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목에 남은 붉은색 자국이 마치 불타오르는 것처럼 뜨거웠다.임유진은 눈을 감을 때마다 이 자국 위에 입을 맞췄던 강지혁이 떠올라 미칠 것 같았다....3일 뒤, 탁유미는 아침 일찍 일어나 아직 자고 있는 윤이 얼굴을 바라보았다.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이렇게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벌써 꽉 차는 기분이다.돌이켜보면 그때 아이를 지우지 않은 건 세상에서 제일 잘한 일이었다. 물론 아이 때문에 두 배로 더 힘든 시기를 보내야 했을 때도 있었지만 지금에 와서 보니 그 모든 것이 다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그때 탁유미 엄마가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세상을 다 가진듯한 얼굴의 딸을 보더니 피식 웃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유미야, 짐 정리는 이제 끝이야. 어차피 오후에 출발할 거니까 지금 좀 자 둬.”“잠이 안 와요.”탁유미는 고개를 저었다.“이따가 이삿짐센터도 오기로 했잖아요. 슬슬 일어나야죠.”“G 시에 가게 되면 가게도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조금 걱정이 되네.”탁유미 엄마의 얼굴은 근심과 걱정으로 가득했다.‘윤이 식당’이 대단히 장사가 잘됐던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단골손님도 많아졌기에 수입이 대체로 안정적이었다. 하지만 G 시로 가게 되면 모든 걸 다시 처음부터 구축해 나가야 하니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이곳에서 자리 잡았던 것처럼 거기서도 열심히 하면 되죠. 걱정하지 마세요, 엄마, 우리 세 식구 분명히 괜찮을 거예요.”탁유미 엄마는 씩씩한 딸을 보며 마음이 미어졌다.“나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엄마랑 윤이가 있는데 내가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요.”탁유미는 자신의 엄마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이곳을 떠나는 건 다른 게 아닌 ‘행복’해지려고 가는 것이다....커다란 연회 홀에서는 지금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이경빈은 오늘 이곳에서 공수진과의 결혼 날짜를 발표할 예정이다.전에는 단지 애인 사이인 것만 알렸다면 오늘은 확실히 두 사람이 맺어지게 된다는 일종의 서약과도 같았
“아빠가 이따 결혼 날짜 발표는 경빈 씨가 하는 게 좋겠대요.”“그래.”공수진이 원하는 거라면 다 해줄 수 있다.“그리고 이따 음악이 흐르면 나랑 같이 춤춰요.”“그래.”그때 휴대폰 진동이 울렸고 이경빈은 발신자를 힐끗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공수진에게 전화 한 통만 하고 오겠다며 연회장 구석 쪽으로 갔다.그에게 걸려온 발신 번호는 탁유미를 감시하려고 보낸 사람의 번호였다.그런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는 건 탁유미 쪽에 급한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통화 버튼을 누르고 상대방의 말을 듣던 이경빈의 얼굴색이 급속도로 변해버렸다.“대표님, 탁유미 씨가 3시 45분 출발의 KTX 승차권을 구매한 것이 확인됐습니다. 아무래도 S 시를 떠나려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그리고?”“혼자가 아닙니다.”혼자가 아니라고?탁유미에게는 어머니가 있고 전에 출소했을 때도 어머니와 함께 사라졌었다.그래서 같이 있는 건가?“아들이 한 명 있습니다.”그 말에 이경빈은 하마터면 휴대폰을 놓칠 뻔했다.“뭐라고?”“3, 4살 정도 되는 아들이 한 명 있습니다.”아들? 탁유미에게 아들이라니?!이경빈은 머리가 새하얘졌다.“대표님, 이제 어떡할까요. 못 떠나게 잡을까요, 아니면 이대로 보낼까요?”이대로 그녀가 S 시를 벗어나게 되면 다시 찾는데 또다시 시간이 걸리게 된다.그때 연회장의 조명이 하나둘 꺼지더니 감미로운 음악 소리가 흘러나왔다.공수진은 그와 춤을 추기 위해 이경빈의 옆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오늘 두 사람이 함께 춤을 추는 사진을 위해 특별히 기자까지 섭외해 두었다.그리고 오늘이 지나면 그간 인터넷에서 떠돌던 그녀를 향한 동정의 시선들이 단번에 사라지게 될 것이다.하지만 그녀가 막 입을 열려던 찰나, 이경빈이 휴대폰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떠나지 못하게 당장 잡아! 그리고 내가 갈 때까지 절대 놓치지 말고!”춤을 추기로 약속했던 남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연회장 밖으로 뛰쳐나갔다.“경빈 씨!”당황한 그녀가 자신도 얼른 따라나
“모르겠어요, 나도...”공수진은 입술을 꼭 깨물고 대답했다.이경빈이 이상해진 건 전화를 받고 나서부터였다. 대체 그건 누구에게서 결려온 전화일까? 누굴 잡으라고 한 거지?그녀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혹시 우리 수진이와의 결혼을 원하지 않아서 떠난 건 아닐까요...?”공수진 엄마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공수진의 집안은 원래 소소하게 중소기업을 운영했었지만 요 몇 년간 이씨 가문의 지지를 받으며 회사가 빠르게 성장해 공씨 가문은 어느새 상류층 가문에 낄 수 있게 되었다.세간에서는 그들을 이씨 가문을 이용해 자신의 지위를 올리려는 기생충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다.그러니 만약 두 사람의 결혼이 깨지기라도 하면 공씨 가문은 계속해서 비난을 받을 것이며 여차하면 예전으로 돌아가게 될 수도 있다.“결혼 날짜도 이미 다 받아왔는데 무슨. 당신은 재수 없는 소리 좀 하지 마.”공수진의 아빠가 호통을 쳤다. 그러고는 두 명을 향해 조용히 속삭였다.“지금 사람들 많은 거 안 보여? 태연한 척해. 아무 문제 없는 것처럼.”공수진의 부모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손님들에게 웃어 보였다.그리고 공수진은 입술을 깨물며 이경빈이 사라진 연회장 입구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아까 그는 마치 그녀 따위 보이지 않는 듯 화를 내며 뛰쳐나갔다.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알면서도 그는 사라져버렸다.대체 누굴까? 대체 누가 이경빈을 이곳에서 사라지게 만든 걸까?강한 불안감이 공수진을 감쌌다.탁유미는 지금 이삿짐센터 직원분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그리고 모든 짐이 차량 위에 실린 걸 본 뒤에야 엄마와 아들을 바라보았다.“엄마, 짐은 이제 됐으니까 일단 식사부터 하고 천천히 출발해요.”윤이는 예쁜 두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엄마, 그럼 우리 이제 S 시로는 안 돌아오는 거예요?”“음...”탁유미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언제까지 이경빈의 눈을 피해 살아야 하는지 그녀도 몰랐으니까.“이제 윤이가 크면 윤이 좋아하는 곳으로 가자.”
탁유미 엄마는 분노가 치밀어 올라 한숨이 절로 나왔다.공수진과 비교하면 자신의 딸은 처지가 너무나도 기구했다.“엄마! 윤이 듣겠어요.”탁유미 엄마는 그제야 입을 꾹 닫았다.다행히 윤이는 지금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두 사람의 대화는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시간은 천천히 흘러갔고 탁유미는 점점 더 불안해졌다. 심지어 지금 당장 엄마와 아이를 데리고 열차에 오르고 싶은 충동도 일었다.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아주기라도 한 듯 마침내 안내방송이 들려오고 전광판에는 그들이 타게 될 열차 옆에 빨간색 승차 준비 등이 깜빡였다.하지만 그때 하필이면 윤이가 화장실을 가고 싶다고 했고 탁유미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화장실로 갔다.“엄마, 나 윤이 데리고 화장실 갔다 올게요.”“늦지 않게 빨리 와.”“알겠어요.”그녀는 윤이를 혼자 남자 화장실로 보낼 수는 없었기에 아이를 데리고 여자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그리고 볼일을 보게 한 다음 아이의 손을 깨끗하게 씻어주었다.“엄마, 혹시 무서워요?”막 나가려는데 아이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탁유미는 윤이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왜 그렇게 생각해?”“엄마 얼굴이 지금 딱 악당을 마주치기 직전의 얼굴이에요.”윤이는 요즘 히어로물 애니메이션에 푹 빠져 있었다탁유미는 그 말에 웃을 수가 없었고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다.아이도 알아챌 수 있을 만큼 그렇게 얼굴에 티가 탔나?“엄마, 내가 엄마 지켜줄 테니까 무서워하지 말아요!”그녀는 눈가가 젖어오는 것을 느끼고는 자기도 모르게 아이를 꼭 끌어안았다.“응, 엄마 이제 안 무서워.”그녀에게 있어 윤이를 낳은 건 정말 최고로 잘한 일일 것이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아이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이나 했을까?탁유미는 아마 윤이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것이다.그때 안내방송이 한 번 더 울리고 탁유미는 그제야 아이를 데리고 화장실에서 나왔다.하지만 몇 걸음 채 떼기도 전에 그녀는 다시 제자리에 굳어버렸다.몸은 덜덜 떨리고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다
이경빈은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다. 아이는 대체 어떻게 된 건지.하지만 막상 아이를 보고 나니 또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전에 한 번 만난 적 있는 아이였기 때문이었다.그때 이상할 정도로 아이가 신경 쓰이고 심지어는 후원까지 하고 싶더라니... 그게 그녀의 아이였을 줄이야...이경빈은 허리를 숙이더니 자신과 닮은 듯한 눈매를 가진 아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너... 이름이 뭐야?”그의 목소리는 잠겨있었다.“‘탁윤’이에요. 그런데 다들 윤이라고 불러요.”윤이는 이경빈을 향해 활짝 웃었다.그리고 이경빈은 그 미소를 보며 왜 그때 이 아이가 이상하리만큼 신경이 쓰였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웃는 얼굴이 탁유미와 똑 닮아있었기 때문이다.탁윤...“아빠는... 어디 있어?”그의 목소리가 언뜻 떨리는 것 같기도 했다.그 질문에 아이의 얼굴은 갑자기 시무룩하게 변했다.“없어요. 엄마가 그러는데 아빠는 하늘나라로 갔대요.”하늘나라?이경빈은 아이를 단숨에 안아 들더니 창백한 얼굴로 서 있는 탁유미의 앞으로 다가갔다.“아이... 이리 줘.”그녀의 목소리는 티 나게 떨려있었다.“소란 피우고 싶은 게 아니라면 조용히 따라와.”이경빈의 싸늘한 시선에 탁유미는 몸이 움찔 떨렸다.꼼짝없이 잡힌 걸까? 윤이까지 들켰으니 이제 벗어나긴 힘든 걸까?아이의 존재를 그렇게 숨기고 숨겼는데 결국에는 들켜버렸다.그녀는 지금 할 수만 있다면 무력을 써서라도 아이를 그의 품에서 빼앗아 오고 싶었다. 하지만 천진난만한 윤이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럴 마음이 싹 사라져버렸다.윤이한테는 어른들의 더럽고 추악한 세계를 절대 보여주고 싶지 않았으니까.“알았어... 갈게.”그녀가 입술을 꽉 깨물고 마지못해 답했다.“엄마, 우리 어디 가요? 기차 안 타요?”아이가 그녀의 말을 듣고 물었다.“윤이야, 우리 기차는 다음에 타고 오늘은... 아저씨랑 다른 곳으로 갈까?”“할머니는요? 할머니는 같이 안 가요?”이에 탁유미는 자기도 모르게 엄마가
탁유미는 한숨을 깊게 들이켜고 이경빈과 함께 차에 올라탔다.그때 탁유미의 휴대폰이 울리고 발신자를 보니 엄마였다.통화버튼을 누르니 전화기 너머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너 지금 어디 있어? 왜 아직도 안 와?”“엄마, 나랑 윤이 못 가요. 엄마 먼저 근처에서 방 잡고 있어요.”“뭐? 무슨 일 있는 거야?”탁유미가 대답하려는데 마침 이경빈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어떻게 대답하는지 보려는 듯 그의 입가에는 싸늘한 미소가 걸려있었다.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있던 윤이도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이렇게 보니 윤이의 눈이 이경빈과 많이 닮아 있었다. 아니, 점점 닮아가는 건가?“나랑 윤이, 지금 이경빈이랑 같이 있어요.”탁유미가 담담하게 얘기했다.그러자 ‘헉’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윤이를... 본 거야? 그럼... 너한테...”탁유미 엄마는 말까지 더듬었다.“걱정하지 마세요, 엄마. 내가 알아서 해결할게요.”탁유미는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알아서 해결해?”그때 이경빈이 입을 열었다.“뭘 알아서 해결한다는 건지 궁금하네.”싸늘한 그의 목소리에 탁유미는 물론이고 두 사람 사이에 있던 윤이도 깜짝 놀라 몸을 움찔 떨었다.하지만 아이는 이내 고개를 들더니 이경빈을 향해 말했다.“아저씨, 우리 엄마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세요. 엄마 무서워하잖아요.”아이는 탁유미와 이경빈이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는 몰랐지만 일단 엄마가 무서워한다는 건 확실히 느껴졌다.윤이는 그녀를 지켜주려는 건지 이경빈과 시선을 마주치고는 등 뒤에 있는 탁유미의 손을 꽉 잡았다.이에 이경빈은 하려던 말을 다시 집어삼켰다.전에는 생글생글 잘도 웃어주더니 지금은 탁유미 때문에 볼을 부풀리고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정말 자신의 아이가 맞는 걸까?차로 오는 길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봐도 올곧게 부딪혀오는 눈빛이 자신과 너무나도 비슷해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하지만 대체 언제 임신한 거지...?“너 몇 살이야?”윤이는 눈을 깜빡거리더니 손가락
심지어는 자신마저도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가 마음속에서 일렁이는 기분이었다.그때 세 사람을 태운 차가 천천히 호텔 입구 쪽에 멈춰서고 이경빈은 말없이 차에서 내렸다.탁유미도 윤이의 손을 잡고 그의 뒤를 따랐다.이곳은 이경빈 명의의 호텔이라 그는 당연하게도 제일 위층의 스위트룸 안으로 들어섰다.처음 이런 곳에 와본 윤이는 신기한지 이곳저곳 둘러보았고 커다란 TV를 봤을 때는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이 났다.그러다 역시 아이라 그런지 서서히 눈꺼풀이 내려왔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원래는 점심을 먹은 뒤 낮잠을 자야 하는데 기차 탈 생각에 들떠 잠을 자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 엄청 피곤했을 것이다.탁유미는 품에서 잠이 든 아이를 확인하더니 이경빈을 향해 물었다.“일단 아이 좀 재워도 될까? 그리고 할 얘기 있으면 윤이 없는 곳에서 해. 아이한테 쓸데없는 얘기 들려주고 싶지 않아.”이경빈은 옆에 있던 방문을 열어주며 암묵적으로 동의했다.탁유미는 윤이를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히고는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리고 아주 당연한 행동인 듯 아이의 말랑한 볼을 몇 번 쓰다듬어 주었다.탁유미도 알고 있다. 이제는 피할 수 없다는 걸. 지금부터는 아이를 뺏기지 않게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윤이의 곁에서 아이가 어른이 되어가는 걸 지켜봐야 하니까!탁유미는 모르겠지만 이경빈은 지금 방문에 기대 복잡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탁유미가 누군가의 ‘엄마’가 되리라고는 상상해본 적도 없다.방금 그녀가 아이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으며 따뜻한 눈길로 바라볼 때는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냥 이대로 계속 그 모습을 보고 싶었다. 평생...탁유미는 심호흡을 한번 하더니 몸을 일으켜 방에서 걸어 나왔다. 그러고는 방문을 닫고 이경빈을 향해 말했다.“하고 싶은 말이 뭐야?”“나한테서 도망가려고 애쓴 게 저 아이 때문이야?”이경빈의 눈은 다시 싸늘해졌다.그는 아까 자신이 했던 생각이 기가 막힌다는 듯 속으로 자조했다.탁유미가 뭐라고 평생을 보고 싶단 말인가.“그
탁유미 이 여자는 어떻게 고작 그 몇 마디 말로 자신을 이토록 아프게 할 수 있는 거지?!“유전자 검사해보면 알겠지.”이경빈은 심장 부근이 저릿한 것을 애써 가라앉히며 담담히 입을 열었다.“그럴 필요 없어. 절대 네 애 아니니까!”탁유미가 다급하게 얘기했다.“그건 네가 정하는 게 아니야. 그리고 내 애가 맞다면 나는 저 아이를 이씨 집안으로 데려갈 거야.”이에 탁유미는 순식간에 얼굴이 창백해져서 자기도 모르게 “안 돼!”라고 소리를 질렀다.목소리가 꽤 컸던 터라 이경빈도 조금 놀란 얼굴이었다.“너는 분명히 나한테 아이는 싫다고 했어. 그런데 왜 그 집으로 데려가려는 건데? 이씨 집안에서 누가 환영해준다고?!”윤이는 그녀의 전부나 마찬가지였다.“나는 내 피가 흐르는 아이를 눈밖에 둘 생각 없어.”탁유미의 가녀린 몸이 미친 듯이 떨렸다. 그리고 창백한 얼굴에는 절망이라는 감정이 그대로 드러났다.이경빈은 그 모습에 또다시 심장이 아파 오는 걸 느꼈다.“그래서 우리 윤이를 데려다 공수진 그 여자 애로 키우겠다는 거야?”그 말에 이경빈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이경빈, 확실히 말하는데, 나는 우리 윤이가 공수진의 아들이 되는 꼴은 절대 못 봐!”탁유미가 악에 받쳐 외쳤다.공수진은 그때 그녀를 모함했고 이경빈은 공수진을 믿었다.탁유미는 두 사람 때문에 가장 예쁘고 빛날 시간을 감옥에서 보냈다.그런데 어떻게 윤이를 그 가증스러운 여자에게 줄 수 있겠는가!정말 데려간다고 한들 공수진이 윤이를 예뻐할 리가 없었다.“절대 못 본다고? 네가 무슨 자격으로?”이경빈은 그녀의 말에 발끈하며 되물었다.“나는 윤이 엄마야. 그런데 내가 왜 자격이 없어.”탁유미는 몸을 덜덜 떨면서도 주먹을 꽉 쥐고 애써 무섭지 않은 척 노력했다.아들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 두려움은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그래? 그럼 그 자격도 없애주지.”이경빈은 싸늘하게 얘기했다.“윤이는 이씨 가문으로 데려갈 거야. 너는 앞으로
게다가 이제는 강문철도 없으니 임유진이 강씨 가문이 안주인이라는 건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또한 임유진은 임신까지 했으니 아이들이 무사히 태어나면 그때는 그 누구도 그 자리를 감히 탐낼 수 없게 된다.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에 강지혁을 대하는 것처럼 그녀를 대했다.임유진은 강지혁의 아내로서 줄곧 강지혁의 곁에 있었다.강씨 가문은 S 시에서 가장 뿌리가 깊고 또 유명한 가문이라 장례식장도 컸고 조문객들도 훨씬 많았다.강지혁은 임유진이 무리라도 할까 봐 몇 번이나 그녀에게 이만 쉬라고 했지만 임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계속해서 그의 곁을 지켰다.“나 아직 괜찮아. 진짜 힘들면 너한테 얘기할게. 나도 내 몸 귀한 줄 알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임유진도 자신이 아이셋을 가진 임산부라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그때 조문객들이 입구를 바라보며 강현수의 이름을 불렀다.이에 임유진은 살짝 움찔하더니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려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그러자 익숙한 남자의 실루엣이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강현수와 마지막으로 본 것도 이제는 몇 달 전이었다.한때는 생사를 함께 했던 친구였는데 결국에는 썩 유쾌하지 않은 방식으로 헤어지게 되었다.강현수는 오늘 부모님과 함께 장례식에 참석했다.임유진이 그를 바라봤을 때 그의 시선 역시 임유진에게 닿아있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을 보자마자 옆으로 늘어트린 손을 살짝 움켜쥐었다.그토록 오래 찾아 헤맸던 사람을, 오랜 기간 마치 습관처럼 떠올렸던 사람을 그는 번번이 놓쳐버렸다.임유진과 다른 방식으로 다시 시작할 수도 있었는데 그는 그 가능성마저도 자기 손으로 부숴버렸다.그 결과 그녀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고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으며 지금 그 남자의 곁에 서 있게 되었다.강현수는 이제 영원히 그녀 곁에는 있을 수 없게 되었다.강현수네 가족이 강지혁과 임유진의 앞으로 다가왔을 때 강현수는 위로의 말을 건네는 부모님과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어쩌면 강지혁은 줄곧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돌아온 그에게 유일한 버팀목이라고는 강문철밖에 없었으니까.“나는 솔직히 네 할아버지가 고마워. 혁이 너를 이렇게 멋있게 키워줬잖아. 그리고 나랑 만나게 해줬고.”임유진은 계속해서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갔다.“혁아, 네가 원하는 가족 간의 사랑은 앞으로 내가 줄게. 그리고 우리 아이들도 줄 거야.”그 말에 강지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임유진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가장 원하는지 이미 다 알고 있었다.“아까 네가 그랬지? 사람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게 다 다르다고. 그럼 너는? 네가 중요하게 여기는 건 뭔데?”강지혁이 임유진의 체향을 들이마시며 물었다.그녀의 냄새를 맡고 있으면 늘 이렇게 마음이 진정되고 몸이 편안해졌다.“나?”임유진은 그 말에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혁이 너랑 우리 아이들이야.”“유진아, 나는 욕심이 많아. 나는 너를 그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아. 그게 우리 아이들이라고 해도 나는 싫어. 나는 내가 네 마음속 1순위였으면 좋겠고 너한테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이 눈을 깜빡였다.설마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들을 질투하는 건가?“혁아, 너는 내 마음속 1순위야. 물론 아이들도 너무 중요하고 소중하지만 너랑은 결이 조금 달라. 혁이 너는 나한테 유일무이한 존재잖아.”임유진은 두 손을 둘러 가볍게 강지혁을 끌어안았다.이미 배가 불러올 대로 불러와 완전히 꼭 끌어안지는 못했지만 싸늘한 방 공기를 녹이기에는 충분했다.“내가 너한테 유일무이한 존재라고?”“응. 널 대신할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어. 물론 아이들을 낳고 진정한 엄마가 되면 어쩔 수 없이 아이들에게 더 신경을 쓰고 더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야. 이건 장담해. 그리고 네가 원하면 네가 원하는 방식대로 더 많이 널 사랑해줄게. 혁아,
별채로 가는 길에는 늘 조명이 켜져 있기에 어두운 저녁이라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임유진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강지혁이 방 한가운데 멀뚱히 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지혁은 불빛을 받으며 시선을 내린 채 바로 앞에 있는 냉동관을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혁아.”임유진은 그를 부르며 천천히 옆으로 다가갔다.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강지혁은 상념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돌렸다.“오지 말라니까. 여기는 나 혼자 있으면 돼.”“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왔어.”임유진은 강지혁의 바로 앞에 서서 그의 볼을 매만졌다.지금은 1월이라 날씨가 무척이나 추웠다. 게다가 지금은 밤이고 별채 쪽에는 보일러도 없었기에 바깥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추웠다.“오늘 밤도 여기 있을 거야?”임유진이 물었다.“응. 그래도 날 키워주셨으니 할 도리는 다해야지.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사람들 많이 올 거야. 너는 몸이 불편하니까 가지 말고 그냥 집에 있어.”“출산할 시기가 임박한 것도 아닌데 뭐.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나도 참석할 거야. 만약 몸이 불편하거나 하면 바로 너한테 얘기할게.”강지혁은 그 말에 임유진의 손을 살짝 잡았다.“너한테는 좋은 기억 하나 없는 사람이잖아. 그런데 왜...”“네 할아버지잖아. 네 유일한 가족이잖아. 그러니까 아무리 나를 마음에 들지 않아 했어도, 아무리 끝까지 나를 손주며느리로 받아들이지 않았어도 나는 할아버지 가시는 길을 너와 같이 보내드려야 할 의무가 있어.”다른 건 없었다.그저 강지혁의 어린 시절을 곁에서 지켜줬다는 사실만으로도 임유진은 충분히 감사했다.강지혁은 그 말에 그녀의 손을 조금 세게 쥐었다.“할아버지가 마지막에 한 말은 신경 쓰지 마. 그 말은 그냥...”“알아. 네 할아버지는 그저 누군가를 깊게 사랑하는 것으로 행복한 결과를 낳을 거라는 걸 믿지 못하시는 분이었던 거지. 네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 일도 있고 네 아버지 일도 있어서 많이 무서우셨을 거야. 너도 나중에 불행하게 될까 봐.”임유진이 말했
강지혁은 마치 강문철에게 자신이 임유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려는지 조금 격앙된 목소리로 얘기했다.강문철은 그 말에 눈동자를 돌려 자신의 유일한 손주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몇 초 후 이제는 모든 게 다 피곤한 듯 천천히 눈을 감으며 입을 열었다.“우리 집안에서... 여자한테 미친 인간 치고... 멀쩡한 사람을 못 봤다. 네가... 계속해서 이러면 너도 언젠가는...”강문철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는가 싶더니 이내 옆에 있던 종합모니터에서 삐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임유진은 그 소리에 강문철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바로 알았다.누군가의 생명이 바로 눈앞에서 멎었다.조금은 무서웠던 노인이, 강지혁의 유일한 가족이었던 노인이 이렇게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모든 게 다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강지혁은 삐 소리가 들린 뒤로 임유진의 손을 꽉 잡았다. 그렇게 계속 힘을 주다가 임유진의 입에서 아프다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며 손을 놓아주었다.“미안. 아팠지?”강지혁은 어느새 빨개진 그녀의 손을 다시 잡으며 초조한 눈길로 물었다.“괜찮아. 그것보다 할아버지...”“응. 가셨어.”강지혁의 얼굴은 가족을 잃은 사람 같지 않게 무척이나 평온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게 아니라는 걸 임유진은 알고 있다.아무리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어도 강문철은 강지혁의 할아버지고 유일한 가족이었다. 강선우가 죽은 뒤로 그의 곁을 지켜줬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강지혁은 몸을 돌려 편히 잠든 강문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리고 임유진은 그런 강지혁의 옆에 서서 그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강문철의 장례식은 3일 뒤로 정했다.그 3일 동안 시신은 냉동관에 넣은 채 강씨 저택의 별채에 두기로 했다.그리고 그 3일 동안 강지혁은 그 어떤 외부인도 별채에 들이지 않았다.별채는 강씨 가문 사람 외에는 허락하지 않는 특별한 곳이었으니까.강선우가 죽었을 때도 그의 시신은 잠시 이 별채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의
강지혁은 임유진의 고집에 결국 알겠다며 그녀와 함께 집에서 나와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한 후 강지혁은 뒤따라온 경호원에게 임유진의 곁을 맡기고 혼자 병실로 들어갔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빼빼 마른 강문철이 흰색 병상 위에 가만히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남자도 병마와 세월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강문철은 강지혁이 안으로 들어온 것을 보더니 마지막 힘을 쥐어짜 입을 움직였다.“왔... 니...”“네, 저 왔어요.”강지혁이 곁으로 다가오며 대답했다.사실 강지혁은 강문철에게 대단한 가족 간의 정은 느끼지 못했다.실제로 강문철은 강지혁이 할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느낄만한 행동을 보여주지 않았으니까.강문철은 언제나 강지혁을 자신의 뒤를 이어 강씨 가문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하나의 장기 말로 여겨왔다. 물론 그 장기 말도 쓸모가 없었다면 진작 버렸을 것이다.“이제는... 강씨 가문의 모든 게 네 손에... 달렸다. 만약... 네가 가문을 망하게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강문철이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할 말은 그게 끝이에요?”강지혁이 강문철을 빤히 바라보았다.이에 강문철은 탁한 눈동자를 옆으로 굴려 병실 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임유진... 그 아가씨... 밖에 있지? 들어오라고 해...”그 말에 강지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유진이 건드릴 생각하지 마세요.”“이 꼴로... 내가 뭘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어차피... 그 아가씨 옆에는... 네 사람 천지일 텐데.”강지혁은 그가 두 손으로 직접 키운 손주이자 가문의 후계자이기에 강지혁의 생각 같은 건 이미 훤히 꿰고 있었다.강지혁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자 강문철이 다시 입을 열었다.“그저... 마지막으로 해줄 얘기가... 있어서 그러는 것뿐이다...”호흡이 점점 가빠지고 안색도 창백해진 것이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강지혁은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발걸음을 옮겨 병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곧바로 임유진의 손을
“그래? 그럼 만약... 내가 너한테 상처를 줘도 너도 똑같이 나 안 볼 거야? 내가 아무리 용서해달라고 빌어도 나 용서 안 해줄 거야?”강지혁은 목구멍을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한마디 한마디 힘겹게 내뱉었다.이에 임유진은 몸을 돌려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강지혁을 바라보았다.“혁아, 너 대체 왜 그래? 요즘 따라 너무 불안해 보여. 무슨 일 있는 거야?”강지혁은 자신의 불안해 보인다는 말에 고개를 푹 숙였다.확실히 그는 요 며칠 줄곧 불안해하고 있었다.탁유미와 이경빈의 일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자신과 임유진의 결말도 그들과 똑같을까 봐 불안해하고 있었다.“혹시 방금 내가 한 말이 널 불안하게 만들었어? 혁아, 내가 언니를 이해한다고 했던 건 소민준과의 일이 생각나서 그랬던 거야. 네가 괜한 생각을 할 게 아니라고. 네가 나한테 상처 줄 리가 없잖아. 그리고...”임유진은 손을 들어 조금 우울해 보이는 강지혁의 눈가를 부드럽게 매만졌다.“전에 내가 말했잖아. 네가 정말 나한테 미안해야 할 일을 했다고 해도 울면 봐주겠다고.”그녀는 강지혁의 눈에 담긴 우울함이 사라질 수 있게 일부러 환히 웃으며 얘기했다.그러자 그 말을 들은 강지혁의 눈에 조금씩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유진아, 너를 향한 내 감정은 언제나 그대로일 거야.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든 절대 변하지 않을 거야.”강지혁은 임유진의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심장에 가져갔다.“그러니까 너도 약속해. 날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절대 변하지 않을 거라고. 약속해.”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깜빡였다.탁유미와의 대화에서 사람의 감정은 언젠가는 변한다는 말에 깊이 공감했는데 눈앞에 있는 남자는 자신의 감정은 변하지 않을 거라고 하고 있다.소민준과의 관계에서 질릴 대로 질려 그에게 모든 감정이 사라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를 사랑하고 있고 그와 영원히 하고 싶은 것 또한 사실이다.“응, 영원히 너만 사랑할게. 절대 변하지 않을게. 약속해.”임유진은 진지한 얼굴로 그에
임유진은 한지영이 정신을 차린 모습을 떠올리면 마음이 아프다가도 그녀가 활기를 되찾아줘서 참으로 고마웠다.한지영은 백연신과 그렇게 헤어진 후 자포자기하는 것이 아닌 적극적으로 치료에 임하며 회복에 힘썼다. 심지어 며칠 전에는 미소를 지으며 이런 말까지 했다.“고작 남자랑 헤어진 것뿐인데 뭐. 연애가 다 이런 거 아니겠어? 사랑했다가 또 헤어졌다가. 그래서 결혼까지 가는 게 기적이라는 말도 있잖아. 열렬히 사랑했으니 그거로 난 됐어. 혹시 알아? 퇴원한 뒤에 진정한 내 운명이 나를 찾아올지.”“다행이네요.”탁유미는 한지영의 말을 전해 듣고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유진 씨랑 지영 씨는 나처럼 이러지 말고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어요.”그녀는 자신의 인생에서 더 이상의 사랑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대화를 나누던 임유진과 탁유미는 병실 밖의 누군가가 그들의 대화를 다 듣고 있는 것을 몰랐다....임유진은 탁유미에게 인사한 후 강지혁과 함께 강씨 저택으로 돌아왔다.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2층으로 올라가려는데 강지혁이 뒤에서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왜 그래?”갑작스러운 포옹에 임유진이 물었다.사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강지혁은 오늘따라 말수가 무척이나 적었고 시선은 거의 창밖에 고정하다시피 했다.그 모습에 임유진이 몇 번이나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지 물었지만 강지혁은 그때마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대답을 피했다.“그냥... 갑자기 안고 싶어져서.”강지혁은 낮게 중얼거리며 아까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그는 이경빈을 따라 탁유미의 병실 앞으로 왔다가 비스듬히 열린 문틈 사이로 임유진과 탁유미의 대화 내용을 들었다.탁유미가 자신에게 상처 준 사람은 다시 받아줄 생각이 없다고 했을 때 이경빈은 휘청하며 그대로 주저앉았고 입을 틀어막으며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했다.그 순간만큼은 우는 것조차도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맨날 안으면서 아직도 부족해?”임유진이 실소하며 물었다.“응. 부족해.”강지혁에게는 어쩌면 평생 부족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무의식 속에서 그 언젠가 임유진이 모든 진실을 알게 되고 그를 떠나면 그때 누군가가 이렇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줬으면 해서 일지도 모른다....탁유미는 이틀 정도 중환자실에 있다가 모든 수치가 안정된 후 바로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다만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앞으로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아야만 했다.탁유미는 간호사가 들어와 약을 갈아줄 때마다 보이는 수술 자국을 보면서 조금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그녀가 아무리 원치 않았다고 해도 지금 그녀의 몸 안에 있는 간은 이경빈의 간이었다.어쩌면 하늘이 조금은 그녀를 가엽게 여겨준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런 방식으로 살게 된 건지도 모른다.윤이와 김수영은 요 며칠 거의 탁유미 곁에서 떨어지지 않다시피 했고 임유진도 자주 탁유미를 보러 병원에 왔다.“유진 씨, 미안해요. 괜히 나 때문에 힘들게 왔다 갔다 하고...”탁유미는 미안한 얼굴로 임유진의 큰 배를 바라보았다.지금쯤 집에서 태교나 들으며 휴식을 취해도 모자란 데 괜히 자신 때문에 임유진이 고생하고 있는 것 같았다.“언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언니가 나였으면 안 이랬을까요? 그러니까 너무 그러지 않아도 돼요.”임유진은 말을 하며 의자에 앉았다.“나 윤이 데리고 나갈 테니까 둘이서 얘기하고 있어.”김수영이 꾸벅꾸벅 졸고 있는 윤이를 안아 들며 보호자가 쉴 수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임유진은 두 사람이 들어간 것을 확인한 후 탁유미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혁이가 그러는데 이경빈 씨도 며칠 전부터는 걸어 다닐 수 있게 됐대요. 그런데... 언니 병실까지 왔다가 매번 들어오지는 못하고 다시 돌아가나 봐요.”그 말에 탁유미는 담담하게 대꾸했다.“이경빈과의 인연은 여기서 끝이에요. 어차피 이경빈도 몸이 다 나아지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거고 나는 계속 여기서 살게 되겠죠. 물론 나랑은 끝이라도 윤이랑은 부자간의 정이 있으니까 둘이서는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네요.”“이경빈 씨와는 정말 일말의 가능성도 없는 거예요?”임유진의
다시 눈을 뜬 이경빈이 보게 된 건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강지혁이었다.마취가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아서 그런지 통증 같은 건 없었다.“유미는... 어떻게 됐습니까?”이경빈이 힘겹게 입을 열며 물었다.“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탁유미 시는 지금 중환자실에 있어요. 이틀 정도 경과를 지켜봐야 한대요.”그의 말에 대답해준 건 강지혁이었다.이경빈은 그 말에 안도의 한숨을 쉬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수술이 무사히 끝났으니 된 거다.앞으로 두 번 다시 탁유미 곁에 모습을 드러낼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녀의 몸 안에 그의 일부가 살아 숨 쉬고 있으니까, 그녀가 죽을 때까지 줄곧 함께하게 될 거니까 그것으로 됐다.그리고 그녀가 준 골수도 평생 그와 함께 할 테니 그 역시 이것으로 그녀와 평생 함께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이경빈은 탁유미의 상태 외에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마치 자기 몸은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였다.의사가 수술 후 주의사항과 나타날 수 있는 증상들에 관해 설명해주는데도 그는 시큰둥한 얼굴로 침묵만 고수할 뿐이었다.강지혁은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의사와 간호사가 전부 다 나간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탁유미 씨 사건을 뒤엎으려고 한다고 들었는데 그렇게 되면 이강 그룹이 큰 타격을 입게 될 겁니다. 어쩌면 판결 결과에 따라 이경빈 씨는 감방살이하게 될지도 모르고요.”“알고 있어요.”이경빈이 담담하게 말했다.자신의 결정으로 그룹에 어떤 파문이 일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그가 받아야 할 벌이다.복수하겠다는 생각에 매몰돼 공수진의 말만 믿고 거짓 증언한 그의 업보다.탁유미가 형을 살게 된 것에 제일 큰 공헌을 한 건 바로 그의 증언이었다.그러니 그녀를 감옥으로 보낸 건 그나 다름없었다.“정말 앞으로는 탁유미 씨 앞에 나타나지 않을 생각입니까?”강지혁이 물었다.“내가 유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많지 않아요. 그런데 유미가 그걸 원한다고 하니 나로서는 들어줄 수밖에요.”그 소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