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째로 빌려?사람이 없는 게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통째로 빌렸을 줄이야...아마 다른 사람이었으면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레스토랑 쪽에서 거절했을 것이다. 오직 강지혁이기 때문에 이곳을 빌릴 수 있었을 것이다.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고이준을 따라 3층에 도착해 보니 큰 홀에는 역시 아무도 없었고 야경이 보이는 창가 쪽에 강지혁 혼자 앉아있었다.그는 발걸음 소리를 듣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자기 쪽으로 걸어오는 임유진을 빤히 바라보았다.살짝 올린 입 끝이 은은한 조명과 어우러져 마치 화보라도 찍는 것 같았고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임유진은 한숨을 한번 들이켜더니 강지혁의 앞으로 다가가 입을 열었다.“언니랑 윤이 데리고 나와줘.”강지혁은 잔잔하게 웃었다.“일단 앉아.”고이준은 그 말에 어느새 의자를 뒤로 빼주고 있었다.임유진은 잠깐 머뭇거리더니 결국 자리에 앉았다.강지혁은 그녀가 자리에 앉자마자 곧바로 메뉴판을 건네주었다.“뭐 먹고 싶은지 한번 봐봐.”“나 밥 먹으러 온 거 아니야.”“나는 밥 먹으러 온 거 맞아.”강지혁은 태연하게 말을 받아쳤다.“전에 내가 했던 말 기억해? 앞으로 돈 많이 벌게 되면 너 맛있는데 데려다준다고 했었잖아.”임유진의 몸이 움찔했다.그건 두 사람이 작은 원룸에 살았을 때 그가 해줬던 말이었다.“여기 음식이 네 마음에 들지는 모르겠어.”아마 그와 얘기를 나누려면 식사부터 마쳐야 할 것 같다.“아무거나 시켜. 난 여기 와본 적 없어서 뭐가 맛있는지도 몰라.”“그래 그럼.”강지혁은 레스토랑 매니저를 불러 이것저것 주문했다. 그리고 두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다 내보냈다.“그렇게도 탁유미 씨를 도와주고 싶어?”“응.”강지혁의 질문에 임유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그 여자는 한지영도 아니잖아. 그런데도 네가 이런 부탁을 할 가치가 있어?”“응. 있어.”탁유미는 그녀가 제일 힘들 때 손을 내밀어줬던 사람이다.‘너 같은 사람
그렇다면 자신은? 자신은 그녀에게 있어 어떠한 존재지?이런 불편한 감정 또한 질투인 걸까?“너는 탁유미 씨한테 일이 생기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먼저 연락도 안 했을 거지?”강지혁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임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표정이 이미 모든 걸 설명해주고 있었다.두 사람을 감싼 공기가 한순간에 차갑게 내려앉았다.다행히도 그때 웨이터가 메뉴를 올리기 시작했다.음식이 하나둘 올라오고 어느새 테이블 위에는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음식들로 가득 차 있었다.하지만 임유진은 그런 음식을 앞에 놓고도 식욕이 돌지 않았고 지금도 탁유미와 윤이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만약 이경빈이 정말 아이를 뺏으려고 든다면...임유진은 문득 지난번 탁유미가 병원에 입원했던 모습이 떠올랐다.그때는 아직 윤이의 존재를 들키기 전이었고 그저 이경빈과 엮이기 싫다는 생각 하나도 자해를 시도한 것이었다그런데 이번에는 윤이의 존재까지 들켜버렸으니...임유진은 더 이상 상상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일단 먹어.”강지혁은 기다란 손가락으로 고기를 썰어주더니 임유진에게 건네주었다.“이 집 스테이크 잘해.”“일단 먼저 언니와 윤이 데리고 나와주면 안 돼?”임유진은 그와 눈을 마주치며 말을 이었다.“제발 부탁할게. 언니한테 무슨 일 생길까 봐 그래.”“부탁?”강지혁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오늘 벌써 두 번이나 나한테 부탁한 거 알아?”임유진은 쓰게 웃었다.그녀 역시 헤어지고 난 뒤에 그에게 뭔가를 부탁할 줄은 생각도 못 했으니까.“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것도 한 번뿐이야. 두 번은 없어.”그의 말에 임유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몸은 뻣뻣하게 굳어버렸다.하지만 그때 그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대신 선택할 기회를 줄게.”“선택?”“그래. 나랑 모르는 사이로 지낼 것인지, 내 누나가 될 것인지, 선택해 봐.”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그의 모습은 마치 먹잇감이 저절로 떨어지길 기다리는 사냥꾼 같았다.임유진은 입술을 잘게 깨물었다.
전에 그는 임유진이 조만간 먼저 누나가 되겠다며 찾아올 것 같다고 말했었다.그리고 그의 말대로 지금 아쉬운 쪽은 확실히 그녀가 맞았다.몇 분 후, 임유진은 결심한 듯 깊게 숨을 들이켜고는 서서히 입을 열었다.“네 누나 할게. 그러니까 지금 당장 유미 언니랑 윤이를 이경빈한테서 데리고 나와 줘. 그리고 이경빈이 함부로 가까이하지 못하게 경호원도 붙여줘.”그녀는 그의 누나가 되는 걸 선택했다.탁유미와 윤이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는데 뭔들 못하겠는가.탁유미에게는 보답해야 할 것이 있고 윤이는... 그 아이만큼은 꼭 지켜주고 싶었다.“그래.”강지혁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더니 이내 고이준에게 전화를 걸어 지시를 내렸다.그리고 전화를 끊고는 다시 임유진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이제 됐지?”“시간은 얼마나 걸릴 것 같아?”“얼마 안 걸려. 이제 식사할까, 누나?”그는 전처럼 예쁘게 웃으며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이에 임유진은 잠깐 움찔하더니 천천히 수저를 들어 음식을 입에 넣기 시작했다.분명히 맛있는 음식이었지만 여전히 식욕은 돌지 않았다. 아마 두 사람의 안전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계속 이럴 것 같았다.강지혁은 그 모습을 보고 딱히 뭐라 하지 않았고 그저 이따금 음식들을 그녀 앞에 건네줄 뿐이었다.3층 홀은 두 사람의 식사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그때 강지혁의 휴대폰이 울리고 임유진은 반사적으로 그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강지혁은 그녀도 들을 수 있게 스피커를 켰다.“대표님, 탁유미 씨와 탁윤 군을 데리고 나왔습니다.”고이준의 목소리였다.“어디 다친 곳은 없어요?”임유진이 다급하게 물었다.“네, 외상은 없어 보입니다만 탁유미 씨 상태가 조금 불안정해 보이긴 합니다.”“두 사람한테 경호원 붙여둬. 그리고 이경빈한테는 두 사람이 S 시에 있는 한 건드리지 못할 거라고 전해.”“네, 알겠습니다.”통화를 마친 뒤 강지혁은 임유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이제 만족해?”임유진은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임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짐을 왜 옮겨? 설마 너 여기서 살려고?”“응. 그때도 같이 살았잖아.”강지혁이 뭐가 문제냐며 피식 웃었다.그때와 지금이 같을 리가 없지 않은가.임유진은 입술을 깨물며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왜? 누나는 나랑 같이 사는 게 싫어?”강지혁은 허리를 숙여 임유진의 얼굴 가까이에 다가가 물었다. 근거리에서 보는 그의 얼굴은 마치 신이 빚은 걸작이 따로 없었다. 게다가 어찌나 가까웠는지 속눈썹 개수까지 셀 수 있을 정도였다.임유진은 얼굴을 반대쪽으로 돌리며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강지혁은 그걸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그녀의 턱을 잡고 자신과 눈을 마주치도록 돌려버렸다.“이게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야?”그의 목소리는 어느새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마치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 보려는 듯 지독하게 눈을 맞춰왔다.“아니면 후회해? 탁유미 그 여자를 구하고 내 제안에 동의한 거 후회해?”“후회... 안 해.”임유진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너처럼 하루아침에 우리 관계를 바꾸는 게 쉽지 않아서 그래. 강지혁, 나한테 적응할 시간을 좀 줘.”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애원에 가까웠다.“알았어. 누나 부탁인데 들어줘야지. 잠깐은 이대로 따로 살아. 적응할 시간을 줄게. 하지만 나는 오래 기다리는 거 못 해.”임유진은 그제야 안도했다.“그리고 혁이라고 불러.”강지혁의 손가락이 천천히 그녀의 입술을 매만졌다. 입술 온도가 조금은 뜨거웠다.“응, 혁아...”원하는 대로 혁이라는 호칭을 듣자 그는 활짝 웃더니 그녀를 자기 품 안에 꽉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얼굴을 그녀의 목에 묻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얘기했다.“드디어 내 누나가 됐네? 앞으로 내 옆에만 있어. 어디 떠날 생각하지 말고. 알았지?”임유진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지금은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한기가 몸을 덮고 있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강지혁의 품은 분명히 이토록 따뜻한데 왜 이리도 추울까......임유진은 다음날
임유진과 강지혁의 첫 만남이 어땠는지 탁유미는 일전 임유진에게 들은 적이 있다. 그때만 해도 두 사람이 그렇게 만난 된 건 정말 대단한 인연이라며 감탄했었다.하지만 지금은 그게 인연이 아니라 점점 더 악연처럼 보였다.“나 때문에 무리 안 해도 돼요!”탁유미가 부채감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사실 언젠가는 이렇게 될 거였어요. 언니가 그런 표정을 짓지 않아도 돼요. 강지혁은 얼마 전부터 계속 자기 누나가 되어 달라고 했었거든요. 그냥 언니 일 때문에 그 시기가 조금 앞당겨졌을 뿐이에요.”강지혁은 자신이 원하는 거라면 그게 무엇이든 반드시 손에 넣는다.지금까지는 여차여차 거절을 해왔지만 그 거절이 언제고 먹힐 거라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녀의 거절은 비유하자면 그가 게임을 클리어하는 데 난이도를 조금 높여줄 장애물 정도일 것이다.“하지만...!”“대신 언니랑 윤이는 이제 이곳에서 마음 졸이지 않아도 되잖아요. 그리고 나도 강지혁이라는 든든한 뒷배가 생긴 거고요. 이렇게 생각하면 꽤 나쁠 것 없는 거래 아니에요?”말은 그렇게 했지만 탁유미는 그녀가 자신의 죄책감을 덜어주려고 이런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다.겉으로 보기에는 그럴싸한 거래지만 임유진에게는 아니다. 잊고 싶은 옛 연인과 누나 동생이라는 이상한 관계에 발이 묶이는 게 정상일 리가 없다.“이제 내 얘기는 여기서 그만. 그보다 어제 이경빈이 뭐래요?”탁유미가 쓰게 웃었다.“윤이를 이씨 집안으로 데려가겠대요. 물론 거절했어요.”“그럼 윤이는 이경빈이 아버지라는 걸 알게 된 거예요?”“아니요. 윤이는 호텔 방에 도착하자마자 잠이 들어버려서 아무것도 몰라요. 그리고 이경빈이 윤이에게 말을 걸 틈도 없이 강지혁 씨 비서라는 분이 찾아왔거든요.”어제는 만약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이경빈은 절대 두 사람을 풀어주지 않았을 것이다.자는 윤이를 데리고 방에서 빠져나올 때 이경빈의 얼굴은 무섭게 일그러져있었다.임유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그런 소리까지 한 걸 보면 조만간 윤이의
“만약 이경빈이 정말 양육권을 걸고넘어진다면 그때는 내가 도와줄게요. 그러니까 지금은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말아요.”임유진은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고마워요, 유진 씨.”만약 임유진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패닉에 빠졌을 것이다. 게다가 여태껏 이경빈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테고.임유진은 탁유미의 거처에서 나왔다.사실 아까 그녀 앞에서는 차마 얘기를 할 수 없었지만, 만약 이경빈이 양육권을 찾겠다고 나오면 탁유미는 높은 확률로 지게 된다.탁유미는 경제적으로 안정적이지 못하고 게다가 옥살이했던 경력까지 있었으니까. 그에 반해 이경빈은 해성시의 유명한 사업가이기에 아이에게 풍족한 생활을 줄 수 있다.게다가 이경빈은 머지않아 공수진과 결혼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아무래도 한 부모 가정보다 정상적인 가족 환경이 더 좋을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모든 면에서 탁유미는 불리할 수밖에 없다.대체 어떻게 해야 탁유미가 양육권을 빼앗기지 않게 할 수 있을까?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보니 어느새 월세방 앞에까지 다다랐다.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거실 한가운데 강지혁이 있었다.“왜 또 왔어?”강지혁은 소파에 앉아 얼마 전 임유진이 구매한 법률 서적을 들고 현관문 쪽을 바라보았다.“내가 오는 게 싫어?”“그게 아니라, 당분간 나 적응할 시간을 준다며?”임유진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맞아. 오늘은 그냥 누나 얼굴 보러 온 거야.”그는 손에 든 서적을 내려놓더니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탁유미 씨 만나고 왔어?”“응.”이제는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되묻는 걸 그만뒀다. 강지혁이라면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알고 있을 테니까.“그렇게 걱정돼?”강지혁은 조금 언짢은 얼굴로 말했다.“언니한테는 신세를 많이 졌으니까.”옥살이하고 나와 그런지 좋은 사람들의 호의는 더 소중히 여기게 된다.“나도 좀 걱정해주지?”강지혁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건드리며 말했다.“너 걱정해주는 사람 많잖아.”“그런 사람 몇천 명이 와도 나는 네가 걱정해주는
강지혁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그녀 말대로 이건 모순이 맞다.임유진을 너무 깊게 사랑할까 봐 두려웠다. 아버지의 전철을 밟게 될까 봐, 사랑 때문에 자존심이고 목숨이고 다 버릴 정도로 그녀를 사랑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하지만 헤어지고 나서는 미쳐버릴 정도로 그녀가 보고 싶고 강제로라도 옆에 두고 싶었다.“날 이렇게 모순덩어리로 만드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너밖에 없어.”그의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그녀에게로 향했다.임유진은 더욱더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역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그녀를 바라보는 강지혁의 눈에는 갈망과 억제가 같이 섞여 있었다....다음날, 임유진이 퇴근하려고 빌딩에서 나와보니 강씨 저택 기사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대표님께서 임유진 씨를 보고 싶으시답니다.”임유진은 잠깐 망설이더니 별말 없이 차에 올라탔다.그리고 그 장면을 정한나가 또 한 번 목격해버리고 말았다.정한나는 그녀가 전과 같은 차량에 오르는 것을 보고 역시 유승호와 뭔가 있는 게 맞다고 확신했다.전에 친구에게서 유승호의 현 여자친구는 연예인이라고 들은 적이 있다. 그러니 만약 이 사실을 그 여자친구가 알게 된다면...정한나는 사악한 미소를 짓더니 휴대폰을 꺼내 들어 임유진이 차에 오르는 장면과 차가 떠나는 모습까지 전부 사진에 담았다.이러한 증거를 조금 더 모은 후 인터넷에 뿌리게 되면 유승호의 애인이 알아서 임유진을 처리해줄 것이다.유승호의 애인은 성격이 괴팍하기로 소문났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니 임유진은 단단히 잘못 걸린 것이다.정한나는 구석진 곳에서 혼자 사진을 보며 씩 웃었다.임유진을 태운 차량은 강씨 저택 앞에 멈춰 섰다.“대표님은 안에 계십니다. 유진 씨가 오게 되면 바로 침실로 올라오라고 하셨어요.”침실이라는 말에 임유진은 조금 어색하게 웃었다. 강씨 저택 사람들 모두 두 사람 사이를 알고 있다 해도 민망한 건 어쩔 수 없었다.지금은 마치 연극 무대에 선 배우가 된 기분이었다. 강지혁이 쓴 대본대로 진행할 수밖에 없는 배우
강지혁은 허리에 타올 하나만 두른 채 촉촉이 젖은 머리를 하고 나왔다. 그러고는 임유진을 보더니 싱긋 웃었다.“왔어?”“응.”임유진은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애먼 벽만 바라보았다.“왜? 민망해?”강지혁은 그런 그녀 앞으로 다가와 말했다.“나 머리 안 말려 줄 거야? 그때 월세방에 처음 들어갔을 때도 샤워하고 나온 내 머리를 누나가 말려줬었잖아.”“너는 키가 너무 커. 그러니까 알아서...”그녀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강지혁이 허리를 숙였다.“이제 됐지?”얼굴 바로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그녀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마침 강지혁의 두 눈과 마주쳐 버리고 말았다.그의 두 눈은 마력이라도 있는 건지 한번 보면 눈을 뗄 수가 없다.강지혁은 타올 하나를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난 누나가 내 머리 말려주는 거 좋아.”임유진은 뻣뻣한 손으로 타올을 건네받더니 천천히 그의 머리에 묻은 물기를 닦아주었다.타올 덕에 그와의 눈 맞춤을 피할 수 있어서 어찌 보면 참 다행이었다.사실 처음 만났을 때뿐만 아니라 강씨 저택에 들어와 살면서도 몇 번이나 그의 머리를 말려주었다.다만 그때와 똑같은 행동이지만 지금은 전혀 다른 마음이라는 것이다.물기를 어느 정도 닦아내자 강지혁은 손가락으로 앞머리를 매만졌다.“머리가 좀 길었네. 하는 김에 나 머리도 잘라줘.”“미용실 가서 자르는 게 좋지 않을까? 난 할 줄 몰라.”임유진은 반사적으로 거절했다.“거짓말을 제일 싫어한다는 사람이 거짓말하면 어떡해.”강지혁은 입꼬리를 씩 올렸다.“그때도 나 머리 잘라준 적 있잖아.”임유진은 입술을 깨물었다.강지혁은 그녀와 월세방에서 했던 것들을 하나부터 열까지 다 다시 해볼 작정인 건가?그와 월세방에서 한 일은 많고도 많았다.“하지만 머리 자르는 도구 같은 것도 없잖아.”임유진은 다른 핑계를 댔다.그러자 강지혁은 집사를 시켜 미용실에서나 볼 법한 도구들을 금방 준비해주었다.이에 조금 말문이 막힌 그녀였다.이렇게 많은 도구는 필요 없거니와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