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유미는 한숨을 깊게 들이켜고 이경빈과 함께 차에 올라탔다.그때 탁유미의 휴대폰이 울리고 발신자를 보니 엄마였다.통화버튼을 누르니 전화기 너머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너 지금 어디 있어? 왜 아직도 안 와?”“엄마, 나랑 윤이 못 가요. 엄마 먼저 근처에서 방 잡고 있어요.”“뭐? 무슨 일 있는 거야?”탁유미가 대답하려는데 마침 이경빈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어떻게 대답하는지 보려는 듯 그의 입가에는 싸늘한 미소가 걸려있었다.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있던 윤이도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이렇게 보니 윤이의 눈이 이경빈과 많이 닮아 있었다. 아니, 점점 닮아가는 건가?“나랑 윤이, 지금 이경빈이랑 같이 있어요.”탁유미가 담담하게 얘기했다.그러자 ‘헉’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윤이를... 본 거야? 그럼... 너한테...”탁유미 엄마는 말까지 더듬었다.“걱정하지 마세요, 엄마. 내가 알아서 해결할게요.”탁유미는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알아서 해결해?”그때 이경빈이 입을 열었다.“뭘 알아서 해결한다는 건지 궁금하네.”싸늘한 그의 목소리에 탁유미는 물론이고 두 사람 사이에 있던 윤이도 깜짝 놀라 몸을 움찔 떨었다.하지만 아이는 이내 고개를 들더니 이경빈을 향해 말했다.“아저씨, 우리 엄마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세요. 엄마 무서워하잖아요.”아이는 탁유미와 이경빈이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는 몰랐지만 일단 엄마가 무서워한다는 건 확실히 느껴졌다.윤이는 그녀를 지켜주려는 건지 이경빈과 시선을 마주치고는 등 뒤에 있는 탁유미의 손을 꽉 잡았다.이에 이경빈은 하려던 말을 다시 집어삼켰다.전에는 생글생글 잘도 웃어주더니 지금은 탁유미 때문에 볼을 부풀리고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정말 자신의 아이가 맞는 걸까?차로 오는 길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봐도 올곧게 부딪혀오는 눈빛이 자신과 너무나도 비슷해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하지만 대체 언제 임신한 거지...?“너 몇 살이야?”윤이는 눈을 깜빡거리더니 손가락
심지어는 자신마저도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가 마음속에서 일렁이는 기분이었다.그때 세 사람을 태운 차가 천천히 호텔 입구 쪽에 멈춰서고 이경빈은 말없이 차에서 내렸다.탁유미도 윤이의 손을 잡고 그의 뒤를 따랐다.이곳은 이경빈 명의의 호텔이라 그는 당연하게도 제일 위층의 스위트룸 안으로 들어섰다.처음 이런 곳에 와본 윤이는 신기한지 이곳저곳 둘러보았고 커다란 TV를 봤을 때는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이 났다.그러다 역시 아이라 그런지 서서히 눈꺼풀이 내려왔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원래는 점심을 먹은 뒤 낮잠을 자야 하는데 기차 탈 생각에 들떠 잠을 자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 엄청 피곤했을 것이다.탁유미는 품에서 잠이 든 아이를 확인하더니 이경빈을 향해 물었다.“일단 아이 좀 재워도 될까? 그리고 할 얘기 있으면 윤이 없는 곳에서 해. 아이한테 쓸데없는 얘기 들려주고 싶지 않아.”이경빈은 옆에 있던 방문을 열어주며 암묵적으로 동의했다.탁유미는 윤이를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히고는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리고 아주 당연한 행동인 듯 아이의 말랑한 볼을 몇 번 쓰다듬어 주었다.탁유미도 알고 있다. 이제는 피할 수 없다는 걸. 지금부터는 아이를 뺏기지 않게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윤이의 곁에서 아이가 어른이 되어가는 걸 지켜봐야 하니까!탁유미는 모르겠지만 이경빈은 지금 방문에 기대 복잡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탁유미가 누군가의 ‘엄마’가 되리라고는 상상해본 적도 없다.방금 그녀가 아이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으며 따뜻한 눈길로 바라볼 때는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냥 이대로 계속 그 모습을 보고 싶었다. 평생...탁유미는 심호흡을 한번 하더니 몸을 일으켜 방에서 걸어 나왔다. 그러고는 방문을 닫고 이경빈을 향해 말했다.“하고 싶은 말이 뭐야?”“나한테서 도망가려고 애쓴 게 저 아이 때문이야?”이경빈의 눈은 다시 싸늘해졌다.그는 아까 자신이 했던 생각이 기가 막힌다는 듯 속으로 자조했다.탁유미가 뭐라고 평생을 보고 싶단 말인가.“그
탁유미 이 여자는 어떻게 고작 그 몇 마디 말로 자신을 이토록 아프게 할 수 있는 거지?!“유전자 검사해보면 알겠지.”이경빈은 심장 부근이 저릿한 것을 애써 가라앉히며 담담히 입을 열었다.“그럴 필요 없어. 절대 네 애 아니니까!”탁유미가 다급하게 얘기했다.“그건 네가 정하는 게 아니야. 그리고 내 애가 맞다면 나는 저 아이를 이씨 집안으로 데려갈 거야.”이에 탁유미는 순식간에 얼굴이 창백해져서 자기도 모르게 “안 돼!”라고 소리를 질렀다.목소리가 꽤 컸던 터라 이경빈도 조금 놀란 얼굴이었다.“너는 분명히 나한테 아이는 싫다고 했어. 그런데 왜 그 집으로 데려가려는 건데? 이씨 집안에서 누가 환영해준다고?!”윤이는 그녀의 전부나 마찬가지였다.“나는 내 피가 흐르는 아이를 눈밖에 둘 생각 없어.”탁유미의 가녀린 몸이 미친 듯이 떨렸다. 그리고 창백한 얼굴에는 절망이라는 감정이 그대로 드러났다.이경빈은 그 모습에 또다시 심장이 아파 오는 걸 느꼈다.“그래서 우리 윤이를 데려다 공수진 그 여자 애로 키우겠다는 거야?”그 말에 이경빈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이경빈, 확실히 말하는데, 나는 우리 윤이가 공수진의 아들이 되는 꼴은 절대 못 봐!”탁유미가 악에 받쳐 외쳤다.공수진은 그때 그녀를 모함했고 이경빈은 공수진을 믿었다.탁유미는 두 사람 때문에 가장 예쁘고 빛날 시간을 감옥에서 보냈다.그런데 어떻게 윤이를 그 가증스러운 여자에게 줄 수 있겠는가!정말 데려간다고 한들 공수진이 윤이를 예뻐할 리가 없었다.“절대 못 본다고? 네가 무슨 자격으로?”이경빈은 그녀의 말에 발끈하며 되물었다.“나는 윤이 엄마야. 그런데 내가 왜 자격이 없어.”탁유미는 몸을 덜덜 떨면서도 주먹을 꽉 쥐고 애써 무섭지 않은 척 노력했다.아들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 두려움은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그래? 그럼 그 자격도 없애주지.”이경빈은 싸늘하게 얘기했다.“윤이는 이씨 가문으로 데려갈 거야. 너는 앞으로
임유진은 탁유미 엄마가 걸어온 전화를 받았다.“유진 씨, 우리 유미랑 윤이가... 이경빈한테 잡힌 것 같아요. 이걸 어떡하죠... 나한테는 걱정하지 말라고는 했는데... 나는 정말... 너무 무서워서... 지금은 연락해도 받지 않아요.”탁유미 엄마는 횡설수설하며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그게 무슨 말이에요? G 시로 안 가셨어요?”“네, 홈으로 들어가기 전에 유미가 윤이를 데리고 화장실로 갔다가 그 뒤로 안 돌아왔어요. 열차는 거의 출발하려고 하고, 그래서 유미한테 전화해 봤더니 이경빈이랑 같이 있다고 하더라고요...”그녀는 이제 울먹이기 시작했다.임유진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일단 그녀를 시키며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했다.“제가 어떻게 해볼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아주머니.”그녀는 전화를 끊고 미간을 찌푸렸다.G 시로 떠나기도 전에 이런 일이 생겨버리다니.이경빈은 대체 그들을 어디로 데려갔을까? 이미 이곳을 떠나버린 걸까? 아니면 아직 이곳에 있나? 어떻게 해야 두 사람을 빨리 찾아낼 수 있지? 신고할까?하지만 두 사람이 사라진 지 아직 24시간도 되지 않았고 탁유미와 이경빈은 아는 사이로 방금도 괜찮다는 연락을 받았기에 경찰서에서 실종신고 접수해줄 리가 만무했다.S 시에서 제일 빨리 누군가의 위치를 알아낼 수 있는 사람...임유진의 머릿속으로 문득 강지혁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강지혁이라면 두 사람의 소재를 바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하지만... 강지혁을 만나려면...임유진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지금은 탁유미와 윤이를 찾아내는 게 우선이다.탁유미는 이경빈에게서 도망치려고 거처까지 옮기려 했고 윤이를 들키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던 사람이었다.그러니 아무리 괜찮다고 말했다 해도 아마 최악의 상황일 것이다.이러는 사이에도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탁유미가 어떤 과격한 반응을 보일지 모르는 일이니까.임유진은 휴대폰을 들어 강지혁의 번호를 찾아보려다가 이내 그의 번호는 진작에 삭제했다는 것을
여차여차 보고를 마친 임원은 강지혁 쪽으로 조심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자신 역시 해고당할까 봐 두려운 것 같았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리고 회의실의 적막이 깨져버렸다.임원진들의 시선은 일제히 강지혁 앞에 놓인 두 대의 휴대폰으로 향했다.강지혁에게는 두 대의 휴대폰이 있는데 한 대는 한정판 고가 핸드폰이었고 다른 한 대는 그 어디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저가 휴대폰이었다.하지만 평소 강지혁은 어째서인지 연락 오는 사람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저가 휴대폰을 더 아꼈다.그리고 지금 그 저가 휴대폰에서 벨 소리가 울렸다.이에 강지혁은 얼굴색을 바꾸더니 사람들 앞에서 바로 전화를 받아버렸다.그리고 얼마 후 강지혁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지금 나한테 부탁하는 거야? ...좋아, 문자로 두 사람의 사진과 마지막으로 목격된 장소를 보내, 알아봐 줄게.”임원진들의 표정은 가지각색이었다.부탁이라니. 강지혁이 부탁한다고 들어주는 사람이었던가?눈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머리를 조아린다고 해도 거들떠보지 않을 사람이 바로 강지혁이다.그런데 방금 통화에서는 일부러 부탁이라는 말을 들으려는 듯 그는 굳이 되물었다.대체 전화기 너머의 사람은 누구였던 것일까?그걸 알고 있는 사람은 고이준밖에 없었다.해당 휴대폰의 번호를 아는 사람은 임유진밖에 없을 테니까. 또한, 이 휴대폰 안에도 임유진의 번호밖에 없었다.하지만 그녀가 대체 무슨 부탁을 했는지까지는 고이준도 몰랐다.한편, 전화를 끊은 임유진은 한동안 멍하니 휴대폰만 바라보았다.방금 그는 강지혁에게 결국 부탁을 했다....탁유미와 윤이를 찾아내려면 어쩔 수가 없었다. 고작 부탁만으로 두 사람의 상황을 알 수 있었으니 오히려 다행이었다.전과 기록을 달고 일자리를 찾아 헤맬 때 망설임 없이 그녀를 고용했던 사람이 바로 탁유미였으니까.“유진 씨, 저번에 노란 장미 준거, 유승호 씨라면서요?”그때 정한나가 웃으며 그녀에게로 다가왔다.“조심해요. 유승호 씨 바람둥이라는 소문이 자자하니까.”걱정하는 듯
임유진은 입술을 달싹이더니 이내 한숨을 한번 내뱉고 물었다.“강지혁은 지금 어디 있죠?”“대표님을 뵙고 싶으신 거면 바로 아래로 내려오시면 됩니다.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이에 임유진이 깜짝 놀랐다.고이준이 이미 이곳에 도착했을 줄이야.혹시 이럴 줄 미리 알고 있었던 걸까...?탁유미와 윤이의 소재가 파악되면 그들을 데리고 나와달라고 부탁할 게 뻔해 미리 고이준을 대기시켜놓은 건가?임유진은 순간 거대한 거미줄 안에 갇힌 듯한 기분이 들었다. 벗어나려고 하면 더 옭아매는 그런 거미줄 말이다.“알겠어요.”임유진은 전화를 끊고 바로 나갈 준비를 했다.지금은 마치 퇴근 시간이었고 다른 동료들도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로펌 아래로 내려와 보니 회색 승용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그리고 임유진을 본 것인지 고이준은 차에서 내려 그녀에게 문을 열어주었다.“타시죠.”임유진이 올라타자 고이준은 그녀를 데리고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동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세상에, 방금 그 벤츠 꽤 비싼 모델 아니었어요?”정한나는 멀어져가는 차를 보며 질투심이 가득 피어올랐다.“흥, 어차피 유승호 씨도 진심은 아니고 그냥 데리고 노는 걸 거예요. 아마 애인은 따로 있을걸요? 그간 만났던 여자들 보면 거의 다 연예인급이던데, 유진 씨는 그저 뭐 새로움? 이런 걸 거예요.”그녀는 방금 떠나간 것이 유승호의 차인 줄 아는 것 같았다.“하지만 방금 차 문 열어준 남자는 유승호 씨가 아니던데요?”옆에 있던 동료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운전기사겠죠. 부자들이 왜 직접 데리러 오겠어요?”정한나는 입을 삐죽이며 말을 이었다.“하여튼 유진 씨 같은 사람 때문에 저희도 같이 욕먹는 거예요. 애인 있는 남자한테 꼬리치기나 하고, 쯧쯧.”“정말 연인일 수도 있죠.”또 다른 동료가 변호에 나섰다.“그럴 리가 없어요. 유진 씨가 유승호 씨한테 접근한 건 아마 돈이 목적일 거예요. 감옥에 들어가기 전까지 소민준이라는 남자의 여자친구였거든요
통째로 빌려?사람이 없는 게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통째로 빌렸을 줄이야...아마 다른 사람이었으면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레스토랑 쪽에서 거절했을 것이다. 오직 강지혁이기 때문에 이곳을 빌릴 수 있었을 것이다.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고이준을 따라 3층에 도착해 보니 큰 홀에는 역시 아무도 없었고 야경이 보이는 창가 쪽에 강지혁 혼자 앉아있었다.그는 발걸음 소리를 듣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자기 쪽으로 걸어오는 임유진을 빤히 바라보았다.살짝 올린 입 끝이 은은한 조명과 어우러져 마치 화보라도 찍는 것 같았고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임유진은 한숨을 한번 들이켜더니 강지혁의 앞으로 다가가 입을 열었다.“언니랑 윤이 데리고 나와줘.”강지혁은 잔잔하게 웃었다.“일단 앉아.”고이준은 그 말에 어느새 의자를 뒤로 빼주고 있었다.임유진은 잠깐 머뭇거리더니 결국 자리에 앉았다.강지혁은 그녀가 자리에 앉자마자 곧바로 메뉴판을 건네주었다.“뭐 먹고 싶은지 한번 봐봐.”“나 밥 먹으러 온 거 아니야.”“나는 밥 먹으러 온 거 맞아.”강지혁은 태연하게 말을 받아쳤다.“전에 내가 했던 말 기억해? 앞으로 돈 많이 벌게 되면 너 맛있는데 데려다준다고 했었잖아.”임유진의 몸이 움찔했다.그건 두 사람이 작은 원룸에 살았을 때 그가 해줬던 말이었다.“여기 음식이 네 마음에 들지는 모르겠어.”아마 그와 얘기를 나누려면 식사부터 마쳐야 할 것 같다.“아무거나 시켜. 난 여기 와본 적 없어서 뭐가 맛있는지도 몰라.”“그래 그럼.”강지혁은 레스토랑 매니저를 불러 이것저것 주문했다. 그리고 두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다 내보냈다.“그렇게도 탁유미 씨를 도와주고 싶어?”“응.”강지혁의 질문에 임유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그 여자는 한지영도 아니잖아. 그런데도 네가 이런 부탁을 할 가치가 있어?”“응. 있어.”탁유미는 그녀가 제일 힘들 때 손을 내밀어줬던 사람이다.‘너 같은 사람
그렇다면 자신은? 자신은 그녀에게 있어 어떠한 존재지?이런 불편한 감정 또한 질투인 걸까?“너는 탁유미 씨한테 일이 생기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먼저 연락도 안 했을 거지?”강지혁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임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표정이 이미 모든 걸 설명해주고 있었다.두 사람을 감싼 공기가 한순간에 차갑게 내려앉았다.다행히도 그때 웨이터가 메뉴를 올리기 시작했다.음식이 하나둘 올라오고 어느새 테이블 위에는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음식들로 가득 차 있었다.하지만 임유진은 그런 음식을 앞에 놓고도 식욕이 돌지 않았고 지금도 탁유미와 윤이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만약 이경빈이 정말 아이를 뺏으려고 든다면...임유진은 문득 지난번 탁유미가 병원에 입원했던 모습이 떠올랐다.그때는 아직 윤이의 존재를 들키기 전이었고 그저 이경빈과 엮이기 싫다는 생각 하나도 자해를 시도한 것이었다그런데 이번에는 윤이의 존재까지 들켜버렸으니...임유진은 더 이상 상상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일단 먹어.”강지혁은 기다란 손가락으로 고기를 썰어주더니 임유진에게 건네주었다.“이 집 스테이크 잘해.”“일단 먼저 언니와 윤이 데리고 나와주면 안 돼?”임유진은 그와 눈을 마주치며 말을 이었다.“제발 부탁할게. 언니한테 무슨 일 생길까 봐 그래.”“부탁?”강지혁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오늘 벌써 두 번이나 나한테 부탁한 거 알아?”임유진은 쓰게 웃었다.그녀 역시 헤어지고 난 뒤에 그에게 뭔가를 부탁할 줄은 생각도 못 했으니까.“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것도 한 번뿐이야. 두 번은 없어.”그의 말에 임유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몸은 뻣뻣하게 굳어버렸다.하지만 그때 그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대신 선택할 기회를 줄게.”“선택?”“그래. 나랑 모르는 사이로 지낼 것인지, 내 누나가 될 것인지, 선택해 봐.”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그의 모습은 마치 먹잇감이 저절로 떨어지길 기다리는 사냥꾼 같았다.임유진은 입술을 잘게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