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진은 입으로는 혁이라고 내뱉으면서 마음속으로는 ‘그는 강지혁이다.’를 계속해서 외쳤다.“네 앞에서 나는 그저 혁이일 뿐이야.”강지혁은 이 말과 함께 두 팔로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그녀의 몸은 그의 향기로 감싸졌다. 임유진의 눈은 어둡게 가라앉았다.강지혁은 더 이상 혁이가 될 수 없다. 헤어짐을 입 밖으로 냈을 때 그녀의 혁이는 이미 사라지고 없으니까....호텔 방 안.이경빈은 지금 공수진과 통화를 하고 있다.“내일 갈 거야. 인터넷은 내가 처리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마.”“경빈 씨, 대체 무슨 일인데 나한테 한마디 말도 없이 떠나요? 따지려는 게 아니에요. 그냥 무슨 일인지는 얘기해줬으면 좋겠어요.”공수진의 목소리는 당장이라도 달려가 안아줘야 할 것처럼 가녀렸다.“돌아가면 다 얘기해줄게.”이경빈은 전화를 끊은 뒤 두 손으로 관자놀이를 주물렀다.그는 요즘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눈만 감으면 탁유미와의 과거 추억들이 자꾸 떠올랐기 때문이다.그녀의 미소, 그녀의 눈물, 임신했다며 외치던 그녀의 모습과 그에 자신이 어떻게 답했는지 그리고 얼마 전 그녀를 찾아가 자신의 애를 낳으라고 했을 때 날카로운 유리잔으로 망설임 없이 배를 찌르던 모습까지...그녀에게는 이미 그의 피가 흐르는 아이가 있었다. 청각 장애가 있는 아이, 윤이.윤이와 처음 만났을 당시를 떠올리자 이경빈은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치솟았다.그때 그는 아이에게 왜 그러냐고 물었다. 이에 윤이는 그와 닮은 두 눈으로 멀뚱히 바라만 보다가 열심히 손으로 휘적거리며 애써 입을 열려고 했지만 나오는 건 옹알이와 비슷한 말뿐이었다.아이가 청각장애인 걸 알아채자마자 밖에서는 냉혈한이라 불리던 그가 어쩐 일인지 동정이라는 걸 했다.하지만 그 아이가 자기 아들이었을 줄이야. 그리고 그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됐다!이경빈은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외투를 들고 방을 나섰다.거실에 있던 부하는 그가 나가려고 하자 벌떡 일어서며 물었다.“대표님, 이 시간에 어디 가시려고요?”
“아저씨!”윤이는 활짝 웃으며 그를 불렀다. 그리고 이경빈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탁유미 엄마도 화장실에서 나왔다가 이경빈의 얼굴을 보고 얼굴이 단번에 창백해졌다. 서둘러 손자를 데려오려고 했지만, 이경빈의 싸늘한 시선과 마주하고는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이경빈은 탁씨 집안에 크나큰 상처를 남겼다.그때 탁유미 엄마는 그에게 재판에 서지 말아 달라고 빌었다. 하지만 이 남자는 싸늘한 한마디만 남기고 그녀를 내쫓았다.“이건 탁씨 집안이 이씨 집안과 공수진에게 진 빚입니다. 솔직히 고작 몇 년간 옥살이하는 것도 모자랄 지경입니다, 아시겠습니까?”탁유미는 엄마가 무서워하는 걸 느끼고는 그녀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탁유미 엄마는 그제야 조금 진정이 되는 듯했다.“이경빈, 할 말 있으면 나랑 밖에서 해.”이경빈은 그녀에게 시선도 주지 않았다.“너 찾으러 온 거 아니야.”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윤이와 시선을 맞추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윤이 너는 탁 씨가 아니고 이 씨야.”그 말에 탁유미는 그가 뭐하러 왔는지 단번에 깨달았다.‘안 돼! 말하지 마! 더 이상 말하지 말라고! 이대로 윤이가 알아버리면...!’그녀가 아들의 귀를 막으려고 재빠르게 다가왔지만 한발 늦었다.이경빈의 청량한 목소리가 그의 입을 뚫고 나와 이 작은 방에 울려 퍼졌다.“내가 네 아빠야.”“아니야!”탁유미는 윤이의 곁으로 다가와 그를 노려보았다.만약 이경빈이 윤이의 팔을 잡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지금쯤 윤이를 자신의 뒤로 숨겼을 것이다.“유전자 검사 보고서라도 눈앞에 대령해야 인정할래?”이경빈의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윤이는 의문 가득한 얼굴로 이경빈을 한번 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탁유미를 바라보았다.“엄마, 아빠는 하늘나라에 있는 거 아니었어요? 왜 아저씨가 내 아빠라고 그래요?”탁유미는 입술을 깨물었다.대체 아이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네 아빠는 한 번도 너를 원한 적 없다고 어떻게 말해야 할까.심지어 그 말 한마디 때문에 윤이는 이 세상에 태어나
“그럼 앞으로 아빠도 우리랑 같이 사는 거예요?”아이의 목소리에는 기대와 갈망이 묻어있었다. 평소 보는 애니메이션 속의 가족들은 모두 함께 살았으니 말이다.이경빈이 그런 아이를 보며 뭐라고 얘기하려는 찰나 탁유미가 먼저 입을 열었다.“윤이야, 아... 빠는 바쁜 것 같으니까 이만 잘 가라고 인사할까?”그녀는 아빠라는 두 글자를 힘겹게 입에 올렸다.“아빠는 오늘 우리랑 같이 안 있어요?”윤이가 실망한 듯 풀이 죽은 얼굴로 물었다.“집이 너무 작아서 아빠는 들어올 수 없을 것 같네.”탁유미는 이경빈에게 제발 그가 이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물러서 줬으면 하는 간절함을 담아 눈빛을 보냈다.이경빈은 미간을 찌푸렸다. 원래 하려던 말이 그녀의 눈빛 때문에 목구멍에서 막혀 나오지 않았다.대체 왜 그녀의 눈치를 봐야 하는 거지?!지금 눈치를 봐야 할 건 탁유미 쪽이 아닌가!하지만 결국 이경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자, 윤이야, 아빠한테 잘 가세요 하고 우리는 이만 자자.”아이는 그녀의 말대로 이경빈에게 인사를 하고는 다시 한번 엄마 아빠와 같이 살고 싶다는 소리를 했다.이에 탁유미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탁유미 엄마가 아이를 데리고 씻으러 화장실로 간 뒤 탁유미가 먼저 입을 열었다.“이경빈, 너랑 내 사이가 어떻든 적어도 아이 앞에서는 쓸데없는 말 하지 마.”“어차피 알게 될 건데 조금 더 빨리 알게 된다고 해도 다를 것 없잖아.”이경빈이 차갑게 대꾸했다.“너 지금 이러는 거 복수 때문이잖아. 이참에 한번 물어나 보자. 3년 형으로도 부족하고 내가 내 배를 찌른 것도 부족하면 대체 네가 원하는 건 뭔데? 어떻게 해야 이 지긋지긋한 복수를 끝낼 수 있는 건데? 팔이나 다리라도 잘라야 속이 시원하겠어? 그래야 네 마음이 풀려?”탁유미는 하루라도 빨리 그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싶었다.이경빈은 그녀의 말을 듣더니 점점 더 표정을 굳혔다.“팔과 다리? 고작 그 정도로 될 것 같아? 나는 윤이를 네 곁에 둘 생각 없어. 전
이경빈은 돌아가는 차 안에서 자기도 모르게 아까 탁유미가 잡았던 팔을 매만졌다.두 사람이 다시 만난 뒤로 탁유미가 먼저 잡아 온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팔을 잡혔을 때 그녀의 손 떨림이 여실히 느껴졌다. 게다가 그의 손을 뿌리치려고 살갗이 닿았을 때 솔직히 깜짝 놀랐다. 그녀의 손이 마치 산 사람이 아닌 것처럼 차가웠기 때문이다.이경빈은 어느새 또 탁유미 생각을 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그녀를 동정해서는 안 된다. 아이는 반드시 이씨 집안으로 데리고 와야 한다!...임유진은 한시라도 빨리 단서를 모으고 싶은 마음에 홀로 가해자 차량 궤적을 따라 CCTV가 없는 그 도로에 도착했다.그리고 이곳에 오기 몇 분 전에는 인터넷에 글까지 올리며 사고 당시 시간대에 CCTV가 없었던 구간을 지나간 차량이 있는지, 혹 블랙박스에 뭔가 찍힌 게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을 달라고 했다.하지만 당연하게도 연락을 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그도 그럴 것이 사건이 일어난 지 벌써 꽤 시간이 흘렀고 만약 정말 찍혔다 하더라도 데이터가 지워졌을 수도 있다.게다가 임유진이 쓴 글을 마침 그 도로를 지났던 사람이 볼 확률은 복권에 당첨될 확률보다 낮았다.임유진은 도로를 거닐며 혹시라도 미처 발견하지 못한 CCTV가 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했다. 물론 이 작업도 경찰 쪽에서 이미 다 한 것이라 별다른 수확은 없었다.그녀는 거의 1분에 한 번꼴로 휴대폰을 확인했다. 그러다 드디어 그녀의 글에 답변을 단 사람이 나타났다. 그 사람은 그날 그 시간대에 확실히 그쪽을 지나쳤고 블랙박스를 확인한 결과 두 여자가 내린 것을 봤다며 임유진의 연락처를 물었다.임유진은 이에 눈이 초롱초롱해졌다.이건 행운인 걸까? 정말 증거를 잡은 걸까?!그녀는 고민도 하지 않고 바로 자신의 휴대폰 번호를 건넜다. 그러자 1분도 되지 않아 휴대폰이 울렸다.전화를 받아보니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진이’님 맞으세요?”‘진이’는 임유진의 닉네임이었다.“네, 혹시 ‘강산’님이신가
“네,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요.”임유진은 활짝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릴 수도 있을 것 같다!만약 소지혜가 진정한 가해자라는 게 밝혀지고 그녀가 재산을 옮기는 것까지 미리 막아버린다면 이재하는 배상금을 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임유진은 그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10분이 거의 다 되어갈 때쯤 흰색 봉고차 한 대가 그녀 쪽으로 다가오더니 이윽고 그녀 앞에 멈춰 섰다.문이 열리자 선글라스와 모자를 쓴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차에서 내리지 않은 채 임유진을 향해 물었다.“‘진이’님 맞아요?”임유진의 시선이 운전석에 있는 남자에게로 향했다. 그 남자 역시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고 얼굴에는 마스크까지 했다.그녀는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끼고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그러나 그녀에게 말을 걸었던 남자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아채더니 단번에 차 안으로 끌어당겼다.그리고 차 문은 쾅 하고 닫혔다.“출발해!”남자가 운전석을 향해 외치자 차에 시동이 걸리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역시 일이 이렇게 쉽게 풀릴 리가 없었다!임유진은 그의 손에서 빠져나오려고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다.방금 그녀가 있던 곳은 CCTV가 없는 곳이다. 그리고 상대방도 아마 그 점을 알고 이렇게 당당하게 유괴를 했을 것이다.“그 여자 허튼짓 못 하게 꽉 잡아.”운전석 남자의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도착하기 전에 재미 좀 봐도 되지?”임유진을 제압한 남자가 변태 같은 얼굴로 물었다.“죽이지만 않으면 돼. 지시 사항에는 그 여자를 당분간 병원 신세 지게 하면 된다고 했으니까.”지시 사항?! 누군가의 지시가 있었다는 것인가?임유진의 위에 올라탄 남자는 더러운 손으로 그녀의 옷을 벗기려고 했다.열심히 발버둥 쳐봤지만 소용없었다. 두 손은 남자에 의해 묶여있었고 얼굴은 여러 번 맞은 탓에 입가에는 피까지 흘렀다.“돈 때문이면 내가 더 줄게요.”임유진은 침착하게 말을 내뱉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냉정해야만 살 수 있다.“돈? 변호사 비서나 하는
“좋아. 대신 번호만 부르라고 하고 전화는 네가 걸어. 저 여자가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것 같으면 바로 팔을 부러트려.”운전석 남자가 무서운 말을 늘어놓았다.이에 임유진는 잠깐 두려움이 스쳤다가 이내 다시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적어도 지금은 잘만 하면 살 수 있을 테니 감옥에 있을 당시보다 훨씬 나은 상황이었다.감옥에 있을 때는 아무리 애를 써봐도 매를 피하지 못했었다. 그리고 맞을 때마다 그저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남자는 휴대폰을 꺼내 들더니 임유진에게 번호를 부르라고 했다. 임유진은 강지혁의 번호를 알려주었다.생각해보면 지금처럼 웃기는 일도 없다. 강지혁에게는 그렇게 철벽을 치며 심지어 마음속으로 강지혁은 혁이가 아니라고 외치면서 막상 이런 순간에는 결국 강지혁에게 기대고 만다.그때 전화가 연결되고 강지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누나?”임유진이 부른 번호는 오직 임유진만 알고 있는 번호였다. 하지만 강지혁의 휴대폰에 보이는 번호는 그녀의 것이 아닌 낯선 번호였다.“설마 동생한테 전화한 거야?”남자는 임유진이 자기를 가지고 놀았다고 생각해 발끈하며 외쳤다.“아니에요. 난 동생 같은 거 없어요. 이건 그냥... 일종의 플레이 같은 거예요.”임유진이 다급하게 해명했다.“X랄도 가지가지 하네.”강지혁은 그들의 대화로 단번에 상황의 심각성을 눈치챘다.“너 누구야?”“네 여자 지금 우리 손에 있거든? 살리고 싶으면 지금 당장 내 계좌로 20억 이체해.”“그러지.”강지혁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제안을 수락했다.“대신 그 여자 털끝 하나라도 건드렸다가는 단 1푼도 못 받을 줄 알아.”“돈이나 준비해 놓고 그딴 소리를 해!”“다시 한번 경고하는 데 그 여자 건드리지 마. 만약 내 말 어기면 고통밖에 없는 인생이 어떤 건지 똑똑히 알게 해줄 거야.”그의 싸늘한 음성에 남자는 순간 손이 떨려와 하마터면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트릴 뻔했다.“목소리 들어야겠으니까 바꿔.”남자는 잠깐 망설이더니 이내 두 손이 묶여있는 임유진 앞으로 휴대폰을
강지혁이라면 분명히 그녀를 무사히 구출해 줄 테니까.임유진은 이런 생각을 한 자신이 기가 막힌 지 자기도 모르게 쓰게 웃었다.뭐든 혼자 하겠다고 결심해놓고 결국에는 또 그에게 기대게 된다.그들의 차량은 계속 P 시 쪽으로 달렸고 곧 있으면 S 시를 벗어나게 된다. 임유진은 강지혁이 무슨 생각인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이제 곧 톨게이트 쪽을 지나가려 할 때 차가 갑자기 멈춰 섰다.“뭐야, 왜 서?”남자가 운전석을 향해 물었다. 하지만 운전석 쪽에서는 아무런 답변도 들려오지 않았다.남자는 결국 혀를 한번 차더니 임유진을 향해 얌전히 있으라는 명령을 한 후 상반신을 앞쪽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머리를 운전석 쪽으로 내밀어 바깥을 바라보았다.그리고 남자의 몸도 운전석 남자처럼 굳어버렸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대체 뭘 본 거지?임유진은 손이 묶인 채 시트에 눕혀져 있어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그때 누군가 밖에서 확성기로 말을 걸어왔다.“너희들은 이미 포위됐다. 저항할 생각하지 말고 순순히 잡히는 게 좋을 거다.”임유진은 그 소리에 깜짝 놀랐다.강지혁의 지시인 걸까?그때 굳게 닫혔던 차 문이 열리고 경찰복을 입은 사람들이 신속하게 남자 두 명을 차에서 끌어냈다. 그리고 경찰들 뒤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강지혁이다!임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그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강지혁은 그녀의 모습을 보자마자 마치 누구 한 명 죽일 기세로 얼굴을 굳혔다.“아무도 이쪽으로 오지 마!”강지혁은 반대편을 향해 별안간 그렇게 외치더니 차 안으로 들어가 묶여있던 그녀의 손을 풀어주고 자신의 외투도 벗어주었다.“둘 중 누가 이랬어? 아니면 둘 다야?”강지혁은 부어오른 임유진의 뺨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조금 전에 몇 대 맞은 것이 벌써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임유진은 긴장이 풀린 건지 그제야 고통이 느껴지기 시작했다.“마스크 안 한 남자가 이랬어.”“그리고 다른 데는 다친 곳 없어? 혹시 저놈들이 너한테...”“괜찮아! 그냥 몇
이 남자가 바로 그 돈줄인 건가?대체 얼마나 대단한 남자이기에 경찰들이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강지혁의 시선이 마스크를 안 한 남자 쪽으로 향하더니 뒤에 있던 부하에게 명령을 내렸다.“내가 가면 손버릇이 더러운 게 어떤 건지 제대로 알려줘.”“네, 알겠습니다.”부하들은 눈앞에 남자는 이제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겠다는 생각에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마스크 안 한 남자는 그 말에 한기를 느끼더니 강지혁이 임유진을 안고 옆에 주차된 벤틀리에 올라타려 하자 돌연 큰소리로 외쳤다.“당신 정체가 뭐야? 그리고 그 여자는 정말 변호사 비서 맞아?”돈줄이라는 남자가 절세미녀도 아닌 여자 때문에 이런 소동을 벌인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그리고 단순히 돈 되는 일을 받았을 뿐인데 결과가 이렇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강지혁은 이미 임유진과 함께 차에 올라탔고 벤틀리는 유유히 현장을 벗어났다.차 안에서 임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고마워.”오늘은 강지혁이 아니었으면 분명히 끔찍한 결과를 맞았을 것이다.“그 상황에도 침착하게 나한테 연락을 다 했네. 잘했어.”강지혁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말을 이었다.“너한테 원한을 품을 만한 사람 누구 생각나는 거 있어?”임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상대방이 원한을 품었을 수는 있을 테지만 이 정도 악랄한 수단을 쓸 사람은 좀처럼 생각나지 않았다.“벌써 두 번째야.”“뭐가?”임유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저번에 단지 앞에서도 너 해치려는 놈들이 있었잖아.”“같은... 사람의 짓이라는 거야?”“조사해 보면 알겠지.”강지혁은 차갑게 말을 내뱉고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다시 부드러운 얼굴로 돌아왔다.“많이 아파?”“조금. 하지만 참을 만해.”볼이 따끔하게 아파 왔지만 감옥에 있을 때와 비교하면 양호한 편이었다.강지혁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손으로 그녀의 입가에 묻은 피를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피 나? 티슈로 닦으면
게다가 이제는 강문철도 없으니 임유진이 강씨 가문이 안주인이라는 건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또한 임유진은 임신까지 했으니 아이들이 무사히 태어나면 그때는 그 누구도 그 자리를 감히 탐낼 수 없게 된다.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에 강지혁을 대하는 것처럼 그녀를 대했다.임유진은 강지혁의 아내로서 줄곧 강지혁의 곁에 있었다.강씨 가문은 S 시에서 가장 뿌리가 깊고 또 유명한 가문이라 장례식장도 컸고 조문객들도 훨씬 많았다.강지혁은 임유진이 무리라도 할까 봐 몇 번이나 그녀에게 이만 쉬라고 했지만 임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계속해서 그의 곁을 지켰다.“나 아직 괜찮아. 진짜 힘들면 너한테 얘기할게. 나도 내 몸 귀한 줄 알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임유진도 자신이 아이셋을 가진 임산부라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그때 조문객들이 입구를 바라보며 강현수의 이름을 불렀다.이에 임유진은 살짝 움찔하더니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려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그러자 익숙한 남자의 실루엣이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강현수와 마지막으로 본 것도 이제는 몇 달 전이었다.한때는 생사를 함께 했던 친구였는데 결국에는 썩 유쾌하지 않은 방식으로 헤어지게 되었다.강현수는 오늘 부모님과 함께 장례식에 참석했다.임유진이 그를 바라봤을 때 그의 시선 역시 임유진에게 닿아있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을 보자마자 옆으로 늘어트린 손을 살짝 움켜쥐었다.그토록 오래 찾아 헤맸던 사람을, 오랜 기간 마치 습관처럼 떠올렸던 사람을 그는 번번이 놓쳐버렸다.임유진과 다른 방식으로 다시 시작할 수도 있었는데 그는 그 가능성마저도 자기 손으로 부숴버렸다.그 결과 그녀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고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으며 지금 그 남자의 곁에 서 있게 되었다.강현수는 이제 영원히 그녀 곁에는 있을 수 없게 되었다.강현수네 가족이 강지혁과 임유진의 앞으로 다가왔을 때 강현수는 위로의 말을 건네는 부모님과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어쩌면 강지혁은 줄곧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돌아온 그에게 유일한 버팀목이라고는 강문철밖에 없었으니까.“나는 솔직히 네 할아버지가 고마워. 혁이 너를 이렇게 멋있게 키워줬잖아. 그리고 나랑 만나게 해줬고.”임유진은 계속해서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갔다.“혁아, 네가 원하는 가족 간의 사랑은 앞으로 내가 줄게. 그리고 우리 아이들도 줄 거야.”그 말에 강지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임유진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가장 원하는지 이미 다 알고 있었다.“아까 네가 그랬지? 사람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게 다 다르다고. 그럼 너는? 네가 중요하게 여기는 건 뭔데?”강지혁이 임유진의 체향을 들이마시며 물었다.그녀의 냄새를 맡고 있으면 늘 이렇게 마음이 진정되고 몸이 편안해졌다.“나?”임유진은 그 말에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혁이 너랑 우리 아이들이야.”“유진아, 나는 욕심이 많아. 나는 너를 그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아. 그게 우리 아이들이라고 해도 나는 싫어. 나는 내가 네 마음속 1순위였으면 좋겠고 너한테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이 눈을 깜빡였다.설마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들을 질투하는 건가?“혁아, 너는 내 마음속 1순위야. 물론 아이들도 너무 중요하고 소중하지만 너랑은 결이 조금 달라. 혁이 너는 나한테 유일무이한 존재잖아.”임유진은 두 손을 둘러 가볍게 강지혁을 끌어안았다.이미 배가 불러올 대로 불러와 완전히 꼭 끌어안지는 못했지만 싸늘한 방 공기를 녹이기에는 충분했다.“내가 너한테 유일무이한 존재라고?”“응. 널 대신할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어. 물론 아이들을 낳고 진정한 엄마가 되면 어쩔 수 없이 아이들에게 더 신경을 쓰고 더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야. 이건 장담해. 그리고 네가 원하면 네가 원하는 방식대로 더 많이 널 사랑해줄게. 혁아,
별채로 가는 길에는 늘 조명이 켜져 있기에 어두운 저녁이라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임유진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강지혁이 방 한가운데 멀뚱히 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지혁은 불빛을 받으며 시선을 내린 채 바로 앞에 있는 냉동관을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혁아.”임유진은 그를 부르며 천천히 옆으로 다가갔다.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강지혁은 상념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돌렸다.“오지 말라니까. 여기는 나 혼자 있으면 돼.”“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왔어.”임유진은 강지혁의 바로 앞에 서서 그의 볼을 매만졌다.지금은 1월이라 날씨가 무척이나 추웠다. 게다가 지금은 밤이고 별채 쪽에는 보일러도 없었기에 바깥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추웠다.“오늘 밤도 여기 있을 거야?”임유진이 물었다.“응. 그래도 날 키워주셨으니 할 도리는 다해야지.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사람들 많이 올 거야. 너는 몸이 불편하니까 가지 말고 그냥 집에 있어.”“출산할 시기가 임박한 것도 아닌데 뭐.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나도 참석할 거야. 만약 몸이 불편하거나 하면 바로 너한테 얘기할게.”강지혁은 그 말에 임유진의 손을 살짝 잡았다.“너한테는 좋은 기억 하나 없는 사람이잖아. 그런데 왜...”“네 할아버지잖아. 네 유일한 가족이잖아. 그러니까 아무리 나를 마음에 들지 않아 했어도, 아무리 끝까지 나를 손주며느리로 받아들이지 않았어도 나는 할아버지 가시는 길을 너와 같이 보내드려야 할 의무가 있어.”다른 건 없었다.그저 강지혁의 어린 시절을 곁에서 지켜줬다는 사실만으로도 임유진은 충분히 감사했다.강지혁은 그 말에 그녀의 손을 조금 세게 쥐었다.“할아버지가 마지막에 한 말은 신경 쓰지 마. 그 말은 그냥...”“알아. 네 할아버지는 그저 누군가를 깊게 사랑하는 것으로 행복한 결과를 낳을 거라는 걸 믿지 못하시는 분이었던 거지. 네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 일도 있고 네 아버지 일도 있어서 많이 무서우셨을 거야. 너도 나중에 불행하게 될까 봐.”임유진이 말했
강지혁은 마치 강문철에게 자신이 임유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려는지 조금 격앙된 목소리로 얘기했다.강문철은 그 말에 눈동자를 돌려 자신의 유일한 손주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몇 초 후 이제는 모든 게 다 피곤한 듯 천천히 눈을 감으며 입을 열었다.“우리 집안에서... 여자한테 미친 인간 치고... 멀쩡한 사람을 못 봤다. 네가... 계속해서 이러면 너도 언젠가는...”강문철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는가 싶더니 이내 옆에 있던 종합모니터에서 삐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임유진은 그 소리에 강문철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바로 알았다.누군가의 생명이 바로 눈앞에서 멎었다.조금은 무서웠던 노인이, 강지혁의 유일한 가족이었던 노인이 이렇게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모든 게 다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강지혁은 삐 소리가 들린 뒤로 임유진의 손을 꽉 잡았다. 그렇게 계속 힘을 주다가 임유진의 입에서 아프다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며 손을 놓아주었다.“미안. 아팠지?”강지혁은 어느새 빨개진 그녀의 손을 다시 잡으며 초조한 눈길로 물었다.“괜찮아. 그것보다 할아버지...”“응. 가셨어.”강지혁의 얼굴은 가족을 잃은 사람 같지 않게 무척이나 평온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게 아니라는 걸 임유진은 알고 있다.아무리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어도 강문철은 강지혁의 할아버지고 유일한 가족이었다. 강선우가 죽은 뒤로 그의 곁을 지켜줬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강지혁은 몸을 돌려 편히 잠든 강문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리고 임유진은 그런 강지혁의 옆에 서서 그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강문철의 장례식은 3일 뒤로 정했다.그 3일 동안 시신은 냉동관에 넣은 채 강씨 저택의 별채에 두기로 했다.그리고 그 3일 동안 강지혁은 그 어떤 외부인도 별채에 들이지 않았다.별채는 강씨 가문 사람 외에는 허락하지 않는 특별한 곳이었으니까.강선우가 죽었을 때도 그의 시신은 잠시 이 별채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의
강지혁은 임유진의 고집에 결국 알겠다며 그녀와 함께 집에서 나와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한 후 강지혁은 뒤따라온 경호원에게 임유진의 곁을 맡기고 혼자 병실로 들어갔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빼빼 마른 강문철이 흰색 병상 위에 가만히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남자도 병마와 세월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강문철은 강지혁이 안으로 들어온 것을 보더니 마지막 힘을 쥐어짜 입을 움직였다.“왔... 니...”“네, 저 왔어요.”강지혁이 곁으로 다가오며 대답했다.사실 강지혁은 강문철에게 대단한 가족 간의 정은 느끼지 못했다.실제로 강문철은 강지혁이 할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느낄만한 행동을 보여주지 않았으니까.강문철은 언제나 강지혁을 자신의 뒤를 이어 강씨 가문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하나의 장기 말로 여겨왔다. 물론 그 장기 말도 쓸모가 없었다면 진작 버렸을 것이다.“이제는... 강씨 가문의 모든 게 네 손에... 달렸다. 만약... 네가 가문을 망하게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강문철이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할 말은 그게 끝이에요?”강지혁이 강문철을 빤히 바라보았다.이에 강문철은 탁한 눈동자를 옆으로 굴려 병실 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임유진... 그 아가씨... 밖에 있지? 들어오라고 해...”그 말에 강지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유진이 건드릴 생각하지 마세요.”“이 꼴로... 내가 뭘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어차피... 그 아가씨 옆에는... 네 사람 천지일 텐데.”강지혁은 그가 두 손으로 직접 키운 손주이자 가문의 후계자이기에 강지혁의 생각 같은 건 이미 훤히 꿰고 있었다.강지혁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자 강문철이 다시 입을 열었다.“그저... 마지막으로 해줄 얘기가... 있어서 그러는 것뿐이다...”호흡이 점점 가빠지고 안색도 창백해진 것이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강지혁은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발걸음을 옮겨 병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곧바로 임유진의 손을
“그래? 그럼 만약... 내가 너한테 상처를 줘도 너도 똑같이 나 안 볼 거야? 내가 아무리 용서해달라고 빌어도 나 용서 안 해줄 거야?”강지혁은 목구멍을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한마디 한마디 힘겹게 내뱉었다.이에 임유진은 몸을 돌려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강지혁을 바라보았다.“혁아, 너 대체 왜 그래? 요즘 따라 너무 불안해 보여. 무슨 일 있는 거야?”강지혁은 자신의 불안해 보인다는 말에 고개를 푹 숙였다.확실히 그는 요 며칠 줄곧 불안해하고 있었다.탁유미와 이경빈의 일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자신과 임유진의 결말도 그들과 똑같을까 봐 불안해하고 있었다.“혹시 방금 내가 한 말이 널 불안하게 만들었어? 혁아, 내가 언니를 이해한다고 했던 건 소민준과의 일이 생각나서 그랬던 거야. 네가 괜한 생각을 할 게 아니라고. 네가 나한테 상처 줄 리가 없잖아. 그리고...”임유진은 손을 들어 조금 우울해 보이는 강지혁의 눈가를 부드럽게 매만졌다.“전에 내가 말했잖아. 네가 정말 나한테 미안해야 할 일을 했다고 해도 울면 봐주겠다고.”그녀는 강지혁의 눈에 담긴 우울함이 사라질 수 있게 일부러 환히 웃으며 얘기했다.그러자 그 말을 들은 강지혁의 눈에 조금씩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유진아, 너를 향한 내 감정은 언제나 그대로일 거야.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든 절대 변하지 않을 거야.”강지혁은 임유진의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심장에 가져갔다.“그러니까 너도 약속해. 날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절대 변하지 않을 거라고. 약속해.”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깜빡였다.탁유미와의 대화에서 사람의 감정은 언젠가는 변한다는 말에 깊이 공감했는데 눈앞에 있는 남자는 자신의 감정은 변하지 않을 거라고 하고 있다.소민준과의 관계에서 질릴 대로 질려 그에게 모든 감정이 사라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를 사랑하고 있고 그와 영원히 하고 싶은 것 또한 사실이다.“응, 영원히 너만 사랑할게. 절대 변하지 않을게. 약속해.”임유진은 진지한 얼굴로 그에
임유진은 한지영이 정신을 차린 모습을 떠올리면 마음이 아프다가도 그녀가 활기를 되찾아줘서 참으로 고마웠다.한지영은 백연신과 그렇게 헤어진 후 자포자기하는 것이 아닌 적극적으로 치료에 임하며 회복에 힘썼다. 심지어 며칠 전에는 미소를 지으며 이런 말까지 했다.“고작 남자랑 헤어진 것뿐인데 뭐. 연애가 다 이런 거 아니겠어? 사랑했다가 또 헤어졌다가. 그래서 결혼까지 가는 게 기적이라는 말도 있잖아. 열렬히 사랑했으니 그거로 난 됐어. 혹시 알아? 퇴원한 뒤에 진정한 내 운명이 나를 찾아올지.”“다행이네요.”탁유미는 한지영의 말을 전해 듣고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유진 씨랑 지영 씨는 나처럼 이러지 말고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어요.”그녀는 자신의 인생에서 더 이상의 사랑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대화를 나누던 임유진과 탁유미는 병실 밖의 누군가가 그들의 대화를 다 듣고 있는 것을 몰랐다....임유진은 탁유미에게 인사한 후 강지혁과 함께 강씨 저택으로 돌아왔다.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2층으로 올라가려는데 강지혁이 뒤에서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왜 그래?”갑작스러운 포옹에 임유진이 물었다.사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강지혁은 오늘따라 말수가 무척이나 적었고 시선은 거의 창밖에 고정하다시피 했다.그 모습에 임유진이 몇 번이나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지 물었지만 강지혁은 그때마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대답을 피했다.“그냥... 갑자기 안고 싶어져서.”강지혁은 낮게 중얼거리며 아까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그는 이경빈을 따라 탁유미의 병실 앞으로 왔다가 비스듬히 열린 문틈 사이로 임유진과 탁유미의 대화 내용을 들었다.탁유미가 자신에게 상처 준 사람은 다시 받아줄 생각이 없다고 했을 때 이경빈은 휘청하며 그대로 주저앉았고 입을 틀어막으며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했다.그 순간만큼은 우는 것조차도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맨날 안으면서 아직도 부족해?”임유진이 실소하며 물었다.“응. 부족해.”강지혁에게는 어쩌면 평생 부족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무의식 속에서 그 언젠가 임유진이 모든 진실을 알게 되고 그를 떠나면 그때 누군가가 이렇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줬으면 해서 일지도 모른다....탁유미는 이틀 정도 중환자실에 있다가 모든 수치가 안정된 후 바로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다만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앞으로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아야만 했다.탁유미는 간호사가 들어와 약을 갈아줄 때마다 보이는 수술 자국을 보면서 조금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그녀가 아무리 원치 않았다고 해도 지금 그녀의 몸 안에 있는 간은 이경빈의 간이었다.어쩌면 하늘이 조금은 그녀를 가엽게 여겨준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런 방식으로 살게 된 건지도 모른다.윤이와 김수영은 요 며칠 거의 탁유미 곁에서 떨어지지 않다시피 했고 임유진도 자주 탁유미를 보러 병원에 왔다.“유진 씨, 미안해요. 괜히 나 때문에 힘들게 왔다 갔다 하고...”탁유미는 미안한 얼굴로 임유진의 큰 배를 바라보았다.지금쯤 집에서 태교나 들으며 휴식을 취해도 모자란 데 괜히 자신 때문에 임유진이 고생하고 있는 것 같았다.“언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언니가 나였으면 안 이랬을까요? 그러니까 너무 그러지 않아도 돼요.”임유진은 말을 하며 의자에 앉았다.“나 윤이 데리고 나갈 테니까 둘이서 얘기하고 있어.”김수영이 꾸벅꾸벅 졸고 있는 윤이를 안아 들며 보호자가 쉴 수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임유진은 두 사람이 들어간 것을 확인한 후 탁유미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혁이가 그러는데 이경빈 씨도 며칠 전부터는 걸어 다닐 수 있게 됐대요. 그런데... 언니 병실까지 왔다가 매번 들어오지는 못하고 다시 돌아가나 봐요.”그 말에 탁유미는 담담하게 대꾸했다.“이경빈과의 인연은 여기서 끝이에요. 어차피 이경빈도 몸이 다 나아지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거고 나는 계속 여기서 살게 되겠죠. 물론 나랑은 끝이라도 윤이랑은 부자간의 정이 있으니까 둘이서는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네요.”“이경빈 씨와는 정말 일말의 가능성도 없는 거예요?”임유진의
다시 눈을 뜬 이경빈이 보게 된 건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강지혁이었다.마취가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아서 그런지 통증 같은 건 없었다.“유미는... 어떻게 됐습니까?”이경빈이 힘겹게 입을 열며 물었다.“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탁유미 시는 지금 중환자실에 있어요. 이틀 정도 경과를 지켜봐야 한대요.”그의 말에 대답해준 건 강지혁이었다.이경빈은 그 말에 안도의 한숨을 쉬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수술이 무사히 끝났으니 된 거다.앞으로 두 번 다시 탁유미 곁에 모습을 드러낼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녀의 몸 안에 그의 일부가 살아 숨 쉬고 있으니까, 그녀가 죽을 때까지 줄곧 함께하게 될 거니까 그것으로 됐다.그리고 그녀가 준 골수도 평생 그와 함께 할 테니 그 역시 이것으로 그녀와 평생 함께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이경빈은 탁유미의 상태 외에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마치 자기 몸은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였다.의사가 수술 후 주의사항과 나타날 수 있는 증상들에 관해 설명해주는데도 그는 시큰둥한 얼굴로 침묵만 고수할 뿐이었다.강지혁은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의사와 간호사가 전부 다 나간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탁유미 씨 사건을 뒤엎으려고 한다고 들었는데 그렇게 되면 이강 그룹이 큰 타격을 입게 될 겁니다. 어쩌면 판결 결과에 따라 이경빈 씨는 감방살이하게 될지도 모르고요.”“알고 있어요.”이경빈이 담담하게 말했다.자신의 결정으로 그룹에 어떤 파문이 일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그가 받아야 할 벌이다.복수하겠다는 생각에 매몰돼 공수진의 말만 믿고 거짓 증언한 그의 업보다.탁유미가 형을 살게 된 것에 제일 큰 공헌을 한 건 바로 그의 증언이었다.그러니 그녀를 감옥으로 보낸 건 그나 다름없었다.“정말 앞으로는 탁유미 씨 앞에 나타나지 않을 생각입니까?”강지혁이 물었다.“내가 유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많지 않아요. 그런데 유미가 그걸 원한다고 하니 나로서는 들어줄 수밖에요.”그 소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