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차여차 보고를 마친 임원은 강지혁 쪽으로 조심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자신 역시 해고당할까 봐 두려운 것 같았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리고 회의실의 적막이 깨져버렸다.임원진들의 시선은 일제히 강지혁 앞에 놓인 두 대의 휴대폰으로 향했다.강지혁에게는 두 대의 휴대폰이 있는데 한 대는 한정판 고가 핸드폰이었고 다른 한 대는 그 어디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저가 휴대폰이었다.하지만 평소 강지혁은 어째서인지 연락 오는 사람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저가 휴대폰을 더 아꼈다.그리고 지금 그 저가 휴대폰에서 벨 소리가 울렸다.이에 강지혁은 얼굴색을 바꾸더니 사람들 앞에서 바로 전화를 받아버렸다.그리고 얼마 후 강지혁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지금 나한테 부탁하는 거야? ...좋아, 문자로 두 사람의 사진과 마지막으로 목격된 장소를 보내, 알아봐 줄게.”임원진들의 표정은 가지각색이었다.부탁이라니. 강지혁이 부탁한다고 들어주는 사람이었던가?눈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머리를 조아린다고 해도 거들떠보지 않을 사람이 바로 강지혁이다.그런데 방금 통화에서는 일부러 부탁이라는 말을 들으려는 듯 그는 굳이 되물었다.대체 전화기 너머의 사람은 누구였던 것일까?그걸 알고 있는 사람은 고이준밖에 없었다.해당 휴대폰의 번호를 아는 사람은 임유진밖에 없을 테니까. 또한, 이 휴대폰 안에도 임유진의 번호밖에 없었다.하지만 그녀가 대체 무슨 부탁을 했는지까지는 고이준도 몰랐다.한편, 전화를 끊은 임유진은 한동안 멍하니 휴대폰만 바라보았다.방금 그는 강지혁에게 결국 부탁을 했다....탁유미와 윤이를 찾아내려면 어쩔 수가 없었다. 고작 부탁만으로 두 사람의 상황을 알 수 있었으니 오히려 다행이었다.전과 기록을 달고 일자리를 찾아 헤맬 때 망설임 없이 그녀를 고용했던 사람이 바로 탁유미였으니까.“유진 씨, 저번에 노란 장미 준거, 유승호 씨라면서요?”그때 정한나가 웃으며 그녀에게로 다가왔다.“조심해요. 유승호 씨 바람둥이라는 소문이 자자하니까.”걱정하는 듯
임유진은 입술을 달싹이더니 이내 한숨을 한번 내뱉고 물었다.“강지혁은 지금 어디 있죠?”“대표님을 뵙고 싶으신 거면 바로 아래로 내려오시면 됩니다.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이에 임유진이 깜짝 놀랐다.고이준이 이미 이곳에 도착했을 줄이야.혹시 이럴 줄 미리 알고 있었던 걸까...?탁유미와 윤이의 소재가 파악되면 그들을 데리고 나와달라고 부탁할 게 뻔해 미리 고이준을 대기시켜놓은 건가?임유진은 순간 거대한 거미줄 안에 갇힌 듯한 기분이 들었다. 벗어나려고 하면 더 옭아매는 그런 거미줄 말이다.“알겠어요.”임유진은 전화를 끊고 바로 나갈 준비를 했다.지금은 마치 퇴근 시간이었고 다른 동료들도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로펌 아래로 내려와 보니 회색 승용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그리고 임유진을 본 것인지 고이준은 차에서 내려 그녀에게 문을 열어주었다.“타시죠.”임유진이 올라타자 고이준은 그녀를 데리고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동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세상에, 방금 그 벤츠 꽤 비싼 모델 아니었어요?”정한나는 멀어져가는 차를 보며 질투심이 가득 피어올랐다.“흥, 어차피 유승호 씨도 진심은 아니고 그냥 데리고 노는 걸 거예요. 아마 애인은 따로 있을걸요? 그간 만났던 여자들 보면 거의 다 연예인급이던데, 유진 씨는 그저 뭐 새로움? 이런 걸 거예요.”그녀는 방금 떠나간 것이 유승호의 차인 줄 아는 것 같았다.“하지만 방금 차 문 열어준 남자는 유승호 씨가 아니던데요?”옆에 있던 동료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운전기사겠죠. 부자들이 왜 직접 데리러 오겠어요?”정한나는 입을 삐죽이며 말을 이었다.“하여튼 유진 씨 같은 사람 때문에 저희도 같이 욕먹는 거예요. 애인 있는 남자한테 꼬리치기나 하고, 쯧쯧.”“정말 연인일 수도 있죠.”또 다른 동료가 변호에 나섰다.“그럴 리가 없어요. 유진 씨가 유승호 씨한테 접근한 건 아마 돈이 목적일 거예요. 감옥에 들어가기 전까지 소민준이라는 남자의 여자친구였거든요
통째로 빌려?사람이 없는 게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통째로 빌렸을 줄이야...아마 다른 사람이었으면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레스토랑 쪽에서 거절했을 것이다. 오직 강지혁이기 때문에 이곳을 빌릴 수 있었을 것이다.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고이준을 따라 3층에 도착해 보니 큰 홀에는 역시 아무도 없었고 야경이 보이는 창가 쪽에 강지혁 혼자 앉아있었다.그는 발걸음 소리를 듣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자기 쪽으로 걸어오는 임유진을 빤히 바라보았다.살짝 올린 입 끝이 은은한 조명과 어우러져 마치 화보라도 찍는 것 같았고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임유진은 한숨을 한번 들이켜더니 강지혁의 앞으로 다가가 입을 열었다.“언니랑 윤이 데리고 나와줘.”강지혁은 잔잔하게 웃었다.“일단 앉아.”고이준은 그 말에 어느새 의자를 뒤로 빼주고 있었다.임유진은 잠깐 머뭇거리더니 결국 자리에 앉았다.강지혁은 그녀가 자리에 앉자마자 곧바로 메뉴판을 건네주었다.“뭐 먹고 싶은지 한번 봐봐.”“나 밥 먹으러 온 거 아니야.”“나는 밥 먹으러 온 거 맞아.”강지혁은 태연하게 말을 받아쳤다.“전에 내가 했던 말 기억해? 앞으로 돈 많이 벌게 되면 너 맛있는데 데려다준다고 했었잖아.”임유진의 몸이 움찔했다.그건 두 사람이 작은 원룸에 살았을 때 그가 해줬던 말이었다.“여기 음식이 네 마음에 들지는 모르겠어.”아마 그와 얘기를 나누려면 식사부터 마쳐야 할 것 같다.“아무거나 시켜. 난 여기 와본 적 없어서 뭐가 맛있는지도 몰라.”“그래 그럼.”강지혁은 레스토랑 매니저를 불러 이것저것 주문했다. 그리고 두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다 내보냈다.“그렇게도 탁유미 씨를 도와주고 싶어?”“응.”강지혁의 질문에 임유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그 여자는 한지영도 아니잖아. 그런데도 네가 이런 부탁을 할 가치가 있어?”“응. 있어.”탁유미는 그녀가 제일 힘들 때 손을 내밀어줬던 사람이다.‘너 같은 사람
그렇다면 자신은? 자신은 그녀에게 있어 어떠한 존재지?이런 불편한 감정 또한 질투인 걸까?“너는 탁유미 씨한테 일이 생기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먼저 연락도 안 했을 거지?”강지혁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임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표정이 이미 모든 걸 설명해주고 있었다.두 사람을 감싼 공기가 한순간에 차갑게 내려앉았다.다행히도 그때 웨이터가 메뉴를 올리기 시작했다.음식이 하나둘 올라오고 어느새 테이블 위에는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음식들로 가득 차 있었다.하지만 임유진은 그런 음식을 앞에 놓고도 식욕이 돌지 않았고 지금도 탁유미와 윤이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만약 이경빈이 정말 아이를 뺏으려고 든다면...임유진은 문득 지난번 탁유미가 병원에 입원했던 모습이 떠올랐다.그때는 아직 윤이의 존재를 들키기 전이었고 그저 이경빈과 엮이기 싫다는 생각 하나도 자해를 시도한 것이었다그런데 이번에는 윤이의 존재까지 들켜버렸으니...임유진은 더 이상 상상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일단 먹어.”강지혁은 기다란 손가락으로 고기를 썰어주더니 임유진에게 건네주었다.“이 집 스테이크 잘해.”“일단 먼저 언니와 윤이 데리고 나와주면 안 돼?”임유진은 그와 눈을 마주치며 말을 이었다.“제발 부탁할게. 언니한테 무슨 일 생길까 봐 그래.”“부탁?”강지혁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오늘 벌써 두 번이나 나한테 부탁한 거 알아?”임유진은 쓰게 웃었다.그녀 역시 헤어지고 난 뒤에 그에게 뭔가를 부탁할 줄은 생각도 못 했으니까.“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것도 한 번뿐이야. 두 번은 없어.”그의 말에 임유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몸은 뻣뻣하게 굳어버렸다.하지만 그때 그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대신 선택할 기회를 줄게.”“선택?”“그래. 나랑 모르는 사이로 지낼 것인지, 내 누나가 될 것인지, 선택해 봐.”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그의 모습은 마치 먹잇감이 저절로 떨어지길 기다리는 사냥꾼 같았다.임유진은 입술을 잘게 깨물었다.
전에 그는 임유진이 조만간 먼저 누나가 되겠다며 찾아올 것 같다고 말했었다.그리고 그의 말대로 지금 아쉬운 쪽은 확실히 그녀가 맞았다.몇 분 후, 임유진은 결심한 듯 깊게 숨을 들이켜고는 서서히 입을 열었다.“네 누나 할게. 그러니까 지금 당장 유미 언니랑 윤이를 이경빈한테서 데리고 나와 줘. 그리고 이경빈이 함부로 가까이하지 못하게 경호원도 붙여줘.”그녀는 그의 누나가 되는 걸 선택했다.탁유미와 윤이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는데 뭔들 못하겠는가.탁유미에게는 보답해야 할 것이 있고 윤이는... 그 아이만큼은 꼭 지켜주고 싶었다.“그래.”강지혁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더니 이내 고이준에게 전화를 걸어 지시를 내렸다.그리고 전화를 끊고는 다시 임유진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이제 됐지?”“시간은 얼마나 걸릴 것 같아?”“얼마 안 걸려. 이제 식사할까, 누나?”그는 전처럼 예쁘게 웃으며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이에 임유진은 잠깐 움찔하더니 천천히 수저를 들어 음식을 입에 넣기 시작했다.분명히 맛있는 음식이었지만 여전히 식욕은 돌지 않았다. 아마 두 사람의 안전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계속 이럴 것 같았다.강지혁은 그 모습을 보고 딱히 뭐라 하지 않았고 그저 이따금 음식들을 그녀 앞에 건네줄 뿐이었다.3층 홀은 두 사람의 식사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그때 강지혁의 휴대폰이 울리고 임유진은 반사적으로 그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강지혁은 그녀도 들을 수 있게 스피커를 켰다.“대표님, 탁유미 씨와 탁윤 군을 데리고 나왔습니다.”고이준의 목소리였다.“어디 다친 곳은 없어요?”임유진이 다급하게 물었다.“네, 외상은 없어 보입니다만 탁유미 씨 상태가 조금 불안정해 보이긴 합니다.”“두 사람한테 경호원 붙여둬. 그리고 이경빈한테는 두 사람이 S 시에 있는 한 건드리지 못할 거라고 전해.”“네, 알겠습니다.”통화를 마친 뒤 강지혁은 임유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이제 만족해?”임유진은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임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짐을 왜 옮겨? 설마 너 여기서 살려고?”“응. 그때도 같이 살았잖아.”강지혁이 뭐가 문제냐며 피식 웃었다.그때와 지금이 같을 리가 없지 않은가.임유진은 입술을 깨물며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왜? 누나는 나랑 같이 사는 게 싫어?”강지혁은 허리를 숙여 임유진의 얼굴 가까이에 다가가 물었다. 근거리에서 보는 그의 얼굴은 마치 신이 빚은 걸작이 따로 없었다. 게다가 어찌나 가까웠는지 속눈썹 개수까지 셀 수 있을 정도였다.임유진은 얼굴을 반대쪽으로 돌리며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강지혁은 그걸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그녀의 턱을 잡고 자신과 눈을 마주치도록 돌려버렸다.“이게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야?”그의 목소리는 어느새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마치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 보려는 듯 지독하게 눈을 맞춰왔다.“아니면 후회해? 탁유미 그 여자를 구하고 내 제안에 동의한 거 후회해?”“후회... 안 해.”임유진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너처럼 하루아침에 우리 관계를 바꾸는 게 쉽지 않아서 그래. 강지혁, 나한테 적응할 시간을 좀 줘.”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애원에 가까웠다.“알았어. 누나 부탁인데 들어줘야지. 잠깐은 이대로 따로 살아. 적응할 시간을 줄게. 하지만 나는 오래 기다리는 거 못 해.”임유진은 그제야 안도했다.“그리고 혁이라고 불러.”강지혁의 손가락이 천천히 그녀의 입술을 매만졌다. 입술 온도가 조금은 뜨거웠다.“응, 혁아...”원하는 대로 혁이라는 호칭을 듣자 그는 활짝 웃더니 그녀를 자기 품 안에 꽉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얼굴을 그녀의 목에 묻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얘기했다.“드디어 내 누나가 됐네? 앞으로 내 옆에만 있어. 어디 떠날 생각하지 말고. 알았지?”임유진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지금은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한기가 몸을 덮고 있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강지혁의 품은 분명히 이토록 따뜻한데 왜 이리도 추울까......임유진은 다음날
임유진과 강지혁의 첫 만남이 어땠는지 탁유미는 일전 임유진에게 들은 적이 있다. 그때만 해도 두 사람이 그렇게 만난 된 건 정말 대단한 인연이라며 감탄했었다.하지만 지금은 그게 인연이 아니라 점점 더 악연처럼 보였다.“나 때문에 무리 안 해도 돼요!”탁유미가 부채감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사실 언젠가는 이렇게 될 거였어요. 언니가 그런 표정을 짓지 않아도 돼요. 강지혁은 얼마 전부터 계속 자기 누나가 되어 달라고 했었거든요. 그냥 언니 일 때문에 그 시기가 조금 앞당겨졌을 뿐이에요.”강지혁은 자신이 원하는 거라면 그게 무엇이든 반드시 손에 넣는다.지금까지는 여차여차 거절을 해왔지만 그 거절이 언제고 먹힐 거라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녀의 거절은 비유하자면 그가 게임을 클리어하는 데 난이도를 조금 높여줄 장애물 정도일 것이다.“하지만...!”“대신 언니랑 윤이는 이제 이곳에서 마음 졸이지 않아도 되잖아요. 그리고 나도 강지혁이라는 든든한 뒷배가 생긴 거고요. 이렇게 생각하면 꽤 나쁠 것 없는 거래 아니에요?”말은 그렇게 했지만 탁유미는 그녀가 자신의 죄책감을 덜어주려고 이런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다.겉으로 보기에는 그럴싸한 거래지만 임유진에게는 아니다. 잊고 싶은 옛 연인과 누나 동생이라는 이상한 관계에 발이 묶이는 게 정상일 리가 없다.“이제 내 얘기는 여기서 그만. 그보다 어제 이경빈이 뭐래요?”탁유미가 쓰게 웃었다.“윤이를 이씨 집안으로 데려가겠대요. 물론 거절했어요.”“그럼 윤이는 이경빈이 아버지라는 걸 알게 된 거예요?”“아니요. 윤이는 호텔 방에 도착하자마자 잠이 들어버려서 아무것도 몰라요. 그리고 이경빈이 윤이에게 말을 걸 틈도 없이 강지혁 씨 비서라는 분이 찾아왔거든요.”어제는 만약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이경빈은 절대 두 사람을 풀어주지 않았을 것이다.자는 윤이를 데리고 방에서 빠져나올 때 이경빈의 얼굴은 무섭게 일그러져있었다.임유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그런 소리까지 한 걸 보면 조만간 윤이의
“만약 이경빈이 정말 양육권을 걸고넘어진다면 그때는 내가 도와줄게요. 그러니까 지금은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말아요.”임유진은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고마워요, 유진 씨.”만약 임유진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패닉에 빠졌을 것이다. 게다가 여태껏 이경빈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테고.임유진은 탁유미의 거처에서 나왔다.사실 아까 그녀 앞에서는 차마 얘기를 할 수 없었지만, 만약 이경빈이 양육권을 찾겠다고 나오면 탁유미는 높은 확률로 지게 된다.탁유미는 경제적으로 안정적이지 못하고 게다가 옥살이했던 경력까지 있었으니까. 그에 반해 이경빈은 해성시의 유명한 사업가이기에 아이에게 풍족한 생활을 줄 수 있다.게다가 이경빈은 머지않아 공수진과 결혼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아무래도 한 부모 가정보다 정상적인 가족 환경이 더 좋을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모든 면에서 탁유미는 불리할 수밖에 없다.대체 어떻게 해야 탁유미가 양육권을 빼앗기지 않게 할 수 있을까?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보니 어느새 월세방 앞에까지 다다랐다.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거실 한가운데 강지혁이 있었다.“왜 또 왔어?”강지혁은 소파에 앉아 얼마 전 임유진이 구매한 법률 서적을 들고 현관문 쪽을 바라보았다.“내가 오는 게 싫어?”“그게 아니라, 당분간 나 적응할 시간을 준다며?”임유진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맞아. 오늘은 그냥 누나 얼굴 보러 온 거야.”그는 손에 든 서적을 내려놓더니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탁유미 씨 만나고 왔어?”“응.”이제는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되묻는 걸 그만뒀다. 강지혁이라면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알고 있을 테니까.“그렇게 걱정돼?”강지혁은 조금 언짢은 얼굴로 말했다.“언니한테는 신세를 많이 졌으니까.”옥살이하고 나와 그런지 좋은 사람들의 호의는 더 소중히 여기게 된다.“나도 좀 걱정해주지?”강지혁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건드리며 말했다.“너 걱정해주는 사람 많잖아.”“그런 사람 몇천 명이 와도 나는 네가 걱정해주는
게다가 이제는 강문철도 없으니 임유진이 강씨 가문이 안주인이라는 건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또한 임유진은 임신까지 했으니 아이들이 무사히 태어나면 그때는 그 누구도 그 자리를 감히 탐낼 수 없게 된다.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에 강지혁을 대하는 것처럼 그녀를 대했다.임유진은 강지혁의 아내로서 줄곧 강지혁의 곁에 있었다.강씨 가문은 S 시에서 가장 뿌리가 깊고 또 유명한 가문이라 장례식장도 컸고 조문객들도 훨씬 많았다.강지혁은 임유진이 무리라도 할까 봐 몇 번이나 그녀에게 이만 쉬라고 했지만 임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계속해서 그의 곁을 지켰다.“나 아직 괜찮아. 진짜 힘들면 너한테 얘기할게. 나도 내 몸 귀한 줄 알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임유진도 자신이 아이셋을 가진 임산부라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그때 조문객들이 입구를 바라보며 강현수의 이름을 불렀다.이에 임유진은 살짝 움찔하더니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려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그러자 익숙한 남자의 실루엣이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강현수와 마지막으로 본 것도 이제는 몇 달 전이었다.한때는 생사를 함께 했던 친구였는데 결국에는 썩 유쾌하지 않은 방식으로 헤어지게 되었다.강현수는 오늘 부모님과 함께 장례식에 참석했다.임유진이 그를 바라봤을 때 그의 시선 역시 임유진에게 닿아있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을 보자마자 옆으로 늘어트린 손을 살짝 움켜쥐었다.그토록 오래 찾아 헤맸던 사람을, 오랜 기간 마치 습관처럼 떠올렸던 사람을 그는 번번이 놓쳐버렸다.임유진과 다른 방식으로 다시 시작할 수도 있었는데 그는 그 가능성마저도 자기 손으로 부숴버렸다.그 결과 그녀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고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으며 지금 그 남자의 곁에 서 있게 되었다.강현수는 이제 영원히 그녀 곁에는 있을 수 없게 되었다.강현수네 가족이 강지혁과 임유진의 앞으로 다가왔을 때 강현수는 위로의 말을 건네는 부모님과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어쩌면 강지혁은 줄곧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돌아온 그에게 유일한 버팀목이라고는 강문철밖에 없었으니까.“나는 솔직히 네 할아버지가 고마워. 혁이 너를 이렇게 멋있게 키워줬잖아. 그리고 나랑 만나게 해줬고.”임유진은 계속해서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갔다.“혁아, 네가 원하는 가족 간의 사랑은 앞으로 내가 줄게. 그리고 우리 아이들도 줄 거야.”그 말에 강지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임유진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가장 원하는지 이미 다 알고 있었다.“아까 네가 그랬지? 사람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게 다 다르다고. 그럼 너는? 네가 중요하게 여기는 건 뭔데?”강지혁이 임유진의 체향을 들이마시며 물었다.그녀의 냄새를 맡고 있으면 늘 이렇게 마음이 진정되고 몸이 편안해졌다.“나?”임유진은 그 말에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혁이 너랑 우리 아이들이야.”“유진아, 나는 욕심이 많아. 나는 너를 그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아. 그게 우리 아이들이라고 해도 나는 싫어. 나는 내가 네 마음속 1순위였으면 좋겠고 너한테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이 눈을 깜빡였다.설마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들을 질투하는 건가?“혁아, 너는 내 마음속 1순위야. 물론 아이들도 너무 중요하고 소중하지만 너랑은 결이 조금 달라. 혁이 너는 나한테 유일무이한 존재잖아.”임유진은 두 손을 둘러 가볍게 강지혁을 끌어안았다.이미 배가 불러올 대로 불러와 완전히 꼭 끌어안지는 못했지만 싸늘한 방 공기를 녹이기에는 충분했다.“내가 너한테 유일무이한 존재라고?”“응. 널 대신할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어. 물론 아이들을 낳고 진정한 엄마가 되면 어쩔 수 없이 아이들에게 더 신경을 쓰고 더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야. 이건 장담해. 그리고 네가 원하면 네가 원하는 방식대로 더 많이 널 사랑해줄게. 혁아,
별채로 가는 길에는 늘 조명이 켜져 있기에 어두운 저녁이라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임유진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강지혁이 방 한가운데 멀뚱히 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지혁은 불빛을 받으며 시선을 내린 채 바로 앞에 있는 냉동관을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혁아.”임유진은 그를 부르며 천천히 옆으로 다가갔다.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강지혁은 상념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돌렸다.“오지 말라니까. 여기는 나 혼자 있으면 돼.”“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왔어.”임유진은 강지혁의 바로 앞에 서서 그의 볼을 매만졌다.지금은 1월이라 날씨가 무척이나 추웠다. 게다가 지금은 밤이고 별채 쪽에는 보일러도 없었기에 바깥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추웠다.“오늘 밤도 여기 있을 거야?”임유진이 물었다.“응. 그래도 날 키워주셨으니 할 도리는 다해야지.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사람들 많이 올 거야. 너는 몸이 불편하니까 가지 말고 그냥 집에 있어.”“출산할 시기가 임박한 것도 아닌데 뭐.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나도 참석할 거야. 만약 몸이 불편하거나 하면 바로 너한테 얘기할게.”강지혁은 그 말에 임유진의 손을 살짝 잡았다.“너한테는 좋은 기억 하나 없는 사람이잖아. 그런데 왜...”“네 할아버지잖아. 네 유일한 가족이잖아. 그러니까 아무리 나를 마음에 들지 않아 했어도, 아무리 끝까지 나를 손주며느리로 받아들이지 않았어도 나는 할아버지 가시는 길을 너와 같이 보내드려야 할 의무가 있어.”다른 건 없었다.그저 강지혁의 어린 시절을 곁에서 지켜줬다는 사실만으로도 임유진은 충분히 감사했다.강지혁은 그 말에 그녀의 손을 조금 세게 쥐었다.“할아버지가 마지막에 한 말은 신경 쓰지 마. 그 말은 그냥...”“알아. 네 할아버지는 그저 누군가를 깊게 사랑하는 것으로 행복한 결과를 낳을 거라는 걸 믿지 못하시는 분이었던 거지. 네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 일도 있고 네 아버지 일도 있어서 많이 무서우셨을 거야. 너도 나중에 불행하게 될까 봐.”임유진이 말했
강지혁은 마치 강문철에게 자신이 임유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려는지 조금 격앙된 목소리로 얘기했다.강문철은 그 말에 눈동자를 돌려 자신의 유일한 손주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몇 초 후 이제는 모든 게 다 피곤한 듯 천천히 눈을 감으며 입을 열었다.“우리 집안에서... 여자한테 미친 인간 치고... 멀쩡한 사람을 못 봤다. 네가... 계속해서 이러면 너도 언젠가는...”강문철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는가 싶더니 이내 옆에 있던 종합모니터에서 삐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임유진은 그 소리에 강문철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바로 알았다.누군가의 생명이 바로 눈앞에서 멎었다.조금은 무서웠던 노인이, 강지혁의 유일한 가족이었던 노인이 이렇게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모든 게 다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강지혁은 삐 소리가 들린 뒤로 임유진의 손을 꽉 잡았다. 그렇게 계속 힘을 주다가 임유진의 입에서 아프다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며 손을 놓아주었다.“미안. 아팠지?”강지혁은 어느새 빨개진 그녀의 손을 다시 잡으며 초조한 눈길로 물었다.“괜찮아. 그것보다 할아버지...”“응. 가셨어.”강지혁의 얼굴은 가족을 잃은 사람 같지 않게 무척이나 평온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게 아니라는 걸 임유진은 알고 있다.아무리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어도 강문철은 강지혁의 할아버지고 유일한 가족이었다. 강선우가 죽은 뒤로 그의 곁을 지켜줬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강지혁은 몸을 돌려 편히 잠든 강문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리고 임유진은 그런 강지혁의 옆에 서서 그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강문철의 장례식은 3일 뒤로 정했다.그 3일 동안 시신은 냉동관에 넣은 채 강씨 저택의 별채에 두기로 했다.그리고 그 3일 동안 강지혁은 그 어떤 외부인도 별채에 들이지 않았다.별채는 강씨 가문 사람 외에는 허락하지 않는 특별한 곳이었으니까.강선우가 죽었을 때도 그의 시신은 잠시 이 별채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의
강지혁은 임유진의 고집에 결국 알겠다며 그녀와 함께 집에서 나와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한 후 강지혁은 뒤따라온 경호원에게 임유진의 곁을 맡기고 혼자 병실로 들어갔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빼빼 마른 강문철이 흰색 병상 위에 가만히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남자도 병마와 세월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강문철은 강지혁이 안으로 들어온 것을 보더니 마지막 힘을 쥐어짜 입을 움직였다.“왔... 니...”“네, 저 왔어요.”강지혁이 곁으로 다가오며 대답했다.사실 강지혁은 강문철에게 대단한 가족 간의 정은 느끼지 못했다.실제로 강문철은 강지혁이 할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느낄만한 행동을 보여주지 않았으니까.강문철은 언제나 강지혁을 자신의 뒤를 이어 강씨 가문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하나의 장기 말로 여겨왔다. 물론 그 장기 말도 쓸모가 없었다면 진작 버렸을 것이다.“이제는... 강씨 가문의 모든 게 네 손에... 달렸다. 만약... 네가 가문을 망하게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강문철이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할 말은 그게 끝이에요?”강지혁이 강문철을 빤히 바라보았다.이에 강문철은 탁한 눈동자를 옆으로 굴려 병실 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임유진... 그 아가씨... 밖에 있지? 들어오라고 해...”그 말에 강지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유진이 건드릴 생각하지 마세요.”“이 꼴로... 내가 뭘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어차피... 그 아가씨 옆에는... 네 사람 천지일 텐데.”강지혁은 그가 두 손으로 직접 키운 손주이자 가문의 후계자이기에 강지혁의 생각 같은 건 이미 훤히 꿰고 있었다.강지혁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자 강문철이 다시 입을 열었다.“그저... 마지막으로 해줄 얘기가... 있어서 그러는 것뿐이다...”호흡이 점점 가빠지고 안색도 창백해진 것이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강지혁은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발걸음을 옮겨 병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곧바로 임유진의 손을
“그래? 그럼 만약... 내가 너한테 상처를 줘도 너도 똑같이 나 안 볼 거야? 내가 아무리 용서해달라고 빌어도 나 용서 안 해줄 거야?”강지혁은 목구멍을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한마디 한마디 힘겹게 내뱉었다.이에 임유진은 몸을 돌려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강지혁을 바라보았다.“혁아, 너 대체 왜 그래? 요즘 따라 너무 불안해 보여. 무슨 일 있는 거야?”강지혁은 자신의 불안해 보인다는 말에 고개를 푹 숙였다.확실히 그는 요 며칠 줄곧 불안해하고 있었다.탁유미와 이경빈의 일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자신과 임유진의 결말도 그들과 똑같을까 봐 불안해하고 있었다.“혹시 방금 내가 한 말이 널 불안하게 만들었어? 혁아, 내가 언니를 이해한다고 했던 건 소민준과의 일이 생각나서 그랬던 거야. 네가 괜한 생각을 할 게 아니라고. 네가 나한테 상처 줄 리가 없잖아. 그리고...”임유진은 손을 들어 조금 우울해 보이는 강지혁의 눈가를 부드럽게 매만졌다.“전에 내가 말했잖아. 네가 정말 나한테 미안해야 할 일을 했다고 해도 울면 봐주겠다고.”그녀는 강지혁의 눈에 담긴 우울함이 사라질 수 있게 일부러 환히 웃으며 얘기했다.그러자 그 말을 들은 강지혁의 눈에 조금씩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유진아, 너를 향한 내 감정은 언제나 그대로일 거야.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든 절대 변하지 않을 거야.”강지혁은 임유진의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심장에 가져갔다.“그러니까 너도 약속해. 날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절대 변하지 않을 거라고. 약속해.”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깜빡였다.탁유미와의 대화에서 사람의 감정은 언젠가는 변한다는 말에 깊이 공감했는데 눈앞에 있는 남자는 자신의 감정은 변하지 않을 거라고 하고 있다.소민준과의 관계에서 질릴 대로 질려 그에게 모든 감정이 사라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를 사랑하고 있고 그와 영원히 하고 싶은 것 또한 사실이다.“응, 영원히 너만 사랑할게. 절대 변하지 않을게. 약속해.”임유진은 진지한 얼굴로 그에
임유진은 한지영이 정신을 차린 모습을 떠올리면 마음이 아프다가도 그녀가 활기를 되찾아줘서 참으로 고마웠다.한지영은 백연신과 그렇게 헤어진 후 자포자기하는 것이 아닌 적극적으로 치료에 임하며 회복에 힘썼다. 심지어 며칠 전에는 미소를 지으며 이런 말까지 했다.“고작 남자랑 헤어진 것뿐인데 뭐. 연애가 다 이런 거 아니겠어? 사랑했다가 또 헤어졌다가. 그래서 결혼까지 가는 게 기적이라는 말도 있잖아. 열렬히 사랑했으니 그거로 난 됐어. 혹시 알아? 퇴원한 뒤에 진정한 내 운명이 나를 찾아올지.”“다행이네요.”탁유미는 한지영의 말을 전해 듣고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유진 씨랑 지영 씨는 나처럼 이러지 말고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어요.”그녀는 자신의 인생에서 더 이상의 사랑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대화를 나누던 임유진과 탁유미는 병실 밖의 누군가가 그들의 대화를 다 듣고 있는 것을 몰랐다....임유진은 탁유미에게 인사한 후 강지혁과 함께 강씨 저택으로 돌아왔다.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2층으로 올라가려는데 강지혁이 뒤에서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왜 그래?”갑작스러운 포옹에 임유진이 물었다.사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강지혁은 오늘따라 말수가 무척이나 적었고 시선은 거의 창밖에 고정하다시피 했다.그 모습에 임유진이 몇 번이나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지 물었지만 강지혁은 그때마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대답을 피했다.“그냥... 갑자기 안고 싶어져서.”강지혁은 낮게 중얼거리며 아까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그는 이경빈을 따라 탁유미의 병실 앞으로 왔다가 비스듬히 열린 문틈 사이로 임유진과 탁유미의 대화 내용을 들었다.탁유미가 자신에게 상처 준 사람은 다시 받아줄 생각이 없다고 했을 때 이경빈은 휘청하며 그대로 주저앉았고 입을 틀어막으며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했다.그 순간만큼은 우는 것조차도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맨날 안으면서 아직도 부족해?”임유진이 실소하며 물었다.“응. 부족해.”강지혁에게는 어쩌면 평생 부족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무의식 속에서 그 언젠가 임유진이 모든 진실을 알게 되고 그를 떠나면 그때 누군가가 이렇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줬으면 해서 일지도 모른다....탁유미는 이틀 정도 중환자실에 있다가 모든 수치가 안정된 후 바로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다만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앞으로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아야만 했다.탁유미는 간호사가 들어와 약을 갈아줄 때마다 보이는 수술 자국을 보면서 조금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그녀가 아무리 원치 않았다고 해도 지금 그녀의 몸 안에 있는 간은 이경빈의 간이었다.어쩌면 하늘이 조금은 그녀를 가엽게 여겨준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런 방식으로 살게 된 건지도 모른다.윤이와 김수영은 요 며칠 거의 탁유미 곁에서 떨어지지 않다시피 했고 임유진도 자주 탁유미를 보러 병원에 왔다.“유진 씨, 미안해요. 괜히 나 때문에 힘들게 왔다 갔다 하고...”탁유미는 미안한 얼굴로 임유진의 큰 배를 바라보았다.지금쯤 집에서 태교나 들으며 휴식을 취해도 모자란 데 괜히 자신 때문에 임유진이 고생하고 있는 것 같았다.“언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언니가 나였으면 안 이랬을까요? 그러니까 너무 그러지 않아도 돼요.”임유진은 말을 하며 의자에 앉았다.“나 윤이 데리고 나갈 테니까 둘이서 얘기하고 있어.”김수영이 꾸벅꾸벅 졸고 있는 윤이를 안아 들며 보호자가 쉴 수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임유진은 두 사람이 들어간 것을 확인한 후 탁유미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혁이가 그러는데 이경빈 씨도 며칠 전부터는 걸어 다닐 수 있게 됐대요. 그런데... 언니 병실까지 왔다가 매번 들어오지는 못하고 다시 돌아가나 봐요.”그 말에 탁유미는 담담하게 대꾸했다.“이경빈과의 인연은 여기서 끝이에요. 어차피 이경빈도 몸이 다 나아지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거고 나는 계속 여기서 살게 되겠죠. 물론 나랑은 끝이라도 윤이랑은 부자간의 정이 있으니까 둘이서는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네요.”“이경빈 씨와는 정말 일말의 가능성도 없는 거예요?”임유진의
다시 눈을 뜬 이경빈이 보게 된 건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강지혁이었다.마취가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아서 그런지 통증 같은 건 없었다.“유미는... 어떻게 됐습니까?”이경빈이 힘겹게 입을 열며 물었다.“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탁유미 시는 지금 중환자실에 있어요. 이틀 정도 경과를 지켜봐야 한대요.”그의 말에 대답해준 건 강지혁이었다.이경빈은 그 말에 안도의 한숨을 쉬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수술이 무사히 끝났으니 된 거다.앞으로 두 번 다시 탁유미 곁에 모습을 드러낼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녀의 몸 안에 그의 일부가 살아 숨 쉬고 있으니까, 그녀가 죽을 때까지 줄곧 함께하게 될 거니까 그것으로 됐다.그리고 그녀가 준 골수도 평생 그와 함께 할 테니 그 역시 이것으로 그녀와 평생 함께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이경빈은 탁유미의 상태 외에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마치 자기 몸은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였다.의사가 수술 후 주의사항과 나타날 수 있는 증상들에 관해 설명해주는데도 그는 시큰둥한 얼굴로 침묵만 고수할 뿐이었다.강지혁은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의사와 간호사가 전부 다 나간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탁유미 씨 사건을 뒤엎으려고 한다고 들었는데 그렇게 되면 이강 그룹이 큰 타격을 입게 될 겁니다. 어쩌면 판결 결과에 따라 이경빈 씨는 감방살이하게 될지도 모르고요.”“알고 있어요.”이경빈이 담담하게 말했다.자신의 결정으로 그룹에 어떤 파문이 일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그가 받아야 할 벌이다.복수하겠다는 생각에 매몰돼 공수진의 말만 믿고 거짓 증언한 그의 업보다.탁유미가 형을 살게 된 것에 제일 큰 공헌을 한 건 바로 그의 증언이었다.그러니 그녀를 감옥으로 보낸 건 그나 다름없었다.“정말 앞으로는 탁유미 씨 앞에 나타나지 않을 생각입니까?”강지혁이 물었다.“내가 유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많지 않아요. 그런데 유미가 그걸 원한다고 하니 나로서는 들어줄 수밖에요.”그 소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