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차여차 보고를 마친 임원은 강지혁 쪽으로 조심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자신 역시 해고당할까 봐 두려운 것 같았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리고 회의실의 적막이 깨져버렸다.임원진들의 시선은 일제히 강지혁 앞에 놓인 두 대의 휴대폰으로 향했다.강지혁에게는 두 대의 휴대폰이 있는데 한 대는 한정판 고가 핸드폰이었고 다른 한 대는 그 어디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저가 휴대폰이었다.하지만 평소 강지혁은 어째서인지 연락 오는 사람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저가 휴대폰을 더 아꼈다.그리고 지금 그 저가 휴대폰에서 벨 소리가 울렸다.이에 강지혁은 얼굴색을 바꾸더니 사람들 앞에서 바로 전화를 받아버렸다.그리고 얼마 후 강지혁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지금 나한테 부탁하는 거야? ...좋아, 문자로 두 사람의 사진과 마지막으로 목격된 장소를 보내, 알아봐 줄게.”임원진들의 표정은 가지각색이었다.부탁이라니. 강지혁이 부탁한다고 들어주는 사람이었던가?눈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머리를 조아린다고 해도 거들떠보지 않을 사람이 바로 강지혁이다.그런데 방금 통화에서는 일부러 부탁이라는 말을 들으려는 듯 그는 굳이 되물었다.대체 전화기 너머의 사람은 누구였던 것일까?그걸 알고 있는 사람은 고이준밖에 없었다.해당 휴대폰의 번호를 아는 사람은 임유진밖에 없을 테니까. 또한, 이 휴대폰 안에도 임유진의 번호밖에 없었다.하지만 그녀가 대체 무슨 부탁을 했는지까지는 고이준도 몰랐다.한편, 전화를 끊은 임유진은 한동안 멍하니 휴대폰만 바라보았다.방금 그는 강지혁에게 결국 부탁을 했다....탁유미와 윤이를 찾아내려면 어쩔 수가 없었다. 고작 부탁만으로 두 사람의 상황을 알 수 있었으니 오히려 다행이었다.전과 기록을 달고 일자리를 찾아 헤맬 때 망설임 없이 그녀를 고용했던 사람이 바로 탁유미였으니까.“유진 씨, 저번에 노란 장미 준거, 유승호 씨라면서요?”그때 정한나가 웃으며 그녀에게로 다가왔다.“조심해요. 유승호 씨 바람둥이라는 소문이 자자하니까.”걱정하는 듯
임유진은 입술을 달싹이더니 이내 한숨을 한번 내뱉고 물었다.“강지혁은 지금 어디 있죠?”“대표님을 뵙고 싶으신 거면 바로 아래로 내려오시면 됩니다.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이에 임유진이 깜짝 놀랐다.고이준이 이미 이곳에 도착했을 줄이야.혹시 이럴 줄 미리 알고 있었던 걸까...?탁유미와 윤이의 소재가 파악되면 그들을 데리고 나와달라고 부탁할 게 뻔해 미리 고이준을 대기시켜놓은 건가?임유진은 순간 거대한 거미줄 안에 갇힌 듯한 기분이 들었다. 벗어나려고 하면 더 옭아매는 그런 거미줄 말이다.“알겠어요.”임유진은 전화를 끊고 바로 나갈 준비를 했다.지금은 마치 퇴근 시간이었고 다른 동료들도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로펌 아래로 내려와 보니 회색 승용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그리고 임유진을 본 것인지 고이준은 차에서 내려 그녀에게 문을 열어주었다.“타시죠.”임유진이 올라타자 고이준은 그녀를 데리고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동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세상에, 방금 그 벤츠 꽤 비싼 모델 아니었어요?”정한나는 멀어져가는 차를 보며 질투심이 가득 피어올랐다.“흥, 어차피 유승호 씨도 진심은 아니고 그냥 데리고 노는 걸 거예요. 아마 애인은 따로 있을걸요? 그간 만났던 여자들 보면 거의 다 연예인급이던데, 유진 씨는 그저 뭐 새로움? 이런 걸 거예요.”그녀는 방금 떠나간 것이 유승호의 차인 줄 아는 것 같았다.“하지만 방금 차 문 열어준 남자는 유승호 씨가 아니던데요?”옆에 있던 동료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운전기사겠죠. 부자들이 왜 직접 데리러 오겠어요?”정한나는 입을 삐죽이며 말을 이었다.“하여튼 유진 씨 같은 사람 때문에 저희도 같이 욕먹는 거예요. 애인 있는 남자한테 꼬리치기나 하고, 쯧쯧.”“정말 연인일 수도 있죠.”또 다른 동료가 변호에 나섰다.“그럴 리가 없어요. 유진 씨가 유승호 씨한테 접근한 건 아마 돈이 목적일 거예요. 감옥에 들어가기 전까지 소민준이라는 남자의 여자친구였거든요
통째로 빌려?사람이 없는 게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통째로 빌렸을 줄이야...아마 다른 사람이었으면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레스토랑 쪽에서 거절했을 것이다. 오직 강지혁이기 때문에 이곳을 빌릴 수 있었을 것이다.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고이준을 따라 3층에 도착해 보니 큰 홀에는 역시 아무도 없었고 야경이 보이는 창가 쪽에 강지혁 혼자 앉아있었다.그는 발걸음 소리를 듣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자기 쪽으로 걸어오는 임유진을 빤히 바라보았다.살짝 올린 입 끝이 은은한 조명과 어우러져 마치 화보라도 찍는 것 같았고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임유진은 한숨을 한번 들이켜더니 강지혁의 앞으로 다가가 입을 열었다.“언니랑 윤이 데리고 나와줘.”강지혁은 잔잔하게 웃었다.“일단 앉아.”고이준은 그 말에 어느새 의자를 뒤로 빼주고 있었다.임유진은 잠깐 머뭇거리더니 결국 자리에 앉았다.강지혁은 그녀가 자리에 앉자마자 곧바로 메뉴판을 건네주었다.“뭐 먹고 싶은지 한번 봐봐.”“나 밥 먹으러 온 거 아니야.”“나는 밥 먹으러 온 거 맞아.”강지혁은 태연하게 말을 받아쳤다.“전에 내가 했던 말 기억해? 앞으로 돈 많이 벌게 되면 너 맛있는데 데려다준다고 했었잖아.”임유진의 몸이 움찔했다.그건 두 사람이 작은 원룸에 살았을 때 그가 해줬던 말이었다.“여기 음식이 네 마음에 들지는 모르겠어.”아마 그와 얘기를 나누려면 식사부터 마쳐야 할 것 같다.“아무거나 시켜. 난 여기 와본 적 없어서 뭐가 맛있는지도 몰라.”“그래 그럼.”강지혁은 레스토랑 매니저를 불러 이것저것 주문했다. 그리고 두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다 내보냈다.“그렇게도 탁유미 씨를 도와주고 싶어?”“응.”강지혁의 질문에 임유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그 여자는 한지영도 아니잖아. 그런데도 네가 이런 부탁을 할 가치가 있어?”“응. 있어.”탁유미는 그녀가 제일 힘들 때 손을 내밀어줬던 사람이다.‘너 같은 사람
그렇다면 자신은? 자신은 그녀에게 있어 어떠한 존재지?이런 불편한 감정 또한 질투인 걸까?“너는 탁유미 씨한테 일이 생기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먼저 연락도 안 했을 거지?”강지혁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임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표정이 이미 모든 걸 설명해주고 있었다.두 사람을 감싼 공기가 한순간에 차갑게 내려앉았다.다행히도 그때 웨이터가 메뉴를 올리기 시작했다.음식이 하나둘 올라오고 어느새 테이블 위에는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음식들로 가득 차 있었다.하지만 임유진은 그런 음식을 앞에 놓고도 식욕이 돌지 않았고 지금도 탁유미와 윤이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만약 이경빈이 정말 아이를 뺏으려고 든다면...임유진은 문득 지난번 탁유미가 병원에 입원했던 모습이 떠올랐다.그때는 아직 윤이의 존재를 들키기 전이었고 그저 이경빈과 엮이기 싫다는 생각 하나도 자해를 시도한 것이었다그런데 이번에는 윤이의 존재까지 들켜버렸으니...임유진은 더 이상 상상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일단 먹어.”강지혁은 기다란 손가락으로 고기를 썰어주더니 임유진에게 건네주었다.“이 집 스테이크 잘해.”“일단 먼저 언니와 윤이 데리고 나와주면 안 돼?”임유진은 그와 눈을 마주치며 말을 이었다.“제발 부탁할게. 언니한테 무슨 일 생길까 봐 그래.”“부탁?”강지혁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오늘 벌써 두 번이나 나한테 부탁한 거 알아?”임유진은 쓰게 웃었다.그녀 역시 헤어지고 난 뒤에 그에게 뭔가를 부탁할 줄은 생각도 못 했으니까.“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것도 한 번뿐이야. 두 번은 없어.”그의 말에 임유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몸은 뻣뻣하게 굳어버렸다.하지만 그때 그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대신 선택할 기회를 줄게.”“선택?”“그래. 나랑 모르는 사이로 지낼 것인지, 내 누나가 될 것인지, 선택해 봐.”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그의 모습은 마치 먹잇감이 저절로 떨어지길 기다리는 사냥꾼 같았다.임유진은 입술을 잘게 깨물었다.
전에 그는 임유진이 조만간 먼저 누나가 되겠다며 찾아올 것 같다고 말했었다.그리고 그의 말대로 지금 아쉬운 쪽은 확실히 그녀가 맞았다.몇 분 후, 임유진은 결심한 듯 깊게 숨을 들이켜고는 서서히 입을 열었다.“네 누나 할게. 그러니까 지금 당장 유미 언니랑 윤이를 이경빈한테서 데리고 나와 줘. 그리고 이경빈이 함부로 가까이하지 못하게 경호원도 붙여줘.”그녀는 그의 누나가 되는 걸 선택했다.탁유미와 윤이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는데 뭔들 못하겠는가.탁유미에게는 보답해야 할 것이 있고 윤이는... 그 아이만큼은 꼭 지켜주고 싶었다.“그래.”강지혁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더니 이내 고이준에게 전화를 걸어 지시를 내렸다.그리고 전화를 끊고는 다시 임유진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이제 됐지?”“시간은 얼마나 걸릴 것 같아?”“얼마 안 걸려. 이제 식사할까, 누나?”그는 전처럼 예쁘게 웃으며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이에 임유진은 잠깐 움찔하더니 천천히 수저를 들어 음식을 입에 넣기 시작했다.분명히 맛있는 음식이었지만 여전히 식욕은 돌지 않았다. 아마 두 사람의 안전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계속 이럴 것 같았다.강지혁은 그 모습을 보고 딱히 뭐라 하지 않았고 그저 이따금 음식들을 그녀 앞에 건네줄 뿐이었다.3층 홀은 두 사람의 식사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그때 강지혁의 휴대폰이 울리고 임유진은 반사적으로 그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강지혁은 그녀도 들을 수 있게 스피커를 켰다.“대표님, 탁유미 씨와 탁윤 군을 데리고 나왔습니다.”고이준의 목소리였다.“어디 다친 곳은 없어요?”임유진이 다급하게 물었다.“네, 외상은 없어 보입니다만 탁유미 씨 상태가 조금 불안정해 보이긴 합니다.”“두 사람한테 경호원 붙여둬. 그리고 이경빈한테는 두 사람이 S 시에 있는 한 건드리지 못할 거라고 전해.”“네, 알겠습니다.”통화를 마친 뒤 강지혁은 임유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이제 만족해?”임유진은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임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짐을 왜 옮겨? 설마 너 여기서 살려고?”“응. 그때도 같이 살았잖아.”강지혁이 뭐가 문제냐며 피식 웃었다.그때와 지금이 같을 리가 없지 않은가.임유진은 입술을 깨물며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왜? 누나는 나랑 같이 사는 게 싫어?”강지혁은 허리를 숙여 임유진의 얼굴 가까이에 다가가 물었다. 근거리에서 보는 그의 얼굴은 마치 신이 빚은 걸작이 따로 없었다. 게다가 어찌나 가까웠는지 속눈썹 개수까지 셀 수 있을 정도였다.임유진은 얼굴을 반대쪽으로 돌리며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강지혁은 그걸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그녀의 턱을 잡고 자신과 눈을 마주치도록 돌려버렸다.“이게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야?”그의 목소리는 어느새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마치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 보려는 듯 지독하게 눈을 맞춰왔다.“아니면 후회해? 탁유미 그 여자를 구하고 내 제안에 동의한 거 후회해?”“후회... 안 해.”임유진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너처럼 하루아침에 우리 관계를 바꾸는 게 쉽지 않아서 그래. 강지혁, 나한테 적응할 시간을 좀 줘.”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애원에 가까웠다.“알았어. 누나 부탁인데 들어줘야지. 잠깐은 이대로 따로 살아. 적응할 시간을 줄게. 하지만 나는 오래 기다리는 거 못 해.”임유진은 그제야 안도했다.“그리고 혁이라고 불러.”강지혁의 손가락이 천천히 그녀의 입술을 매만졌다. 입술 온도가 조금은 뜨거웠다.“응, 혁아...”원하는 대로 혁이라는 호칭을 듣자 그는 활짝 웃더니 그녀를 자기 품 안에 꽉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얼굴을 그녀의 목에 묻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얘기했다.“드디어 내 누나가 됐네? 앞으로 내 옆에만 있어. 어디 떠날 생각하지 말고. 알았지?”임유진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지금은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한기가 몸을 덮고 있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강지혁의 품은 분명히 이토록 따뜻한데 왜 이리도 추울까......임유진은 다음날
임유진과 강지혁의 첫 만남이 어땠는지 탁유미는 일전 임유진에게 들은 적이 있다. 그때만 해도 두 사람이 그렇게 만난 된 건 정말 대단한 인연이라며 감탄했었다.하지만 지금은 그게 인연이 아니라 점점 더 악연처럼 보였다.“나 때문에 무리 안 해도 돼요!”탁유미가 부채감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사실 언젠가는 이렇게 될 거였어요. 언니가 그런 표정을 짓지 않아도 돼요. 강지혁은 얼마 전부터 계속 자기 누나가 되어 달라고 했었거든요. 그냥 언니 일 때문에 그 시기가 조금 앞당겨졌을 뿐이에요.”강지혁은 자신이 원하는 거라면 그게 무엇이든 반드시 손에 넣는다.지금까지는 여차여차 거절을 해왔지만 그 거절이 언제고 먹힐 거라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녀의 거절은 비유하자면 그가 게임을 클리어하는 데 난이도를 조금 높여줄 장애물 정도일 것이다.“하지만...!”“대신 언니랑 윤이는 이제 이곳에서 마음 졸이지 않아도 되잖아요. 그리고 나도 강지혁이라는 든든한 뒷배가 생긴 거고요. 이렇게 생각하면 꽤 나쁠 것 없는 거래 아니에요?”말은 그렇게 했지만 탁유미는 그녀가 자신의 죄책감을 덜어주려고 이런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다.겉으로 보기에는 그럴싸한 거래지만 임유진에게는 아니다. 잊고 싶은 옛 연인과 누나 동생이라는 이상한 관계에 발이 묶이는 게 정상일 리가 없다.“이제 내 얘기는 여기서 그만. 그보다 어제 이경빈이 뭐래요?”탁유미가 쓰게 웃었다.“윤이를 이씨 집안으로 데려가겠대요. 물론 거절했어요.”“그럼 윤이는 이경빈이 아버지라는 걸 알게 된 거예요?”“아니요. 윤이는 호텔 방에 도착하자마자 잠이 들어버려서 아무것도 몰라요. 그리고 이경빈이 윤이에게 말을 걸 틈도 없이 강지혁 씨 비서라는 분이 찾아왔거든요.”어제는 만약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이경빈은 절대 두 사람을 풀어주지 않았을 것이다.자는 윤이를 데리고 방에서 빠져나올 때 이경빈의 얼굴은 무섭게 일그러져있었다.임유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그런 소리까지 한 걸 보면 조만간 윤이의
“만약 이경빈이 정말 양육권을 걸고넘어진다면 그때는 내가 도와줄게요. 그러니까 지금은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말아요.”임유진은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고마워요, 유진 씨.”만약 임유진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패닉에 빠졌을 것이다. 게다가 여태껏 이경빈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테고.임유진은 탁유미의 거처에서 나왔다.사실 아까 그녀 앞에서는 차마 얘기를 할 수 없었지만, 만약 이경빈이 양육권을 찾겠다고 나오면 탁유미는 높은 확률로 지게 된다.탁유미는 경제적으로 안정적이지 못하고 게다가 옥살이했던 경력까지 있었으니까. 그에 반해 이경빈은 해성시의 유명한 사업가이기에 아이에게 풍족한 생활을 줄 수 있다.게다가 이경빈은 머지않아 공수진과 결혼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아무래도 한 부모 가정보다 정상적인 가족 환경이 더 좋을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모든 면에서 탁유미는 불리할 수밖에 없다.대체 어떻게 해야 탁유미가 양육권을 빼앗기지 않게 할 수 있을까?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보니 어느새 월세방 앞에까지 다다랐다.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거실 한가운데 강지혁이 있었다.“왜 또 왔어?”강지혁은 소파에 앉아 얼마 전 임유진이 구매한 법률 서적을 들고 현관문 쪽을 바라보았다.“내가 오는 게 싫어?”“그게 아니라, 당분간 나 적응할 시간을 준다며?”임유진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맞아. 오늘은 그냥 누나 얼굴 보러 온 거야.”그는 손에 든 서적을 내려놓더니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탁유미 씨 만나고 왔어?”“응.”이제는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되묻는 걸 그만뒀다. 강지혁이라면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알고 있을 테니까.“그렇게 걱정돼?”강지혁은 조금 언짢은 얼굴로 말했다.“언니한테는 신세를 많이 졌으니까.”옥살이하고 나와 그런지 좋은 사람들의 호의는 더 소중히 여기게 된다.“나도 좀 걱정해주지?”강지혁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건드리며 말했다.“너 걱정해주는 사람 많잖아.”“그런 사람 몇천 명이 와도 나는 네가 걱정해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