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 대신 번호만 부르라고 하고 전화는 네가 걸어. 저 여자가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것 같으면 바로 팔을 부러트려.”운전석 남자가 무서운 말을 늘어놓았다.이에 임유진는 잠깐 두려움이 스쳤다가 이내 다시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적어도 지금은 잘만 하면 살 수 있을 테니 감옥에 있을 당시보다 훨씬 나은 상황이었다.감옥에 있을 때는 아무리 애를 써봐도 매를 피하지 못했었다. 그리고 맞을 때마다 그저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남자는 휴대폰을 꺼내 들더니 임유진에게 번호를 부르라고 했다. 임유진은 강지혁의 번호를 알려주었다.생각해보면 지금처럼 웃기는 일도 없다. 강지혁에게는 그렇게 철벽을 치며 심지어 마음속으로 강지혁은 혁이가 아니라고 외치면서 막상 이런 순간에는 결국 강지혁에게 기대고 만다.그때 전화가 연결되고 강지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누나?”임유진이 부른 번호는 오직 임유진만 알고 있는 번호였다. 하지만 강지혁의 휴대폰에 보이는 번호는 그녀의 것이 아닌 낯선 번호였다.“설마 동생한테 전화한 거야?”남자는 임유진이 자기를 가지고 놀았다고 생각해 발끈하며 외쳤다.“아니에요. 난 동생 같은 거 없어요. 이건 그냥... 일종의 플레이 같은 거예요.”임유진이 다급하게 해명했다.“X랄도 가지가지 하네.”강지혁은 그들의 대화로 단번에 상황의 심각성을 눈치챘다.“너 누구야?”“네 여자 지금 우리 손에 있거든? 살리고 싶으면 지금 당장 내 계좌로 20억 이체해.”“그러지.”강지혁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제안을 수락했다.“대신 그 여자 털끝 하나라도 건드렸다가는 단 1푼도 못 받을 줄 알아.”“돈이나 준비해 놓고 그딴 소리를 해!”“다시 한번 경고하는 데 그 여자 건드리지 마. 만약 내 말 어기면 고통밖에 없는 인생이 어떤 건지 똑똑히 알게 해줄 거야.”그의 싸늘한 음성에 남자는 순간 손이 떨려와 하마터면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트릴 뻔했다.“목소리 들어야겠으니까 바꿔.”남자는 잠깐 망설이더니 이내 두 손이 묶여있는 임유진 앞으로 휴대폰을
강지혁이라면 분명히 그녀를 무사히 구출해 줄 테니까.임유진은 이런 생각을 한 자신이 기가 막힌 지 자기도 모르게 쓰게 웃었다.뭐든 혼자 하겠다고 결심해놓고 결국에는 또 그에게 기대게 된다.그들의 차량은 계속 P 시 쪽으로 달렸고 곧 있으면 S 시를 벗어나게 된다. 임유진은 강지혁이 무슨 생각인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이제 곧 톨게이트 쪽을 지나가려 할 때 차가 갑자기 멈춰 섰다.“뭐야, 왜 서?”남자가 운전석을 향해 물었다. 하지만 운전석 쪽에서는 아무런 답변도 들려오지 않았다.남자는 결국 혀를 한번 차더니 임유진을 향해 얌전히 있으라는 명령을 한 후 상반신을 앞쪽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머리를 운전석 쪽으로 내밀어 바깥을 바라보았다.그리고 남자의 몸도 운전석 남자처럼 굳어버렸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대체 뭘 본 거지?임유진은 손이 묶인 채 시트에 눕혀져 있어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그때 누군가 밖에서 확성기로 말을 걸어왔다.“너희들은 이미 포위됐다. 저항할 생각하지 말고 순순히 잡히는 게 좋을 거다.”임유진은 그 소리에 깜짝 놀랐다.강지혁의 지시인 걸까?그때 굳게 닫혔던 차 문이 열리고 경찰복을 입은 사람들이 신속하게 남자 두 명을 차에서 끌어냈다. 그리고 경찰들 뒤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강지혁이다!임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그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강지혁은 그녀의 모습을 보자마자 마치 누구 한 명 죽일 기세로 얼굴을 굳혔다.“아무도 이쪽으로 오지 마!”강지혁은 반대편을 향해 별안간 그렇게 외치더니 차 안으로 들어가 묶여있던 그녀의 손을 풀어주고 자신의 외투도 벗어주었다.“둘 중 누가 이랬어? 아니면 둘 다야?”강지혁은 부어오른 임유진의 뺨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조금 전에 몇 대 맞은 것이 벌써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임유진은 긴장이 풀린 건지 그제야 고통이 느껴지기 시작했다.“마스크 안 한 남자가 이랬어.”“그리고 다른 데는 다친 곳 없어? 혹시 저놈들이 너한테...”“괜찮아! 그냥 몇
이 남자가 바로 그 돈줄인 건가?대체 얼마나 대단한 남자이기에 경찰들이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강지혁의 시선이 마스크를 안 한 남자 쪽으로 향하더니 뒤에 있던 부하에게 명령을 내렸다.“내가 가면 손버릇이 더러운 게 어떤 건지 제대로 알려줘.”“네, 알겠습니다.”부하들은 눈앞에 남자는 이제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겠다는 생각에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마스크 안 한 남자는 그 말에 한기를 느끼더니 강지혁이 임유진을 안고 옆에 주차된 벤틀리에 올라타려 하자 돌연 큰소리로 외쳤다.“당신 정체가 뭐야? 그리고 그 여자는 정말 변호사 비서 맞아?”돈줄이라는 남자가 절세미녀도 아닌 여자 때문에 이런 소동을 벌인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그리고 단순히 돈 되는 일을 받았을 뿐인데 결과가 이렇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강지혁은 이미 임유진과 함께 차에 올라탔고 벤틀리는 유유히 현장을 벗어났다.차 안에서 임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고마워.”오늘은 강지혁이 아니었으면 분명히 끔찍한 결과를 맞았을 것이다.“그 상황에도 침착하게 나한테 연락을 다 했네. 잘했어.”강지혁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말을 이었다.“너한테 원한을 품을 만한 사람 누구 생각나는 거 있어?”임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상대방이 원한을 품었을 수는 있을 테지만 이 정도 악랄한 수단을 쓸 사람은 좀처럼 생각나지 않았다.“벌써 두 번째야.”“뭐가?”임유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저번에 단지 앞에서도 너 해치려는 놈들이 있었잖아.”“같은... 사람의 짓이라는 거야?”“조사해 보면 알겠지.”강지혁은 차갑게 말을 내뱉고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다시 부드러운 얼굴로 돌아왔다.“많이 아파?”“조금. 하지만 참을 만해.”볼이 따끔하게 아파 왔지만 감옥에 있을 때와 비교하면 양호한 편이었다.강지혁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손으로 그녀의 입가에 묻은 피를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피 나? 티슈로 닦으면
물론 강지혁도 알고 있다. 임유진을 아프게 한 건 이따위 눈에 보이는 상처가 아니라 마음속에 새겨진 상처라는 것을.그리고 그 상처가 다 아물기까지 꽤 시간이 걸릴 것이다....차량은 어느새 병원 앞에 도착하고 강지혁은 임유진을 안고 차에서 내렸다.미리 얘기해 둔 것인지 임유진이 진찰실에 들어선 순간 의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을 마중했다.다행히 가벼운 찰과상뿐이라 큰 문제는 없는듯했다. 얼굴의 부기도 며칠 뒤면 말끔히 돌아온다고 했다.모든 검사가 끝나고 강지혁은 그녀에게 새 옷을 보여주며 말했다.“옷 갈아입어야지.”“응.”임유진의 옷은 어깨 부분부터 찢겨 있어 확실히 옷을 갈아입어야만 했다.옷을 건네받으려고 손을 내밀자 강지혁은 줄 생각이 없는 듯 쇼핑백을 들고 멀뚱히 바라보기만 했다.이에 임유진이 고개를 갸웃했다.“다쳤잖아. 혼자 갈아입기 불편할 거야.”‘그래서? 아...’무슨 뜻인지 파악한 임유진의 얼굴이 단번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 더 야릇해 보이기도 했다.“간호사한테 대신 입혀달라고 하면 돼...”임유진이 다급하게 얘기했다. 두 사람은 지금 VIP룸에서 간호사가 약을 가져오길 기다리는 중이다.“부끄러워서 그래? 뭐가 부끄럽지? 전에도 몇 번이나 옷을 갈아 입혀준 적 있잖아.”‘그건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지.’임유진은 아직 그런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받기는 힘들었다.강지혁의 입술이 굳게 닫히고 방 안의 공기는 단번에 싸늘해졌다.그가 혹시 화가 난 건 아닌가 싶어 임유진이 힐긋 바라보자 강지혁은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방에서 나가버렸다.그리고 얼마 안 가 간호사 한 명이 방금 그 옷을 가지고 안으로 들어왔다.“강지혁 대표님께서 임유진 씨 옷을 갈아입혀 주라고 해서 왔습니다.”“아, 네, 그럼 부탁할게요.”옷을 다 입고서야 강지혁은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약 받아왔어. 이제 데려다줄게.”그는 방금 그 어색한 순간 따위 없었던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행동했다.그러고는 당연하게 다시 그녀를 안아 들었
그녀의 빨갛게 부어오른 뺨을 보고 있자니 심장이 무언가에 짓눌린 듯 답답하고 아파 왔다.아까 임유진을 구출할 당시 두 손이 꽉 묶여 볼품없는 모습으로 시트 위에 눕혀져 있는 것 봤을 때는 살인 충동마저 느꼈다.아끼고 또 아끼던 여자를 다른 사람이 상처 내고 아프게 했으니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른다.임유진은 입술을 깨물며 결국 한마디 신음도 내지 않았다. 고통을 참는 건 이미 습관이 되었으니까. 그리고 아프다고 외쳐봤자 소용없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강지혁은 얼굴을 다 닦아주고 약을 발라주었다.임유진은 얼굴뿐만이 아니라 몸에도 얻어맞은 상처가 있었다.“내가 알아서 바를게.”“등 뒤는 손이 안 닿을 거야.”“하지만...”“부끄러워서 그러는 거면 눈을 감고 발라줄게. 아까 보고서를 잠깐 봐서 대충 어느 위치인지 알고 있으니까.”강지혁은 말을 마치고 임유진이 뭐라고 할 틈도 없이 바로 그녀의 등 뒤로 갔다. 그러고는 눈을 감은 채 손을 뻗어 그녀의 옷을 위로 올렸다.“앗!”임유진이 깜짝 놀라 몸을 움찔 떨었다.“움직이지 마. 움직이면 정확한 위치를 알 수가 없어.”강지혁의 손은 그녀의 등에서 천천히 움직였다.그러다 아픈 곳을 정확히 찾아냈을 때 임유진의 몸이 다시 한번 흠칫 떨렸다. 그리고 이내 시원한 약이 펴 발라지고 등 뒤에서 알싸한 느낌이 들었다.하지만 분명히 시원해야 할 등이 지금은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정확히는 강지혁의 손이 스치는 곳마다 혈액이 다 몰린 것처럼 뜨거웠다.약을 다 바른 뒤 임유진의 등 뒤는 블러셔를 바른 것처럼 핑크색이 되었다.그녀는 서둘러 옷을 내렸다.“됐... 됐어.”강지혁은 그제야 굳게 닫힌 눈을 천천히 떴다. 기다란 속눈썹이 위로 올라가는 순간 매혹적인 눈동자가 드러났다.“며칠 정도는 일 나가지 마. 집에서 쉬어.”강지혁은 옆 탁자에 약을 올려놓으며 말했다.“안 돼. 걷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요즘 일 많아서 쉬는 건 힘들어.”게다가 아직 변호사 비서이고
집에서 쉬게 하려고 로펌 전체를 쉬게 만든 것은 아닐까?고작 한 사람을 쉬게 만들겠다고?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로펌이 아무 이유도 없이 3일이나 쉴 리가 없다.임유진은 씻고 침대 위에 누웠다. 상처 부분에 약을 다 발랐던 터라 이제는 아프지 않았다. 다만 눈을 감으면 오늘 있었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아까 강지혁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 임유진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안심했다. 그리고 그녀는 이 세상에 한지영을 빼고 이토록 자신을 아껴줄 수 있는 사람이 또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그 사람은 이토록 그녀를 아껴주면서도 사랑은 싫다고 한다.연인 놀이는 강지혁이 헤어짐을 얘기하는 순간 끝이 났다. 그러면 누나 동생 놀이는 또 언제 끝이 날까?마음속으로 아무리 되뇌어 봐도 그녀에게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강지혁은 지금 큰 방 한가운데서 싸늘한 눈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땀만 삐질삐질 흘리고 있는 경호원 두 명을 보고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체념한 표정의 고이준도 있었다.“경호를 이딴 식으로 해?”차가운 목소리에 고이준의 몸이 움찔 떨렸다.강지혁은 지금 화가 난 상태다. 그것도 아주 단단히.경호원들의 얼굴은 이미 사색이 되었다.그때 고이준이 용기를 내어 먼저 입을 열었다.“대표님, 얘네들도 임유진 씨가 납치된 후 그들이 아지트에 다다랐을 때 구출하려고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납치범들이...”고이준은 강지혁의 시선이 자기한테 떨어지자 등 뒤에 식은땀이 흘렀다.만약 임유진이 오늘 더 다치기라도 했다가는 고이준 역시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두 명의 경호원은 그가 직접 골라 붙여준 사람이니까.“납치범들이 차 안에서 손을 댈 줄은 몰랐다? 만약 저것들이 구할 때까지 기다렸다면 상황이 어떻게 됐을 것 같아?”강지혁은 자리에서 일어서 두 명의 경호원 앞으로 다가가더니 바로 발로 복부를 차버렸다.“고이준, 이딴 것들을 유진이 옆에 둘 생각을 했어?”강지혁이 싸늘한 얼굴로 비웃었다.고이준과 두 명의 경
“다쳤으면 다쳤다고 왜 얘기를 안 해!”한지영은 임유진 보러 월세방에 왔다가 그녀의 뺨이 붉게 부어오른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심각해 보여서 그렇지 이제 안 아파.”임유진은 두 날 전에는 더 심했다는 얘기를 차마 하지 못했다.“대체 어떻게 된 거야. 누구한테 맞은 거야?”임유진은 납치됐던 당시 일을 간단하게 얘기해주었다. 애써 덤덤한 척 얘기했지만 한지영의 얼굴은 점점 심각하게 변해버렸다.그러다 구출 당시 얘기에 갑자기 그녀의 말을 끊었다.“잠깐만, 그러니까 톨게이트 앞에서 경찰들이 진을 치고 있었던 게 너를 구하기 위해서라는 거야? 그러면 설마... 그게 너를 납치했던 차량이었던 건가...”“?”임유진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무슨 뜻이야?”한지영은 휴대폰을 꺼내 들어 뭔가를 검색하고는 임유진에게 보여주었다.화면 속에는 이름 모를 네티즌이 올린 사진 한 장이 있었다.멀리서 찍은 사진이기는 했지만 톨게이트 앞에 경찰차들이 나란히 줄지어 서 있고 무장한 경찰들이 총을 들어 어느 한 차량을 겨누고 있는 모습이 제대로 찍혔다.꽤 삼엄한 상황에 댓글 중에는 액션 영화 촬영 중인 건 아닌가 하는 추측들도 난무했다.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국제적인 범죄자들을 소탕하는 현장일 게 분명하다며 흥미진진해 했다.결과적으로 실제 상황이 어땠는지 제대로 맞추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한지영도 이 사진을 봤을 당시는 그저 신기해하기만 했었다. 하지만 그 사진 속 상황이 벌어진 것이 친구 때문이었다니...“그럼 강지혁이 널 구해준 거야?”“응.”“그러는 걸 보면... 아직 좋아하는 것 같기는 한데.”한지영이 중얼거렸다.“헤어질 때 뭐 이상했다거나 무슨 일 있었다거나 하지는 않았고?”“그냥 힘들다고 했어. 그리고 애초에 나한테 접근한 것도 재미 때문이고. 누나 동생 놀이에서 연인 놀이 잠깐 했다가 지금은 다시 누나 동생 놀이로 돌아간 것뿐이야.”임유진이 쓰게 웃으며 답했다.“그게 무슨 뜻이야?”“그간 일이 조금 있어서 강지혁이랑은 그때
한지영이 남자 연예인에 관해 얘기하면 한껏 비아냥거리며 핀잔을 줘 결국에는 그의 화를 다 풀어주고 달래주고서야 평화가 찾아왔다.또한, 달래주지 않거나 하면 백연신은 클럽 간 일을 부모님에게 얘기하겠다며 협박을 해왔다.그러니 한지영은 요즘은 그의 기분을 최대한 맞춰주며 눈치를 보고 있다.하지만 질투를 제외하면 백연신과 함께 있는 건 너무나도 편했다. 그는 그녀가 TV를 보고 있으면 알아서 과자를 건네주었고, 허리가 아프다고 호소하면 마사지해 주었으며 연예인 사인이 필요하다고 하면 그다음 날 바로 구해다 주었다. 물론 여자 연예인 한정으로 말이다.임유진은 이것저것 불평하지만 그럼에도 행복한 것 같은 친구의 얼굴을 보며 두 사람이 잘돼가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다만 백연신의 집안을 생각하면 여전히 걱정되었다.백씨 일가는 지금 꽤 복잡한 상황이다. 백연신이 사생아 신분으로 현 백씨 가문 가주가 되기까지 분명히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그 집안 정실부인과 그 뱃속에서 나온 아들 두 명이 있는 한 언제고 다시 백연신을 끌어내리려고 들 테니 말이다. 그들이 이대로 순순히 백선 그룹을 백연신에게 넘겨줄 리가 없다.후계자 싸움은 언제나 진흙탕 싸움이고 백연신이 사생아라 그 정도가 더욱더 심할 게 뻔했다.임유진은 한지영이 그런 암투에 휘말리지 않고 그저 행복하게 연애만 했으면 한다. 한지영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니까.한지영은 임유진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얘기하다가 날이 어두워지고 나서야 월세방에서 나왔다.9월의 저녁은 낮과는 달리 조금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그녀는 강지혁과 임유진이 또다시 얽혔다는 생각에 생각이 많아졌다. 하지만 자신이 아무리 고민해 봐도 친구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이다.한지영은 차에 시동을 걸고 자신의 집이 아닌 백연신의 별장으로 향했다.백연신은 지금 대부분 시간을 S 시에서 보내고 있다.별장 앞에 도착하니 도우미가 서둘러 문을 열어주었다. 백연신은 갑자기 나타난 한지영을 보며 조금 놀란 듯 물었다.“늦은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