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빨갛게 부어오른 뺨을 보고 있자니 심장이 무언가에 짓눌린 듯 답답하고 아파 왔다.아까 임유진을 구출할 당시 두 손이 꽉 묶여 볼품없는 모습으로 시트 위에 눕혀져 있는 것 봤을 때는 살인 충동마저 느꼈다.아끼고 또 아끼던 여자를 다른 사람이 상처 내고 아프게 했으니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른다.임유진은 입술을 깨물며 결국 한마디 신음도 내지 않았다. 고통을 참는 건 이미 습관이 되었으니까. 그리고 아프다고 외쳐봤자 소용없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강지혁은 얼굴을 다 닦아주고 약을 발라주었다.임유진은 얼굴뿐만이 아니라 몸에도 얻어맞은 상처가 있었다.“내가 알아서 바를게.”“등 뒤는 손이 안 닿을 거야.”“하지만...”“부끄러워서 그러는 거면 눈을 감고 발라줄게. 아까 보고서를 잠깐 봐서 대충 어느 위치인지 알고 있으니까.”강지혁은 말을 마치고 임유진이 뭐라고 할 틈도 없이 바로 그녀의 등 뒤로 갔다. 그러고는 눈을 감은 채 손을 뻗어 그녀의 옷을 위로 올렸다.“앗!”임유진이 깜짝 놀라 몸을 움찔 떨었다.“움직이지 마. 움직이면 정확한 위치를 알 수가 없어.”강지혁의 손은 그녀의 등에서 천천히 움직였다.그러다 아픈 곳을 정확히 찾아냈을 때 임유진의 몸이 다시 한번 흠칫 떨렸다. 그리고 이내 시원한 약이 펴 발라지고 등 뒤에서 알싸한 느낌이 들었다.하지만 분명히 시원해야 할 등이 지금은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정확히는 강지혁의 손이 스치는 곳마다 혈액이 다 몰린 것처럼 뜨거웠다.약을 다 바른 뒤 임유진의 등 뒤는 블러셔를 바른 것처럼 핑크색이 되었다.그녀는 서둘러 옷을 내렸다.“됐... 됐어.”강지혁은 그제야 굳게 닫힌 눈을 천천히 떴다. 기다란 속눈썹이 위로 올라가는 순간 매혹적인 눈동자가 드러났다.“며칠 정도는 일 나가지 마. 집에서 쉬어.”강지혁은 옆 탁자에 약을 올려놓으며 말했다.“안 돼. 걷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요즘 일 많아서 쉬는 건 힘들어.”게다가 아직 변호사 비서이고
집에서 쉬게 하려고 로펌 전체를 쉬게 만든 것은 아닐까?고작 한 사람을 쉬게 만들겠다고?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로펌이 아무 이유도 없이 3일이나 쉴 리가 없다.임유진은 씻고 침대 위에 누웠다. 상처 부분에 약을 다 발랐던 터라 이제는 아프지 않았다. 다만 눈을 감으면 오늘 있었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아까 강지혁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 임유진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안심했다. 그리고 그녀는 이 세상에 한지영을 빼고 이토록 자신을 아껴줄 수 있는 사람이 또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그 사람은 이토록 그녀를 아껴주면서도 사랑은 싫다고 한다.연인 놀이는 강지혁이 헤어짐을 얘기하는 순간 끝이 났다. 그러면 누나 동생 놀이는 또 언제 끝이 날까?마음속으로 아무리 되뇌어 봐도 그녀에게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강지혁은 지금 큰 방 한가운데서 싸늘한 눈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땀만 삐질삐질 흘리고 있는 경호원 두 명을 보고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체념한 표정의 고이준도 있었다.“경호를 이딴 식으로 해?”차가운 목소리에 고이준의 몸이 움찔 떨렸다.강지혁은 지금 화가 난 상태다. 그것도 아주 단단히.경호원들의 얼굴은 이미 사색이 되었다.그때 고이준이 용기를 내어 먼저 입을 열었다.“대표님, 얘네들도 임유진 씨가 납치된 후 그들이 아지트에 다다랐을 때 구출하려고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납치범들이...”고이준은 강지혁의 시선이 자기한테 떨어지자 등 뒤에 식은땀이 흘렀다.만약 임유진이 오늘 더 다치기라도 했다가는 고이준 역시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두 명의 경호원은 그가 직접 골라 붙여준 사람이니까.“납치범들이 차 안에서 손을 댈 줄은 몰랐다? 만약 저것들이 구할 때까지 기다렸다면 상황이 어떻게 됐을 것 같아?”강지혁은 자리에서 일어서 두 명의 경호원 앞으로 다가가더니 바로 발로 복부를 차버렸다.“고이준, 이딴 것들을 유진이 옆에 둘 생각을 했어?”강지혁이 싸늘한 얼굴로 비웃었다.고이준과 두 명의 경
“다쳤으면 다쳤다고 왜 얘기를 안 해!”한지영은 임유진 보러 월세방에 왔다가 그녀의 뺨이 붉게 부어오른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심각해 보여서 그렇지 이제 안 아파.”임유진은 두 날 전에는 더 심했다는 얘기를 차마 하지 못했다.“대체 어떻게 된 거야. 누구한테 맞은 거야?”임유진은 납치됐던 당시 일을 간단하게 얘기해주었다. 애써 덤덤한 척 얘기했지만 한지영의 얼굴은 점점 심각하게 변해버렸다.그러다 구출 당시 얘기에 갑자기 그녀의 말을 끊었다.“잠깐만, 그러니까 톨게이트 앞에서 경찰들이 진을 치고 있었던 게 너를 구하기 위해서라는 거야? 그러면 설마... 그게 너를 납치했던 차량이었던 건가...”“?”임유진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무슨 뜻이야?”한지영은 휴대폰을 꺼내 들어 뭔가를 검색하고는 임유진에게 보여주었다.화면 속에는 이름 모를 네티즌이 올린 사진 한 장이 있었다.멀리서 찍은 사진이기는 했지만 톨게이트 앞에 경찰차들이 나란히 줄지어 서 있고 무장한 경찰들이 총을 들어 어느 한 차량을 겨누고 있는 모습이 제대로 찍혔다.꽤 삼엄한 상황에 댓글 중에는 액션 영화 촬영 중인 건 아닌가 하는 추측들도 난무했다.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국제적인 범죄자들을 소탕하는 현장일 게 분명하다며 흥미진진해 했다.결과적으로 실제 상황이 어땠는지 제대로 맞추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한지영도 이 사진을 봤을 당시는 그저 신기해하기만 했었다. 하지만 그 사진 속 상황이 벌어진 것이 친구 때문이었다니...“그럼 강지혁이 널 구해준 거야?”“응.”“그러는 걸 보면... 아직 좋아하는 것 같기는 한데.”한지영이 중얼거렸다.“헤어질 때 뭐 이상했다거나 무슨 일 있었다거나 하지는 않았고?”“그냥 힘들다고 했어. 그리고 애초에 나한테 접근한 것도 재미 때문이고. 누나 동생 놀이에서 연인 놀이 잠깐 했다가 지금은 다시 누나 동생 놀이로 돌아간 것뿐이야.”임유진이 쓰게 웃으며 답했다.“그게 무슨 뜻이야?”“그간 일이 조금 있어서 강지혁이랑은 그때
한지영이 남자 연예인에 관해 얘기하면 한껏 비아냥거리며 핀잔을 줘 결국에는 그의 화를 다 풀어주고 달래주고서야 평화가 찾아왔다.또한, 달래주지 않거나 하면 백연신은 클럽 간 일을 부모님에게 얘기하겠다며 협박을 해왔다.그러니 한지영은 요즘은 그의 기분을 최대한 맞춰주며 눈치를 보고 있다.하지만 질투를 제외하면 백연신과 함께 있는 건 너무나도 편했다. 그는 그녀가 TV를 보고 있으면 알아서 과자를 건네주었고, 허리가 아프다고 호소하면 마사지해 주었으며 연예인 사인이 필요하다고 하면 그다음 날 바로 구해다 주었다. 물론 여자 연예인 한정으로 말이다.임유진은 이것저것 불평하지만 그럼에도 행복한 것 같은 친구의 얼굴을 보며 두 사람이 잘돼가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다만 백연신의 집안을 생각하면 여전히 걱정되었다.백씨 일가는 지금 꽤 복잡한 상황이다. 백연신이 사생아 신분으로 현 백씨 가문 가주가 되기까지 분명히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그 집안 정실부인과 그 뱃속에서 나온 아들 두 명이 있는 한 언제고 다시 백연신을 끌어내리려고 들 테니 말이다. 그들이 이대로 순순히 백선 그룹을 백연신에게 넘겨줄 리가 없다.후계자 싸움은 언제나 진흙탕 싸움이고 백연신이 사생아라 그 정도가 더욱더 심할 게 뻔했다.임유진은 한지영이 그런 암투에 휘말리지 않고 그저 행복하게 연애만 했으면 한다. 한지영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니까.한지영은 임유진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얘기하다가 날이 어두워지고 나서야 월세방에서 나왔다.9월의 저녁은 낮과는 달리 조금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그녀는 강지혁과 임유진이 또다시 얽혔다는 생각에 생각이 많아졌다. 하지만 자신이 아무리 고민해 봐도 친구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이다.한지영은 차에 시동을 걸고 자신의 집이 아닌 백연신의 별장으로 향했다.백연신은 지금 대부분 시간을 S 시에서 보내고 있다.별장 앞에 도착하니 도우미가 서둘러 문을 열어주었다. 백연신은 갑자기 나타난 한지영을 보며 조금 놀란 듯 물었다.“늦은 시
“보고 싶은데 시간이 무슨 상관이에요?”한지영는 달달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연신 씨도 나 좋아하고 나도 연신 씨 좋아해서 참 다행인 것 같아요.”임유진의 상황과 비교해보면 정말 다행이라고밖에 말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래서 더 임유진이 안쓰러웠다.“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백연신의 목소리가 아까와는 달리 다정해졌다.그녀가 무슨 일 때문에 갑자기 이런 소리를 하는 건지는 몰라도 꽤 듣기 좋은 소리였다.“오늘 유진이 만나고 왔어요. 유진이가 그러는데 강지혁이랑 지금 다시 누나 동생 사이가 됐대요. 이대로라면 유진이는 강지혁을 절대 잊지 못할 거예요.”한지영은 말을 할수록 감정이 점점 더 격해졌다.“대체 강지혁이 무슨 생각으로 그딴 제안을 한 건지 모르겠어요. 유진이한테 마음이 있는 건 확실한 것 같은데, 이럴 거면 애초에 왜 헤어지냐고요! 웬만한 여자 마음보다 더 복잡한 게 강지혁의 마음일 거예요.”“강지혁은 아직 유진 씨를 사랑하고 있어.”백연신이 말했다.“아직 사랑하고 있다고요?”“그래.”강지혁의 그 눈빛은 절대 옛 연인을 바라보는 눈빛이 아니었다. 같은 남자로서 임유진을 향한 강지혁의 사랑이 아직 지속 중이라는 걸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리고 오히려 지금은... 그 정도가 더 심각해 진 것도 같다.“그럼 대체 왜 헤어진 건데요? 그리고 아직 사랑하면서 유진이를 사랑하는 게 힘들다는 소리는 왜 했대요?”“그건 본인에게 물어봐야지.”백연신은 한지영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말했다.“이제 그만 생각해. 네 일도 아니잖아. 괜히 끼어들 생각은 하지도 말고.”“어떻게 그래요! 유진이 일인데.”한지영이 미간을 찌푸렸다.그녀에게 있어 임유진은 이제 그냥 친구가 아니라 친자매나 마찬가지였다.“알았어, 알았어.”백연신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지영에게 임유진이 얼마나 중요한 친구인지 그 역시 알고 있다. 심지어 그것 때문에 종종 질투가 나기도 했으니까.그는 가끔 임유진과 자신이 동시에 물에 빠지면 한지영은 아무 망
한지영은 이 기회에 두 사람이 전에 어떤 밤을 보냈는지 떠올리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그때 백연신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왜 웃어요?”한지영이 고개를 갸웃했다.“내가 너무 적극적이어서 그래요?”‘너무 밝히는 것 같으려나?’하지만 한지영이 이토록 안달 나 하는 남자는 오직 백연신 뿐이다.“아니, 역시 내가 사랑하는 여자구나 싶어서.”백연신은 손가락을 치우더니 그녀의 입술을 탐하기 시작했다.한지영이라는 여자는 가식이 없고 또 순수하다. 그런 그녀와 마주할 때면 백연신은 자신을 감싸던 벽을 쉽게 허물게 되고 꽁꽁 감춰왔던 모습들도 거리낌 없이 보여주게 된다.그녀를 만나고 사랑하게 된 건 아마 그의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일 것이다. 어느샌가 한지영은 백연신의 구세주가 되어 있었다.백연신은 평생에 걸쳐 한지영이라는 여자를 사랑하고 아껴줄 생각이다....임유진이 다시 출근하게 됐을 때 빨갛게 부어올랐던 뺨은 어느새 많이 가라앉았다. 게다가 얼굴 위에 가볍게 파운데이션으로 바르고 나니 평소 얼굴과 별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퇴근 시간이 되자 강씨 저택 기사가 또다시 마이바흐를 끌고 그녀를 데리고 왔다.“유진 씨, 모시러 왔습니다.”임유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순순히 차에 올라탔다. 처음에는 차에 올라타는 걸 거절하려고도 해봤지만 어차피 강지혁이 원하는 건 이뤄지지 않은 적이 없기에 그저 순응하기로 했다.그리고 그 말은 강지혁이 원하지 않는 순간 이 모든 것이 한순간에 끝날 수도 있다는 것이기도 했다.임유진이 차에 오르는 순간 구석에 숨어있던 정한나가 또다시 사진을 찍었다.그는 최대한 많은 증거를 남겨 놓을 생각이다. 그래야만 임유진을 확실하게 보낼 수 있을 테니까.그보다 아쉬운 점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유승호가 직접 데리러 온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이다.임유진은 차에 올라서도 교통사고 사건만 생각했다. 오늘 이재하의 부모가 전화를 걸어왔었다. 울면서 집에 돈이 없다고, 이대로 배상금을 받지 못하면 아들의 치료도 제대로 이어갈 수가
이제 며칠 뒤면 재판이 열리게 된다.임유진이 한숨을 깊게 내쉬며 머리 아파하고 하고 있을 때 차량은 어느새 어딘가에 도착해 있었다.고개를 돌려보니 이곳은 전에 강지혁이 한번 데리고 왔던 샵이었다.임유진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기사에게 물었다.“왜 여기로 온 거예요?”“대표님께서 이곳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그 말에 임유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차에서 내렸다.안으로 들어가니 샵 원장이 친절하게 마중을 나왔다.“임유진 씨 맞으시죠? 강지혁 대표님이 계시는 룸으로 안내하겠습니다.”임유진은 원장을 따라 2층의 한 VIP룸에 도착했다. 문을 열어 보니 소파 한가운데 강지혁이 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연보라색 드레스가 세팅되어 있었다.보라색과 흰색 수정이 박혀 있는 해당 드레스는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너무 고급지고 예뻤다.“이따 저녁에 파티가 있어. 나랑 같이 가야 하니까 이거로 입어 봐.”“파티?”임유진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거창한 파티는 아니니까 너무 긴장하지 말고.”전에 그를 따라 파티에 참석한 적이 있지만 그다지 좋은 기억은 없었다.‘오늘은 과연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갈 수 있을까...?’임유진은 피팅룸으로 들어가 드레스로 갈아입었다.강지혁이 고른 드레스는 그녀의 몸에 있는 상처를 전부 다 가려주었다. 단 손만 빼고 말이다.멀리에서 보면 괜찮을지 몰라도 가까이에서 보면 삐뚤빼뚤한 것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다.그녀가 신경 쓸 만한 부분은 다 가려주고 싶었지만 손이라서 어쩔 수가 없었다.임유진이 피팅룸에서 나오자 강지혁의 눈에 놀라움이 스쳤다.사실 그는 처음 이 드레스를 봤을 때부터 임유진에게 잘 어울리는 옷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디자이너의 하나밖에 없는 이 드레스를 거액에 사버렸다.그리고 지금 입고 나온 것을 보니 마치 처음부터 그녀의 옷이었던 것처럼 역시 잘 어울렸다. “예쁘네.”강지혁이 앞으로 다가가 입꼬리를 올리고 웃었다.임유진은 조금 어색한 얼굴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는 옆에 놓인 액세서리 상자
“내 마음에 들고 안 들고가 중요해?”“당연히 중요하지. 이 드레스가 싫으면 다른 거로 입어도 돼.”강지혁의 목소리는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그는 마치 아끼고 또 아끼는 공주를 대하는 듯했다.이에 임유진은 자신들이 정말 헤어진 연인 사이가 맞나 싶은 착각이 들어 머리가 복잡해졌다.“그럼 이런 누나 동생 사이가 싫다고 하면 이것도 그만해 줄 거야?”임유진은 자기도 모르게 이 말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그러자 강지혁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이내 웃는 얼굴로 답했다.“안 돼. 혹시 하는 기대도 품지 마.”강지혁은 그녀가 영원히 그의 곁에 있기를 바란다.임유진이 원하는 거라면 무슨 수를 써서든 줄 것이다. 그녀를 사랑하는 것과 그녀를 곁에서 떠나보내는 것만 제외하고 말이다....강지혁은 거창한 파티가 아니라고 했지만 임유진의 눈에는 꽤 큰 규모의 파티로 보였다.S 시의 재벌 2, 3세들 뿐만 아니라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영향력 있는 인물들도 파티에 얼굴을 비추었다.임유진이 강지혁과 팔짱을 끼고 파티장에 들어섰을 때 파티장의 모든 이목이 그곳으로 쏠렸다.임유진은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전부 다 느껴졌다.일전 열렸던 파티에서 임유진의 얼굴을 이미 봤던 사람들은 그다지 놀란 얼굴이 아니었지만 임유진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그녀를 보며 자기들끼리 속닥거렸다.“배고프지. 일단 뭐 좀 먹을래?”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은 잠깐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퇴근하고 바로 샵으로 가 드레스 입고 메이크업까지 받느라고 저녁때를 놓쳤기에 지금 상당히 배가 고팠다.“여기서 기다려. 먹을 것 좀 가져올게.”만약 사람들이 강지혁의 이 말을 들었더라면 또 한 번 놀랄 것이다. 여자를 위해 음식을 가져다주는 강지혁의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을 테니까.강지혁의 약혼자였던 진애령조차 이런 대접은 받아본 적이 없다.강지혁이 떠난 후 임유진은 제자리에 서서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파티장에는 재벌 2, 3세들 뿐만이 아니라 화려하게 갖춰 입은 연예인들도
게다가 이제는 강문철도 없으니 임유진이 강씨 가문이 안주인이라는 건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또한 임유진은 임신까지 했으니 아이들이 무사히 태어나면 그때는 그 누구도 그 자리를 감히 탐낼 수 없게 된다.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에 강지혁을 대하는 것처럼 그녀를 대했다.임유진은 강지혁의 아내로서 줄곧 강지혁의 곁에 있었다.강씨 가문은 S 시에서 가장 뿌리가 깊고 또 유명한 가문이라 장례식장도 컸고 조문객들도 훨씬 많았다.강지혁은 임유진이 무리라도 할까 봐 몇 번이나 그녀에게 이만 쉬라고 했지만 임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계속해서 그의 곁을 지켰다.“나 아직 괜찮아. 진짜 힘들면 너한테 얘기할게. 나도 내 몸 귀한 줄 알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임유진도 자신이 아이셋을 가진 임산부라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그때 조문객들이 입구를 바라보며 강현수의 이름을 불렀다.이에 임유진은 살짝 움찔하더니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려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그러자 익숙한 남자의 실루엣이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강현수와 마지막으로 본 것도 이제는 몇 달 전이었다.한때는 생사를 함께 했던 친구였는데 결국에는 썩 유쾌하지 않은 방식으로 헤어지게 되었다.강현수는 오늘 부모님과 함께 장례식에 참석했다.임유진이 그를 바라봤을 때 그의 시선 역시 임유진에게 닿아있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을 보자마자 옆으로 늘어트린 손을 살짝 움켜쥐었다.그토록 오래 찾아 헤맸던 사람을, 오랜 기간 마치 습관처럼 떠올렸던 사람을 그는 번번이 놓쳐버렸다.임유진과 다른 방식으로 다시 시작할 수도 있었는데 그는 그 가능성마저도 자기 손으로 부숴버렸다.그 결과 그녀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고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으며 지금 그 남자의 곁에 서 있게 되었다.강현수는 이제 영원히 그녀 곁에는 있을 수 없게 되었다.강현수네 가족이 강지혁과 임유진의 앞으로 다가왔을 때 강현수는 위로의 말을 건네는 부모님과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어쩌면 강지혁은 줄곧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돌아온 그에게 유일한 버팀목이라고는 강문철밖에 없었으니까.“나는 솔직히 네 할아버지가 고마워. 혁이 너를 이렇게 멋있게 키워줬잖아. 그리고 나랑 만나게 해줬고.”임유진은 계속해서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갔다.“혁아, 네가 원하는 가족 간의 사랑은 앞으로 내가 줄게. 그리고 우리 아이들도 줄 거야.”그 말에 강지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임유진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가장 원하는지 이미 다 알고 있었다.“아까 네가 그랬지? 사람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게 다 다르다고. 그럼 너는? 네가 중요하게 여기는 건 뭔데?”강지혁이 임유진의 체향을 들이마시며 물었다.그녀의 냄새를 맡고 있으면 늘 이렇게 마음이 진정되고 몸이 편안해졌다.“나?”임유진은 그 말에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혁이 너랑 우리 아이들이야.”“유진아, 나는 욕심이 많아. 나는 너를 그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아. 그게 우리 아이들이라고 해도 나는 싫어. 나는 내가 네 마음속 1순위였으면 좋겠고 너한테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이 눈을 깜빡였다.설마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들을 질투하는 건가?“혁아, 너는 내 마음속 1순위야. 물론 아이들도 너무 중요하고 소중하지만 너랑은 결이 조금 달라. 혁이 너는 나한테 유일무이한 존재잖아.”임유진은 두 손을 둘러 가볍게 강지혁을 끌어안았다.이미 배가 불러올 대로 불러와 완전히 꼭 끌어안지는 못했지만 싸늘한 방 공기를 녹이기에는 충분했다.“내가 너한테 유일무이한 존재라고?”“응. 널 대신할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어. 물론 아이들을 낳고 진정한 엄마가 되면 어쩔 수 없이 아이들에게 더 신경을 쓰고 더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야. 이건 장담해. 그리고 네가 원하면 네가 원하는 방식대로 더 많이 널 사랑해줄게. 혁아,
별채로 가는 길에는 늘 조명이 켜져 있기에 어두운 저녁이라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임유진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강지혁이 방 한가운데 멀뚱히 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지혁은 불빛을 받으며 시선을 내린 채 바로 앞에 있는 냉동관을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혁아.”임유진은 그를 부르며 천천히 옆으로 다가갔다.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강지혁은 상념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돌렸다.“오지 말라니까. 여기는 나 혼자 있으면 돼.”“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왔어.”임유진은 강지혁의 바로 앞에 서서 그의 볼을 매만졌다.지금은 1월이라 날씨가 무척이나 추웠다. 게다가 지금은 밤이고 별채 쪽에는 보일러도 없었기에 바깥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추웠다.“오늘 밤도 여기 있을 거야?”임유진이 물었다.“응. 그래도 날 키워주셨으니 할 도리는 다해야지.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사람들 많이 올 거야. 너는 몸이 불편하니까 가지 말고 그냥 집에 있어.”“출산할 시기가 임박한 것도 아닌데 뭐.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나도 참석할 거야. 만약 몸이 불편하거나 하면 바로 너한테 얘기할게.”강지혁은 그 말에 임유진의 손을 살짝 잡았다.“너한테는 좋은 기억 하나 없는 사람이잖아. 그런데 왜...”“네 할아버지잖아. 네 유일한 가족이잖아. 그러니까 아무리 나를 마음에 들지 않아 했어도, 아무리 끝까지 나를 손주며느리로 받아들이지 않았어도 나는 할아버지 가시는 길을 너와 같이 보내드려야 할 의무가 있어.”다른 건 없었다.그저 강지혁의 어린 시절을 곁에서 지켜줬다는 사실만으로도 임유진은 충분히 감사했다.강지혁은 그 말에 그녀의 손을 조금 세게 쥐었다.“할아버지가 마지막에 한 말은 신경 쓰지 마. 그 말은 그냥...”“알아. 네 할아버지는 그저 누군가를 깊게 사랑하는 것으로 행복한 결과를 낳을 거라는 걸 믿지 못하시는 분이었던 거지. 네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 일도 있고 네 아버지 일도 있어서 많이 무서우셨을 거야. 너도 나중에 불행하게 될까 봐.”임유진이 말했
강지혁은 마치 강문철에게 자신이 임유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려는지 조금 격앙된 목소리로 얘기했다.강문철은 그 말에 눈동자를 돌려 자신의 유일한 손주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몇 초 후 이제는 모든 게 다 피곤한 듯 천천히 눈을 감으며 입을 열었다.“우리 집안에서... 여자한테 미친 인간 치고... 멀쩡한 사람을 못 봤다. 네가... 계속해서 이러면 너도 언젠가는...”강문철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는가 싶더니 이내 옆에 있던 종합모니터에서 삐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임유진은 그 소리에 강문철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바로 알았다.누군가의 생명이 바로 눈앞에서 멎었다.조금은 무서웠던 노인이, 강지혁의 유일한 가족이었던 노인이 이렇게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모든 게 다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강지혁은 삐 소리가 들린 뒤로 임유진의 손을 꽉 잡았다. 그렇게 계속 힘을 주다가 임유진의 입에서 아프다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며 손을 놓아주었다.“미안. 아팠지?”강지혁은 어느새 빨개진 그녀의 손을 다시 잡으며 초조한 눈길로 물었다.“괜찮아. 그것보다 할아버지...”“응. 가셨어.”강지혁의 얼굴은 가족을 잃은 사람 같지 않게 무척이나 평온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게 아니라는 걸 임유진은 알고 있다.아무리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어도 강문철은 강지혁의 할아버지고 유일한 가족이었다. 강선우가 죽은 뒤로 그의 곁을 지켜줬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강지혁은 몸을 돌려 편히 잠든 강문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리고 임유진은 그런 강지혁의 옆에 서서 그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강문철의 장례식은 3일 뒤로 정했다.그 3일 동안 시신은 냉동관에 넣은 채 강씨 저택의 별채에 두기로 했다.그리고 그 3일 동안 강지혁은 그 어떤 외부인도 별채에 들이지 않았다.별채는 강씨 가문 사람 외에는 허락하지 않는 특별한 곳이었으니까.강선우가 죽었을 때도 그의 시신은 잠시 이 별채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의
강지혁은 임유진의 고집에 결국 알겠다며 그녀와 함께 집에서 나와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한 후 강지혁은 뒤따라온 경호원에게 임유진의 곁을 맡기고 혼자 병실로 들어갔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빼빼 마른 강문철이 흰색 병상 위에 가만히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남자도 병마와 세월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강문철은 강지혁이 안으로 들어온 것을 보더니 마지막 힘을 쥐어짜 입을 움직였다.“왔... 니...”“네, 저 왔어요.”강지혁이 곁으로 다가오며 대답했다.사실 강지혁은 강문철에게 대단한 가족 간의 정은 느끼지 못했다.실제로 강문철은 강지혁이 할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느낄만한 행동을 보여주지 않았으니까.강문철은 언제나 강지혁을 자신의 뒤를 이어 강씨 가문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하나의 장기 말로 여겨왔다. 물론 그 장기 말도 쓸모가 없었다면 진작 버렸을 것이다.“이제는... 강씨 가문의 모든 게 네 손에... 달렸다. 만약... 네가 가문을 망하게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강문철이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할 말은 그게 끝이에요?”강지혁이 강문철을 빤히 바라보았다.이에 강문철은 탁한 눈동자를 옆으로 굴려 병실 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임유진... 그 아가씨... 밖에 있지? 들어오라고 해...”그 말에 강지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유진이 건드릴 생각하지 마세요.”“이 꼴로... 내가 뭘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어차피... 그 아가씨 옆에는... 네 사람 천지일 텐데.”강지혁은 그가 두 손으로 직접 키운 손주이자 가문의 후계자이기에 강지혁의 생각 같은 건 이미 훤히 꿰고 있었다.강지혁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자 강문철이 다시 입을 열었다.“그저... 마지막으로 해줄 얘기가... 있어서 그러는 것뿐이다...”호흡이 점점 가빠지고 안색도 창백해진 것이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강지혁은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발걸음을 옮겨 병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곧바로 임유진의 손을
“그래? 그럼 만약... 내가 너한테 상처를 줘도 너도 똑같이 나 안 볼 거야? 내가 아무리 용서해달라고 빌어도 나 용서 안 해줄 거야?”강지혁은 목구멍을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한마디 한마디 힘겹게 내뱉었다.이에 임유진은 몸을 돌려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강지혁을 바라보았다.“혁아, 너 대체 왜 그래? 요즘 따라 너무 불안해 보여. 무슨 일 있는 거야?”강지혁은 자신의 불안해 보인다는 말에 고개를 푹 숙였다.확실히 그는 요 며칠 줄곧 불안해하고 있었다.탁유미와 이경빈의 일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자신과 임유진의 결말도 그들과 똑같을까 봐 불안해하고 있었다.“혹시 방금 내가 한 말이 널 불안하게 만들었어? 혁아, 내가 언니를 이해한다고 했던 건 소민준과의 일이 생각나서 그랬던 거야. 네가 괜한 생각을 할 게 아니라고. 네가 나한테 상처 줄 리가 없잖아. 그리고...”임유진은 손을 들어 조금 우울해 보이는 강지혁의 눈가를 부드럽게 매만졌다.“전에 내가 말했잖아. 네가 정말 나한테 미안해야 할 일을 했다고 해도 울면 봐주겠다고.”그녀는 강지혁의 눈에 담긴 우울함이 사라질 수 있게 일부러 환히 웃으며 얘기했다.그러자 그 말을 들은 강지혁의 눈에 조금씩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유진아, 너를 향한 내 감정은 언제나 그대로일 거야.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든 절대 변하지 않을 거야.”강지혁은 임유진의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심장에 가져갔다.“그러니까 너도 약속해. 날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절대 변하지 않을 거라고. 약속해.”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깜빡였다.탁유미와의 대화에서 사람의 감정은 언젠가는 변한다는 말에 깊이 공감했는데 눈앞에 있는 남자는 자신의 감정은 변하지 않을 거라고 하고 있다.소민준과의 관계에서 질릴 대로 질려 그에게 모든 감정이 사라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를 사랑하고 있고 그와 영원히 하고 싶은 것 또한 사실이다.“응, 영원히 너만 사랑할게. 절대 변하지 않을게. 약속해.”임유진은 진지한 얼굴로 그에
임유진은 한지영이 정신을 차린 모습을 떠올리면 마음이 아프다가도 그녀가 활기를 되찾아줘서 참으로 고마웠다.한지영은 백연신과 그렇게 헤어진 후 자포자기하는 것이 아닌 적극적으로 치료에 임하며 회복에 힘썼다. 심지어 며칠 전에는 미소를 지으며 이런 말까지 했다.“고작 남자랑 헤어진 것뿐인데 뭐. 연애가 다 이런 거 아니겠어? 사랑했다가 또 헤어졌다가. 그래서 결혼까지 가는 게 기적이라는 말도 있잖아. 열렬히 사랑했으니 그거로 난 됐어. 혹시 알아? 퇴원한 뒤에 진정한 내 운명이 나를 찾아올지.”“다행이네요.”탁유미는 한지영의 말을 전해 듣고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유진 씨랑 지영 씨는 나처럼 이러지 말고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어요.”그녀는 자신의 인생에서 더 이상의 사랑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대화를 나누던 임유진과 탁유미는 병실 밖의 누군가가 그들의 대화를 다 듣고 있는 것을 몰랐다....임유진은 탁유미에게 인사한 후 강지혁과 함께 강씨 저택으로 돌아왔다.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2층으로 올라가려는데 강지혁이 뒤에서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왜 그래?”갑작스러운 포옹에 임유진이 물었다.사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강지혁은 오늘따라 말수가 무척이나 적었고 시선은 거의 창밖에 고정하다시피 했다.그 모습에 임유진이 몇 번이나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지 물었지만 강지혁은 그때마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대답을 피했다.“그냥... 갑자기 안고 싶어져서.”강지혁은 낮게 중얼거리며 아까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그는 이경빈을 따라 탁유미의 병실 앞으로 왔다가 비스듬히 열린 문틈 사이로 임유진과 탁유미의 대화 내용을 들었다.탁유미가 자신에게 상처 준 사람은 다시 받아줄 생각이 없다고 했을 때 이경빈은 휘청하며 그대로 주저앉았고 입을 틀어막으며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했다.그 순간만큼은 우는 것조차도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맨날 안으면서 아직도 부족해?”임유진이 실소하며 물었다.“응. 부족해.”강지혁에게는 어쩌면 평생 부족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무의식 속에서 그 언젠가 임유진이 모든 진실을 알게 되고 그를 떠나면 그때 누군가가 이렇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줬으면 해서 일지도 모른다....탁유미는 이틀 정도 중환자실에 있다가 모든 수치가 안정된 후 바로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다만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앞으로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아야만 했다.탁유미는 간호사가 들어와 약을 갈아줄 때마다 보이는 수술 자국을 보면서 조금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그녀가 아무리 원치 않았다고 해도 지금 그녀의 몸 안에 있는 간은 이경빈의 간이었다.어쩌면 하늘이 조금은 그녀를 가엽게 여겨준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런 방식으로 살게 된 건지도 모른다.윤이와 김수영은 요 며칠 거의 탁유미 곁에서 떨어지지 않다시피 했고 임유진도 자주 탁유미를 보러 병원에 왔다.“유진 씨, 미안해요. 괜히 나 때문에 힘들게 왔다 갔다 하고...”탁유미는 미안한 얼굴로 임유진의 큰 배를 바라보았다.지금쯤 집에서 태교나 들으며 휴식을 취해도 모자란 데 괜히 자신 때문에 임유진이 고생하고 있는 것 같았다.“언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언니가 나였으면 안 이랬을까요? 그러니까 너무 그러지 않아도 돼요.”임유진은 말을 하며 의자에 앉았다.“나 윤이 데리고 나갈 테니까 둘이서 얘기하고 있어.”김수영이 꾸벅꾸벅 졸고 있는 윤이를 안아 들며 보호자가 쉴 수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임유진은 두 사람이 들어간 것을 확인한 후 탁유미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혁이가 그러는데 이경빈 씨도 며칠 전부터는 걸어 다닐 수 있게 됐대요. 그런데... 언니 병실까지 왔다가 매번 들어오지는 못하고 다시 돌아가나 봐요.”그 말에 탁유미는 담담하게 대꾸했다.“이경빈과의 인연은 여기서 끝이에요. 어차피 이경빈도 몸이 다 나아지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거고 나는 계속 여기서 살게 되겠죠. 물론 나랑은 끝이라도 윤이랑은 부자간의 정이 있으니까 둘이서는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네요.”“이경빈 씨와는 정말 일말의 가능성도 없는 거예요?”임유진의
다시 눈을 뜬 이경빈이 보게 된 건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강지혁이었다.마취가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아서 그런지 통증 같은 건 없었다.“유미는... 어떻게 됐습니까?”이경빈이 힘겹게 입을 열며 물었다.“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탁유미 시는 지금 중환자실에 있어요. 이틀 정도 경과를 지켜봐야 한대요.”그의 말에 대답해준 건 강지혁이었다.이경빈은 그 말에 안도의 한숨을 쉬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수술이 무사히 끝났으니 된 거다.앞으로 두 번 다시 탁유미 곁에 모습을 드러낼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녀의 몸 안에 그의 일부가 살아 숨 쉬고 있으니까, 그녀가 죽을 때까지 줄곧 함께하게 될 거니까 그것으로 됐다.그리고 그녀가 준 골수도 평생 그와 함께 할 테니 그 역시 이것으로 그녀와 평생 함께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이경빈은 탁유미의 상태 외에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마치 자기 몸은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였다.의사가 수술 후 주의사항과 나타날 수 있는 증상들에 관해 설명해주는데도 그는 시큰둥한 얼굴로 침묵만 고수할 뿐이었다.강지혁은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의사와 간호사가 전부 다 나간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탁유미 씨 사건을 뒤엎으려고 한다고 들었는데 그렇게 되면 이강 그룹이 큰 타격을 입게 될 겁니다. 어쩌면 판결 결과에 따라 이경빈 씨는 감방살이하게 될지도 모르고요.”“알고 있어요.”이경빈이 담담하게 말했다.자신의 결정으로 그룹에 어떤 파문이 일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그가 받아야 할 벌이다.복수하겠다는 생각에 매몰돼 공수진의 말만 믿고 거짓 증언한 그의 업보다.탁유미가 형을 살게 된 것에 제일 큰 공헌을 한 건 바로 그의 증언이었다.그러니 그녀를 감옥으로 보낸 건 그나 다름없었다.“정말 앞으로는 탁유미 씨 앞에 나타나지 않을 생각입니까?”강지혁이 물었다.“내가 유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많지 않아요. 그런데 유미가 그걸 원한다고 하니 나로서는 들어줄 수밖에요.”그 소원을