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혁은 허리에 타올 하나만 두른 채 촉촉이 젖은 머리를 하고 나왔다. 그러고는 임유진을 보더니 싱긋 웃었다.“왔어?”“응.”임유진은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애먼 벽만 바라보았다.“왜? 민망해?”강지혁은 그런 그녀 앞으로 다가와 말했다.“나 머리 안 말려 줄 거야? 그때 월세방에 처음 들어갔을 때도 샤워하고 나온 내 머리를 누나가 말려줬었잖아.”“너는 키가 너무 커. 그러니까 알아서...”그녀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강지혁이 허리를 숙였다.“이제 됐지?”얼굴 바로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그녀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마침 강지혁의 두 눈과 마주쳐 버리고 말았다.그의 두 눈은 마력이라도 있는 건지 한번 보면 눈을 뗄 수가 없다.강지혁은 타올 하나를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난 누나가 내 머리 말려주는 거 좋아.”임유진은 뻣뻣한 손으로 타올을 건네받더니 천천히 그의 머리에 묻은 물기를 닦아주었다.타올 덕에 그와의 눈 맞춤을 피할 수 있어서 어찌 보면 참 다행이었다.사실 처음 만났을 때뿐만 아니라 강씨 저택에 들어와 살면서도 몇 번이나 그의 머리를 말려주었다.다만 그때와 똑같은 행동이지만 지금은 전혀 다른 마음이라는 것이다.물기를 어느 정도 닦아내자 강지혁은 손가락으로 앞머리를 매만졌다.“머리가 좀 길었네. 하는 김에 나 머리도 잘라줘.”“미용실 가서 자르는 게 좋지 않을까? 난 할 줄 몰라.”임유진은 반사적으로 거절했다.“거짓말을 제일 싫어한다는 사람이 거짓말하면 어떡해.”강지혁은 입꼬리를 씩 올렸다.“그때도 나 머리 잘라준 적 있잖아.”임유진은 입술을 깨물었다.강지혁은 그녀와 월세방에서 했던 것들을 하나부터 열까지 다 다시 해볼 작정인 건가?그와 월세방에서 한 일은 많고도 많았다.“하지만 머리 자르는 도구 같은 것도 없잖아.”임유진은 다른 핑계를 댔다.그러자 강지혁은 집사를 시켜 미용실에서나 볼 법한 도구들을 금방 준비해주었다.이에 조금 말문이 막힌 그녀였다.이렇게 많은 도구는 필요 없거니와 다
“그래?”강지혁은 수중에 있는 가위를 보더니 눈빛이 순간 차갑게 변했다. 방금 그 순간, 그는 그녀라면 기꺼이 목숨을 내줄 수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미친 게 틀림없다.한 번도 여자에게 자신의 목숨을 줘도 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그의 죽음은 오직 그가 결정하는 것이니까. 애초에 그녀와 헤어진 것도 그렇게 될까 봐 겁이 나서 아니었나?그런데 왜 헤어진 마당에 이런 생각이 드는 거지?“정말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그의 침묵 때문에 임유진이 뭔가 오해했는지 다급하게 해명했다.“너랑 헤어졌을 때 확실히 힘들고 고통스럽긴 했어도 다 지난 일이야. 고작 헤어진 거로 상대를 죽이려는 생각은 안 해.”강지혁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가 다 지난 일이라고 했을 때, 마치 심장에 뭔가에 찔린 듯 욱신거렸다.“나 죽이고 싶단 생각 한 적 없어?”강지혁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응, 없어.”“내가 죽는 건 싫다는 뜻이야?”그는 그녀를 꿰뚫어 보듯 집요하게 눈을 맞춰왔다.“죽길 바라지는 않아.”두 사람이 헤어졌다고 한들 그것 때문에 강지혁이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저 서로가 모든 걸 잊고 각자의 길을 가기만을 바랐다. 물론 지금에 와서는 그것도 안 될 것 같지만...“그럼 너는 날 죽일 일도 없겠네?”임유진은 그의 말이 조금 웃겼다. 일단 그의 말은 성립 자체가 되지 않는다. S 시 제일 꼭대기에 있는 남자를 고작 변호사 비서 따위가 무슨 수로 죽일 수 있을까.“그건 내가 대답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대답해 줘.”강지혁은 그녀의 답을 원했다.그의 눈과 마주하자 임유진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그녀는 입을 달싹이다 한참 뒤에야 ‘응’이라는 한 글자를 내뱉었다.이에 강지혁의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가더니 이내 활짝 웃었다. 눈가가 예쁘게 접힌 것이 진심으로 기쁜 듯했다.“그 말 꼭 기억해.”그는 다시 수중의 가위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계속 잘라.”머리를 다 자르고 나니 임유진은 손이 다 얼어붙
“...”애착 인형 같은 건가...?임유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상념에서 빠져나와 다시 한번 사건 자료에 집중했다.며칠 후면 이재하의 재판이 열리게 된다. 김은아 쪽은 이대로 계속 질질 끌며 배상금을 주지 않을 생각인 듯했다.배상금으로 거의 억 단위의 돈을 주기보다 1년 형을 사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임유진은 교통사고를 낸 진정한 가해자가 소지혜라는 걸 거의 90% 확신하고 있지만 아직 이렇다 할 유력 증거는 잡지 못한 상태다.역시 사고 현장을 다시 한번 둘러보며 증거를 찾을 수밖에 없는 건가? 이거 말고는 현재로서 다른 방법이 없었다.증거를 찾지 못하면 재판에서 이긴다고 한들 이재하 가족은 일 푼도 얻지 못하게 된다.“뭘 그렇게 열심히 봐?”그때 강지혁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고개를 돌려보니 강지혁은 어느새 화상 회의를 끝내고 그녀의 곁에 와 있었다.그는 허리를 숙이고 한 손으로 책상을 지탱한 채 그녀가 보고 있던 사건 자료를 바라보았다.“사건 좀 보는 중이야.”“정말 그 작은 로펌에서 변호사 비서로 계속 일할 거야? 내가 좀 도와줄까?”강지혁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아예 로펌을 세워줄게. 그러면 너는 변호사 자격증도 있으니까 남들 보조가 아니라 네가 직접 사건을 받을 수도 있게 돼.”“괜찮아. 지금은 일단 경력을 쌓고 싶어.”“그래서 거절하려고?”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두 사람을 감싸고 있던 공기도 덩달아 무거워진 듯했다.임유진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더니 그를 보며 말했다.“강지혁, 나한테 뭘 자꾸 해주지 않아도 돼. 네가 언니랑 윤이 지켜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고마우니까.”그녀는 그에게 기댈 생각이 없다.강지혁이 정말 로펌을 차려준다고 해도 그건 결국 그녀의 것이 아닌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신기루 같은 것일 테니까. 언젠가 그의 마음이 또 변하게 되면 그것도 하루아침에 사라지게 된다.강지혁은 손가락으로 그녀가 입술을 깨물지 않게 입술을 어루만지며 물었다.“왜 계속 혁이라고
임유진은 입으로는 혁이라고 내뱉으면서 마음속으로는 ‘그는 강지혁이다.’를 계속해서 외쳤다.“네 앞에서 나는 그저 혁이일 뿐이야.”강지혁은 이 말과 함께 두 팔로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그녀의 몸은 그의 향기로 감싸졌다. 임유진의 눈은 어둡게 가라앉았다.강지혁은 더 이상 혁이가 될 수 없다. 헤어짐을 입 밖으로 냈을 때 그녀의 혁이는 이미 사라지고 없으니까....호텔 방 안.이경빈은 지금 공수진과 통화를 하고 있다.“내일 갈 거야. 인터넷은 내가 처리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마.”“경빈 씨, 대체 무슨 일인데 나한테 한마디 말도 없이 떠나요? 따지려는 게 아니에요. 그냥 무슨 일인지는 얘기해줬으면 좋겠어요.”공수진의 목소리는 당장이라도 달려가 안아줘야 할 것처럼 가녀렸다.“돌아가면 다 얘기해줄게.”이경빈은 전화를 끊은 뒤 두 손으로 관자놀이를 주물렀다.그는 요즘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눈만 감으면 탁유미와의 과거 추억들이 자꾸 떠올랐기 때문이다.그녀의 미소, 그녀의 눈물, 임신했다며 외치던 그녀의 모습과 그에 자신이 어떻게 답했는지 그리고 얼마 전 그녀를 찾아가 자신의 애를 낳으라고 했을 때 날카로운 유리잔으로 망설임 없이 배를 찌르던 모습까지...그녀에게는 이미 그의 피가 흐르는 아이가 있었다. 청각 장애가 있는 아이, 윤이.윤이와 처음 만났을 당시를 떠올리자 이경빈은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치솟았다.그때 그는 아이에게 왜 그러냐고 물었다. 이에 윤이는 그와 닮은 두 눈으로 멀뚱히 바라만 보다가 열심히 손으로 휘적거리며 애써 입을 열려고 했지만 나오는 건 옹알이와 비슷한 말뿐이었다.아이가 청각장애인 걸 알아채자마자 밖에서는 냉혈한이라 불리던 그가 어쩐 일인지 동정이라는 걸 했다.하지만 그 아이가 자기 아들이었을 줄이야. 그리고 그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됐다!이경빈은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외투를 들고 방을 나섰다.거실에 있던 부하는 그가 나가려고 하자 벌떡 일어서며 물었다.“대표님, 이 시간에 어디 가시려고요?”
“아저씨!”윤이는 활짝 웃으며 그를 불렀다. 그리고 이경빈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탁유미 엄마도 화장실에서 나왔다가 이경빈의 얼굴을 보고 얼굴이 단번에 창백해졌다. 서둘러 손자를 데려오려고 했지만, 이경빈의 싸늘한 시선과 마주하고는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이경빈은 탁씨 집안에 크나큰 상처를 남겼다.그때 탁유미 엄마는 그에게 재판에 서지 말아 달라고 빌었다. 하지만 이 남자는 싸늘한 한마디만 남기고 그녀를 내쫓았다.“이건 탁씨 집안이 이씨 집안과 공수진에게 진 빚입니다. 솔직히 고작 몇 년간 옥살이하는 것도 모자랄 지경입니다, 아시겠습니까?”탁유미는 엄마가 무서워하는 걸 느끼고는 그녀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탁유미 엄마는 그제야 조금 진정이 되는 듯했다.“이경빈, 할 말 있으면 나랑 밖에서 해.”이경빈은 그녀에게 시선도 주지 않았다.“너 찾으러 온 거 아니야.”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윤이와 시선을 맞추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윤이 너는 탁 씨가 아니고 이 씨야.”그 말에 탁유미는 그가 뭐하러 왔는지 단번에 깨달았다.‘안 돼! 말하지 마! 더 이상 말하지 말라고! 이대로 윤이가 알아버리면...!’그녀가 아들의 귀를 막으려고 재빠르게 다가왔지만 한발 늦었다.이경빈의 청량한 목소리가 그의 입을 뚫고 나와 이 작은 방에 울려 퍼졌다.“내가 네 아빠야.”“아니야!”탁유미는 윤이의 곁으로 다가와 그를 노려보았다.만약 이경빈이 윤이의 팔을 잡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지금쯤 윤이를 자신의 뒤로 숨겼을 것이다.“유전자 검사 보고서라도 눈앞에 대령해야 인정할래?”이경빈의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윤이는 의문 가득한 얼굴로 이경빈을 한번 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탁유미를 바라보았다.“엄마, 아빠는 하늘나라에 있는 거 아니었어요? 왜 아저씨가 내 아빠라고 그래요?”탁유미는 입술을 깨물었다.대체 아이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네 아빠는 한 번도 너를 원한 적 없다고 어떻게 말해야 할까.심지어 그 말 한마디 때문에 윤이는 이 세상에 태어나
“그럼 앞으로 아빠도 우리랑 같이 사는 거예요?”아이의 목소리에는 기대와 갈망이 묻어있었다. 평소 보는 애니메이션 속의 가족들은 모두 함께 살았으니 말이다.이경빈이 그런 아이를 보며 뭐라고 얘기하려는 찰나 탁유미가 먼저 입을 열었다.“윤이야, 아... 빠는 바쁜 것 같으니까 이만 잘 가라고 인사할까?”그녀는 아빠라는 두 글자를 힘겹게 입에 올렸다.“아빠는 오늘 우리랑 같이 안 있어요?”윤이가 실망한 듯 풀이 죽은 얼굴로 물었다.“집이 너무 작아서 아빠는 들어올 수 없을 것 같네.”탁유미는 이경빈에게 제발 그가 이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물러서 줬으면 하는 간절함을 담아 눈빛을 보냈다.이경빈은 미간을 찌푸렸다. 원래 하려던 말이 그녀의 눈빛 때문에 목구멍에서 막혀 나오지 않았다.대체 왜 그녀의 눈치를 봐야 하는 거지?!지금 눈치를 봐야 할 건 탁유미 쪽이 아닌가!하지만 결국 이경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자, 윤이야, 아빠한테 잘 가세요 하고 우리는 이만 자자.”아이는 그녀의 말대로 이경빈에게 인사를 하고는 다시 한번 엄마 아빠와 같이 살고 싶다는 소리를 했다.이에 탁유미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탁유미 엄마가 아이를 데리고 씻으러 화장실로 간 뒤 탁유미가 먼저 입을 열었다.“이경빈, 너랑 내 사이가 어떻든 적어도 아이 앞에서는 쓸데없는 말 하지 마.”“어차피 알게 될 건데 조금 더 빨리 알게 된다고 해도 다를 것 없잖아.”이경빈이 차갑게 대꾸했다.“너 지금 이러는 거 복수 때문이잖아. 이참에 한번 물어나 보자. 3년 형으로도 부족하고 내가 내 배를 찌른 것도 부족하면 대체 네가 원하는 건 뭔데? 어떻게 해야 이 지긋지긋한 복수를 끝낼 수 있는 건데? 팔이나 다리라도 잘라야 속이 시원하겠어? 그래야 네 마음이 풀려?”탁유미는 하루라도 빨리 그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싶었다.이경빈은 그녀의 말을 듣더니 점점 더 표정을 굳혔다.“팔과 다리? 고작 그 정도로 될 것 같아? 나는 윤이를 네 곁에 둘 생각 없어. 전
이경빈은 돌아가는 차 안에서 자기도 모르게 아까 탁유미가 잡았던 팔을 매만졌다.두 사람이 다시 만난 뒤로 탁유미가 먼저 잡아 온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팔을 잡혔을 때 그녀의 손 떨림이 여실히 느껴졌다. 게다가 그의 손을 뿌리치려고 살갗이 닿았을 때 솔직히 깜짝 놀랐다. 그녀의 손이 마치 산 사람이 아닌 것처럼 차가웠기 때문이다.이경빈은 어느새 또 탁유미 생각을 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그녀를 동정해서는 안 된다. 아이는 반드시 이씨 집안으로 데리고 와야 한다!...임유진은 한시라도 빨리 단서를 모으고 싶은 마음에 홀로 가해자 차량 궤적을 따라 CCTV가 없는 그 도로에 도착했다.그리고 이곳에 오기 몇 분 전에는 인터넷에 글까지 올리며 사고 당시 시간대에 CCTV가 없었던 구간을 지나간 차량이 있는지, 혹 블랙박스에 뭔가 찍힌 게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을 달라고 했다.하지만 당연하게도 연락을 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그도 그럴 것이 사건이 일어난 지 벌써 꽤 시간이 흘렀고 만약 정말 찍혔다 하더라도 데이터가 지워졌을 수도 있다.게다가 임유진이 쓴 글을 마침 그 도로를 지났던 사람이 볼 확률은 복권에 당첨될 확률보다 낮았다.임유진은 도로를 거닐며 혹시라도 미처 발견하지 못한 CCTV가 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했다. 물론 이 작업도 경찰 쪽에서 이미 다 한 것이라 별다른 수확은 없었다.그녀는 거의 1분에 한 번꼴로 휴대폰을 확인했다. 그러다 드디어 그녀의 글에 답변을 단 사람이 나타났다. 그 사람은 그날 그 시간대에 확실히 그쪽을 지나쳤고 블랙박스를 확인한 결과 두 여자가 내린 것을 봤다며 임유진의 연락처를 물었다.임유진은 이에 눈이 초롱초롱해졌다.이건 행운인 걸까? 정말 증거를 잡은 걸까?!그녀는 고민도 하지 않고 바로 자신의 휴대폰 번호를 건넜다. 그러자 1분도 되지 않아 휴대폰이 울렸다.전화를 받아보니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진이’님 맞으세요?”‘진이’는 임유진의 닉네임이었다.“네, 혹시 ‘강산’님이신가
“네,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요.”임유진은 활짝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릴 수도 있을 것 같다!만약 소지혜가 진정한 가해자라는 게 밝혀지고 그녀가 재산을 옮기는 것까지 미리 막아버린다면 이재하는 배상금을 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임유진은 그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10분이 거의 다 되어갈 때쯤 흰색 봉고차 한 대가 그녀 쪽으로 다가오더니 이윽고 그녀 앞에 멈춰 섰다.문이 열리자 선글라스와 모자를 쓴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차에서 내리지 않은 채 임유진을 향해 물었다.“‘진이’님 맞아요?”임유진의 시선이 운전석에 있는 남자에게로 향했다. 그 남자 역시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고 얼굴에는 마스크까지 했다.그녀는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끼고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그러나 그녀에게 말을 걸었던 남자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아채더니 단번에 차 안으로 끌어당겼다.그리고 차 문은 쾅 하고 닫혔다.“출발해!”남자가 운전석을 향해 외치자 차에 시동이 걸리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역시 일이 이렇게 쉽게 풀릴 리가 없었다!임유진은 그의 손에서 빠져나오려고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다.방금 그녀가 있던 곳은 CCTV가 없는 곳이다. 그리고 상대방도 아마 그 점을 알고 이렇게 당당하게 유괴를 했을 것이다.“그 여자 허튼짓 못 하게 꽉 잡아.”운전석 남자의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도착하기 전에 재미 좀 봐도 되지?”임유진을 제압한 남자가 변태 같은 얼굴로 물었다.“죽이지만 않으면 돼. 지시 사항에는 그 여자를 당분간 병원 신세 지게 하면 된다고 했으니까.”지시 사항?! 누군가의 지시가 있었다는 것인가?임유진의 위에 올라탄 남자는 더러운 손으로 그녀의 옷을 벗기려고 했다.열심히 발버둥 쳐봤지만 소용없었다. 두 손은 남자에 의해 묶여있었고 얼굴은 여러 번 맞은 탓에 입가에는 피까지 흘렀다.“돈 때문이면 내가 더 줄게요.”임유진은 침착하게 말을 내뱉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냉정해야만 살 수 있다.“돈? 변호사 비서나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