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현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상반신을 앞으로 기울이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갑작스러운 스킨십에 임유진이 화들짝 놀라 손을 빼내려고 했다.하지만 강현수는 그녀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고 그 손을 자신의 심장 쪽으로 끌어당겼다.“느껴져? 평소보다 더 빨리 뛰는 거?”그의 눈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어제 CCTV를 보다가 그 남자가 널 뒤쫓아 가고 이윽고 네가 화면에서 사라졌을 때 여기가 얼마나 빨리 뛰었는지 알아?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어. 호흡이 가빠와 제대로 숨도 쉬지 못했고 손이 떨려 물컵 하나 제대로 쥐지 못했어.”강현수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그는 마치 어린애가 속상함을 털어놓듯, 사라진 그녀를 질책하듯 그렇게 한마디 한마디 뱉어냈다. 그리고 그 모습은 그녀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이래도 너를 향한 내 감정이 착각 같아 보여?”강현수는 그녀의 시선을 집요하게 쫓았다. 그의 눈동자에 비친 그녀는 상당히 놀란 듯한 얼굴이었다.그녀는 강현수가 이런 말까지 할 줄은 몰랐다.그리고 그의 심장에 닿은 손이 점점 뜨거워지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현수 씨...”그녀는 입을 열어 뭐라고 얘기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유진아.”강현수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다른 건 다 의심해도 상관없지만 내가 널 사랑한다는 것만큼은 의심하지 마.”초라한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남자는 몸을 기울인 채 여자의 오른손을 꽉 잡고 그의 왼쪽 가슴에 대고 있었고 여자는 그런 남자를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당혹감도 그리고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이 서려 있었다.이 순간, 두 남녀는 마치 자신들만의 세계에 들어간 것처럼 주위는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듯했다.옆에서 식사 중이던 사람들은 모두 식사를 멈추고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학생으로 보이는 여자아이들은 휴대폰를 들어 몰래 그 장면을 찍기도 했다.사람들은 두 사람에게 정신이 팔린 나머지 검은색 승용차 여러 대가 어느새 음식점 밖에 주차된
경호원들은 가게 안으로 들어와 사장님과 얘기를 나누더니 음식값은 모두 계산한다는 말을 하며 손님들을 내쫓기 시작했다.자리에서 버티고 있던 사람들은 검은색 양복 차림의 남자들이 줄지어 들어오자 결국 고분고분 가게를 떠났다.어수선한 분위기에 강현수와 임유진도 드디어 입구 쪽에 멈춰 있던 강지혁을 발견했다.임유진은 강지혁이 이곳에 있는 것에 조금 놀란 얼굴이었지만 강현수는 마치 그가 올 줄 알았다는 듯이 태연한 얼굴이었다.“너도 들어와서 같이 식사하지 그래?”강현수는 강지혁을 보며 말했다.“같이 식사할 거면 지금 추가 주문하고. 우리가 주문한 음식도 아직 안 왔거든.”강지혁은 이를 꽉 깨물더니 천천히 그들이 있는 작은 테이블로 다가왔다.임유진은 저도 모르게 강현수에게 잡힌 손을 빼냈다. 다행히 이번에는 그녀의 손을 다시 잡지는 않았다.“사장님.”강현수는 카운터에서 넋 놓고 있는 사장을 불렀다.사장은 갑자기 꿈에서 깨기라도 한 듯 몸을 부르르 떨며 답했다.“네, 손님!”그러고는 마침 나온 그들의 주문 음식을 들고 다가갔다.“추가 주문할게요.”강현수는 메뉴판을 훑어보고는 두 가지 음식을 추가 주문했다.“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사장은 서둘러 주방장에게로 달려가 주문을 넣었다. 그러고는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주방에 박혀있었다.이로써 홀에는 강현수와 임유진 그리고 강지혁 이렇게 세 사람만 남았다.작은 테이블에 삥 둘러 서 있는 세 사람의 모습이 무척이나 불편해 보였다.임유진은 지금 어찌할 바를 몰라 애꿎은 테이블만 건드렸고 강지혁은 어두운 얼굴을 한 채 강현수를 보고 있었다.임유진은 강지혁이라면 분명히 강현수의 제안을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그의 입에서는 “그러지.”라는 긍정적인 말이 튀어나왔다.그러고는 이내 의자에 앉았다.임유진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강지혁을 바라보았다.정말 같이 식사하려는 걸까?“왜? 나랑 같이 밥 먹기 싫어?”강지혁은 고개를 들어 아직 멍한 얼굴의 그녀를 바라보았다.“아니면 내가
방금 이곳으로 들어오기 전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두 사람을 봤을 때 강지혁은 세상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다.두 사람이 있는 그 공간은 감히 침범할 수 없다는 듯이, 그녀의 눈에는 오로지 강현수밖에 없는 듯했다.“하지만 아쉽게도 유진이는 너를 사랑하지 않아. 앞으로도 그럴 거고.”강지혁은 강현수를 차갑게 바라보았다.“지금은 그럴지도 모르지만 미래 일은 그 누구도 모르는 거야.”강현수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그보다 너는 지금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이런 말을 하는 거지? 두 사람 헤어졌잖아. 이제 끝난 사이잖아.”그 말에 강지혁의 표정이 어두워졌다.“지혁아, 난 너한테 많은 기회를 줬어. 그동안 몇 번이나 유진이 손을 놨었으니까.”강현수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보고 말했다.“헤어지는 걸 택한 건 너야. 나는 더 이상 유진이 손을 놓아줄 생각이 없어.”강지혁이 코웃음을 쳤다.“놓아줄 생각이 없어? 하하... 뭐 집안이라도 걸게?”“너는 너희 집안 걸 수나 있고?”두 남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히며 분위기가 험악해졌다.그때 사장이 마침 타이밍 좋게 나타나 강현수가 추가 주문한 음식들을 올렸다.그는 이 세 명이 어떤 사람들인지는 잘 몰랐지만 가게 앞을 봉쇄한 것을 보면 뭐가 됐든 지금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하는 게 상책이라는 것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사장님, 소주 두 병 주세요.”사장이 몸을 돌린 그때 강현수가 뜬금없이 술을 달라고 했다.“네, 알겠습니다... 잠시만요.”사장은 서둘러 소주 두 병을 들고 왔다.그들에게는 와인이나 양주를 건네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아쉽게도 이곳에 그런 고급술은 없었다.강현수는 소주병을 따더니 강지혁을 보며 물었다.“술 한잔할래? 너랑 술 마시는 것도 꽤 오래된 것 같은데.”강지혁은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 입술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그러게. 너랑 술 마시는 것도 오랜만이네. 기왕 이렇게 만난 건 한잔하지 뭐.”그러고는 강현수가 따라주는 술잔을 잡았다. 그러고
고작 7만 원으로 강지혁과 강현우 이 두 남자의 밥을 샀다는 걸 사람들이 알면 어떻게 생각할까?임유진은 자기가 생각해도 웃긴 지 웃음을 터트리고는 월세방으로 향했다.그녀는 피곤이 몰려와 화장실에서 빠르게 씻더니 곧바로 침대 위에 누웠다.지금 그녀는 무척이나 힘들었다. 몸이 힘든 것이 아닌 정신이 힘들었다.임유진은 어제오늘 두 날 연속으로 강현수의 열렬한 사랑 고백을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마음을 받아줄 수가 없었다.강현수는 그녀를 사랑한다고 했지만 과연 앞으로도 그럴까? 어쩌면 그녀를 향한 그의 사랑은 짧게는 몇 개월일 수도 있고 길어봤자 1년 또 혹은 2년 정도밖에 안 될지도 모른다.임유진은 더 이상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지 않았다. 사랑하고 버림받는 그 아픔이 너무 고통스러워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한번은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다. 두 번도 힘들지만 견뎌낼 수 있다. 하지만 세 번은 그럴 자신이 없었다.그녀는 눈을 감은 채 잡념을 집어 던지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그러다 슬슬 잠에 들려는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이 번쩍 뜨였다.노크 소리는 꽤 다급했다.임유진는 눈가를 비비고 문 쪽으로 다가가 물었다.“누구시죠?”시계를 보니 벌써 저녁 10시가 넘었다.“유진 씨, 저 고이준입니다.”고이준의 목소리에 그녀가 멈칫하며 잠깐 망설이더니 결국 문을 열어주었다.의외였던 건 문을 열고 보니 거기에는 고이준 뿐만이 아니라 강지혁도 함께 있었다. 그는 지금 술에 취해 상체를 고이준에게 기대고 있었다. 게다가 얼굴에는 짙은 취기가 어려있었다.생각해 보면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술을 마신 강지혁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여기로 오는 것이 아닌 강씨 저택으로 가셔야죠.”임유진이 말했다.고이준은 난감한 듯 웃었다.그가 왜 그걸 모를까.문제는 강지혁이 기어이 이곳으로 오겠다고 고집을 피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일 아침 눈을 떴을 때 임유진의 월세방이 아니면 비서직에서 잘라버리겠다고 협박까지 했다.“대
임유진은 고이준에게 빨리 강지혁을 부축하라는 시선을 건넸다.하지만 고이준은 어색하게 웃더니 그녀에게 말했다.“그럼... 대표님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내일 아침 데리러 올 테니 혹시 밤사이 필요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고이준은 자신의 명함을 신발장 위에 올려놓더니 친절하게 문까지 대신 닫아주고 그렇게 자리를 떠나버렸다.임유진은 그 모습을 보고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튀어나왔다.고이준은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강지혁을 이곳에서 재우려고 작정한 모양이었다.강지혁과 이곳에서 하룻밤을?임유진은 이를 꽉 깨물더니 일단 그를 부축해 침대 쪽으로 향했다.고이준은 차에 올라타고 임유진의 집을 바라보더니 긴 한숨을 내쉬었다.생각해보면 그 역시 강지혁이 취한 모습을 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그는 언제나 냉철하고 이성적인 그런 사람이었다.그런 사람이었기에 강문철의 엄격한 교육도 버텨내고 결국에는 강씨 가문을 이어받을 수 있었다.그런 강지혁이 오늘은 강현수와 정신을 잃을 때까지 술을 마셨다. 두 사람 모두 지기 싫어하는 어린애 같았다.만약 그 모습이 매스컴을 타게 되면 사람들은 아마 경악을 할 것이다.강현수도 술자리에서 일어날 때 보니 강지혁과 다를 것 없었다.고이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강현수가 임유진을 사랑하게 될 줄 그 누가 알았을까.게다가 제일 이해가 가지 않는 사람은 바로 강지혁이었다. 이미 헤어진 사람을 대체 왜 놓지 못하는 걸까.대체 임유진은 무슨 매력이 있어 두 남자를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술을 마시게 만드는 걸까!고이준은 이제 언젠가 임유진이라는 여자 때문에 S 시가 발칵 뒤집힌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다만 임유진은 강현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했다.만약 그녀가 강현수를 사랑하게 되면...고이준은 가설만 제기했을 뿐인데 온몸에 소름이 돋아버렸다.이러한 가능성은 차라리 생각하지 않는 것이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은은한 불빛 아래 임유진은 지금 침대 위에 고이
그 마음은 그를 사랑하게 되고부터 더욱더 커졌다.강지혁이 대단한 것도 알고 그녀보다 가진 것도 많다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임유진은 그를 지켜주고 싶었다. 자신의 온 힘을 다해 그를 지켜주고 싶었다.만약 그가 안정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를 불안하게 하는 요소를 전부 제거해서라도 그에게 안정감을 주고 사랑해주며 그녀에게 그가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알려주고 싶었다.하지만 그 모든 것이 그녀의 광대 짓에 지나지 않았다.강지혁은 처음부터 그녀가 지켜줄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그에게 그녀는 그저 장기 말일 뿐이었다.임유진은 쓰게 웃더니 허리를 숙여 강지혁의 신발을 벗겨 주었다. 그리고 이대로 이불까지 덮어준 다음 그녀는 오늘 밤 소파에서 잘 생각이었다.그에게 이불을 덮어주려는데 하필이면 오늘따라 이불이 벽 쪽에 놓여 있는 바람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몸을 넘어 이불을 가져와야 했다.그렇게 이불 끝자락을 짚고 다시 허리를 펴려는데 어느샌가 그는 눈을 뜨고 있었다.검은색 눈동자는 취기 때문인지 예쁘게 일렁거렸다.“유진아...”강지혁은 입을 열고 그녀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임유진은 순간 몸이 얼어붙어버렸다. 그러다 빠르게 다시 정신을 차리려는데 그가 두 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얼떨결에 그녀의 상반신은 강지혁의 위에 엎드리게 되었다.임유진이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키자 그가 두 손에 힘을 주었다. 그 탓에 그녀는 또다시 그의 품에 안기고야 말았다.“유진아, 유진아... 강현수 사랑하지마...”그의 목소리에는 짙은 술향기가 배어있었다.“강현수는 물론이고 그 누구도 사랑할 생각 없어. 이제 만족해? 이불 덮어 줄 테니까 빨리 이 손 풀어.”임유진은 지금 한시라도 빨리 그의 품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그 누구도... 사랑할 생각이 없어?”강지혁은 혼자 그녀의 말을 되뇌더니 갑자기 몸을 옆으로 뒹굴어 임유진의 몸을 위에서 짓눌렀다.“그 말은 나도 사랑하지 않겠다는 뜻이야?”강지혁은 그녀에게 몸무게의
“그러면... 너도 날 버릴 거야?”강지혁은 입술을 달싹이다 힘겹게 이 말을 내뱉었다.버린다고?이 말이 임유진에게는 우습기 짝이 없었다.강지혁이 어떤 사람인데, 그리고 애초에 그녀는 그를 가진 적도 없다.“너 진짜 취했구나. 빨리 비켜. 지금 시간도 늦었...”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얼굴이 갑자기 아래로 확 다가왔다. 두 코가 거의 맞닿을 그런 거리였다.“취했다고?”강지혁은 웃는 듯 마는 듯한 그런 표정을 지었다.“나 안 취했어. 멀쩡해.”안 취했다고, 멀쩡하다고는 하지만 제정신이라면 그런 말을 내뱉을 리가 없다.“나 버리지 마. 응? 유진아...”그는 고통스러운 눈빛으로 그녀에게 애걸하듯 말했다.버리지 않겠다는 그녀의 한마디가 지금은 그 무엇보다 더 중요하다는 듯이 말이다.강지혁이 술에 취했다는 걸 알지만, 어쩌면 내일 아침이 되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걸 알지만 임유진은 그럼에도 결국 이 말을 뱉어내고야 말았다.“이제 와서 그런 말 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는데? 널 버리지 말아 달라고? 날 먼저 버린 건 너야!”그의 얼굴이 서서히 어두워져 갔다.하지만 임유진의 말을 계속되었다.“전에 너를 원했던 건 너를 내 가족으로 여겼기 때문이고 너를 사랑해서였어. 하지만 지금은 널 가족으로 생각하지도 않고 널 사랑하지도 않아. 그리고 더 이상 나는 널 원하지 않아.”그렇다. 그를 사랑하지도 않고 그를 원하지도 않는다.이 말은 그에게 들려주는 말이기도 했고 그녀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말이기도 했다.강지혁의 눈가가 점점 빨갛게 변해버렸다. 그녀의 한마디 한마디가 그의 귀를 타고 들어와 그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그녀는 그를 사랑하지도 않고 그를 원하지도 않는다...순간 심연 깊숙이 있던 두려움이 그의 몸을 덮쳤다. 그는 마치 자신이 뭘 하든 눈앞에 있는 여자를 곁에 둘 수 없을 것만 같았다.강지혁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거칠게 탐했다.그녀는 이러면 안 된다!자신의 곁을 떠나면 안 된다!“읍...”임유진은 갑작
하지만 눈을 감고 아무리 기다려봐도 생각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몇 초 뒤 임유진이 슬며시 눈을 떠보니 강지혁이 그녀의 손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그러고는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손 안 아파?”순간 임유진은 뭐라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와 코끝이 시큰해졌다.강지혁은 항상 이렇게 그녀를 누구보다 더 소중히 대하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막상 그녀가 그 다정함에 푹 빠졌을 때는 그 누구보다 매정하게 버려버렸다.“날 사랑하는 게 아니면 나한테 키스하지도 말고 널 때린 손이 아픈지 안 아픈지도 물어보지 마! 네가 이럴수록 나는 네가 더 싫어지니까!”임유진은 그를 힘껏 노려보고는 그의 손에 잡힌 손을 거칠게 빼냈다.흐트러진 머리카락이 희고 붉은 얼굴에 몇 가닥 붙어있고 그 사이로 빨간 입술을 꽉 깨문 그녀의 모습은 누가 봐도 명백한 거부였다.강지혁은 순간 얼굴에 핏기가 가시고 몸도 비틀거리다가 속에서 뭔가가 올라올 것 같아 입을 꽉 틀어막은 채 허겁지겁 침대에서 내려 화장실로 달려갔다.그리고 문이 닫힌 순간 겨워 내는 소리가 들려왔다.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술을 마셨으니 당연한 결과였다.임유진은 침대에서 내려와 자신의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그의 뺨을 내리친 그 감촉이 아직 남아있는 것 같았다.그녀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내뱉었다.맞은 사람은 따로 있는데 왜 때린 사람이 이렇게 아픈 걸까.화장실에서 들리던 토하는 소리가 점점 멎어갔다. 하지만 강지혁은 어쩐 일인지 한참이 지나고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이에 임유진은 혹시 그가 화장실에서 쓰러진 건 아닌가 싶어 그쪽으로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너... 너 괜찮아?”안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임유진은 어쩔 수 없이 조금 더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강지혁, 내 말 들려? 혹시 잠든 거야? 셋 세고 문 열게.”그녀는 손가락으로 셋을 센 다음 혹시 몰라 한 번 더 노크했다.똑똑.“나 들어간다?”임유진은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급하게
강지혁은 임유진의 고집에 결국 알겠다며 그녀와 함께 집에서 나와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한 후 강지혁은 뒤따라온 경호원에게 임유진의 곁을 맡기고 혼자 병실로 들어갔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빼빼 마른 강문철이 흰색 병상 위에 가만히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남자도 병마와 세월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강문철은 강지혁이 안으로 들어온 것을 보더니 마지막 힘을 쥐어짜 입을 움직였다.“왔... 니...”“네, 저 왔어요.”강지혁이 곁으로 다가오며 대답했다.사실 강지혁은 강문철에게 대단한 가족 간의 정은 느끼지 못했다.실제로 강문철은 강지혁이 할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느낄만한 행동을 보여주지 않았으니까.강문철은 언제나 강지혁을 자신의 뒤를 이어 강씨 가문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하나의 장기 말로 여겨왔다. 물론 그 장기 말도 쓸모가 없었다면 진작 버렸을 것이다.“이제는... 강씨 가문의 모든 게 네 손에... 달렸다. 만약... 네가 가문을 망하게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강문철이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할 말은 그게 끝이에요?”강지혁이 강문철을 빤히 바라보았다.이에 강문철은 탁한 눈동자를 옆으로 굴려 병실 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임유진... 그 아가씨... 밖에 있지? 들어오라고 해...”그 말에 강지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유진이 건드릴 생각하지 마세요.”“이 꼴로... 내가 뭘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어차피... 그 아가씨 옆에는... 네 사람 천지일 텐데.”강지혁은 그가 두 손으로 직접 키운 손주이자 가문의 후계자이기에 강지혁의 생각 같은 건 이미 훤히 꿰고 있었다.강지혁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자 강문철이 다시 입을 열었다.“그저... 마지막으로 해줄 얘기가... 있어서 그러는 것뿐이다...”호흡이 점점 가빠지고 안색도 창백해진 것이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강지혁은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발걸음을 옮겨 병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곧바로 임유진의 손을
“그래? 그럼 만약... 내가 너한테 상처를 줘도 너도 똑같이 나 안 볼 거야? 내가 아무리 용서해달라고 빌어도 나 용서 안 해줄 거야?”강지혁은 목구멍을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한마디 한마디 힘겹게 내뱉었다.이에 임유진은 몸을 돌려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강지혁을 바라보았다.“혁아, 너 대체 왜 그래? 요즘 따라 너무 불안해 보여. 무슨 일 있는 거야?”강지혁은 자신의 불안해 보인다는 말에 고개를 푹 숙였다.확실히 그는 요 며칠 줄곧 불안해하고 있었다.탁유미와 이경빈의 일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자신과 임유진의 결말도 그들과 똑같을까 봐 불안해하고 있었다.“혹시 방금 내가 한 말이 널 불안하게 만들었어? 혁아, 내가 언니를 이해한다고 했던 건 소민준과의 일이 생각나서 그랬던 거야. 네가 괜한 생각을 할 게 아니라고. 네가 나한테 상처 줄 리가 없잖아. 그리고...”임유진은 손을 들어 조금 우울해 보이는 강지혁의 눈가를 부드럽게 매만졌다.“전에 내가 말했잖아. 네가 정말 나한테 미안해야 할 일을 했다고 해도 울면 봐주겠다고.”그녀는 강지혁의 눈에 담긴 우울함이 사라질 수 있게 일부러 환히 웃으며 얘기했다.그러자 그 말을 들은 강지혁의 눈에 조금씩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유진아, 너를 향한 내 감정은 언제나 그대로일 거야.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든 절대 변하지 않을 거야.”강지혁은 임유진의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심장에 가져갔다.“그러니까 너도 약속해. 날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절대 변하지 않을 거라고. 약속해.”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깜빡였다.탁유미와의 대화에서 사람의 감정은 언젠가는 변한다는 말에 깊이 공감했는데 눈앞에 있는 남자는 자신의 감정은 변하지 않을 거라고 하고 있다.소민준과의 관계에서 질릴 대로 질려 그에게 모든 감정이 사라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를 사랑하고 있고 그와 영원히 하고 싶은 것 또한 사실이다.“응, 영원히 너만 사랑할게. 절대 변하지 않을게. 약속해.”임유진은 진지한 얼굴로 그에
임유진은 한지영이 정신을 차린 모습을 떠올리면 마음이 아프다가도 그녀가 활기를 되찾아줘서 참으로 고마웠다.한지영은 백연신과 그렇게 헤어진 후 자포자기하는 것이 아닌 적극적으로 치료에 임하며 회복에 힘썼다. 심지어 며칠 전에는 미소를 지으며 이런 말까지 했다.“고작 남자랑 헤어진 것뿐인데 뭐. 연애가 다 이런 거 아니겠어? 사랑했다가 또 헤어졌다가. 그래서 결혼까지 가는 게 기적이라는 말도 있잖아. 열렬히 사랑했으니 그거로 난 됐어. 혹시 알아? 퇴원한 뒤에 진정한 내 운명이 나를 찾아올지.”“다행이네요.”탁유미는 한지영의 말을 전해 듣고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유진 씨랑 지영 씨는 나처럼 이러지 말고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어요.”그녀는 자신의 인생에서 더 이상의 사랑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대화를 나누던 임유진과 탁유미는 병실 밖의 누군가가 그들의 대화를 다 듣고 있는 것을 몰랐다....임유진은 탁유미에게 인사한 후 강지혁과 함께 강씨 저택으로 돌아왔다.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2층으로 올라가려는데 강지혁이 뒤에서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왜 그래?”갑작스러운 포옹에 임유진이 물었다.사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강지혁은 오늘따라 말수가 무척이나 적었고 시선은 거의 창밖에 고정하다시피 했다.그 모습에 임유진이 몇 번이나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지 물었지만 강지혁은 그때마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대답을 피했다.“그냥... 갑자기 안고 싶어져서.”강지혁은 낮게 중얼거리며 아까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그는 이경빈을 따라 탁유미의 병실 앞으로 왔다가 비스듬히 열린 문틈 사이로 임유진과 탁유미의 대화 내용을 들었다.탁유미가 자신에게 상처 준 사람은 다시 받아줄 생각이 없다고 했을 때 이경빈은 휘청하며 그대로 주저앉았고 입을 틀어막으며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했다.그 순간만큼은 우는 것조차도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맨날 안으면서 아직도 부족해?”임유진이 실소하며 물었다.“응. 부족해.”강지혁에게는 어쩌면 평생 부족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무의식 속에서 그 언젠가 임유진이 모든 진실을 알게 되고 그를 떠나면 그때 누군가가 이렇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줬으면 해서 일지도 모른다....탁유미는 이틀 정도 중환자실에 있다가 모든 수치가 안정된 후 바로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다만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앞으로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아야만 했다.탁유미는 간호사가 들어와 약을 갈아줄 때마다 보이는 수술 자국을 보면서 조금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그녀가 아무리 원치 않았다고 해도 지금 그녀의 몸 안에 있는 간은 이경빈의 간이었다.어쩌면 하늘이 조금은 그녀를 가엽게 여겨준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런 방식으로 살게 된 건지도 모른다.윤이와 김수영은 요 며칠 거의 탁유미 곁에서 떨어지지 않다시피 했고 임유진도 자주 탁유미를 보러 병원에 왔다.“유진 씨, 미안해요. 괜히 나 때문에 힘들게 왔다 갔다 하고...”탁유미는 미안한 얼굴로 임유진의 큰 배를 바라보았다.지금쯤 집에서 태교나 들으며 휴식을 취해도 모자란 데 괜히 자신 때문에 임유진이 고생하고 있는 것 같았다.“언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언니가 나였으면 안 이랬을까요? 그러니까 너무 그러지 않아도 돼요.”임유진은 말을 하며 의자에 앉았다.“나 윤이 데리고 나갈 테니까 둘이서 얘기하고 있어.”김수영이 꾸벅꾸벅 졸고 있는 윤이를 안아 들며 보호자가 쉴 수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임유진은 두 사람이 들어간 것을 확인한 후 탁유미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혁이가 그러는데 이경빈 씨도 며칠 전부터는 걸어 다닐 수 있게 됐대요. 그런데... 언니 병실까지 왔다가 매번 들어오지는 못하고 다시 돌아가나 봐요.”그 말에 탁유미는 담담하게 대꾸했다.“이경빈과의 인연은 여기서 끝이에요. 어차피 이경빈도 몸이 다 나아지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거고 나는 계속 여기서 살게 되겠죠. 물론 나랑은 끝이라도 윤이랑은 부자간의 정이 있으니까 둘이서는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네요.”“이경빈 씨와는 정말 일말의 가능성도 없는 거예요?”임유진의
다시 눈을 뜬 이경빈이 보게 된 건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강지혁이었다.마취가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아서 그런지 통증 같은 건 없었다.“유미는... 어떻게 됐습니까?”이경빈이 힘겹게 입을 열며 물었다.“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탁유미 시는 지금 중환자실에 있어요. 이틀 정도 경과를 지켜봐야 한대요.”그의 말에 대답해준 건 강지혁이었다.이경빈은 그 말에 안도의 한숨을 쉬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수술이 무사히 끝났으니 된 거다.앞으로 두 번 다시 탁유미 곁에 모습을 드러낼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녀의 몸 안에 그의 일부가 살아 숨 쉬고 있으니까, 그녀가 죽을 때까지 줄곧 함께하게 될 거니까 그것으로 됐다.그리고 그녀가 준 골수도 평생 그와 함께 할 테니 그 역시 이것으로 그녀와 평생 함께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이경빈은 탁유미의 상태 외에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마치 자기 몸은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였다.의사가 수술 후 주의사항과 나타날 수 있는 증상들에 관해 설명해주는데도 그는 시큰둥한 얼굴로 침묵만 고수할 뿐이었다.강지혁은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의사와 간호사가 전부 다 나간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탁유미 씨 사건을 뒤엎으려고 한다고 들었는데 그렇게 되면 이강 그룹이 큰 타격을 입게 될 겁니다. 어쩌면 판결 결과에 따라 이경빈 씨는 감방살이하게 될지도 모르고요.”“알고 있어요.”이경빈이 담담하게 말했다.자신의 결정으로 그룹에 어떤 파문이 일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그가 받아야 할 벌이다.복수하겠다는 생각에 매몰돼 공수진의 말만 믿고 거짓 증언한 그의 업보다.탁유미가 형을 살게 된 것에 제일 큰 공헌을 한 건 바로 그의 증언이었다.그러니 그녀를 감옥으로 보낸 건 그나 다름없었다.“정말 앞으로는 탁유미 씨 앞에 나타나지 않을 생각입니까?”강지혁이 물었다.“내가 유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많지 않아요. 그런데 유미가 그걸 원한다고 하니 나로서는 들어줄 수밖에요.”그 소원을
“임유진 씨한테 맡기려고 했는데 너를 설득하지 못할까 봐... 그래서 너와 직접 얘기하려고 들어왔어. 내 얼굴 보고 싶지 않다는 거 알아. 내 간이 너한테는 달갑게 느껴지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아. 하지만...”이경빈은 주먹을 꽉 말아쥐더니 탁유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그래도 수술은 받아줘. 네가 수술을 받으면 그때는 두 번 다시 네 앞에 나타나지 않을게. 네가 원하는 건 뭐든 다 해줄게.”이경빈은 지금 오직 그녀가 살기만을 바랐다.그녀만 살 수 있다면 뭐든 좋았다.탁유미는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만약 나한테 간을 기증해주면 수술 후에 후유증 같은 게 생길 수도 있어. 그래도 괜찮아?”평온한 그녀의 말투에 이경빈은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수, 수술받으려고?!”“...응.”윤이와 김수영을 위해 그녀는 한번 희망을 걸어보고 싶었다.“간을 기증해주는 대신에 뭐 바라는 거 있으면 지금 여기서 확실하게 얘기해. 너한테 빚지는 건 싫으니까. 물론 내가 수술대 위에서 죽게 되면 그때는 네가 바라는 게 뭐든 간에 들어줄 수 없게 되겠지만.”“아니! 넌 죽지 않아!”이경빈이 흥분해서 외쳤다.“분명히 괜찮을 거야. 네 골수를 이식받았을 때 나는 아무런 거부반응도 없었어. 그러니까 내가 너한테 주는 것도 괜찮을 거야. 걱정하지 마!”이경빈은 확신에 찬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래서 조건은? 그것부터 말해.”탁유미의 말에 이경빈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조건이라니, 그녀에게 간을 기증해주는 대신 바라는 게 있다고 하면 그녀가 멀쩡히 살아 숨 쉬는 것밖에 없다.그녀가 살 수 있다면 간 따위 몇 번이고 더 기증해줄 수 있다.“바라는 거 없어. 그리고 나한테 빚진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돼. 오히려 지금은 내가 너한테 빚진 걸 갚는 거니까. 너도 그때 나한테 골수를 기증해줬잖아.”“그래? 그럼 서로 빚진 게 없는 거네? 알았어. 수술 무사히 끝나면... 우리 더는 보지 말자. 나는 더 이상 너랑
“유진 씨? 유진 씨가 여기는 어떻게 왔어요?”탁유미가 깜짝 놀라며 임유진에게 물었다.“이경빈 씨 전화를 받고 왔어요.”임유진은 탁유미의 곁으로 다가가며 말했다.“언니, 수술해요. 지금이 마지막 기회예요. 이 기회를 포기하면 그때는 정말 돌이킬 수 없어져요.”“유진 씨!”탁유미는 갑작스러운 임유진의 말에 당황해하며 그녀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그러고는 서둘러 윤이를 바라보았다.임유진은 윤이가 바로 그녀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라는 것을 알기에 태연한 표정이었다.“언니가 남은 시간을 편히 보내고 싶은 건 알겠어요. 그리고 수술 결과가 안 좋으면 그 남은 시간마저 사라지게 될까 봐 두려워하는 것도 알겠고요. 하지만 언니... 만약 수술에 성공하면 그때는 윤이가 어른이 되는 모습까지 볼 수 있어요.”임유진은 말을 하며 자신의 복부를 쓰다듬었다.“언니, 만약 그때 내가 배 속의 아이를 한 명 지우는 걸 택했으면 어쩌면 아이들이나 나나 조금 더 안전했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랬으면 결코 지금 같은 행복감은 느끼지 못했을 거예요. 나는 그때 의사 선생님들의 권고에도, 혁이의 반대에도 결국 아이를 포기하지 않았어요. 아이들과 함께 이겨내고 싶었어요. 그러니까 언니도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으면 좋겠어요. 쉽게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윤이도 언니가 그러기를 바랄 거예요. 세상에 엄마를 일찍 보내고 싶어 하는 자식은 없으니까요. 윤이를 위해서라도 포기하지 말아줘요.”탁유미는 그 말에 몸을 움찔하더니 시선을 돌려 어리둥절한 표정의 아들을 바라보았다.윤이는 임유진의 말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한 가지만은 본능적으로 알아들었다.“엄마, 윤이는 엄마가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윤이랑 함께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제 윤이가 키도 크고 힘도 세지면 그때는 윤이가 엄마를 지켜줄게요!”탁유미는 그 말에 결국 눈물을 보였다.윤이는 서둘러 침대 위로 올라가더니 앙증맞은 손으로 하염없이 흐르는 그녀의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그때 병실
임유진은 그 말에 깜짝 놀라며 얼른 답했다.“알겠어요. 지금 당장 병원으로 갈게요!”“임유진 씨...”전화를 끊으려던 그때 기어들어 갈 듯한 이경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내가 웬만하면 이런 부탁을 하지 않는데 지금은 임유진 씨 말고는 부탁할 사람이 없어서 이렇게 부탁 좀 할게요. 제발... 제발 유미 좀 설득해주세요. 유미가 내 간을 받고 수술할 수 있게 제발 도와주세요...”임유진은 그의 간절한 부탁에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그간 자주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경빈과는 몇 번 만난 적이 있다. 그래서 그가 얼마나 자존심이 강한 남자인지 임유진은 아주 잘 알고 있다.그런데 그런 남자가 지금 탁유미의 목숨 때문에 제발이라는 말까지 하며 그녀에게 간절히 부탁하고 있다.만약 이대로 탁유미가 죽게 되면 이경빈은 어쩌면 평생 지옥 속에서 살지도 모른다.“알겠어요.”“무슨 일이야?”전화를 끊자마자 옆에 있던 강지혁이 물었다.“유미 언니 지금 병원에 있대. 지금 바로 간이식 수술을 받지 않으면 언니가 위험하대.”임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외투를 챙겼다.“언니가 수술받을 수 있게 설득하러 가야겠어.”“같이 가.”“너는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저녁에 다시 하면 돼. 너 혼자 보내는 게 걱정돼서 그래.”“내가 왜 혼자야. 네가 붙여둔 경호원분들이 있는데. 걱정하지 마.”“그래도 걱정돼.”강지혁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솔직히 그는 마음 같아서는 외딴 섬을 하나 사들여 임유진을 그 섬에 데리고 가 자신의 시야 안에서만 있게 하고 싶었다.임유진은 그의 고집스러운 말에 결국 알겠다며 같이 밖으로 향했다.병원.탁유미가 있는 병실 앞으로 뛰어와 보니 문밖 의자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인 채 머리를 꽉 쥐고 있는 이경빈의 모습이 보였다.“언니는 어떻게 됐어요?”임유진이 다가와 물었다.이경빈은 그 말에 고개를 번쩍 들고 임유진을 쳐다보았다.임유진은 이경빈과 눈이 마주친 순간 몸이 움찔했다.이경빈이 지독하게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이경빈은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그대로 탁유미를 안아 들고 윤이에게 말했다.“지금 당장 엄마 데리고 병원으로 갈 거야. 윤이도 엄마 아픈 거 싫지?”윤이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이경빈을 따라 차량 쪽으로 달려갔다.차 문이 열린 후 이경빈은 탁유미를 조수석에 내려놓았고 윤이는 아무 말 없이 서둘러 뒷좌석에 올라탔다.아이는 시트에 편히 등을 기대는 것이 아닌 몸을 앞으로 하며 잔뜩 긴장한 얼굴로 탁유미를 바라보며 말했다.“엄마, 조금만 참아요. 병원에 가면 의사 선생님들이 엄마 구해줄 거예요. 그러면 하나도 안 아플 거예요!”탁유미는 그 말에 남은 힘을 끌어다 애써 웃어 보였다. 아들의 걱정 가득한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엄마는 괜찮아... 조금만 있으면 금방 괜찮아져.”모자의 대화에 이경빈은 가슴이 미어져 서둘러 시동을 걸고 병원으로 향했다.가는 길 그는 혹여 아픈 소리를 내면 윤이가 걱정할까 봐 이를 꽉 깨물고 참는 그녀를 보며 문득 과거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그날 탁유미는 그와 나란히 걷던 도중 울퉁불퉁한 바닥에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분명히 아플 텐데도 그녀는 괜찮다며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서더니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다시 걸었다.그러다 날이 어두워지고 집에 거의 도착할 때쯤 그녀의 발걸음은 티가 나게 느려졌고 이에 이상함은 여긴 이경빈은 그녀의 발을 힐끔 봤다가 그제야 퍼렇게 멍든 그녀의 발목을 발견했다.“바보야? 왜 아프다고 말을 안 해?”이경빈의 추궁에 탁유미는 그의 눈빛을 피하며 우물쭈물 답했다.“아프다 그러면 또 걱정할 거잖아. 그리고 솔직히 이 정도는 집에 가서 약 바르면 금방 나아.”탁유미는 늘 이랬다. 늘 이렇게 자기보다는 옆에 사람을 더 위하며 자기가 받는 고통은 아무렇지 않은 것으로 치부해버렸다.그녀는 그런 여자였다.이경빈은 차량이 빨간 불에 멈출 틈을 타 티슈를 꺼내 탁유미의 땀을 닦아주었다.많이 아픈 건지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땀 범벅이 되었고 고통을 참느라 이빨에게 혹사당한 입술은 빨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