인데.”태은정은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